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밥] 열세번째 고백
2021. 2. 20. 10:05

 

 

 

 

늦봄? 아니면 초여름?

나는 반팔 티셔츠 한 장이면 밤이고 낮이고 떡을 칠 날씨인데, 남들은 뭐 한 장씩은 위에 걸치고 감싸고 다니는 그런 날씨. 정수리로 떨어지는 햇볕은 따가운데 건물 근처 그늘은 제법 서늘한 그런 애매하고 모호한 시점. 나한테는 어느새 다가온 초여름이고, 누군가에게는 아직 채 지나가지 않은 늦봄이던 때였다.









열세번째 고백









하마터면 쥐고 있던 쭈쭈바를 다 떨굴 뻔 했다. 생각이 들고나니 이번엔 그 차가운 걸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야무지게 언덕을 밀어 차던 두 다리마저 아스팔트에 처박힌 채로 나는 그저 입을 쩍 벌렸다.


"신입생이네?"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었다. 분명히 그였다. 그 언젠가. 어느 생앤가 하늘의 시기질투로 떠나 보내야만 했던 나의 선녀, 아니면 직녀. 혹은 나무꾼, 아니면 견우라든가. 확신할 수 있었다.

운명이라고.


"사체과?"


예술대 건물을 비스듬히 등지고 선 마른 등이 한숨이라도 쉬듯 오르내리는 걸 힐끔 보며 바지 주머니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다시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 새벽까지 부어라 마셔라 지랄을 해댔으면 적어도 반나절쯤은 내버려 둬야 하는 거 아닌가. 대체 무슨 정신으로들 사는 건지 내기 농구가 잡혔으니 당장 튀어나오라는 전화가 울린 게 겨우 열두 시가 조금 넘은 때였다. 까치집 지은 머리 하나 정리할 새도 없이 뛰쳐나와 가면서도 내가 지금 존나 어떤 미래를 꿈꾸며 대학에 왔나 회의감에 진절머리를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존나 이게 뭐라고. 내기 농구가 뭐라고. 체교과가 뭐라고. 세기의 라이벌은 무슨.

12시 20분이 달랑달랑. 진짜 존나 기적이다. 이 언덕을 지금 몇 분만에 친 거지? 절로 수그러졌던 허리를 쭉 늘려 피며 돌아온 길을 돌아다 보는데 어느새 스치고 지나갔던 건물 앞 남자가 제 쪽으로 부는 바람을 피하는 법도 없이 두 눈을 꼭 감아 내리며 맞서고 있었다.

하마터면 쥐고 있던 쭈쭈바를 다 떨굴 뻔 했다.


"그걸 어떻게...?"
"그거. 티셔츠."


아침 드라마 여주인공도 요새는 섣불리 안 할 대사를 수줍게 읊고 나니 운명의 남자가 턱 끝으로 톡 내 티셔츠를 가리켰다. 내 귀엽고 상큼한 개나리색 과티. 시발.

꼬불꼬불 잘 말린 새카만 파마 머리에 멀건 얼굴. 기다란 두 눈이 천천히 나를 훑어 내리며 깜빡였다. 벌거숭이가 된 기분에 순간 몸에 한기가 드는 것만 같았다.


"몸 좋아 보인다."
"네?"


잘못 들은 건가. 네? 작지 않게 튀어나간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남자는 양 허리에 손까지 척 얹은 채 나를 보며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입맛이라도 다시는 것처럼.

어쩌면? 저 사람도? 나를?

엄한 상상만으로 절로 붉어진 두 뺨이 내리쬐는 햇빛에 더욱 익어 후끈후끈. 이마께로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힘도 세겠네?"
"그, 그렇죠."


말더듬이처럼. 병신 같이.

계단 하나를 더 내려와 다가서며 말을 붙이는 얼굴이 볼수록 더 손 떨리게 취향이라 꼴깍 침 삼키는 타이밍조차 엇박이 되어 한없이 우스운 꼴이 되었다. 와중에 묻는 말은 또 왜 이렇게 야하게만 들리는지. 싱긋 웃는 입매, 발간 입술이 눈 앞에서 번들거렸다.

가진 거라곤 힘밖에 없는데. 남는 거라곤 힘뿐인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 마주친 눈을 연신 번뜩였다.


"막 바쁜 거 아니면-"
"한가합니다!"


좋네.

우렁찬 소리에 지나가는 건물로 들어가던 학생들 네댓 명이 온몸을 들썩이며 놀라는 것이 보였지만 창피할 새가 없었다. 외려 날 대신해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인 나의 운명의 소리가 귓전을 울릴 뿐이었다.

좋네, 라니.
좋네.
뭐가? 내가?
누가? 내가?

커피라도 한 잔? 밥이라도 한 끼? 튀어나올 다음 말을 기대하며 두 손을 모아 맞잡았다. 기왕이면 커피보다는 밥으로 시작해 커피로 달려가는 편이 안 나을까. 기도라도 하는 심정이었다.


"이걸 저 안에다 좀 옮겨놔야 하는데."
"네?"
"작업실까지만. 들어가자마자 오른쪽 복도 끝에 있어요."


내가 어제 과제하느라 밤을 샜더니 힘이 없어서.

태연한 얼굴로 과제 핑계를 대는 남자가 이쪽, 저쪽 어깨를 주무르며 고개를 살랑살랑 내저었다. 그제야 허연 가루가 덕지덕지 묻은 바짓단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티셔츠에 잔뜩 뭘 묻힌 남색 멜빵바지. 언뜻 보아도 작업복인 게 분명해 보이는 후줄근한 차림새에 넝마처럼 허벅지 한중간까지 늘어진 회색 가디건. 선녀 비단 옷이라도 걸친 마냥 꽃 같아 보이던 환상은 무엇이었을까.

얼굴의 힘인가.

석고가루. 발치에 놓인 하얀 포대에 적힌 이름을 한 번, 남자의 바짓단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미대생인가? 어쩜 존나 자기 같은 전공도 골랐네. 감격스러운 마음에 그 얼굴만 빤히 보고 있자니 남자가 마음에도 없는 손놀림으로 포대자루 끄트머리를 잡아 쥐었다. 아니 어루만졌다.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제가 할게요. 어딘지 알려만 주시면."


숟가락 들 힘도 없게 생긴 하얀 손에서 얼른 뺏어 잡은 포대 머리를 손에 단단히 쥐어 잡았다. 이까짓 거. 일도 아니지.

25kg 중량이 콕 박힌 미친 포대 하나를 겨우 작업실 문간에 풀썩 내려놓자마자 부연 안개가 눈 앞으로 흩뿌려졌다. 이제 하나. 남은 게 세 포대.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욕을 집어삼키며 홱 고개를 돌리는데 야무지게 손등으로 코와 입을 잘 틀어막은 남자가 남은 손으로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사실 뻑뻑해진 두 눈이 제대로 떠지질 않아 명확하진 않았지만 굳이 나한테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 이유는 없으니까. 엄지 손가락이었겠지.

눈물이 어룽어룽. 자꾸만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그냥 계세요. 금방 가지고 올게요."
"진짜 뽀빠이네. 커피 사줘야겠다."


다시 뽀르르 날 쫓아 복도로 나서는 남자를 손을 휘휘 저어 만류했다. 달고 가봐야 먼지나 뒤집어쓰지. 다시 돌아서는 뒤통수로 감탄에 찬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커피. 커피? 커피라니. 커피라니.

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부옇게 오른 석고 먼지가 연신 빨려 들어갔다.









**









"너 디자인과 누구한테 돈 뜯겼어? 또 와 있네."
"뭐래, 병신이."


