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밀크] Photograph Part.1
2021. 1. 10. 01:57





We keep this love in a photograph

We made these memories for ourselves

Where our eyes are never closing

Hearts are never broken

Times forever frozen still





헤어지고 8개월정도가 지났다. 그러게 말이야, 원우는 순영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하다 서로의 전 애인이 생각났다고 할까, 순영이 수화기 사이로 상자를 뒤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우도 덩달아 몇달 간을 봉인되어 있던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상자 안에는, 

무수히 많은 사진들과, 편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편지를 한 장 집어서 읽다 보니까 괜히 울렁거리곤 했다. 

“…순영아.”

응?

“괜히 열었다, 어떡하지.”

원우는 상자 안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싱숭생숭, 감정이 괜히 소용돌이 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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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1 첫 만남

내가 김민규를 처음 만났던 때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민규가 1학년이었을 때였다. 무슨 오기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이과를 와서는 과학 수학에 허덕이고 있어서 매 쉬는 시간마다 질문하러 교과목 선생님을 찾아가곤 했었다. 근데 그 날, 교무실에서 꽤나 요란한 소리가 났었다. 

“아 쌤 아파요!”

목소리 진짜 우렁차다, 생각했다. 교무실에서 저러면 안 쪽팔리나, 괜히 큰 목소리때문에 내가 다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학교에서 누가 그니까 양아치 짓 하라고 했냐 이놈아! 학생주임 선생님도 목소리 진짜 크시구나….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려는 한 키 큰 남자애. 잠깐 그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눈이 마주쳤던 것 같다. 나와 달리 쌍꺼풀이 진한 눈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엄청난 분위기가 느껴지는 모습. 명찰 색을 보고는 나보다 어리다는 것도 알게 되었던 것 같고. 

질문을 끝내고 계단을 올라 교실로 다시 돌아가는데 손목이 붙잡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김민규는 진짜 저돌적으로, 불도저 같았다. 그 큰 손으로 내 손목을 잡고는 하는 말이, 

형 내 이름은 김민규에요. 까먹지 말아요.

그 두 마디를 듣고는 진짜 멍, 했던 것 같다. 18년 인생에서 저런 애도 처음 봤고, 저렇게 저돌적으로 들이대는 애도 처음이었고.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렇게 갑작스레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와서 손목을 잡는 행동은.

처음엔 그냥 단순히 장난인 줄 알았다. 근데 진짜 맨날 찾아올 줄은 몰랐지. 매 쉬는 시간마다 뒷문에 서있고 목이 빠져라 내 자리 쳐다보는데 어찌 그 시선을 못 느낄까. 문 앞에 서서 자기가 대형견인 것 마냥, 꼬리 대신에 손을 마구 흔드는 김민규를 보면 정신이 없다가도, 그 덩치에 맞지 않는 듯한 묘한 귀여움에 웃게 되었다. 매번 올라와서 자리를 차지하곤 주변을 맴돌면서,

형 점심 누구랑 먹어요? 나랑 같이 먹으면 안돼요? 

사소한 질문부터 시작해서,

형 진짜 눈 되게 예쁘다,

가끔은 이런 곤란한 주제들로 나를 당황시키기도 했다. 뭐가 예뻐, 타박하면 아니에요 진짜 예뻐요 초롱초롱 바라보고 있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하루가 끝날 때까지 김민규가 교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괜히 뭔가 이상하고 어색했다. 매번 오던 애가 오지 않아서 그러는 건가, 싶기도 했다.

왜 안 왔냐고 연락을 해볼까, 말까 무척 고민을 하다가 결국 연락을 해보았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 마냥 기분이 오묘했다. 

오늘 학교 안 왔어?

딩동-, 그러곤 머지 않아 김민규한테 답장이 왔다. 

저 오늘 아파서 학교 못갔어요ㅠㅠ형 나 보고싶었구나?

진짜 웃기는 애네, 하면서도 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무슨 일 있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계속 김민규 걱정을 했었다. 그래도 연락으로 왜 안 왔는지 사유도 들으니까 괜히 긴장같은 것들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많이 아픈 건 아니고, 가벼운 감기라고 걱정하지 말라는 이어서 온 문자에 괜히 낯간지러웠다. 

얼굴을 책상에 묻었다. 괜히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사실 살가운 성격이 되지 못했다. 친한 친구가 아파도 이렇게 문자 보낸 적이 정말 드물었다. 그래서일까, 가방을 챙기곤 전화를 걸었다.

