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마실래?"
자리에나 좀 앉아서 얘기하든가. 성격은 급해서 쥐고 있던 차키만 테이블에 올려둔 민규가 인사도 없이 대뜸 물었다. 그래도 이게 얼마만인데.
"아메리카노."
하긴 뭘 묻냐는 듯한 표정을 샐쭉 남긴 채 돌아선 민규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주문대 앞으로 향했다.
진전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원고를 내팽개쳐두고 침대 위에 멍청히 뻗어 있던 어제 늦은 오후였다. [나 지금 비행기 타. 내일 저녁에 보자. 연락할게.] 꼬박 석 달 열흘만의 연락이었다. 답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곧 들고 있던 핸드폰을 저 발치에 툭 던져 버렸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음은 물론이고 이미 비행기 모드인지 모를 일 아닌가.
다만 그렇게 천장을 멀뚱히 보고 있으려니 입가에 나도 모를 미소가 스몄다. 그럼 그렇지. 꼭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안도했다.
"탔네."
"이 정도면 양반이지"
그런가? 가지고 온 진동벨을 내려놓은 민규가 탔다는 말에 두 손등을 내보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정신 없이 함께 달랑였다.
"언제 들어왔어?"
"좀 아까."
"머리라도 말리고 나오지."
너 기다리잖아.
정작 하는 사람은 뭐 마실래, 묻던 그 목소리에서 티끌 하나 변함이 없는데 듣는 이쪽만 괜히 속이 울렁인다. 우리 만나볼래요, 묻던 그 때 그 날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사실 막 설렐 타이밍도, 막 두근거릴 입장도 아닌데 내가. 아무래도 너무 오랜만인 탓이지 싶었다. 이 잘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게.
문득 낯설어진 시선을 피해 톡톡 두드리던 진동벨이 위잉- 요란스레 울렸다.
"뜨거운 거 못 마시잖아."
가지고 온 트레이를 가만 내려놓은 민규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머그잔을 내게 주는 대신 제 플라스틱 컵의 동그란 뚜껑을 잡아 벗겨냈다. 문득 마주친 내 의아한 시선엔 제가 더 의아한 듯 대꾸를 하면서. 빨대로 살살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담긴 얼음 두어 개를 머그잔에 조심스레 옮기고서야 하얀 머그잔이 주인을 찾아 내 앞으로 왔다. 여느 때보다 그을린 투박한 손끝은 손잡이 방향까지 반듯하게 돌려주고서야 멀어졌다.
"좀 편했어?"
"어?"
익숙한 풍경이었다. 뜨거운 건 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주제에 커피는 곧 죽어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만 시킨다며 타박하던 민규의 찡그린 미간도, 그럼에도 한없이 신중하게 얼음을 옮겨 담던 민규의 섬세한 손길도. 핸드폰이든, 책이든 뭔가에 잔뜩 시선을 쏟고 있었을 내 맞은편에 앉은 민규가 꼬박 2년이 넘도록 보낸 일상의 한 단면이었다. 고작 100일만에 이토록 생소해질 일이 아니었다.
어쩐지. 요 얼마간은 커피를 무슨 용광로에 끓이나 그랬다.
"연락 없이 지내는 거."
"아…, 그냥."
진짜 편했나 보네?
얼버무리는 내 대답에 활짝 웃어 보인 민규가 짓궂게 되물었다. 뭐 대단한 질문이라고 아니라는 말 한 마디가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
"넌? 너는 좋았어?"
"나?"
"응. 너. 니가 그러자고 한 거였잖아."
끝내 마음 속 원망이 손톱만큼 담겨 나간 목소리에 민규가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석 달도 더 된 일이었다. 김민규 생일이 까딱 넘어간 늦은 밤이었으니까. 자리를 빠져 나와 받은 전화에 민규가 대뜸 그랬다. 파견 명령이 났다고. 석 달이 될지, 반 년이 될지. 얼마가 될지 모르겠다고. 정말이지 요만큼도 가고 싶지 않았는데 가지 않을 이유도, 가지 못할 이유도 더 이상은 못 찾겠다는 말을 했었다.
서너 달 뒤면 한 번 휴가 나올 수 있을 거야. 그 때까지만 우리 시간이라는 걸 가져보자. 이게 진짜 잘하는 짓인지.
그렇게 끊긴 전화에 어쩌면 다시 연락을 해볼 수도 있었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노라고.
"나야 뭐. 익숙했지? 조금 답답했고."
눈썹을 찡긋 들어올리며 대꾸하는 민규의 씁쓸한 얼굴에 나야말로 명치끝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
지나가는 누가 본다면 일행인 것도 몰랐겠다 싶을 차림이었다. 줄곧 퇴근 후 저녁에나 만났으니 아는 모습이라곤 반듯한 정장을 빼 입은 늘씬한 회사원 차림뿐이었다. 흐트러진 거라곤 외투를 벗을 때나 보이던 여기저기 구겨진 셔츠가 다였는데.
물론 이번이 고작 여섯 번째 만남이기는 했다. 제대로 만나보자던 그 말 이후론 겨우 두 번째. 생일이라고 했다. 벚꽃 가득한 서울 한복판을 건장한 남자 둘이 거니는 상상을 했다. 얼추 그에 맞춰 흉내라도 내야 하지 않을까. 고르고 골라 입고 나간 자리엔 나와 꼭 같은 생각을 한 이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서 있었다.
"잘 어울리네요, 정장도."
"정장 덕 좀 본다 생각했는데. 아니네요."
각 잡힌 정장 대신 걸친 블루종이 진한 인상을 한결 부드러워 보이게 만들었다. 이슬이 맺힌 차가운 맥주 캔과 함께 기울어진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해산물 못 먹는단 얘기는 왜 안 했어요."
"내 얘기 할 일이 아직 없었잖아요. 나이 먹고 편식하는 게 자랑도 아니고."
본인 생일이니 본인이 밥을 사야겠다고 우기는 통에 끌려간 곳이 웬 일식 집이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벌써 으리으리한. 그 때라도 뒤돌아 나올 걸. 아님 당당하게 무슨 스페셜을 외치는 그 순간에라도 벨을 누르는 그 손을 잡아 말릴 걸. 끝내 튀김 몇 개와 알밥 정도를 겨우 입에 밀어 넣는 나를 보며 절망하는 얼굴을 보는 건 나 역시 괴로운 일이었다.
