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한] 죽음만 꺼내 씹었다
2021. 2. 20. 10:05

 

 

 

 

'독백도 끝이 나고
바람도 불지 않아
 이 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
문 한 번 열지 않고
반추 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겨울일기, 문정희








죽음만 꺼내 씹었다.








하늘은 부서지고 침몰한 청춘은 아무런 말이 없다.




너를 찾은 건 겨울이었다. 그래, 그런 온난한 겨울은 아니었다. 얼마간 따뜻했던 겨울은 어느새 혹독한 추위가 되어 살을 에고 심장을 할퀴었다. 나는 묵묵히 그런 겨울 속에서 옷깃을 여미며 묵묵히 너를 위한 노래를 불렀고 묵묵히 무던히도 버텼다.

그러다 문득 추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손이 얼얼해서 벌겋게 다 터버릴 정도로 추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이 겨울이 더 혹독해지기를 빌었다. 따뜻한 방 안에 앉아있는 날이면 나는 창문을 활짝 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겨울을 맨살로 느끼고 그렇게 살갗이 다 벗겨지지 않으면 도무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없었다. 하얗게 말라 비틀어진 살가죽을 손톱으로 피가 날 때까지 뜯어내지 않고는, 그렇게 생(生)의 증거인 선혈(鮮血)을 보지 않고는 생을 느낄 수 없어 나는 늘 피투성이인 채였다. 못난 손 위에, 까맣게 굳은 딱지와 빨갛게 터진 상처.



나는 다만 버텨야 해서 그랬다. 버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너지기 전까지는 버텨야 했다. 너도 그랬을 테니 나도 그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겨울은 끝내 지나가지 않았다. 겨울은 머물러서 나를 죽였다.





너에게 그랬듯이.





/



"그, 혹시 옆에 자리 없으면 앉아도 될까요?"



숨을 급하게 몰아쉬면서 민규는 원우의 옆자리를 가리킨다. 원우는 눈을 찌를 만큼 잔뜩 덮인 앞머리를 모자로 꾹 눌러 내리면서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인다. 미세한 움직임에도 감사해요, 하고 활짝 웃은 민규가 원우의 옆자리로 꽤나 묵직한 소리를 내며 앉는다. 원우는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을 깜빡이다 모자를 더 푹 눌러 쓴다. 민규는 자리에 앉고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가방을 뒤적거린다. 노트북을 꺼내서 전원을 켜고는 온통 까만색으로 점철된 옆의 인영을 흘긋, 종이로 출력한 레포트를 가방에서 꺼내고는 다시 흘긋, 쳐다본다. 원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채색이다.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어두운 색깔의 옷은 오히려 그를 더 눈에 띄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공간을 메우는 힘은 그의 몫이었다. 공기에 잔뜩 서린 예민한 존재감에 민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시선을 레포트로 돌린다. 강의를 듣기보다는, 다른 밀린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맨 뒤쪽 자리를 찾은 거지만 민규는 왠지 이 자리가 나쁘지 않다고 느낀다. 출석 체크에 대충 응하고 나서 모니터 속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그러면서도 민규는 어쩐지 옆 자리의 원우가 신경쓰여 계속 흘긋거리고 만다. 전원우. 아주 미세한 움직임으로 또 굼뜬 손이 살짝 올라왔다 내려간다. 이 큰 강의실에서 그렇게 작은 손짓으로 괜찮을까. 걱정이 무색하게 이름은 곧바로 넘어간다. 민규는 이유 모를 긴장감에 입술을 혀로 축이며 손을 움직였다. 전원우. 그게 이름이구나. 얼핏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선배였던가.



"저기..."



민규는 원우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톡, 건드려본다. 흠짓, 움찔거린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원우는 고개를 숙인 채 웅얼이듯 왜... 하고 말끝을 흐린다. 원우의 외투 주머니에서 떨어진 작은 상자를 건네자 원우는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민규의 손에서 빠르게 상자를 낚아챈다. 가벼운 상자는 한순간에 원우의 품 속으로 사라졌다. 꽉 붙든 손에 마디마디가 선명하게 올라온다. 뼈대가 참 얇다. 민규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생각을 한 뒤에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두어번 흔들었다. 원우는 아주 작은 숨결로 민규에게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민규는 그렇게라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색함이 맴도는 정적 속에서 숨을 쉬기 버거웠던 탓이다. 강의를 들으면서, 레포트를 뒤적거리면서도 이상하게 그 존재가 자꾸만 민규의 신경을 건드렸다. 원우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엷은 몸짓으로 의자에서 일어난다. 아... 키가 꽤 큰 편임에도 불구하고 원우는 소리 없이 움직인다. 늘 둔탁한 소음을 달고 사는 민규는 무음의 팔랑이는 가뿐함이 신기하다. 원우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더니 습관처럼 모자를 눈앞으로 꾹 내린다. 가만히 원우를 올려다보던 민규는 원우의 귀에 뚫린 피어싱에 시선이 닿는다. 단조한 십자가. 까만 모자.

그리고 아마도 까만 마스크? 민규의 예상대로 원우는 곧 주머니에서 까만 마스크를 꺼내 든다. 이제 알겠다. 민규는 원우를 그제야 알아본다. 동기인 석민이 늘 입에 달고 사는 그 '이상한' 선배, 전원우다. 이름이 주는 익숙함의 이유를 알아차린 민규는 어딘가 다급해진다. 우당탕. 텅 빈 강의실에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간다. 그 소음은 앞서 걸어가던 원우를 뒤돌아보게 할만큼이나 드라마틱한 구석이 있었다. 민규는 새빨개진 얼굴로 의자를 바로 세운 다음에 노트북을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원우는 잠시동안 자리에서 민규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간다. 민규는 원우의 뒷모습을 쫓아 밖으로 나간다. 이미 잡기엔 멀어진 거리를 눈으로 계산하며.

















