아, 망했어! 마우스를 집어던졌다. 서울에서 제일 빠른 피씨방이라더니 구라였어. 원래도 피켓팅으로 유명한데 연말콘이라 더할 것 같아서 인터넷 엄청 뒤져서 일부러 찾아왔는데도 망했다. 1층은 고사하고 3층 꼭대기라도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만 그랬지 막상 창 열리니까 욕심 생겨서 1층 여기저기 클릭하다 이미 선택된 좌석이라는 창만 백 번 보고나니 매진. 짜증나, 짜증나. 자기가 병신인 거라 남탓 할 수도 없고 머리만 쥐어뜯다 기운이 다 빠져서 의자에 파묻혀 있는데 지잉, 지잉.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밍구. 기력 없이 늘어져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얘 성공했나?
“어, 야. 너 했어?”
- 형 못 했어?
“어, 나 완전 망했어. 완 전.”
- 뭐야. 엄청 쉽던데. 나 폰으로 했는데도 일층 두 장 잡았어.
“두 장 했어? 야, 그러면 나 한 장,”
- 나 여친이랑 갈 건데?
“너 여친 없잖아!”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쳤다. 이게 장난해! 김민규 여친 없는 거 세상이 다 아는데 무슨 개소리람. 장난까지 말고 티켓 내놔. 어차피 김민규는 이 가수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원우가 하도 좋다고 난리를 치니까 덩달아 한 번 해보겠다고 그런 것뿐이었다. 계좌번호 줘. 내가 결제할게. 문자로 보내, 알았지? 농담 아니고 진심으로 얘기하는데 얘는 이게 장난 같은 건지 아니면 그냥 놀리려는 심산인지 싫은데엥. 하고 대꾸한다. 야! 기어이 폭발해서 바락 소리치자 아, 존나 시끄러워. 하고 등 뒤쪽 어딘가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우는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낮췄다.
“닥치고 내놔. 뭐 필요해, 수고비 줘?”
- 아니, 수고비 됐구 여친 줘. 나 이거 여친이랑 갈 거라니까.
“있지도 않은 여친 타령이야, 자꾸. 죽을래?”
- 형. 나 김민규야. 연말까지 두 달 남았는데 안 생길 거 같애? 생겨요. 걱정 말아요.
“야, 너는 이씨, 있지도 않은 여친이 나보다 더 중요해?”
-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암튼 알았어. 형은 망했구나. 끊을게엥.
“…….”
뚜뚜. 통화가 끝나고 깜빡이는 통화시간을 내려다보는데 기가 막혀서 헛웃음만 나온다. 아오, 김민규 이새끼 죽여 버려….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
작년 여름이었나, 김민규가 동아리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여럿이 모여서 술을 마셨는데 새벽에 남은 건 민규랑 원우랑 둘 뿐이었던 적이 있다. 야, 우리 맥주 한 캔만 더 할까? 어차피 차는 끊겼고, 새벽이 되니까 더위도 가셔서 노상도 괜찮을 것 같아 물었더니 그럼 맥주 사서 잔디밭에 가잔다. 잔디밭 굿. 학교 도서관 앞에 엄청 커다란 잔디밭에 단 둘이 앉았다. 처음엔 마주 앉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나란히 앉았다. 별이 하나두 없네. 술에 취해서 꼬불거리던 김민규의 발음.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이 느리게 깜빡깜빡했다.
야, 노래 들을래? 술만 마시기 심심해서 핸드폰을 꺼내들자 몬 노래? 하며 비좁은 화면을 보겠다고 김민규가 바짝 달라붙었다. 저리 가, 더워. 남들보다 체온이 높은지 붙으니까 갑자기 열기가 확 끼친다. 이잉. 털어내려고 하니까 덩치에 안 어울리게 애교 따위를 부렸다. 형이 젤 좋아하는 가수. 일 년 365일 똑같은 플레이리스트를 보여주자 아아. 나 이 사람 알아. 그런다. 대한민국에서 이 사람 모르면 간첩인데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다. 무슨 노래 좋아해? 하나 고르라고 화면을 내밀었더니 좋아하는 노래 없는데. 그런다. 저 노래 잘 안 들어요. 여전히 가까운 채 눈을 깜빡깜빡. 진심으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라 기가 막혔다. 김민규 인생 헛살았네. 들어봐, 임마. 다 좋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좋은 곡을 꾹 누르자 곧 스피커를 타고 노래가 흘러나왔다. 피아노와 함께 차분히 시작해서 점점 고조되다 후반부에 감정이 펑펑 터지는 곡이었다. 박자를 따라 몸이 좌우로 흔들흔들 움직이고, 브릿지에선 목소리를 높여서 따라 불렀다. 아, 진짜 좋아.
좋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달라붙어 있던 애가 나지막이 말했다. 돌아보자 원우의 어깨 위에 턱을 올린 채 눈을 감고 있다. 그치, 좋지. 이 노래도 좋아. 다음 곡을 선택하는데 김민규가 흐아암. 하고 하품을 했다. 형, 집에 가면 안돼요? 저 넘 졸린데. 그리곤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야, 이것만 듣고 가. 붙잡았더니 히잉. 졸린데…. 하면서도 옆에 앉아주긴 했다.
그때 처음 안 주제에. 전원우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십 년 동안 이 가수의 팬이었다. 초등학생 때 사촌누나 때문에 우연히 들었던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처음엔 그냥 그랬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좋아졌다. 한 살 한 살 나이 먹으면서 이해할 수 있는 곡이 점점 늘어나는 게 신기하고 행복하고 그런. 몇 년 전에 처음으로 콘서트도 갔는데, 너무 벅차서 시작부터 엔딩까지 엉엉 울면서 봤다. 그 이후로 웬만한 단독콘서트는 꼭 가려고 했는데.
올해는 못 가게 생겼다. 내가 갈 티켓을 김민규가 갖고 있어서. 있지도 않은 여자친구랑 가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어서. 얘한테 이 티켓을 어떻게 뺏지. 학교 가는 내내 그 생각만 했다. 웃돈을 준다고 해도 싫다고 난리인 게, 아무래도 원우가 안달복달하는 게 재미있어서 그러는 것 같아서 더 괘씸했다.
밍구. 전화를 걸자 여보세요옹. 하고 받는다. 너 어디야? 지하철역을 나와 학교로 걸어가며 묻자 동방인데? 그런다. 기다려 봐.
동아리방 문을 열자 세 칸짜리 소파에 넘치게 누워있는 김민규가 보였다. 안뇽. 손을 흔들더니 쥐고 있는 핸드폰을 도로 들여다본다. 블루투스 스피커에 노래를 크게 틀어 놨다. 그 가수 노래. 형, 이 사람 1995년에 데뷔했대. 형이랑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어. 이미 알고 있는 걸 신기하다는 듯이 말한다.
“민규야.”
“응?”
“티켓 나한테 팔아.”
“싫다니깐. 여친이랑 갈 거야. 이 콘서트 연인들한테 인기 일등이래.”
“그래, 근데 너는 여친이 없잖아.”
“형, 나 김민규라니깐.”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원우를 바라보니까 더 기가 막힌다. 형, 나는 무조건 두 달 안에 세상에서 제일제일 사랑하는 사람 만날 거야. 그 사람이랑 둘이서 손 꼬옥 잡구 같이 갈 거야. 뜬구름도 약간 상공 수백 킬로미터 위에 있는 걸 붙잡아대면서 그런다.
민규야…. 작전을 바꿔야지 싶다. 최대한 불쌍한 얼굴을 하고, 불쌍한 걸음으로 걸어가 불쌍하게 민규의 얼굴 곁에 쪼그려 앉았다. 민규야, 형은. 불쌍하게 손을 잡고 얼굴을 마주 보자 왜 이래, 징그럽게. 그런다.
“형은 그 사람 십 년 팬이야.”
“알아.”
“내 일 년의 낙이 그 사람 콘서트 가는 거야, 민규야.”
“아, 그래?”
“어, 그래.”
“근데?”
…죽일까. 분노가 확 차올라서 숨을 크게 들이쉬어 일단 가라앉혔다. 민규야. 빼내려고 비트는 손을 억지로 끌어다 두 손으로 붙잡았다. 불쌍하게. 아주아주 불쌍하게.
“형 소원이야… 응?”
“…뭐 그렇게까지 그러냐.”
정말 뭐 이렇게까지 하니까 얘도 마음이 좀 그런지 입술이 삐쭉해진다. 형 진짜진짜 소원이야…. 그래서 더 불쌍한 척을 했다. 한계치 다다랐으니까 이제 그만 티켓 주겠다는 말을 좀 하겠니. 그런 마음으로 좀 더 꼬옥 민규의 손을 붙들었다.
