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골목길…
높은 언덕을 오르느라 어깨에서 흘러내린 가방 끈을 끌어올리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몇 발자국을 옮겼을까 아려오는 발바닥과 교과서의 무게에 짓눌린 어깨가 아파옴에 다시 걸음을 멈춰세워 굳어있던 허리를 폈다.
조용한 골목길에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주먹을 쥐어 허리를 두어 번 때리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서울에서는 별을 마주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더니… 그렇지만도 않은 듯 검게 물든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이 이따금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별을 담던 시선을 옮겨 조금은 멀리 떨어진 주택의 옥상을 바라봤다.
청녹색 테이프가 덕지 덕지 붙은 현관의 창을 통해 환한 빛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에 굼뜨게 움직이던 걸음을 빨리해 언덕을 올랐다.
“오늘은 빨리 왔네?”
“응”
부엌과 거실… 그리고 안방의 경계가 모호한 작은 옥탑방의 한 공간에 펼쳐진 작은 밥상 위에는 서로의 앞에 놓여진 작은 밥그릇과 국그릇, 그리고 콩나물과 계란프라이가 고작이었다.
소박한 밥상을 사이에 두고, 아무런 말 없이 손을 움직이길 수 차례… 정적을 참지 못해 건넨 물음에 묵묵히 젓가락을 움직이던 이의 짧은 대꾸가 돌아왔다.
또 다시 이어지는 정적 속에서 의무적으로 이어지던 움직임이 한참을 망설이다 꺼낸 그 음성에 거둬지고, 고개를 들자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이가 입술을 움찔이다 조심스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원우야”
“…”
“전원우”
“듣고있어”
“오늘 네 담임 선생님한테 연락 받았어”
“…”
“너 학교 안 나간지 삼일이나 됐다며”
“…”
“누나는 분명 아침마다 네가 제 시간에 집을 나서길래 당연히 학교에 가는 줄 알고 있었어. 너 대체… 아침 마다 그 시간에 학교 말고 어디에 있었던 거야?”
“…”
“담임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네 성적이면 이름있는 좋은 대학들 무난히 갈 수 있는데 출석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이대로 버리기엔 아깝지 않냐고…
누나는 네가 한번도 성적표를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너 반에서 1등이라며… 조금만 더 하면 전교 1등도 가능하다고 선생님이…”
“그러면 뭐해”
“…”
“대학 갈 것도 아닌데”
“… 갈 것도 아니라니 당연히 대학”
“어떻게? 내가 어떻게 대학을 가? 어떻게 보내 줄 건데?”
“…”
“하루 하루 살기도 빠듯한 이 상황에 무슨 대학이야. 그 시간에 차라리 알바를 하는게”
“원우야 넌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누나가 늘 말했잖아. 다른 건 다 누나가 알아서 한다고”
“그럼 공부만 할 수 있게 해주던지… 누나. 나 현실 파악 못 할 정도로 어린 애 아냐”
“…”
“내 주제도 잘 알고 있고, 처음부터 내 손에 쥘 수 없는 것에 욕심 부리고 싶은 생각도 없어”
“… 원우야… 어디 가려고 밖에 추워…”
“잠깐 나갔다올게… 그러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원우야”
등 뒤로 들려오는 이의 목소리도… 닫힌 현관문 사이로 새어나오는 울음 소리도… 모두 외면한 채… 그 모든 것들에게서 등을 돌려
지금 제가 처한 상황에서 도망치듯 그렇게 걸음을 옮겨 그 자리를 벗어났다.
삐걱 삐걱
녹이 슬어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시끄러운 소음을 토해내는 그네 위에 앉아 의미없이 발을 구르기를 몇 번,
깊은 한숨과 함께 떨궈낸 고개에 낡아 빠진 운동화가 눈에 들어오고, 부러 화풀이를 하듯 모래 바닥을 차냈다.
그녀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자신을 위해 그 누구보며 애쓰며, 그녀가 스스로를 희생 시키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면서…
순간의 울컥함을 참지 못하고 생각없이 뱉어버린,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을 가시와도 같은 말들…
“언제까지 여기있을거야?”
“??”
“날 춥다 원우야”
타박 타박 들려 온 발소리와 함께 숙인 고개의 시야 사이로 익숙한 운동화가 자리했다.
천천히 올린 고개에 어색하게 웃고있는 이의 얼굴과 마주하게 되고, 시야에 맞춰 쭈구려 앉은 이가 앓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밀었다.