민규가 다시 원우를 만난 것은 꽤나 의외의 공간에서였다. 앞머리를 길게 내리고 모자로 온 얼굴을 덮어내던 캠퍼스 속 모습과는 달리 시원하게 깐 앞머리가 인상적이었다. 민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당혹스러운 빛으로 물든 채, 가느다란 손으로 채 가려지지 않는 얼굴을 덮으려 애쓴다. 민규는 원우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선다.



"저, 아시죠."



확신이 담긴 투에 원우는 어물쩡 고개를 주억거린다. 민규는 그 대답에 예쁘게 웃어보이며 원우의 앞에 놓인 술잔을 만지작거린다. 원우는 민규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는 눈과 마주쳤을 때, 원우의 몸은 또 한번 빳빳하게 굳었다. 하지만 원우에게는 저를 가릴만한 그 무엇도 없었다. 원우는 입술을 깨문다.

민규는 불가항력적인 이끌림으로 원우를 제 시선 속에 담아 낸다. 원우의 얼굴을 자세하게 뜯어보며 그 세밀함에 감탄한다. 밀가루처럼 뽀얀 살결은 잡티 하나 없이 말끔했고, 이마에서는 둥글었다가 코끝으로 가 별안간 날카로워지는 선은 틈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하나의 도자기 같았다. 적당히 붉은 입술은 끝으로 갈수록 얇게 분홍빛으로 물들어서 언젠가 본 꽃잎을 생각나게 했다. 그 선배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석민의 말이 온 심장으로, 마음으로 뼛속 깊이 이해가 된다. 지나치게 아름다워 순수한 피조물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배경과 섞여들기 위해 온통 까만색으로 자신을 뒤덮어도 숨겨지지 않는 존재감은, 색감으로 가득찬 지금, 배가 되어 민규의 시야를 괴롭힌다. 아주 천천히 호흡하며 원우의 얼굴을 본다. 턱 끝에서부터 살살, 눈빛은 타고 올라와 결국 눈에서 찌릿, 하는 느낌과 함께 맞부딪친다. 공기에서 파스스, 하는 소리가 난 건 아닐까. 민규는 원우의 눈동자를 호흡으로 빨아들일 것처럼 무겁게 숨을 들이쉰다. 원우는 속눈썹을 파르르 떤다.



민규는 잠시 말을 잃는다. 아름다움 앞에 모든 것이 무릎을 꿇고 만다.



"...선배님."



민규는 침을 꿀꺽 삼키고 원우는 숨을 얄팍하게 내쉰다.



"눈...."



민규의 시선이 올곧게 원우의 눈동자를 담는다. 민규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 속에 원우의 모습이 비쳤다. 원우는 진득하게 붙어오는 민규의 시선을 마주보며 서글픈 미소를 삼켜내려고 입을 꾹 다물고 뜨거운 목구멍으로 연신 침을 삼켰다. 입 안이 말라서 침이 없는데도, 울컥, 올라오는 무언가를 삼켜내려 억지로 입술을 깨문다.



"아름다워요."



원우의 눈동자가 크게 뜨인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동공이 흔들리고 발은 저절로 뒷걸음질을 쳤다. 아름답다는 말에 익숙하지 않아서. 원우의 입이 자꾸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열렸다가도 닫히고, 그렇게 뻐끔뻐끔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한다. 민규는 원우의 앞으로 놓인 술잔에 제 잔을 가볍게 부딪치더니 짠, 하고 아무렇지 않게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킨다.



".....여기서 일해요?"



원우의 모습을 못본 척, 화제를 돌린 민규는 태연한 얼굴로 홀을 둘러본다. 사소한 배려에도 원우는 입술을 꾹꾹 누른다. 원우는 민규의 질문에 가볍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다가, 문득 민규의 시선이 저에게 닿아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그만 목소리로 응, 하고 대답한다. 민규는 원우의 목소리에 설핏 웃더니 턱을 괴고 원우를 바라본다. 원우는 오롯한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 괜히 뒤를 돌아 테이블 위를 행주로 닦는 척을 한다. 민규는 원우가 움직일 때마다 같이 사락이는 와이셔츠 자락을 눈으로 쫓는다. 분명 어깨에 잘 맞는 옷인데도 낭창한 허리에 감긴 셔츠는 품이 헐렁했다. 허리춤에서 쭈글쭈글 접힌 옷자락의 주름을 하나씩 세기만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민규는 푸스스, 웃음을 터뜨린다. 낮은 웃음소리가 원우의 귀에 닿자 원우는 또 흠짓 어깨를 떤다. 하나하나 서툴게 반응을 보이는 원우의 모습에 미소가 자꾸만 새어나온다.



"...근데,"



드물게 원우의 입이 먼저 열린다. 민규는 놀라서 다른 곳을 보고 있던 고개를 홱 돌린다. 원우는 민규의 과반응에 약간 주춤하더니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여기.. 들어오는 거 힘들지 않았어..?"



귀여운 질문이다. 민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미 캠퍼스 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을 모르는 순수하고 깨끗한 눈망울이 못내 사랑스럽다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호텔리어라 열 살 남짓한 때부터 바에 눌러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는 사실을 굳이 알리고 싶지는 않아 민규는 말끝을 부러 흐린다.



"아니...뭐, 성인이잖아요."



장난스럽게 받아친 민규 덕에 상황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원우는 더이상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잔을 손으로 쓸어본다.



"...음,"



원우는 다시 운을 떼어 본다.



"내 눈..."



예쁘다고 해준 건 네가 처음이야.



