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감정의 오해
2021. 1. 10. 02:11




“가자, 응?”


몇 번이나 어르고 달랬지만 실패다. 허리를 굽혀 눈을 맞춰보지만 그것도 실패. 결국은 아예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들이밀었더니 고사리 손으로 민규의 넓은 어깨를 밀어낸다. 마음씨는 착해서 있는 힘껏 미는 게 아니라 아주 살짝. 아빠 싫어. 조그마한 얼굴, 그것보다 더 조그마한 입술을 움직이며 나온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민규는 엄마야,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주저 앉았다. 


“어떻게 아빠가 싫을 수 있어?”
“병원 안 간다 해 놓구!”
“어어? 말은 바로 하자, 김 봄. 언제 안 간다고 했어? 아빠 늦게 일어났으니까 점심 먹구 가자고 한 거지?”
“아냐! 아빠가 안 간다구 했어!”


콩만한 게 대드는 걸 보니 이것도 이제 다 컸다 싶어서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짠한데, 통통한 손가락으로 애먼 제 후드 끈을 만지작거리는 게 귀여워 입술이 자꾸 멋대로 올라가려 한다. 이러면 안 돼. 오늘 병원에 갈 거라 월차까지 냈다. 마음이 약해서 가기 싫다고 떼 쓰는 걸 몇 번 들어주느라 병원 문턱을 못 넘었더니 또 저러는 거다. 


“봄. 너 오늘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 안 만나면 어제처럼 기침 엄청 하구, 콧물도 이만큼 나오고 열도 난다?”
“…….”
“진짜 그래도 좋아? 봄이 저녁마다 아빠랑 목욕하는 거 제일 좋아하는데 그것도 못하잖아.”


이건 좀 먹혔나 보다. 아침에 유치원 데려다 줄 때 잠시 보고, 하루 종일 못 보다가 저녁에 만나 겨우 밥을 먹고 목욕을 한다. 봄은 그 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하루 종일 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그 시간만큼은 민규 품에 매달려 애교를 피우고 마음껏 투정을 부린다. 그런데 감기에 걸려 그 재미를 못 느낀 지 몇 주가 되었다. 

응? 봄아. 하얗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손을 잡고 손등을 문질렀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뭔가 결심을 한 듯 했다. 들어갈 거야? 그랬더니 아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엉! 우렁차게 대답도 한다. 귀여워. 일어나 문을 열었더니 먼저 병원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접수 하려구요.”
“애기 이름이…?”
“김 봄이요. 아, 처음 왔어요.”
“이거 적어주시겠어요?”


간호사가 건넨 종이 위에 칸을 채워나갔다. 이름. 김 봄. 주소는 아직 이사온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익숙하지가 않다.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이사온 주소를 받아 적었다. 아이와 함께 이사를 오면 새로 알아가야 할 게 많았다. 병원, 약국, 마트, 그리고 주말에 놀 수 있는 키즈카페. 회사 사람들에게 추천 받은 소아과였다. 의사 선생님이 친절해. 어느 소아과든 의사가 친절하지 않겠나 싶으면서도, 몇몇 의사들은 싱글 대디인 민규를 향한 눈빛이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푹신한 소파에 앉으니 봄이 아장아장 걸으며 앞으로 걸어온다. 아빠, 나 앉혀줘. 큰 몸을 구부려 앉은 민규 앞에서 봄이 무릎을 톡톡 쳤다. 한 팔로 안아 올리니 꺄르르 웃음이 터진다. 컨디션은 그리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자꾸 콧물이 나온다. 무릎에 앉혀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콧물을 훔쳐냈다. 


“주사 맞으면 어떡해요?”
“봄이 감기 더 빨리 낫는 거니까 좋지!”
“근데 봄이는 주사 싫은데….”
“아빠가 호야호야 해줄게.”


손을 붙잡고 호호 불어대는 모습에 또 웃음을 터트린다. 우리 아들 웃음이 많아서 좋네.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끌어 안았다. 작은 몸에서는 금방 먹은 시리얼을 티라도 내는 듯 우유 냄새가 났다. 그리고 아침에 발라 준 베이비로션 냄새도. 이 냄새만 맡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잠도 잘 왔다. 최고의 수면 유도 향기였다. 아빠 더워요. 찡찡거리는 말에도 민규는 팔을 풀지 않았다. 가끔은 봄이 보다 더 아이 같은 짓을 했다. 그럴 때마다 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김 봄. 들어오세요.”


손을 잡고 원장실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컴퓨터를 보고 있다가 의자를 빙글 돌려 봄이네 부자를 향해 싱긋 웃는 의사 선생님은 얼굴이 친절했다. 인터넷에도 의사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이유가 있었네. 차분한 흑발에 동그란 안경을 쓴 의사는 봄을 향해 손바닥을 보이며 흔들었다. 안녕, 봄이? 아까와 다르게 잔뜩 굳은 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민규 다리 뒤로 숨는다. 이런 일을 숱하게 봐왔을 의사는 책상에 있는 뽀로로 스티커를 꺼낸다. 