아는 후배 하나 붙잡고 김민규 집 주소를 읊으라고 했다. 아프다고 하니까 걱정도 되고, 또 매번 오던 애가 안 오니까 어색하고 낯설기도 해서, 내 머릿속에는 김민규 집에 간다는 자체를 어떻게든 합리화 하고 싶었나 보다. 김민규 집 문 앞에서 계속 서성거렸다.

아니 내가 너네 집에 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라는 뻔한 이유부터 시작해서

그냥 걱정 되어서 한 번 와봤어, 라는 돌직구까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손톱을 깨물었다. 초인종 눌러야 하는데 어떡하지, 뭐라 말해야 하지, 계속 고민하고 있던 찰나, 도어락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열리는 문에 이마를 박았다.

…형?

그리고는 김민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마를 감싸고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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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김민규한테 손목이 붙잡혀서 집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잠깐 약이랑 간식거리 좀 주고 가려고 들린 거였는데, 어떡하지. 앉아있다 가라는 김민규 말에 또 혹해서 그냥 들어오게 되었다. 보통은 대화를 할 때 김민규가 일방적으로 말을 하고, 자신은 간략하게 대답만 해주는 그런 식이었는데, 지금은 정말 고요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저 앉아서 내 발끝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김민규가 앞에 마주보고 앉았다.

“걱정 되어서 왔어요?” 밝게 웃으면서 물어보는데 괜히 얼굴에 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손이 머리에 닿고 쓰다듬어주는데, 괜히 홧홧해지는 기분. 주려던 것을 주고 내일 봐, 라는 말 한마디를 하고는 바로 나와버렸다. 

“아 더워….”

어쩌면 이 사건 이후로 조금은 김민규랑 더 가까워 졌는지도 모르겠다. 쟤는 뭐 저렇게 뚫어지게 쳐다보고 그러냐.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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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상념에 잠기기도 하였다. 전 애인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더군다나 그 첫 애인과 모든 것의 처음을 공유했다면. 첫 뽀뽀, 첫 키스, 첫 섹스까지 다. 민규는 동기 석민과 함께 공강시간을 멍하니 흘려 보내고 있었다. 사실 대학 들어오기 전에 원우 형이랑 깨졌고, 대학 와서 좋아하는 사람도 생겨보고 그랬지만, 가끔씩 생각나는 원우의 잔상들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결국 생각의 끝은 전원우였다.

입학하고 첫 학기가 지나고, 약간 모든 것에 체념한 듯한 자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연애, 학점, 모든 것들에 신경을 쓰기가 싫었다. 분명 연애가 하기 귀찮은 건 맞았다. 하지만 원우 형이 가끔씩 생각날 때 마다 참 언행불일치구나, 싶었다. 

“근데 연애는 결국 돌고 돌아서 첫 연애가 제일 좋다고는 하더라,” 석민이 말했다. 그건 맞아, 민규는 수긍했다. 연애를 해보려고 해도, 계속 잔상에 남곤 하니까. 원우 형이 자신에게 어떻게 해줬는지, 그런 것들이 꽤나 영향을 미치곤 했다. 연애를 해보려고 해도 상대방에게서 원우 형의 모습을 찾곤 했다.

싱숭생숭하지 너, 석민이 민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민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애 좀 해보려고 소개를 받았어도, 설렘은 잠시, 사라지고 결국엔 과거에 연연하는 자신만 남아있었다. 그렇다고 지금도 원우 형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글쎄, 사실은 잘 모르겠다. 다만 계속 생각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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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2 축제

내가 원우 형한테 불도저처럼 다가가 인사를 하고, 하루하루 같이 등, 하교 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몇달 째 였다. 여전히 나는 형에게 치댔고, 형은 귀찮음을 온 몸으로 표현하다가도 결국은 다 받아주고 있고. 형은 이미 내 일상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괜히 형이 없으면 왠지 모르게 빈 자리를 크게 느끼곤 했다. 

어느 새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학교에서 여름 방학 전에 축제를 하겠다고 공지를 이미 올린 상태였다. 축제에 딱히 큰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형과 추억 한가지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형을 꼬드기기 시작했다. 2학년까지는 축제 즐겨도 되잖아요, 형. 너무 공부만 하는 것보다는 조금은 쉬어주는 것도 필요할 것 같은데. 아 뭐 그런걸…. 귀찮아, 라고 하던 형도 결국은 넘어가고 말았다.

