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잔인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확실히 아는 이는 없다. 그저 지도 그 어느 곳에도 기록되지 않은 괴상하고 작디작은 규모의 마을에서 대대로 살았던 조상으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의 일부만을 들어 이곳 주민들은 철석같이 믿을 뿐이었으니 이에 뚜렷한 확신은 서지 않는다, 하물며 그 전설의 일부는 상당 부분 왜곡되고 변질되었을 것이리라.
그 환상과 허구의 공간 속 전달자는 봄이 되는 날 선홍색의 꽃잎이 춤을 추며 하늘 위를 가득 수놓고 여름이 되는 날 다홍빛의 색을 머금은 탐스러운 열매가 열리며 가을이 되는 날 초록색의 잎들이 노란빛의 색으로 물들며 겨울이 되는 날 새하얀 눈을 두 손으로 담는다 이야기한다.
이 전달자를 신뢰할만한 구실은 그리 썩 뾰족하지 않지만, 굳이 증거를 더 내세운다면 마을 언덕에 위치한 낡은 도서관의 한구석을 지키고 있는 성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성서에는 깨끗하고 순수하며 고귀한 영혼을 나타내는 흰색과, 끝없는 어둠과 악을 뜻하는 검은색 말고도 여러 신성함을 담아낸 색과 동시에 불쾌함과 더러움을 표현한 색도 자주 언급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 넓은 땅에 흩어진 감각과 감정을 한껏 담아냈다 한들, 그것을 살갗으로 직접 느끼고 실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주민들은 전설과 성서를 손에 잡음과 동시에 금방 질려 하며 생기 하나 없는 현실을 마주 하곤 했다.
'이곳' 사람들은 흰색이나 검정 혹은 이도 저도 아닌 회색 옷을 입었다. 흰 열매를 따먹고 검은 빵을 씹어 넘겼으며 몇몇은 종종 그것을 팔기도 했다. 그들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은 투명한 회색빛의 물이었으며, 검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짙은 회색의 불로 구워 어느 정도 거무스름해질 때 입에 넣었다.
색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사람들의 판단 능력은 극히 원시적이었다. 어떤 색이 음식을 취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인지를 알지 못하고 종류마다 그 기준이 다른 데다가 그 밖에도 여러 변수가 존재해서 그들은 때때로 본능에만 의지해 판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생활의 방식이 부모에게서 자식, 그리고 그들의 또 다른 자식한테로 이어져 자리를 잡기까지 무고한 사람들이 갖은 질병으로 희생되었다. 생채기가 난 자리에서 검은 피가 흐르면 그것이 얼마나 많이 흘러야 생명에 지장이 가는지를 실험하고 기록해야 기준점을 겨우 세워 목숨을 지킬 수 있었고, 분비물, 노폐물, 배설물 등의 인간의 몸에서 배출되는 것은 분간하기가 쉽지 않아 대충 비슷한 선에서 두기로 약속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거대한 재앙으로 간주했다. 태초에 이 땅에 잉태될 때부터 색이 완전히 삭제된 세상을 보았기에 그것이 재앙인지 선물인지 파악할 순 없지만, 언제부터 그리 병들었는지 몰라 세계의 반죽에서 이 마을을 아무렇게나 떼어내 빚은 후 구름 사이로 숨어들어간 신의 존재를 떠올리며 마냥 험담을 퍼붓는 행동조차도 실행할 순 없지만, 온전히 시각을 제외한 모든 동물적인 감각에 의지해 생존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충분히 번거롭고 위험이 따르는 작업이었으니 이것은 곧 재앙이라 칭할 수 있었겠다. 누군가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릇된 감정을 허용하지 못해 색깔이라는 존재를 눈 속과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걸까. 정말 그런 것이라면 그 무엇이 신을 노여워하게 만들어 우리의 보이지도 않는 버팀목을 훔쳐 간 것일까. 알 도리가 없다. 무능하게도, 알 도리가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가끔씩 존재 자체가 희미한 전설과 성서 속의 세계를 멋대로 그려내며 옅은 본성만으로 쉽게 일생을 살아갈 수 있는 그 세계를, 줄곧 동경해오기만 했다.
