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움] DRUNKEN
2021. 2. 20. 10:07





밤이면 네가 우는 꿈을 꿨다. 나 사랑하기는 해? 얼마나 울었던 건지, 다 갈라져 안쓰럽기까지 했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다. 너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다만 너와 나의 사랑을 이해하는 깊이나 방식, 그리고 그 외의 다른 것들마저 한참이나 달랐다는 게 네 눈물의 큰 요인이었다. 워낙 사람들에게 정이 많고 사랑이 넘치던 나는 이리저리 네 방향으로 모두 튀어나온 모양의 퍼즐 조각이었고, 너는 그 어떤 방향으로도 튀어나오지도 들어가있지도 않은 정사각형 모양의 퍼즐 조각ㅡ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정사각형의 조각ㅡ이었다. 그럼에도 너는 내게 맞춰주기 위해서 열심히, 네 한 몸 깎아 날 끼워맞췄고, 너무 열심히 깎아낸 탓에 틈이 생겨 허전해진 너는 결국 나를 떠나버렸다.





*





"그만 좀 마셔라. 이러다 취해서 또 헛짓거리 하지 말고."
"내가 뭐."


내가 언제 헛짓거리를 했다고. 투덜대며 비어있던 잔에 또 술을 넘치게 가득 따라 입에 털어넣었다. 오늘따라 술이 왜 이렇게 달달한지, 내가 소주를 마시는 게 아니라 실수로 달달한 음료수라도 시킨 건가 싶어 술병을 이리저리 살펴보기까지 했다. 초록색 병에 수려한 글씨까지. 내가 먹던 소주 맞는데, 왜 이렇게 달지. 아. 전원우 때문인가. 죄책감이 덕지덕지 묻은 그 이름 석자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얼른 머리를 흔들어 글자를 지워내곤 또 그 이름을 떠올릴까 무서워 곧바로 다시 술을 입에 들이부었다.


"쟤 취한 거 맞지?"
"맞는듯. 갑자기 혼자 분위기 잡고 술 퍼마시는 거 봐라."
"망했네. 쟤 전원우 집 못 가게 막아라."
"취하긴 누가 취해! 그리고 왜 자꾸 형 이름이 나오냐고, 어?"


존나 찔리게에... 이 자식들아. 술잔을 쾅 소리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잠시 내 모습을 살피는 것 같던 친구들은, 술병에 뻗는 내 손을 잡아 제지하고선 이내 저들끼리 쑥덕거리더니 나를 밖에 내쫓기까지 했다. 취했어, 너. 들어가라. 그 한마디 하고선 언제 불렀는지 모를 택시에 날 태운 다음 내 대신 내 집주소를 술술 얘기하더니, 내 손에 돈까지 쥐어주곤 금방 돌아갔다. 나쁜놈들. 술도 못 마시게 해. 이미 차는 출발했고, 창 밖 풍경은 정신없이 달리느라 바쁘고. 그래, 쓸데없는 생각도 못하게 일찌감치 집 가서 잠이나 자자ㅡ, 하는 생각도 잠시. 신호를 기다리기 위해 잠시 멈춘 택시 덕에 바깥 풍경이 빛 덩어리가 아닌 온전한 모습으로 눈에 담기기 시작했다. 저기, 형이 좋아하던 빵 가게 아닌가. 이런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려지자마자 스스로를 제어하기도 전에 이미 나는 택시에 돈을 다 내줘버리곤 다시 땅에 발을 딛고 있었다. 저질렀다. 술만 들어갔다 하면 충동적인 행동을 해버리곤 한다. 이성을 제대로 붙잡고 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 같은 것들. 아마 친구들도 이런 걸 걱정했던 거겠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가게 앞까지 다가가 괜히 유리창 너머로만 안을 기웃거리며 살펴보고 있었다.


"아직 영업중이에요."