축제 당일 학교는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다양한 부스들이 세워져 있었다. 간식거리를 형 입에 물려주면 형은 잘 먹곤 하였다. 간식거리 말고 밥 좀 잘 먹었으면 좋겠는데, 괜히 입에서 걱정이 맴돌았다. 안 그래도 요즘 공부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 것 같은데. 형은 살짝 더 말라가는 것만 같았다. 

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진 부스. 폴라로이드로 사진을 찍어준다고, 나는 혹했다. 사진 부스는 친한 친구가 가입해 있는 동아리에서 주관하고 있었다. 와서 사진 찍고 가, 친구의 한 마디에 형을 바라보며 물었다.

“형 사진 찍을까요?” 그냥 추억으로 남기기도 괜찮은 것 같아서요. 형이 고민하는 눈치였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손을 붙잡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갖가지 소품들이 있었다. 소품 이용해서 사진 찍어도 돼, 친구의 말을 듣고는 머리띠 위주로 바라보았다. 토끼 귀, 고양이 귀, 다양한 동물 머리띠가 있었다. 형이랑 제일 잘 어울리는게 뭘까, 고민하다가 토끼 귀 머리띠가 눈에 띄었다. 머리띠를 뽑아 형 머리 위에 조용히 씌워주었다. 아 귀여워, 형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뭐야, 나 머리띠 하라고?그럼 너도 써, 이러면서 기린 머리띠를 씌워주는 형. 그렇게 둘이 나란히 섰다. 

웃으세요, 하나 둘 ,셋. 그렇게 또 하나의 추억거리가 쌓여갔다.

친구에게 사진을 받으니 사진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형이 빨랐다. 사진을 받아 자기 지갑에 쏙 끼워 넣고는 나 있으니까 내가 사진 갖는다?내 꺼야, 시전하는 형. 나도 갖고 싶었는데!내 꺼야 저리가. 

사진도 찍고, 마지막엔 공연을 보려다가 지쳐 보이는 원우 형 모습에 손을 꼭 잡고 빈 교실로 들어갔다. 살짝 더워지는 여름이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형은 지친 듯 책상에 앉았다. 양아치네, 의자에 안 앉고. 괜히 놀리고 싶었다. 그러자 형이 고개를 홱 돌려 째려보았다. 그 모습에 또 웃음이 나서 그냥 원우 형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개 취급 하지마…. 말 끝을 흐리는 원우 형. 그리고,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보여서 손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둘 다 멍했던 것 같다. 순간 나도 넋을 놓고 형도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아, 미쳤다. 속에서 나비가 날아다니는 듯한 기분에 세상이 빙 돌았다. 

미안해요 형. 그냥 버릇이 나왔어요. 재빠르게 형에게 사과했다. 형도 눈빛을 수습하고는 괜찮다고 말해왔다. 이 일로 혹시라도 어색해지면 어떡하지, 란 생각이 머리에서 계속 맴돌았다. 

집에 가던 길, 원우 형이 돌아서선 말했다. 

괜찮아, 진짜.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민규야, 그냥 평소처럼 해. 

그리곤 그냥 형에게 잘 자라고 폭 안아주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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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한테 연락해 보는 건, “ 원우의 말도 끝나기 전에 순영이 말했다. 정신차려, 끝났어 이미. 김민규가 붙잡아봤고 그때 너 어떻게 했어. 귀찮다고, 너가 다시 붙일 수 있는 기회 알아서 날려 버리곤 무슨 정신으로 너가 연락을 다시 해봐. 순영이 타박했다. 아.

맞아 내가 걷어 찼었지. 수화기 사이로 원우의 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그 미련 남는 것들 다 버려. 순영이 말했다. 어차피 기회는, 물 건너 갔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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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석민. 원우 형한테 연락 해볼까?

민규야 솔직히 말해도 되냐? 

응. 

아니 하지마. 결과가 너무 뻔히 보여. 

석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그건 맞지…. 끝말을 흐렸다. 헤어지고도 본인이 잡았고, 결국 그 잡힌 후에도 미지근한 형의 반응들에 지쳐 나가 떨어진 건 자신이었다. 차마 헤어지고 나서의 과정을 석민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아마 이야기를 했다면, 자존심도 없이 무슨 짓이야 이런 반응이 나올 것 같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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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3 밤길은 위험하니까.