그들의 앞에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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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는 손에 쥐고 있던 먹다 남은 오곡 빵을 입안에 욱여넣으며 광장 입구를 에워싼 어른들의 틈을 파고들어 광장의 중앙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조각조각 잘려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모으며 익숙지 않은 소란을 즐기던 그는 마침내 대열의 끝에 다다랐고, 그곳엔 크고 작은 짐 꾸러미를 품에 안은 낯선 사람들이 광장에서 벗어나 분주히 걸어가고 있었다. 무리에 중년 남성과 여성, 그리고 젖살이 채 빠지지도 않은 어린아이 여럿이 있는 것을 보니 옆 마을에서 이주해 온 소가족일 것이리라, 민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낯선 소가족을 쫓아가는 주민들의 인파에 휩쓸려 자칫하면 발을 접지를 뻔하였으나 민규는 머릿속을 가득 채운 호기심을 잡아 어른들의 팔과 겨드랑이, 어깨 사이로 보이는 그들의 실루엣을 조금이나마 목격했다.
그중 민규는 어지러운 인파 속 공포 어린 표정을 지은 채 언제 무너질지 모를 가느다란 몸을 이끌고 걸어가는 제 또래의 한 소년에게 줄곧 시선을 두었는데, 그 소년은 자신의 짙은 흑색의 머리카락을 다 덮고도 남을 만큼의 큰 빵 모자를 푹 눌러쓰고 짙은 회색의 두꺼운 책을 품에 안고 있었으며, 괴이하게도 온전한 두 눈은 그 큰 빵 모자에 가려져 있어 볼 수 없었다.
정체모를 서늘한 그림자가 이마 위에 드리워있었다, 그 아이는. 민규는 제가 방금 삼켜낸 오곡 빵이 해가 지기 전까지 의지해야 하는 자신의 마지막 양식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보이지도 않는 소년의 눈빛의 길을 따라 더 깊숙이 무리의 틈으로 파고들어 걸어갔다.
압박해오는 모든 것에 공포를 먹어버린 눈과 마주하지 않았던 그날.
서로의 존재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그날.
그날이 그들의 희미한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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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부부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던 그 소년은 또래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총명했으나 그 존재 자체는 조금 남달랐다.
이전에 거주하고 있었을 고장이 농가일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부모와는 달리 밭일에 익숙지 않았고 건초 더미를 나르거나 소똥을 치우는 일을 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를 듯한 왜소한 체형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매일 방 한편에 틀어박혀 한 곳에 많은 책을 쌓아 놓고 하루 종일 읽어나갔는데, 주된 내용이 인간의 역사와 문화 및 종교에 관한 내용이 담긴-민규로선 한 번도 접근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을 분야였다- 것이어서 얼핏 보면 그것은 마치 소년이 자신을 둘러싼 삶에서 달아나려는 하나의 몸부림처럼 보였다.
가끔씩 신문 잡지 또는 남녀 간의 애정과 치정을 다룬 가벼운 단편 소설을 접할까 말까 하는 농가 주민들에겐 그 아이가 꽤나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켰을 만도 했겠다. 그러니 이는 곧 일부 과장되고 편집된 낭설이 되어 이방인처럼 마을 곳곳을 떠돌아다녔는데, 가끔씩 민규는 이 낭설을 접할 때마다 입꼬리를 귀에 걸치며 자신이 가진 소년의 유일한 흔적인 스쳐 지나갔던 첫 만남을 회상하곤 했다.
또한 소년을 향한 민규의 순수한 욕망은 더욱 진해져갔다.
만나고 싶다. 방 한편에서 달빛 하나에 의지한 채로 알 수 없는 이야기 속을 헤엄쳐나갈 그 아이와, 만나고 싶다.
그리고 며칠 뒤 그의 순수한 욕망은 곧 현실이 되어 눈앞에 모습을 들어냈다. 소년의 부모가 밭일을 하러 집을 나섰을 때, 민규는 충동적인 호기심에 소년의 집 앞을 찾아왔고,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잠깐의 정적 뒤 문이 열렸다. 그 문의 그림자 뒤엔 무언가에 겁을 잔뜩 먹은 소년이 빵 모자의 앞부분을 손으로 잡아 있는대로 끌어내리며 서있었다.
무슨 일로…. 느릿하게 물어오는 아이의 음성이 사뭇 낮고 부드러워 조금 놀랐으나 민규는 목을 한번 가다듬고선 잠깐 들어가도 되냐 물었다. 순간 정적이 그들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도 소년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문을 조금 열어두고선 마치 들어오라는 듯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민규는 아이의 발자국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고, 현관문을 닫자마자 코 끝을 간질이는 향긋하고 고소한 향이 몰려왔다. 한껏 따뜻한 온기와 향에 심취해있을 때, 소년은 그의 앞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며 여전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외부인을 들여보낸 것인지 소년은 속으로 그 모든 것을 덧없이 비난해가기 시작했다.
