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에겐 한 가지 룰이 있다.
집 밖에서, 특히 학교에선 전원우에게 아는 척하지 말 것.
민규가 정한 것은 아니었다. 저보다 한 살 많은 전원우가 그렇게 말했다. 싫은데? 하는 게 가오 상해서 나도 그러고 싶었다고 대꾸했고 어쩌다 보니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는 규칙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지켜질 것 같았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 하나만 아니었으면.
민규는 페이스북을 안 했다. 계정은 있는데 사진이나 글을 안 올렸고 댓글도 안 달았다. 친구들이 ‘김민규 ㅋㅋㅋㅋㅋㅋ존나 웃김’하고 태그한 것들을 보다가 진짜 웃기면 ‘좋아요’를 눌러주는 게 다였다. 그럼 김민규는 에센에스를 하나도 안 하는 애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인스타를 했다. 신중한 팔로의 기준을 가진 민규의 인스타 계정은 팔로워가 k를 찍고 m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셀카는 올리고 지웠다. 남아있는 게시물 중 대부분은 풍경 사진이거나 누군가가 민규를 찍어준 사진이었다.(대신 각 잡고 찍은 거면 안 됨) 그 날도 망원동에서 찍은 사진의 ‘좋아요’ 수가 500개가 넘어가는 걸 보며 헤헤거리고 있었는데 페이스북과 카톡 알림이 마구 쏟아졌다. 뭐야, 뭔 일 났나? 설마 내 초딩 졸업사진 올라온 건 아니겠지? 진짜 그거일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페이스북에 들어가려고 할 때 창현에게 전화가 왔다.
-야, 너 지금 뭐 해?
진짜 무엇을 하고 있냐는 순수한 의도가 아니었다. 일이 지금 이렇게 좆됐는데 닌 어디서 뭘 처하고 있냐는 거였다.
“왜.”
-니 대숲에 글 올라왔어. 미친놈아.
“한 두 번이냐. 별 시답지 않은 거로 전화하지마. 끊어.”
그래서 알림이 존나게 왔구만. 민규는 과사가 올라왔을까 걱정했던 게 쪽팔렸다. 그러면서 동시에 기분이 좋아졌다. 페이스북엔 민규에게 여친이 있냐 묻는 글 혹은 좋아한단 글이 꽤 올라왔다. 민규는 그때마다 자신을 태그한 댓글을 보며 쪼개다가 조용히 퇴장했다. 연락 주세요. 이딴 거는 찌질하잖어. 인기 많은 걸 알지만 모른 척 해야 해. 하하버스의 변주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글이겠지, 하며 끊으려던 민규였다.
-아니, 시발. 전원우랑 니랑 이복형제냐는 글 떴다니까.
“뭐? 끊어.”
진짜야? 김민규 진짜냐고. 멀어지는 창현의 외침을 무시하고 곧장 페이스북에 들어간 민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세명고 대숲. #16838번째 외침
3학년 3반 김민규랑 9반 전원우 이복형제라는데 맞나요?]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끝으로 피가 싹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머리카락만 봐도 왔던 길을 돌아가는데 누가 이딴 글을 올렸지? 민규는 친구들에게 전원우의 ㅈ도 말하지 않았다. 출처도 모르는 글에 댓글이 30개가 달렸다. 십 분 전 올라온 글이었으니 앞으로 몇 개가 더 달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댓글 창을 눌러보니 삼 분의 이가 민규를 태그한 것이었고 나머지는 기가 차는 내용이었다. ‘나 김민규랑 전원우 같은 집에 들어간 거 본 적 있음ㅋㅋㅋㅋ’ , ‘근데 왜 성이 다름? 아빠 성 안 따랐낰ㅋㅋ.’ , ‘전원우가 전학 왔으니까 전원우 엄마가 새엄마임?’ 이 댓글엔 리댓이 달려 있었다. ‘나 김민규 엄마 동네에서 봤는데. 전원우만 델꼬 온 거 아님?’ 시팔조팔. 제멋대로 욕이 튀어나왔다. 민규가 방 밖으로 튀어 나갔다. 주말 저녁 9시. 티비는 아빠와 엄마 차지였고 쫑이는 개껌을 씹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냐는 엄마의 말도 못 들은 민규는 건너편의 꽉 닫혀 있는 방문을 열어제꼈다. 야, 노크. 짜증을 내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9반 전원우였다.
“전원우. 니 페북 봤어?”
“나 페북 안 해.”
갑작스러울 만도 한데 원우는 평온한 표정으로 인강을 듣고 있었다. 원우도 페북을 안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민규는 계정이라도 있었지만 원우는 아예 가입조차 안 했다. 그러니 이렇게 태평하지. 민규가 핸드폰을 원우의 눈 앞에 들이밀었다.
“이딴 글이 올라오는데 글자가 눈에 들어오냐?”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원우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렸다. 원체 예민한 눈꼬리가 금세 날카로워져 핸드폰을 낚아채고 댓글을 확인했다. 그새 댓글이 50개로 늘어 있었다.
“어떤, 어떤 새끼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큰소리에 민규의 엄마 아빠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물어왔다. 나중에 얘기할게. 민규는 문을 닫고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어두운 방 안에 둘만 남았다.
“니 나랑 같이 사는 거 애들한테 말하고 다녔냐?”