"원래 말이 좀 없어요?"
"그런 건 아닌데, 보통 듣는 일이 많으니까."
별 말도 아닌 대답에 크게 고개를 끄덕인 사람이 다시 한 번 쥐고 있던 맥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줄곧 느낀 거지만 참 뭘 먹든 맛있게도 먹는다. 없던 식욕이 들끓는다. 분명 같은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필시 내 것보다는 저 손 안의 맥주가 배는 맛있을 것 같은 느낌. 뭘 팔아도 잘 팔 얼굴인데. 어디 광고 모델로 소개라도 해볼까. 그저 회사원으로 살기엔 달린 얼굴이 너무나 아깝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젖힌 그를 돕기라도 하듯 시원한 강바람이 동그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다른 차림새에 갈 곳이 마땅히 생각나질 않아 아쉬운 대로 찾은 한강변이었는데. 함께 있으려니 곳곳이 그림이다. 만개한 벚꽃 길도. 북적대는 사람들도. 가까운 다리의 불빛도. 그를 받은 강물도. 옆에 앉은 사람도.
"직업병이에요? 이야기 수집 같은 거."
"이야기 수집은 맞는 것 같아요."
이야기 수집이라니. 아직도 볼 때마다 탄성이 터져 나와 입을 틀어막을 지경인 어마어마한 얼굴에서 튀어나오는 말이 지나치게 아기자기해 푸스스 웃음이 함께 터져 나왔다. 마주한 입 꼬리도 함께 따라 올라선다.
"내 얘기는 그럼 이제 다 수집한 거예요, 작가님?"
"얼추?"
"그럼 이젠 우리 얘기를 할 차례네."
멋쩍은 소리와 함께 이 쪽으로 온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모르고 진득이 이어지자 어쩐지 입장이 그대로 뒤집혀 버린 것만 같았다.
새로 들어갈 작품 배경이 대기업 건설사가 될 거라는 말에 건너고 건너 소개를 받은 사람이었다. 건설사 입사 2년차 사원. 세 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첫 번째 인터뷰가 끝나고 본인의 상사를 줄줄이 소개하며 몇 주를 내도록 자리에 함께 한 은인이었다. 필요하다면 회사 기밀이라도 훔쳐오겠다며 농담을 건네던 이 덕분에 엄두가 나지 않던 일이 반의 반절로 줄었으니 가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구워 삶았는지 담당 상무를 모셔 와 앉혀놓은 마지막 인터뷰를 마친 후 인사를 망설이던 그에게 물었다. 술이라도 한 잔 하겠느냐고.
미안한 마음이 요만큼, 고마운 마음이 이만큼. 그리고 나머지는 아쉬운 마음이었다.
"혹시 메신저 같은 건 전혀 안 쓰는 거예요?"
"네. 아…, 불편해요?"
"꼭 그런 건 아닌데. 왜요? 왜 안 써요?"
귀찮아서요.
고민 없이 뚝 떨어지는 대답이 어떤 의미로는 놀라웠는지 흔치 않게 웃음기를 지운 얼굴이었다. 이렇게 또 저렇게 엮여서 말을 나누고 하는 것들이 내게는 사실 조금 귀찮은 일이었다. 아주 핸드폰을 없애고 칩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깟 메신저 안 쓰는 게 대수일까.
"시시콜콜 떠드는 편도 아니고."
"문자 답장도 잘 안 하잖아요."
"핸드폰을 잘 안 봐요. 작업할 때는 또 거의 무음이라."
전화도 금세 끊고.
뾰로통한 얼굴로 하는 타박에 지난 며칠 밤마다 울리던 핸드폰 진동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딴에는 꽤 했다 싶었는데. 간지럽지도 않은 턱 밑을 살살 긁었다.
"전화나 문자로 시시콜콜 떠드는 거 사실 별로 안 좋아해요."
"난 좋아해요. 시시콜콜."
"그럼 해요. 민규 씨는 해요. 좋을 것 같아요. 시시콜콜."
미주알고주알.
변명처럼 다다다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한 번 삐죽인 입술로 그런다. 저 덩치, 저 얼굴에 미주알고주알이라니. 당치 않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이지 괜찮을 것 같았다. 좋을 것 같았다. 시시콜콜. 미주알 고주알. 저 사람이라면.
"나는 얼굴 보고 얘기할게요. 이렇게. 천천히."
**
"연락이 없는 건 익숙했고, 휘몰아치는 하루를 떠들지 못하는 건 답답했고."
"휘몰아쳤어?"
끄덕이는 얼굴에 장난스레 서러움이 어린다.
"덥고. 뜨겁고. 일은 많고. 술은 없고."
"아…, 거기 술 못 마신다고 했지."
"너도 없고."
어쩌면 이대로 끝이 나는 건 아닐까.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가정이 요 며칠 내내 나를 뒤흔들었다. 석 달에 한 번 휴가라고 하니, 내 생일쯤 맞춰 나올 게 분명하다고 믿었다. 어떤 근거도 무엇도 없이 나는 거의 확신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화가 났다 한들 김민규가 내 생일을 그냥 넘길 리 없다고. 그러니 사흘 전엔 연락이 오지 않을까, 이틀 전엔 연락이 오지 않을까. 흐르는 시간에 숨이 턱턱 막히고 있었다.
"심심했지. 밤은 길고. 생각은 많아지고."
"……."
"또 기죽은 척 한다. 쓸데없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머그잔 손잡이만 손끝으로 쓸어 만지는데 까맣게 그을린 손가락 두어 개가 한 쪽 볼을 툭 건드리고 지나갔다.
깊이 잠들지 못해 선잠에 들고도 몇 번이나 울리지도 않은 진동에 잠에서 깨어났던 어제 아침에 이르러서는 끝이란 말이 절로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젠 정말 끝이구나.
"나름 좋았어. 유익했고."
"뭐…, 선물은 없어?"
"맡겨놨어?"