“형 소원 들어주면 형도 니 소원 들어줄게. 응?”
“내 소원?”
단순한 것. 눈이 동그래져서 되묻는데 됐다 싶었다. 응, 니 소원. 뭐든 말해. 형이 다 들어줄게. 그니까 너도 내 소원 좀 들어줘. 곰곰이 생각하느라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간다.
“나 소원 없는데.”
“아냐, 있을 거야.”
한참 생각하더니 하는 말에 고개를 확확 가로저었다. 있어. 민규야, 너 소원 있어. 잘 생각해봐. 있어. 약간 주문처럼 되풀이하는 말에 민규가 다시 한 번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형,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소원 하나 뿐이야.”
쎄하게 그런 소리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이 콘서트 가는 거.”
“…아오.”
욕할 뻔 했다. 잡고 있던 손을 내팽개치곤 벌떡 일어나자 민규도 몸을 일으킨다. 헤헤. 혀를 쏙 내밀고선 웃는데 옛말 다 틀렸다. 침 뱉을 수 있을 것 같아. 형, 내가 중고나라 뒤져볼까? 부러 팍팍, 거칠게 짐을 챙기는 원우의 등에 대고 그런다. 됐어. 불퉁하게 대꾸하자 됐음 말고. 하고 대답이 쉽다.
“김민규.”
가방을 들쳐 메고 돌아보자 응? 하고 소파에 앉은 채 원우를 올려다보았다.
“넌 평생 솔로일 거야. 늙어 죽을 때까지.”
“아, 뭐야, 저주하지 마!”
“죽어서도 솔로일 거야. 사랑? 니 인생에 그딴 건 없어. 다음 생에도 없어. 그 다음 생에도,”
“하지 말라고오!”
“간다.”
저주를 퍼붓고 동아리방을 나섰다. 아, 혀엉! 등 뒤에서 부르는 거 못 들은 체 문을 꽝 닫아버렸다.
핸드폰 붙잡고 사는 게 일이 됐다. 중고나라 맨날 들여다보지만 가뭄에 콩 나듯이 나오는 건 다섯 배를 부르고 앉았고, 그마저도 잠깐 놓치면 대체 그 비싼 걸 누가 그렇게들 바로바로 사는지 금세 판매완료라 그러고. 아무리 인생 타이밍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김민규 죽여 버려…. 동아리방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는데 벌컥, 문이 열린다. 호랑이 새끼 오셨네.
“뭐냐.”
누운 채로 흘깃 봤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리다. 쟤는 가끔 저렇게 지나치게 멋을 부릴 때가 있는데 정말 너무나 과하다. 향수를 얼마나 뿌렸는지 문가에 있는데 완전 반대편의 원우에게까지 향기가 폴폴 흐른다.
“응, 나 오늘 미팅.”
전신거울이 필요해서 왔는지 문 옆에 있는 전신거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옷매무새를 보고, 거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여기저기를 살펴본다. 어우, 잘생겼어. 자기 얼굴 칭찬을 그렇게 해대는 걸 보면서 쯧쯧 혀를 차다가, 눈이 번쩍, 해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팅 간다고?”
“어. 미대 애들이래. 짱이겠지?”
“아니, 야, 아냐, 미대 안 돼.”
“미대 안 돼? 왜?”
눈이 동그래져서는 돌아본다. 미대, 미대가 그니까. 일단 뱉었는데 미대생을 만나 봤어야 단점을 알지. 말문이 막혀서 어버버 헤매다가 누구랑 가는데. 하고 다른 질문을 했다. 우리 과 애들이랑 가지. 그리곤 다시 거울을 본다. 안 돼. 저거 못 가게 해야 하는데. 만에 하나 거기서 눈 맞는 애 생기면 내 티켓 걔한테 가 버리잖아.
“나도 같이 가.”
“어?”
아까보다 눈이 더 커다래져서는 돌아본다. 형 나 미팅 간다고. 원우의 머리꼭대기부터 신발 앞코까지 위아래로 훑어보며 그런다. 알아, 나도 가자고.
“…형 오늘 옷 뭐 입었는지 까먹었지?”
“왜, 뭐, 내 옷 뭐, 왜.”
회색 트레이닝 세트에 과잠바. 과제 때문에 교재 챙겼더니 거북이 등딱지 마냥 빵빵한 백팩. 그래도 일단 뻔뻔하게 나가본다. 왜, 뭐가 이게 뭐가 어때서!
에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핸드폰을 꺼내서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어, 야 난데. 너 나랑 같은 동아리에 원우형 알지. 원우형이 미팅 따라가고 싶다 그러는데. 아, 진짜? 잘됐네, 그럼. 무슨 희소식인지 웃으면서 원우를 본다. 오케이. 엄지와 검지를 동글게 만들어서 보여주고.
“근데 약속시간 삼십 분만 미루면 안 될까? 원우형 완전 거지꼴이야.”
“거지꼴은 아니거든!”
“미루기 좀 그런가? 할 수 없지, 뭐. 알았어.”
통화를 끝내고선 원우를 휙, 돌아본다. 영 맘에 안 드는지 미간을 다 찌푸리고선 원우를 바라보다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온다. 왜. 너무 전투적으로 다가오니까 괜히 놀라서 갈 데도 없는 소파 위에서 뒤로 좀 물러나는데, 아무 소용없게 턱이 붙잡혔다. 버르장머리 없게 한 손으로 원우의 턱을 쥐고선 이쪽, 저쪽 돌려본다. 야, 손. 뭐라고 하려는데 이번엔 과잠바 옷깃을 잡더니 확 잡아당기고.
“야, 너 뭐 하는,”
“있어 봐, 좀.”
예고도 없이 목덜미에 코를 박더니 킁킁, 강아지처럼 숨을 쉰다. 세팅을 너무 열심히 한 머리칼이 까슬까슬하게 얼굴에 닿아왔다. 왁스인지 스프레이인지 아무튼 그런 향과 들이부은 향수의 향이 뒤섞여서 원우는 순간 흡, 하고 숨을 다 멈추고.
“아저씨 냄새는 안 나서 다행이네.”
“아저, 아저씨라니!”
그거 확인하려고 그랬는지 이내 손을 놓고 물러난다. 그래봤자 꼴랑 한 살 차이인데 죽을라구 진짜. 어지간히 꽉 쥐어 당긴 탓에 구겨진 옷을 탁탁 털어 말끔하게 정리해주고선 얼굴을 마주 본다. 그리곤 한숨을 폭. 뭐, 잘 됐다. 얼굴이 가까운 채 그런다.
“형이 폭탄하면 되지, 뭐.”
“이게 진짜.”
꽝, 이마로 이마를 때리자 아야야. 하고 물러난다. 폭탄은 니가 될 거거든.
아아악! 카페를 나서자마자 민규가 소리를 질렀다. 열심히 만졌을 머리를 아깝게 다 쥐어뜯으면서. 아주 무사히 잘 파토난 미팅 덕분에 멘붕 온 김민규는 한참 동안 자리에 쪼그려 앉은 채였다. 야, 가자. 유유히 따라 나온 원우가 발끝으로 툭, 민규의 발치를 찼다.
“형.”
“응.”
“나 잘 씻어.”
“알어.”
“아는데 왜!”
쪼그려 앉은 채 고개를 들어 바락 소리친다. 아는데 왜 그랬어어…. 그랬다가 이내 눈썹이 축 쳐지고. 잘 안 씻는 애로 몰고 가는 작전이 아주아주 성공했다. 아이고, 우리 민규. 머리를 하고 싶었음 감고서 했어야지, 어깨에 이게 뭐니, 이게. 민규의 어깨를 툭툭 털어서 테이블에 대고 훅 불었을 때 맞은 편 애들 얼굴 표정이 제일 가관이었다.
“아는데, 하필 오늘 그렇게 엉망이더라고.”
태연하게 대꾸하자 히잉. 하고 다시 무릎 새로 얼굴을 묻는다. 사내놈이 이깟 걸로 멘붕이고 그래. 야, 됐어. 일어나, 술이나 마시자. 다시 한 번 툭, 발치를 차니까 울상인 얼굴로 원우를 다시 올려다본다. 내가 살게, 가. 그 말 기다린 건지 그제야 미적미적, 일어난다. 길어서 다 접었던 거 펴는 데도 한참 걸린다.