마음 뜯긴 거거든.


"순대국이나 먹으러 가자."
"너는 순대국 집에 빚진 거 있냐?"


뭔 순대국을 물 처마시듯이 먹는 건지. 아직도 과 동기 절반은 이석민이 순대국집 아들인 줄 알고 있는 판국이었다. 먹는 걸로도 모자라 바쁠 땐 서빙까지 하고 돌아다니는 걸 보면 진짜 무슨 빚이라도 진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보다, 이쯤 어슬렁거렸음 우연찮게 한두 번쯤은 마주쳐도 되는 거 아닌가. 벌써 며칠 째 예대 건물을 배회하고 있는 건지, 일주일? 열흘? 차마 작업실이 있다던 건물 안에까지는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아 건물 주변만 하염없이 돌고 있는 거다. 괜히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파일 하나는 손에 쥐고. 혹시나 마주치면 괜히 볼 일이라도 있어 온 척은 해야 하니까.


"안 가? 같이 가자. 승철이형이 산다 했는데."
"최승철 그 새끼는 이름도 꺼내지 마."
"왜?"


내 천 년의 원수니까.

손가락이 후들거리도록 포대자루를 나르고 나서야 여기저기 묻은 가루를 톡톡 터는데 얼른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선 남자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얼른 지갑만 찾아 들고 가겠노라고. 행여 가루가 닿을까 점점 멀어져 가던 남자가 뒤를 돌아 계단을 오르는 걸 확인하고서야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벅벅 닦기 시작했다. 첫 술에 배부를 리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혹시나 그 가느다란 손가락이 한 번 스치는 기적이 오지나 않을까. 손톱 밑까지 꼼꼼히 비누를 한참 문대고 있는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윙윙 정신 사납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승철이형만한 선배가 어디 있냐."
"내기에 미쳐가지고. 그러다 패가망신한다고 전해라."


체대 똥군기라면 치를 떨어 남은 잔재 하나마저 모두 걷어치워냈다 전해지는 최승철은 흔히 사체과의 영웅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업적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의 체대를 다닐 수 있을 거라곤 사실 상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란 것이 존재를 했는데. 내기에 미쳐 돌아있는 정신병자라는 것. 내기 농구, 내가 축구는 물론이고 내기 당구에 노래방이라도 가면 점수 내기에까지 환장을 한다는 점이었다. 저 혼자 하는 거야 누가 뭐라 하겠는가. 매번 이렇게 후배들 목줄을 잡아채는 것이 문제지. 그 날도 그랬다.

전화 안 받냐?

물기를 대충 털고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냈다. 아니나 달라. 최승철 이름이 쿡 박힌 화면이 무섭도록 빛을 밝혔다. 이건 고민할 가치도 뭣도 없는 일이었다. 다시 주머니에 핸드폰을 밀어 넣는 순간에도 으르렁대는 최승철의 짐승 소리가 아른거렸지만 이건 선택이 아니었다.

저런 사람을 생애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굳건히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봤을 땐 나 못잖게 굳건히 마음을 다잡은 듯한 최승철의 얼굴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죄책감이 빚어낸 환상인가. 갸우뚱하는 순간 그의 짐승 소리가 뒤통수로 날아와 꽂혔다.


"그래서 안 가?"
"최승철 온다 그럼 나는 안-"
"안 가?"


꼭 오늘처럼.

언제 왔는지 뒤에서 나타난 최승철 허연 얼굴이 저승사자처럼 허공을 둥둥 날아다니는 것만 같아 절로 가드가 올라갔다.


"형, 그게 아니라요."
"됐어. 오늘은 너 아니어도 사람 많아."
"형 석민이는 간답니다."


보기에도 아찔한 이석민 애교가 그리도 좋은 건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둘의 사랑을 나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내가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거야.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이대로 정문까지 사라져주겠어. 생각을 하는데 가는 걸음에 턱 뭔가가 걸려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어?"
"사체과?"


무슨 전봇대 걸어오는 줄 알았네.

뭐 그렇게 대차게 부딪쳤다고 나자빠진 건지. 일어날 생각도 없이 주저앉은 남자가 나를 알아보고 베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새카만 파마머리는 연신 흔들어대면서. 존나 예쁘게.

변명할 새도 없이 헤드락을 당해 질질 농구장으로 끌려갔던 그 날 볼 수도 있었다. 저 존나 예쁜 얼굴. 최승철만 아니었으면. 진짜 천 년의 원수. 죽을 때까지 원망하며 미워하고 살리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 최승철 후배네?"
"네?"
"그 때 내가 너네 술값도 내줬는데 기억 안 나?"


바지춤에 슥슥, 그의 손을 잡아줄 채비를 하는데 옆에 멀뚱히 서 있던 긴 생머리의 소유자가 덥석 그의 손을 훔쳐 잡았다. 오늘부턴 너도 내 천 년의 원수다. 홱 노려보는데 남잔지 여잔지 모를 사람이 세상 반가운 얼굴로 내게 말을 붙여왔다. 기억 어디에도 없는 얼굴인데.


"술값은 내가 내줬는데 왜 생색은 니가 내."
"니 돈이 다 내 돈이지. 언제 왔어?"
"금방. 그럼 니 돈도 다 내 돈이야?"


그건 천천히 생각을 한 번 해보자.

뻔뻔한 얼굴로 딱 잘라 말하는 남자의 어깨 위로 최승철이 척 팔을 둘러 얹었다. 친구? 아주 쌍으로 철천지원수다. 얼른 다 사라졌으면 좋겠네. 그 때 못 얻어 마신 커피라도 어떻게 사주고 싶은데. 바싹 마르는 입술을 적셔 올렸다. 저기-


"원우도 같이 가지?"
"응. 지수형도 금방 내려온대."


오오- '원우'라고 했다. 이름도 어떻게 '원우'지. 파마머리 동글동글 굴러가듯 '원우'. 이름도 어쩌면 '원우'.

이름 하나 알았을 뿐인데 뱃속 어딘가가 간질간질.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콧구멍이 자꾸 벌름거리는 걸 감출 길이 없어 손가락으로 틀어막자 절로 심호흡이 툭툭 터져 나왔다.


"형 후배들이야? 같이 가?"
"어. 우리 신입생들. 얘는 이석민이고."


쟤는 신경 쓰지마. 나 가면 안 간대. 얘만 갈 거야.

되도 않는 예쁜 척을 하는 이석민을 품에 안은 최승철이 내 쪽을 손가락질하며 말하자 아직도 엉덩이를 툭툭 털던 원우씨가 다시 한 번 환하게 웃으며 나를 돌아다 봤다.


"아쉽네. 나 갚을 빚 있는데, 우리 뽀빠이한테."


뽀빠이, 우리 뽀빠이. 우리 뽀빠이!


"갈래요, 형. 승철이 형. 형님, 저도 데려가 주세요. 네? 제발요."


강아지마냥 두 주먹을 최승철 앞에 들이밀며 머리를 조아렸다. 나의 은인이시여. 내 평생 충성을 맹세하는 마음이었다.









**









세상에 태어나 제일 잘한 짓을 한 다섯 개쯤 꼽으라면 그 중 하나는 필시 지난 겨울에 일찌감치 운전 면허를 따놓은 일이었다. 나머지는 그 날 예대 건물 앞을 지나간 거랑 석고가루 포대를 날라준 거랑 뭐 그런 거.