“봄이 이거 줄까요?”


낯선 사람이 주는 물건, 음식은 절대 받는 게 아니라고 호되게 교육을 시켰더니 민규 눈치를 슬쩍 본다. 괜찮아. 민규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쭈뼛쭈뼛 걸어가 두 손으로 스티커를 받고 인사를 꾸벅 한다. 감사함미다아. 


“의자에 앉아서 선생님이랑 이야기 할까요?”


톤이 낮은 목소리지만 말투는 상냥하다. 민규는 얼른 의자에 봄을 앉히고 옆에 섰다. 


“봄이 어디가 아파요?”
“콧물…나고요. 기침도 해요. 밤에요.”
“밤에 기침하고 콧물도 나구나. 아버님, 열은 있나요 봄이?”


예고도 없이 쳐다보는 눈빛에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네? 아, 네. 조금.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그러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매일매일 온도를 체크하고 찍어놨던 사진을 보여줬다. 


“아버님이 엄청 꼼꼼하시네요.”


진료차트에 무언가를 적던 의사가 민규를 바라보며 웃는다. 그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또 우물쭈물.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지. 


“봄이 아, 해볼까요?”


의자에 앉은 채 봄이 앞으로 다가와 봄의 편도를 확인하고 청진기를 배에 갖다 댄다. 숨 크게 쉬어볼까? 올챙이 같은 배가 오르락 내리락 한다. 잘하네, 봄이. 청진기를 목에 걸고 봄의 옷을 내려 깔끔하게 매무새를 가다듬어줬다. 


“감기네요. 편도가 좀 붓긴 했지만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거 같아요. 일단 오늘 주사를 맞고….”
“주사여!?”


주사라는 말에 봄의 눈이 이만큼 커진다. 의사는 봄과 눈을 마주치느라 책상 가까이 몸을 숙였다. 응, 오늘은 봄이 주사 맞아야 해요. 주사 무서운데에…. 


“선생님이 안 아프게 놔줄게요.”
“…진짜요?”
“진짜요.”


의기양양한 의사는 봄의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서 바늘을 꽂는다. 얼굴은 분명히 웃고 있는데 주사를 준비하는 행동이 무서웠나 보다. 잘 맞으면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괜찮아. 간이 침대에 걸터앉아 봄의 바지를 조금 내렸다. 하얗고 뽀얀 엉덩이가 드러나자 봄이 칭얼거린다. 할 수 있어, 김 봄. 그랬더니 민규 허벅지에 얼굴을 묻고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작게 웃는 의사와 눈이 마주쳤다. 


“봄이는 음식 중에 뭐 좋아해요?”
“어…어…카레요! 아빠가 만들어 준 카레!”
“와 맛있겠다.”
“우리 아빠 요리 짱 잘해요! 봄이는 아빠 카레 좋아해요.”


봄이 좋겠네.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코올 솜으로 엉덩이를 한번 닦고 몇 번 탁탁 치고는 바늘을 쿡 찔러 넣는다. 그 와중에 봄은 카레 이야기를 계속 하고. 아! 약이 쭉 들어가고 바늘은 이미 빠져 나왔다. 솜으로 엉덩이를 몇 번 문지른다. 


“다 맞았다. 안 아팠지?”
“힝….”


민규 허벅지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더니 울상이다. 잘 맞네, 우리 아들. 볼을 집게 손으로 주물렀더니 말랑말랑 하다. 


“아버님, 조금 문질러 주세요.”


의사가 손을 뗀 알코올 솜을 잡고 몇 번 문질렀다. 쓰레기 통에 솜을 버리고 바지를 끌어 올렸다. 


“오늘은 목욕 시키지 마시고 약 3일 먹어보고 좋아져도, 안 좋아져도 꼭 한번 더 오셔야 해요.”
“네.”
“봄이 오늘 잘했으니까 이게 줄게요.”


아이들 선물인 듯 사탕꾸러미 하나를 꺼내어 봄에게 건네니 아까와는 다르게 깡총깡총 뛰어서 두 손으로 받는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꾸벅 하는 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인사 잘 하네요. 


“약 잘 먹고 한번만 선생님이랑 또 봐요.”
“네!”


