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피AU
1.
저녁쯤이 돼서야 한동안 거세게 내리던 비가 겨우 그치고 날이 맑게 개서 오랜만에 해안가로 수영을 나온 원우였다. 날이 개면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니 어디 가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던 촌장님의 말씀은 이미 머릿속에서 잊은 지 오래인 원우는 어느새 신고 있던 신발까지 벗어 던지고 자신의 하얀 발을 따뜻하게 감싸는 모래사장을 걸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물가로 다가가고 있었다. 비가 왔는데도 잔잔하니 넘실거리는 파도가 어느새 원우의 하얗고 얇은 무릎까지 올라와 넘실거리고 있었고 자신의 다리를 감싸는 시원한 바닷물의 원우 입가에는 미소가 잔뜩 머금어져 있었다.
이게 얼마 만에 물놀이인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입고 있던 흰 티까지 벗어 던지고 물속으로 풍덩 들어가 버리는 원우의 마른 몸을 시원한 바닷물이 감싸 안았다. 으, 살겠다. 지금 이렇게 놀고 있는 모습을 촌장님께 걸린다면 대차게 혼날지도 모르겠지만 이 순간만큼 촌장님께 혼나는 것 따위는 무섭지 않았다. 까짓거 지금 실컷 놀고 이따가 한번 혼나지 뭐. 벌써부터 귓가에 촌장님의 호통 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졌지만 개의치 않고 다시 한번 바다 깊숙이 들어가는 원우였다.
2.
어느덧 해는 지고 바다 위로 둥그런 보름달이 원우의 머리 위에 드리웠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된 거지? 물 안에서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보고 원우는 물 밖으로 고개를 쭉 내밀고 본인과 똑 닮은 동그란 보름달을 바라본다. 비가 오고 난 뒤 맑게 갠 밤하늘이라서 그런지 하늘 위에 떠있는 달이 오늘따라 유난히 밝고 둥그렇다. 그리고 그 아래 바다 위에 떠 있는 하얀 달처럼 뽀얀 흰고래 한 마리가 달빛을 벗 삼아 혼자 유유히 물놀이를 즐긴다.
3.
혼날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역시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대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원우의 동그란 뒤통수를 향해 호통이 날아왔다.
“전원우! 너 이놈 새끼야!”
나름 조용히 들어온다고 숨소리 하나까지 신경 써가면서 살금살금 걸어왔는데, 그걸 들으시다니 우리 영감님 귀도 밝으셔. 원우는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대충 손으로 한번 털고는 아직 화가 많이 나 계시는 촌장님을 향해 쪼르르 달려가 본다.
“아이구, 아부지.”
“누가 네 아버지여.”
“나 애기 때부터 지금 껏 키워줬는데, 아부지가 아부지가 아님 누구여?”
응? 으응? 하얀 두 손으로 야무지게 촌장님의 어깨를 주무르며 애교를 부리는 원우의 귀여운 애교에 결국 헛웃음을 터트리신 촌장님이셨다. 그리고 돌아오는 꿀밤 두 대. 아야. 소리와 함께 원우는 자신의 이마를 두 손으로 감쌌다.
“요놈아, 내일은 어디 나갈 생각도 말어. 알긋냐?”
얼른 들어가서 씻고 자빠져 자. 말을 마치고 다시 한번 원우의 이마에 꿀밤을 때리시려는 촌장님의 손길을 원우는 재빠르게 피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부지! 안녕히주무셔!”
어유, 저 썩을 것. 언제 철들라나 몰라. 원우가 들어간 대문을 바라보며 자상한 웃음을 지어 보이시는 촌장님.
4.
작은 섬마을에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건지 작은 마을을 잡아먹을 듯 쉴새 없이 내리는 비는 마을 전체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이 작은 섬마을에 젊은 촌장은 거센 비바람과 파도에 선착장에 있는 배들이 떠내려가지는 않았는지 확인을 위해 폭우를 뚫고 선착장으로 나왔다.