사람이 여덟이나 되는데 운전 면허를 갖고 있는 사람이 달랑 둘이었다. 승철이 형이랑 나랑. 차 두 대를 렌트해 가자는 말에 일주일 전부터는 엄마 차를 끌고 나가 부리나케 연수도 받았다. 형 앞에서 우스운 꼴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 조수석에 앉은 원우 형을 상상만 해도 코피가 터질 것 같았다. 꼭 무슨 생각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좋고 또 좋아서.

그리고 디데이였다.


"원래 이렇게 다른 과랑도 막 MT를 가고 그러나?"
"알게 뭐야. 최승철, 윤정한 술 먹고 싶어 가는 건데. 우린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최승철 개새끼."


뭘 또 개새끼까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부승관이 얼른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쫄기는. 다 정육 코너에서 고기 긁어 모으고 있을 텐데. 다 살피고 살펴 욕하는 거다, 나도. 나도 몸 좀 사려야지. 또 나 떼놓고 술 마시러 가면 그것만큼 눈물 나는 일이 없으니까.

내가 자기한테 얼마나 충성을 하고, 내기 농구며 축구며 뭐 하나 허투루 한 게 없는데. 이럴 수가 있는가. 이 서운한 마음을 말로는 이루 다 할 수가 없는 거다. 운전자 둘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차에 태울 사람을 정하자더니 첫 판에 이기자마자 원우 형을 선점하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죽고 못 사는 윤정한은 내버려두고 원우 형 손목을 잡아 끌며 자기 뒤로 세우더니 그저 좋아서 낄낄, 버림 받은 정한이 형은 또 뭐가 좋은지 깔깔. 차라리 원 없이 웃기라도 하든지 웃음을 참아가며 입술을 말아 문 지수 형까지. 하마터면 초등학교 졸업하고 처음으로 친구들 앞에서 눈물을 쏟는 참상이 벌어질 뻔 한 순간이었다.


"과자 다 샀어? 콜라는? 김치는?"
"다 샀어요."
"에이, 그게 없네. 우리 원우 야채과자 좋아하는데."


카트에 산처럼 쌓아놓은 먹을 것들을 계산대 위로 올리고 또 올리는데 큰 쌈장 하나를 들고 총총 달려가 작은 쌈장 두 개로 바꿔온 야무진 정한이 형이 엄마처럼 질문을 이었다. 다 샀다, 다 샀어. 대충 끄덕 고개를 끄덕여주는데 느닷없이 또 전원우 공격이다. 중얼거리는 얼굴을 돌아보니 커다란 눈이 더없이 번쩍인다. 저 형은 눈 좀 절반만 뜨고 살았으면 좋겠다. 다 뜨면 쏟아질 것 같아. 뜨끔한 마음에 마지막으로 주워 올리던 라면 봉지를 내려놓고 다시 과자 코너를 향해 내달렸다.

빠새도!

등 뒤로 울리는 소리 뒤로 킁킁, 코웃음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야, 내려서 트렁크 좀 열어봐. 나 손 없어."


야! 이석민. 앞 바퀴를 툭툭 발로 차며 소리를 지르는데 느릿느릿 차문 열리는 게 하세월이다. 신종 엿 먹이기인가. 원수 같은 것들이 무거운 것만 잔뜩 담아줘 추욱 처진 종이 상자를 한 번 더 추켜 올리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 새끼를 그냥-


"미안. 나 블루투스 연결한다고 정신 없었어. 이거 트렁크 어떻게 열어?"
"형? 이 차 타요?"
"응. 승철이 형이 석민이 운전 가르친다고 데리고 갔어."


걔 면허 있어?

그럴 리가요. 한참을 헤매다 열어준 트렁크 안으로 상자를 챙겨 넣고, 먼저 조수석에 오르는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시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최승철님은 위대하시고 현명하신 나의 은인이시며 그 자체로 저에게 내린 은총이시니, 저는 그 큰 뜻을 몰라 님을 원망할 줄만 알았습니다. 이 어린 양의 무지함을 부디 용서하시고, 긴 밤 님만을 위해 올릴 저의 소맥을 기꺼이 받아주소서. 아멘.


"노래 너무 졸린가보다. 다 자네."
"푹 자야 이따 노니까. 계속 재워요, 형."


주구장창 울려 퍼지는 눈물 터지는 발라드 노랫소리에 잘 버티고 떠들던 부승관마저 고개가 꺾인 채 잠이 들었다. 최한솔은 출발한 이래로 눈을 뜬 걸 본 적이 없고. 나야 좋은데. 하늘 천지에 형과 나 둘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리듬을 타던 형이 흥얼흥얼 낮은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녹네, 녹아.


"아, 형. 야채 과자 발 밑에 봉지에 있어요. 아침 안 먹었다면서요."
"오- 나 이거 좋아하는데. 너도 좋아해?"


세상 하고 많은 과자 중에 하필 저 과자를 고르는 사람들의 심리를 나는 그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다만 저 야채 과자의 존재 가치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고 볼 수 있었다. 원우형 입에 들어가려고 존재하지. 그것만으로도 향후 100년간은 야채과자의 생산 중단이라는 것은 아니 될 일이었다.


"저도 좋아해요. 빠새도 있어요, 형."
"빠새는 정한이형이 좋아하는 거."


윤정한. 윤정한. 윤정한.


"나 해산물 안 먹거든."
"과자도?"
"어. 향도 싫어서."


웃기지? 민망한 듯 웃던 형이 다시 야채과자 몇 개를 오독오독 씹어 삼켰다. ASMR 따위. 파삭파삭  과자 부숴지는 소리에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것이 이것이 극락인가, 하는 순간 과자 하나가 불쑥 입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그만 살아도 되겠다.
원이 없네.
이게 사람 사는 행복인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운전 잘하네. 승철이형은 터프한데."
"연수 받아서요."
"몸으로 하는 건 뭐든 잘하나 봐. 농구, 축구도 잘한다며."


에이, 뭐. 그냥.

멋쩍게 무슨. 손사래까지 쳐가며 나도 모르게 헤헤 웃고는 있는데 이게 진짜 이석민 욕할 게 아니다. 이 덩치에 나올 소리가 아니다. 절로 소리가 잦아들었다.


"나는 진짜 다 못해. 농구, 축구는 당연히 못하고. 나 수영도 못해."
"가르쳐 드릴까요?"
"몇 번 배웠는데 다들 포기하고 떨어져 나갔지. 아, 맞다. 나 키스도 못해."


손사래를 치다 아직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오른손 하나가 애처롭게 허공에 박제가 되었다. 음?


"나 첫사랑한테 키스 못한다고 차였어."
"어쩌다가..."
"영화 보면 둘이 입술 맞대고 고개만 이리저리 비틀잖아. 난 그렇게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


뭘 넣어야 되는지는 몰랐지.

세상에나. 나지막이 조곤조곤 더할 수 없이 조신한 목소리는 말을 맺자마자 씁, 하는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 위험한 사람이다. 치명적이야. 운전이고 나발이고 옆에 앉은 사람을 보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엉덩이가 들썩였다.


"뭐 그런 걸로 헤어져. 그치?"


물론 내가 좀 고장난 메트로놈처럼 움직이기는 했어.

말을 해놓고 혼자 웃음이 터진 형이 여전히 허공에 아무렇게나 방치한 내 손을 덥석 잡아 핸들 위로 얌전히 내려놓았다. 아직 한 손 운전은 이르지. 하는 무면허의 주제 넘은 참견까지 곁들이면서.

고장 난 메트로놈. 속도 올린 와이퍼 같은 그런?

아무렴 어떤가. 사랑이란 본디 서로의 부족한 곳을 채워주는 것인데. 나는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하다못해 입술을 맞댄 형이 상모를 돌린대도 나는 괜찮을 것 같았다. 진심으로.