사탕에 홀려서 병원에 또 오라는 말에 신나게 대답한다. 감사합니다. 의사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더니 오기 싫다고 칭얼거리던 애는 어디 가고 사탕이 담긴 비닐을 뜯으려 이리저리 쳐다 보고 있다. 아빠 이거 뜯어줘요. 계산을 하고 처방전을 받고 있는 민규의 허벅지를 톡톡 친다. 간호사의 이야기를 듣느라 대충 대답을 했더니 혼자 해보겠다고 조용하다. 안녕히 계세요. 병원 밖으로 나오자마자 쪼그리고 앉아 사탕 꾸러미를 뜯었다. 


“무슨 맛 먹을래?”
“포도!”


보라색 포장지의 사탕을 꺼내 껍질을 쭉 찢었다. 동그란 사탕을 먹으려 입을 아 벌리는 게 참새 같다. 작은 입에 쏙 넣었더니 단맛이 느껴지니 헤헤 웃는다. 


“다음에도 병원 잘 오기야. 약도 잘 먹고.”
“엉!”
“약속했다?”
“엉!”


이렇게 말 잘해도 또 반복될 걸 안다. 손을 잡고 약국에 들러 약을 타는 동안 의자에 앉아서 다음에 할 걸 생각했다. 마트를 가야겠다. 오랜만에 평일에 쉬는 날이니까 특식을 해줘야지. 톡톡. 봄이 민규의 허벅지를 친다. 응? 그랬더니 손에 쥐고 있던 사탕 꾸러미를 건넨다. 더 까줘? 그랬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아빠도 하나 먹어요.”
“아빠도?”
“엉. 아빠도 힘들어찌.”


그래도 생각해주는 건 우리 아들 밖에 없네. 괜히 코 끝이 찡해진다. 아빠 힘든 건 알아? 사탕을 오물오물 먹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오렌지 맛 사탕 하나를 꺼내어 입 안에 넣었다. 맛있네. 단 게 들어오니 기분이 좋아진다. 김 봄 님. 그 사이에 나온 약 봉지를 받아 들고 약국을 나왔다. 주차장으로 가는 내내 봄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들 오늘은 특식 해줄게.”
“특식이 뭐예요?”
“맛있는 거. 우리 아들 불고기 좋아하지?”


오 예! 카시트에 앉히는데 귀 옆에 대고 소리를 꺅꺅 지른다. 아이구, 놀래라. 그랬더니 민규 목을 끌어 안고 뽀뽀세례다. 내 새끼, 내 새끼. 어두컴컴한 주차장에서 울리는 뽀뽀소리가 웃겼다. 















전원우.

점심 시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병원에 갔다 온 걸 이야기 했더니 의사 이름이 툭 튀어 나왔다. 그런 것까지 아세요? 눈을 동그랗게 떴더니 몇몇 선임들이 아하하 웃었다. 워낙 유명해야지. 


“애들한테 잘하고 잘생겨서 유명하잖아.”
“그런 거 같긴 하더라고요. 인터넷에서도 유명하구.”
“봄이는 어때? 거기서 우리 애들은 주사 맞으면 바로 낫더라.”


확실히 감기가 많이 떨어지긴 했다. 콧물은 아직 흘리는 거 같은데 새벽에 심하던 기침도 멎어서 잠도 잘 잔다. 민규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좋은 병원을 알았다 싶었다. 


“그 의사 선생님 민규씨 집 근처에 살 걸? 거기 마트에서 몇 번 봤어.”
“아 그래요?”


병원 근처에 사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가 보네. 그랬다가 의사 선생님 어디 사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싶고. 마시던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려는 찰나 핸드폰 진동이 징 울린다. 봄의 유치원에서 온 메시지였다. 딱 한 모금이 남은 물약과 입을 아 벌리고 있는 봄이의 사진이었다. 


[챙겨주신 물약은 점심 먹고 한 방울까지 다 마셨습니다!]


메시지 다음으로 봄이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온다. 오구오구, 내 새끼. 입꼬리와 광대가 주체할 수 없이 솟아 올라간다. 약도 다 먹었으니까 또 가야겠네. 언제가 좋지. 토요일에 가볼까. 민규는 적당한 날짜를 고르느라 캘린더를 실행했다. 이번 주 토요일이 좋겠다. 아침에 일찍 갔다가 대청소를 하고 약속했던 케이크를 먹으러 가야겠다. 















“아빠!”


오늘은 길이 조금 여유로워서 유치원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평소보다 10분 정도 빨리 왔더니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봄이 민규에게 달려온다. 김 봄! 쪼그리고 앉아 팔을 벌렸더니 팔랑팔랑 뛰어와 와락 안긴다. 아빠아…. 말 끝이 늘어지는 게 오늘은 조금 피곤했나. 오구오구, 잘 놀았어?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쳐 안아 들고 유치원 현관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는 선생님에게 같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봄을 내려 놓았다. 


“봄이 가방 가지고 오세요.”
“네!”