그 많았던 생각이 어디에 어떻게 유익했는지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질 않아 에둘러 딴 소리를 찾아 머리를 굴렸다. 뭐가 됐든 답을 들어봐야 내게는 하나 유익할 것 같지가 않았다.
느닷없는 선물 타령이 어이 없었는지 코웃음을 치던 민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차에라도 다녀올 요량인가 올려다 보는데 꼭 맞는 청바지 뒷주머니를 힘들게 뒤적여 꺼낸 건 작은 종이 봉투 하나였다. 툭 불거진 모양새가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그대로 가늠케 했다. 저만한 크기에 저런 봉투의 여행 선물이라면 답이야 거기서 거기였다.
"자석이야?"
"뭐야. 투시도 해?"
내려놓은 종이 봉투를 다시 들어 불빛에 이리저리 비춰보던 민규가 소름이 다 돋았단 얼굴로 과장되게 물었다. 기쁠 때고, 슬플 때고, 행복할 때고. 언제든 세상 누구보다 훨씬 기쁘고, 훨씬 슬프고, 훨씬 행복한 김민규가 고스란히 이 곳 내 눈 앞에 와 있단 것이 여실히 느껴져 다시 한 번 안도했다. 몇 달을 체한 듯 차갑게 식어 있던 손끝까지 이제야 온기가 드는 것만 같았다.
"자석이 뭐야."
"살 시간이 진짜 없었어. 살만한 건 더 없었고."
"그래도 면세점 건 너무했다. 생일인데."
어. 일단 생일 축하해.
삘리도 말한다.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생일이란 말을 먼저 꺼낼 생각도, 그렇다고 그가 있었다던 도시가 그려진 마그넷이 그렇게나 서운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만 대수롭지 않아 먼저 튀어나간 말에 입술을 한 번 말아 물며 대꾸하는 김민규 한 마디에 막상 마음이 희한하게 가라앉는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나한테만큼은 지극정성이었던 지난 시간이 결국 문제였던 걸까. 그새 잊고 안도했던 우리의 끝이 그의 입에서 자비 없이 쏟아질 것만 같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급하게 왔어. 현장에 사고 터져서 휴가도 며칠이나 밀려 나왔고."
"응. 그래도 자석이 뭐냐."
그새 굳어버린 내 얼굴이 신경 쓰이는지 변명처럼 늘어놓는 말이 그래도 듣기가 좋아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그럼에도 미친놈 널을 뛰듯 오르내리는 이 변덕이 내 것 같지가 않아 자꾸 말이 이상하게 튄다. 자석이 자석인 게 문제인 건 아닌데. 자석이 아니라 병따개였어도, 마감이 엉망인 열쇠고리였어도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럼 넌 작년에 왜 그랬는데."
내가? 되물으려 뻥긋 입술을 떼었다 그대로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면세점 마그넷은 아닌 게 아니라 양반이었다.
**
목이 마르다 못해 찢어질 것 같아 눈을 떴을 땐 벌써 도마에 칼 두드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고 있었다. 몇 신데 벌써 와서 저러고 있는 걸까. 그저 입이 방정이고 술이 원수였다. 비밀번호 까먹을 정신도 아닌데 무슨 손가락이 부러졌다고 등에 매달려 비밀번호를 주구장창 외워댄 건지. 와중에도 다른 사람 들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나 속닥거렸단다. 그 날 이후로 벌써 몇 달째 저렇게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고 있으니. 누굴 원망할까 싶다.
"민규야. 민규야, 나 물."
"나와 먹어."
"제발. 한 번만. 나 죽어. 제발."
화상. 진상, 웬수야. 고주망태.
온갖 타박을 하면서도 컵 한 가득 꿀물까지 만들어 내미는 얼굴이 오늘도 어김없이 잘났다. 이 정도면 얼굴 뜯어먹고도 살만한데. 연기를 발로 한다 해도 이 얼굴이면 주인공 친구 역할 정도는 갖다 맡겨도 되겠다 싶다. 달달한 걸 입에 가득 물고 저를 빤히 올려다 보는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꼴이 말이 아닌가?
"장난 아니야? 추해?"
"어. 씻어. 술 냄새 나."
"그래서 싫어?"
그럴 리가.
무뚝뚝한 소리를 하고도 정작 싫으냐 소리엔 도끼눈을 뜨고 보니 무서울 리가 있나. 뭘 그렇게 뚝딱거렸는지 채 마르지 않은 젖은 두 손이 두 볼을 살짝 움켜쥐고 달아났다.
"머리는. 안 아파?"
"조금? 죽을 것 같지는 않고."
"속은."
"속은 괜찮아. 다 토하고 자서."
아차, 했을 땐 이미 김민규 미간에 주름 서너 개가 촘촘히 자리를 잡고 난 뒤였다. 뭘 또 굳이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을까.
다년간의 음주 활동을 통해 몸소 체득한 몇 가지 사실 중 하나였다. 자기 전에 게워내야 아침 편하다는 것. 내 끼니 걱정으로 하루의 절반은 보내는 것 같은 김민규 보기엔 미쳐 죽을 버릇일지 몰라도 숙취로 사흘을 내리 굶어 아사 직전에 살아나기를 몇 번이나 경험했던 나로서는 그것만이 살 길이었다.
"속 괜찮으면 얼른 씻어. 씻고 나와서 밥 먹어."
이를 앙 다물며 성질을 죽이던 민규가 반절쯤 남은 꿀물을 받아 치우고 날 잡아 일으켰다.