"저는 괜찮아요."
"응? 뭐가?"
"저는 진짜 다 잘해요. 몸으로 하는 건 뭐든지. 자신 있어요."


그래? 우리 뽀빠이는 좋겠네.

놀리는 법도 없이 다정하게 대꾸한 형이 이내 앞이나 보란 말을 남기고 핸드폰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입수를 또 하라고? 나 이제 머리 말랐는데?"


들어가기 싫으면 왕을 뽑아. 승관아.

이쯤 되니 승철이 형 승부욕은 승부욕도 아닌 수준이었다. 정한이 형 게임에 미쳐 돌아 저러는 거 보면 승철이 형은 순둥이 그 자체였다. 혀를 내두르는 승관이를 향해 인자하게 웃어 보인 정한이 형이 나무 젓가락에 야무지게 王자를 적어가며 게임을 할 채비를 했다. 이렇게 퍼 마시고 야밤에 저 찬 바다로 기어들어가면 최소 협심증 아닌가? 벌써 그득그득 쌓인 술병들을 보고 있노라니 벌써 숙취가 밀려오듯 머리가 지끈거렸다.


"단판이야?"
"단판이지. 몇 명 할까?"
"혼자는 외롭지. 외로우니까 둘. 둘 들어가자."


둘이 들어가면 뭐 하늘에 해라도 솟나, 바닷물이 느닷없이 따수워지기를 하나. 덜 외로울 게 뭐가 있나. 말 같지 않은 소리에 모두들 나란히 동조하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왕이 둘 고르는 걸로?"
"그럼 또 재미가 없지. 왕의 성은을 받은 한 사람이 둘을 고르는 걸로 가자."


모두의 동의를 얻으려는 듯 둘러앉은 면면과 일일이 눈을 맞추던 정한이형이 시작한다!를 외치며 젓가락이 거꾸로 처박힌 통을 박수무당처럼 짤짤 흔들어 보였다. 열정 넘친다, 진짜. 손바닥을 모아 입구를 가린 통에서 저마다 하나씩 젓가락을 뽑아 득달같이 밑둥을 확인했다. 기왕 하는 게임인데 왕 노릇 한 번 해봐야지. 기대에 차 내려다 본 내 젓가락 끝엔 꽝! 한 글자가 밉살 맞게 그려져 있었다.


"자, 경들은 모두 내게 충성을 맹세하라."


하나씩 꽝이 적힌 나무젓가락을 통에 도로 던져놓는데 제일 늦게 젓가락을 들고 가 늑장을 피우던 원우형이 가려놓았던 밑둥을 보며 히죽 웃음을 흘렸다. 어설프게 누웠던 몸을 일으켜 양반 다리까지 반듯이 해 자세를 고쳐 안은 형이 짐짓 목소리를 깔아 왕 흉내를 냈다. 아이돌 누가 귀엽다고 아파트를 다 부숴버리겠다던 동생의 심정이 이런 시점에서야 이해가 되다니. 한심하다 끌끌 찼던 그 때의 내 혀를 잘라 없애고 싶은 지경이었다.

전원우 귀여워. 겁나 귀여워. 당장 이 펜션이라도 부숴버릴까.


"형 하고 싶어? 시켜줄까?"


전하부터 폐하에 임금님까지. 갖가지 호칭이 난무하는 가운데 'Your Highness' 간지 터지는 목소리가 좌중을 압도했다. 어디 호위 기사를 흉내라도 내는지 팔 하나까지 척 앞으로 세워 앉으면서.

미국 사람 조슈아 홍이었다.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근데 형. 우리가 나름 동기고, 좋은 친구잖아? 이제는 그냥 지수야, 원우야, 하자."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워온 거야?

중얼거리는 승관이 목소리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명 미국 여권 들고 캘리포니아 오가는 미국 사람이라고 했는데.

느닷없이 동기애를 자랑하며 서로를 부둥켜 안은 두 사람의 시원스러운 야자 타임은 한참이나 끝이 날 줄을 모르고 이어졌다. 승철이형의 사촌 동생이자 도예과 신입생인 최한솔이 그들의 길고도 장황한 스토리를 간추려 풀어헤쳐놓을 때까지.

벌써 술을 몇 번이나 함께 마셨는데도 누가 몇 학번이고 몇 살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거야 궁금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형이 아닌 다른 데에 쏟을 정신이 요즘의 내게는 요만큼도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최승철이 윤정한이랑 초중고 동창에 대학 동기고, 한 학번 아래에 홍지수, 우리 형이 있는데 홍지수는 1년 늦게 입학했으니 저 둘과는 동갑. 한국말은 대장금과 불멸의 이순신으로 배웠고, 최애 드라마는 정도전. 납득이 되는 얘기에 이석민, 부승관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주위를 환기라도 시키듯 승철이형이 박수를 짝짝 쳐댔다.


"그럼 우리 지수가 두 사람 골라보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원우형 손에 달랑거리던 王자 젓가락이 지수형 공손한 두 손으로 넘어가자 술판은 다시 한 번 반전이 일어 술렁였다. 뭘 더 어떻게 알랑방구를 뀌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요! 와썹 브로. 요! 맨?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던 이석민이 지수형을 향해 하이파이브를 바라듯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곧 더없이 차가운 얼굴로 돌변한 형이 손등으로 툭 이석민은 손을 내리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브로, 라니? 그래도 대한민국이 동방예의지국인데. 위아래는 좀 지키면서 살자."


어? 진짜 화났나? 싸해진 분위기 속에 모두들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는데 쥐고 있던 젓가락을 푹 옆에 앉은 이의 가슴팍에 꽂아 넣은 지수형이 눈웃음을 살살 흘리며 말을 이었따.


"그런 의미에서 첫 입수자의 영광은 우리 원우. 내 동생 원우."
"와, 이러기 있어? 내가 왕이었는데? 그거 내가 준 건데?"
"왕 뽑지 말란 규칙 있었어?"


없었지. 역시 우리 지수가 천재네.

정말 감탄해마지 않는 표정으로 역대급 연기를 선보이던 정한이형을 따라 승철이형 역시 두 엄지를 추켜올리며 그를 찬양했다.

예쁜 내 동생. 벙찐 원우형 동그란 뒤통수를 연신 쓸어 만지던 지수형이 다음 먹잇감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누구를 저 시커먼 바다 속으로 밀어 넣어볼까. 모두가 그런 형의 뜨거운 눈빛을 외면했다.

차라리 자원을 할까. 없어 보이게 질질 끌려들어가지 말고 당당하게! 남자답게! 호기롭게! 한 번 외쳐볼까? 잘 구슬려서 원우형 대신 내가 두 번 들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폭풍전야의 고요함을 깨고 조심스레 입을 뗐다.


"형, 내-"
"다음 입수자는 민규."


이건 나선 것도, 안 나선 것도 아니다. 절망이 온몸을 덮쳐왔다.

간단히 끝낸 이 결과가 후련하기라도 한 양 스스로 감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지수형이 여기저기 죽다 살아난 이들과 포옹을 나누며 이 아름다운 여름 밤을 자축했다.

그 언젠가 노래방 바닥을 물구나무를 선 채 휘젓는 지수형을 보며 입을 틀어막았던 정한이형이 생각이 났다.

지수는 미국에서 살아야 해. 대한민국은 너무 좁아. 지수를 담아낼 수가 없어. 대한민국이 품을 사이즈의 또라이가 아니야. 우리, 보내주자. 지수. 보내주자. 놔주자.