민규는 당당했다. 진짜 그런 적 없었으니까. 전원우가 이번에 전교 1등 했대. 걔 이번 모고 올 1등급이래. 하면 걔가 누군데? 라고 했다. 같은 집에 사는 걸 아는 사람은 민규와 가족, 원우 그뿐이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원우도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규칙을 만든 사람이 원우인데 자기가 어길 리가. 더더욱이 원우는 애초에 말할 사람도 없었다. 점심과 석식을 같이 먹는 주민형이 유일했다. 그러나 민형과는 그런 얘기 자체를 안 나눴다. 급식 맛 평가나 공부 얘기만 했다. 그럼 대체 누군데? 민규가 소리를 질렀다. 아 시발. 인생이 어째 잘 굴러가나 싶었다. 원우가 들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다시 키고 게시물을 눌렀다.
“뭐하냐?”
“관리자한테 글 내리라고 하게.”
사진도 없고 다 카더라 뿐이잖아. 얘네 싹 다 캡처해서 나한테 보내. 고소해버리게. 인터넷이라고 함부로 글 싸지르면 원우 같은 애들에게 걸려 통장 털리는 거였다. 원우는 머리속으로 얘네를 어떤 항목으로 신고할지 고민했다. 명예훼손이 적합할 듯했다. [게시글 당사자입니다. 이거 고소할 건데 글 내려주세요. 관리자도 고소 가능한 거 아시죠?] 빠르게 메시지를 보낸 원우는 캡처까지 완료한 후 핸드폰을 던지듯이 민규에게 넘겼다. 피디에프 따서 넘겨. 캡쳐만으론 부족할까 봐 확실하게 일러두었다.
“반박글 같은 거 올리지 마. 먹잇감 던져주는 꼴이야. 댓글 같은 것도 달지 말고.”
민규는 남의 일 처리하는 것처럼 구는 원우가 이해가 안 됐다.
“야, 니는 화도 안 나냐? 미쳐 돌아가도 니 일 아닌 것 같지. 어, 우리 가족만 구설수 나고.”
민규는 그 말을 하면 안 됐다. 원우는 화가 안 난 게 아니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고 폭발하기 일초 전이었다. 그래서 이 새끼들의 인생 한 부분을 망쳐주고 싶었고 그 방법을 영민하게 찾아낸 거였다. 원우가 민규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쳤다. 처음 보는 눈빛에 민규가 손을 쳐내지도 못하고 눈만 끔뻑였다.
“그럼, 이 글 올린 새끼 찾아내서 팰까? 댓글 단 새끼들은 대가리 하나씩 깨고? 닌 그렇게 하고 싶음 그렇게 해.”
민규는 알았다. 전원우가 좀 더 막 나가는 애였으면 진작에 그렇게 할 애라는 걸.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게 전원우니까. 원우가 겨우 한 살 많은 것뿐인데 이런 상황에서 어린 티가 났다.
“니만 잘났지, 아주.”
하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민규는 손을 뿌리치고 거세게 방문을 닫고 나왔다. 남겨진 원우의 마음은 알 바 아니란 듯이. 엄마와 아빠, 쫑이 모두 민규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규는 설명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등 뒤의 사람이 안 들었으면 했다. 다음에요. 별거 아녜요. 민규의 부모님은 다행히 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둘이서 싸우지만 마라. 원우가 얼마나 힘들겠니.”
저도 싸우기 싫거든요. 쟤만 안 저러면. 민규는 튀어나오는 속내를 억지로 삼키고 알겠다고 했다. 내일 학교는 어떻게 가냐. 고3이고 나발이고 자퇴하고 싶었다.
늘 원우는 민규보다 20분 먼저 집을 나섰다. 아침 식사는 같이해야 한다는 엄마의 말에 교복까지 다 입고 밥을 먹은 뒤 바로 책가방을 챙겨 학교에 갔다. 민규는 아직 부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밥 먹고 있는데. 아무튼 나중에 나온 민규가 버스를 기다리는데 문자가 왔다. 안 봐도 원우였다. 원우는 투지 폰을 쓰니까. 진짜 씹으려고 했는데 화면에 뜨니까 어쩔 수 없이 봤다.
[애들이 물어보면 대꾸하지마. 괜히 버튼 눌려서 화내지 말고.]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거든? 누굴 분조장으로 아나. 빠르게 자판을 누르던 민규가 도로 지우고 ㅇㅇ 두 개만 보냈다. 쿨하게, 김민규. 쿨하게. 정작 버스에서 모두가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아 교통 카드를 네 번이나 잘 못 찍은 민규였다.
의외로 대놓고 물어보는 애는 없었다. 쑥덕거리는 건 좀 있었는데 그건 가볍게 무시하면 됐다. 원우는 워낙 친구가 적고 말수가 없어 물어볼 사람이 없었고 민규는 …. 궁금해 죽겠단 애들과 눈 마주치면 가볍게 웃어줬다. 차라리 물어보면 죽여버린다, 를 육성으로 내뱉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웃음이었다. 결국 창현이 참지 못하고 야, 어제 페북…. 하고 입을 뗐을 때 민규는 앞에 앉은 체육부장 동언의 등을 찔렀다.
“야, 밥 먹고 2반 애들이랑 오 대 오 축구 하자.”
민규는 축구를 좋아하고 잘했지만, 맨날 하진 않았다. 매일 땀나게 뛰는 게 싫은 것도 있었고 좋은 승률을 가지려면 적당히 조절하는 것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한 번 했는데 존나 잘하는 게 간지잖아. 민규 주위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자연스레 창현의 말은 묻혔다.
“왜, 창현이 할 말 있어?”
조용히 다물란 뜻이었다.
“아, 아니. 내가 2반 애들한테 물어보고 온다고.”