“집에 가자”
불이 꺼진 방 안,
몇 번을 괜찮다 거부해도 기어이 두터운 이불을 제게 덮어준 이가 얇디 얇은 이불을 덮고선 제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누웠다.
서로의 숨 소리만을 가만히 듣고있었을까 애써 태연한 척 제 목소리를 다듬은 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이제 야간 조 끝나서 전 보다는 일찍 끝날거야. 그래도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
“집에 있을래 아니면 끝나고 병원으로 올래?”
“… 병원으로 갈게”
“그래. 아 그리고 오늘. 그 학생 깨어났다?”
“…”
“이번에는 좀 위험 했다는데 다행이지?”
“그러게”
“그 애도 열 아홉이면 한창 하고싶은게 많을 텐데…”
“누나”
“응?”
“누나 좋다던 그 의사 선생님하고 만날 생각 없어?”
“야!!! 무슨 소리야… 내가 어떻게… 안돼”
“왜?”
“…그야 최쌤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니까…”
“…”
“이상한 소리말고, 잠이나 자!! 내일은 학교 꼭 가고”
“…”
“대답!!”
“응”
“아 피곤하다. 누나 먼저 잘게”
“응”
“잘자 원우야”
“….응”
“…”
“…”
“누나”
“…”
“누나”
“…”
“미안해”
“…”
“누나가 그런 말 들으면 어떤 기분일지 누구보다 잘 아는데… 내 그 말에 누나가 분명히 울 거라는 거… 나보다 훨씬 더 아파할 거라는거 내가 잘 아는데 그랬어”
“...”
“근데 누나”
“…”
“누나도 알잖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잖아”
“…”
“그게 다 사실이라는 거. 우리 형편이 내가 대학을 갈 상황이 아닌 것도, 누나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대학을 보내줄 수는 없다는 것도 다 알고 있잖아”
“…”
“나 욕심 부릴 생각 없어. 원하지도 않아. 그러니까… 나 때문에 누나가 원하고 있는 걸… 모르는 체 하면서 포기하지마. 제발”
소리없이 흐느끼는 이를 모른 척 등을 돌리며 돌아누웠다.
차디찬 바닥을 타고 올라 온 냉기가 온 몸을 파고 들어와 발 끝 부터 머리 끝까지 꽁꽁 얼려갔다.
두터운 이불이 제 기능을 잃고 함께 식어갔다.
몸을 둥그렇게 말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온기를 찾으려 방황하는 시야가 멈춘 곳에는 불투명한 창의 유리를 통해 넘어오는 옅은 달빛이 자리해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그 것을 바라보다 두 눈을 감았다.
그 작은 행동 하나에 옅게 비춰지던 빛이 모습을 감추고, 남은 것은 까맣게 물든 어둠이었다.
내게 남은 것은 그 어둠 하나였다.
내게 주어진 빛 이라는 듯 보여지던 것은 그저 허상에 불과 하다는 듯 쉽게 모습을 감추고, 남은 것은 어둠 뿐…
마치 지금의 나를 보여주는 듯한 어둠.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 없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가난이라는 늪의 어둠.
모든 상황들이 가리키고 있었다.
너는 저 어둠과 같다고… 그러니 절대 이 어둠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
온 몸이 축축 늘어지며 바닥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 속,
부스럭 거리는 소음에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려 두어번 깜빡이자 흐릿하던 시야가 원래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그와 함께 질리도록 보아 온 새하얀 천장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젠장…
자세히 귀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말을 뱉어낸 본인 마저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내뱉어진 그 음성에 부스럭 거리던 소리가 일순간 사라지고,
천장을 바라보고있는 시야에 그와 같은 색의 새하얀 옷을 입은 이가 침범해왔다.
“일어났네? 좋은 아침”
“… 아침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응 맞아. 지금 오후 세시야”
“…오래도 잤네”
“네가 생각해도 그렇긴 하지? 진짜 잘 자더라. 너”
“잘 자는게 아니라 잘 재웠겠죠”
“…”
“허튼 짓 못하게 엄청 독한 걸로”
“…”
“그래서 지금 손 하나도 꼼짝 못 하겠는데 이 정도면 그 사람이 원하는대로 된 건가?”
“…”
“손을 들 수가 없는데 긋는 건 당연히 안되겠지. 그쵸 아줌마?”
“… 야 나 아줌마 아니라니까!!!….”
“됐고, 이거 언제 풀려요?”