"민규야. 내 동생 원우 잘 부탁해. 털끝 하나 적시지 말아줘. 곱게 키웠어."






분명 푹푹 찌는 열대야의 늦은 밤이 분명했는데. 바다인지 하늘인지 분간도 가지 않을 시커먼 풍경을 앞에 두고 나니 어쩜 뒷골이 다 서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지금 이렇게 들어가는 건 불법 아닌가. 어디 경비 서는 안전 요원들이라도 없는지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물론 돌아오는 건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기준은 요쯤?"
"명치요?"
"아니. 심장은 한 번 푹 담갔다 와야지. 요쯤. 젖꼭지 두 개는 다 적셔오는 거다."


진짜 한 대 팰까. 젖꼭지 두 개를 가리키며 앙증맞게 걸그룹 춤을 춰 보이는 윤정한이 긴 머리를 휘날리며 최승철에게로 달려갔다. 선후배고 나발이고 이 정도면 한 대는 까도 될 것 같은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뭉그적뭉그적, 백사장 위에 슬리퍼 두 짝을 곱게 벗어놓은 원우형이 곧 곁에 와 섰다. 해 뜨거운 낮에도 물놀이는 취미에 없다며 아주 펜션 방구석에 처박혀 핸드폰 게임을 조지고 책을 뒤적이던 형이었는데. 이 야밤에 입수가 웬 말인가.

체념의 정서로 무르익은 까만 눈동자가 더없이 서글펐다.

이대로 함께 물미역이 될 수는 없었다.


"젖꼭지 두 개만 담그면 되는 거죠?"
"어. 그거면 인정."
"형이 두 개라고 했어요!"


쪼르르 앉아 핸드폰 카메라를 벌써 손에 받쳐든 악마 삼형제의 확답을 받자마자 바다를 향해 다가섰다. 벌써 들어가나? 잠시 망설이던 원우 형이 애매하게 뒤를 졸졸 따랐다.

죽을 것처럼 차진 않다. 찰박찰박 쏟아지는 파도에 손을 담가 심장언저리를 톡톡 적셨다. 이대로 골로 갈 수는 없다. 아직 이 형이랑 못해본 게 너무 많다. 뒤에 서 머뭇대며 바다로 손을 내뻗는 형을 만류해 세웠다.

형은 적실 필요 없어요.


"타요."
"너네 뭐하냐?"
"젖꼭지 두 개만 적시면 된다면서요. 네 개라고 안 했잖아요."


타요, 얼른.

기함해 숨 넘어가는 무리들의 소리가 바닷가를 울렸다.


"머리채 잡아도 되니까 잘 붙들고 있어요."
"야, 잠시만. 나 너무 무서운데."


경상도 어디서 왔다더니. 마음이 급해져 채 지우지 못한 사투리 억양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와 귓전을 적셨다. 와 진짜 숨 넘어가게 귀여운데. 어떻게 세상 사람들한테 들려줄 방도가 없네. 와. 이걸 나 혼자 즐기는 건 인류에 대한 예의가 아닌데.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래. 인정. 둘이면 해가 솟고 바닷물이 뜨끈뜨끈 데워진다는 걸 왜 몰랐을까, 진짜. 외롭지 않게 둘씩 들어가라고. 누가 그랬었지. 굉장히 로맨틱한 사람이었네.


"갑니다."


길쭉길쭉 곧게도 뻗은 뼈대가 하도 예뻐서 말랐어도 무게는 제법 나갈 줄 알았는데. 겨우 깃털보다 티끌만큼 무거운 수준이었다. 뭐 하나 현실감 있는 구석이 없다.

작년에 태어난 사촌 동생 무등도 한 번 안 태워봤는데. 이렇게 소중한 걸 태울 줄 알았더라면 미리 연습이라도 해볼 것을. 잔뜩 긴장해 머리통을 감아 안은 형 두 다리를 꼭 붙들고 천천히 바다로 걸음을 내디뎠다.

힘이 바짝 들어간 두 다리가 가슴팍을 자꾸 조이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죽을 것처럼 춥지도, 달빛이 있어 아주 어둡지도 않아 걸음걸음이 무거울 것도 없었다. 어린 아이마냥 내 머리통을 꼭 끌어안은 두 팔과 마른 가슴팍은 어쩐지 귀여웠고 정수리 근처로 훅훅 떨어지는 입김은 뜨거웠다.

와, 내가 지금 내 운명을 둘러메고 바다를 헤치는구나. 문득 벅차 허리춤을 세우고 숨을 고르려는데 뒷목 언저리에 닿은 무언가의 존재가 확연히 와 닿았다.

그래. 있겠구나. 있어야지. 있어야 하는 것이지. 없으면 큰일이 나지.


"너 진짜 뽀빠이네."


바람에 실려 날아온 형의 감탄의 한 마디  같은 건 들리지 않은지 오래였다. 오로지 바닷물 아래 깊이 잠긴 나의 영원한 친구가 행여 저를 잊을까 존재감을 발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민규야. 그만 나가자."
"잠깐만요. 좀만요."


나는 지금 나갈 수가 없어요.









**









"그냥 주점 같은 거야?"


사다 준 스크류바를 야무지게 빨던 원우형이 그새 새빨개진 입술을 오물거리며 물어왔다. MT를 다녀온 이후로 TPO를 무시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끈대는 아랫도리가 또 울컥, 존재감을 들이댔다. 수치도 모르고.

비어있던 형 옆 자리로 얼른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냥 주점이요. 올 거죠?"
"가지. 가야지."


고민도 없이 떨어진 대답이 듣기 좋아 헤벌쭉 또 멍청한 웃음을 내보이는데 마주보던 형이 그런 날 따라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가슴이 저릿저릿 저리기 시작했다. 이 넘치는 감정이 주체가 안 돼서. 어떻게든 이걸 발산을 시키기는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내일 일이야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장 오늘의 내가 사고라도 대차게 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글드글했다.

그새 다시 매대 위로 시선을 돌린 형이 비뚤어진 잔들의 위치를 보기 좋게 돌려놓기 시작했다.


"많이 팔았어요?"
"몰라. 나 교대한지 이제 한 시간이라."
"형이 만든 건 뭐에요?"


나? 짧게 되물은 형이 매대 한 쪽 끝에 넓고 길게 구운 도자기 접시 하나를 가지고 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잔뜩 올려진 작은 도자기 조각을 옆으로 슥 밀어내고 보니 붕어인지 잉어인지 모를 물고기 두 마리가 멋들어지게 헤엄을 치고 있는 접시였다.


"이런 걸 어떻게 만들어요. 너무 예쁘다."
"그건 지수형이 만든 거고."
"네?"


내 건 얘네들.

방금 전 내 손에 떼거지로 밀려난 도자기 조각을 다시 제 자리로 모아 진열하는 형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드리워졌다.


"나도 막 예쁘다고는 생각 안 했어."
"반지. 반지 예쁜데. 제가 눈이 해태라. 죄송해요. 예뻐요. 귀여워요. 진짜."
"그럴 수 있어. 너무 마음 쓰지마. 작품 보는데 거슬리게 이런 거 얹어놔서 미안해."


지수형 접시 포장해줄까? 살래?

풀 죽은 목소리에 어찌할 바를 몰라 엉덩이만 들썩이고 있는데 입술을 한 번 삐죽인 형이 하얀 옥반지 같은 모양새에 작은 나뭇잎이 쫑쫑 둘러 그려진 반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다시 햇빛에 요리조리 반지를 뒤집어가며 한참을 들여다본 형이 홱 내 쪽을 향해 그를 들이밀었다.


