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수] awakening 上
2021. 2. 23. 00:08




땀에 젖은 얼굴을 본다. 아무렇게나 넘긴 앞머리 끝이 축축했다. 막 끝난 연습에 숨이 차는지 혀를 살짝 내밀고 숨을 고른다. 꼭 강아지 같다. 그 와중에도 얼굴은 잔뜩 찌푸린 채였다. 집중할 때마다 민규는 표정이 구겨진다. 오늘도 온 얼굴로 나 집중하고 있어요, 하고 있었다. 원우는 제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아린 허벅지를 문지르며 속으로 비명을 참았다. 잠깐 쉬었다 하자는 말에 활짝 웃은 민규의 덧니가 반짝인다. 어떡하지. 다시 허벅지를 꼬집었다. 어떡해. 너무 귀여워...


김민규는 귀엽다. 사실 멋있다는 표현에 더 근접했지만 적어도 원우에게 그랬다. 귀엽다. 그것도 아주 많이. 솥뚜껑 같은 손도 그렇고 그 손으로 꼼지락거리며 턱턱 만들어내는 것도 그렇고 통통한 입술도 그렇고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겁이 많은 것도 그렇고. 의도치 않은 행동 하나하나가 다 귀엽기만 하다. 여기서 승철 같은 사람들은 거의 2m에 육박하는 남자애가 어디가 그렇게 귀엽냐고 따질 수도 있는데 사람은 표면 말고 내면이 중요하다. 이건 김민규 한정이 아니라 관계 모두에 적용되는 말이니 참고해도 좋고.


물론 조금 유별나다는 건 인정하지만 내가 그렇다는데 어쩔 거야. 승철은 콩깍지가 쓰인 거라고 했지만 원우는 인정할 수 없었다. 콩깍지는 못난 걸 보면서 귀엽다고 할 때나 쓰는 말이고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면서 귀엽다고 하는 걸 콩깍지 쓰였다고 하지 않으니까.


이거 봐. 자는 모습 개 귀엽지. 뚝뚝 떨어지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 닦으며 물을 마시고 있는 승철의 어깨를 툭 쳤다. 그 손길에 뒤를 돌아본 승철이 원우가 내미는 화면에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런 거 너나 보라고. 승철이 휴대폰을 툭 밀고 벽에 기대앉았다. 그러곤 더 이상 말 걸지 말라는 듯 귀에 이어폰을 쑤셔 넣는다. 안 좋은 반응에도 원우는 별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사진 보느라 바빴다. 몸을 한껏 구긴 채 소파에 앉아 인상을 팍 쓰며 자고 있는 민규의 사진에 저절로 웃음이 났다. 최승철은 바보야. 이걸 보여줘도 안 보다니.


자신과의 대화를 차단한 승철을 뒤로 하고 원우는 구석에 앉아 휴대폰을 두드렸다. 그리고 사진첩의 민규 폴더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감상한다. 이건 밥 먹을 때 찍은 거고, 저건 음방 가는 차 안에서, 또 이건 대기실에서. 벌써 오늘 찍은 민규의 사진만 해도 수 십장이 넘었다. 그 중 대부분은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했지만 괜찮았다. 흐릿한 사진마저도 귀여웠으니까. 그리고 오늘은 자는 모습을 고화질로 건졌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오늘 컨디션 좋은 것 같다?”

“민규 사진 엄청 건졌거든.”

“김민규도 졸라 피곤하겠다. 매일같이 휴대폰 들이대는 형이랑 같이 살아서.”

“귀엽잖아, 민규.”

“저 커다란 애를 귀엽다고 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 같은데.”