“뭐가”
“약 언제 풀리냐구요. 어차피 약 기운 풀려도 이렇게 손에 붕대 칭칭 감아놔서 아무 것도 못해 나”
“저녁 전에는 풀릴 거야”
“그리고 또 몇 분 안 지나서 재우겠지”
“…너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뭐 죽지 말라는 말? 제발 살라는 말?”
“너 기억하고있긴 하구나 그 말”
“기억은 하지. 들어 줄 생각은 없지만”
“… 그거 말고, 네가… 버텨낸다면 아무도 모르는 비밀 장소 알려주겠다는 말”
“… 그랬었나. 죽기 직전이라 기억 안 나는데”
“너 진짜 얄미운데 그래도 약속이니까 알려줄게”
“대체 뭔데”
“1123”
“뭐라는거야”
“병원 옥상 비밀 번호”
“???”
“매번 병실에 갖혀있기 답답하다며. 오늘 저녁 회진 8시야. 넌 그 전에 약 기운 풀릴 거고”
“…”
“네가 있는 이 곳은 VVIP 병실이라 CCTV도 없어. 간호사들도 호출로 움직이지”
“…”
“내가 봐줄 수 있는 시간은 삼십 분이야. 그러니까 그 정도만 놀고, 다시 와야 해. 알겠지?”
“간다고 안 했는데. 난 또 엄청 대단한 곳이라고”
“직접 가보면 알게 될 걸?”
“됐네요”
“어쭈? 내 비장의 카드를 무시한다 그거야?”
“아줌마 일 안해요? 이 간호사가 다른 환자들 방치하네”
“간다. 가!! 손 움직일 힘은 없고, 입 움직일 힘은 아주 넘치네!!!”
“… 아줌마”
“왜!!! 가라며!!!”
“그래서 비밀번호가 몇 번이라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름에 헉 헉 거리며 가쁜 숨을 입 밖으로 토해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빠르게 뛰는 심장에 손바닥으로 그 위를 누르며 숨을 고르기 위해 몇 번이고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내쉬는 일련의 행동을 반복했다.
비밀의 장소는 커녕 그 전에 죽겠네.
그토록 바라던 것이니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울며 저를 붙잡고 꼭 깨어나라며 제게 애원하던 이가… 다시 깨어난 저를 향해 기특하다는 듯 자랑스레 말해준 곳이니…
어느 덧, 잔잔한 파동으로 돌아 온 심장의 떨림이 손바닥을 따라 흐르고,
그에 멈춰섰던 걸음을 옮겨, 굳게 닫혀진 문의 자물쇠를 풀어냈다.
매일 질리도록 보았던 새하얀 천장과 온 몸 구석 구석 배어 빠지지 않을 것만 같던 지독한 약품 냄새가
두꺼운 철문을 열고 그 공간에 발을 들인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새까만 하늘과 지독한 약 냄새를 떨쳐내버린 시원하지 만은 않은 바람내음.
새까만 암흑이 순백의 것을 물들였다.
잔잔하게 파동 치던 심장의 떨림이 점차 크기를 키워가며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고통을 동반하는 파장이 아닌, 기분 좋은 떨림이 심장을 타고 퍼져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걸음을 따라 불어 온 바람이 머리를 흐트리며 지나 감에도 상관없다는 듯 옮기던 걸음이 옥상의 끝에 다달아 난간에 막히고서야 멈춰섰다.
그 밖으로 뻗어 낸 손을 따라 또 한번의 바람이 불었다.
손가락을 타고 올라 온 바람이 새하얀 병원복을 스치며 그 보다 더 새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진 손목을 드러나게 만들었다.
넋을 놓은 듯, 난간 밖으로 보여지는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이 그 손목을 향해 움직였다.
새하얀 붕대를 고정하고있는 반창고가 위태롭다.
작은 손 짓에도 뜯어 질 것 처럼 매우…
위태롭다.
차가운 옥상 바닥을 뒹굴던 반창고와 금새 새까맣게 물든 붕대가 바람을 타고 난간 밖으로 떨어져내렸다.
낙엽이 떨어지듯 바람을 따라 허공을 유영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바람은 계속해서 불어오고 있었고, 그에 의해 완연히 드러난 양 손목에는 사라지지 않을 흉터가 여럿 아프게 자리해있었다.
쉴 새 없이 웃음을 토해내던 얼굴이 이번엔 난간 밖으로 고개를 숙여 까마득한 아래를 바라봤다.
난간에 위태롭게 매달린 몸이 금방이라도 아래로 떨어질 듯 흔들렸다.