"귀엽지 않냐?"
"귀여워요. 진짜. 한 번만 믿어주세요."
"나름 공들인 건데."


접시, 컵 같은 건 너무 흔해서 안 했다는 말을 덧붙인 형은 제 약지에 반지를 슥 끼워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무슨 손도 예뻐.


"우리 뽀빠이 여동생 있다고 안 했나? 이거 그냥 줄게. 선물로 줘. 내 약지에 맞춘 거라 보통 검지 정도엔 들어갈 거야."
"제가 끼면 안돼요?"
"정상적인 사회 생활은 안 하고 싶은 거야?"


뽀빠이 그렇게 안 봤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형이 작은 비닐 포장에 반지를 넣어 테이프를 붙여 봉했다.

고작 그 망나니에게 이런 반지 선물이라니. 당치 않았다. 손에 쥐어준 반지를 일단 후드 주머니에 밀어 넣고 지갑을 꺼내 들었다. 됐어. 그냥 주는 거야. 살 거면 어머니 드릴 그릇이나 사. 만류하는 형의 손목을 한 손으로 틀어쥐고 겨우 꺼낸 지폐를 형 호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힘으로 날 어찌해볼 생각을 하다니. 본인 스스로도 우스웠는지 헛웃음을 흘린 형이 주머니 속 지폐를 곱게 꺼내 돈통이라고 마련해놓은 것 같은 허접한 박스에 돈을 집어넣었다. 못내 뿌듯했는지 닫힌 상자를 팡팡 두들기기까지 하면서.

귀엽다. 정말이지. 너무 귀여워서 예술대부터 공학관까지 건물 세 동은 맨손으로 부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아.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벽돌 건물 무너지는 상상을 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늦게 오는 사람은 안주팀 붙박이라고 했다. 서빙을 해야 형을 봐도 보는 거지.

더 큰 미래를 위하여.


"형 저 갈게요. 이따 주점 꼭 와요."
"어. 여동생이 유치하다고 까면 가지고 와. 환불해줄게."
"걔 안 줘요. 헐크 같은 애라 이틀 만에 다 깨먹을 걸요."


그럼? 일어선 나를 한참 올려다 보던 형 앞에 비닐에 쌓인 반지를 흔들며 대답했다.


"나중에 이 반지 꼭 맞는 애인 생기면 줄 거예요."






윤정한, 홍지수에 하다못해 최한솔도 와서 저러고 있는데 형은 어딜 가있어서 안 보이는 건지. 나가서 한 번 물어나 보고 싶은데 꼭 이럴 때 해물파전 주문이 또 들어왔다. 석민이 어머님이 들통 가득 해오신 파전 반죽이 벌써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몇 시쯤 됐나. 기름 두른 팬에 반죽을 올려 펼치면서 슬쩍 입구를 내다 보는데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웬 시커먼 놈팽이랑 화기애애 핸드폰을 주고 받고 있는 거다. 어라라? 핸드폰에 꾹꾹 뭐를 눌러 찍고 있는 형을 내려다 보던 놈팽이가 이내 형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손에 휘감아 돌돌 말아가며 웃기 시작했다.


"부승관. 야. 뭐 버릴 거 없냐?"
"어?"
"아무거나 쓰레기 좀 줘봐. 밖에 내놓고 오게."


뭐 어떻게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놓쳐버릴 줄이야.

야물딱지게 쓰레기봉투를 꾹꾹 눌러 담아준 부승관 손길에 한 박자를 놓치고 밖으로 달려나가니 커다란 놈팽이 새끼는 어느새 저만치 가 버리고 손을 흔들어 배웅하던 형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이쪽을 향해 느릿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또 마주친 시선엔 세상 반가운 얼굴을 다 하고선. 정말 내가 반갑기는 한 걸까. 쓸데없이 불퉁 튀어나와버린 못난 입술을 도로 집어넣을 기운이 없다.


"쓰레기 버리러 가?"
"누구에요?"
"누구? 아, 방금? 친구."


나 먼저 들어간다.

정 없기는. 홱 돌아 주점으로 들어가는 형 뒷모습에 울컥 또 코끝이 찡해졌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난 왜 저 사람을 좋아하는가. 분명 시작은 얼굴이었는데. 하늘하늘한 몸매였는데. 취향을 저격한 분위기였는데. 이쯤 돼서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누구 말마따나 좋은 이유가 수천, 수만 가지가 되고 나니 진짜 내가 형을 좋아하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그냥. 정말 그냥. 그냥 좋다. 그냥.

그래서. 저 새끼는 뭔데. 누군데.


"왜 이렇게 늦었어? 너 그거 다 마셔. 보조는 맞춰야지."
"요 앞에서 중학교 때 친구 만나서. "
"오- 우리 학교래요?"


언제 또 장사는 접었는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부승관이 해물파전을 잔뜩 우물거리며 물었다.


"아니. 놀러 왔대. 쟤 진짜 쥐콩만했는데. 나보다 커졌더라."
"민규만 해?"
"비슷할 것 같은데. 덩치가 더 커서. 나는 무슨 어디 형님이 말 거는 줄 알고."


현금 있는지부터 생각했잖아. 잔뜩 졸아든 말투에 다들 낄낄 분위기 좋게 한 잔씩을 입 안에 털어 마셨다.

중학교 때 친구란 말이지? 그래 봐야 같은 학교도 아니고. 한 5년 안 봤으면 거의 남이라고 봐야지. 그리고 덩치야, 뭐. 내가 아직 제대로 벌크업을 안 해서 그렇지. 마음만 먹었다, 그럼 다 끝나지. 아까 그 놈팽이만큼 키우는데에는 뭐 반 년도 필요 없지. 보충제 좀 퍼먹고 하면. 내가 누군데. 뽀빠이 아니냐고. 우리 형 뽀빠이지. 원우네 뽀빠이.


"아니야. 이번엔 진짜야. 그냥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니까."


왁자지껄 다시 소란스러워진 테이블을 바라보며 하루만에 코팅이 다 긁힌 싸구려 팬에 남은 제육 볶음을 닥닥 긁어 부었다.


"오. 김민규."
"그만하고 와서 앉아. 손님도 없어."
"들어봐요. 근데 그 누나가 지난 번 수업 때 내 옆으로 오더니 뭐라 그랬는지 알아?"


내려놓은 제육볶음에 일제히 달려드는 좀비 같은 젓가락들을 보며 따로 챙긴 접시를 슬그머니 원우 형 앞으로 내밀었다.


"미친 거 아냐? 김치전이 있었어?"
"다 떨어졌다며."
"아, 바닥까지 긁었더니 요만큼 나왔어요. 원우형은 해산물 못 먹잖아요."


형들은 더 비싼 해물파전도 다 먹었으면서.

여차하면 달려들 기세의 좀비들로부터 김치전을 사수하며 형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누가 볼세라 구석탱이에 엎어놓은 마지막 반죽이었다. 겨우 한 장이 나올까 말까 한. 행여 타지는 않을까 덜 익어 뭉개지지는 않을까.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부친 건데. 한 입이라도 뺏길까 얼른 좀비 젓가락들을 퉁퉁 치며 시선을 돌리고 급히 말을 돌렸다.


"그래서. 이석민 그 누나가 뭐라고 했는데."
"여기, 자리 있나요?"


그게 뭐? 누나의 목소리를 흉내라도 내는 건지 듣기 싫은 가성의 한 마디에 누구 하나 동조를 하지 못하고 의문의 시선만을 교환했다. 그게 대체 왜?