그래, 다녀와. 민규는 자기의 위치를 잘 알았고 그걸 잘 써먹을 줄 아는 애였다. 서열질은 딱 싫은데 최상위에 있는 애. 그게 김민규였다. 야, 김창현! 올 때 메로나!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영어 단어장을 들고 급식실로 가는 원우와 주민형을 마주쳤다. 복도에 있는 이가 모두 원우와 민규를 쳐다보았다. 민형이 어, 민규. 안녕. 하고 인사했고 민규도 손을 흔들었다. 응 민형이도 안녕. 원우는 멀뚱히 민규를 쳐다봤다. 민형이 물어봤을까? 물어봤으면 답을 해줬을까? 궁금증이 솟아올랐으나 민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틀었다. 멈칫했던 애들도 금방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밥 존나 맛 없다. 매점 갈래?”
오랜만에 맛있는 메뉴가 나오는 날이었는데 민규는 밥을 다 남겼다. 핫도그만 먹고. 요구르트는 창현에게 줬다. 애들이 그러자며 우르르 일어났다. 잔반 통으로 향하는데 어디서 김민규 어쩌구 전원우 어쩌구 하는 소리가 들렸다. 쑥덕거리는 소리는 가볍게 무시하기로 했는데. 아까 복도에서 전원우를 봐서 그런 걸까. 들리는 말이 입에 담기도 싫을만큼 저급해서 그런 걸까. 민규가 급식판을 들고 진원지로 다가갔다.
“전원우가 그럼 사생아? 그런 거야?”
“김민규랑 김민규 엄마는 무슨 심정일까. 지 아빠가 두 집 살림한 거잖아.”
“일부다처제 오졌다. 김민규 아빠 씹부럽.”
“야. 여기 자리 있냐? 앉아도 되지.”
남자 셋이었다.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빠르게 스캔해보니 어제 댓글에서 본 이름도 있었다. 피디에프 따느라 외워진 거였다. 원명현 너구나, 씨발넘. 어제 이 새끼가 단 댓글에 베개를 터지도록 팼었다. 어어, 근데 다 먹은 거 아냐? 아까까지 떠들 땐 언제고 민규와 애들이 옆에 앉자 조용하게 밥만 먹기 시작했다. 민규가 국물을 휘젓다 숟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야.”
누굴 명확히 지칭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민규의 친구들은 급식판만 바라보거나 딴청을 피웠고 떠들던 셋만 민규를 쳐다보았다.
“맛있냐?”
“어?”
“남 얘기 씹으니까 맛있냐고.”
저 희번덕한 눈을 똑바로 쳐다봐야 할까. 아니면 피해야 할까. 한 명은 내리깔고 한 명은 먼 곳을 응시했고 바로 맞은편에 앉은 애만 민규의 시선에 묶여 계속 눈을 마주치는 중이었다.
“적당히 개겨.”
민규가 식판을 맞은편 애의 식판 위로 엎었다. 그 바람에 잔반이 튀어 교복 셔츠가 더러워졌다. 민규는 못 볼 꼴 봤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있는 애 의자를 발로 찼다. 때리진 않았다. 의자가 밀려나서 넘어졌을 뿐. 민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내가 더러운 걸 못 봐서 순간.”
야, 근데 니가 치우고 가라. 기분이 잡쳤다. 어쩌다가 가족을 욕 먹이게 됐는지. 민규의 친구들이 겨우 일어난 애의 뒤통수를 한 대씩 치고 갔다. 야, 그냥 싸물고 밥이나 쳐 먹지. 급식실에서 나오는데 뒤에서 누가 민규의 손목을 잡았다. 전원우였다. 민규가 단숨에 돌려질 만큼 거센 악력이었다.
“야, 김민규. 뭐 하는 짓이야.”
“너야말로 지금 뭐 하냐?”
“내가 학교에서 조용히 있으랬지.”
애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핸드폰을 들어 찍는 애들도 있었다. 원우가 렌즈를 쳐다보았다. 초상권 침해로 털어줄 생각이었다.
“그럼 우리 가족이 욕 듣고 있는데 참고 있냐? 내가 니 말만 들어야 하는 등신이야?”
“야.”
“닌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난 못 참어.”
어제 들었던 말을 되돌려주는 민규에 원우는 헛웃음이 나왔다.
“어떤 게 두 분을 위한 일인지 몰라?”
“어, 몰라. 모르는데 이럴 때 내버려 두는 건 아니란 건 알겠다.”
뭐야, 둘이 진짜 형제야? 민규가 여자애를 냅다 쏘아봤다. 진짜 일 치룰 것 같은 눈깔에 떠들던 애들이 다 합죽이가 되었다. 민규는 원우의 말을 무시하고 교실로 향했다. 야, 나 빼고 축구해. 민규 없으면 오늘 축구는 없다는 걸 알면서 하는 말이었다. 민규를 말리지도 못하고 친구들은 뒤꽁무니를 쫓았다. 민형이 원우의 등을 밀었다.
“형, 가요. 쟤 지금 어떤 말 해도 안 들어요.”
원우는 민형에게 이끌려 발걸음을 떼다 아직도 모여 있는 애들에게 그랬다.
아까 동영상이나 사진 찍은 애들 싹 다 고소할 거야. 이름 다 외웠으니까 삭제해도 소용없어.