히죽 웃고 있는 원우 옆에 순영이 앉았다. 너도 볼래? 별 반응도 없다. 그럼 혼자 보지 뭐. 그런 반응에 익숙해진 원우다. 그런 제 친구를 한심한 눈으로 보는 순영 또한 늘 반복되는 일상 중 하나다. 벌써 자신만의 세상에 빠진 원우를 보며 순영이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싫어하는 아침연습에 지적 받는 일 없이 잘 따라 오는 원우에 뭔 일인가 했더니. 그래도 그렇게 사진 찍는 거 민규한테 스트레스 안 받게 해라. 짐짓 리더 같은 소리를 하며 순영이 원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라는 신호였다. 순영의 손을 잡은 원우가 일어섰다. 쉬는 시간이 끝났다.


사람은 자신이 결여된 것에 강한 소유욕을 느낀다. 원우 또한 그랬다. 웃지 않으면 냉하기까지한 원우는 귀여운 것에 사족을 못 썼다. 작고 작은 것들. 그런 걸 보면 눈이 돌아갔다. 본성보다 이성을 우선시하는 성격도 귀여움 앞에서는 별 수를 못 썼다. 그래도 한정판 인형을 사다가 뮤비 일정까지 미룬 건 자신이 생각해도 좀 심하기는 했다. 불려가 된통 깨지면서도 제 손에 들어온 인형에 실실 웃다 몇 배로 까인 건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 후로 인형 구매 금지령을 당했다는 건 더더욱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귀여운 것 앞에서는 앞뒤 안 가리는 불도저가 되는 전원우한테 김민규는 돌진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형, 나 또 찍었지.”

“아니, 신경 쓰지 말고 연습해.”

“셔터음 다 들리는데 뭘 신경 쓰지 말래! 그만 좀 찍어.”


무음모드로 해놨다고 했는데 버튼을 누르자마자 찰칵, 하는 소리에 민규가 눈치 채고 말았다.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까 순영이 한 말이 생각났다. 권순영이 보면 휴대폰이고 뭐고 다 뺏을 텐데.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도 없었다. 안도하며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살짝 삐친 표정의 민규가 그만 좀 찍으라며 성화였다. 그 통통한 입술을 삐죽이는데 원우는 순간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려 손을 가져다대었다 멈추었다. 너무 귀엽잖아. 원우는 무음 모드를 안 해놓은 자신을 원망했다. 연습하는 뒷모습이 귀여워서 몰래 찍으려고 한 건데 소탐대실하고 말았다. 둘 다 얻었으면 좋았을 것을. 쩝, 입을 다시니 민규의 표정이 더 구겨진다. 형, 내 말 안 듣고 있지! 허리에 손을 올리며 화난 척 한다. 어떡해. 저러면 쫄 줄 아나봐. 더 귀여워...


“그 정도면 중증이다, 중증.”


혀를 끌끌 차며 정한이 둘 사이를 가로질러 지나간다. 형, 민규 얼굴 안 보이잖아! 버럭 소리 질렀더니 정한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이게 민규 앞에선 위아래도 없네. 싱긋 웃으며 말하는 정한에 아차 싶은 원우가 바로 눈을 휘어 접었다. 아이, 형. 아닌 거 알지? 은근슬쩍 손을 잡아오는 원우에 정한이 피식 웃었다.


“아, 형! 원우 형 보고 그만 좀 찍으라고 좀 해줘. 귀찮아 죽겠다니까.”

“원우가 내 말 들을 놈도 아니고. 어차피 맨날 팬들한테 찍히는 거 멤버 형한테 좀 찍히면 어떠냐?”

“팬들보다 더 많이 찍으니까 그렇지! 저번엔 나 씻고 있는데 문 벌컥 열고 카메라부터 들이댔다고!”


진짜 그랬어? 아무 말 없이 웃었다. 어휴. 정한이 한숨을 크게 쉬었다. 아니, 화장실 가려고 문 열었는데 민규가 씻고 있잖아. 그래서 다시 나가려다 민규 엉덩이가 너무... 아! 그만 말해! 뭘 또 부끄러워하고 그래. 형은 너의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걸? 아저씨 같은 소리 좀 하지마! 민규가 제 귀를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형 때문에 못 살아. 민규 없으면 형도 못 살아... 원우가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몰라, 둘이 알아서 해. 자기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손을 털며 정한이 자리를 피했다. 가지 말고 한 마디 하라니까? 붙잡는 민규의 손을 매몰차게 떼어낸 정한이 연습실 밖으로 사라졌다. 진짜 다들 너무해. 민규의 입술이 더 튀어 나왔다.


