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거 주의
멈추어진 세계에서 성장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서기 3109년, 우리들의 세계가 멈추었다. 지지 않는 태양과 오지 않을 밤을 목도하였다. 고3의 여름이었다.
우리는 어른이 되지 못할 운명을 지니었다.
낮과 밤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하늘을 올려보면 언제나 태양이 희게 빛났다. 그것은 날로 거대해져 하늘을 집어삼켜갔다. 언젠가 대지를 불사를 듯이.
어둠이 사라진 밤. 눈을 감아도 빛이 있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ㅡ 눈을 감아도 낮이에요. 잠들 수가 없다고요!
찢어지는 음성은 비명 같았다.
무너져가는 세계에서 미래란 무의미한 단어에 불과하였다. 학생들은 의미 없이 학교에 나가 의미 없는 시간을 죽였다. 공기놀이. 비석치기. 땅따먹기... 오래 전 사라진 놀이들을 하며
ㅡ 우린 언제 죽게 될까?
우스갯소리를 지껄였다.
개중에 K는 가장 의미 없는 일을 일삼던 애였는데, 그 하릴없는 일이란 매일 자라나는 키를 재는 것이었다. 교실 구석진 곳엔 K가 자라온 흔적들이 새겨졌다. 조금씩 자라나는 흑색 실금들. K는 그것을 보며 뿌듯이 미소를 지었다.
“키는 왜 재는 건데?”
그러나 멈추어진 세계에서 성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자라난다는 증표 중 하나잖아.”
“자라서 뭘 하려고?”
“자라고 또 자라서 나는 어른이 될 거니까.”
소리 내어 웃는 K. 그 빛나는 얼굴은 저 하늘의 태양보다 더 환하였다.
사라진 밤은 사람들의 얼굴 위로 똬리를 틀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이들의 노곤한 얼굴이 있었다. 빛이 사라진 눈 밑엔 까만 밤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제 얼굴에 어둠을 묻히고 밤을 찾고 있다.
그런 아이들의 소일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제 수철이가 죽었잖아. 오늘은 옆집 재규 아저씨가 죽었대. 그래? 201동 아저씨도. 어쩌다? 마약 중독이지, 뭐. 그거 구하려다 재산을 몽땅 날렸다잖아.
A가 죽었대. 그제는 B가. 또 C가. 그런 이야기가 들려왔다.
매일매일.
일상처럼.
이상하고 따분한 나날이었다. 나는 책상 위로 한 쪽 뺨을 붙였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K의 얼굴을 보았다. 책상 위 눈을 감고 엎드린. 햇볕을 오롯이 받아내며.
그리고 K의 말에 대해 생각하였다. 자라고 또 자라 홀로 어른이 될 것이라던 그.
그러나 나는 알 수가 없다. 키 따위가 과연 우리들의 성장을 말해줄 수 있을까?
게다가 나는 이미
서서히 떠지는 K의 눈동자를 볼 때면
“지루하다, 그치.”
훌쩍 어른이 된 기분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투명하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는 흐르는 강물 같다. 그 안엔 죽지 않을 태양이 가득 차있다. 그 애 그 청아한 눈동자와 미소를 볼 때면 나는 달콤함이 무언지 알게 될 것만 같다...
밤이면 우리는 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 안은 우리들만의 방공호였다. 결코 허물어지지 않을.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마를 맞대었다. 손을 잡았다. 끌어안았다. K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면 두 개의 심장 박동이 들리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 깜빡깜빡. 눈을 깜빡인다. 그곳에 안락한 어둠이 있었다.
때때론 밤의 거리를 배회하기도 하였다. 무너져가는 세계에서 질서란 무의미한 단어에 불과하였다. 도심에선 성매매와 도둑질과 살인과 마약이 성행하였다. 거리는 네온사인으로 온통 반짝이었다. 마리화나. 헤로인. LSD. 필로폰. MDMA... 빛을 뿜는 간판들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이따금은 좀비 같은 사람들의 뒤통수가 보이었다. 그들의 웃는 듯 우는 얼굴과 네온사인들이 뒤섞이며 녹아내렸다. 그 절망 속에서 K는
“저 너머엔 진짜 밤이 있지 않을까?”