다시 어색한 정적이 쏟아져내리니 민규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대뜸 소년의 손을 잡아왔다. 나 놀러 온건데, 너랑 같이 있어도 되지? 해맑게 뱉어낸 그 말투가 소년의 미간을 있는대로 구겨놓았다.
얜 도대체 뭘까.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소년이 애를 쓰고 있을 때 민규는 그런 소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술 더 떠 소년의 방이 있을 위층으로 향했다. 꺼낼 말도 없으면서 입술을 혀로 연신 축이는 소년의 행동이 무척 안절부절못해 보였다.
거대한 서재를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소년의 방은 그 공간의 절반이 알아들을 수 없는 제2의 외국어로 메꾸어져 있었고, 그 나머지의 절반조차도 난생 접해보지 못했던 단어로 가득했다. 하나하나 손으로 훑으며 걸음을 옮기는 민규를 보는 소년은 다시 입술을 축였다.
이 책을 다 읽어? …어느 정도.
민규는 자신의 머리카락에 붙은 흰 먼지를 털어내며 몸을 돌려 소년을 보았다. 그러자 소년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이거 읽어줄 수 있어? 그 말과 함께 민규는 아무렇게나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은 작은 책 하나를 집고선 소년에게 내밀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본 소년이 아무런 대답 없이 바로 주저앉아 책을 건네받곤 펼쳤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민규도 소년을 따라 옆에 앉아 그의 옆에 붙어 어깨너머로 글씨를 보았다. 소년은 곧 그 온화한 음성으로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고 민규는 그를 경청했다.하필 그가 집은 책이 복잡한 철학의 세계가 적힌 이야기라 소년이 더 깊게 읽어낼수록 민규는 머릿속에서 피어나는 물음표를 감당할 수가 없었고 끝엔 전부 집어던지며 그저 소년의 목소리와 바삐 움직이는 입술에 초점을 맞추었다.
너 듣고 있긴 한 거야? 마침내 찔린 정곡. 미안하다며 사실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자 소년은 한숨을 쉬곤 책을 덮으며 이제 그만 가보라고 했다. 그에 민규는 아쉬워하며 다른 책을 집어 들고 무작정 읽어달라 잡아떼었고 소년은 망설이더니 다시 글을 읽어내려갔다.
그때 문득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민규가 소년을 쿡쿡 찌르며 물었다. 그런데 '불그스름한' 이라는 말은 도대체 뭘까?
민규는 그저 호기심에 물은 질문이었으나 그와는 달리 소년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원래는 민규의 질문에 동의하거나 답했어야 할 행동을 접어두곤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걸 몰라? 왜 모르냐니. …정말 몰라?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되물음에 어느 순간 소년과 민규는 혼란스러움 속에서 서로의 틀어진 어느 부분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소년은 자신의 입술을 가리키며 이것과 같은 색이라 말했지만, 본래 이 마을에서 태어나 이 마을의 곡식과 물을 삼키며 자라난 민규의 눈엔 그저 모든 것이 밋밋한 흑백으로 비칠 뿐이었다. 그때 서로는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러자 민규는 갑작스레 입을 틀어막고 별안간 호기심으로 바라보던 소년을 공포와 환멸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소년은 어리둥절해하며 자기 딴의 민규의 괴상망측한 행동을 지켜봤고, 이어 아랑곳하지 않은 채 머리를 쥐어잡아뜯는 민규는 소년이 바라보는 세계가 얼마나 휘황찬란하고 생동감이 넘치는지, 자신이 지겹게도 봐왔던 말라 비틀어진 세계와는 그곳이 얼마나 먼 곳에 존재하는 것인지 곱씹었다. 그리고 한순간 민규는 소년이 마치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들어왔던 전설 속의 전달자가 아닌가 생각했다. 몇 번을 부정하다 민규는 점점 희미해지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고 소년의 옷자락을 잡으며 문득 물었다. 이거, 무슨 색이야. 그가 가리킨 것은 자신의 눈동자였으며, 소년은 단 한초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갈색. 그럼 이건? 이어 민규는 자신의 눈을 포함한 여러 신체와 옷을 가리켰고 소년은 마찬가지로 답했다. 살구색. 이건? 빨간색. 그럼 이건? 초록색. 아아, 아니야. 아닐 거야. 점점 환희와 공포에 일그러지는 민규의 얼굴에 이젠 소년이 되려 겁을 먹기 시작했다.