“민규야, 형이 사진 찍는 게 싫어...?”

“귀찮은데 맨날 딱 붙어서 그러니까 그렇지! 그리고 사람 몰래 찍는 거 그거 완전 나쁜 거거든?”

“그럼 너가 안 귀여우면 되잖아...”


귀여운 걸 어떡하라구... 허, 기가 차는지 민규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내가 형한테 몰래 사진 찍히는 게 다 내가 귀여운 탓이라는 거야? 자기가 말하고도 민망한 지 관자놀이를 긁었다. 응. 뭘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규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형, 나는 귀여운 게 아니라 잘생긴 거야.”

“그렇기도 한데 나한테는 그냥 귀여워. 강아지 같아.”

“나 사람인데?”


뭔 대화가 저래. 옆에서 듣던 승철이 픽 웃었다. 저러니까 전원우가 계속 저러지. 원우가 주장하는 김민규의 귀여움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바지만 저럴 땐 좀 알 것 같기도 하다. 바보 같은 건지 순수한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은 사람이라 말하는 민규나 그 모습에 또 휴대폰을 들이대는 원우나 아주 환장의 커플이 따로 없다. 둘이 알아서 잘 해봐라. 생수를 들이키며 승철이 혀를 찼다.



***



답답해... 눈을 뜬 민규가 제 가슴팍 위의 팔을 치웠다. 툭 떨어진 팔이 다시 엉겨 붙었다. 민규가 또 한 번 팔을 밀었다. 그러고 아예 침대에서 내려 왔다. 안고 있던 민규가 빠져 나가자 허전해진 팔에 이불 덩어리가 벌떡 일어난다. 꽁꽁 싸매고 있던 이불이 반동에 바닥으로 떨어지며 퉁퉁 부은 얼굴의 원우가 드러났다. 눈도 못 뜬 채로 민규의 이름만 불러 댄다. 무서워... 민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민규야...”

“언제 또 내 방에 온 거야.”

“우리 룸메이트잖아...”


일어나기는 했는데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는 건 어려웠는지 풀썩 드러누운 원우가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저음인데 잠기니 알아들을 수도 없을 정도로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뭐라는 거야. 붕 뜬 머리를 벅벅 긁으며 거실로 나갔다. 나가기 전에 떨어진 이불을 원우 위로 꼼꼼히 덮어준다. 귀찮기는 해도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미 잠의 수렁에 빠진 원우는 따라 나갈 수 없었다.


결국 해가 중천에 다다라서야 일어난 원우였다. 어제 좀 무리해서 연습했다고 뻗어버렸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나이 먹어서 그런가... 승철이 들으면 코웃음 칠 얘기였지만. 이러다 아침 연습도 못하는 거 아니야. 뻑뻑한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내려온 원우가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조용한 숙소에 의아함을 느낀 것도 잠시 소파에 앉아 있는 민규를 발견했다. 까치집을 얹은 채 티비를 보느라 정신없는 민규의 뒤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왁 하고 어깨를 잡았는데 어째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왜 안 놀라?”

“형 오는 거 다 알았으니까.”

“애들 다 어디 갔어?”

“다들 놀러 나갔어. 근데 형 진짜 오래 잔다.”

“오늘 연습 안 해?”

“취소됐다고 말한 지가 언젠데. 형은 자고 있어서 몰랐겠네.”