젊은 촌장은 비바람을 맞아가며 배들을 연결하고 있던 밧줄들을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가려던 참이었다.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어린 갓난쟁이의 울음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젊은 촌장은 울음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배가 있는 곳 옆에 낡은 창고 앞에 섰을 때, 울음소리는 더욱 크고 선명하게 들려왔고 그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하얀 포대기에 싸여서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려주는 듯 대차게 울고 있는 갓난쟁이였다.
촌장은 천천히 다가가 하얀 포대기에 싸여 있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울음을 뚝 그치는 아이였다. 오히려 언제 울었냐는 듯 꺄르르 거리며 자신을 안고 있는 촌장에게 조막만 한 손을 뻗기도 했다.
우선 자신의 집으로 아이를 데리고 왔지만, 그 뒤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스러운 촌장이었다. 그런 촌장을 알 리가 있는 갓난쟁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촌장을 향해 손을 뻗어가며 꺄르르 웃어 보이기 바쁘다. 웃음이 어찌나 둥글둥글 예쁜지. 아이의 웃음을 따라 촌장에 입가에도 미소가 가득 번졌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누가... 젖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아이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어 본다. 닿아오는 손길이 좋다고 다시금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아이. 이 어여쁜 아이를 바라보며 꼭 아이의 부모를 찾아주겠다고 다짐하는 촌장이다.
5.
그의 굳은 다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비가 그치자마자 촌장은 아이를 품에 안고 온 마을을 뛰어다녔다. 하지만 아이의 부모도. 아이의 부모를 아는 사람도. 이 아이를 아는 사람도. 마을 구석구석을 아이를 안은 채 뛰어다니며 수소문해봤지만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덧 해는 지고 있었고 촌장의 얼굴에는 땀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자신을 위해 뛰어다니는 촌장을 알리가 없는 갓난쟁이는 촌장의 품에 안겨 단잠에 빠져들었고 촌장은 갓난쟁이의 포동한 볼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날 이후로도 촌장은 아이를 안고 몇 날 며칠을 뛰어다녔다. 작은 섬마을을 몇 번이고 뛰어다니며 섬으로 배를 몰고 들어오는 뱃사람들에게까지 아이의 부모를 아느냐고 물으면서까지 촌장은 갖은 노력을 해보았지만 아이를 안다는 사람은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왔을 때도 갓난쟁이를 알고 있다는 사람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고 겨울이 지나 해가 넘어가 다시 여름이 찾아올 때까지 촌장은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커갔다. 동글동글 어여쁜 웃음도 여전했다. 동글동글한 웃음을 딴 예쁜 이름까지 생겼다. 원우. 전형우 촌장의 성을 따서 전원우라는 예쁜 이름을 원우는 다섯 살이 되던 여름 선물 받았다. 원우는 자신의 이름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원우야, 생일 축하한다."
다섯 살이 되던 해 원우는 이름이 생겼고 첫 생일을 맞이했다.
그날 원우는 이름을 받자마자 섬마을 전체를 뛰어다니며 자신의 이름을 자랑했다. 지나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일을 하고 계시는 아주머니, 아저씨에게 가서는 조막만한 손으로 어른들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마을 어른들은 그런 원우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며 축하해주었고 원우는 신이나서 마을 이곳저곳을 더욱 뛰어다녔다.
그렇게 작은 흰돌고래는 마을 사람들의 축하와 사랑을 받으며 더욱 무럭무럭 자랐다.
시간이 더 흐르고 작았던 흰돌고래는 여전히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어엿한 청년의 모습이 되어있었다. 젊었던 촌장의 이마에는 주름이 하나 둘 생겨있었고 원우는 자신을 키워주고 있는 촌장의 일을 돕기 위해 오늘도 바닷가 근처에 나와있었다.