또다시 정적이 몰아쳤고 그 정적을 깬 것은 놀랍게도 소년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이상해. 채도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다니는데 거기엔 통일성도 단합성도 없어서 조금이라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아파져. 처음엔 그들이 그저 색을 구별하는 감각이 둔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색을 보지 못해서였다는 건 지금 알았어.
민규는 숨을 고르며 여전히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소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너 정말 신기하다, 여러모로. 그렇게 말한 민규는 가픈 숨을 쉬며 소년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소년은 눈알을 여러 번 굴리다가 마침내 입술을 떼었다.
…원우.
민규는 원우를 보며 밝게 웃어 보이곤 이어 대답했다.
자주 올게. 그래도 되지?
그들은 오늘 서로의 세계를 처음 깨달았다.
그 후 민규는 원래부터 자신의 생활패턴에 자리 잡았던 일과 중 하나가 원우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는지 항상 같은 시간의 같은 걸음으로 같은 길을 밟고 걸어가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손동작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러면 언제나 그랬듯 원우가 현관문을 열어주며 들어오라 손짓했고 민규는 환히 웃으며 원우의 방으로 올라가 바로 눈에 밟히는 책 한 권을 골라 원우에게 주었다. 원우는 처음과 달리 차차 망설임을 떼어가며 민규에게 책을 읽어주었고 (방에 있는 책 중 대부분은 민규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구사된 것이었기에 원우가 없었다며 책장을 넘기는 것 조차도 조심스러워 했을 것이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들려주다 결말에 도달하면 민규는 그제서야 원우에게 자신이 보지 못하는 색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 말했다. 원우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 모든 색이 이루는 조화를 설명했고, 민규는 그 만의 세계를 미처 다 이해하고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그저 원우가 들려주는 그 모든 이야기가 신비해서 깊게 경청했다. 그리고 이따금씩 원우는 민규의 손을 잡아 그의 신체 부위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색을 읊어주었다.
여긴 진갈색, 여긴 연갈색. 왜 같은 갈색인데 색이 다르다고 하는 거야? 다 같은 이 마을 주민이라 해서 너랑 내가 똑같은 사람인 건 아니잖아? 민규는 그런 원우의 화법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모르는 세계는 하나하나 세심하게 알려주며 손가락으로 작은 부피의 모든 것을 가리키고 그 본연의 존재를 깨우쳐주는 원우의 행동을 보면 민규는 가슴 한구석에 따뜻한 햇볕이 스며드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언젠가 민규는 원우에게 물었다. 그럼 여긴 무슨 색이야? 민규가 가리킨 곳은 한쪽 뺨이었고, 원우는 살며시 웃으며 답했다. 분홍색. 그것도 색이 정말 뚜렷한.
그리고 그를 말하는 원우의 뺨도 뚜렷한 색의 분홍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일의 출발점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원우가 조금씩 민규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함으로부터였다. 어느 날 민규는 지금까지 밖을 한번도 나가지 않는 원우에게 같이 나가보자며 대뜸 원우의 손을 잡아 광장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민규의 억센 손아귀의 힘에 원우는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가기만 했다.
어째서인지 평소 원우는 생기 하나 없는 두 눈을 넓은 빵모자 뒤에 숨기고 누군가와 마주하기를 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저를 끌고 나온 민규에 의해 원우는 미처 빵모자를 쓰고 나오지 못했고, 곧 온 광장을 누비며 돌아다니는 그와 우연히 눈이 마주친 소수의 사람들은 갑자기 경악을 하며 심지어는 픽 쓰러지기까지 했다.민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광장을 둘러보며 원우의 팔목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고, 그와 동시에 원우는 새파랗게 질려 입을 틀어막는 사람들을 외면한 채로 두 눈을 손으로 가렸다. 사람들은 원우의 손 틈으로 조금씩 보이는 그 눈동자를 보고 손가락질하며 연신 비명을 질렀고, 민규는 그런 사람들의 틈으로 원우를 마저 이끌어가며 현실과 외면하기를 택했지만 이미 퍼져나간 혼동의 물결은 걷잡을 수가 없어서 모두의 시선이 하나같이 원우의 가려진 두 눈에 꽃혔다. 강하게 떨려오는 소년의 몸에 민규는 그만하라며 사람들에게 소리쳤지만 그들이 놀라하는 이유를 모르니 소리치던 그 음성도 점점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어 누군가가 멀리서 '빨간색'이라는 뜻 모를 단어를 말하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빨강'이 전해졌다.