그 자리의 모두가 저 돌아버린 눈빛이 형제가 아닌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원우와 민규는 형제가 아니었다. 민규의 엄마는 중학교 교사를 하다 민정과 민규를 낳고 전업주부가 되었고 아빠는 P 시에서 치과 병원을 하는 의사였다. 원우의 어머니는 민규의 어머니와 초, 중, 고 동창이었고 아버지를 소개해준 게 민규의 어머니였다. 그래서 둘이 어렸을 때부터 친한 거였냐고? 아니. 민규는 원우를 열일곱 살 때 처음 봤다. 새벽 세시에. 엄마 아빠는 전화를 받고 거실을 서성이다 벨 소리에 튀어나가 문을 열어줬다. 온통 멍으로 얼룩진 여자와 목에만 멍이 든 남자애가 서 있었다. 원우의 어머니, 정선과 원우였다. 엄마는 정선을 부둥켜 안고 울기 시작했고 아빠는 우두커니 서 있는 원우의 손을 잡아 집안으로 들였다. 민규는 쫑이를 안고 돌아가는 상황이 파악이 안 돼 입술만 오므렸다 폈다. 원우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찰나였다. 원우는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창피함과 미안함 그 어디쯤이었다. 민규는 따라 눈을 내리다 원우의 맨발을 보았다. 급히 도망쳐 나오느라 상처가 나고 흙먼지가 묻은 발. 그리고 다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민규가 쫑이를 내려놓고 원우를 데리고 욕실로 갔다. 씻고 나와. 들어간 원우는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민규는 다시 쫑이를 안고 원우는 어디 갔냐는 부모님에 욕실을 가리켰다. 그리고 원우가 나올 때까지 그 앞에 서 있다 깨끗한 잠옷을 내밀었다.
“크면 말해. 다른 거 줄게.”
원우는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민규도 기억하겠지만 그 결이 비교도 안될 만큼 정확하고 세세하게. 따뜻하게 맞춰져 있던 물의 온도와 문 밖으로 쫑이를 어르던 민규의 목소리와 나왔을 때의 집 안의 훈훈함. 살았다는 안도감. 잠옷을 건네주던 손. 다정을 다정인 줄도 모르던 얼굴. 열여덟의 원우가 처음 느껴본 무던한 세심함. 원우의 짝사랑이 시작된 밤.
정선과 원우는 유학 간 민정의 방에서 지냈다. 둘이 방에 있을 땐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 이유가 워낙 모자가 말이 없어 거의 들리지 않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주 작은 소리로 대화를 해서 민규가 못 들었던 것이었다. 습관이었을까, 배려였을까. 원우는 밥을 남기지도 않았다. 먹는 걸 보면 입이 짧은 것 같은데 식사를 거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원우는 새벽에 씻었다. 종종 민규가 밤늦도록 핸드폰을 하다 화장실에 가다가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를 몇 번 들었다. 그제야 원우가 눈칫밥을 먹는단 걸 알았다. 민규는 화가 났다. 부모님은 눈치 줄 사람은 전혀 아녔다. 오히려 오래전 있었던 일로 죄책감을 갖고 정선과 원우에게 더 잘해주고 싶어 하는 분들이었다. 지레짐작으로 알아서 기는 원우가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이걸로 성질을 부리면 부모님이 더 걱정할 것 같아 민규는 꾹꾹 참고 있었다.
상황이 좀 나아지고 원우는 민규가 다니는 학교로 전학을 왔다. 원우를 아빠 쪽에서 데리고 있었는데 학교를 보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민규와 같은 학년으로 다녀야 한다고 했다. 원우는 무감한 낯으로 수긍했다. 개빡치겠다. 민규는 원우가 새로 교복을 맞추는 걸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원우는 소매에 달린 단추를 한참이나 만졌다.
학교 가기 전 날 원우는 민규에게 학교에서 아는 척을 하지 말라고 했다. 한 달 동안이나 말이 없다가 대뜸 붙이는 말이 저거였다. 어이없어. 민규는 내가 더 그러고 싶었다는 투로 좋다고 했다. 원우는 민규가 학교에서 꽤 인기가 많다는 걸 알았다. 부유한 집안의 성격과 얼굴 모두 흠잡을 데 없는 인기 많은 애. 그런 애가 자기와 같이 다니면, 아니 아는 척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추문들이 따라올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럴 바엔 서로 모른 척하는 게 훨씬 나았다. 그게 원우가 민규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정선은 일을 해서 원우를 혼자 키울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고 싶어 했다. 그래서 원우에게 일 년만 참아달라고 했다. 둘이 따뜻하게 잘 수 있는 집의 전세금을 벌어 아무 위협 없이 살자고 했다. 원우는 엄마를 믿었다. 그렇게 공장으로 떠난 엄마와의 연락이 끊기고 민규의 부모님에게 주기로 한 매 달의 양육비를 처음부터 준 적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원우는 엄마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저를 데리고 그 지옥에서 꺼내준 엄마니까. 제게 무슨 짓을 해도 원우는 그 빚을 갚아야 했다. 그리고 민규네에게도. 그래서 더 독해졌다.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울 만큼 공부했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이 틀어질 만큼 펜을 쥐었다. 허리 디스크를 얻게 된 것도 이쯤이었다.
그 즈음 민규가 일본 여행을 다녀와서 원우에게 준 것은 동전 파스였다. 원우는 울고 싶었다. 민규는 속도 모르고 자꾸만 자기에게 마음을 빌려줬다. 갚아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원우는 모르는 척 그걸 받고 아주 깊게, 아주 세밀하게 기억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떳떳해지자. 나중에 아무렇지 않게 돌려주자. 받았던 마음을 배로 줘도 구차해지지 않을 사람이 되자. 내가 가진 것들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보고 원우는 갖고 있던 죄책감이 더 커져 민규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게 힘들었다. 내가 더 조심했으면. 내가 더 없는 사람처럼 굴었으면. 민규가 다치는 일이 없었을 텐데. 두 분이 걱정하는 일이 없었을 텐데. 원우는 아무것도 잘못 하지 않았는데 모든 게 다 제 탓인 것 같았다. 이제 어떡하지. 학교에서 얼굴 붉혀가며 싸웠으니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잡아뗄 수도 없다. 원우가 펜을 돌리다 집중이 도저히 안 돼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악! 너무 세게 박았다.