말을 하는 원우의 눈빛에 반짝 생기가 돈다. 민규는 작은 빗장이 하나 열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원우가 걸어놓은 마음 속의 커다란 울타리, 그 위로 힘겹게 걸친 빗장이 덜컹거리며 풀린 것 같다고. 얼굴을 마주한지 두 시간 만에 원우의 얼굴에 그려진 말간 호선을 보며 민규는 찬란함을 느낀다. 스물 두 살, 푸른 청춘에 까만색은 어울리지 않는다. 눈동자에 담긴 붉은 청춘이 타오를듯이 민규의 머릿속을 잠식해간다.



홍안(紅眼).



전 세계 인구의 1%도 안 되는 붉은 눈동자의 주인. 원우는 지독히도 적색이 잘 어울렸다. 푸르고 붉게 펑펑 터지는 폭죽처럼, 원우의 인생 어딘가는 지금 붉고 푸르렀다. 스물 한 살, 민규는 방치하던 청춘에 처음으로 물을 주었다. 메말랐던 인생에 원우가 침입한다. 그건 온통 원우의 청춘이 찬란하기 때문일 거라고, 민규는 색감으로 가득한 원우를 보며 속으로 곱씹는다. 청춘이 꽃 피는 시기. 오월의 늦봄에 민규는 원우의 꽃이 궁금했다.



내년 봄에는 꼭 그 아름다운 꽃을 피워줄래요?



민규는 고백의 언어를 모른다. 그래서 가장 낭만적인 고백을 한다. 김민규답게, 그리고 그들의 청춘답게.

















/



당신의 청춘이 너무 밝게 피어서 실명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온통 까만 꽃인데도….

무수한 색을 지녀서, 그 모든 걸 흡수해서, 누군가의 눈에는 까맣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웠어.

…곧, 지고 말 거야.

알아. 하지만 진다고 해서 당신의 청춘을 흘려보낼 수는 없잖아.















/



원우는 민규의 손길이 익숙해졌으면서도 늘 새롭게 반응한다. 움찔거리지 않는 순간이 없어 민규는 끝 없이 벅찼다. 곁을 내어줬으면서, 매번 민규가 원우를 보듬을 때면 처음 겪는 사람인 마냥 볼을 붉게 물들인다. 눈동자와 꼭 닮은 색으로 양 볼이 발갛게 물들면 민규는 '사랑스럽다'는 말의 형체를 두 눈으로 똑똑히 인지한다. 그 언어를 그림으로 풀어내면 꼭 제 눈앞의 원우가 될 거라고 확신한다.



"형, 예뻐요."



그리고 그러한 원우에게 느끼는 감정은 주체할 수 없어서 입 밖으로 툭툭 나오곤 했다. 원우는 사랑의 언어에 면역이 없어서 민규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이 간지럽다. 목 언저리부터 주욱 발 끝까지 간지러운 느낌은 늘 몸을 관통하고, 그러면 몸은 또 빳빳하게 굳고 만다. 그 후로는 작은 행동에도 움찔, 눈동자만 굴릴 뿐이었다.



"...안 예뻐."



한 박자 느리게 떨어진 대답은 효력이 없다. 원우도 그걸 알아서 붉어진 귓가를 가릴 생각도 못하고 손등을 다 덮은 소매를 짓이기고 늘이기만 했다. 민규는 원우가 습관처럼 대꾸하는 말에도 표정을 굳히고는 다시 한번 예뻐, 하고 말을 붙인다. 원우는 입술을 달싹이다 또 조용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민규는 이제 원우의 목소리에 익숙해져, 아주 섬세한 소리까지도 선명히 귀에 담았다.



너의 청춘이,

더 찬란해.



글자들이 기분 좋은 울림을 가지고 웅웅대며 귓가로 흘러든다. 곧 가장 아름답게 개화할 민규의 청춘이 궁금했다. 하지만 아직 오지 않았어도, 원우의 머릿속에 단 하나의 문장만은 확실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김민규의 청춘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영롱한 빛깔을 띨 것이다.

민규는 떨리는 손길로 원우의 손에 제 손을 겹친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원우에게로 전해졌으면 했다. 원우의 말 한마디에 어김없이 반응하는 심장의 빠른 울림을 원우도 알았으면 좋겠노라고. 원우는 아는듯 모르는듯 희미하게 웃으며 민규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는다. 조금씩 대담해진 관계는 처음의 머뭇거림을 넘어서 훌쩍 가까워진 거리를 반영한다. 원우는 손등을 느리게 문지르는 손길에도 놀라지 않고 민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다른 곳에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전부 다 보여줘요. 숨기지 마. 절절한 고백이 떠오른다. 원우는 더이상 무채색으로 섞여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민규와 함께 있으면 오색이 찬연히 펼쳐진 세상이 당연한 무언가가 된다. 무채색에 숨지 않아도 원우는 섞여든다. 물감이 섞이고 빛이 섞이는 것처럼. 민규와 섞여서 진중해진 색감과 섞여서 하얀 빛으로 둥둥 뜨는 빛깔이 한데 뭉쳐 원우를 뒤덮는다.