며칠 내내 내리던 비가 그치고 비와 바람 때문에 소란스럽던 바다는 어느새 잔잔해져 있었다. 그리고 살랑거리며 이는 파도가 촌장님을 따라 나와서 일을 돕고 있는 원우의 눈에 아른거렸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엄청 시원하겠지? 으, 들어가고 싶다. 분명히 촌장님의 일을 도와주려고 왔는데, 살랑거리는 파도와 바다의 짠내음이 자꾸만 유혹적으로 원우에게 다가온다. 보지 않으면 되겠지 싶어 두 눈을 꾹 감아봤지만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원우의 귓가를 간지럽힌다.
"요놈아, 안 오고 뭐 해."
눈을 꾹 감고 있는 원우에게 촌장님의 호통이 들려왔다. 원우는 그제야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다시 한번 푸른 빛을 띄고 있는 바다가 원우의 두 눈 가득 들어찼다. 넋을 놓고 바다를 보고 있는 원우가 답답스러운 촌장님이 원우의 동그란 뒤통수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아야."
아프지 않지만 맞은 자신의 뒤통수를 문지르며 원우는 울상을 지어보였다. 그런 원우에게 촌장님은 정신을 차리고 빨리 짐이나 들라며 짐을 원우에게 한 아름 건네주었다. 히잉 소리를 내며 짐은 건네 받아드는 원우의 두 손 가득 어느새 짐이 들려졌다. 여전히 원우의 시선은 바다로 가 있는 상태였고 짐을 옮기는 발걸음에 힘이 없다.
"어?"
짐을 옮기다 말고 원우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 뒤를 걷고 있다가 뚝 멈춰서는 원우 때문에 덩달아 촌장님의 걸음까지 멈춰 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뚝 멈춰서 버린 원우를 향해 촌장님의 욕지거리가 들려왔지만 원우는 여전히 바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 멈추고 지랄이여."
"아부지."
"왜 써글 것아."
저기, 뭐가 있어요. 말과 함께 원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검은 무엇인가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저게 뭐시여. 원우ㅇ, 야! 이놈아! 촌장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우는 들고 있던 짐을 그 자리에 내팽개치고 바다로 향해 뛰어갔다.
6.
바다에 빠진 게 사람이란 걸 알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원우는 입고 있던 반팔티를 벗어 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봐요."
괜찮아요? 우선 물속에서 힘들게 질질 끌다시피 해서 해변가로 나오기는 했는데, 그 뒤로는 어떻게 해야 될지 도통 모르겠는 원우였다. 온몸이 젖은 채 모래사장 위에 남자를 눕히고 코 근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보았다. 숨을 쉬지 않았다. 헉, 어쩌지. 어떡해야 하지. 숨을 쉬지 않는 남자 때문에 당황을 한 원우는 누워있는 남자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그리고 순간 켁켁거리며 물을 뱉어내는 남자.
"어어?"
켁켁거리며 물을 뱉고 깨어난 남자의 한번, 그 남자가 갑자기 자신의 손목을 확 낚아채는 바람에 순간 휘청이는 몸에 두 번 화들짝 놀란 원우. 손목을 어찌나 세게 잡아 왔는지 원우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방금까지 숨을 쉬지 않았던 남자의 안부가 먼저였던 원우가 다시 한번 괜찮냐고 묻자 대답 대신 물에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자신의 머리를 헤집는 남자였다.
"저기... 괜찮으신 거죠?"
"시발... 뭐야..."
남자는 잔뜩 잠긴 탓에 탁성까지 띄는 목소리로 욕을 작게 내뱉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남자에게 다시 한번 얼굴을 들이밀고 괜찮냐고 물어보는 흰고래 원우. 갑자기 자기 얼굴 앞에 가득 들어차는 원우 때문에 화들짝 놀라며 원우를 경계하는 남자의 까만 머리칼 위로 까만 귀가 뿅 하고 튀어나왔다. 어? 우와아. 그리고 남자의 까만 귀를 보자마자 두 눈을 반짝이는 흰고래.
7.