그렇게 학교를 뒤집어 놓고 정작 당사자들은 뻔뻔하게 수업을 듣고 밥을 먹었다. 사실 뻔뻔한 척이었다. 야 진짜 우리 이복형제 그런 거 아니거든. 부모님들끼리 친한데 전원우 사정 때문에 당분간 같이 사는 거야. 그니까 한 번만 더 사생아 어쩌구 입에 올리면 확 다 찢어..라고 해명하는 것보단 모른 체 구는 게 더 현명한 일이라는 걸 둘 다 잘 알았다. 둘을 궁금해 죽으려던 학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해졌다. 재미있는 일이어도 제 일이 아니면 금방 시들한 법이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복도에서 마주치면 애들은 원우와 민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니네 어떡할 거냐? 라는 뉘앙스였다. 그럴 때마다 분위기를 푸는 건 다름 아닌 민형이었다.
“어, 민규 안녕.”
민형은 이과면서 원우와 뺀질 나게 붙어 다니는 애였다. 도서관에서 친해졌단다. 민형이 읽고 싶은 책을 늘 원우가 빌려 가서 누군지 얼굴 한번 보려다가. 그렇게, 덥석. 그래서 같이 밥도 먹고 가끔 매점도 가는 모양이었다. 원우형, 원우형. 하면서. 그래서 민규는 어, 안뇽. 이라 해놓고 속으론 주민형 개새끼, 했다. 니가 전원우를 알아? 하는 마음이었다. 원우는 그러거나 말거나 얼른 이 자리를 뜨고 싶어 민형의 니트를 잡아끌었다. 벌레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민규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형, 오늘 야자 말고 까페 가서 공부할래요?”
쟤 전원우 좋아하냐?
“그럴까? 근데 선생님이 허락해 주시려나?”
어쭈.
쌍으로 난리 났다. 친구들은 민규를 툭툭 밀었다. 이제 가자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을 죽일 듯이 쳐다보는 민규에겐 들리지 않았다. 분명 찌질한 짓인 걸 아는데 민규는 자기도 모르게 전원우의 이름을 불렀다.
“...왜?”
“오늘 쫑이 니가 목욕 시키는 날이잖아.”
아뿔싸. 너무 갔다. 지가 말해놓고 자존심에 제대로 금 간 민규가 눈을 감았다. 차라리 누가 목을 때려서 기절 시켜줬으면. 하지만 일을 벌여놓은 사람이 수습을 해야 하는 법.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한 민규가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저번에 너 시험 기간이라고 내가 두 번 더 했다. 이번엔 안 봐줘.”
수습은 개나 주고 될 대로 되라지. 민규는 콱 꽹과리를 들고 복도를 달리고 싶었다. 깽깽깽깽! 쟤 미쳤나 봐. 그래서 저런 소리를 하는구나. 하는 정당성을 얻지 않을까. 민규의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 재만 남기 직전에 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엥? 고개를 끄덕였다고?
“알겠어.”
그 짧은 대꾸 후 원우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김민규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거 아냐? 동네방네 다 말하고 다녀라 아주. 옥상에 올라가서 한 음절씩 ‘김-민-규-개-새-끼-야!’ 하면 이 마음이 풀리려나. 그리고 원우는 반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민형을 그 자리에 두고 왔다는걸.
그 시각 민형은 눈을 반달처럼 접어 웃고 있었다. 이쁘게 웃는다고 모두 생각했다. 단 한 사람 김민규 빼고. 뭘 쪼개. 열아홉 민규의 마음은 삐딱해도 한참을 삐딱했다. 민형은 눈물까지 닦고 나서야 겨우 말을 뗐다.
“아, 너네 너무 재밌다.”
“신경 꺼.”
기분이 제대로 상할 대로 상한 민규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수업 시간 종이 쳤다. 복도에서 시간을 다 잡아먹는 바람에 매점을 못 갔지만 애들은 불만 없이 가자며 민규의 팔을 쳤다. 야, 담 시간에 가자. 내가 살게. 제멋대로여도 민규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였다. 애들이 김민규 이름을 부르며 교실로 들어갔다. 복도가 금세 한산해졌다. 교실 밖에 있는 건 민규와 민형 둘이었다.
“그런데, 엄연히 원우형이 한 살 많은데 너, 너 거리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이건 물은 게 아니라 시비를 걸어온 거였다. 민형은 아직 웃고 있었고 민규만 입매가 단단해졌다. 민규는 모든 일을 유하게 넘기는 편이었는데 다만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저와 관련된 일들을 함부로 떠들면 미친개처럼 굴었다. 민규가 천진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민형아. 우리 집 일에 신경 끄라니까.”
수업 잘 들어. 민규는 다정한 말로 민형을 위하고 지나쳤다.
다녀왔습니다. 밤 열한시쯤 집에 들어왔는데 쫑이와 원우가 거실에 서 있었다. 타월로 쫑이를 감싸 안고 반바지 차림인 걸 보니 정말로 쫑이를 목욕 시킨 듯했다. 그냥 한 말이었는데. 괜히 저 땜에 정말로 공부를 못한 거 아닌가 싶어서 민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손을 뻗어 쫑이를 건네받았다.
“엄마가 쫑이 산책 시켰대?”