원우는 자신에게 생긴 변화를 찬찬히 되짚어본다. 마스크와 모자, 눈을 찌르는 앞머리로 모든 것을 꽁꽁 숨기기에 바빴던 어린 날의 저가 지나가고, 민규를 만나며 천천히 족쇄를 풀어내는 제 모습이 휙휙 머릿속을 훑고 지나간다. 잔잔하게 웃을 수 있었다. 좋은 일이니까. 어쩌면, 한 번쯤은 먼저 다가가야 할지도 몰라. 원우는 민규만큼이나 벅찬 마음을 꾹꾹 눌러담아 아끼고 추슬러서 민규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폭삭-

민규의 품에 정확히 안착한 원우는 얼굴을 민규의 옷가지 사이에 묻었다. 늦여름 환절기라 옷이 두툼해서 다행이었다. 얇은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숨을 내쉬기에는 열감이 뜨끈했다. 코트에 얼굴을 파묻고, 손은 꾸물꾸물 민규의 등판을 가로질러서, 꼬옥. 원우의 자세가 완성된다. 그리고 민규가 이 자세를 이해하기까지는 삼 초의 시간이 필요하다. 삼 초 뒤에는 늘 원우보다 세게 마주보고 끌어안는 민규니까, 그 정도면 민규의 머리가 터지지 않고 무사히 원우의 적극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드물게 원우가 먼저 품에 안겨올 때면 민규는 없던 힘도 솟아난다. 소중한 애인의 마르고 팔랑이는 몸은 한 팔로도 감길 것 같아 이상하게 속상하다. 그래도 힘을 주어 끌어안는다. 이러고 있으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거든.

원우가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민규는 꼭 봄에 같이 청춘을 피워내고 싶었다. 그래야만 제 청춘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이 하지 못하면 시들어 버리고 만다. 첫 눈에 전율로 느낀 감각. 서로의 청춘이 될 거라는 의미였다.



















/



사람들은 다들 위선자였다. 나는 단 한 명의 진심도 마주하지 못해서, 너를 위해서 나 하나만은 진심을 담아 울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위선적인 그들은 너를 마주하기가 두려워서 온갖 핑계를 대며 너를 외면하고 종국에는 떠나갔으니까. 너는 눈부셨는데 왜 그 빛 속에는 아무도 없었니. 그렇지만 나 또한 그에 대한 대답이 두려워 저 질문은 속으로만 애타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너를 떠나간 사람들은 그 사실이 못내 불편했는지 어디선가 핑계를 댈만한 구실을 찾았다. 모두 각자의 탓이면서, 누구에게도 잘못은 없는데, 마치 누군가는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듯. 그들에게는 알량한 마음의 안식을 가져다줄 욕받이가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그들 앞에 섰다. 너로 향할 비난과 원망은 없어야 했다. 죄목이 없는 죄인이 교수대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다.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사형을 선고한다. 그 소리가 교수대 위까지 울려퍼지는지도 모르고.

언젠가는 특별해서 아름다웠던 기억이 이제는 숨통을 조여온다.



아. 나는 결국, 다시 흑백의 세상으로 가야 하는가 싶다.



너의 발간 색감이 아직 덕지덕지 묻어있는데, 그걸 씻어내고서라도 나는 모든 걸 지워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추운 바람이 들이닥쳐서 나를 차갑게 할퀸다. 사람들의 시선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너의 부재였다.



이 추운 겨울 속에 네가 없다는 것.



















/



"충성!"



민규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원우를 향해 경례한다. 원우는 군복 차림의 민규를 보며 작게 미소지었다. 키가 더 커졌어. 원우가 손을 올려서 민규와 제 사이를 가늠하자 민규는 머쓱한 듯이 짧게 깎은 머리를 매만지며 웃는다. 군대에 가서도 어김없이 훌쩍 커버린 민규는 이제 원우가 온전하게 고개를 틀어야만 눈에 담겼다. 길지 않은 휴가라 원우에게로 곧장 달려오고 싶다며 어리광을 부리는 민규에게 본가를 들렀다 오라고 당부했더니만, 딱 인사만 하고서 제집조차 들리지 않고 여기로 온 듯 싶었다. 원우는 그 사실이 과분하면서도, 사랑스럽다. 낯간지러운 말을 못 하는 성격이라 늘 침묵했지만, 그 침묵은 원우에게 찰랑이는 사랑의 언어임을, 민규는 알까? 원우는 몰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민규의 탄탄한 어깨를 토닥이며 안아준다. 비관의 삶에 들어온 낙관은 어느새 마이너스에서 영의 위치로, 다시 영의 위치에서 플러스로 삶을 바꿔놓는다. 눈가를 가리고 찔렀던 앞머리는 단정하게 눈썹까지 내려오는 길이가 되었다. 숨겨야만 했던 홍안은 더이상 부끄럽지 않다.



민규야, 너는 내 인생에, 나의 청춘에…



원우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까치발을 들어 민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민규도 원우의 목에 얼굴을 파묻으며 나른하게 한숨을 흘린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서로를 마주 안고 온기를 느끼는 순간에도 둘은 서로가 가져온 변화를 느낀다. 민규의 삶은 목적을 가진 뚜렷한 무언가로 변하고, 원우의 세상은 '먼저' 하는 것을 배운다. 군대를 빨리 다녀오겠다며 의젓하게 말을 꺼냈던 날, 원우는 잘했어, 한 마디와 함께 민규의 볼에 살며시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볼을 훑고, 민규는 원우의 허리를 끌어안아서 몇 번이고 입술 위로 촉, 촉, 가볍게 입을 맞췄다. 무의미한 레포트를 훑고, 질문을 던지지 않으며 시키는 대로 살아온 삶은 이내 사랑으로 가득 찬다. 우리 형, 곰신 신기면 안 되는데, 그치. 입대 전날, 입술이 괜히 삐져나온 민규를 살살 달랜 원우는 정작 민규가 들어간 후에 홀로 민규의 얼굴을 그렸다. 세상의 반 정도는 민규였던지라, 민규가 없으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원우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건 아니었으므로. 그림자에 숨어서 웅크리고 그 누구와도 그 어떠한 이야기도 나누지 않던 삶은 아주 사소한 일까지 기억하려 애쓰는 노력으로 채워진다.