“거기서 떨어지면 죽어”
“…?”
“….”
“….”
난간에 위태로이 매달린 이의 시선과…
벽에 기대앉아 그를 지켜보던 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목격하겠지”
“…”
“삶을 붙잡기 위해 찾아 온 곳에서 삶을 놓아 버린 이의 모습을”
“…”
“아니면 그 모습에 제가 아는 이의 모습을 투영하여 볼지도 모르지”
“너 뭐야”
“그 쪽이 죽던 말던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자리 비켜 줄테니까 지금 당장은 죽지마”
“뭐?”
“그렇지 않으면, 꼭 당신 죽음에 내가 책임이 있는 것 같잖아”
“…”
“정말 다 나 때문인 것 같잖아”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갈색 빛 머리칼이 그 속에 숨기고 있던 이의 눈을 드러냈다.
난간에 매달린 저 보다 훨씬 위태로운 빛을 띄며 차게 식어있는 그 눈을…
-
타박 타박
정적에 휩싸인 복도를 가르고 퍼져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크게 되돌아왔다.
몇 번을 보아도 익숙해지지않는 새하얀 벽과 전등의 빛에 눈이 시려와 걷던 걸음을 멈춰 세우곤 느리게 두 눈을 감아냈다.
어둠이 이리 마음 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까…
그 따위의 허튼 생각을 하며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을까 쿠당탕 커다란 소음과 함께 누군가와 크게 부딪힌 몸이 바닥으로 그대로 떨어져 내렸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진 내가 놀라 크게 눈을 떠올린 곳에는 나와 함께 넘어진 새하얀 병원복을 입은 여자가 제 입을 두 손으로 틀어 막으며 연신 기침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울컥, 크게 터진 여자의 기침과 함께 여자의 손과, 새하얀 병원복, 빛이 바랜 내 교복의 와이셔츠에 검붉은 얼룩이 스며 들어가기 시작했다.
“!!!!”
“환자분!! 괜찮으세요? 정신차리세요!!!”
그 모습을 발견하고, 빠르게 달려 온 한 간호사 분을 시작으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밀려난 나는 여자가 들어간 병실의 문에서 멀어지기 위해 굳어버린 다리를 질질 끌며 뒤로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물러서던 몸이 차디찬 벽에 막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 열려진 병실의 문 너머로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토해내는 여자를 바라보다 시선을 내려 병실에서 복도까지 길게 이어진 검붉은 얼룩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대로 이어진 시선은 어느새 똑같은 얼룩에 물든 손과… 교복 셔츠에 닿았다.
시야에 가득 찬 새빨간 피를 바라보는 시야가 흐릿해지고, 순간 코 끝을 찌르듯 비릿한 피 냄새가 순식간에 온 공간을 감싸고 돌기 시작하려던 때...
“전원우? 원우야 너 괜찮아?”
“…”
“전원우 정신차려!!!”
“…아…”
“너 괜찮아?”
“…누나?”
“이게 대체 무슨…”
거울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을 몇 번 살펴 본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옷 가지들을 챙겨들고는 화장실을 나섰다.
그러자 안절 부절 못하는 얼굴로 화장실 앞을 방황하던 누나가 냉큼 내게 달려왔다.
“다 갈아 입었어?”
“응”
“병원이다보니 마땅히 줄 옷이 환자복 밖에 없어서”
“…괜찮아”
“옷은 이리줘. 세탁소에 최대한 빨리 해달라고 할게”
“응”
미안하다며 멋적게 웃어보이는 누나가 옷을 건네 받으려 손을 내밀었고, 그 손에 들고있던 옷을 전해주려던 내 시선의 끝에 새하얀 반창코가 붙은 누나의 손목이 걸렸다.
그리고 그런 내 시선을 눈치 챈 누나가 놀란 듯 내게서 손목을 숨기려다 건네 받으려던 옷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에 당황한 듯 빠르게 몸을 숙인 누나가 옷 가지를 집어 들기 시작했고, 그 뒷통수를 가만히 내려보던 나는 그런 누나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려냈다.
“… 어디에 있을거야?”
“… 옥상에서 책 읽다 올게”
“그럴래? … 날씨 좀 쌀쌀하니까 춥다 싶으면 바로 내려오고”
“…응”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말을 건네던 누나가 그럼 좀 이따 보자며 먼저 자리를 벗어 났고, 그 비어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 또한 금새 그 곳을 벗어났다.