안경에 물이 튀어 티셔츠에 대충 문대던 원우가 흐릿한 민규에게 초점을 맞췄다.
“아니, 못 여쭤봤어.”
“산책 시키고 목욕하는 게 좋은데.”
“미안.”
민규가 원우를 쳐다봤는데 도통 안 보여 무슨 표정인지 모르겠다. 민규는 가만히 원우를 보다가 말리는 건 자기가 하겠다며 쫑이를 안고 방으로 갔다. 방금 고마워, 라고 한 것 같았는데 맞나. 원우와 민규가 각각 맞은편 문 앞에 섰다. 원우가 먼저 문고리를 당기는데 민규가 대뜸 그랬다.
“기분 나빠?”
“뭐가. 주어 목적어 다 빼먹고 그렇게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하냐.”
“으, 수험생처럼 굴지 마.”
“왜 넌 아닌 척이야.”
말 다 했으면 들어간다. 오늘따라 자꾸 말을 걸어오는데 원우는 도통 가슴이 떨려서 헛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얼른 들어가서 진정시키고 영어 개념 복습을 해야 했다. 근데 김민규는 원우를 놔줄 생각이 도통 없어 보였다.
“아니, 내가 너한테 야, 야 거리는 거. 기분 나쁘냐고.”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데 기분이 나빠야 하나. 원우는 그런 거에 별생각 없는 편이었다. 민규는 원우와 처음 만났을 때 자기와 동갑인 줄 알았고 어쩌다 보니 계속 말을 까고 있었다. 설사 기분이 나쁘다고 이제 와서 형이라고 부르라는 것도 웃겼다. 그리고 사실 더 친밀한 느낌이 들어 내심 좋았다. 하여튼 전원우도 이해 못 할 인간이었다.
“별로. 나 들어간다.”
원우의 방문이 닫혔다. 민규는 쫑이를 안고 풀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거 봐. 주형민 암 것도 모르면서! 이긴 기분에 쫑이의 까만 코에 뽀뽀했다. 쫑이 형아가 이쁘게 말려줄게용. 쟤는 왜 콧노래야. 빡치게. 민규의 허밍을 들은 원우가 이어폰의 볼륨을 높였다.
민규가 정말 대학 안 갈 거냐는 선생님의 닦달에 잉잉 우는소리를 내고 있는데 9반 담임과 상담 중인 원우가 눈에 들어왔다. 슬그머니 학년 부장도 와서 말을 얹고 있었다. 서울대를 보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엄마 아빠도 내심 기대하는 것 같던데. 야, 김민규! 집중 안 해?
“아 쌤. 전 대학 욕심 없다니까요.”
진짜였다. 대학을 못 갈 성적은 아니었는데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아무 대학이나 가는 건 돈 낭비였다.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이미 허락 하셨는데여.”
포기한 거지만. 암튼 그거나 그거나 대학을 안 간다는 의미니까 상관없었다. 민규가 놔달라고 징징거릴 동안 원우는 상담을 마쳤다. 쌤 저 가볼게요. 별안간 민규가 타령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무실을 나서는 원우에게 슬쩍 어깨동무를 했다.
“미쳤어?”
이제 아주 대놓고 원우에게 아는 척을 해오는 민규였다. 밥 먹다가 보면 맛있게 머겅. 하는 예의도 차렸다. 원우가 뜨악한 표정으로 팔을 뿌리쳤다.
“헐. 나 상처받았어.”
“많이 받아라.”
“근데 쌤이 너 어디 쓰래? 무슨 과?”
“알 거 없어.”
딱 그 네 글자를 말하곤 원우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와, 대박 너무해. 대학 알려주면 지원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는데. 아, 서울대는 못 가려나? 그 옆 학교라두. 아까 대학 갈 생각은 없다더니. 민규는 만사가 태평했다.
민규가 대숲에 글을 올린 범인을 알게 된 건 아주 우연이었다. 11월,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원우가 씻는다고 욕실로 가고 민규는 원우의 방에 누나가 두고 간 만화책을 꺼내러 갔다. 책장에서 27권을 꺼내는데 뭐가 떨어졌다. 담배였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 괜히 두리번거렸다. 나쁜 짓 하나도 모를 것처럼 생겨서 순 양아치였다. 근데 전원우 이미 스무 살이잖아. 그래도 학생이니까 담배 피우면 안 되는 거 아냐? 민규는 잠시 청소년 보호법을 생각하다가 그냥 제자리에 두었다. 제대로 몰라서 그런 게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돌아서려는데 다른 서류 봉투에 시선이 꽂혔다. 만화책과 문제집 사이에 껴 있는 갈색 봉투가 이질적이어서 그랬던 걸까. 민규는 홀린 듯이 들어있는 수십 장의 종이를 꺼냈다. 원우가 명예훼손과 허위 사실 유포, 초상권 침해로 고소하기 위해 모은 증거들이었다. 전에 봤던 거라서 대충 넘기고 있는데 한 장의 종이에 손이 베이는 바람에 서류가 다 바닥으로 흩어졌다. 아, 씨. 존나 아퍼. 입에 손가락을 넣고 쭉 빠는데 바로 발 치에 떨어진 카톡 사진이 좀 수상했다.
11반 김주은 | 야 ㅋㅋㅋ그래서 아직도 전원우는 몰라? 니가 글 올린 거?
어ㅋㅋㅋㅋ모르는 듯. 알면 좆돼
11반 김주은| 근데 진짜 이복형제 맞대?
몰라. 엄마가 아울렛에서 김민규 엄마가 전원우한테 우리 아들 거리면서 쇼핑하는 거 봤다는데. 맞겠지.