나는 안 되나봐아. 혼자 소주 나발을 불더니 벌써 엎어져서는 우는 소리다. 형이 저주해서 그래. 징징거리다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선 원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런다. 내가 뭘 저주를 했다고. 소주 안 받는다는 핑계로 맥주만 홀짝거리면서 물었더니 형이…. 하고 말을 다 못 맺고 다시 엎어진다. 그리곤 조용. 야, 자냐? 다 망가진 머리꼭지를 두드리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휘청휘청, 똑바로 걷지도 못하면서 앞서서 씩씩하게도 걷는다. 이만큼 이쪽으로 왔다가 저만큼 저쪽으로 가더니 어디에 발이 걸렸는지 갑자기 풀썩 엎어진다. 으이구…. 일어나, 임마. 다가가서 팔을 붙잡자 무릎이 아프다고 낑낑거린다. 그니까 무릎 보게 일어나라고.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났더니 바지의 무릎께를 제대로 갈았는지 옷감이 다 해져서는 피가 비친다. 잘한다, 잘해. 일 년 보면서 이보다 더 한 것도 많이 봤다. 크고 무거운 애를 부축해서 일단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간이테이블 의자에 앉혀놓고 소독약이랑 밴드 사서 나왔더니 그새를 못 참고 의자에서 주르르 흘러내려서는 바닥에 자빠져있다. 야, 일어나 봐. 이미 꿈나라 떠난 애 얼굴을 두드려 정신줄 붙잡게 했더니 눈을 반만 뜨고선 원우를 본다. 혀엉. 입 열 때마다 술 냄새가 풀풀.
“나 졸려….”
“나도 졸려, 임마.”
“그럼 자자….”
와락. 팔을 뻗어서는 끌어안는다. 야, 야 이새끼야. 졸지에 길바닥에서 부둥켜안고 뒹구는 꼴이 됐다. 안 놔, 이거 안 놔? 팔이며 등이며 되는 대로 두드리는데 힘만 세서 꼼짝도 안 하고. 집에 가서 자야 할 거 아냐, 집에 가서! 급한 마음에 뒤통수를 움켜쥐어 잡아당기자 아파아! 하면서 손을 놓는다. 그리곤 또 쿨쿨. 이 진상새끼….
팍. 묵직하게 배를 누르는 무게에 윽. 하고 눈을 떴다. 그게 다가 아니라 곧 온몸을 다 꽁꽁 옭아매고. 하여튼 얘 잠버릇. 다리 사이에 베개 끼듯이 원우를 끼고서도 모자라서 더 끌어당기려고 자꾸 팔다리에 힘을 주는데 꼼짝을 못 하겠다. 내가 얘 이래서 한 번만 더 집에 데리고 오면 사람이 아니라고 다짐한 게 불과 올해 여름, 두 달 전쯤인 것 같은데 또 데리고 왔어. 깨자마자 골치가 아프다.
“아오, 좀 저리 가.”
온 힘을 다 해 가슴팍을 밀어내는데 얘 요새 운동하나 몸이 아주 탄탄하다. 그런 말 따로 안 했는데, 이게 나 몰래…. 밀어내다말고 손을 쫙 펴서 가슴팍의 근육을 재 보았다. 어쭈, 제법이잖아. 그러는 사이에 으응. 하고 움직인 김민규가 다시 한 번 팔다리에 힘을 꽉. 옴짝달싹 못 하고 갇히는 신세가 됐다. 깨야지 손을 놓으니까 일단 깨워봐야겠는데 팔다리가 다 묶인 상황에 뭘 어떻게 해야.
낑낑거리는데 문득, 아침이라 살벌하게 텐트를 친 김민규의 아래가 원우의 배꼽 근처를 꾹 누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이씨, 이 징그러운 새끼, 뭐가 이렇게 커. 그러고 보니 마찬가지로 모닝 텐트를 친 전원우의 아래는 김민규의 허벅지 즈음에 닿아있고. 움직일 때마다 서로 비벼지고 있다는 걸 새삼 자각하니까 갑자기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야, 일어나. 김민규, 일어나라고.”
몸은 가만히, 되는 대로 이마로 김민규의 얼굴을 때려댔다. 그마저도 행동반경이 좁아서 힘이 실리지가 않아서 쿡, 쿡, 누르는 꼴이다. 야. 야. 그래도 열심히 턱언저리를 몇 번 때리자 또 으응. 하고 잠꼬대. 김민규. 김민규, 야. 답답해 죽겠네.
툭. 아무 데나 두드리던 이마가 이상한 데에 닿았다. 까슬하고 물컹하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촉이 뭔지 분명히 알겠어서 순간 저도 모르게 파드득, 어깨를 떨고선 한껏 물러났다. 야, 쫌!
꽝. 온 힘을 다 해 박으니까 드디어 눈을 뜬다. 입술 안쪽이 자기 이에 부딪쳐서는 피를 보고서야. 아, 뭐야아! 적반하장으로 지가 더 화를 내면서. 나 입술 찢어졌어! 벌떡 일어나서는 자기 입술부터 만져 보면서 그런다. 원우 이마 한가운데에 지 앞니 자국 찍힌 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넌 내 방 말고는 아무 데서나 자지 마라. 컵라면 두 개에 물 부어놓고 마주 앉아서 툭 말했더니 왜? 하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다. 너 잠버릇 진짜 엄청나거든.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형은 아닌 줄 아냐. 그런다. 내가 무슨 잠버릇이 있다고.
“나는 잠버릇 없거든.”
“자기 잠버릇을 자기가 어떻게 아냐? 원래 다 모르지.”
“내 잠버릇이 뭔데?”
“형 막 엄청 안겨.”
“웃겨. 니가 엄청 끌어안지, 사람 꼼짝도 못하게.”
“형이 그러니까 내가 안아주는 거거든.”
“와, 너 되게 웃긴다. 사람 숨도 못 쉬게 꽉 끌어안고서 니가, 어?”
“아니라니깐, 내가 안아주는 거라니깐.”
“됐거든.”
손을 휘휘 젓고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뜨거운 김이 포르르 올라서 얼굴이 후끈해진다. 안기긴 누가 안겨, 미쳤냐.
중고나라는 포기했고, 김민규를 더 열심히 쫓아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캠퍼스 저 멀리서 윤곽만 봐도 알아차렸다. 김민규! 크게 부르면 걔도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원우혀엉. 손을 붕붕 흔들어대면서 지 친구들 다 보내고 원우를 기다려주고. 너 오늘은 소개팅 안 가냐. 얼굴 보면 인사가 그랬는데 김민규는 맨날 푸하하, 하고 웃었다. 갈건데? 짱짱 예쁜 애 만날 건데? 놀리다가 한 대 맞고.
쫓아다니면서 파토 낸 보람이 있게, 김민규는 아직 여자친구가 없다. 공연까지 한 달 남았고 이대로만 유지된다면 티켓은 전원우의 손에 들어오게 돼 있다. 티켓을 잡은 게 가상하니 한 장은 김민규 주…면 얘랑 둘이 보러 가야 하는 거잖아? 그건 좀 별론데.
동아리방 문이 벌컥 열리더니, 또 김민규다. 오늘도 역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껏 꾸미고선. 저게 그렇게 당해놓고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정신을 아주 못 차린 건 아닌지 들어오려다가 이미 있는 원우를 발견하고선 흠칫 놀란다. 안녕. 인사를 하고선 도로 나가려는 걸 잽싸게 뛰어가 뒷덜미를 잡았다.
“야, 너 또 어디 가.”
“아, 오늘은 아무 데도 안 가!”
“아무 데도 안 가는데 누가 이렇게 차려 입으래, 어?”
“그냥 입었어, 그냥!”
“뻥치고 있네, 빨리 말 안 해?”
“왜 또! 와서 망칠라구 또!”
“내가 언제 망쳤다고 그래! 그냥 걔네가 니가 싫다는 거지!”
“암튼 따라오지 마!”
“싫어, 따라갈 거거든!”
지구 끝까지 따라갈 거야! 뒷덜미 잡고 있던 걸 놓고 아예 폴짝 뛰어 등허리에 확 매달려 업혔더니 휘청하면서도 얼른 버티고 선다. 빨리 말 해. 양쪽 귀를 잡아당기며 말하자 아파아. 하고 우는 소리.
“오늘은 진짜 아냐.”
그래도 혹시 떨어질까 싶어서 허벅지 아래쪽을 받쳐 들고선 뒤를 돌아보며 그런다. 진짜 아냐? 아무리 봐도 맞는데 아니라고 자꾸 그런다.
“오늘은 장례식장 가.”
“…아, 진짜?”