마을 신부의 강론을 통해 한두 번쯤 들어 봤던 이름이었지만 그것이 이렇게 생길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원우는 그제서야 민규의 손을 힘껏 뿌리쳐 자리에 서서 멀뚱거리는 사람들에게 검붉게 번뜩이는 제 눈을 가리키고는 동시에 이것이 피와 같은 색이고 동시에 불과 같은 색이며 내리쬐는 태양과 같은 빛이기에 따뜻함에서 파생되어 점차 뜨거움과 고통으로 번져가는 신비한 색이라고 허탈함에 잠식된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원우의 말은 민규의 의구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얼떨떨해하며 주위를 돌아보는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은 눈에 비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나 많은 시간 동안 깊게 눈을 맞추어왔던 민규였음에도,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사고회로가 투둑 끊겨버렸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민규는 잠에 들기까지 수없는 물음에 물음을 이으며 생각했다.
그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흰 색도 회색도 검은색도 아닌 색을 보았다는 것이, 그런 갑작스럽고 극단적인 경험이 어째서, 태어날 때부터 은혜를 내려주고 따스하게 보살펴준 태양이나 일용할 양식에 더욱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불, 가끔씩 날카로운 것에 베어 생채기 사이로 울컥 솟아오르는 피가 아닌 그 소년의 눈동자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의 눈은 이 세상의 일부분에서 아무렇게나 떼어진 신의 피조물에서 구원된 유일한 물질인가? 아니면 신이 따로 창조해낸 재료로 만들어진 것일까? 그의 눈을 더욱 자세히 바라보고 싶었으나, 그날 이후 눈을 맞추기를 극히 거부하던 원우에 의해 민규는 원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아, 어쩌면 그는 마법사인걸까? 되짚어보면 또래 나이와는 맞지 않게 이미 이 세상을 구축하는 세계의 구조와 순환의 원리를 전부 깨달은 듯 짓는 특유한 공허함이 담긴 표정과 세상을 뒤집어 그 이면을 살피고 헤아릴 줄 아는 깊고 성숙한 가치관이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그의 각막에 비치는 모든 세상에 저절로 색이 입혀지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마법사가 하는 일이 아닌가.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사람들은 소년의 눈동자만이 아닌, 눈동자와 같은 색의 것들을 일상에서 보기 시작했다. 사과와 한 송이의 장미, 입술과 심지어는 그 안의 혀까지. 저마다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소년의 눈동자와 색이 비슷한 사물들이 서서히 눈에 띄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놀라움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고, 그 감정은 점점 격해져 '빨강'이라는 이름을 듣고 되뇌기만 해도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머리에 피가 몰려 정신까지 아득해지는 경험을 겪고 타인과 공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공유의 선을 타지 못한 이들은 그들의 새로 건설된 세계를 헤아리지 못하며 정상적인 일상을 찾으라 윽박을 질렀고, 이는 기존에 그들이 지니고 드러냈던 평범함의
범위를 한참 벗어난 광기로 물들어 서로의 심장을 꿰뚫고 다른 갈래로 뻗어 나아갔다. 이젠 이것이 새로운 일상으로 자리 잡는 것이 시간문제에 불과할 것이다.