학기 초 엄마가 수험생이 된 기념으로 민규와 원우에게 옷을 사줬던 기억이 빠르게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카톡 분량은 그게 끝이었다. 캡처 사진 밑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세명고 3학년 11반 김주은. 세명고 3학년 13반 주민형.
전원우가 어떻게 이 카톡을 보게 됐을까. 주민형한테 따져 물었을까. 어떻게 너가 이럴 수 있냐고. 그리고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 민규는 개처럼 민형을 찾아다니며 생각했다. 실은 이복형제니 뭐니 떠들어대도 상관없었다. 그 위에 걸쳐진 추잡한 소문이 싫었을 뿐. 부모님을 거들먹거리고 전원우를 사생아 취급하는. 그래서 누가 글을 올린 거냐고 찾지 않았다. 괜히 전원우가 눈치 볼까 봐. 그냥 앞으로 같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데 있을 작은 해프닝으로 여겼다. 그런데 범인이 누군지 안 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민규는 11반 최세훈에게 종종 주민형이 폐휴지 버리는 곳에서 담배를 핀다는 걸 알아냈다. 이 뻔한 새끼. 민규가 전 날 찾은 공기계 핸드폰을 들고 컨테이너로 향했다. 역시나 범생이들이 모여서 즐건 담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속엔 주민형도 있었다. 민규는 경주마처럼 직진해서 주민형의 멱살을 틀어쥐고 컨테이너 벽에 밀쳤다. 세게 밀치지도 않았는데 얇은 벽 때문에 소리가 요란했다.
“야. 니 변태 새끼지.”
주민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거 안 놔? 어, 못 놔. 시발럼아.
“니 전원우 좋아하냐? 그럼 시발 고백을 하든가. 음침하게 뒤에서 개수작이야.”
주위가 술렁거렸다. 증거도 출처도 없는 모호한 말들. 하지만 어느 것보다 확실한. 민형이 잡힌 멱살을 풀려 팔을 밀어냈지만 역부족이었다.
“증거 있어?”
“아니 없는데. 근데 니는 왜 증거도 없으면서 대숲에 글을 싸질렀냐.”
“....”
“니네 엄마가 봤다고? 그럼 나 니네 엄마한테 물어봐도 되지. 댁이 말한 걸 아들 새끼가 친한 형 좋아해서 고대로 글 올렸는데 고소장 드려도 되냐고.”
주민형이 진짜 전원우를 좋아하든 말든 그건 안중에도 없었다. 민규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잘 알았다. 민규가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애들이 더 크게 떠들어댔다.
“야, 이거 놓고 얘기해.”
“그래, 너가 나한테 얘기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야.”
민규는 애초에 민형의 해명이나 변명을 들으러 온 게 아니었다.
한 가지는 이 핸드폰에 대고 니가 글 올렸다고 자백하는 거야. 왜, 싫어? 아직 하나 남았어. 이걸로 대가리 깨질 때까지 처맞고 대숲에 니가 올린 거였다고 글 쓰는 건데. 어떡할래. 민형아?
“너 학교 폭력으로 신고할 거야.”
민형이 떨리는 턱을 겨우 치켜들고 말했다. 민규가 그 턱을 잡고 아래로 내려 눈을 마주했다. 턱을 누르는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잘게 떨렸다.
“어, 해봐. 할 수 있는 거 다 해봐. 그게 되나.”
내가 우리 가족 일에 신경 끄랬지. 전원우가 이복 형제건 더 좆같은 관계건 니가 입에 올릴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민형아, 선택해. 나는 후자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민형은 이 더운 눈을 전에도 봤었다. 원우에게 카톡을 들키고 목이 졸렸던 때. 침착한 사람은 폭력을 쓸 때도 차분했다. 학교에 신고할 거냔 말에 원우는 그랬다. 아니, 너 성인 될 때까지 기다릴 거야. 책임지는 법을 배워야지.
민규는 녹음 파일을 수능이 끝나고서야 원우에게 줬다. 어떻게 얻었냐는 말에 그냥 설득했다고 했다. 원우는 칼을 들이밀고 돈을 달라 하는 게 구걸이냐, 협박이냐? 하고 물으려다 알겠다고 했다. 주민형이 좀 괘씸해서. 고소는 진짜 했다. 민규와 같이. 합의는 돈을 들고 와서 하세요. 원우가 가장 많이 한 말이었다. 민규는 원우가 좀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도 써먹어야지.
수능이 끝나고 그래도 학교에는 가는 민규와 달리 원우는 알바를 시작하고 두세 번 나갈까 말까였다. 선생님이 출결이 들어간다, 어쩐다 했지만 씨알도 안 막혔다. 가끔 민규가 학교에 좀 오라고 해야 느즈막이 얼굴만 비추고 알바를 하러 갔다. 학교 정문엔 <고려대 수석 입학 전원우> 플랜카드가 걸렸다. 두 개만 더 맞았으면 고려대가 아니라 서울대였을 텐데. 서울대를 못 간 건 원우인데 민규가 아쉬운 낯이었다. 전액 장학금을 준다는 학교 중 제일 높은 학교를 골라서 간 것도 모르고.
민규가 스무 살이 되던 날, 원우는 민규에게 시계를 선물했다. 알바비와 합의금을 몽땅 쏟아 살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시계였다. 좋긴 한데 얼떨떨했다. 이걸 왜 줘? 하는 민규에게 원우는 스무 살 기념이라고만 했다. 민규는 원우 스무 살 때 아무것도 못 해줬는데. 민규는 고민하다 인스타에 시계가 크게 나온 사진을 올렸다. 협찬인지 묻는 댓글은 죄다 차단했다. 감히 어떤 시계인데.