그러고 보니까 그런 복장이네. 짙은 색 자켓과 셔츠와 팬츠. 머리도 하던 거에 반 정도만 만졌고.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스르르, 등에서 내려왔다. 누구 장례식? 묻자 고등학교 동창. 그런다. 어린애가 안 됐네…. 짠한 마음이 들어서 가, 그럼. 하고 민망한 손길로 옷매무새를 정리해주었다. 낼 연락할게. 얘랑 굳이 그런 사이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사이가 됐다. 김민규 소개팅 미팅 파토내고 사생활 감시하려면 그럴 필요가 있어서. 새삼스럽게 그러니까 좀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으응. 하고 어설프게 대꾸하곤 민규의 옷깃만 더 반듯하게 문질러주었다. 가. 툭, 어깨를 두드려주자 갈게. 하고 민규가 돌아섰다.
“형.”
복도 끝까지 가더니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돌아보며 부른다. 걸음이 잘 안 떨어지나 봐. 그럴 만도 하다. 아직 이 나이에 죽음은 낯설고 무섭고 좀 그러니까.
“빨리 가.”
그래도 가야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데. 손을 흔들어서 가라는 표시를 하자 입술을 삐죽삐죽, 그러더니 다시 원우를 본다.
“…뻥이야.”
“…야!”
다다다닥. 이미 계단을 뛰어 내려간 걸 뒤늦게 쫓아갔지만 역부족. 낼 연락할게! 층계참을 돌아 아래층까지 간 민규가 난간 사이로 원우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넌 죽었어! 다시 동아리방으로 달려가 가방부터 챙긴 원우가 복도를 달렸다.
넌 죽었어. 걸리기만 해 봐. 가만 안 둬.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이렇게 빨리 달려본 건 처음인 것 같다. 달리면서 원우와 민규의 교집합에 있는 애들한테 다 전화를 했다. 김민규 오늘 소개팅 어디서 한대? 받자마자 물었더니 다들 민규 좀 가만 냅두라고 성화다. 걔도 좀 연애도 하고 그래야지 너 때문에 꼴이 그게 뭐냐? 핀잔은 한 귀로 들어와서 한 귀로 나간다. 그래서 걔 어디 있는데?
자기네들끼리 전원우한테는 비밀로 하기로 약속이라도 했는지 다들 모른다고 잡아떼는 게, 이 근처인 게 분명했다. 일부러 먼 데까지 가면 어차피 못 찾을 거 동네 이름이라도 말해줬겠지. 애들이 다 순해빠져갖고 거짓말은 또 한 명도 못하고. 학교 주변 카페라 봤자 얼마 되지도 않는다. 김민규 너 이새끼 잡히면 가만 안 둬!
온 동네 골목을 다 뛰어다녔다. 카페란 카페는 다 들어가 봤는데 금세 잡히질 않는다. 이게 진짜. 남은 카페, 남은 가게, 남은 데가 어디 있지. 사거리에 서서 머리 양쪽을 두드리며 달리느라 헝클어진 생각을 정리하다가,
“…김민규!”
발견했다. 횡단보도 너머에 있는 거. 소개팅이라더니 혼자서 길 건너에 있다. 삐딱하게 서서는 핸드폰을 꺼낸다. 받으라고, 손짓을 하고선 귓가로 가져간다. 지잉지잉. 곧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고.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받자마자 소리쳤더니 너머에서 김민규가 핸드폰을 멀찍이 뗀다. 너 이씨, 아무리 그래도!
- 그러는 형은 진짜 나한테 왜 이러냐?
“야, 나는!”
- 내가 누구 좀 만나는 게 그렇게 싫어?
“어! 싫어!”
- 왜 싫어?
“왜냐면!”
티켓 때문에! 말하려니까 어딘가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아서 말이 몸 한가운데에서부터 콱 막히는 거다. 시작은 분명히 그것 때문이었는데,
- 형 나 좋아해?
“뭐래, 미친놈아!”
그건 정말 아니라서 바락 소리를 지르고 났더니 툭, 통화가 끊어진다. 황급히 고개를 들자 어느새 초록불로 바뀌어서는, 김민규가 저쪽에서부터 걸어오고 있다.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게 멀리서도 보여서 괜히 맘 한구석이 찔끔, 구겨지는 것 같고.
“그럼 나 싫어해서 그래?”
앞에 서서는 그런다. 내가 꼭 너를 좋아하거나 싫어해야지만 니가 누굴 만나는 걸 방해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머릿속에서는 말이 다 맺어졌는데 그게 입 밖으로 나오진 않는다. 그럼 왜 방해 하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있는 말이 하나라서. 티켓 때문에. 분명히 엄청 중요하고 대단한 건데 막상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유치한 거 스스로도 알겠으니까.
“형, 나 좀 짜증나려고 그래.”
“…….”
“내가 오늘 십 분 동안 문자랑 전화를 몇 개나 받았는지 알아?”
“…….”
많이 받았겠지. 전원우가 전화한 애들이 죄다 김민규에게 연락했을 테니.
“다 전원우 또 시작이라고 난리더라.”
“…….”
“계속 이러면 나 진짜 짜증날 거 같애.”
“…….”
답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로, 겨우 ‘짜증날 것 같다’는 소리만 할 뿐인데 뭐라고 말을 못하겠다. 머릿속이 덜컥, 덜컥, 생각을 만들어내는 장치들이 제 구실을 못하고 버퍼링이 자꾸 걸리고. 그러니까 괜히 성질만 벌컥 솟는다.
“야, 너는 형한테 짜증난다는 말해도 돼?”
“왜 안 돼? 형은 맨날 나한테 이새끼 저새끼 하고, 미쳤냐 돌았냐, 죽인다 다 하잖아.”
“그거야,”
“형이라서 돼? 그런 게 어디 있어.”
“…….”
얘가 말을 이렇게 잘했나. 한마디도 대꾸를 못 하겠다. 입술이 열린 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더니 한숨을 푹 쉬곤 간다만다 말도 없이 휙, 원우를 지나쳐서 가 버렸다. 김민규. 그렇게 가버리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민규야. 뭔가 잘못됐고, 잘못했고. 돌아보았지만 당연히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었다.
망했어…. 공연은 이제 열흘 앞으로 다가왔는데 전원우는, 티켓은커녕 김민규까지 잃어버린 상황이다. 더 이상 공강이 있어도 동방에 들를 수가 없고 김민규네 과가 있는 건물은 멀찍이 돌아서 다니고 그랬다. 빠른 길을 두고 돌고 돌아서 찬바람 속을 걷다 보면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해? 하고 속이 울컥, 뒤집어질 때도 있었지만 이내 사그러들었다. 내가 이렇게 해야지….
지잉지잉. 터덜터덜 걷는데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받아보니 그냥 그런 술자리 얘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데 민규도 온대. 그런다. 민규? 귀가 갑자기 틔였다. 민규가 너 요새 뭐하냐고 물어보더라. 서로 연락 안 해? 그렇게 죽고 못 살더니. 너머에서 하는 말에 걸음을 다 멈췄다. 죽고 못 살긴… 그냥 내가 괴롭힌 거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니깐 알긴 아냐? 그런다. 알긴 알지….
알면 와. 와서 민규한테 사과 해. 그래야 너네 둘 다 마음 편해진다. 충고라고 하는 말에 더 시무룩해진다. 사과라니. 그런 낯간지러운 짓을…. 김민규를 마주하고 미안하다고 말 하는 건 상상만으로도 온 몸이 말리는 것 같다. 대답을 안 했더니 안 와? 하고 저쪽에서 재촉을 한다.
- 너 오늘 안 오면 담주는 종강이야. 그럼 민규 두세 달은 꼬박 못 봐. 그럼 사람은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거고. 그렇게 좋은 사람 잃는 거 안 무섭냐? 민규 좋은 앤데.
“…….”
안 무섭냐? 고 묻지 않았다면 그런 기분은 안 들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물어보니까 덜컥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알았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하자 시간이랑 장소를 알려준다. 통화가 끝나고서도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좋은 사람 잃는 거 안 무섭냐? 민규 좋은 앤데. 마지막 말이 자꾸 맴돈다. 좋은 애지…. 소원이 사랑하는 사람이랑 콘서트 보러 가는 거라서 소개팅에 미팅에 그렇게 노력하는 거 다 파토내고 다녔는데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참다가 겨우 싫은 소리 한다는 게 짜증난다 수준이었는데. 참을성으로 보자면 거의 부처님 급인데 좋은 애 정도가 아니지. 진짜 좋은 애. 정말 좋은 애.