시간이 흘러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그 중요하다는 6월 모의평가 날이 다가왔다. 예나 다름없이 등교, 하교는 민규랑 꾸준히 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6월 모의평가가 진짜 중요하다고 계속 그래서 괜히 더 긴장이 되었다. 민규가 옆에서 뭐라 해도 잘 들리지가 않았다. 긴장하면 더 안좋은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자 내가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는지 민규가 잠깐 걸음을 멈추고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곤 자신의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 모의고사 보는 날이라서. 볼을 손으로 짝 쳤다. 정신 차려야지, 옆에 있는 사람한테 무슨 매너 없는 행동일까, 생각했다. 그러자 민규는 손을 머리 위에 조심스레 올리며 쓰다듬어 주었다. 잘 할거에요, 형. 우리 형 공부 잘하는 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그리고는 해사하게 웃었다. 웃는 건 되게 예쁘네, 생각했다. 또 얼굴에 열 오를까 고개를 팩 돌리고는 민규의 손에서 벗어났다. 같이 가요 형, 뒤에서 민규가 소리지르며 쫄래쫄래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교실 안에는 숨막히는 적막감이 맴돌았다. 다들 고등학교 3학년 중에서도 중요하다는 6월 모의평가 날이라서 그런지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괜히 억눌린 분위기 때문에 더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넥타이를 조용히 끌렀다. 숨막혀, 그 순간 교실 문이 열리고는 왠 기다란 형체가 들어왔다.

김민규?

초콜릿 하나와 껌 하나를 건네며 민규가 말했다. 머리 써야할 때는 단 것도 좋다고 하고, 그리고 이건 졸릴 때 씹으라고. 

세심한 배려에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다. 고개를 숙이고는 고마워, 작게 말했다. 고마우면 모의고사 잘 보고 오늘 하루는 나랑 보내기. 민규가 다리를 접고는 눈을 맞췄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쁘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민규. 잘 봐요, 그리고는 유유히 교실을 나섰다. 

이렇게까지 들어오면, 어떡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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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의고사는 무난하게 봤다. 예상했던 것처럼 본거라면, 순탄하게 본거지, 뭐. 마지막 과목까지 채점을 꼼꼼히 하곤 교실을 나섰다. 그 순간, 누군가가 손목을 덥석 잡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손목을 잡은 장본인은 아니나 다를까, 민규였다. 

“나랑 아까 한 약속 지키러 갑시다 전원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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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은 꽤나 재미있게 보낸 것 같다. 게임도 하러 가고, 스트레스 풀겠다고 노래방도 가고. 공부할 때는 체력 떨어지면 안된다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시간이 시간인지라 집 가자, 민규의 손을 붙잡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헐 지금 형 내 손 잡은 거에요? 오두방정 떠는 민규를 보며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너도 맨날 내 손목 너 것인 것 마냥 잡고 그러면서. 

아니 그건. 

응 조용히 해.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민규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버젓이 내리지 않는 걸 보고는 물었다. 너 집 안 갈꺼야? 왜 안 내려. 형 집에 데려다 줄려고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민규를 보고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어린 아이도 아니고, 입술을 내밀며 투덜댔다. 

밤길 위험한 건 어린 아이만 해당되는게 아니에요, 형. 민규가 환하게 웃었다. 

집으로 올라가던 길, 거의 다 왔다고 민규에게 말했다. 나 혼자 갈 수 있어, 좀만 더 걸어가면 돼. 너도 집 가야지. 그러자 민규가 날 폭 안아왔다. 가기 싫네, 내 귀에 속삭였다. 오늘 모의고사 보고 노느라 고생했어요. 가서 푹 쉬어요, 민규 목소리가 귀에서 맴돌았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샤워하고 침대에 몸을 뉘인 상태에서 하루를 되새겨 보았다. 민규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식되고 그랬다. 이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하는 걸까, 그냥 괜히 마음이 간지럽곤 하였다. 