안에 있던 사람이 성큼성큼 걸어나와 문을 열더니 웃는 얼굴로 대뜸 내게 그랬다. 아마 마감 중이라 못 들어가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나보다. 머쓱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니 따뜻하고 포근한 향이 났다. 형이 주로 뭘 먹었더라. 정말 내가 술에 취하기라도 한 건지 빵 이름은 하나도 보이지를 않았다. 그래도 생긴 걸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어떻게 된 게 형이 뭘 먹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형이랑 만났던 게 몇 년인데. 여기도 한 두 번 온 게 아닐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울컥, 눈물이 났다. 한심했다. 형은 내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기억해주고 챙겨주고 하다 못해 얘기라도 해줬는데, 왜 나는 이런 거 하나 떠올리지 못할까. 창피하게도 나는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뚝뚝 쏟아냈다. 당황한 가게 주인이 내 앞까지 달려와 괜찮냐 묻는데도, 나는 미동도 않고 추하게 눈물만 흘렸다. 모르겠어요, 뭘 좋아했는지. 그렇게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아껴준다고 얘기했는데, 정작 그 사람이 어떤 빵을 좋아했는지 조차도 기억이 안 나요. 한 번도 아니고, 내가 또 그것만 먹냐고 얘기할 만큼 많이 먹었었는데, 왜 그걸 물어볼 생각도 안 하고, 사주지도 않고... 목소리 끝이 떨려오다 결국 소리를 삼켰다. 쓸데없는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아버린 게 창피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가게를 나온 후였다. 어쩐지 손이 묵직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내 양손에는 가게 안에 진열되어있던 모든 빵들이 가게 로고가 박힌 종이가방 안에 가득 담긴 채였다. 머리가 안 되면 내 지갑이 고생을 하는구나. 헛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퍼뜩, 정신이 들어 고개를 들어보니 왠지 익숙한 골목이었다. 술에 취해도 단단히 취한 모양이었다. 여기로 가면 안되는 걸 아는데도 다리는 말을 듣지 않고 자꾸만 안쪽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쿵. 벽에 머리를 세게 박아버리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김민규. 암만 술에 절었다고 한들, 구질구질하게 전애인 집까지 찾아가지는 말자. 여전히 비틀거리는 시야를 있는 힘껏 바로잡아 겨우 걸음을 돌렸다. 다른, 다른 곳으로 가자. 최대한 네 생각이 들지 않을 만한 곳으로. 그런 마음에 심장도, 나도, 빠르게 뛰었다.










*





"또 오세요!"


갈 수록 손이 무거워져만 갔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추억이 박혀있지 않은 게 없어서, 그걸 내 손에 쥐지 않고는 차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운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앞이 뿌옇게 흐려져서 뭐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어느새 도착한 공원 벤치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또 엉엉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 멍하게 허공만 응시하던 시선이, 화단에 쳐진 울타리에 닿았다. 울타리. 사람들에게는 각자 울타리가 있다. 이 안에 들일 사람을 정하는 것도, 범위를 정하는 것도, 자신의 몫이다. 나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내 울타리 안에 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들여놓았고, 전원우의 울타리 안에는, 오직 나뿐이었던 거다. 그 말은 즉, 나는 울타리 안 사람들 모두를 돌보느라 바빠 누구 하나만을 단독으로 챙길 여유가 없었던 반면, 전원우는 모든 걸 내게 쏟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모두 챙기느라 바빴던 나는, 전원우가 홀로 지쳐가는 지는 눈치채지 못했었다.


"...이제와서 후회하면 뭐해."


다 끝났는데. 홀로 중얼거리다 발끝에 채이는 돌멩이 하나를 걷어차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붙잡을 양심은 없지만, 이 처치곤란의 선물들을 전달할 용기는 생긴 것 같았다. 그래, 선물 정도는 괜찮을 지도 몰라. 얼굴같은 거 안 봐도 괜찮으니까, 그냥 선물이라는 쪽지만 남기고 두고 오면 모를 거야. 정 필요가 없으면 버리던가 누구 주던가 하겠지. 여전히 술에 절어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방금 전의 그 익숙했던 골목에 들어섰다. 가는 동안, 이것만 두고오자 했던 생각이 목소리만이라도 들을까, 얼굴만 보고 갈까, 하는 생각들로 바뀌어갔다. 나도 참 어지간히 미친놈이지. 헛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전원우가 사는 아파트 안으로 몸을 들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은 별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막상 익숙한 현관문 앞에 서게 되니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쳤지, 진짜. 아무리 술을 쳐마셨다고 해도 여기까지 찾아오긴 뭘 찾아오냐. 벽에 머리를 한 번 쿵, 박았다. 정신... 정신 차리자. 이제 그냥 집에 가는 거야. 여기까지 한 번 와봤으면 됐잖아. 겨우 정신을 다잡으며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던 그때,


"...김민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익숙하고 또 그리운 목소리가 내 발을 붙잡았다. 여기서 뭐해. 이어서 들리는 말소리에 성대가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나를 끔찍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이대로 나를 신고하기라도 하면? 다시는 자기 눈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말을 해버리면? 온갖 막장 드라마 서사를 써내려가며 눈물도 숨소리도 꾹 참고 있었다.


"숨 참는다고 존재가 숨겨지는 것도 아닌데, 숨 좀 쉬어."
"...하아. 아니, 그게... ..."
"일단 들어와. 춥잖아."