김민규에 비해 전원우는… 겨우 콘서트 티켓 같은 걸 소원이라고 애를 그렇게 괴롭혔다. 유치하게. 철없게. 주먹으로 꽁꽁, 머리를 때리고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직 해도 안 졌는데 지하 술집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백팩 어깨끈을 꼭 쥐었더니 어깨가 쪼그라들었다. 어디 있냐. 선뜻 들어가진 못하고 입구에 서서 고개만 들이밀어 안을 살폈다. 김민규가 있으면 무슨 얼굴을 하고 가야 하지. 김민규가 없으면 이따가 걔가 나타났을 땐 어떤 얼굴을 해야 하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뭐해?”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더니 김민규다. 고민은 개뿔, 놀라서 멍청한 얼굴로 김민규를 한참 바라보기만 했다. 안 들어가? 민규는 태연하게 원우를 지나쳐서 안으로 들어갔다. 같이…. 가자는 말이 입안에서 뭉그러진다. 이미 테이블에 닿은 민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원우도 걸음을 옮겼다.
차례로 도착했으니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았다. 전원우 김민규 오늘은 화해해라! 뭔지도 모르면서 시끄럽게 구는 애들 때문에 기운만 자꾸 빠진다. 화해가 아니라 사과. 전원우가 그냥 사과하면 되는 일이다. 근데 그걸 맨 정신에는 못 하겠어서 자꾸 술만 마시게 된다.
“형.”
몇 잔째인지 모르겠는데 소주잔을 집어 들자 김민규가 옆에서 손목을 쥐어 말린다. 많이 마셨어. 그러니까 그런가 싶다. 마주한 얼굴이 흐릿해졌다가, 또렷해졌다가. 또렷해지는 걸 보니 아직 아주 취하진 않았다. 민규의 손목을 털어내고 다시 원샷.
풀썩. 졸리고 어지러워서 더 이상 앉아 있질 못하겠어서 엎드렸다. 시끄러운 소리들이 멀리멀리서 들린다. 나 쫌 진짜 바보 같네. 미안하다는 말을 못해서 술을 이렇게 퍼마시구. 몸을 흔드는 손에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자 김민규의 얼굴이 보인다. 형. 뭐라고 말을 하는데 잘 안 들린다. 다시 눈을 감으니까 또 흔들고. 눈을 뜨니까 뭐라고 말 하는데 안 들리고.
에이씨…. 원우는 몸을 일으켰다. 손을 뻗자 쉽게 김민규가 닿았다. 야. 처음엔 어깨를 붙잡은 손이 헤매다가 민규의 얼굴을 붙잡았다. 김민규가 뭐라고 말하는데, 안 들린다. 그래서,
와락 끌어안았다. 안 들려, 병신아…. 가까워진 귓가에 대고 말하니까 얘가 한숨을 크게 쉰다. 집에 가자구. 그만큼 가까워지고서야 목소리가 들렸다. 응응.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드문드문했다. 정신차려보니까 김민규의 등이었고, 정신차려보니까 집이었고, 정신차려보니까,
김민규랑 끌어안고 있다. 얘 잠버릇 진짜. 술이 깨려는지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이 아파서 밀어낼 기운도 없다. 아직 어두컴컴한 새벽. 들어오면서 보일러를 안 켰는지 좀 춥다. 몸을 웅크리니까 끌어안고 있는 김민규의 팔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간다. 나 추워…. 잠결에 투정을 했더니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그래도 춥다. 어디서 자꾸 이렇게 한기가 들지. 몸이 자꾸 웅크러들고, 본의 아니게 자꾸 품을 파고들게 됐다. 팔다리가 얽히고 몸이 빈틈없이 달라붙고 나니까 좀 낫다.
컵라면에 물 부어놓고 마주 앉아서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원우는 애꿎은 손톱만 자꾸 뜯어댔고, 민규는 딴 데만 보고 있고. 일 초가 영원 같이 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는데 아무 말도 떠오르질 않아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형, 하고 문득 민규가 불렀다. 응? 얼른 고개를 들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무슨 할 말….”
“없어?”
“…….”
있긴 있다. 미안했다, 잘못했다. 근데 죽어도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 거다. 없음 말고. 민규가 뚜껑을 열었다. 포르르, 김이 솟아서 시야를 가렸다. 수업은 몇 시야? 민규의 물음에 원우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공강.”
“나돈데.”
그럼 더 자야겠다. 컵라면 하나쯤이야 금세 다 비운 김민규가 자리에서 도로 일어났다. 한 달에 한두 번 올까말까 하면서 자기 살림살이 다 챙겨놔서는, 자기네 집 마냥 칫솔을 꺼내서 이를 닦고선 도로 침대에 올라간다. 어우, 죽겠다. 푹 엎어져서는 앓는 소리를 한다. 너네 집 가서 자. 입맛이 영 없어서 젓가락으로 라면을 깨작거리며 말했더니 내가 어제 형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런다. 기억 안 나는 걸 보니 그랬을 거라서 더 말을 안 했다.
“내가 보니까 말야.”
엎드린 채로 고개만 돌려서는 원우를 본다. 베개에 볼이 눌려서는 입술이 삐쭉했다. 여전히 라면을 깨작거리며, 원우도 눈을 들어 민규를 바라보았다.
“형은 나를 너무 좋아하는 거 같아.”
“…뭔 소리야.”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돼.”
“밥 잘 먹여놨더니 개소리 하고 있어.”
“그게 아닌데 뭐 그렇게 울고불고 할 일이야?”
“…야, 너 내가 기억 못 한다고 아무 말이나 할래?”
“진짠데. 다 물어 봐. 형 울고불고 난리 났었어. 사람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봤는지 알아?”
“…….”
“김민규 여자 만나지 마, 김민규 연애 같은 거 하지 마. 완전 난리쳐놓고선.”
“…….”
아니, 기억 안 난다. 저게 또 나 놀리려고 저러지. 인상을 팍 구기고선 바라보고만 있었더니 아무한테나 전화해서 물어 봐. 그런다. 자신만만한 표정. 핸드폰을 찾았는데 진짜일까 봐 전화는 못 하겠다. 그 쪽팔림을 어떻게 감당해.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거든.”
도끼병 있나 그런 소리 좀 했다고 생각이 그렇게 밖에 안 돌아가나 모르겠다. 좋아해도 니가 아니라 니 티켓, 그 콘서트 티켓이 좋은 거지. 부연 설명은 굳이 하지 않았다. 아니긴. 김민규는 그냥 고개를 돌렸다. 야, 너 헛소리할 거면 너네 집 가서 자! 한 소리하니까 몰라몰라, 하면서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끌어올린다.
너무 많이 마시긴 했는지 머리가 계속 아파서 결국 원우도 민규의 곁에 도로 누웠다. 혼자 뒤집어쓰고 있는 이불을 끌어내려 나란히 덮고선 민규는 엎드린 채로, 원우는 천장을 보고 누워선 눈을 감았다. 소화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다 까무룩 잠이 들고.
다시 눈 떴을 때는 이제 아주 당연하고 익숙하게, 김민규랑 끌어안고 있다. 잠결에 답답하다 했다. 얘는 엎드려서 자다가 언제 이랬나 모르겠네. 으휴. 꼼짝도 못하고 안긴 채로 다시 눈을 감았다. 귓가에서 고른 숨소리가 크게 들린다. 별 게 다 익숙해진다.
해 넘어가도록 잤다. 달라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억지로 밀어 올렸다가 헉, 놀라서 숨을 삼켰다. 바짝 가까운 채로 얼굴을 마주 하고 있는 김민규. 언제 깼는지 어두운데 민규의 새까만 눈동자만 반짝반짝 했다. 여전히 단단하게 끌어안은 채라 제일 먼저 김민규의 등을 안고 있는 손부터 풀었다. 절루 가, 임마. 가슴팍을 짚고 쭈욱 밀어내자 의외로 순순히 놔준다. 깼는데 왜 그러고 있어, 징그럽게. 휙 몸을 돌려 침대에서 내려왔다. 기지개를 쭉 켜고선 캄캄해진 창을 내다보곤 다시 민규를 돌아보자 따라서 몸을 부스스 일으킨다. 잠이 덜 깼나 느리게 눈을 깜빡, 깜빡, 하면서 원우를 바라보고만 있다. 일어났음 집에 가. 같이 털어버릴 것처럼 이불을 펄럭이자 그제야 침대에서 내려온다.
민규가 세수하고 이것저것 챙겨 나갈 준비 하는 동안 원우는 도로 침대에 누웠다. 모로 누워 여기저기 오가는 걸 바라보는데 딱 봐도 미적거리는 게 보인다. 갈 준비 다 끝난 것 같은데 뭘 자꾸 내놨다가 도로 집어넣었다가.
“야.”
“응?”
“술 마실래?”
할 말은 쟤가 있지 싶다. 이참에 미안하단 말도 해야겠고.