스무 살이 되고 술을 물처럼 마셨지만 외박은 절대 안 했다. 못해도 열한시 반이 되면 나 간다! 하고 튀어나왔다. 부모님이 무서워서? 아니, 두 분은 이제 자식들 걱정할 거 없다고 매일 놀러 가기 바빴다. 열두시쯤 집에 도착하면 원우도 알바를 마치고 씻고 나왔다. 그럼 민규는 해장한단 이유로 같이 라면을 끓여먹자고 했다. 원우는 속이 더부룩하다면서 김치를 꺼냈다. 민규는 원우가 먹는 걸 보며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구 늘어놓았다.
“넌 하고 싶은 거 없어? 스무 살 공부한다고 못 즐겨서 더 하고 싶은 거 많을 것 같은데.”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데. 대답하기 귀찮은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게 정말 좋았다.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거였으니까. 김민규한테 고백? 하지만 이건 말할 수 없었다.
“…인형 뽑기?”
“그건 암 때나 할 수 있잖아.”
“난 한 번도 안 해봤어.”
거짓말. 진짜. 에이, 뻥.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왜 해. 야, 그럼 너 저번에 들고 온 지방이는 뭐야. 그거 주민형이 준 건데? 어딨어, 불태워버릴 거야. 뻥임. …너 진짜 개 너무하다. 사실 세희가 줬어. 야 당장 갖고 와. 더 싫어.
졸업식 전 날이었다. 내일이면 졸업한다고 또 술을 마신 민규가 침대에 누워 야광별을 보고 있는데 원우가 방에 들어왔다. 그러더니 민규 보고 일어나라고 했다.
“왜?”
우리 바다 가자. 알바 끝나고 한 잔 했는지 원우의 얼굴이 빨갰다. 대뜸 바다를 가자는 원우에 민규가 손을 내저었다. 우리 내일 졸업식이야. 알아.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투였다. 민규가 물었다. 진심이야?
“응. 바다 가고 싶어졌어. 나 여기 와서 바다를 한 번도 못 봤어. 예전 살던 곳은 바다 옆이었단 말이야.”
민규는 자신이 취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우의 손을 잡고 서울역으로 갔다.
밤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부산이었다. 서울 촌놈이라 바다 하면 부산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새벽에 부산역에서 내려 비몽사몽인 채로 해운대에 갔다. 택시비가 만원 넘게 나왔다. 미쳤다. 꼬인 혀로 중얼거렸다. 원우는 하나도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오만 원을 주고 삼만 얼마를 거슬러 받았다. 새벽 바다는 개 추웠다. 진심으로 너무 추워서 귀가 떨어진 건 아닐까 몇 번이나 귀를 만져봤다. 원우가 동영상으로 그런 민규의 모습을 남겼다. 추워서 볼이 아픈데 해가 떴다. 씨뻘건 해가 솟는 걸 보니 정신이 또렷해졌다. 원우가 우와, 하면서 또 동영상을 찍었다. 민규가 스물 한 살을 축하한다고 선물한 핸드폰으로. 해가 거의 다 넘어왔을 때였다.
“나 아까 엄마 만나고 왔다.”
아까? 지금 막 해가 떴으니까 어젯밤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원우가 몸을 웅크렸다. 민규가 좀 더 옆으로 붙었다.
“나보고 가자고 했는데. 엄마가.”
“응.”
가슴이 시큰거렸다. 진짜 가면 어쩌지. 민규는 발갛게 튼 원우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엄마를 따라간다고 하면 그때는 쿨, 가오 그딴 건 버리고 매달리고 싶었다.
“…잘 살라고 했어. 엄마한테. 아직 내가 엄마를 책임 못 질 것 같다고.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잘 살라고 했어.”
잘 했지. 나 잘했지, 민규야. 원우는 울지 않았다. 다만 얼굴이 간지러워 손바닥으로 마구 비볐다. 전에는 차라리 혼자이고 싶었는데 막상 진짜 혼자되니까 마음이 이상하더라. 작게 읊조린 말이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해가 완전히 떠올랐다. 해는 아주 멀리 있는데 그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져 따뜻하단 착각이 일었다. 그 순간 민규는 어쩐지 원우 대신 울고 싶어졌다.
“춥다. 그치?”
“누가 너 혼자 냅둔대.”
민규가 몸을 돌려 원우와 마주했다. 그림자가 하나였다. 민규가 원우의 손을 잡아 제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아주 살짝, 아주 가볍게 원우의 입술에 뽀뽀했다. 입술이 터 까슬한 감각의 첫 키스였다.
“계속 같이 있을 거잖아. 나도 있고 정미희씨, 김배성씨도 있고. 쫑이도 있잖아.”
“…넌 고백을 무슨 이런 식으로 해?”
아, 분위기 다 깨졌어. 민규가 발을 굴렀다. 그러다 눈꼬리가 장난스럽게 길어졌다.
“좋아한다고 말도 못 하는 애한테 그런 말은 안 듣고 싶거든.”
원우의 눈이 땡그래졌다. 어떻게 알았어? 내 일기 봤지! 놀리던 민규의 눈도 똥그래졌다. 그런 걸 일기에 써놔? 그냥 알았는데? 내가 널 좋아한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마지막 말은 안 했다. 마지막 가오랄까. 원우가 민규를 밀쳤다. 웃는데 볼이 아팠다. 근데 좋아서 자꾸 웃었다. 야, 다시 붙어. 왜? 인스타에 올려야 해. 우리 1일 기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