소파 뒤로 고개를 젖힌 민규가 원우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그냥 몸을 돌리면 될 걸 굳이 고개를 젖힌다. 꼭 상대방의 눈을 보고 말하는 민규의 버릇이었다. 소파에 걸쳐 있는 민규의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마구 쓰다듬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에서 느껴진다. 강아지 같이 만지지 좀 말라고 톡 쏘아 붙인 민규가 다시 고개를 바로 한다. 손에서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이 아쉬웠다. 조금 더 만지고 싶은데...


왜 안 놀러갔냐는 물음에 귀찮아서 안 나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민규 옆에 앉아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까도 그렇게 붙어 있었으면서 지겹지도 않아? 우리 민규랑 같이 있는데 뭐가 지겨워. 근데 저 프로는 좀 지겨워, 다른 거 틀어 봐. 톡톡 치니 반항 없이 리모컨을 집어 든다.


“근데 형 어제 승철이 형이랑 짠 거 맞지.”


채널을 돌리다 말고 민규가 빤히 쳐다본다. 괜히 시선을 회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저거 재밌겠다, 냅둬 봐. 부자연스러운 행동에 눈치 챘는지 민규가 고개를 저었다. 맞네, 둘이 짠 거. 뭘 짜긴 짜, 소금도 아니고. 요상한 개그를 쳤더니 반응이 싸늘했다. 이게 아닌가. 머쓱해 뒷머리를 긁적였다. 됐어, 순영이 형한테 이번 무효라고 이를 거야. 화난 표정을 한 민규가 멀찌감치 자리를 고쳐 앉는다.


에이, 형이 다 민규랑 같이 쓰고 싶어서 그런 거지. 어차피 다 눈치 챈 마당에 굳이 부인하기도 뭐해서 달래주는 걸로 방향을 전환했다. 흥, 여전히 꿍한 민규 옆에 찰싹 붙어서 온갖 아양을 떨었다. 사실 자신이 순영만 뽑지 않았어도 민규의 이름이 적힌 막대를 흔드는 승철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숙소에서는 룸메를 제비뽑기로 정하는데 어제가 그 날이었다. 전부터도 그랬지만 요즘 들어 유난히 잔소리가 심해진 순영만 피한다면 누가 되는 상관없던 원우였다. 그러나 민규를 너무 괴롭혀서 벌 받은 건지, 뽑은 막대에는 순영의 이름이 선명히 적혀 있었다. 방금 전과 확연히 다른 원우의 표정에 멤버들은 웃어댔고 원우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앞으로 순영과의 생활이 얼마나 험난할 것인가에 대해 고찰했다. 그렇게 고개를 떨구고 있는 원우의 곁으로 승철이 다가 왔다. 아무 말 없이 막대를 건네면서.


“승철이 형 엊그제 나한테 게임 져서 그래. 치사하게. 자기는 뒷끝 없다고 눈 벌개져서 그러더니.”


어쩐지 순순히 바꿔준다길래 이상하다 싶더니. 그냥 김민규 귀찮게 하고 싶어서 그런 거였네.
막대를 받아 들고서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승철이 떠올랐다. 무슨 벌칙도 아니고 취급이 너무했다. 내가 뭐 계속 김민규만 괴롭힐 줄 아나 본데, 아주 잘 파악했네. 역시 리더의 통찰력.


“그래서 나랑 같이 방 쓰기 싫어?”

“아니, 그건 아니고. 둘이 짜고 치니까 그렇지!”

“짜고 치면 뭐 어때. 나 진짜 권순영이랑 하기 싫었단 말이야.”

“순영이 형이 형 잡아먹기라도 한대? 뭐 그렇게 싫어해.”

“권순영은 나 잡아먹고 남은 걸로 사골까지 끓여 먹을 애거든. 민규야, 그냥 형이랑 같이 살자, 응? 귀찮게 안 굴게.”

“그럼 나 안고 자지 말구 형 침대에서 자.”