예상 외로 너무 아무렇지 않은, 아니 아무렇지 않은 걸 넘어서 날 챙겨주려고 하는 듯한 모습에 심장이 저렸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내가 전원우였으면 나한테 욕 한사발 먹이고 쫓아내도 시원찮았을텐데. 코를 훌쩍이며 전원우를 따라 집 안에 들어섰다. 손에 들린 건 뭐야, 선물? 농담을 내뱉으며 옅게 나마 웃음을 터트리는 널 보니 모두 한 순간의 꿈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왜 그러냐는 놀란 네 목소리를 듣고도 아무런 대꾸를 할 수도 없어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렸다.


"...김민규, 너 술 마셨,"
"미안해."


주책맞게도, 내 이름이 한 번 더 불렸을 때에는 속절없이 미안하다는 소리가 툭 튀어나가고 말았다.
미안해. 원래 이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여기까지 와버렸어. 술 마시고 집 가던 길에 형이 좋아하던 빵 가게가 눈 앞에 보이는데 어떻게 지나칠 수 있겠어. 근데 그 안에 들어가니까, 형이 뭘 좋아했는지 하나도 모르겠는 거야... 내가, 내가 너무 한심해서 한참 울다가, 결국 거기 있는 빵 다 사버렸어. 근데 한 번 형 생각을 하고 나니까, 가는 곳마다 형이 없는 곳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거기를 다 지나쳐. 나는 못해. 멍청한 김민규는 깨닫는 것도 늦고, 후회도 늦어서, 아마 잊는 것도 느린가봐. 다른 건 다 형이 느린데... 왜 이런 것만 내가 꼴등이지... ...찾아와서 미안해. 염치없어서 미안하고, 양심 없어서 미안해. 근데... 근데 형 혼자 둔 게 제일 미안해. 나 이런 말 하는 것도 너무, 너무 미안한데... 술김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만 얘기할래.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게 해줘, 전원우.
마지막에 가서는 거의 오열을 했다. 감정은 자꾸만 북받치고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머릿 속에서 전부 엉켜서 제대로 흘러나오지도 않고. 엉엉 목놓아서 울기에는 못 다한 말이 많아서 결국 창피하게도 전애인 앞에서 오열을 하고 말았다. 내가 이야기를 끝마치고 바닥에 머리를 대고 훌쩍이는 순간까지도 전원우는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불쾌해 하는 건지, 조용히 아무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참의 정적 이후, 형은 내 뒷머리를 토닥이더니 일어나, 한마디를 내뱉었다. 소매로 눈물을 꾹꾹 닦아내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자니, 김민규 나 봐,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얼굴 보기 무서워서 바닥만 보고 있던 건데... 바들바들 떨리는 시선을 겨우 올려 형 얼굴을 쳐다보려다ㅡ,


"...에구. 잠들었네."





*





나보다도 족히 한뼘은 더 큰 것 같은ㅡ그것도 술에 떡이 된ㅡ놈을 침대 위에 옮겨 눕혀두고, 겉옷도 벗겨서 가지런히 걸어두기까지 하니 숨이 찬다. 엊그제는 친구 생일파티랍시고 신나게 놀다가 취했으면서, 오늘은 또 무슨 연유로 술을 퍼부었길래, 이미 재결합한 연인에게 와서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우는 건지, 원.

헤어진 다음 날, 오늘처럼 술에 잔뜩 취한 채로 울면서 찾아왔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했던 비슷한 것들은 모조리 양손에 바리바리 싸들고서 문 앞에서 서성이길래 집안에 들였더니, 대성통곡을 하며 오늘과 비슷한 말을 했었다. 미안해,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게 해줘. 아마 김민규는 모르겠지, 본인이 술에 취해 얼마나 많은 한 번만을 외치고 있는지. 소리없이 웃으며 곤히 자고 있는 민규의 볼을 콕 찔러본다. 그 말에 혹해서 다시 사귄 이후로, 정말 약속했던 것들 다 지켜주며 전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에 정말 다시 마음을 열어도 되겠다 싶었는데, 어지간히도 속앓이를 했던 건지 뭔지, 술만 마시면 그때와 같은 일을 반복한다. 아직까지는 그게 마냥 안쓰럽고 귀여운데, 조금만 더 반복되면 정말 질릴지도 모르니 술을 멀리하라고 하던지, 아니면, 술버릇을 바꿀 수 있게 노력하던지 해야할 판이다.


"김민규, 내일 또 이불 차겠네."


내일 일어나면 물어나 봐야지. 한 번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니까 어떻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