소주병이 와르르, 넘어졌다. 형, 우리 그만, 그만 마셔야겠다. 이미 무뎌진 발음으로 민규가 말했지만 원우가 안 돼!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싸나이가! 어! 맥락 없는 핑계를 대며 더듬더듬 이미 빈 소주병을 쥔다. 잔에 팍 내리꽂았다가 나오는 게 없으니까 얼굴 앞에서 흔들흔들. 머야, 엄넹.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코가 막혀서는 맹한 발음으로 그러고선 다른 병을 집어 들었다. 그것두 없어, 바보야. 맞은편에 앉은 민규가 흐흥. 하고 웃었다. 바아보오? 한 대 쥐어박는 시늉을 하려던 게 몸이 말을 듣질 않으니 그대로 중심이 기울어 앞으로 엎어지려는 거, 민규가 붙잡아줘서 겨우 면했다. 형 취했다. 도로 밀어서 침대에 기대게 해주고선 또 웃는다. 뜨끈한 방에 마주 앉아 있어서 그런가 둘 다 얼굴이 발그레하게 익었다.
침대에 기대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눈앞이 핑핑 돌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혈관을 타고 소주가 도는 기분이다. 웃기넹. 혼자서 웃었더니 왜애? 하고 민규가 물었다. 어질어질한 시선을 천천히 돌리자 쟤는 이미 바닥에 누웠다. 손을 포개어 제 머리를 받치고선 원우를 올려다본다. 새까만 눈동자와 빨간 볼. 모가 왜야, 임마. 괜히 틱틱거리는데 민규가 또 흐흥. 하고 웃었다.
“형 쫌 귀엽당.”
“머래, 병신이….”
“형 지금 여기만 빨개.”
자기 볼 양쪽을 콕콕 가리키며 그런다. 저도 똑같은 걸 모르니까 저러지. 것두 웃긴다. 웃음을 흘리니까 왜 또 웃어엉. 하면서 민규도 웃었다. 바보들처럼 흐흥, 흐흥, 하고 자꾸 웃기만 했다.
“야.”
“왜앵.”
“너 어카냐.”
“머를 어켕.”
“여친 없어서.”
“모라는 거야, 언제는 만나지 말라구, 울고 불고 지랄 해놓고선….”
“지라알?”
“그게 지랄이지 모가 지랄이야….”
저걸 콱. 쥐어박아야겠는데 온몸이 무거워서 손도 못 들겠다. 에고고, 죽겠다. 결국 원우도 몸을 기울여 맨 바닥에 누웠다. 몇 뼘쯤을 사이에 두고 민규의 얼굴이 마주 보인다. 뭐가 그렇게 자꾸 웃음이 나는지 둥글게 휜 눈꼬리와 새까만 눈동자, 빨간 볼.
“암튼 그래가꾸,”
“응.”
“너 이제 어케.”
“머를 자꾸 어케.”
“여친 없어서 콘서트 혼자 가야 하자나.”
“아니거든! 아직!”
말을 하다 말고 심각한 얼굴이 된다. 오늘 며칠이지? 물어보더니 손가락을 꼽아보고.
“…망했넹….”
일주일도 안 남았다는 걸 자각하고선 입술이 댓발 나왔다. 이게 다 형 때문이자나! 바락 소리를 치더니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다. 히잉. 우는 건지 우는 시늉인지.
“내가 같이 가주까?”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티켓 한 장이 분명히 남는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선심 써주는 척 말했더니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선 뾰족해진 눈으로 원우를 본다. 나쁜 사람. 입술이 삐쭉해서는 그런다. 나쁘긴 모가 나빠, 너 혼자 갈 거 내가 같이 가주겠다는데! 도리어 큰소리를 치자 미간이 더 구겨진다.
“시러, 여친이랑 갈 거야.”
“아, 그놈의 여친 진짜.”
짜증을 팩 내고선 벌떡 일어났다. 내가 하면 될 거 아냐, 내가! 답답해서 가슴을 팍팍 치니깐 민규의 눈이 동그래진다. 형이 한다고오? 되묻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형은 안 돼. 검지 하나를 세워 휘휘 저으면서 그런다.
“왜, 내가 모가 모자라. 내가 모가 부족해!”
“형은 꼬추 있자나, 안 돼.”
“야, 지금 21세긴데, 그게 문제야?”
“문제 아니야?”
“아니지, 21세기인데!”
“그른가…?”
뭔 소리를 지껄이는지 왜 설득 당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설득 당한 민규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있어바. 그리고선 방 구석으로 더듬더듬 기어가 제 가방을 가져온다. 형 기다려바…. 안을 뒤적이다 뭐가 잘 안 되는지 가방을 아예 뒤집어서 다 쏟아버린다. 야, 그게 모야아. 가방에 무슨 쓰레기가 저렇게 많은지, 영수증이며 다 먹은 과자봉투 같은 게 원우의 방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요새 길에 쓰레기통이 잘 없어갖구…. 변명을 하고선 여기 있다! 하고 자기 손바닥만 한 다이어리를 집어 든다. 기다려바…. 페이지를 차근차근 넘기더니 이거 바! 하고 어딘가를 펼쳐서 내미는 걸 받아들었는데, 얘도 어지간히 악필이라 글씨가 얼른 눈에 안 들어온다. 버킷… 버킷리스트….
“나 여친이랑 그거 다 할 건뎅. 형 할 수 이써?”
“…….”
뭐가 엄청 많다. 그리고 잘 못 알아보겠고. 눈을 가늘게 뜨고 한 줄 한 줄 읽어보려 했지만 없는 정신에 그런다고 글자가 제대로 들어올 리가 만무. 자음모음이 분리돼서 둥둥 떠다니는 와중에 하나는 정확하게 보인다. 같이 콘서트 보러 가기.
“야, 형은 못 하는 거 없그든?”
다이어리를 탁, 덮어서 내밀며 큰소리를 쳤다. 진짜지이? 다시 묻는 말에 그럼! 당연하지! 하고, 뭔가 찜찜하지만 일단 큰소리를 빵빵 친다. 고지가 눈앞이다. 티켓이 내 손 안에….
확. 갑자기 손목이 잡히더니 끌려가는가 싶다가 도로 밀려서는, 바닥에 등이 닿았다. 왜, 뭔데. 눈 깜짝할 새에 몸 위에 올라앉은 김민규에 갑자기 술이 다 깬다. 야, 무거워. 밀어내려고 해도 밀리지가 않고.
“다 한다며.”
“아니 뭐 이런 것도 있었어?”
“어. 여친 방에서 섹스하기.”
“아, 안 돼!”
어깨를 팍 붙잡아 멈춰 세우자 왜애! 하고 난리다. 왜는 이새끼야, 이게 지금….
“아, 뽀뽀부터 할까?”
아니, 야, 그게 아니.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진짜로, 입술이 닿았다. 흡. 숨을 삼키자 귓가에 진공이 내린다. 쿵쾅쿵쾅, 그 와중에 심장 뛰는 소리만 크게 나고. 꾸욱, 아프도록 세게 누르고 있다가 금세 떨어져서 살았다. 안 그랬음 질식할 뻔 했다.
“형.”
한 번 했으면 됐지 아직도 원우의 위에 올라앉은 채 내려다보고 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어쩐지 얼굴을 못 보겠어서 눈을 꾹 감은 채 대꾸를 안 했더니 혀엉. 하고 어깨를 흔들어댄다. 죽은 척 하고 싶다….
“나 또 한다.”
그리곤 다시 부딪쳐 온다. 흡. 마찬가지로 숨을 삼켰다. 요령이라곤 하나도 없이 이번에도 꾸욱, 세게 누르기만 하는 게 아무래도 얘….
“…너 키스 안 해봤지.”
눈을 뜨자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민규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응응. 고개를 끄덕이고선 어케 알았어? 그런다. 어휴….
“근데 섹스는 어떻게 하려고?”
“…그거 그냥 다 자연스럽게 되는 거 아니야?”
“…….”
퍽이나 자연스럽게 되겠다…. 깜빡깜빡하는 눈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뒷덜미를 쥐자 놀라서는 어깨가 움츠러든다. 티켓 값이라고 치고, 내가 이건 가르쳐준다.
“입 열어 봐.”