그건 좀... 말끝을 흐렸더니 당장이라도 말할 기세로 휴대폰을 집어 드는 민규를 만류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근데 그냥 같이 누워있기라도 하면 안 돼? 응, 안 돼. 단호한 민규에 어깨가 축 쳐졌다. 우리 민규 안 안고 자면 형 잠 못 자는데...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민규를 보자 살짝 움찔한다. 그, 그래도 안 돼. 쳇. 전에는 먹혔는데 이제 좀 컸다고 끄떡없다.


알았어, 그럼 안 그럴 테니까 순영이한테 말하지 마. 내키진 않았지만 순영에게 들키지 않는 게 우선이었으니 수긍하는 척 했다.그 말에 멀리 떨어져 앉은 민규가 다시 거리를 좁혀 앉았다. 진짜지? 어지간히 귀찮긴 했는지 눈을 반짝이며 되묻는 민규에 원우는 살짝 미안해졌다. 그렇게 싫었나.. 근데 진짜 괴롭힌 게 아니라 귀여워서 그런 건데...


민규를 보면 그랬다.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성을 앞선 본능이 공처럼 여기저기로 통통 튀었다. 통제할 수도 없이. 그리고 원우는 그 이유를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형의 표현방식은 좀 이상해.”

“뭐가 이상해. 남들도 다 그럴 걸? 팬들도 너 귀엽다고 난리잖아.”

“그건 팬이니까 그렇고. 형은 사람을 좀 헷갈리게 해.”


말을 뱉고 순간 아차 싶었는지 민규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뭐야, 왜 그래. 말을 하다 말고 돌덩이마냥 딱딱해진 민규가 이상했다. 아, 몰라! 나 잘 거야! 못할 말을 한 것처럼 입 꾹 다물고 아무 말 없던 민규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쿵쾅거리며 방으로 들어간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멍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헷갈리게 한다는 게 무슨 뜻이지? 민규의 말을 되생각해도 도저히 모르겠다. 뭘 헷갈리게 한다는 거야?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해도 빨갛게 달아오른 민규의 귀 끝이 자꾸 걸려서. 마음이 복잡했다. 그리고 조금 불안했다. 애써 외면하던 것을 민규가 알아챈 건 아닐까 하고. 한참을쇼파에 앉아 있던 원우는 멤버들이 돌아오고 나서야 풍선처럼 부푼 생각을 터트렸다.



***



거울에 비치는 이질적인 모습에 원우는 제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잔뜩 바른 왁스에 머리카락 끝이 딱딱했다. 아무리 봐도 적응 안 된단 말이지. 아이라인을 그린 눈이 간질거렸다. 무심코 눈을 비비려는 원우를 코디 누나가 기겁을 하며 저지했다. 메이크업 망가져! 대기실에 있으면 제 몸은 제 것이 아니었다. 무대 아래서 대기할 때는 코만 풀어도 화장 지워진다며 혼났다. 원우가 눈을 비비려던 손을 내렸다. 얼굴이 갑갑했다.


바람 좀 쐬고 온다는 말에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승철이 벌떡 일어섰다. 난 환타. 승철의 돌발 행동에 움직이지 좀 말라며 담당 누나가 화를 버럭 냈다. 머쓱한 표정의 승철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입모양으로 말했다. 파인애플 맛으로. 최승철! 아이, 누나 또 화를 내고 그래요. 능글대는 승철을 뒤로 하고 동전 몇 개를 챙겼다.


머리 망가지지 않게 조심해. 신신당부하는 코디 누나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로 나왔다. 북적거리던 대기실을 벗어나니 숨통이 트였다. 공기도 좀 맑아진 거 같기도 하고. 빨리 갔다 와야겠다. 원우는 진한 화장을 한 채 의상까지 갖춰 입은 제 모습이 조금 창피했다. 나 누구예요, 하고 알아봐주길 바라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빠른 걸음으로 로비로 향했다. 그러나 원우의 바람과 달리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여기저기서 인사가 쏟아졌다. 어색하게 웃으며 받아 주고 있었지만 달아오르는 얼굴은 어쩔 수 없었다. 자판기 앞에서도 계속 꾸벅거리다 겨우겨우 환타를 뽑을 수 있었다.