누가 천방지축 김 봄 아니랄 까봐,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제 반으로 뛰어 들어간다. 애가 좀 별나죠. 멋쩍게 이야기를 했더니 선생님은 손사래를 친다. 봄이 정도면 얌전해요. 한 손엔 가방을 한 손엔 외투를 질질 끌며 신발장으로 온 봄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봄, 천천히 와도 되는데. 민규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외투를 입고 가방을 둘러멘다. 


“아빠아, 이거 안 빠져요.”


옷을 그렇게 입으니까 안 빠지지. 모자를 쑥 빼고 가방 뒤로 몇 겹으로 접힌 옷을 탁탁 당겨 주었다. 가방까지 제대로 입고 나서야 공!수! 하더니 선생님에게 인사를 한다. 봄이 내일도 신나게 유치원 와. 상냥한 목소리에 유치원이 떠나가라 네! 하고 대답한다. 익숙하게 신발 찍찍이를 혼자서 탁탁 붙이고 민규의 손가락을 잡았다. 


“가요!”


차 문을 열어 먼저 봄을 앉히고 앞으로 빙 돌아 운전석에 올라 탔다. 


“봄아. 마트 들렀다 갈까?”
“좋아!”
“그럼 밥 조금 늦게 먹게 되는데 괜찮아?”
“응! 대신에 맛있는 거 사주세요.”
“뭐 먹을까, 아들?”
“으음….”
“일단 아빠 출발할 테니까 생각해 놔.”


알게써요. 아직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까닥까닥 한다. 귀여워. 이사 오고 본격적으로 장 보는 건 처음인 거 같다. 물건 정리에 서류 떼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 날 먹을 것만 후다닥 사왔는데 오늘은 텅텅 비어버린 냉장고를 좀 채워볼까 했다. 그리고 이사 오면서 너무 낡아서 버리고 온 봄의 물건들도 몇 개 사고. 살게 많네. 대충 머리 속에 생각을 하는데 품목이 다양해진다. 오늘 다 들고 올 수 있으려나. 











핸드폰 하나만 챙기고 한 손엔 봄을 안아 마트 안으로 들어왔다. 카트 탈래! 지나가는 카트를 보며 손을 뻗는다. 장시만. 마트만 오면 이렇게 흥분하는 건 누굴 닮은 거지. 아무리 봐도 닮을 사람이라고는 자신 뿐인데 그럴 때마다 자아성찰을 하게 되는 거다. 나도 마트에 오면 저렇게 흥분하나.

동전 하나를 넣고 카트를 빼냈다. 발버둥을 치는 아이를 앉히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핸드폰에 적어 놓은 목록을 보며 먼저 과일 코너로 걸어갔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과일을 빠뜨릴 수가 없다. 아침에도 먹이고 밤에도 저녁 먹고 나면 간식으로 꼭 먹였다. 제철에 맞는 과일을 찾는 재미가 의외로 쏠쏠했다. 


“봄. 배 안 고파?”


코너마다 사야 하는 것들이 많아서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카트 안이 제법 찬다. 떡볶이 좀 먹을까? 지나가다 떡볶이 냄새에 민규가 발길을 멈췄다. 먹을래! 팔을 뻗는 봄을 의자에 앉혔다. 튀김과 순대도 시키고 나서야 봄이 앞에 앉을 수가 있었다. 오늘 유치원에서 뭐했어? 물티슈로 손을 닦아주며 물었다. 오늘은 간식을 먹었지! 제 아들 아니랄 까봐, 먹는 게 가장 기억에 남았나 보다. 간식 뭐였어? 요구르트랑 빵! 우리 봄이 좋아하는 것만 잔뜩 먹었네. 그래서 기분이 좋았구나. 

테이블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볶이와 순대 그리고 튀김이 나오자 봄이 눈을 반짝인다. 잠시만. 미리 챙겨온 포크로 떡볶이를 작게 자르고 양념을 덜어냈다. 아직 매운 거 못 먹으면서 떡볶이는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포크로 콕 찍어 건네니 두 손으로 잡고 잘도 먹는다. 아이, 잘 먹네. 먹는 틈을 타 순대도 자르고 튀김도 자르고. 전부 다 봄의 입에 맞게 만들고 나서야 하나를 입 안에 넣을 수 있었다. 


“주말에 어디 갈까? 아빠가 봤는데 그림 전시 보러 갈까?”
“네!”
“그럼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전시도 보고 오자?”


환하게 웃는 봄의 볼을 손등으로 쓰다듬었다. 보고만 있어도 예쁘고 그래서 가끔은 미친 게 아닐까 싶었지만, 아이 가진 부모의 마음이 다 그럴 거다. 먹는 것만 배부르고 잘 놀고 오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를 감사하게 된다. 요즘엔 많이 커서 가끔 말을 받아 칠 때면 얄밉기도 하지만.