"엄마가 들어가기 전에 먹으라고 준 건데,"



형이랑 먹고 싶어서 가져왔어요. 손에 들린 봉투를 달랑이며 눈가를 찡긋거리는 민규에 원우가 못 말린다는 듯 웃는다. 집 안으로 민규를 들이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꺼낸다. 작은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서 발장난을 치다가, 시선이 맞닿으면 숨죽여 웃었다. 원우는 지금이 딱 완벽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오랜만의 만남이지만 어색함은 없고 오직 서로만 있었다. 청춘과 찬란함, 사랑. '너'로 가득 찬 완벽한 순간이다. 민규가 아, 하고 원우의 입 앞에 숟가락을 대면 원우는 조그맣게 입을 벌려 오물거린다. 아주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고개를 끄덕인다. 원우는 민규가 없는 학교 생활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면 민규는 별볼일 없는 군대 막사 이야기를 주절주절 했다. 가끔씩 스치던 손은 어느새 깍지를 끼고 있었다. 민규는 원우의 손가락에 짧게 입술을 누르며 조금만 기다려요, 한다. 원우는 달력을 보더니 민규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응, 하면서 민규의 어깨에 기댄다.



"제대하면 형이랑 진짜 이것저것 다 할 거예요."

"..뭐 하고 싶은데?"

"맛집 투어도 하고 싶고, 같이 바다도 보러 가구, 음... 그냥, 형이랑 함께하는 뭐든 하고 싶어요."



원우의 심장은 기분 좋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함께하는 미래를 그린다. 원우에게는 어쩐지 낯간지러운 일이었다. 처음이니까. 민규와는 모든 게 처음이라서, 처음이 주는 설렘을 나눴고, 이제는 익숙함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그려본다. 미련과 후회 속에서 과거를 살던 원우는 처음으로 앞을 봤다. 자신에게도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민규와 그 길을 걸어가는 상상은 늘 잔잔한 미소로 끝난다. 아니, 그 길은 끝나지 않겠지. 서로의 청춘이 다할 때까지, 눈부실 만큼 빛나는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그리고 조금씩 흩어져가는 청춘 속에서도 손을 잡고, 나중에는 '우리'가 일상이길 바란다. 원우는 민규의 눈가를 살살 쓸어본다. 손에 담기는 적당한 온기와 초콜릿 색 피부가 사랑스러워서 조용히 매만진다. 민규는 눈을 감고 원우의 손길을 느낀다.



"사랑해요."

"...나도."



몇 번을 말해도 질리지 않는, 오히려 넘쳐나기만 하는 말을 내뱉는다. 헤퍼질까봐 아끼기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시간이 더 아까워서, 틈이 나는 대로 사랑을 전한다. 서로에게 닿아도 닿아도 모자라서. 민규는 천천히 원우의 볼을 감싼다. 민규의 어깨에 올라온 손이 바짝 긴장한다. 한 손에 감기는 원우의 허리를 붙잡고 무릎 위로 올린다. 원우의 고개가 느리게 떨어지고, 민규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겹친다. 너무 소중해서 아주 느리게, 놀라지 않게 움직인다. 손으로 등을 토닥이며.

한참의 시간 끝에 입술이 떨어진다. 원우는 발갛게 상기된 볼로 바르작거렸다. 원우를 가볍게 안아서 내려준 민규는 흐트러진 원우의 앞머리를 정리한다. 다정한 눈빛을 올려다보는 원우의 눈이 몽롱하게 빛난다.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물기 어린 목소리에 민규가 잠시 멈칫한다. 눈꼬리를 잔뜩 접어 웃으면서, 나도 너무 행복해요, 민규가 대답한다. 눈부시게 피어날 일만 남았다. 잔뜩 영글은 민규는 찬란하지 않은 구석이 없다. 그 미래에, 내가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원우는 미래를 그린다. 단 한번도 기대한 적 없었던 행복한 미래를.



























"...김민규 상병 보호자 되십니까?"



덜컥, 걸려온 전화에 원우는 하던 일을 멈추고 전화를 받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낯설었다. 원우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일어났음을 직감한다. 네. 한 마디를 내뱉는 것조차 힘겨웠다. 무슨 일이 있을 때 부모님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원우의 번호를 써냈다고 조심스럽게 얘기하던 민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와인잔을 거꾸로 달아서 정리하던 손길이 멎는다.



"그게... 다름이 아니라...."



김민규 상병이…. 남자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김민규 상병이…… 죽었습니다.





쨍그랑-

와인잔이 바닥에 떨어진다. 무수한 파편으로 깨져서 원우의 발목에 튀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원우는 그 비좁은 공간을 헤맨다. 전화기 너머로는 계속해서 의미를 잃은 말들이 웅웅거리며 전해졌다. 비참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듣기 거북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마지막 말을 듣자마자 원우는 외투도 걸치지 못한 채로 뛰쳐나간다.



"죄송, 죄송.. 지금 민규가, 민규...민규야... 저 가봐야 돼요 저, 저 지금 민규…"



로비에서 민규의 아버지에게 붙들린 원우는 눈앞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댄다. 무슨 일이냐며 큰 소리로 다그치는 음성에도 원우는 희게 질린 채 잡힌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내달릴 뿐이었다. 죄송, 죄송해요.. 나중에..일단...제가, 흐, 죄송해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한겨울에 와이셔츠 한 장을 걸친 차림으로 거리를 헤매는 원우에게 이상한 시선들이 꽂힌다. 원우는 추위도 느끼지 못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뛰었다.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가야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택시를 급하게 잡아 타고 주문을 외듯 병원의 이름만 중얼거렸다. 빨리, 흐윽, 빨리 가주세요, 기사님… 제발, 제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흐느꼈다. 기사는 백미러로 원우의 모습을 흘끗거리며 말 없이 속도를 올렸다. 한산한 거리를 위태롭게 내달리는 차 안에서 원우는 온몸을 떤다. 갑작스레 한기가 찾아들어서 뼛속까지 시렸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지로 닦아낸다. 우악스럽게 문지른 볼짝은 짓물러 빨갛게 쓸렸다.