하늘을 바라보는 유일한... 유일한 이였다. 희망을 잃지 않는 유일한 사람.
오늘은 학교가 떠들썩하였다. 누군가 행성을 탈출하였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하는 말은 제각기 달랐다. 307동 Q래. 아냐, P라던데? 비행기를 만들었다고 하더라. 우주선을 빌렸대. 난 행글라이더라고 들었어...
그 날 밤 K는 꿈을 꾸었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밤, 행성을 벗어나 어른이 되는 꿈을.
K가 과학이나 세간의 일 따위에 몰두하게 된 것은 그 즈음이었다.
“이런 건 갑자기 왜 봐?”
이해할 수가 없어 물었다. TV의 네모난 화면과 잡지의 네모난 페이지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제 세상에 반짝이는 것은 태양과 K뿐이었다. 거리엔 시신과 절망이 굴러다녔고 매체는 쓰잘머리 없는 정보만을 배출하였다. 수많은 인구의 사망 소식만을. 그럼에도 K는 온갖 TV 프로와 서적을 찾아보기 시작하였는데.
“알아야하니까.”
“왜 알아야하는데?”
“어른이 되고 싶어서!”
어릴 적부터 포기가 빨랐다. 유달리 느긋하였다. 조급해할 필요 없어. 남들이 하는 만큼만 하면 되지 뭐. 그것도 여의치 않음 안주하면 되는 거고. 그런 생각이 나의 삶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내 눈앞의 K는 언제나,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며 달리고 있다. K는, 태양보다 환히 빛나는 K의 눈은 미래를 향하여 있는 걸까?
얼마 후 K는 무언가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온갖 고철들을 그러모았다. 밤새 무언가를 고찰하였다.
“형, 그거 알아?”
“뭘.”
“저 하늘에서 빛나는 둥근 게 가짜래. 가짜 태양이래. 대기권을 넘어서면 진짜 밤과 진짜 태양을 볼 수 있다는 거야.”
그러곤 알 수 없는 말을....
그 후로도 권태로운 일상이 지속되었다. 성긴 햇볕을 보았다. 맥없는 죽음을 목도하였다. 숱한 영혼들의 이름을 듣고 잊었다. 아이들의 우는 듯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틀면 책상에 왼쪽 뺨을 맞대고 있는 K의 얼굴이 보였다. 감긴 눈의 속눈썹이 길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갈색 머리칼이 흔들리었다. 나는 어릴 적 보았던 개울의 아름다운 황금빛 물결을 떠올렸다. 지금에 와선 결코 볼 수 없는.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방과 후 K가 나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우리는 학교와 운동장과 이제는 소용이 없어진 철물점과 낡은 버스 정류장과 썩은 개울을 지나 어느 한 공터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가 내게 보여준 것은
“짜잔.”
태양보다 밝게 빛나는 황금빛 열기구였다.
“나랑 떠나지 않을래?”
K는 더없이 환히 웃고 있었다.
“형과 함께 어른이 되고 싶어.”
다정한 말을 읊조리며.
K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끝을 맞잡았다. 함께 열기구의 등나무로 탑승하였다. 밸브를 잡아당겼다. 버너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대지가 멀어져갔다. 태양의 홍염이 점진적으로 뚜렷해졌다. 말라비틀어진 숲과 나무. 스러져가는 도시. 사람들. 썩은 강물. 대륙. 바다. 재색의 구름. 옛 추억과 그리움. 무수한 것들을 스치었다. 떠나보냈다.
그리하여 열기구의 황금빛 구피가 성층과 맞닿았을 때,
나는 K와 키스를 하였다.
저 너머의 우주에서 우리는 어른이 될 것이었다.
* 김성중, 허공의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