그렇게 뽑은 환타를 들고 대기실로 가는 중에 화장실 앞에서 손을 털고 있는 민규와 딱 마주쳤다. 다급하게 반대쪽으로 몸을 틀었지만 이미 민규의 눈에 걸린 후였다. 형! 달라붙는 가죽 바지를 입은 민규가 성큼 다가오더니 제 앞에 선다. 시선 둘 곳을 찾다 민규가 부르는 소리에 결국 눈을 마주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후다닥 도망쳤던 그날 이후, 어쩐지 민규 보는 게 조금 껄끄러워진 원우였다.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민규에 잠깐이라도 혼란스러워한 것에 어이없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찜찜한 기분에 평소처럼 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티낸 건 아닌데 갑자기 이렇게 마주치니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디 갔다 왔어? 민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손에 들린 환타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민규가 잠깐 생각하다 알겠다는 듯이 웃었다. 승철이 형꺼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내가 마시면 화내겠지? 아쉬운 표정으로 민규가 물었다. 마시고 싶어? 그동안 괜히 혼자 찔려 피했던 것도 미안하기도 하고. 뒷말은 생략한 채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꺼냈다. 딱 한 개 더 마실 돈이 남아 있었다. 눈을 빛내는 민규에 사줄 테니 앞장서라고 하자 재빨리 앞에 선다. 팔랑거리는 꼬리만 있으면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그래서 그 피디님이 나한테 뭐라고 했냐면... 로비로 다시 가는 내내 민규는 쫑알거리며 제 말을 하기 바빴다. 부쩍 개인 활동이 잦아진 탓에 민규가 하는 말 중 대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잔뜩 찡그린 채 말하는 얼굴이 귀여워 그냥 듣고만 있었다. 또 카메라를 들어 찍고 싶었지만 참았다. 민규가 아무렇지 않게 굴어도 아직 남아있는 일말의 복잡함이 제 본능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민규의 얘기를 들으며 자판기에 다다랐을 무렵 누군가 인사를 해왔다. 오늘 무슨 날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려다 어쩐지 낯익은 얼굴에 멈칫했다. 옆에 서있던 민규도 누군지 눈치 챘는지 살짝 굳었다. 뭐 마시려나 봐요. 흘러내리는 머리를 귀에 걸며 서지연이 말을 걸어온다. 아, 네. 어색하게 대답하며 슬쩍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다들 제 할 일 하느라 바빠 이쪽에 관심 없어 보였다.


별 접점도 없는데 콕 찝어 민규의 이름을 언급하며 이상형이라 말한 서지연에 포털사이트가 뒤집힌 적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지연은 1군 아이돌이었고 민규는 데뷔한 지 1년도 채 안된 신인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김민규가 누구냐며 궁금해 하기 시작했고 실검까지 오른 민규에 멤버들이 더 난리를 쳐댔다. 어떻게 된 거냐고 집요하게 물어보는 승철을 떼어내며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고 억울해 하던 민규가 생각났다. 그 날 멤버들에 시달리다 회사까지 불려간 민규였다.


그렇게 민규와 서지연의 스캔들 아닌 스캔들은 그 다음 터진 서지연의 열애설에 잠잠해졌다. 민규는 이용당한 거냐며 놀려대는 형들에 거하게 삐친 민규를 달래느라 꽤 애 좀 먹었다. 그 뒤로 서로 되도록 언급하지 말자고 협의했는데 이렇게 딱 마주치다니.  


불편함을 온 몸으로 티내고 있는데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건지 음료수를 뽑을 때까지 서지연은 그 자리에 서있었다. 뭐라도 해야 하는 건가? 제 옆에 바짝 붙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민규를 쿡쿡 찔렀다. 아무 반응도 없이 서지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색한 공기가 무거웠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온 환타를 서둘러 꺼냈다.


“아, 저희는 그럼 이만...”