"관심의 표현이지. 자리 있는지 먼저 용기 있게 딱! 물어보고. 내 옆자리에 굳이 앉겠다고."
"자리가 엄청 많이 남아있었어?"
"그렇지는 않았는데-"


이거 뭐하는 놈이야. 부승관의 한 마디에 그제야 모두들 가슴 속 묻어두었던 탄식을 입 밖으로 쏟아냈다. 자리가 남아도는데 앉는 것도 아니고, 그게 무슨 용기고 관심이야.

와중에도 혼자만 답답한 마음을 금하지 못한 채 가슴을 팡팡 두드리는 이석민을 두고 모두 함께 소주잔을 모아 부딪쳤다. 금사빠 이석민의 정상적인 연애를 위하여.


"고백을 해볼까 봐."
"몇 번이나 봤다고. 그 수업 주에 한 번 아니야? 그럼 이제 한 네 번 본 거 아니냐고."
"사랑에 있어서 그딴 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

절로 튀어나온 동조의 한 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단번에 내게로 모여들었다. 다들 콧구멍은 왜 또 벌렁거리는 건데. 뭘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냥 그렇다고요. 그래서 고백은 어떻게 할 건데?"


다시 부리나케 화제를 돌렸다.


"일단 뭐. 아름다우십니다."
"그게 뭐야."
"대뜸 그럼 어떡해. 일단 남자 친구는 없는지, 애인은 없는지부터 확인해야지."


형! 애인 있어요?

천장을 뚫고 날아간 목소리에 하나 남은 저쪽 테이블에서까지 목을 쭉 빼고 소리의 근원을 찾기 시작했다. 누구라도 볼만한 일이었다.


"나는 없지. 근데 그 여자분은 있을 수도 있지."


조용히 김치전을 쪼개 먹던 형이 되도 않는 이석민 멘트에는 더 이상 참아줄 수가 없었는지 미간을 다 찌푸리며 꺼낸 조언에 내가 미쳐 돌았다. 그게 왜 이 시점에 나올 말이야. 자괴감에 젖어 풀썩 고꾸라진 정수리 위로 누군지 모를 이의 따뜻한 손길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형 입에서 튀어나온 애인 없다 소리에 체한 듯 답답했던 뭔가가 쑤욱 내려갔으니 나는 정말이지 답이란 게 없는 인간이었다.


"마시고 죽어, 민규야."


그 날 빈 잔에 소주를 채워주는 지수형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









"형, 이거 어디다 놔요."


급하게 작업대 하나를 슥 밀어 치운 형들이 먼지 바닥 위로 신문지 몇 장을 착착 깔아 펼치기 시작했다. 형은 또 어디를 갔나? 작업실을 휘 둘러보는데 정한이 형이 봉투 하나를 받아가며 대뜸 원우는 화장실. 하고 말을 건넸다. 누가 물어봤나. 애써 궁금하지 않은 척 큼큼 나머지 봉투를 모두 올려 도시락을 하나씩 꺼내 내려 놓았다.


"김민규 또 배달이야? 고생 많네. 너네는 우리 애 좀 작작 부려먹어라."
"내가 뭐 억지로 시키냐. 쟤가 여기다 꿀 발라놨는지 맨날 기웃거리니까 오는 김에 좀 사와라, 하는 거지."


체대 운동장보다 여기서 보는 일이 더 많은 승철이 형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어깨를 휙 감싸며 하는 타박에 정한이형이 지지 않고 느물거렸다. 재수는 없는데 딱히 틀린 말이라곤 요만큼도 없으니 화를 낼 건덕지도 없다.


"세상에 우리 허니 왔다. 원우야, 이리와. 마이 허니. 꿀벌이 사온 저녁 먹자!"
"왜 이래, 이 형이. 민규 언제 왔어?"


방금요.

어제도 밤샘을 했다더니 방금 세수를 한 말간 얼굴이 그새 때꾼해져 안쓰럽기 그지 없는 꼴이었다. 뽀글뽀글 앞머리에 매달려 달랑이던 물방울이 톡톡 떨어지자 들고 있던 수건으로 팡팡 두들기는 모습이 흡사 그루밍하는 고양이가 따로 없다.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새 가까이 온 형 작은 손이 어깨를 톡톡 치고 지나간다. 고마워. 인사와 함께.


"민규 안 먹어?"
"아, 이거 니 거냐?"
"아뇨. 형 거 맞아요. 형 있을 것 같아서 샀어요. 집 김장한대서 갔다가 밥 얻어먹고 왔어요."


너만 그 맛있는 걸 먹고 온 거야? 막 수육에 김치 속 싸서? 혹시 생굴도 있었니?

이 형은 캘리포니아에서 온 게 맞긴 한 건가. 그러고 보니 미국 여권은 또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우리 모두 속고 있는 게 아닐까. 무슨 미국 사람이 수육에 김치 속 싸서 먹을 생각을 해.

도시락 불고기를 욱여 넣으면서도 서글픈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무슨 중죄를 다 지은 기분이 되어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엄마가 싸준다고 했는데. 그거 기다리면 너무 한밤중이니까. 도시락 사오라면서요."
"잘했어, 잘했어. 착하네. 김장도 도와드리고. 재주가 몇 개야, 우리 뽀빠이는."


아닌 게 아니라 진짜 싸올 마음은 있었다. 엄마가 수육도 넉넉히 삶았다고 했고. 다만 뒷정리를 하는 새 가져갈 김치 속에 생굴을 모조리 넣어 버무려놓은 엄마의 부지런함이 문제였다. 들고 와봐야 원우형은 한입 먹어볼 수도 없는 그림의 떡인데. 지하철에 버스를 갈아타며 두 시간 반을 굳이. 이고지고 들고 올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막상 원우형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지금에 와서는 후회가 되긴 되는데. 별 수 있나.


"민규 손도 잘 써?"
"농구 잘하잖아."
"발도 잘 써?"
"축구 잘하잖아."


무슨 만담 같은 둘의 대화를 멀뚱히 듣다 고개를 들어올리니 정한이형이 나를 향해 무섭도록 두 눈을 반짝였다.


"너 꼬막 좀 밀어볼래?"
"그게 뭔데요?"
"반죽. 저거 흙."






남의 과 작업실에 들어와서 활개를 치는 것도 영 불편한데 다른 사람 없다고 이렇게 막 시키는대로 해도 되는 건지. 찝찝한 건 찝찝한 거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양말은 둘 다 어디로 사라지고 트레이닝 바지마저 무릎 위로 착착 접혀 올라가 있었다.


"이게 기포를 빼는 건데. 발로 밟아서 반죽을 한다고 보면 돼."
"그냥 밟으면 돼요?"
"어. 발을 이렇게 누르면서 피는 거야."


이렇게요? 애매하게 서서 한 발을 디디는데 설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지 턱을 살살 긁던 형이 요리조리 발을 바닥에 들이밀며 시범을 보였다. 물론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체 이딴 걸 왜 시켜서. 윤정한에 대한 원망의 불씨가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원우형이 설명을 하고 있으니 안 한다 손을 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작심을 하고 다시 한 발을 떼 옆으로 조금 자세를 옮기려는데 휘청, 중심을 잃었다. 어어? 놀란 와중에 앞에서 보고 있던 형이 급하게 내 두 팔을 붙들었다.


"위험하니까. 그냥 잡고 하자."


오오, 윤정한. 빠새 사줘야겠다. 열 봉지는 사줘야겠다.