원우는 그 후로 평소처럼 집 밖을 나서지 않았고, 민규가 찾아와 문을 연신 두드려도 절대 열어주는 법이 없었다.그가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네봐도 돌아오는 말은 제발 오지 말라는 날카로운 부메랑에 지나치지 않았으니, 날이 갈수록 그들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해져만 갔다. 그동안 원우를 정체불명의 마법사라 예상하며 꺼려 해왔던 자신을 자책하며 민규는 계속해서 한숨을 뱉어냈지만, 이미 마을은 광기 어린 빨강에 매료되어 음산한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젠 빨강이라는 문구를 단순하지만 강압적이게 활용하여 지어낸 해괴한 음의 노랫말을 부르며 빨강이 마치 자신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초현실적인 능력과 같은 것이라고 당당히 소리쳤다. 그들은 더욱 광기에 사로잡혀 빨강에 취한 채 더욱 농도 짙은 빨강을 잡기 위하여 영문모를 폭력을 무차별적으로 행사했고 그들만의 붉고 둥근 띠를 이루었다. 한편 소년의 눈 한번 마주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빨강이 선명하게 보인다며 자부하는 이들이 그 무리에 끼어들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발각되었고 그들을 배제하는 와중에 더 큰 난동과 폭력이 벌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 칭해진 원우는 영문도 모른채 재판정이 끌려 나왔다. 사람들은 노래와 주먹질을 멈추고 다 같이 숨을 죽여 재판을 지켜보았다. 안타깝게도 민규만이 이 풍경을 보지 못했다. 혹여나 다른 이가 소년의 눈동자를 보고 빨강의 세계를 다시 한번 알아차리게 될까 봐 원우의 눈은 안대로 가려지게 되었다. 같이 묶여버린 손과 발을 달싹이며 몸부림치던 그는 솟아오르는 공포심을 겨우 진정시키고 천천히 숨을 머금었다. 소년은 오랫동안 색이 보이지 않고도 건실히 잘 살아온 마을 사람들을 난폭과 나태에 빠트린 죄명으로 기소되었고, 거기에 더해 소년이 평소 무엇을 보고 들으며 또 수상한 행동이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밖에 잘 나오지 않던 원우의 평상시 행동의 처참한 결과였다-의심을 사는 점이 한둘이 아니어서 점점 불리한 쪽으로 몰리게 되었다. 마침 하나라도 트집을 잡아 그를 마녀와도 같은 존재로 간주하고 싶었던 지도자들에게는 그것이 매우 좋은 구실이 되었다.
소년에게 최후 변론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재판관은 빠르게 판결문을 낭독해 내려갔다. 그러고선 지도자들은 원우의 안대를 벗어 곧바로 빨갛게 타오르는 그 두 눈을 빠르게 도려낸 다음 바닥에 던지고 짓밟았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붉은 선혈에 원우는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목이 찢어지도록 울음을 토해내고선 의식을 잃었다. 사람들의 야유와 환호가 넘쳐나는 가운데 지도자들은 도끼로 그 새하얀 목을 자르지 않은 것은 자신들이 베푼 최선의 관용이라 하며 즉시 차갑게 식어 계속 피를 토해내는 원우의 눈에 안대를 다시 씌우고는 마을의 언덕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아 언제든지 짐승의 발길질에 의해 힘없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환경을 주었다.
그것은 자비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추방이었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 붉은 색을 본다는 소년의 두 눈이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이 민규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며 언덕 위로 걸음을 옮겼고, 그 끝의 절벽과 마주하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샘을 터트렸다.
절벽의 끝에 무척 익숙한 형태의 소년이 비쩍 마른 몸으로 쓰러져있었는데, 그 주위가 혈흔으로 추정되는 짙은 액체로 진득하게 물들어 있어서 소름이 돋지 않을 수가 없었다. 힘이 모조리 빠져나간 다리를 겨우 일으켜 세우며 민규는 의식이 없는 소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발끝에 소년의 싸늘한 살결이 닿자 그는 바로 소년을 품에 안아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숨은 붙어있었지만, 며칠 동안 그 상태로 방치되었던 것인지 뺨엔 검게 말라붙은 핏자국이 가득했고 옅게 뱉는 숨결이 너무 희미해 금방 사라질 것만 같았다. 민규는 충동적인 것에 이끌려 안대를 벗기려 했으나, 그 안에서 썩은 살갗을 갉아먹고 자라나고 있을 구더기들과 차마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손을 거두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힘이 없는 소년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원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한없이 울음을 터뜨리던 그는 그렇게 노을이 지고 짙은 태양이 저 너머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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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자신의 집에 데려온 민규가 그의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옆을 떠나지 않으며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고 있을 무렵, 마을을 다스리는 자들은 빨강을 볼 수 있다며 자칭하는 이들을 눈에 띄는 대로 잡기 시작했다. 마을을 떠돌아다니는 그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며 그들은 그 어떠한 변명도 듣지 않고 절차 없이 그들은 두 눈을 도려내었다. 광장은 날마다 비명과 절규에 찌들어갔고 뽑힌 붉은 눈알이 수북이 쌓이다 차례로 선혈을 터트리며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심사가 뒤틀린 이들은 검은 구두를 신은 이웃까지 빨강을 볼 수 있는 자들을 고발하였고, 그들은 자신이 빨강을 구별할 수 없다며 아우성쳤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확인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따라서 변호할방법도 없었으며 말 한마디만 그럴듯하게 지어내면 멀쩡한 두 눈이 뽑혀나가는 것은 순식간일 터였다. 그렇게 점차 빨강이라는 색을 입에 담는 이들은 모습을 감추었고, 설령 그를 목격했다 한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시침을 떼고 외면함으로써 그 이야기도 어디까지나 기담 수준에 머물다 마침내 사라지고 말았다.