“저 원우 씨.”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원우에게 지연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니 번호 좀 알려주세요, 그런다. 네? 당황한 티를 내니 재밌다는 듯 웃었다. 민규의 표정이 바로 구겨졌다. 얜 또 왜 이래. 아니, 잠깐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 상황을 이해하려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다. 일단. 번호를 물어보는 건 연락하고 싶다는 의미다. 그런데 서지연은 내 번호를 물어봤다. 즉, 서지연은 나랑 연락하고 싶어 한다. 여기까지가 삼단 논법에 의거한 결론이고. 여기서 또 다른 전제 하나. 서지연은 김민규를 이상형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민규에게 호감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럼 민규 번호를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닌가? 성립되지 않는 결론에 머리 속이 복잡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저희가 휴대폰이 없어서요.”

“손에 들고 있는 건 휴대폰이 아니라 게임기인가요?”

“매니저 형 껀데요.”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원우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민규가 딱딱한 말투로 내뱉었다. 노골적인 적대감이었다. 서지연도 그런 민규에 지지 않고 받아쳤다. 둘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오고 갔다. 이목을 끄는 광경에 흘끗대는 시선이 느껴졌다. 수군거리기까지 하는데 둘은 신경도 안 썼다. 그 사이에 낀 원우만 좌불안석이었다. 원우의 어깨를 잡은 민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희 곧 무대 올라가야 해서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럼 또 봐요, 원우 씨.”

“아, 네.”


안녕히 가세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뻣뻣하게 서있는 민규의 등을 찔렀다. 빨리 너도 해. 그러자 마지못해 고개를 살짝 숙인다. 아주 미묘하게. 지연이 사라지고 나니 달라붙던 시선 또한 흩어졌다. 시야에서 지연이 완전히 벗어나서야 민규가 원우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가자. 바로 등을 돌린 민규가 먼저 앞으로 갔다. 벌써 저 중간까지 간 민규를 서둘러 뒤쫓았다. 그럼에도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기다려주지도 않고 휘적휘적 걸어간 민규는 대기실에 도착할 때까지 꾹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환타 만들어서 오냐? 이미 세팅이 끝난 승철이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성질낸다. 이미 지쳐있을 대로 지친지라 별 말 없이 환타를 건네주었다. 눈을 가늘게 뜬 승철이 어색하게 떨어져 있는 둘을 번갈아 본다. 뭔가 냄새가 나는데. 너네 둘이 왜 따로 왔어. 눈치 하나는 빠르다. 이상한 소리 마라며 본격적으로 취조할 기세인 승철을 떠밀었다.


내내 조용하던 민규가 왜 늦게 왔냐는 매니저 형의 말에 원우 형이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서 안 나오는 바람에 그랬다며 거짓말을 친다. 전원우 똥병 걸림? 그 말에 대기실 안에 웃음이 와르르 쏟아진다. 어이없어 쳐다보니 아까 심각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유치하게 혓바닥을 내민다. 그러고 얼마 있지 않아 올라 갈 준비 하라는 신호가 떨어졌다. 민규가 제일 먼저 대기실을 나갔다. 원우는 대기실이 조용해지고서야 복잡한 생각으로 무대로 나갔다.


무대에 있으면서도 집중을 하지 못해 몇 번 안무를 틀렸다. 다들 말은 안 해도 길어지는 녹화에 피곤해하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는 순영의 말에 한숨을 크게 쉬었다. 머리가 꽉 차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민규가 잠깐 쳐다본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유에서였다.


어떻게 무대를 했는지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차 안이었다. 다들 자느라 정신없는데 제 앞의 동그란 뒤통수만 바로 서 있었다. 꼭 뭘 생각하는 것처럼. 창문에 기댄 채 밖만 쳐다본다. 이미 어두워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너머를 바라봤다. 뒤에서 지켜 보다 눈을 감았다. 곧 잠이 쏟아졌다. 너무 지친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