평범한 표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갓난쟁이 민규는 태어남과 동시에 버림을 받았다. 연한 황갈색 털에 희끗희끗한 검은 반점을 가진 부모와 다르게 온몸이 까만 털로 뒤덮인 채 태어났다는 이유로 말이다. 민규는 젖을 채 떼기도 전에 고아원에 버려졌다.
고아원에서도 민규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털을 가진 민규는 사랑받아도 모자랄 나이 눈칫밥을 먹어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민규는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빨랐다. 거기에 나이가 들수록 수려해지는 외모까지. 머리 회전이 빨랐던 민규는 자기가 살아가야 될 방법을 금방 찾아냈다. 민규는 자신이 열여덟이 되던 해에 무작정 살고 있던 고아원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아무 계획도 없이 나온 것치고는 나름 며칠은 잘 버티고 지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고아원에서 나온 열여덟이 몇 가지 없었다. 알바를 해도 잘 곳이 마땅치 않아 알바하는 곳 영업이 끝나면 홀에 담요 하나를 깔고 그 위에서 새우잠을 잤다. 그것마저 사장님께 걸려 쫓겨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러다 어떻게 연락이 닿아 예전에 같이 고아원 생활을 하던 곰수인인 형과 연락이 닿았다. 좋은 일자리가 하나 있다며 민규에게 소개를 시켜줬는데, 가릴 것이 없었던 민규는 연락을 받자마자 곰 형에게 달려갔다. 꾀죄죄한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온 민규를 곰 형은 정말 반갑게 맞아주었다.
"짜식, 못 본 사이에 키가 더 컸다?"
"형이 작아진 거는 아니고?"
뭐라고, 임마? 죽을래? 꾀죄죄한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온 민규를 곰 형은 정말 반갑게 맞아주었다.
분명 전화로는 잡심부름 정도만 해주면 된다고 해서 온 건데, 형이 말했던 일터라는 곳과 민규가 생각했던 일터와는 생김새와 하는 일마저 달랐다. 큰돈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인 일터라는 곳에서 민규는 정말 잡심부름만 하며 생활했다. 민규의 수려한 외모와 특유의 싹싹함과 능글맞은 성격 덕에 팁이라는 것도 받으면서 말이다. 일터에 일 잘하고 잘생긴 어린 흑표범이 있다는 얘기는 어느새 서서히 퍼져나가 주위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억지로 웃어 가며 주위 사람들의 비위를 맞췄고 가식을 떨어 가며 주어지는 일을 닥치는대로 해나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민규를 눈여겨보던 일터에 사장이자 곰 형의 상사였던 사람의 추천으로 조직의 발을 들이게 된 민규였다.
조직은 민규가 생각했던 것보다 큰돈이 아무렇지도 않게 왔다갔다 했고 좀 더 복잡하게 돌아가는 큰 조직이었다. 그만큼 민규에게 오는 돈도 많았고 이렇게 큰돈을 만지게 된 민규는 열심히 조직 생활을 해나갈 수 밖에 없었다. 윗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가식을 떨어가며 열심히 일했다. 덕분에 보스의 눈에 들어 보스의 총애까지 받게 된 민규였다. 하지만 이런 민규를 고깝게 본 곰 형이었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란 게 이런 것이었는지. 아니면 폭풍전야라는 게 이런 것인지. 날씨가 유독 좋았던 날. 보스의 심부름으로 현장에 나가 있던 민규에게 다급한 전화가 왔었다.
"야! 김민규!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일하고 있으니깐 그렇지. 무슨 일 있어?"