항상 있던 김민규가 없으면 어색하곤 했다. 그리고 그 세심한 배려들이 나는 좋았다. 이 감정이 좋아하는 걸까? 가끔씩 해오는 스킨십들도 놀랄 때도 있지만, 사실 누군가가 폭 안겨온다는 그 느낌이 오히려 나는 좋았다. 뭔가 부족했던 것들이, 채워지는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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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4 야간자율학습

고등학교 3학년 2학기가 되자 선생님들이 교실이 너무 시끄럽다면 자습실 가서 공부해도 된다고 하는 말씀들에 매 시간마다 자습실로 가곤 했다. 공부할 때 방해 받는게 싫어서 자리를 담요로 천막처럼 사방을 가리고 공부하곤 했다. 문제가 생각보다 잘 안 풀려서 멍 때리다가 다시 풀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확 안아오는 팔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민규였다. 

어디 갔나 했어요, 교실 갔는데 형도 없고 그래서. 

꼭 껴안고 놔주지 않는 민규에 원우는 한숨을 쉬었다. 

좀 놔줘…. 

싫어요 몇시간 동안 못 봤으니까 계속 이러고 있을래요. 

공부할건데…? 

이 상태로도 공부 할 수 있잖아요.

매 하루하루가 비슷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또, 조금씩 다르곤 했다. 작은 치이는 포인트들이 하루에 한 개씩은 존재하곤 했다. 어쩌면, 원우가 민규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게 되는 때는 10월 정도였던 것 같다. 점심을 먹고 학교 옥상에 올라가 이야기도 하면서, 시간을 때우곤 하였다. 그러다 아무 생각없이 원우가 민규에게 폭 안긴 적이 있었다. 민규도 순간 멍 때리다가 원우를 밀쳐냈었다. 

서로에 대한 스킨십이 꽤나 자유로웠지만, 되려 위의 상황처럼 아무 생각 없이 서로에게 스킨십을 했다가 놀라는 경우도 있었다. 

민규가 일이 없다면, 원우가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날 때 까지 원우를 기다려주곤 하였다. 그리고 매일같이 원우를 집에 데려다 주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근데 하루는 원우 집 앞 가로등에서 민규가 의미심장하게 원우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원우가 민규를 말갛게 바라보며 물어도 미동 조차 없던 민규, 그리고는 아니라며 뒤돌아서 집을 향해 걸어가는 민규를 보며 원우는 잔잔하던 일상에 누군가가, 돌을 던진 것 마냥 엄청난 파동이 일어날 것 같음을 느꼈다.

하루는 수시 발표가 나는 날이었다. 보통 잘 긴장하지 않던 원우도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무언가 날이 서 있는 듯한 분위기에 민규는 원우의 어깨를 조물조물 주물러주곤 했다. 그러다 원우의 이마에 손을 짚는 민규. 보통이면 손을 쳐냈을 원우인데 그저 내두었다. 민규는 원우 형이 심상치 않구나, 느끼고 원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원우는 민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수시 원서들 중에서 처음으로 발표 나는 날 이라서, 그래서 그래.” 아, 민규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원우의 뒤통수를 살살 쓸어주었다. 괜찮아요, 잘 될 거에요. 그 손길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는 원우였다. 근데 기분 나쁜 신경 쓰임이 아니라, 되게 잔잔한, 평화로운 손길.

점심을 먹고, 학교 도서관 안에 있는 컴퓨터 앞에 죽치고 앉아있었다. 원우가 멍하니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는 시간에 민규는 맞은 편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수험번호를 입력하고는 결과를 확인하는 원우였다. 책을 한 장, 두 장 넘겨가며 기다리고 있던 민규의 목에 원우의 팔이 감겼다. 민규가 고개를 뒤로 해서 원우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원우는 이미 민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요, 민규가 원우의 손을 붙잡고 학교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 서서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실 예상은 했어, 원우가 작게 속삭였다. 원체 너무 높은 학교이기도 했고, 많은 기대는 안했는데 그래도 첫 원서가 이렇게 떨어지니까 좀 허하긴 하네. 

어떻게 위로 해줘야 하나, 민규는 고민했다. 사실 말로 위로를 해주기엔, 뭔가 잘못할 것 같고, 그냥. 폭 안아주었다. 괜찮아요, 하면서 원우에게 속삭였다. 등을 토닥토닥해주며 괜찮다고 계속 말해주었다. 괜히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만 같아서 원우는 더 고개를 민규의 어깨에 파묻었다. 