-
“오늘 따라 되게 소란스럽네”
“…어?”
“정신도 없는 것 같고”
“…”
“뭐 남자친구한테 차였어요?”
“그런거 없거든?”
“하긴, 그런 거 같긴 했어요”
흐릿하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며, 선명하게 보여지는 병실 천장을 바라보다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불안하게 이어지는 행동들에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허나 돌아오는 반응 역시 평소와는 다름에 저 또한 기분이 내려앉는 듯 했다.
“병원에 무슨 일 있어요?”
“어? 뭐가?”
“평소보다 공기가 다른 것 같아서”
“똑같은데? 가습기도 멀쩡하고”
“분위기가 어수선한데”
“여기 방음 잘 돼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리”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
“…”
“환자 한 분이 좀 상황이 심각해져서 그래. 그래서 병실 전체가 좀 정신이 없어”
“그 쪽도?”
“응. 나도”
“그럼 다들 그 쪽 신경 쓰느라 바쁘겠네”
“응. 그래도 넌 예의주시하고 있으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차라리 잠을 자”
“하루 종일 자다가 지금 깨어난 사람한테 또 자라니 너무하네”
“맨날 심장 떨어지게 하는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심장은 그렇게 쉽게 안 떨어져요. 특히 아줌마 같이 건강한 사람 심장은”
“…”
“나같은 애 심장이나 떨어지지”
“…야 김민규”
“아 이상한 표정 짓지 말고, 그만 가요. 장난도 못 치겠네”
조용한 병실 안,
가만히 누워 바라보고있던 새하얀 천장 위로 흐릿한 인영 하나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맡아 본 시원한 바람 냄새와 함께 흩날리던 머리카락. 그리고 마주했던 시선.
어째선지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떠오르는 인영의 얼굴에 짜증이나 미간을 찌푸리다 약 기운이 거의 다 빠져나간 몸을 일으켜세웠다.
다시 한번 마주친다면, 원인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움직인 다리가, 병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은 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 앞에 보여지는 광경도 그 때와 같았다.
허나 그 것들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듯 나는 옥상을 몇 번이고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이내 내가 찾는 이가 그 곳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닳은 나는 왠지 모를 허탈함에 다시 텅빈 옥상을 눈으로 쓸다
며칠 전 시선을 마주했던 그 순간, 상대가 자리했던 그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 것도 없는 바닥에 주저앉아 등 뒤에 자리한 벽에 등을 기대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과 벽에서 왠지 모를 온기가 스며있는 것만 같아 눈을 감고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을까
문이 열리는 작은 소음과 함께 옅은 발자국 소리가 조용한 공간에 퍼져갔고,
놀라 떠올린 눈에 멀리 떠올리지 않는 곳에… 자신에게 익숙한 장소로 걸음을 옮기려던 상대가 그대로 멈춰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 때와 같이 다시 시선이 마주쳤고, 조용히 뛰고있던 심장이 방금 전 계단을 오르던 그 순간처럼 조금씩 박동의 크기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마주치는 시선 속.
혹시라도 그 때 처럼 자리를 박차고 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차라리 내가 먼저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있던 찰나
멈춰있던 걸음을 다시 움직인 상대가 아무렇지 않은 듯, 내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들고있던 책을 펼쳐 들었다.
저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분명 모를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향한 시선에 흔들림이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차분하게 가라앉아있던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길게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 쪽도 환자였네”
“…”
“그 땐 사복이라서 몰랐는데”
“…”
“여길 알고있는 걸 보면, 그 쪽도 그 아줌마랑 친한 사인가? 아무한테나 안 알려주는 것처럼 말하더니 여기 저기 다 말해줬네”
“…”
“아니면 병원에서 좀 오래 있었거나? 뭐 나 처럼 심장이 제 기능을 못 하는 걸 수도 있겠네”
“…”
“이 병원 그 거 전문이라던데”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난 그 쪽이랑 같은 환자 아닌데”
“다들 그렇게 말하지. 난 환자 아니라고”
“그럼 그 쪽도 환자 아니겠네”
“아니. 난 환잔데? 나 곧 죽어”
“…”
떨떠름하게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이 빌어먹을 심장이 먼저 터지거나, 아니면 내 스스로 끝을 내거나.
어느 방법으로든 저는 죽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 시기를 조금 늦추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지루한 병원 생활을 견디게 해 줄 비장의 카드가 생긴 것 같으니까
마주치는 시선 속에서 불어 온 바람에 의해
책의 페이지가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