뒷덜미를 당겨 좀 떨어트리고 말하자 이, 이렇게? 하고 아- 입을 연다. 너무 커, 멍청아. 쫌 다물어. 그러니까 착하게 조금 다물고. 반쯤 열린 입술을 하고선 기다리는 걸 바라보다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김민규 눈이 커다래지는 게 보인다. 눈 감아. 입술이 닿았을 때 나지막이 말하자 민규가 얼른 눈을 감는다. 원우도 천천히 눈을 감고, 멍청하게 벌리고 있는 민규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가 얼굴을 조금 틀어 비스듬히 물었다. 그리고,
쏙, 혀끝을 밀어 넣었더니 안쪽이 뜨끈뜨끈하다. 말캉한 혀를 감으니까 자연스럽게 손에 힘이 들어가서 더 끌어당기게 된다. 민규가 완전히 원우의 위에 엎드린 모양새가 됐다. 그냥 가르쳐주는 건데 심장이 쿵쾅쿵쾅, 너무 빠르게 뛰고 자꾸 숨이 찼다. 그냥 가르쳐주는 건데….
“그만, 그만….”
입매가 다 젖어서 민규를 밀어내려고 했더니 조금 물러나다가 다시 부딪쳐 온다. 그만 해애…. 우는 소리를 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열린 입술 새로 민규의 혀끝이 밀려들어왔다. 으으응…. 하지 말란 소리가 입안에서 먹혀서 앓는 소리처럼 나왔다. 민규야아…. 이러다 밤새 입술만 부비고 있을 것 같아 억지로 억지로 얼굴을 쥐어 밀어냈다.
“…….”
“…….”
눈이 마주치니까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상한 분위기가 됐다고 해야 하나? 조금 전까지 둘 다 술에 취해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었는데 술기운도 하나 없이 말끔하고, 헛소리도 더는 나오지 않고. 서로의 타액이 엉망으로 묻은 입술을 하고선 이렇게 바짝,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으니까.
“…더 할래.”
김민규가 다시 입술을 물어왔다. 아까보다 더 집요하게 입안을 헤집는다. 숨을 못 쉬겠어. 매달릴 데가 없으니까 민규만 자꾸 끌어안게 됐다. 등허리 어디쯤이 짜릿짜릿하고 몸 안쪽이 간질간질하다. 으응…. 애가 칭얼대는 것 같은 소리가 자꾸 났다. 나 숨 차. 안은 어깨를 몇 번이나 두드리고서야 다시 떨어졌다.
“…….”
“…….”
그리고 또 이상한 기분. 이상한 분위기. 눈을 마주하고 있다가 먼저 피한 쪽은 원우였다. 시선을 내리고선 괜히 손끝으로 쥐고 있는 민규의 어깨만 갉작였다. 간지러워. 민규가 손을 잡아 내리면서 자연스레 손가락이 얽혔다. 이게 더 간지러워….
“내일 또 해도 돼?”
“……으응….”
으응. 이라니. 머릿속에선 안 돼! 안 돼! 하고 외쳤는데 대답은 그렇게 나온다. 이게 무슨 일이야….
쪽, 쪽, 간지러운 소리가 쉴 새 없이 난다. 안 간다는 거 억지로 집에 보내고서야 겨우 숨 돌리고 생각 좀 정리하다 보니 밤을 샜는데, 얜 첫 차 타고 도로 왔다. 오자마자 원우의 침대에 앉아 원우도 옆에 앉혀 놓고선 쪽, 쪽, 입술을 부딪치는데 밀어내지도 못하고 받아주고만 있다. 왜 밀어내질 못 하냐면, 잘 모르겠다.
입술 위에서 쪽쪽거리던 김민규의 입술이 오지 탐험 하듯 조심스럽게 원우의 볼 위에도 한 번 쪽, 하고 내려앉았다가, 원우가 질색팔색을 하지 않으니까 다른 쪽 볼에도 쪽, 하고 도장을 찍는다. 맘대로 해라, 맘대로 해…. 얼굴 여기저기를 다 내주고 나니까 김민규가 슬그머니 떨어진다. 이제 성이 좀 차는 모양이다. 가만히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민규가 마주 보였다. 형, 나 여기다가두 해도 돼? 손으로 귀를 조물거리며 물었다. 하지 마, 간지러. 거긴 좀 너무 아직 그래서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저었더니 귀여운데…. 하고 서운해 한다. 귀엽긴 개뿔…. 간지러운 귓바퀴를 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아침 해가 뜨느라 창이 밝아졌다.
“형, 핸드폰 줘 봐.”
밥 먹다 말고 갑자기 핸드폰을 달란다. 왜? 딱히 숨길 것도 없어서 내밀었더니 가져가서는 뭘 한참 찾았다. 형 무슨 색 좋아해? 뜬금없이 묻는데 고민하게 된다. 몰라, 검은색? 대답하니까 그건 안 돼. 그런다. 검은색, 회색, 흰색 안 돼. 진짜 좋아하는 색인데 다 제껴버리니까 더 고민하게 됐다. 그럼 그냥 뭐… 녹색?
“난 보라색 좋아해.”
묻지도 않은 자기 취향을 얘기하고선 핸드폰을 도로 내민다. 뭐 했어? 액정을 내려다보았다가 눈을 가늘게 뜨게 됐다.
“뭐냐, 이거.”
“난 보라색 좋아하니깐. 형은 녹색 좋아하니까 이거 할게.”
밍구 라고 저장해놨던 걸 보라색 하트로 바꿔놨다. 민규 핸드폰엔 원우가 녹색 하트로 저장됐고. 하트…. 기가 막혀서 보고만 있었더니 바꾸면 안 돼. 하고 선수를 친다.
“바꾸면 우리 헤어지는 거야.”
“…….”
언제 사귀기는 했니…. 대충 사귀는 거 비슷하게 굴러가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사귀는 건 아니지 않나…. 티켓 값이다 생각하고 장단 맞춰주고는 있는데, 물론 그 장단의 수위가 약간 높긴 하지만 아무튼 그냥 장단 맞춰주는 건데 저렇게까지 가 버린다. 니 맘대로 하렴… 콘서트는 이제 이틀 남았으니….
자. 밤늦게 집 앞으로 잠깐 나오라 그래서 또 뭘 하려고. 하고 툴툴거리며 내려갔더니만 쇼핑백을 하나 내밀었다. 뭔데? 받아들기 전에 눈이 가늘어져서 물었더니 그냥, 형 어울릴 것 같아서 지나가다 샀어. 그런다. 뭐길래. 받아 들어서 안을 살펴보니까 니트다. 보라색 니트.
“…나 보라색 안 좋아하는데.”
“응. 형은 녹색 좋아하잖아.”
대수롭잖게 대꾸하면서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자기 쇼핑백을 펼쳐 보인다. 그니까 내가 녹색, 형은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 칭찬 받고 싶어 하는 강아지의 얼굴을 하고선 어깨에 힘이 쫘악 들어가 있다. 잘했다, 잘했어…. 어차피 내일도 만날 거 내일 줘도 될 건데 이 추운 날씨를 뚫고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온 게 대단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낼 입구 와. 알았지?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돌아선다. 낼 봐! 잘 자! 골목 끝까지 손을 흔들면서 뒷걸음질을 친다. 어휴….
안 입으면 하루 종일 툴툴거릴 것 같아서 입고 나왔다. 막상 입어보니까 보들보들하고 따뜻하기도 했고. 공연장과 가까운 지하철역에 먼저 도착해서 일 년 365일 똑같은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김민규를 기다렸다. 드디어 콘서트 날이다. 그리고 일 년의 마지막 날. 생각하니까 갑자기 헛웃음이 터졌다. 콘서트가 뭐라고 티켓 얻으려고 이 난리를 쳤니. 두 달 간이 머릿속을 막 스쳤다. 미친놈이야, 정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노래가 끊기고 진동이 울린다. 보라색 하트. 지하철 내렸는데 어디냐는 말에 출구번호를 일러주었더니 십 초면 가! 그런다. 통화가 끊기자 노래가 다시 이어진다. 신곡 위주로 하겠지? 그래도 이 노래는 꼭 불러주면 좋겠다. 리스트를 뒤적거리는데 갑자기 와락, 누군가의 품으로 끌려갔다. 누군가 아니고 김민규. 엄청 뛰어왔는지 숨을 몰아쉬느라 정신이 없다. 천천히 와도 되는데. 등을 두드려주자 하이고오. 하고 죽는 소리를 낸다.
“와, 입었네.”
점퍼 안쪽에 보이는 니트를 확인하고선 이내 얼굴이 밝아졌다. 나두. 그리곤 자기 니트도 보여준다. 녹색 잘 안 받을 줄 알았는데 막상 입으니까 괜찮다. 역시 완성은 얼굴. 김민규가 좀 잘생기긴 했다. 쟤만한 애가 없긴… 하다만 그걸 왜 내가 뿌듯해 하고 있냐. 원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자. 민규보다 앞서 걸었더니 같이 가. 하고 얼른 따라붙는다.