막상 위로를 받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보니까, 원우는 미쳤구나, 내가. 손으로 자신의 볼을 쳤다. 미쳤어, 미쳤어. 제정신이 아닌게야, 나. 최대한 스킨십이나 그런 것들 먼저 하는 거 자제하려고 했는데 왜 그랬어 나. 근데 막상 민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보통은 자신이 먼저 스킨십을 하고, 형은 피하기 급급했다. 근데 이렇게 먼저 다가오고, 사실 순간 당황했다.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마음이, 커져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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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나는 민규가 다니고 있는 대학에 가본 적이 없었다. 민규는 내가 바쁠 때 학교로 와주곤 했다. 아마 민규가 내 학교로 처음 온 때가 민규 수능 끝나고 조금은 여유로울 때, 내가 기말고사 기간이라서 좀 많이 바쁠 때, 그 때 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조금은 민규에게 지쳐가던 때였던 것 같다. 민규에게 일일이 모든 것을 고하기 너무, 이렇게 말하면 안되지만, 번거롭고 귀찮았다. 그래서 민규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긴 이별의 과정을 거쳐갔고, 그 이후에도 한번도 다른 이유 때문에라도 민규의 학교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순영이 나에게 물었다.

야 ▽대학교 지금 가을 축제한다고 하는데 너 갈래?

사실 순영이는 내가 민규랑 사귀었다, 이 사실만 알 뿐 민규에 대한 정보를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그 학교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만, 지금 상황의 나는, 조금은 뭔가 마음이 찌르르 했다. 사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 마음 반,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 반. 설마 그 큰 학교에서 민규를 만날까,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그래, 같이 가자. 순영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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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는 큰 재미가 없었다. 1학기 축제는 학생회 였던 지라 주점도 준비하고, 주점도 하면서 꽤나 재미있게 보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동아리 주도라서 그런지, 크게 재미있다는 걸 모르겠다. 학교 밖으로 나갈까, 석민에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석민을 보고는 정문 쪽으로 발을 돌렸다. 셔틀 버스가 들어오고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다. 내리는 사람들을 보고는, 눈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몇 날 몇 일을 고민하게 한 사람이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원우 형?

형도 눈을 들어 날 보더니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그 찰나에 많은 감정들이 교차했다. 잘 지냈는지, 그리고 그렇게 가차없이 가고도 잘 지냈는지, 걱정과 증오가 함께 하는 그런 감정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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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5 너랑 나

원우의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여전히 민규는 수업을 도망가고 원우가 공부하고 있는 자습실로 오곤 했고, 원우는 민규의 시선을 받으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자습실 주변에는 쉴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공부도 잘 되지 않아서 민규와 원우는 나와서 간간히 대화를 하곤 했다. 원우의 무릎은 이미 민규가 베고 있었다. 멍하니 민규를 바라보다 민규의 앞머리를 헤치고 이마를 콕 찔렀다. 

넌 바보야.

원우가 민규를 보며 말했다.

내가 왜요?

민규가 일어나 원우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몰라. 넌 바보야.

아니 내가 왜요….

잘 생각해 봐. 난 공부하러 가야겠다.

민규를 밀어내며 원우는 다시 자습실로 향했다. 어리둥절한 민규였다. 도대체 뭔 소리지 저 형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괜히 말 한마디가 사람 잡는다고, 계속 머리에서 맴돌았다. 

괜한 말을 한 걸까, 원우는 머리를 짚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내뱉었던건지. 왈칵 왈칵 올라오는 민규에 대한 감정이 참 주체가 안되었다. 그래서 내 마음 너는 알까, 하는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데, 불 지른 기분이었다.  

집에 갈 때도 민규는 원우에게 물어봤다. 

내가 왜 바보에요? 

바보니까 바보지. 

아니 그니까 왜요…. 답답해 죽으려고 하는 민규였다. 

그러다 원우 집에 거의 다 오자 민규가 원우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말해줄 때 까지 안 놔줄래요.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고 난 간다, 바로 민규의 손을 뿌리치고 집으로 달려가는 원우였다. 허, 민규는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여우네, 전원우.

사실 뭔가 예사롭지는 않았다. 가끔씩 원우가 자신에게 보이는 행동들을 잘 생각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이 형이 날 좋아하나, 그러다가도 에이 설마, 하면서 생각들을 지우곤 했다. …설마 진짜 그것 때문에 바보라고 한 건가?