곰 새끼가 지가 실수하고 네가 한 짓이라고 보스한테 너 팔았어. 보스가 너 잡으면 죽인대. 얼른 도망쳐. 그렇게 어디로 가야 될지 정하지도 않고 무작정 멀리 멀리 도망쳐 나왔다. 시발, 불곰 새끼... 어쩐지 요즘 나 쳐다보는 눈깔이 제대로 된 눈깔이 아니었어. 민규의 잘 세팅되어 있던 머리는 어느새 땀에 젖어 헝클어져있었다. 아무 배나 빌려 바다로 도망쳐 나가보았지만, 때마침 거센 비바람을 맞이했고 얼마 안 가 배가 뒤집히며 민규는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거센 비바람과 파도를 눈앞에서 맞이했고 수영이라고는 전혀 하지 못했던 민규는 물에 빠진 채 허우적거렸다. 아아, 이대로 죽겠구나.라고 서서히 물에 잠기던 그때 하얀 무언가 자신에게 빠르게 헤엄쳐왔다. 첨벙 소리와 함께 자신에게 다가오던 흰고래. 헤엄쳐 자신에게 다가오던 모습이 퍽 우아하다고 민규는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생각했다.
8.
민규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옆에 서서 쉴새 없이 쫑알거리고 있는 이 흰고래가 현실일 리가 없으니깐 말이다. 물에 빠져서 겨우 죽다가 살아났다고 생각하기도 잠시 신기하단 듯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흰고래 때문에 잔뜩 경계를 하고 있는 민규였다.
"우와아."
"뭐, 뭐야..."
"짱 신기하다."
"대체 뭐가..."
사람 처음 봐? 민규의 말에 대답 대신 고개를 좌우로 젓고 다시 두 눈을 반짝이며 민규에게 다가가는 원우였다. 아니, 그럼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이번에는 대답 대신 원우는 슬쩍 웃으며 몸을 일으켜 앉아 있는 민규의 위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안 그래도 아까 물에 뛰어들려고 반팔티까지 벗어던진 탓에 원우의 하얗고 마른 상체가 민규 눈에 가득 들어찼다. 민규는 고개를 점점 뒤로 했고 원우는 점점 더 민규에게 다가간 덕분에 꽤나 요상야릇한 자세가 되었다. 야, 야아. 왜 이래! 왜! 왜 이러세요! 저리가!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진 민규는 점점 다가오는 원우에게 소리를 쳐봤지만 원우는 들은 척도 않고 점점 다가왔다. 어느새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가 되어 민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읏..."
"헐, 완전 부드러워."
민규의 머리 위로 튀어나온 까만 귀를 만지는 하얀 손. 민규는 감탄사와 함께 자신의 귀를 만지작거리는 원우를 감았던 눈을 뜨고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초면인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두 눈을 반짝이면서 민규의 귀가 쫑긋거릴 때마다 감탄사를 연발하는 원우 덕에 민규는 모래사장에 앉아 시선을 내린 채 한참 자신의 귀를 원우에게 내어주었다.
9.
"일어날 수 있어요?"
무리하면 안 될 거 같은데... 물속에 빠지며 왼쪽 발목을 접질린 민규를 원우가 민규의 팔을 붙잡고 부축을 해주었다. 괜찮겠어요? 아프죠? 으으. 원우는 마치 자신이 아프기라도 한 듯 민규를 부축하는 내내 연신 걱정했다.
"그런데 왜 저기에 빠져있었어요?"
수영할 줄 몰라요? 저기는 비가 오면 파도가 세서 우리 마을 사람들도 수영 잘 안 하는데. 저도 예전에 저기서 수영 한 번 했다가 빠져서 죽을 뻔했거든요. 그때는 지금 보다 훨씬 키도 작고 힘도 없어서 진짜 죽겠구나 싶었는데. 그때 딱 촌장님이 구해주러 나타나신 거 있죠? 아아, 그때 촌장님한테 진짜 많이 혼났었는데. 옆에서 부축하는 내내 쫑알쫑알거리는 흰고래 때문에 민규는 당장이라도 저 흰고래에 입술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그러지는 못하고 나름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니 속으로 한숨을 푹 쉬며 묵묵히 걷기만 하는 민규였다.