한 접시씩 거하게 비워내고 나서 다시 쇼핑을 시작했다. 집에서 적어도 한 끼는 음식을 해 먹었다. 평소에 반찬도 만들어 놓고 주말에는 티비에서 봤던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을 하는 게 민규의 낙이었다. 고맙게도 봄은 잘 먹어줬다. 편식하는 애들 때문에 고민하는 부모님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잘 먹어주는 것도 고마웠다. 

카트 안이 수북하다. 오늘 하루에 다 못 사겠네. 급하지 않은 것들은 주말에 다시 나와 사기로 했다. 물건이 넘치다 못해 봄이 앉아 있는 곳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이거는 봄이가 들어. 봄이 좋아하는 과자를 건네자 소중한 것처럼 품에 쏙 껴안는다. 


“아빠 간장 샀어요!?”


간장이 마침 똑 떨어졌는데 그걸 늘 까먹다가 음식 할 때 생각나고는 했다. 봄아, 아빠 간장 사라고 해줘. 주차장에서부터 부탁했더니 그게 지금 생각났는지 묻는다. 맞다, 간장! 민규는 급하게 카트를 멈추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아빠, 까먹었어! 꺄르륵 웃는 얼굴을 보며 같이 웃었다. 그래, 아빠가 까먹었네. 

간장도 종류가 많아서 몇 개를 보다 늘 사용하던 제품을 고민하지 않고 들었다. 이거면 되겠지. 카트로 걸어오는데 봄이 민규의 뒤를 보며 어!? 한다. 왜? 시선을 따라가자 어디서 많이 본 동글동글한 뒤통수가 눈에 들어온다. 누군데? 혹시 유치원 선생님인가 싶어서 잘 봤지만 그건 아니고. 아는 사람이야? 그랬더니 봄이 고개를 갸웃하며 민규를 바라본다.


“선생님!”
“선생님?”
“봄이한테 사탕 준 선생님!”


사탕…. 사탕…..


때마침 뒤를 빙글 도는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아, 의사 선생님. 전원우 선생님. 혹시 아는 척을 하면 싫어할까 고개를 휙 돌렸는데 봄은 손을 방방 흔든다. 어이구, 아들아. 눈을 질끈 감았는데 뒤에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안녕, 봄이. 안녕하세요.”


톤이 낮은 목소리와 상냥한 말투. 놀라 뒤를 돌았더니 여기까지 걸어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손 흔들 땐 언제고 원우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니 수줍어한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다 뵙네요.”
“네. 감기는 괜찮은가요? 봄이?”
“많이 좋아졌어요. 주말에 병원 또 가려고요.”
“다행이네요. 봄이 주말에 선생님이랑 또 만나자.”


순간 주사 생각이 났는지 얼굴에 근심 걱정이 드리운다. 그 모습에 낮게 웃던 원우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주사 안 맞을 거예요. 그러자 봄의 표정이 풀린다. 머리를 쓰다듬어준 원우가 민규를 마주본다. 저기…. 이런 표정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침울해진다. 아까까지는 환하게 웃던 사람이 이러니까 갑자기 덜컥 겁이 나는 거다. 


“죄송한데, 아버님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네? 뭐 때문에 그러세요?”


마트에서 도와달라고 저런 표정을 짓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물음표를 이만큼 띄우고 쳐다보니 진열되어 있는 간장들을 가리킨다. 간장이요?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제가 요리에 이응 자도 몰라서 그러는데….”
“네.”
“간장은… 뭘로 사야 하나요?”


…….

순간 정적이 흘렀다. 말을 못 꺼냈던 첫 번째 이유는 지금 들은 게 맞나 싶어서. 두 번째는 첫 인상과는 너무 다른 원우의 표정이 신기해서. 간장요? 간장? 몇 번이나 되물었더니 제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색하게 웃는다. 간장 종류가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아….”


뒤를 돌아 진열된 상품을 봤더니 진짜 많다. 사실 처음 요리를 할 때 민규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국간장, 조선간장, 진간장. 그런 건 어느 때 쓰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인터넷에 검색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물어보면서 이젠 제법 용도에 맞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원우가 왜 물어 봤는지 이해가 돼서 씩 웃었다.


“그냥 맛낼 때 사용하실 거죠?”
“네.”


혼자 살면서 게다가 요리를 잘 못하는 편이면 조림이나 이런 건 하지 않을 거니까. 민규가 방금 산 간장과 똑같은 제품을 골라 건네주었다. 원우의 카트도 뭐가 많다. 혼자서 얼마나 고민을 하면서 샀을까. 고추장, 된장 이런 건 고민을 안 했으려나. 


“이거는 국이나 나물 무칠 때 쓰고요, 이거는 소스나 볶음이나 조림, 아 이건 조림 전용인데 사실 국에 쓸 거 아니면 맛은 거의 비슷해요.”
“아아.”


