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작열한 햇빛이 족히 100년은 넘은 듯한 나무기둥을 타고 내려왔다. 까슬거리는 나무 가시에 손이 찔려 피를 봐도 아무렇지 않은 듯 기둥을 더 세게 쥐었다. 얇고 하얗지만 거친 손이, 다시 한번 기둥을 쓸어내린다. 붉은 선혈이 번지자 한참을 뚫어지게 제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이내 툭-하고 떨어뜨린 원우가 흐르는 물에 손을 헹궜다. 심해 속 수압이 몸을 짓누르는 것처럼 얉은 상처 표면에 물이 쏟아졌다. 방금 나무가시에 긁혀 떨어져나간 살점처럼 떨어진 꼬리 끝부분에서 통증이 몰려온다. 눈썹을 찡그리고 세면대에 몸을 기댔다. 부릅뜨고 있는 눈에서 쥐도새도 모를 사이에 눈물이 떨어졌다.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는 제 꼬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세면대에 잔뜩 받은 물 때문에 눈물을 흘렸는지 흘리지 않았는지조차 몰랐다. 그저 물 몇백 방울에 눈물 한 방울이 더해진 것 뿐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형, 그거 알아? 인어는 꼬리 끝부분이 살짝 떨어져나가면 그 후에 사랑하는 사람도 잃게 된대. 그러니까 약간 예언인거지. 아 나는 얘랑 헤어지게 되겠구나.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르대. 사고로 잃을 수도 있고 그냥 단순하게 싸울 수도 있고 그렇다더라. 신기하지 않아? 눈이 빛나는 채로 제게 인어에 대해 말해주던 김민규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인어인데, 나에 대해 내가 모를리 없지.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이 틀렸음을 민규는 매번 깨우치게 해서 사랑했다. 나도 모르는 나를 네가 알아. 물수제비를 뜨다가 여덟번째에서 가라앉은 돌이나, 뜨고 나서 첫번째에서 아주 빨리 가라앉은 돌이나. 물 속 깊이 가라앉는다는 결과는 같다. 딱히 부정할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김민규와 다른 수많은 사람을 비교하는 건 불가능했다. 객관적으로는 가능하다 할지도 몰랐으나 마음 한 켠에서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아우성쳤다. 김민규는 좀 달랐다. 아니, 많이 달랐다.
김민규의 시도때도 없는 다정함이 그리웠다. 옆에 있을 때는 그렇게 귀찮더만 없으니까 허전한게 꼭 오래 전 있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윤곽이 드러나던 하얀 쇄골에 이를 박고 진득하게 물고 빨던 김민규가, 꼬리 비늘을 만지작거리며 살풋 웃던 김민규가 보고싶어 환멸이 났다. 전원우 진짜 미쳤나. 곁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떠날 때처럼 가볍게 떠나보내던 원우가, 민규만은 가벼히 보내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눈을 꿈벅거리며 천장으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얇은 손목에 청록색 핏줄이 난 길 그대로 김민규라는 이름이 정직하게 써 있었다. 내 이름도 써 있을까. 다른 손으로 손목을 움켜쥐며 조용히 읊조린다.
한참동안 잠에 빠져들어 깨어보니 어느새 붉은 노을과 함께 눈이 부신 햇빛이 화장실에 난 작은 창문으로부터 새어들어왔다. 하얗다 못해 색깔조차 없어 보이는 욕조가 눈에 담겼다. 손목을 바라보자 파란색과 초록색이 오묘하게 섞인 청록색 핏줄이, 그리고 그 아래 깔끔하게 써있는 '김 민 규' 라는 이름에 시선이 갔다. 하긴, 지워질리가 없지. 후- 하고 손목에 맺힌 물기를 털어낸다. 단지 이렇게 하면 김민규 이름이 더 잘 보일까 라는 이유였다. 괜히 아릿한 느낌에 물 속으로 전신을 담갔다가 나와 파하- 하곤 숨을 내뱉는다.
김민규와 함께했던 시간이 다시 돌아왔으면 했다. 잃고 싶지 않았는데. 잔뜩 머리를 헝크러뜨리며 절망했다. 저를 스쳐갔던 사람들은 많았다. 남자 여자 연상 연하. 그만큼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잃었다. 잃어도 상관없지 않은 사람은 김민규가 유일했다. 저를 보며 해사한 웃음을 짓는 아이를 잃고 싶지 않았다. 오랫동안 제 옆에 있기를 바랐다. 매일 머리를 헝크러뜨리고 푸스스 웃는 김민규가 금방이라도 올 것 같아서 끊임없이 기다린다. 언젠가는 오겠지. 온다고 약속했는데. 사실 오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다. 그냥 올거라고 끝까지 믿어보고 싶었다. 오겠지. 올거야. 올건데......