사실 처음 본 순간부터, 자신이 1학년 일 때부터 이미 원우 형이 좋았다. 처음에는 외모가 자신의 이상형이라서 좋아했었다. 하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알아가면서, 형에게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뭔가 무심해 보이면서도,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 다 챙겨주는 그런 스타일. 그런 성격에 또 한 번 반했던 것 같다. 형이 좋았다. 형이 가끔씩 보이는 그 미소들, 그리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 모습들을 자신만 보고싶었다. 또 힘들 때는 자신이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었다.

민규는, 원우를 좋아했다. 예전부터, 짝사랑 해왔다. 그게 결론이었다. 

밤을 꼴딱 새웠다. 민규의 안색이 밝지는 않았다. 잠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민규는 양치를 하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짜 못생겼다…. 아침에 학교를 가면서도 멍 때리며 민규와 원우는 서로 한 마디도 없었다. 원우가 교실로 들어갈 때쯤 민규에게 말했다.

“교실 들어가서 좀 자. 안색 별로 안좋다.”

형 때문에 그래요…. 차마 말을 삼켰다. 민규는 그저 손으로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교실로 향했다. 원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러지 애가, 매번 갓 잡은 고등어 마냥 싱싱해서 나한테 매달리고 그랬던 애인데. 오늘은 영 기운이 없어 보이네. 짐을 챙겨서 원우는 자습실로 다시 향했다.

그 날 점심시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일은 6교시에 터졌다. 수업을 가볍게 넘기고 민규가 원우가 있는 자습실로 왔다. 원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하는 말.

형, 이야기 좀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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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지냈어? 원우가 조심스럽게 민규를 보며 말했다. 어쩐 일이에요, 민규는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아차, 민규는 생각했다. 이렇게 날카롭게 말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원우는 시선을 앞에 있는 잔에 두었다. 따뜻한 라떼가 김을 내며 식어가고 있었다. 

형, 나는, 그 태도때문에 지쳐서 놓은 것 뿐이에요.

우리가 다시 재결합한다고 해도, 글쎄요. 

저도, 이제는 그만큼 바빠졌고요. 이제 내가 그 때처럼 형 모든 것들에 신경 쓸 만큼 한가롭지는 않아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분명 석민과 이야기할 때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되려 원우 형한테 연락 해볼까, 그리워 하는 마음들이 좀 더 많았는데. 민규는 말하면서도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원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 얘는, 정말 마음 싹 접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민규가 한 마디를 남기고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다, 마음 약해지면 안된다 김민규. 일어나 어서. 자신을 재촉하며 민규가 의자를 넣고 떠나려는 순간, 원우의 말이 들려왔다.

민규야.

내 말 좀, 들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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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6 Happily Ever After

이야기 좀 해요, 라는 민규의 말에 원우는 나왔다.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 자주 올라가다 보니까 민규와 원우는 그 곳에 의자 두 개를 가져다 두었다. 그래서 가끔 앉아서 이야기도 하고, 서서 바람도 쐬고, 그러곤 했다. 민규는 원우를 의자에 앉히고는 물었다. 

도대체 내가 왜 바보인데요? 내가 아무리 고민해봐도, 짚이는 게 있긴 하지만 글쎄요, 과연 그거일까 싶어서요. 민규가 물었다. 

설마, 민규야. 아니지? 너가 짚인다는 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원우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뭔데, 이야기해봐 짚이는 것.” 원우는 신발 끝을 바라보며 말했다. 

순순히 말해 주기는 너무 어렵고, 가위바위보 해서 내가 지면 이야기 해 줄게요. 

그렇게 시작된 가위바위보, 몇 번을 무승부가 나오다가 결국,

아.

민규가 졌다.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어떡하지, 과연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괜히 했다가 모든 것들이 다 어긋나버리면 어떡하지. 민규는 잠깐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형, 좋아해요.

김민규가, 전원우를 좋아해요.

민규의 말을 듣고 원우의 눈이 흔들렸다. 아 세상에, 입을 손으로 가렸다. 원우가 일어나 옥상 반대편으로 향했다. 원우의 표정과 행동을 보고는 민규는 망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민규야.

나도 그래.

원우가 다가와 민규를 끌어안았다. 

수능 몇일 전에 할만한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계속 커지고, 숨길 수가 없는데 어떡해. 민규가 원우를 끌어안고는 말했다. 

진짜 많이 좋아해요, 형. 

나도, 전원우가 김민규를 좋아해.

그렇게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Photograph Part.1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