알겠다는 듯 움직이는 머리에 따라 차분하게 내려 앉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또 모르시는 거 있어요? 


“사실 요리를 거의 처음 시작해서 뭐가 맞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일 하시니까 밥 해먹기 힘드시죠?”
“네. 몇 년 동안 배달 음식만 먹었더니 건강도 안 좋아지는 거 같아서….”
“맞아요. 집에서 해 먹는 게 좋긴 하죠.”
“아무튼 감사합니다. 덕분에 간장은 이제 구분하게 됐네요.”


원우가 웃었다. 이렇게 웃으니까 제법 귀엽다. 얼굴에 반을 가리는 것 같은 동그란 안경이 올리며 민규가 건넨 간장 용기를 뚫어져라 쳐다 본다. 처음 봄을 데리고 이것저것 하던 때가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주말에 뵐게요. 민규의 인사에 원우도 꾸벅 허리를 굽힌다. 그리고 주방용품 코너로 사라지는 등을 바라봤다. 다 큰 어른인데 이상하게 걱정이 됐다. 주방용품 코너에서 도마나 칼을 앞에 두고 뭐가 좋을까 한참을 고민하지 않을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이만큼 솟았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이런 오지랖은 이제 부리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치, 봄아?”
“뭐가여!?”


그냥 한 말인데 참새처럼 짹짹거리며 묻는다. 이제는 정말 아이만 생각하고 싶어서 다른 것들은 저 멀리로 치우기로 했다. 그러다가 남는 게 없다고 친구들은 말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환하게 웃는 아이만 있으면 세상의 모든 걸 다 이룬 느낌이었으니까. 










“와, 진짜 많다.”


장바구니 가방을 가지고 오긴 했는데 거기에도 다 들어가지 않을 만큼 물건을 사버렸다. 다 필요한 것들이었지만 분명 집에서 정리를 하다 보면 아닌 것들도 끼어있겠지. 아빠, 나 과자아. 제 옆에 있던 장바구니 가방 안으로 손을 넣어 뒤진다. 아이고, 김 봄. 혹시라도 떨어지지 않게 봉지를 갈무리하던 민규가 탄식을 터트렸다. 


“아빠가 알아서 꺼내줄 건데.”
“빨리 먹고 싶단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차에 타면 바로 주기로 약속 했는데 지키지 않은 건 민규였으니까. 과자 포장지를 뜯어 입에 물려주고 다른 것들도 다 뜯어서 옆에 놔뒀다. 이거 다 먹으면 먹어요. 차 문을 닫고 얼른 운전석에 올라탔다. 이만큼 길게 나온 영수증에 적힌 품목들을 대충 눈으로 훑었다. 잘못 산 건 없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시동을 걸었다. 


“아빠.”
“네?”
“집에 가면 목욕할 거예요?”
“봄이는 오늘도 안될 거 같은데?”


백미러로 뒷좌석을 보니 아랫입술을 퉁 내밀고 있다. 아빠랑 목욕하고 시푼데…. 이럴 때보면 혼자서 아등바등 키운 게 보람이 있다. 


“주말에 병원 가서 의사 선생님한테 물어보자. 우리 봄이 목욕해도 되는지.”
“주사 맞으면 또 못하잖아!”
“에이, 아까 선생님이 주사 안 맞는다구 하셨잖아.”


봄을 달래며 주차장을 빠져 나와 오른쪽으로 커브를 틀자, 저 멀리 보이는 모습이 눈에 익숙하다. 전원우 선생님? 택시를 잡고 있는지 도로를 향해 손을 까닥까닥 하는데 잡히지가 않는다. 오늘 날도 추운데. 니트 하나에 코트를 입고서, 추운지 연신 손을 호호 녹이고 있었다. 


“…….”


어쩌지. 가는 방향이면 상관없는데. 오지랖을 부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게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앞으로 운전을 해나갔다. 김민규 그냥 지나가, 지나가, 지나가….


“선생님.”


결국엔 깜빡이를 켜고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찬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오늘 밤부터 엄청 추워진다고 하더니 진짠가 보네. 가까이서 보자 원우의 얼굴은 잔뜩 얼어있었다. 코 끝도 빨갛고. 


“네?”
“지금 택시 안 잡히지 않아요? 어디까지 가세요?”
“괜찮아요. 콜 택시 부르려고요.”
“그냥 타세요, 얼른요.”


저 얇은 몸으로 제일 큰 봉지가 두 개다. 그것도 꽉꽉 눌러 담아서. 망설이는 원우의 눈빛에 픽 웃어버렸다. 타세요. 한번 더 권하자 입술을 살짝 깨문다. 


“타세여, 선샌님!”