대체 몇 시인데 아침부터 찾아와서 이 난리법석을 피우는 걸까. 밥 한 끼가 뭐 대수라고. 잘 맞는 거라곤 속궁합 하나뿐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우리 둘 모두 그게 농담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취향, 생활습관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소소한 가치관마저 함께 가는 게 없으니 정치색은 꺼내기조차 무서워 1년이 되도록 아직 입도 떼지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
와중에도 식습관은 우리 사이 간극이 가장 좁혀지지 않는 부분 중 하나였는데, 일단 민규는 삼시 세 끼를 다 찾아먹지 못하면 재앙이 벌어지는 줄 아는 불치의 병에 걸려 있었다. 이런 날이 있음 저런 날도 있다고 하루에 두 끼든, 세 끼든 굶어 죽는 거 아님 그게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나 생각하는 나와는 전혀 다른 부류였다. 그러니 곧 죽어도 아침밥을 찾아먹는 민규는 주말에도 늦잠을 자는 법이 없는 아침형 인간의 표본이었다. 최소한 아홉 시 뉴스는 끝나야 작업할 의지가 생겨나 해가 뜨면 마법에서 풀려나듯 다시 침대로 가 눕는 나로서는 아침만 먹고 다시 자라는 민규의 채근이 생애 가장 끔찍한 천둥 소리로 들리는 것이었다.
"콩나물국 아니네."
"주는 대로 먹어."
"네."
얼마나 마신 거야.
중얼대듯 묻는 말에 쥐려던 숟가락을 조용히 내려놓고 살살 턱밑을 긁어가며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마주친 시선에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이 어린다. 슬그머니 손가락 하나를 더 펼쳐 붙였다. 세 병?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초리가 얼굴 여기저기를 따갑게 찌르고 지나갔다. 분명 세 병까진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뭘 더 마셨는지 뻗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런 일은 원래 확실한 것만 헤아리는 것이 맞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다 죽어. 술 줄여."
"탈고하고 이제 좀 노는 건데-"
"두 달이면 많이 놀았어. 건전하게 놀아, 나랑."
너랑 노는 것도 딱히 되게 건전하진 않잖아.
느물거리는 말투에 크게 썰린 김치를 반으로 쪼개던 민규가 또 한 번 도끼눈을 뜬다. 틀린 말도 아닌데. 하루 반나절은 내 끼니 걱정, 또 반나절은 그 생각뿐인 게 확실했다. 원래 성욕이 식욕과 비례한다고 했던가. 처음 퍼왔던 맞은편 고봉밥이 어느새 밑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드라마 하나 끝낼 때마다 주량이 한 병씩은 너끈히 늘긴 느는 기분이었다. 연출 팀부터 배우들 뒤풀이 자리까지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해방감을 만끽하다 보면 하루 걸러 하루를 죽도록 마시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루를 죽어라 마시고 하루를 죽을 것처럼 숙취에 허덕이다 다시 하루를 죽어라 마시는 삶이었다. 그마저도 이렇게 턱 밑에 찾아와 김치를 찢어주는 김민규가 아니었음 지금쯤 송장이 되어 이 집을 떠났을 것도 분명했다.
"더 안 먹어?"
"미역국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어딜 나가."
아침부터 쟤가 왜 저럴까. 창원에 있는 우리 엄마도 저렇게는 안 하는 잔소리가 무슨 소나기처럼 예고도 없이 쏟아진다.
주는 밥도 반절이나 꾸역꾸역 먹어 치웠는데 또 뭐가 불만일까. 어제 입었던 청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대자마자 또 뽀르르 거실로 따라 나온 민규가 앞을 막고 섰다. 무슨 짱돌벽마냥 단단한 게 우뚝. 비켜라. 해 안 든다.
"이 아침부터 꼭 담배를 피우러 나가야 해?"
"담배 냄새 싫어하잖아. 그럼 안에서 피워?"
"안 피워도 되잖아. 잠깐은."
짜증스런 말투와 다르게 내려다 보는 눈은 또 마냥 골 난 눈이 아니다. 왜 이럴까, 진짜. 얽히는 시선에 잠깐 숨을 고르고는 털썩 소파 위에 몸을 묻었다.
담배도 술도 마찬가지였다. 좁혀지지 않는 간극. 언제든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 좋은 기분이 흐트러지지 않을 만큼만 마시는 김민규와 취하지 않을 거면 술을 왜 마시나, 사이다나 빨고 살지. 생각하는 나. 담배라곤 호기심에라도 입에 대본 적도 없다는 김민규와 없이는 대사 한 줄 지문 한 줄 쓸 자신이 없는 골초인 나. 다만 이 문제가 끼니 이야기보다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일이 적은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김민규의 전적인 이해. 아니면 인정이든가.
"무슨 일 있어? 왜 아침부터 와서- 오늘 토요일이야?"
"목요일."
"너 회사 안 갔어?"
빨리도 물어본다.
더없이 퉁명스런 말투가 툭, 날아온다. 프리랜서한테 주말이 따로 있나. 그까짓 요일이야 드라마 한참 방송되는 이틀이나 중요하고 말 문제였다.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심술이 나서 이러는 건지, 나도 불끈 화가 치밀어 올라 여전히 우뚝 솟은 손목을 붙잡아 옆에 앉혔다.
"뭔데. 뭐가 불만이야."
"너 나랑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언제야?"
"어제, 그제?"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어제 술 마시러 가기 전에 했나. 아니다. 그제다. 그제 자기 전에. 아닌가?
"월요일 저녁. 너 이태원에서 술 마신다고 그랬던 날."
"아, 근데. 그게 왜?"
"어제는 전화를 안 받았지."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겨우 그걸로 화가 났을까. 대답 없는 나를 마냥 보던 민규가 천장에 대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전화통 붙잡고 사는 인간 아니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문자는 정 없다고 하도 조르고 졸라 연인끼리 한다는 무슨 어플도 깔아서 원 없이 떠들고도 있었다. 물론 나야 하루에 한두 번쯤 읽고 말 뿐이었지만. 단순히 연락이 안됐다고 이러는 것 같지는 않고 내가 뭔가 실수를 하긴 한 모양이었다.
좀처럼 듣기 힘든 낮은 목소리가 다시 거실을 울렸다.
"너 치매야? 이 정도면 알코올성 치매 아니냐?"
"뭐가."
"눈치는 어디다 팔아 먹은 건데?"
이쯤 되니 내가 뭔가를 잊고 있는 게 분명했다. 월요일에 통화를 했던 상황을 머리에 그렸지만 모든 것이 너무나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었다. 벌써 이틀이나 술을 퍼부어댄 뇌는 정상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생각나는 거라곤 급히 나갈 준비를 하며 받은 전화에 기계적으로 응, 응 했던 게 전부였다. 뭘 까먹은 걸까. 굉장히 중요한 뭔가가 있었던 걸까. 오늘이 무슨 날이라도, 하다못해 김민규 생일이라도 되는 건-
"민규야. 와아, 민규야. 미안해. 미안해, 민규야. 진짜 미안해."