얼마 뒤 의식을 차린 원우는 민규의 음성을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지만 그의 이목구비의 형태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넓고 다채로운 빛을 담았던 시야의 자리가 비어 생긴 공허함을 갑작스레 떠안게 되었기에 원우는 묽은 피눈물을 흘리며 그저 말없이 손에 잡히는 민규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한없이 읊조리는 민규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원우는 괜찮다고,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답을 할 기운조차 없어서 그저 천천히 민규의 등을 토닥이는 것밖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긴 하였으나 점점 쇠약해지는 원우에 민규는 속이 타들어갔고, 간단한 죽을 내와도 한두 숟갈 입에 넣다가 도로 토해버리자 그는 하루하루를 한숨과 눈물로 지새웠다.앞을 볼 수 없는 원우에 민규는 소년의 손을 꼭 잡으며 이제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인 눈 앞에 보이는 그 모든 풍경을 원우에게 입으로 옮기는 것을 행하였다. 원우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고, 시간이 지나 나중엔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힘이 모두 빠져버린 것인지 안면을 미세하게라도 움직이지 못해 애꿎은 민규의 손만 차갑게 감싸왔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민규가 무언가를 절박하게 놓치지 않으려는 듯 원우에게 끝없이 말을 걸고 있을 때 원우가 손을 뻗어 민규의 뺨을 어루만졌다. 식어버린 그 손길이 투박하게 살을 감싸오자 민규는 그런 소년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또다시 눈물을 흘렸고, 다시 미안하다는 말만 되뇌었다. 원우는 이젠 웃어 보이지도 못하는 입술에 힘을 주며 그에게 힘겹게 말했다.
조금 더, 많은 걸 보여주고 알려주고 싶었어.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을 너도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어.
그러자 겹친 원우의 손은 힘없이 허공으로 추락했다.
아니야. 아직, 나 아직 너에게 할 얘기가 많이 남았어. 네 말에 아직 대답을 하지도 못했어. 이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가지 마. 가지 마.
그렇게 한동안 가만히 원우의 얼굴을 보고 있던 민규는 조금씩 어깨를 들먹거리며 실소하기 시작했다. 그 실소는 저도 모르게 점점 커지고 고조되었고, 그 소리가 커질수록 실소는 통곡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아-.
그렇게 한참을 울부짖던 그는 이제 자신이 그동안 원우를 보며 갈망했던 크고 작은 욕구를 자신에게서 영영 거두어 가시기를 신께 간구했다. 존재하는 색을 인간이 볼 수 없게 만드신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고, 한때 환호하며 다른 이들이 보았던 '빨강'을 알려 한 것도 신 만의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이의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색도 무의미했으며 그는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젠 제발 저의 두 눈도 거두어 가주세요. 다신 아무것도 보지 못하도록. 다신 아무것도 원하지 못하도록. 눈을 감아 깊은 암흑 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절실한 마음으로 이 깊은 암흑이 지속되기를 바라며 눈을 뜬 그의 눈앞에, 자신의 손이 어루만지고 있던 원우의 하얀 얼굴이 조금씩 물드는 듯하더니 그가 태어나 처음 보는 색으로 바뀌었다. 그는 거기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몰랐지만 적어도 심장을 타고 흐르는 온몸의 피가 목구멍을 뚫을 것처럼 세차게 밀고 올라와 모든 감각을 잠식시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온몸이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보살핌을 받는 듯 따뜻해지며 머리 위로 새하얗고 밝은 빛이 쏟아져 내리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띄었을지도 모를 미소를 그리며 원우의 뺨을 다시 한번 어루만졌다.
나, 이젠 정말 너의 눈이 되어줄 수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