뒷자리에서 깜찍하게 소리를 지르는 봄이 목소리에 원우가 웃음을 터트린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조수석 문을 열고 제 옆에 내려 놨던 봉지를 들고 올라 탄다. 


“여기가 의외로 택시 잡기가 힘들더라구요.”
“그런 거 같아요.”
“어디까지 가세요?”
“저는….”


안 태웠으면 큰일날 뻔 했다. 원우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집으로 방향과 같았다. 신호에 걸린 틈에 옆을 슬쩍 보니 제 무릎에 큰 봉지 두 개를 다 올려 놓고 있느라 앞은 보일까 싶다. 이러면 사이드 미러도 안 보이니까,


“안에 깨지는 거 없죠, 계란이나 유리컵이나.”
“네.”
“그럼 뒤에 잠시 내려 놓을게요.”
“아, 제가 할게요.”


죄송해요, 의자에는 자리가 없어서. 이미 꽉 찬 민규네 물건이 자리를 잡고 있어 봉지는 바닥에 내려 놨다. 괜찮아요. 원우가 들고 있던 봉지도 먼저 들어 내려놨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꾸벅 하는 원우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차 없이 장보기 정말 힘든데.”
“네, 점검 보냈더니 좀 불편하네요. 그나저나 제가 폐 끼치는 거 같아서….”
“아녜요. 어차피 가는 방향이에요.”
“네에….”


오지랖. 민규는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일면식이 있는 사람이 저런 상황에 놓이면 그냥 가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상처 받은 것도 여러 번이라 그러지 말자는 게 신년 목표였는데 연말 즈음에 와서 깨진 게 어이가 없다. 선샌님, 이거 먹어요! 자기가 먹고 있던 과자를 건네는 봄을 향해 원우가 흐흐 웃는다. 고마워. 저런 걸 먹을까 싶은데 긴 팔을 뻗어 과자를 받아 먹는다. 맛있네, 봄아. 그랬더니 맛있지요! 하면서 제 입에도 하나 더 넣는다. 


“김 봄, 먹어요 아니고 드세요, 해야지.”
“드세여어~”


창 밖을 보면서 영혼 없이 민규의 말을 따라 하는 봄의 목소리에 원우가 웃음을 터트린다. 죄송해요, 애가 좀 장난꾸러기예요. 

원우의 행동 하나, 하나에 괜히 신경이 쓰인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그냥 뭐 하는지 궁금해진다. 왜 궁금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참 정적인 사람인 듯 했다. 조용히 안경을 올리고 볼을 긁고,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길고 얇은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춘다. 모든 게 다 조용해서 신기했다. 저와 봄은 모든 게 다 시끄러운데. 


“잘 자네.”


그새 봄은 잠에 들었다. 백미러를 힐끗 보며 말했더니 원우는 뒷좌석으로 몸을 돌려 확인한다. 그리고는 또 흐흐 웃고. 


“아이 좋아하시나 봐요.”
“네.”
“아, 소아과 선생님한테 너무 당연한 걸 물었나요?”
“아뇨, 안 그런 분들도 계시니까.”
“잘 봐주셔서 감사해요. 이 근처로 이사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좋은 병원 알게 된 것 같아서 기뻐요.”
“감사합니다.”


수줍게 웃느라 볼록 올라가는 광대가 귀엽다. 아 무슨 생각하는 거야. 따라서 올라가려는 입술을 딱 붙잡았다. 원우가 말했던 장소 근처에 왔더니 손가락으로 신호등을 가리킨다. 저기서 내려주시면 돼요. 차가 오지 않는 곳에 세우고 얼른 내려 뒷문을 열었다. 제가 할게요. 후다닥 달려온 원우는 한 발이 늦었다. 양 손에 원우의 물건을 들고 건네주는 민규 앞에서 연신 어쩔 줄 몰라 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니에요. 얼른 들어가세요.”
“네. 조심해서 가세요.”


인사를 하고 걸어가는 원우의 뒷모습을 보다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다시 돌아왔다. 운전을 하려다 말고 걸어가는 원우를 바라봤다. 낭창낭창한 몸으로 무거운 짐들을 들고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왜 이렇게 자꾸 신경이 쓰이지. 웃기네 정말. 가끔은 제 맘을 자신도 모를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아서 괴로웠다. 그냥 이것도 지나가겠구나, 하고 생각해야 하는 게 맘 편했다. 


가자.
아빠 김민규는 할 일이 많으니까, 얼른 집으로 가야 했다. 