"너는 진짜-"
"미안해. 나 진짜 치맨가?"
평일 아침에 들이닥친 김민규, 느닷없이 올라온 미역국, 난데없는 불평 불만에 이제 보니 그저 서운하고 서러운 저 얼굴까지. 누가 봐도 이걸 모를 수가 있을까, 싶은 그림이었다.
아랫입술 삐죽거리는 모양새가 맘이 상하긴 어지간히 상한 모양새다. 슬그머니 두툼한 손을 끌어 잡으니 탁, 매몰차게도 쳐낸다.
"가자. 어디든 가자."
"시끄러워."
"미안해, 진짜."
월요일 스피커폰을 켜둔 채로 옷장을 뒤지던 내 모습이 슬그머니 기억 저 끝 언저리로 들어왔다. 그래, 이틀 휴가를 내볼테니 여행을 가자는 신명 난 목소리가 쩌렁쩌렁 방 안을 울렸던 것까지도. 어디라도 상관 없어? 묻는 말엔 응, 무심히 대답도 했었다. 너 좋은 데로 가. 니 생일이잖아. 덧붙여 가면서. 그걸 어떻게 이렇게 새카맣게 까먹을 수가 있는지, 나도 지금 내가 너무 놀라워 환장할 지경이었다.
"선물."
"어?"
"선물도 준비 안 했냐? 선물 내놔. 빨리."
잡아주지 않는 손 대신 티셔츠 소매 끝을 애절하게 매만지는데 여전히 심통 난 얼굴이 대뜸 선물. 하고 말을 붙였다. 아, 선물. 준비를 했을 리가. 당황해 끔뻑이는 내 두 눈을 힐끗 쳐다본 민규가 목소리를 한 번 더 드높이며 선물을 내놓아라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걸치고 있던 티셔츠라도, 입고 있던 팬티라도 당장 내놓으라며 양팔을 붙든 민규가 온몸을 짤짤 흔들었다.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골이 덩달아 짤짤 흔들렸다.
"아, 이거. 이거 너 해."
"이게 뭐야. 라이터를 왜 날 줘. 내가 담배 피우냐?"
"거기 이름 봐봐."
검정색 지포라이터였다. 앞면엔 'wonwoo', 뒷면엔 'mingyu' 이름이 각인되어 있는. 라이터를 이리저리 뒤집어보던 민규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 이 쪽을 바라봤다. 너를 위해 준비했어, 하는 거짓말은 태생적으로 못할 위인이었다, 내가. 이미 오해를 했는지 한결 누그러진 얼굴이 된 민규가 설명을 바라듯 내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민규 역할 맡았던 배우가 선물로 줬어. 감사했다고."
"니가 받은 거라고?"
"그게…, 그렇지?"
야, 전원우!
높아진 언성에 되나 가나 양 손을 뻗어 뒷목을 감아 안았다. 내팽개치면 거실 저 구석으로 휙 날아가 불쌍한 척이라도 하려는 심산이었다. 김민규가 절대 나를 내치지 못할 거라는 걸 요만큼도 의심치 않는 굳은 믿음과 함께였다.
민규가 모델이 되었던 드라마 역할을 맡았던 신인 배우였다. 신인 배우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만한 역할이었다. 비중이 크진 않았지만, 집필을 하는 내내 그가 생각나는 만큼 여기저기에 깨알같이 심어놓은 장면이 많았다. 기존의 배우들 누구도 성에 차지 않아 신인 배우 오디션에 직접 훈수를 두기까지 했으니 제 입장에선 내가 은인처럼 느껴질 만도 했다. 사실 내가 한 거라곤 배우들 중 가장 민규를 닮은 얼굴과 체격을 가진 사람을 골랐던 것뿐인데.
종방연 내내 곁에 오지도 못한 채 맴돌던 신인 배우가 한참 취해 담배를 피우러 밖에 나온 내게 바짝 붙어 말을 건넸던 순간은 사실 온전치 못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버릇없게 이름만 덜렁 새겨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던 기억과 각인 내용을 배송 메시지에 적는 줄 알고 착각을 했느니 말았느니 하는 얘기를 끊임없이 늘어놓았다는 정도? 그 와중에도 잘된 일이다 생각을 했던 기억까지.
"미안해. 한 번만 봐줘라."
"내가 이걸로 뭐를 해. 쥐포라도 구워?"
"뭐, 실밥 정리도 하고. 또 나 담뱃불도 붙여주고."
전원우.
귓가에 닿은 으르렁 소리에 다시 한 번 두 팔에 힘을 줘 그를 안았다.
**
"그래도 난 내가 샀잖아. 직접. 골라서."
"미안."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살았던 걸까. 문득 지난 날의 끝없는 과오가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눈 앞에 있는 존재에 대해 얼마나 무뎌져 있었던 걸까.
"생각은 좀 해봤어?"
"무슨 생각."
"뭐. 우리 사이?"
생각이고 자시고. 연락이 없던 그 긴 시간동안 난 한 번도 우리 사이에 대한 생각을 곱씹어본 일이 없었다.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우리나 어쩌면 마침표를 찍을 우리는 내 상상력의 범주 안에 드는 모습이 아니었다. 다만 내려질 처분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을 뿐. 이렇게나 공허하게 흘려버릴 시간이었다면 그 때 그렇게 끊긴 전화에 다시 한 번 연락이라도 해볼 걸, 몇 번이고 후회했지만 나는 이미 받는 것에만 익숙해진 개차반이었다.
"나는 좀 했어. 좀 많이 했지. 어떻게 해야 좋을까, 우리가. 아니 내가."
"……."
"언제부턴가 내가 자꾸 너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더라고. 너는 그냥 너인 건데."
내가 너를 바꿀 수는 없는 건데. 그래서도 안 되는 건데.