한순간 없어져버린 김민규가 야속했다. 웃으면서 나갔었는데 왜 아직도 안와. 입을 삐쭉거리곤 물 속으로 또 다시 들어갔다. 매일 밤 욕조가 차갑다며 칭얼대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침이 되면 바로 보러올게 라며 배시시 웃는 김민규가 보고 싶어서, 제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예쁘다고 조곤조곤 말하는 김민규가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어버려 물 속에서 눈을 감고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살짝 곱슬거리는 머리가 완전히 펴졌다. 머리 끝부분을 살살 잡고 꼬았다. 아 김민규 보고싶다. 며칠이내로 온다면서 거짓말 치고 앉아있네. 욕조 안에서 혼자 지낸 것만 해도 한달이었다. 김민규가 없어진지도 한달이었다. 제 경험으로는 아직 헤어진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김민규가 그 예외일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정말, 정말로.
한 번만 다시 사랑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민규야.
낙화유수;落花流水
모든 것들은 권력을 가진다. 서 있는 자리에서 원하는 만큼 힘을 가진다. 각각 가지고 있는 권력은 어쩌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도 뜻했다 . 전원우는 최소한 타인을 마음대로 할 '힘'은 있었다. 파도를 휘몰아치게 해 운명이 여신이 정해놓은 실이 본래 길이보다 짧아지게 하거나 난파된 배를 살려서 길어지게 하던가. 그런 전원우가 인간 하나 때문에 바다를 떠난다고했다. 무엇을 그만둘 때도 책임이라는 걸 져야했다. 뭐만 하면 책임이래. 짜증나게. 위로부터 온 편지에 써 있던 말이 이해되지 않아 원우가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내가 가진 힘이었고 힘을 가지면서 지내왔었고, 그 힘을 포기하면서 이제까지 했던 것들에 책임을 지라니. 내가 원해서 그 자리에 올라갔나. 태어날 때부터 그 자리였는데. 책임을 질 건 꽤 많았다. 그동안 살리고 죽인 사람들에 대한 책임. 자리에있을 때 저질렀던 모든 일들. 모든 일들을 마치고 나서야 '인간' 김민규를 만날 수 있었다.
김민규는 마냥 어려보였다. 저보다 몇백 살이나 어린 '인간'이 저를 챙기고 상당히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서야 머리가 멍해졌다. 사실 김민규는 혼자서도 잘했다. 그게 무어든. 사람을 챙기고 달래고 일을 처리하고. 꽤, 아니 많이 능숙했다. 내가 너무 어리게 봤나. 잠깐 아파 헬쓱해진 저를 떠나지 않고 돌보는 민규를 보며 한 생각이었다. 따지고 보면 저보다 어리더라도 인간의 삶에서는 다 자란 어른이었다. 그때부터 좀 더 기대기로 했다. 조금 더 맡겨보기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민규야 나 아파."
조금 엄살을 부려보기도 하고.
"아니야 오늘은 옆에 있어줘."
조금 떼를 써보기도 했다.
떼를 쓰든 엄살을 부리든 짜증을 내던 김민규는 항상 무덤덤했다. 내가 그럴 때마다 푸스스 웃기만 했다. 일부로 짜증내도 한없이 받아주는 김민규의 아량에 놀랐다. 괜히 답답하다고 생각해서 화도 냈다. 그럴 때마다 김민규는 항상 웃었다. 진짜 바보인가. 왜 저렇게 다 받아주지.
"바보 같아."
"뭐가요?"
"그렇게 푸스스. 웃는 거."
"괜찮아요. 나 형한테만 이렇게 웃으니까."
"......응."
한참을 고민하다가 되지도 않는 답을 애써 토해냈다. 답하고 잠시 정적이 찾아온 후에, 저와 마디 하나씩 차이나는 큰 손이 볼을 감쌌다. 김민규에 비해 체온이 낮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더워,민규야아... 입술을 맞대고 느릿하게 파고들어왔다. 이제까지 김민규가 없었을 때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꼭 꼭 닫은 마음의 문 틈으로 느릿하게 파고들었던게, 꼭 지금이랑 겹쳐서 웃음이 났다. 푸흐, 하고 웃자 김민규도 따라 배시시 웃는다. 입을 떼곤 쪽 쪽 소리가 나게끔 입을 맞춘다. 그러다가 꼭 내가 모르는 사이에 입술을 감쳐물곤 뒷목을 살살 쓸어댄다.