병원 앞에 선 봄의 표정이 비장했다. 비장하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나이였지만 표정은 정말 그럴싸했다. 나름의 많은 용기가 필요했나 보다. 주사는 맞지 않을 거라 말했지만 솔직히 좀 못미더웠나 싶고. 주말의 소아과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아이들은 병원 한 구석에 있는 놀이방에서 블록 놀이를 하고 있었고, 몇몇 아이들은 부모의 품에 안겨 있었다. 봄, 가서 놀래? 아이들이 많은 놀이방을 보던 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앉을 자리가 없어 서 있는 민규의 손가락 하나를 고사리 손으로 잡아 온다. 따뜻한 온기에 웃음이 퍼졌다. 


“잘 가요.”


진료실 문이 열리면서 원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쏠린다. 아이와 부모가 나오느라 살짝 열린 틈으로 원우와 눈이 마주쳤다. 한없이 다정한 눈빛이 민규의 시선에 멎는다. 심장이 이상하게도 빠르게 뛰었다. 둘 중 그 누구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입 안이 바싹 말라왔다. 왜 이래 정말.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이렇게라도 내쉬지 않으면 숨쉬는 것도 까먹을 것만 같았다. 


“김 봄 어린이.”


진료실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겨우 진정시킨 가슴이 갑자기 또 펑, 하고 터져버릴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춘기의 소년도 아닌데 왜 이렇게 원우만 보면 감정이 제 감정이 아니게 되는지. 

문이 열리고 들어가자 턱까지 오는 니트를 입고 앉아 있던 원우가 환하게 웃는다. 하얗고 얇은 손을 얼굴 옆에 두고 흔들었다. 봄이 안녕. 그리고 민규와의 짧은 눈인사까지. 안녕하세요. 봄은 씩씩하게 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는데, 민규는 그러지도 못하고 옆에서 마른 침만 계속 삼켜댔다. 


“봄이 감기 많이 나았네요.”


키보드로 무언가를 입력하며 그런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무심한 눈빛이 너무 좋아서 한참을 바라봤다. 


“그럼 오늘부터 목욕해도 되나요?”


민규의 질문에 눈을 마주한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는다. 네, 이제 하셔도 돼요. 어떤 사람의 미소에 마음이 뛰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아니, 몇 년 만일까. 이제 생각도 나지 않는 감정이 원우 때문에 다시 생겨나는 게 신기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경멸도 솟아났다. 감정을 다 잡았다. 


“오늘은 주사 안 맞고 약 드릴 테니까, 그거 다 먹이시면 될 거 같아요.”


따뜻한 저 눈빛에 다잡은 감정이 다시 무너진다. 
















스스로가 웃기다고 생각했다. 겨우 몇 번 봤을 뿐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가고 눈길이 한번 더 가는 게. 이건 다 쓸데없이 감정 소비를 하고, 오지랖이 넓은 자신 때문이라고 하면서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마음이라는 게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이러는 걸까. 


“…아.”


민규는 작게 탄식했다. 눈 앞에 원우가 서 있었다. 잘 못 본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면 다가와 인사를 하는 원우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가 코 끝을 간지럽게 하고 있었으니까. 그냥 모른 척 지나가지. 이제는 원우를 탓하고 있었다. 사실, 이제 병원에 가지 않으면 볼 일이 없으니 이 감정도 정리가 되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자꾸 만나게 되고, 눈에 보이고, 그러면….


“봄이는 좀 괜찮나요?”
“네. 기침도 안 하고 콧물도 안 나요.”
“다행이네요. 지난 번에는 너무 감사했어요.”


그러면서 민규 손에 들린 카페의 메뉴판을 가리킨다. 제가 사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그러지 않으면 제 마음이 불편할 거 같아서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렇게 하게 해주세요.”


진지한 눈빛에 허락을 구하는 말투. 더 이상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대답이 쉽게 나오지가 않는다. 어떡하지. 민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시려던 따뜻한 라떼가 점원의 손을 거쳐 원우에게로, 그리고 원우의 손에서 민규에게 건네졌다. 잔을 주고 받을 때 잠시 스친 손길에 또 심장이 눈치 없이 뛴다. 


“근데 저희 되게 많이 마주치네요.”


쑥스럽게 이야기 하며 웃는 원우의 얼굴을 계속 보고 싶었다. 잠시만요. 뒤에서 갑자기 몰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한발 짝 비켜주느라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졌다. 놀라 어깨를 움츠리는 모습마저 귀여웠다. 정말 미치겠네.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민규와 시선을 마주치다 어색한 듯, 창 밖을 쳐다 본다. 동그란 뒤통수와 날카로운 얼굴의 옆 선이 조화로웠다. 니트의 소매가 손등 반을 덮고 있었다.


“…….”


다시 눈이 마주쳤다. 아……. 계속 쳐다보고 있던 민규의 시선을 느꼈는지 원우의 눈빛이 흔들린다. 죄송해요. 의미 없는 사과를 하고 이번엔 민규가 고개를 돌렸다. 



감정에 대한 오해가 자꾸 쌓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