중얼거리듯 말을 덧붙이며 멍청히 빨대를 휘젓던 민규가 그 손길을 멈추자 얼음이 달그락거리던 소리마저 덩달아 뚝 끊겼다. 매장에 틀어놓은 노랫소리마저 사라질 듯 귓가에서 멀어지고 민규와 나만이 공간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기대를 낮출게."
"어?"
"내가 기대를 낮출게. 바라지 않을게."
더할 수 없이 편안한 눈빛이 외려 내 입을 바싹 마르게 했다. 그새 식어 따뜻해진 머그잔을 두 손으로 잡아 쥐었다.
무슨 의미일까. 헤어지잔 말을 돌려 하는 걸까. 사람에게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그 이상의 마음은 주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여태껏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생각하고 생각해 내놓은 저 말이 민규가 말하는 우리의 끝인 건 아닌지.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보채는 거 이제 안 할게. 연락 좀 해라, 받아라. 그런 거 이제 안 할게."
밥도 그렇고. 말을 덧붙이며 피식 웃음을 흘린 민규가 커피를 한 모금 쪽 빨아올렸다. 민규가 한참이나 저 멀리 물러난 것만 같았다. 남처럼, 한 발 물러나 관계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손끝이 저릿저릿 저려오기 시작했다.
"담배 가지고 잔소리 안 할게."
"민규야."
"술도. 닦달 안 할게."
뒷주머니에 찔러놓은 담뱃갑이 전에 없이 살갗을 쿡쿡 찌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항상 너의 첫 번째는 아닌 것도. 그래, 그것도 전부 내 기대였으니까."
"민규야."
"욕심을 버려볼게."
다시 부르는 이름에도 대꾸하는 법 없이 말을 맺은 민규가 얽힌 시선에 다시 웃음기를 담았다. 누가 그런 말을 하면서 웃어. 정작 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어 마냥 일렁이는 새카만 커피를 내려다 보고만 있었다.
첫 번째가 아니라니, 일 순위가 아니라니.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한 그 소리가 명치 끝을 꾸욱 밀어 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 날의 그 감정 없는 민규의 목소리에 담긴 마음이 그랬었다는 걸 나는 어쩜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마음 한 구석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로 화가 났다는 생각마저 품고 있었다. 망나니처럼.
"그러니까 우리-"
"낮추지마, 기대. 더 바라고 욕심 내라. 민규야"
내가 잘못했어.
**
무슨 술을 저렇게 무시무시하게 먹나. 정신 나간 놈처럼 먹기로는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도저히 따라갈 재간이 없는 연륜이었다. 인터뷰를 하고 있는 건지 그냥 술고래가 뿜는 술을 받아 마시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오늘은 진짜 취하면 안 되는데. 초조한 마음에 자꾸만 손목에 두른 시계로 시선이 간다.
"그 때야 과학 수사가 어디 있어. 그냥 좆뱅이 치는 거지."
80년대 수사물은 괜히 써보겠다고 설쳐댄 걸까. 잔뜩 열이 올라 씩씩거리고 있을 김민규 얼굴이 언뜻 눈 앞에 스치는 듯 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강력계를 지키다 은퇴를 했다던 전직 형사의 거친 소리에 연신 고개를 끄덕여주며 술잔을 채웠다.
예정대로 움직였다면 지금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 곳 마포 복집이 아니었다. 언제고 이름만 들으면 파블로프의 개마냥 김민규가 침을 흘려 마지 않는 소고기집에서 손을 벌벌 떨며 고기 값을 계산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작년의 과오를 잊어주겠다는 말에 덜컥 그러마 해놓고도 한 대 가격에 기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한우집.
"아니, 근데 그 새끼가 딱 화장실에서 나오는 거야!"
"그래서요?"
"이 새끼 뒤통수를 확 낚아챘는데. 쏜살같이 달아나더라고."
훌렁 벗겨진 가발만 내 손에 남겨놓고 말이야.
옛 생각에 신이 났는지 한참을 떠들던 사람이 껄껄 웃어대기 시작했다.
입봉작을 함께 작업하며 친해졌던 조연출 형이 소개한 자리였다. 그의 올해 정년 퇴직이 기사화가 될 만큼 이름 깨나 날렸다던 강력계 형사라는 말에 두 말도 않고 졸라 어렵게 잡은 약속이었다. 금요일만은 피해달라 읍소해 일요일 저녁 느지막이 이곳 복집을 예약까지 해뒀는데 느닷없이 진동이 울려댄 게 오늘 오후 네 시쯤이었다. 와이프 평생 소원이었다던 유럽 여행을 이제서야 함께 떠나려는데 출발 날짜를 그만 착각했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주 토요일이라고 생각해 덜컥 약속을 잡고 보니 당장 내일 저녁에 출국이더라며 오늘 저녁 잠깐 만나는 건 어떻겠느냐 묻는 그의 말에 차마 거절의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늘이 아니면 한 달을 더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 놈한테 맞은 칼 자국이 여기서 여기까지 이만큼 있다고."
볼래? 대답을 듣고자 한 말이 아니었는지 이미 주섬주섬 끌어올려진 티셔츠 안으로 몇 개나 그어진 칼자국이 보였다. 그 때 맞았다는 흉이 어디에 있는지 한 눈엔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급할 거 없다. 이제 겨우 기획 단계인 걸. 은퇴 강력계 형사야 찾으면 한 트럭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죄송한데 오늘은 선약이 있어 어렵겠다는 말로 아쉬운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래. 올해 또 이런 짓을 벌였다간 이별을 면치 못하리라. 마음을 다잡는 내도록 미리 조사해놨던 그의 파란만장한 전력이 자꾸만 눈 앞에 아른거렸다. 조폭 개나리파 두목을 검거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부터 서울 전역에 걸친 소매치기 조직을 소탕했던 일, 그리고 서울 북부 연쇄 살인 사건까지. 새 드라마의 모티브가 될 사건이었다. 사건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장 가까이서 보고 들었던 한 사람이었다. 내려놓았던 핸드폰을 다시 손에 붙들었다.
"근데 작가 양반 선약 있다 하지 않았어?"
"네? 아…, 네. 괜찮습니다."
"여자친구 만날 일인가?"