"흐으-"
항상 기분이 좋아지려고 할 때면 김민규는 짧은 입맞춤으로 마무리했다. 짜증나. 미간 사이를 좁히며 잔뜩 쨰려보면 웃기만 하다가, 정말 정말 가끔은 다시 입을 맞춰왔다. 입을 맞추면서 귀엽다는 듯 입꼬리를 내리지 않던 김민규가, 한없이 옆에서 묵묵히 챙겨준 김민규가 없어진 건 얼마 지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날따라 비늘이 반짝이지도 않고 어쩌다가 비늘 하나가 툭 빠진 듯 허전했다. 과연 하나가 떨어져 어디 갔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전에 김민규가 했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아서 민규를 다급하게 불러댔다.
"김민규. 김민규!"
"으응."
침대에서 막 잠에 깨어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다. 안 갔구나 아직. 진짜 진짜 다행이야.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잠이 슬슬 몰려왔다. 한참을 자고 나서야 깼다. 몸이 찌뿌둥한게 꽤 오래 잔 것 같아 평소대로 김민규를 불러댔다. 김민규. 김민규우.
이상하네. 이 시간 쯤이면 잠을 깨서 달려와야 했다. 열두시 사십 육 분. 김민규가 대답을 안 한다는 건 절대 좋은 건 아니었다. 같이 산 6년 동안 불러서 오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김민규가, 그런 애가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으면 전혀 좋은게 아니라는 말이다. 아까 떨어진 비늘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욕조 안에도 없고, 주변 곳곳에도 없었다.
처음에는 멍 하다가 마음을 다잡을 새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쩌다 까무룩 잠들어 버린건지 좁은 창으로 잔월이 보였다. 하루를 꼬박 잔 건지 아침이라기도 애매하고 새벽이라 하기도 애매한. 그런 시간에 깼다. 그리고 어제 아침처럼 또 김민규를 찾았다. 이름을 부르는 걸 그만 둘리도 없었다. 욕조에서 나갈 수는 없으니 이름을 부르는 걸로도 족해야 했다.
아마 나흘째부터 이름 부르는 건 포기했던 것 같다. 비늘이 떨어진 자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밤을 새고 낮에는 잠을 잤다. 김민규가 없었던 날부터 모든 게 악몽으로 변했다. 새벽에 밝은 달을 함께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눴던 건, 그 달을 보며 네가 빨리 돌아오길 원해 매일 기도하게 되는 내가 되었고. 네가 꼬리 비늘을 보며 예쁘다 예쁘다 뚫어지게 바라보던 시간은 그저 비늘이 떨어져 눈에 띄게 빈 곳을 바라보는 시간으로. 그렇게 변했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또 바라고 있다. 오지 않을까.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늦어도 되니까 제발 와줘. 언젠가 오지 않을까-라며 막연하게 생각했던 내가 이제 간절함의 기적을 바라고 있음을. 네가 없어서 긴 밤을 지새우고 있음을. 김민규가 모르는게 당연한데도 괜히 미워졌다.
걱정 시키려고 일부로 이래? 민규야, 제발.
이상할시리만큼 밤에 잠을 잘 잤던 것 같다. 원래 밤에 잠 못 드는데. 작게 중얼거리고선 평소대로 손목을 바라봤다. 많은게 바뀌었고, 손목에 있는 김민규 이름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손목에 새겨진 이름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건, 김민규가 없어진 날부터 생긴 나름의 습관이었다. 예쁘네. 새겨진 이름은 지독할시리만큼 예뻤다. 후,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 애가 뭐가 예쁘다고.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하다가, 평소처럼 시계를 보고, 평소처럼 세면대에 기댄다.
"다시 왔으니까."
"다시 왔으니까 예뻐. 그렇지?"
다시 왔다. 김민규가. 그토록 아픔에 시달리게 했던 김민규가 반짝거리는 비늘을 보여주고 배시시 웃었다. 아니,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나도, 웃었다. 울고 웃었고 웃고 울었다.
"안녕."
응, 안녕 민규야.
눈을 마주치곤 바로 입술을 부딫힌다. 평소라면 숨이 차서 받아내지도 못할 것 같았던 입맞춤이 그렇게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치열을 급하게 훑는 김민규가 평소와 너무 달라서 웃음이 났다.
"민규야, 사랑해."
"나도. 나도 사랑해요."
다시 한 번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또 잃지 않기를. 내일이 되어도 우리가 영원하기를.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