"김민규, 김민규 어딨어요…"



병원 앞에는 군복을 입은 사람이 원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울한 표정으로 원우를 바라보던 남자는 힘겹게 침을 삼키고 원우를 안으로 이끈다. 차라리 응급실이었다면. 차라리 중환자실이었다면. 아니면 수술실이라도. 원우의 바람이 무색하게 군복을 입은 사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원우를 지하로 끌고 간다. 가장 인정하기 싫은 문 앞에 원우를 세운다. 원우는 문을 열지 않았다. 남자는 그런 원우를 빤히 보더니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하얀 천으로 덮인 누군가의 인영이 있다. 원우는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선다.



흐윽-

원우는 결국 닿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왜, 왜. 대답이 없는 질문은 메아리가 되어 다시 원우에게로 날아와 박혀 든다. 남자는 원우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고는 앞까지 끌었다. 원우가 고개를 저어도 남자는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원우를 기어이 하얀 천 바로 앞에 세웠다.



"면목, 없습니다. 하지만... 확인, 하셔야...."



도무지 말을 끝맺을 엄두는 안 나는지 말끝이 흐려졌다. 원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하얀 천을 열어젖힌다.



"...이게, 왜, 왜 이렇게.... 왜… 왜 이래요....? 이거 민규 아니잖아, 민규가 이럴 리.... 왜 이렇게...."



남자는 가만히 원우의 말을 들어주다가 가까이 다가와서 하얀 천을 전부 걷어냈다. 그도 눈을 질끈 감은 상태로. 툭. 원우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흙투성이 피부 위로 번졌다. 파랗게 질린 입술은 형체를 잃고 우그러져 있었다. 나뭇가지에 긁혀 헝클어진 머리와 흙이 말라붙어 비틀어진 피부, 그리고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부어버린 얼굴.

여전히 흙투성이인 옷에 검게 굳은 얼룩이 있었다. 선명한... 자상. 원우는 믿을 수 없어서 눈물이 말라버렸다. 울음도 나오지 않는 눈을 깜빡이며 목으로는 억눌린 쇳소리를 낸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아무런 말도, 움직임도... 그냥 모든 게 멈췄다. 총알이 박힌 곳으로는 엉겨붙어서 굳어버린 핏덩이가 있었다. 마지막까지 상처를 움켜쥐고 있었는지 손에도 핏자국이 한가득이었다. 피는 군복을 적시고도 모자라서 이곳저곳에 흘러내린 자국이 보였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입이 벌어진 채로 굳어버린 민규의 모습에 원우는 말문이 막혔다. 큰 소리로 울부짖기라도 하고 싶은데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아서 주먹으로 계속 답답한 가슴만 내리쳤다.



"김민규 상병님이… 단독행동을 하다가, 탄환에 맞고... 쓰러..지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귀를 막을 힘조차 없다. 남자는 자비 없이 이야기를 전달한다. 마치 금방 끝내고 털어버려야 하는 업무인 것처럼. 잔인했다.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이는 남자의 모습에 심장이 비이성적으로 요동쳤다. 죽여놓고, 슬퍼하지 마. 원우는 민규의 볼을 어루만졌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털썩-

원우는 주저앉는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냉기가 뼛속을 타고 원우의 몸을 차게 잠식해갔다. 그냥, 이렇게 영원히 차게 굳어버리는 게 나을까. 원우는 그늘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눈을 질끈 감는다. 더이상 홍안은 아름다울 수 없었다. 단 한 명, 예쁘다고 해줄 사람이, 없어서.



청춘은 침몰했다.



원우의 세상이 부서졌다.





















/



원우는 넋이 나간 와중에도 민규의 부모에게 연락을 했다. 그 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원우는 다시 철저한, 혹은 처절한 이방인이 되었다. 장례식에 원우의 자리는 없었다. 민규의 마지막 모습은, 시리고 차가운, 그것. 차갑게 식어버린 민규의 볼을 몇 번이고 문지르다가 뒤늦게 달려온 민규의 부모님에 의해 끌려나갔다. 그날 이후로 원우는 다시 혼자였다. 혼자.

원래부터 미래는 없었던 거야. 원우는 끊임 없이 되뇌인다. 누구를 설득하려는 건지도 모르고. 가장 아름답던 청춘은 막 꽃을 피울 참이었다.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많은 삶이었다. 그래야 했다. 하지만 모든 건 짓밟히고 땅으로 추락했다. 민규의 죽음을 설명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비즈니스. 해치워버리고 싶은 골치 아픈 일을 처리하는 것 마냥 사무적으로 절차를 설명하고, 싸인을 받고. 원우는 차가운 복도에 주저앉아 공허한 눈빛으로 그 과정을 지켜봤다.



모든 게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세상은 암전. 의미를 가졌던 말들과 시간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만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다. 내뱉는 숨결에 추억이 하나씩, 폐부를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며 뱉어지는 호흡. 함께 쌓아올렸던 시간은 다시 원우를 훑고 빠져나간다.