한참을 신명 나게 떠들던 남자가 다 식어빠진 복지리를 한 숟가락 떠먹으며 물어왔다.
"네."
"그럼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괜찮습니다."
볼 일이 있어 수원 어디에 내려와 있는데 한 일곱 시면 올라갈 수 있을 거라던 그의 말에 프로젝트에 무슨 문제가 생겨 연차도 못 낸다며 우는 소리를 하며 출근한 민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우리 집으로 퇴근을 하고 조금만 쉬고 있어라. 어김없이 날아오는 전원우, 이름 석자 공격에 다시 한 번 철썩 같이 약속을 거듭했다. 최대한 빨리 가겠다. 절대 취해서 가지 않겠다. 세상이 두 쪽이 나서 늦는대도 자정 전엔 생일 케이크에 촛불은 밝혀 주겠다. 못 미덥단 목소리를 하고도 일단 다시 사무실로 돌아간다며 전화를 끊어준 민규가 곧 메시지를 보내왔다. 늦으면 다음 생일은 없다는 으름장 아래로 악마 얼굴을 한 이모티콘이 불을 뿜고 있었다.
"잘해줘. 나중 가서 잘해주려고 보면 남이야."
"남 같으세요?"
"남이지. 내가 제일 몰라.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잔 부딪치잔 말도 없이 홀로 기울이던 술잔에 취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가 하소연을 하듯 털어놓았다. 현실에 치여 사느라 젊음을 흘려 보낸 저 나이대의 남자들이 하는 흔한 소리였다. 벌개진 얼굴이 다시 비운 술잔을 조용히 채웠다.
"이젠 바가지도 안 긁어."
"왜요."
"관심이 없대. 바라는 것도 없고. 징그럽대, 그냥."
어디 나갈 약속도 없이 주구장창 집안에 떡처럼 들러붙어 있는 나이 든 남편이 반가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징그럽다는 말이 아주 이해 못할 이야기는 아니지 싶어 고개를 흔들어 젓는 남자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번에 여행 가셔서 마음 많이 풀어드리세요."
"그래야지. 전작가는 미리미리 잘해. 일이 다가 아니더라고."
나라를 몇 번이나 들썩거리게 만들었던 인물이었다. 한 때는 독사며 괴물 형사며 갖가지 타이틀도 바꿔 달아가며 범죄자들 간을 다 졸여놨다던. 범인들 때려 잡아넣은 이야기를 할 때엔 그렇게나 뱃심 가득 주어 울리던 커다란 목소리가 어느새 한참 가라앉은 채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안 들어가봐도 돼?"
"저야 좋은데, 내일 출발이신데 괜찮으세요?"
"에이, 괜찮아. 하도 말을 많이 해서 취하지도 않아. 내가 너무 늦어서. 미안해."
먼저 가보겠느니, 어쩌느니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말을 뒤로 숨긴 채 돌리고 돌려 건넨 말이었다. 잔뜩 취해 꼬인 발음이 녹음을 하고 있으면서도 알아 들어지려나 걱정이 될 판인데, 본인은 자각조차 없다. 아쉬운 사람이 그저 납죽 엎드려야지. 더 이상은 입 꼬리가 당겨지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일곱 시엔 도착한다는 사람을 기다리며 약속 장소 근처 카페로 향했다. 커피 한 잔 비우는 동안엔 도착하겠지. 차가 막힌다. 조금만 기다려달라, 같은 전화가 두 번이 더 울리고 아홉 시를 꼭 10분 앞두고서야 그가 도착했다. 머릿속엔 온통 망했다는 생각뿐이었다.
"전화라도 한 통 해주고 와. 기다릴 거 아니야."
"그럼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손을 휘휘 저어 배웅하는 사람에 꾸벅 인사를 건네며 핸드폰을 챙겼다. 두꺼운 유리문 너머 찬 바람이 살갗에 닿으니 그제야 좀 정신이 드는 듯 숨이 터져 나왔다.
몇시일까. 두려움에 손에 쥔 핸드폰을 들어올리는 일에도 망설임이 잔뜩 붙었다. 열한 시 반쯤 되었을까. 사실 그렇대도 당장 자정 전에 집에 도착할 방도는 없었다. 행여 자정 전에 전화라도 걸어 비벼본다면 어떻게 또 비벼지지 않을까. 민규는 착하니까.
굳은 마음과 함께 떠오른 까만 화면엔 숫자 네 개가 위풍당당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12시 03분. 역시 망했다는 생각뿐이었다. 뭐라고 하지? 숫자 패드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사이 시간이 한 걸음을 더 내달렸다. 12시 04분. 일단 걸자. 걸어서-
생각을 하는 순간 번쩍, 무음으로 해놓았던 핸드폰 화면이 색을 발했다.
"여보세요?"
민규였다.
**
"기대를 왜 버려."
내가 언제 버린다고 했어. 황당한 얼굴을 감추지 못한 민규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잘못했어. 내가 다 잘할게. 정신 차려볼게."
"원우야. 나는-"
"담배 끊을게. 술도 줄일게. 아니다. 술도 끊자. 끊을게."
이름은 왜 자꾸 불러. 나지막이 다시 불러오는 내 이름에 순간 울컥 코끝이 찡해져 입술을 앙 말아 물었다.
담배 끊는 게 뭐가 대수라고. 요새 여기저기 눈치도 보이고 고달파서 전자담배든 뭐든 갈아타볼까 그랬다. 그래, 술도. 사실 생각해보니 대단히 맛이 있는 것도 필수 영양소도 아니었다. 없이도 살아온 세월이 엄마 뱃속 포함 얼추 20년은 되니 그 또한 살아지지 않을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주알고주알 그거 할게. 너 듣기 싫다 할 때까지 할게. 시시콜콜."
"전원우."
"그리고 민규야."
횡설수설 쏟아내는 내 목소리를 민규가 가만, 크지 않은 부름으로 막아 세웠다.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데. 다시 입을 떼려 달싹이는 이를 얼른 다시 불러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오해야. 내가 순간순간 빠릿하질 못해. 알잖아. 그래서 착각하는 거야."
"뭘."
"뭐가 더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착착, 난 그게 잘 안 돼. 그래서 그런 거야."