"그러니까. 꾹꾹 누르면서 도는 건데. 어어- 이거 안되겠다. 잠시만."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또 툭 튀어나온 사투리가 가슴팍을 간질이고 지나갔다. 귀여워. 씹어먹고 싶다, 진짜.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던지고 양말을 휙휙 대충 벗어낸 원우 형이 척, 내 앞을 가로막으며 반죽 위로 올라섰다. 꼬슬꼬슬한 머리카락이 코끝에 닿을랑말랑, 가깝다 못해 손만 뻗으면 와락 백허그도 너끈히 할만한 거리였다.

세상에.


"나 봐봐. 발 내밀어봐. 그렇지. 그렇게 체중을 실어서 한 번 꾹, 다시 옆으로 요만큼 가서-"


하라니까 발만 이만큼씩 내밀어 쫓아는 하고 있다만 사실 아무 얘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저 악마들 눈에 띄지는 않을까. 덜덜 떨리는 내 두 주먹이 형 눈에 띄지는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 아름다운 형의 옥체에 이 천박하고 더러운 나의 육신이 닿지는 않을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치. 잘한다. 역시 다 잘하-  응?"
"네?"
"방금 불렀잖아. 쿡-"


제가요? 되묻는 말에 빼꼼 돌아다본 의아한 얼굴이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


"왜?"
"네?"
"응? 아아-"


다시 홱 돌아선 형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형의 엉덩이를 쿡 밀어 찌른 원흉을 향해서.

닿지 않으려 뒤로 물러선 몸뚱이와는 영 의견이 맞지 않았던 걸까? 아랫도리 세상에선 힘없는 트레이닝 천을 밀고 자라난 우리 친구가 닿을 듯 말 듯 흔들리는 형의 엉덩이를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 콕콕- 쿡쿡- 안녕!


"열정이 있어서 그래. 열정이. 그럴 수 있어. 괜찮아."









**









종강이었다.

스무 살이 끝나고, 신입생 시절이 끝이 났으며, 또 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다 끝이 나는 와중에 나만 이렇게 허송세월 시간만 보내고 또 보내고. 바보 같이 멈춰 있었다. 다시 멍청한 새해를 맞이할 수는 없었다. 끝을 내야 했다. 무식한 짝사랑은.

해야 했다, 고백을.


"언제 왔어? 가자. 뭐 먹을래?"
"형, 거기 말고. 이쪽으로 가요."
"주차장? 차 가지고 왔어? 누구 차?"


저녁 같이 먹을 수 있냐는 말에 더없이 흔쾌히 그래,를 외친 형의 대답을 시작으로 하나씩 차분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스테이크가 유명하다는 어느 식당에 전화를 해 해산물을 모조리 뺀 코스를 예약하고, 본가까지 내려가 엄마 차도 한 이틀 빌려 올라왔다. 형의 탄생화라는 하얀 장미는 다발로 포장해 트렁크에 실어 두었고, 설마 좋아할까 싶기는 했지만 안 하는 건 그거대로 아쉬우니 트렁크를 열면 함께 쏟아져나올 헬륨 풍선도 색깔 별로 가득 채워두고.

또 뭐가 있을까. 뭘 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 매 시간, 매 분, 매 초 비는 틈이 없도록 계획을 짜놓고 어제는 모든 동선을 따라 답사까지 다녀왔다.

그러니까 계획은 완벽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준비는 나로서는 더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거 안 밀리는데. 어떡하냐. 전화도 안 받아?"
"네. 아, 미치겠네."

하고 많은 차 중에 왜 하필 내 앞에 이중 주차를 해놓은 건데. 그리고 이중주차를 정해야겠으면 기어는 왜 중립에 안 둔 건데. 왜 전화는 안 받는 건데.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마지막이다. 이번 전화까지 그냥 넘기면 바퀴 네 개 못이라도 땅땅 박아줄 테다. 이를 악물고 다시 한 자, 한 자 숫자를 찍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디래? 뭐래?"
"강의 중이래요. 30분 안에 끝난다고."
"아, 그럼 기다리자. 나 아직 배 안 고파."


늙은 대학원생인 건지, 젊은 교수인 건지 더 말할 새도 없이 뚝 끊어버린 전화를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노라니 패딩에 둘둘 싸여 떨고 있던 형이 괜찮다는 툭 어깨를 부딪쳤다. 매번 저만 날아갈 걸 알면서도.


"이제 좀 따뜻하다. 괜찮아. 좀 천천히 먹지, 뭐. 배 많이 고파?"


그냥 뒀다가는 언 송장 치우기 일보직전이라 얼른 차에 태워 열선부터 올려줬더니 부비작부비작 금세 온돌바닥에 올려놓은 고양이마냥 늘어진다. 와중에 영 풀어지지 않는 내 얼굴까지 살펴주고. 눈물 나게 고마운데,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지금 당장 예약 시간이 얼마 남지를 않았다. 한참 막힐 시간인데.

딱 돌아버리겠는데 또 되게 열심히도 뭘 찾는다. 블루투스 연결이라도 할 심산인 건지. 엄마 차라 나도 잘 모르겠는데. 절로 나오는 한숨을 목 끝으로 넘기며 화면을 같이 들여다 보는데 순간, 노래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란다.


"걱정 마."


아, 진짜 이 형을 어떡하지? 어떡하지, 진짜. 씹어먹을까.


"오늘은 머리 세운 뽀빠이네."
"아, 괜찮아요?"
"어. 훤칠하다. 이마 보이니까."


오늘 무슨 날이야?

왁스까지 발라 올린 머리가 눈에 들어오니 이제서야 한껏 꾸며댄 어색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걸친 코트자락을 살살 만진 원우형이 두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무슨 날이었는데. 이제는 모르겠어요.

대답 대신 지어 보인 울상에 내 쪽으로 아주 몸을 틀어 마주한 형이 진지한 얼굴로 눈을 맞춰왔다.


"혹시 무슨 일 있어?"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지금이어도 되는 건가.

학교에서 제일 낡아빠진 공대 건물 뒤 거지 같은 주차장에서 이렇게. 조명도, 근사한 음식도, 향 좋은 와인도 뭣도 없이. 이렇게 대충? 엉망으로? 얼렁뚱땅? 그래도 되는 건가.

정말이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오늘 진짜 준비 많이 했는데."
"뭘? 응?"
"고백하려고."


고백? 나한테?

정말 요만큼도 눈치채지 못했던 건지 되묻는 형의 두 눈이 놀란 토끼 눈이었다.


"무슨 고백을 또 해."
"네?"
"너 벌써 열두 번은 더 한 것 같은데."


열두 번? 내가?

황당한 형보다 더 황당해져 말문이 턱 막힌 나를 두고 곧 속사포 같은 형의 말이 이어졌다.


너 예술대 건물에 죽치고 앉아서 나만 찾고 다녔던 거. 내 먼지 나는 작업복 보면서 스타일 좋다고 말 같지도 않은 말한 거. MT 가는 길에 나한테 키스 잘한다고 어필도 했고. 바다 들어갔다 나와서 지는 쫄딱 젖었으면 겨우 내 바짓단 젖은 것부터 닦아줬잖아.


"아..."


그것 뿐이야? 전에 작업실에서 나 물레 돌리는 거 훔쳐보다 침 흘리는 거 내가 다 봤어. 축제 때 사간 반지도 부적처럼 들고 다니지? 그리고 그 날 너 나한테 애인 있는지는 왜 물어봤어? 어? 왜 그랬는데?


"좋아해서요. 좋아해서 그랬어요."


홀린 듯이 입 밖으로 툭, 진심이 튀어나갔다.


"좋아해요, 형."


열세 번째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