이제 텅 빈, 공허함. 살았지만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한 인영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바람이 불면 당장이라도 바스라질 것처럼, 선만 있고 속이 없었다. 채워넣은 생명이 꺼져간다. 원우는 느리게 호흡한다. 민규의 사인은 총상이었다. 단독행동. 민규가 할 리가 없는데. 그렇지만 그러한 이유로 민규의 죽음은 관과 함께 땅 속에 묻힌다. 그 죽음은 아무런 말이 없는 이의 탓이 된다. 부서진 채 땅 속에 묻힌 민규의 잘못이 된다. 원우는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가증스럽게 눈가를 찍어대고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은 뒤돌아서 민규를 탓했다. 죽음 뒤에도 죽음이 기다린다. 죽어서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민규는 항변할 길이 없다. 원우는 온몸이 쥐어뜯기는 고통에 괴롭게 비틀며 신음한다. 청춘은 천천히 기울어 심해로 잠겨든다. 물 밑에서 허우적대며 점점 가라앉는다.



원우는 몸을 웅크린다. 얇은 몸이 간헐적으로 경련했다. 불이 꺼진 방에서 고개는 심연으로 떨어진다. 나는, 민규야. 나는 네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미래는 사(死)로 도배되어 원우를 짓누른다. 헐떡이며 온몸으로 민규의 부재를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토해내고 싶은 심장은 요동친다. 죽음을 삼키지 못해 목 끝에 걸린 우울을 굴리다 씹고 다시 삼키려 애쓴다. 차갑게 얼어버린 손 끝이 무감각했다. 추위는 원우를 한 겹으로 감싸, 흔든다. 민규의 온기를 기억하던 손 끝은 점차 색을 잃고 파래진다.

원망스럽니, 민규야. 이것도 다 알아달라는 말인 거니. 원우는 소리 없는 질문을 하며 눈물을 흘린다. 민규의 혼이라도 남아 저를 괴롭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아팠노라고, 추웠노라고 원우에게 떼를 쓰는 것이라도, 그게 민규라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뜻했던 겨울은 점점 가혹해지기만 했다. 봄이 없어서. 봄을 부르며 피어날 꽃이 없어서.



원우의 겨울은 일그러진 눈꽃을 피워냈다. 봄에 닿지 못하고 사그라들, 처연한 꽃이었다. 차갑게, 차갑게…. 민규에게 닿을 수 있다면 이대로 얼어버려도 괜찮았다. 얼음 조각이 심장에 박혀서, 하얗게 굳어버린대도.





















/



…사실, 이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제가 민규를 그렇게 보내고 너무, 너무 힘들어서… 매일 밤마다 민규가 피를 뒤집어쓰고 꿈에 나타났어요. 원망스러운 눈길로 왜, 왜 죽였어, 하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했냐고. 그럴 때마다 눌러왔던 죄책감이 피어올라서... 민규한테 모든 걸 뒤집어 씌웠으니까.. 그 차가운 데서 혼자 죽어갔는데, 죽은 다음에도, 다들 숨기기에만 급급해서... 아무도 못 봤어요, 그때까지도... 민규한테 의식이 있었는데... 죽였어….

오발탄이었어요. 좀 덜 떨어진 애가, 보초 서다가 실수로… 둘밖에 없었는데... 그 애가 막 갑자기 밤에 사색이 되어서는 구 상병 방에 왔대요, 살려달라고. 자기가 민규를 죽인 것 같다고. 근데 구 상병 그 새끼... 그 새끼가 미친 소리 하지 말라면서 걔를 때렸대요... 이 일은 없었던 거니까 그냥 자라고. 다음 날에 막사에 갔더니 민규가 없었어요. 무슨 일이냐고 해도 아무도 대답을 안 해서, 무작정 보초 서는 데를 다 돌아봤어요... 근데, 근데. 애가... 죽어있었어요… 어디 기댈 곳을 찾다가 힘이 빠진 건지, 비탈길에 굴러떨어져서 있는데, 그 놈이 그 정신에 지혈을 하려고 외투를... 외투를 상처에 여미고...



죽은 줄 알았어요. 그 추위에 살아있을 수가 없으니까... 이미 빳빳해져가지고 온기가 전혀 없길래... 사람들을 불렀어요. 근데 구 상병 이 미친놈이 미리 선수를 쳤는지 이미 간부들이 애 죽음을 조작해놨더라고... 씨발. 그러고는 태연하게 민규 시... 시체를 병원으로 이송했어요. 저는 그 모습에 너무 화나서, 화나서… 병원으론 따라가지도 못 했어요. 안 믿기니까. 그런데 나중에... 나중에 따라갔던 애가 퀭한 눈을 하고 오더니 저를 붙잡고 고해성사 하듯이... 울면서 막 빌어요. 자기가 잘못했다고, 민규 형한테 몹쓸 짓을 했다고.. 그런데, 글쎄… 병원에 데려가서는 준비된... 영안실에 애를 넣었대. 의사한테 가지도 않고, 그냥.... 죽여버린 거야... 그러고는 걔한테 보호자를 부르라고 시키더니 무슨 얘기를 하러 나가버렸대요, 민규한테 시선도 한번 안 주고. 그 애가 떨리는 손으로 민규한테 하얀 천을 덮어주고, 전화를 하고... 그래서 원우 씨가 왔는데.....



순영은 말을 하다가 눈을 질끈 감는다. 이 말을 전하는 게 당신에게 더 독이 될 것 같아. 한참을 멈췄다가 망설이며 말을 한다.



그때.... 걔가 이상한 걸 봤대요. 원우 씨 보라고 천을 들췄다가 한 발짝 뒤에서 보는데.... 원우 씨가.....

원우 씨가 흘린 눈물이 민규 볼 위로 떨어졌을 때...... 민규가..... 손을 움찔거렸대...... 그 차가운 데서 총 맞은 채로 열 몇 시간을.... 버틴 거야.... 버텼는데, 아무도... 아무도 몰라봤어요. 나는 그때, 화나서 애꿎은 데다가 화풀이나 하고 있었는데... 그 시간까지도 민규는... 이 독한 놈이 버텼어요...