공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일단 밥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서 공연장과 잇닿아 있는 쇼핑몰을 한 바퀴 돌았다. 녹색이랑 보라색을 같이 파는 가게는 잘 없어서 민규가 좀 시무룩해 했다. 형 보라색 잘 어울리는데. 살면서 단 한 번도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색인데 걔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가 싶다.
“한 시간 전부터 입장 된다 그랬는데, 가볼까?”
대충 시간이 그렇게 된 것 같아서 말했더니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티켓 줘 봐. 자리 어디야? 공연장 표지판을 따라 걸어가며 원우가 민규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
티켓 어디 있지…? 걸음을 멈추고선 가방을 한참 뒤지더니 멍청한 얼굴로 그런다. 가방 속에 넣어놨는데…? 눈이 커다래져서는 원우를 보더니 다시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야, 장난치지 마. 티켓이 뭐 발이 달려서 도망갈 리도 없고 가방 속에 넣어놨으면 가방 속에 있어야지 없어질 리가 있나. 가방이 열 개 스무 개 있는 김민규도 아니고 들고 다니는 거 저거 하나뿐인데.
“…진짜 없어.”
그리고선 길바닥에 쪼그려 앉아 가방을 뒤집어서 털어댔다. 저번에 원우네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수증이며 과자 껍질이며, 뭐가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야, 너 내가 이것 좀 고치랬지. 타박을 하면서도 민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쓰레기를 같이 헤집었다. 없어. 근데 진짜 없다. 그냥 눈으로 봐도 없는데 뒤진다고 나올 리가 없다. 원우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아, 그때 형네 집에서….”
그래 그때. 이렇게 탈탈 털었던 적이 있다. 거기에 티켓이 있었다고? 그 쓰레기들은 당연히 다음날 아침 싹싹 모아서 쓰레기통에 버렸고, 그 쓰레기통은 오늘 아침에 나오는 길에 비웠다. 미쳤나 봐…. 기운이 쭈욱 빠진다. 내가 그 티켓 때문에 무슨 짓을 했는데….
기가 막히니까 화도 안 나고 웃음만 난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내다 버린 사람은 나잖아. 주저앉아서는 헛웃음만 흘렸더니 민규가 눈치를 본다. 혀엉. 쓰레기를 도로 다 주워 담고선 조심스럽게 부르는 걸 휙, 돌아보았더니 찔끔, 쫄아서는 눈을 돌린다.
“니 버킷리스트에 그런 건 없냐?”
“…어떤 거?”
“여친한테 죽어라 맞기.”
으이구. 되는 대로 손을 뻗어 쥐어박으려고 했더니 얼른 물러난다. 너 이새끼 이리 안 와? 벌떡 일어나서 쫓아가자 아 혀엉! 하면서 벌써 저만치 도망가 버렸다. 셋 세기 전에 와. 하나! 둘!
“혀엉, 잘못했어어.”
셋 세기 전에 달려와서는 자세를 낮춰 품에 폭 안기면서 그런다. 혀어엉. 우리 술 마시자, 응? 내가 살게. 꼼짝도 못하게 붙들고서는 잉잉거리니까 열이 확 올랐다가도 또 그냥 웃음만 난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기가 막혀서 웃는 건데 화 풀려서 그러는 줄 알고 김민규가 따라서 헤헤, 웃었다. 웃지 마. 정색을 하니까 넹. 하고 얼굴 표정을 싹 감추고. 내가 진짜 너 때문에….
“야, 됐어, 우리 헤어져.”
아직 매달려 있는 거 밀어내면서 그랬더니 어? 하고 눈이 동그래진다. 이 콘서트 올려구 니 여친한 거 아냐, 콘서트 못 보게 됐으니까 헤어져!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어떻게 할 수는 없고, 김민규가 맨날 ‘그러면 우리 헤어지는 거야.’를 입버릇으로 달고 살던 게 있어서 농담 반으로 한 말이었는데 스르르, 팔을 풀고선 물러서는 민규 얼굴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형 아무리 그래도 그런 소리는 하는 거 아니야.”
“왜 하면 안 돼. 넌 맨날 하잖아.”
“나는 그냥,”
“그리구 언제 우리가 사귀기는 했어? 사귀자고 말도 안 했어.”
어라. 갑자기 이상해진다. 그냥 다 농담이었는데 마지막 말을 하는 순간 원우는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는 걸 느꼈다. 사귀자고 말도 안 했으면서 나만 보면 뽀뽀하고 키스하고 끌어안고 만지고. 근데 나 오늘 콘서트도 못 보잖아. 이거 너무 내가 손해인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니까 순식간에 생각이 주르르 퍼져나갔다. 나만 닳았어.
“말을, 말을 꼭 해야 사귀는 거야?”
“당연하지.”
“안 사귀는데 그럼 왜 그랬어?”
“니가 그렇게 하니까,”
“나 안 좋아해?”
“…….”
말이 탁, 막힌다. 순간 심장도 쿵, 떨어지고. 뭐야, 이거 진짜 이상해. 안 좋아하냐고? 상식적으로 너랑 나랑 서로 좋아하는 게 이상하지 않아? 뽀뽀 좀 하고 키스 좀 하고, 좀 많이 끌어안고 남들보다 더 많이 만지기는 하는데, 그게 좋아하는 건,
“…알았어.”
생각만 했지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안 꺼냈는데 다 들렸는지, 아니면 알아챘는지 민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착각했다. 눈도 못 마주치고선 그러더니 한걸음 물러난다. 갈게. 쓸쓸하게 인사를 하고선 돌아서는데,
붙잡지는 못 했다. 저만큼 멀어지고 이내 사람들 사이에 섞였는데도 김민규는 김민규라서, 아무리 멀고 복잡해도 윤곽만으로도 알아볼 수가 있어서, 진짜로 안 보일 때까지 원우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잘못한 것 같다.
아니, 잘못했나?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콘서트 보고, 끝나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공연 얘기하고, 그러다 0시 종 치는 거 보고 그렇게 행복하게 오늘 하루가, 일 년이 마무리 됐어야 하는데 죄다 망했다. 소란스러운 거리를 혼자 걷는 사람은 전원우 뿐인 것 같았다. 다들 친구든 연인이든 있는데.
다 민규 잘못도 아닌데 너무 그랬다. 확인도 안 하고 내다 버린 건 전원우인데. 걔는 그 순간에 정말 얼마나 당황했을까. 같이 공연 보러 간다고 같이 입을 옷까지 사다가 추운 한밤중에 건네주고 갔는데. 생각할수록 더 잘못한 쪽은 전원우다. 그렇긴 해도,
우리가 사귀기는 하냐는 질문은 잘한 것 같다. 정리가 필요하긴 했다. 이런 일이 계기가 될 줄은 몰랐지만.
너무 급격했다. 일주일도 안 됐는데. 그런 식으로 부대끼다 보면 정이야 들겠지만, 원우는 애초부터 쟤가 티켓을 가졌으니 장단이나 맞춰주자는 식이었고, 민규는 약간, 복수심 같은 거 아닐까 싶었고. 그런 불순한 마음들이 오래 갈 리가 없고, 당장 내일이라도 갑자기 둘 다 정신을 차리면 급격하던 얼마간은 없었던 게 될까?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낼 수 있을까? 걷는 내내 생각해봤지만 아니라는 결론 밖에 나지 않았다. 안 돼. 정신 차리면 그냥 다,
잃는 거지. 무섭지 않냐?
당연히 무섭지….
기분이 가라앉으니까 걸음도 축축 쳐졌다. 느린 걸음으로 집 앞까지 왔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보며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시야 끄트머리에 겨우 걸쳐있는데도 알겠다.
“…왜 여기 있어.”
민규. 현관 앞에 서서는 원우를 바라보고 있다. 집으로 바로 올 줄 알았더니. 원우보다 한참 전에 와서 기다렸는지 얼굴 보자마자 입술을 삐쭉 내밀고선 중얼거린다. 왜 여기 있냐구. 다시 묻는데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와락 끌어안는다.
“사귀자.”
“…….”
나참. 이젠 웃음도 안 나온다. 한숨을 폭 내쉬었더니 한숨 쉬지 마! 하고 금세 징징. 사귀자아. 사귀자고 말했잖아아.
그렇게 열심히 얘 소개팅과 미팅을 파토내고 다녔을 필요가 있나 싶다. 이런 애랑 누가 사귀어준담. 허우대만 멀쩡했지, 연애라곤 이렇게 젬병인데.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음 그냥 처음부터 여친 됐고 나랑 사귀자고 할 걸 왜 그렇게 고생을 했나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