단 한 번도 네 앞에 누가 와 섰던 적 없어. 단 한 번도.
웅변이라도 하듯 어느 새 꼭 쥐어진 두 주먹 위로 김민규의 따뜻한 손이 하나씩 올라왔다. 마주한 얼굴은 한 가득 웃음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느린 사람이 성격은 그렇게 급할까."
"어?"
"왜 말을 다 듣지를 않니."
다시 피식 바람 새는 소리로 웃던 민규가 내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우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대로 이해가 되질 않아 다시 멍청한 표정이 된 내 모습이 카페 저쪽 유리창에 언뜻 비쳐 보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너는 그냥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있어도 된다는 거야."
"기대를 낮추겠다며."
"응, 나는 바라는 거 없이 그냥 있는 너를 사랑하겠다고."
지금처럼. 그보다 더 많이.
더없이 다정한 예의 그 얼굴로 돌아온 민규가 낯뜨거운 소리를 잘도 꺼내며 찡긋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처럼, 무슨 동화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대본을 써도 이렇게 쓰면 작가 감성 촌스러운 거 봐라, 사랑을 해봤니 어쨌니. 욕을 바가지로 먹을 일이었다.
"대신."
"대신?"
조건이라도 붙이듯 대신, 하고 말을 끊어낸 민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섰다. 그새 더 컸을 리도 없는데 그 얼굴만 올려보는데도 한참이나 고개를 꺾어야 했다. 뭘 찾는지 주머니에 쏙 집어넣은 민규의 손이 곧 꽉 쥔 주먹이 되어 빠져 나왔다. 의자를 밀어내고 내 옆으로 자리를 옮긴 민규가 주위를 한 번 쓱 둘러보곤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영문을 몰라 덩달아 눈치를 한 번 휘 둘러보는데 덥석 손이 잡혔다.
"같이 살자."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랄 새도 없이 붙들린 손가락에 닿은 이질적인 감촉에 고개가 뚝 떨어졌다. 투박한 손끝에 어울리지 않는 조심스러운 손길이 손마디마디 사이를 지나 가장 안쪽까지 반지를 끌어 올렸다. 선물이 진짜 자석이 다였을까봐? 짓궂게 말을 덧붙인 민규가 벙찐 내 얼굴 한 쪽을 슥 쓸어 만졌다.
"같이 살아. 지금 이대로는 내가 불안해. 얼마간이라도 좋아. 같이 살자."
반지를 끼워준 손을 두 손으로 잡아 만지며 민규가 말했다. 한두 번 생각에 나온 말이 아니었는지 힘주어 말하는 목소리가 단단하다.
이럴 바엔 차라리 같이 살라던 주변 사람들 말이야 벌써 수십 번은 들어 익숙할 지경이었고, 서로의 집에 서로의 칫솔부터 속옷, 옷가지들이 제 것처럼 가 있게 된 것도 오래였다. 또 우리 집 작은 방엔 한여름 열대야에도 차렵 이불을 휘어 감고 자는 내 덕에 등판 가득 땀띠를 얻은 민규가 작년에 가져다 놓은 얇은 여름 이불 세트가 있었고, 김민규 집 거실엔 내가 사다 놓은 TV가 넓지도 않은 벽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지경이 되고도 살림 합쳐 버릴까 하는 농담에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던 건 내가 아니라 민규였다.
"제대로 좀 먹이고. 나쁜 거 피우고, 마시고 해도 조금 덜 나빠지라고 뭐라도 좀 챙기고."
왜 싫어? 술 자리에서 친구 누군가가 물어왔을 때 개인적인 시간, 공간 없이는 힘들 것 같다 막연히 생각했던 대답을 내놓았던 나와는 달리 한숨부터 푹 쉬고 우다다 민규가 꺼내놓은 말은 이러했다. 술, 담배는 기본에 식습관은 엉망이고 남들 잘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 자는 애를 눈 앞에 두고 볼 걸 생각만 해도 벌써 아찔하다고. 지금도 충분히 갑갑하다는 민규가 이어 덧붙인 말엔 모두의 야유가 쏟아졌다.
내가 쟤를 얼마나 들들 볶겠어. 나는 좀 갑갑해도 재는 신나게 살아야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도 좀 편하게 하고."
하고 싶었던 말은 얼추 다 꺼내놓았는지 후련한 얼굴을 하고 내 손을 톡톡 두드리던 민규가 마른 입술을 한 번 적시고는 가벼운 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사실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결혼하자는 거였는데."
"어?"
"그냥. 나는 결혼이 하고 싶어. 너랑."
무의미하겠지만.
혹시라도 그 말이 진지하게 들리지는 않을까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산뜻한 소리로 맺은 이야기에 어쩐지 요상하게 혀끝이 아릿한 기분이 들었다. 앞니로 꾹꾹 혀끝을 잡아 깨물며 그새 붉어진 민규 귓가를 바라봤다. 이어지는 침묵에 다시 입술을 달싹인 민규가 말했다.
"그냥 하는 말이야. 부담스-"
"하자, 결혼. 그게 뭐 대수야. 호적에도 안 올려주는 거. 그냥 하자. 우리 둘이. 지금 해."
뭘 어떻게 할까?
정신 없이 묻는 나를 멍청히 쳐다보던 민규가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진지한데.
늦은 저녁, 절반쯤 사람이 앉은 카페 안, 크지 않은 음악 소리, 제 온도를 잃은 커피 두 잔과 중동에서 갓 돌아온 새까만 김대리의 남자다운 손. 그 끝에 어색하게 빛나는 그의 선물과 나.
붙들린 손을 빼냈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다시 빼 손에 쥔 채로 잔뜩 미소를 머금은 얼굴을 올려다 봤다. 염치는 없지만 좀 쓸게. 두터운 손을 들어 쥐고 그의 새끼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대충 맞아 돌아가는 반지를 한 번 더 꾹 밀어 넣으며 속삭이듯 그를 향해 말을 건넸다.
"결혼하자, 우리."
누가 볼까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곤 잡은 손을 끌어 반지에 촉,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림 같은 얼굴이 순식간에 쏟아져 내렸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