그런데 딱 원우 씨가 볼을 만졌을 때, 손에서 스르륵 힘이 풀렸대... 진짜 마지막 숨은 그때... 그때였는데..... 너무 미약해서 숨을 쉬는지 아무도 몰랐어요. 승관이는 보고도 못 믿었다고 그랬어요... 근데 꿈에 민규가 나와서 계속 승관이를 보고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대요... 그게 뭔지를 모르겠어서 늘 꿈 꾸면서 울다가 어느날.... 어느날 민규가 무슨 말을 하는지가 들렸대요. 그날 울다가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갔는데, 저녁에 승관이가 전부 말해줬어요. 민규가... 처절하게....



나 살아있었어.



자기는 살아있었다는 걸 승관이한테 알리려고 꿈에 수도 없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채로 나온 거예요....



순영이 인상을 찌푸린다.



아마도... 승관이가 그래, 아마도..... 민규가 원우 씨 보려고 버틴 것 같다고.... 눈 뜰 힘도 없고 숨을 제대로 쉴 힘도 없는 애가.... 원우 씨가 오자마자 마지막으로 움직이고는.. 놨으니까... 그 차가운 데서... 얼마나.... 누군가가 구하러 오기를 기다렸을지... 생각하면.....

미안해요.... 미안해요, 원우 씨….





















/



누구보다 찬란했던 청춘은 조각조각 부서진 채 까만 어둠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원우는 매일 밤 민규의 악에 받친 절규를 들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악몽. 민규의 죽음이 원우의 눈앞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흐르는 눈물은 마를 새 없이 원우의 볼을 타고 떨어졌다. 손등에 가득한 자잘한 상처를 손톱으로 긁으며 뜯으며 원우는 이를 악문다. 온기를 찾아볼 수 없는 공간에서 입술이 퍼렇게 뜬 채로 버텼다. 그러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다. 민규의 아픔을 제가 다 받아내지 않고서는, 도무지, 귓가에서 울리는 끔찍한 소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왜 죽였어.

살아있었는데.... 왜 그랬어…!



미안해, 내가..... 내 잘못이야.... 원우는 속죄하듯 자꾸만 손을 모아서 빈다. 들어주는 대상이 없는 고해만 반복된다. 몸에서 훅 피어오르는 병적인 열기로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도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멈추지 않았다. 너의 청춘을, 지켜주지 못해서. 내가 너를... 죽여서 미안해.

행복을 바란 것 자체가 넘치는 욕심이었다. 그리고 넘치는 욕심은 민규의 숨을, 단번에. 원우는 끊임 없이 속죄한다. 찬란하고 아름답던 민규의 청춘을 저의 까만 우울로 물들여서, 죄인이었다. 원우는 거울을 보지 않았다. 붉은 눈을 마주해버리면, 무너질까봐. 오직 민규만 담았던 눈이고 민규의 눈 속에서만 오롯이 존재하던 눈이었다. 이제 그 눈도 같이 죽어버렸어. 원우의 눈과 청춘은 민규와 함께 관 속에 매장된다. 아아, 누가 애도의 노래를 불러줄까. 겨울은 길거리에 노래가 없다.



원우는 그럼에도 겨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민규의 고통을 전부 뼈에 새기며, 민규를 죽인 계절이 지나가면 어떻게든 이 비관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민규 없이는 이미 이 삶에 의미는 없었지만 그래도 민규와 함께할 수 있었던 삶이라서. 견딜만 하지 않을까. 적어도, 그런 찬란한 시간 속에 우리가 존재해서.



그런데 민규야, 겨울은 잔인해.



원우는 중얼거리며 손에 힘을 푼다. 탁. 맥 없이 떨어지는 손이 바닥에 닿아 작은 소음을 낸다. 겨울은 끝 없이 이어져 원우의 숨통을 옥죄었다. 끝끝내 붙잡고 있던 청춘을 놓을 만큼, 겨울은 인정사정 없이 원우를 끌어낸다. 무감각해진 얼굴로 원우는 정처 없이 헤맸다. 누구로부터 도망치는지 모르고 달렸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고 계속해서 어딘가를 향해 갔다. 민규의 무덤은 본가 근처의 어딘가에 있다고 했다. 어딘가에. 원우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하, 하. 모든 감정이 메마른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더이상 나올 게 없는 숨결이 의미도 없이 원우의 안에서 빠져나간다. 생이 송두리째 뽑히는 느낌. 원우는 내뱉는 숨결마다 점점 속이 비어감을 느낀다. 다시는 채워지지 않을 공백. 어딘가로 향하던 걸음은 천천히 멎는다. 푸른 하늘을 위에 두고 드넓은 바다를 아래에 둔다.

그동안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선명한 남색과 투명한 에메랄드 색이 이리저리 섞인다. 멀리서 청춘의 파아란 녹음 짙은 소리가 들려온다. 온통 원색으로 가득찼던 청춘의 빛이 원우의 시야를 어지럽힌다.



…민규야, 거기 있어-



질문도, 명령도 아닌 문장이 애매하게 입술 끝에 걸렸다. 원우의 말에 대답하듯 파도가 철썩거린다. 바위에 닿아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를 가만가만 내려다보던 원우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홍안이 한순간 까만 심연으로 떨어진다. 민규를 닮은 흑안이 되어 파도를 보다가 하늘을 본다.

거기가, 청춘이구나. 원우는 청춘의 풀잎 향을 가슴 깊이 들이쉬며 눈을 감는다. 서로의 청춘이 되기로 약속했던 말들을 새긴다. 반드시, 지킬게. 바람이 원우의 머리칼을 흩뜨린다. 원우의 입꼬리가 위로, 아래로, 어딘가로 비틀린다.



비틀린 입꼬리로 원우는 허공을 딛었다.



완벽한, 청춘착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