마을로 걸어가는 내내 원우의 입은 쉴새 없이 움직였다. 입가에는 웃음기를 가득 머금고 쫑알쫑알 쉴새 없이 말을 했다. 민규는 그런 원우가 정말 신기했다. 얘는 뭐가 좋다고 이렇게 실실 웃는 거지. 앞만 바라보며 신나게 애기를 하는 원우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민규는 생각했다. 무슨 말이 이렇게 많을까. 애 사실은 고래가 아니라 앵무새 아닐까?라고 원우를 바라보고 있던 민규에게 고개를 돌리는 원우였다.
"있잖아요..."
부축을 받느라 안 그래도 제법 가깝게 있었는데, 원우가 고개를 돌리니 다시금 가까워진 얼굴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뒤로 쭉 빼는 민규였다.
"왜, 왜?"
"진짜 수영 못 해요?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어요?"
악의없는 순수한 눈망울을 하고 질문을 해오는 원우.
"몰라도 돼."
원우의 시선을 피해 민규는 고개를 휙 돌리고 괜히 헛기침을 해보였다. 쌀쌀맞은 민규의 반응에 마음이 상하지도 않는지 원우는 되려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그럼 말 안 해주셔도 돼요. 아, 그런데 좀 궁금하기는 하다.라며 혼자 부스스 웃어버리는 원우였다.
민규와 원우가 부축을 받으며 부축을 하며 힘겹게 도착한 마을은 아기자기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평범한 마을이었다. 원우는 민규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는 마루에 민규를 앉혀 놓고 자신이 얼른 가서 의사 선생님을 모셔올 테니, 여기서 쉬고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 대문을 열고 밖으로 후다닥 뛰어나갔다. 민규는 자신을 위해서 빠르게 뛰어나가는 원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원우의 말대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을까. 의사 선생님을 모셔오겠다던 흰돌고래는커녕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 한 명이 없어 민규는 슬슬 지루해졌다.
"언제오냐..."
결국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던 몸을 뒤로하여 마루에 철푸덕 눕는 민규였다.
10.
물에 빠져 몸이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아, 진작에 수영이라도 배워둘걸. 어두운 바다는 민규를 점차 집어삼켰고 민규는 바다 깊숙히 점점 가라앉았다.
그때 첨벙 소리와 함께 하얀 무언가 민규에게 다가왔다. 물을 가르며 다가오는 폼이 퍽 우아했다. 점점 다가오는 무언가에 민규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눈을 어렴풋이 떴을 때 보이는 건 자신을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 바라보고 있는 원우였다.
"잘 잤어요?"
"......"
"엄청 잘 자던데요?"
와, 뭔데 존나 예뻐 보이는 거지. 배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쳤나.자기를 보며 말갛게 웃어 보이는 이 예쁜 흰돌고래를 보며 민규는 속으로 감탄을 쏟아냈다.
"발목 있잖아요. 나으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셨어요. 무리한 운동도 하지 말라고 하셨고 당분간은 꼭 붕대 감고 다니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또... 밥도 잘 챙겨 먹으라고 하셨고..."
또 뭐가 있더라... 옆에서 쉴 틈 없이 와다다 말을 해오는 원우 떄문에 민규의 미간이 좁아졌다. 저 쫑알쫑알거리는 입을 어떻게 한담. 그와중에 쫑알거리는 입술이 참 예쁘기도 하다. 민규는 생각과 동시에 팔을 뻗어 원우의 마른 목덜미를 잡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맞닿는 둘의 입술. 갑작스러운 민규의 입맞춤에 원우의 눈이 땡그랗게 커졌다. 맞닿은 입술을 떼기 위해 버둥거려봤지만 흑표범의 악력을 이기기에 원우의 힘은 턱없이 부족했다. 길게 이어지던 입맞춤에 결국 눈을 감고 있던 원우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놓으며 천천히 떨어지는 민규. 나른한 눈을 하고 흰고래의 동그란 뒷머리를 슬슬 쓸어넘겨 준다.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조용."
이미 원우의 얼굴은 물로 새하얗던 목까지 붉어져 있다. 말도 못 하고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누워있는 흑표범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원우를 보며 민규는 그래, 착하다.라는 말과 함께 부스스 웃어 보이고는 다시 잠에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