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전원우와 함께 있으면 평생 보지 못할 것 같은 풍경들을 자주 보게된다. 그러니까, 햇살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거나, 꽃잎이 분위기를 알고 떨어진다거나 하는 일 말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당연하지만 전원우는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공기도 좋은데 학교에 쳐박혀 있는 제가 불쌍하지 않느냐며 말을 건넨건 참 잘한 일이다. 학교에 이렇게 좋은 공간이 있을줄이야. 벚꽃은 지고 꽃은 보기 힘들 줄 알았는데, 학교 뒤 쪽 우거진 수풀 사이 이어진 길은 한쪽 벽이 온통 장미로 가득이었다. 새빨간 빛이, 은은한 꽃향기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줄 알았는데 전원우 없는 꽃담은 그저 그런 풍경일 뿐이었다.
여름의 낮은 길다. 해는 저물었지만 아직 하늘은 밝고 바람은 다 식어 선선하다. 피곤해보인다 했더니 꾸벅꾸벅 졸던 머리가 내 어깨 위로 얹어졌을 때는 얼마나 놀랬던지. 불편하진 않을까 혹시 땀냄새가 나진 않을까 했던 걱정은 다 쓸데없는 거였다. 내 심장소리나 들리지 않으면 다행이지.
예쁘다. 예쁘다. 책을 평소에 조금 더 많이 읽어둘 걸 그랬다. 형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멋진 말을 많이 해줄텐데 나는 잘 하는 말이라고는 단순한 한 마디밖에 없다. 예쁘다. 바람 때문에 쏟아진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는 모양이다. 움찔거리며 움직이는 눈커풀 위로 후 바람을 불어보다 치워지지 않아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
...어? 형?
지금 깨면 안 되는데. 망했다.
첫사랑 요정님
그늘
말도 안 돼. 야자실이 이랬단 말이야?
야자실과는 인연이 없었다. 굳이 학교에서 공부해서 뭘 한단 말인가. 또래 남자아이들과는 다르게 상당히 수업도 열심히 듣는 편이었고, 시험도 보면 나름 중상위권에 머물곤 했다. 딱히 학원까지 다닐 정도로 공부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시험날짜 이 주 전 정도만 공부했는데 이번 여름은 더위가 조금 심한 편이라 그제서야 야자실이나 이용할까 싶었다.
4층은 예약식으로 운영하고 3층은 자유롭게 이용한다고 했다. 애초에 자유롭게 쓴다고 해도 들어와 공부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쾌적하고 시원할 거라고 분명 석민이 그렇게 말했는데. 공부보다도 저녁을 먹은 후 열기가 가시면 축구를 한 판 하자고 약속한 것이 기다려지기는 했지만 저는 분명 야자실에 공부를 하러 왔단말이다.
그런데, 이건 너무 심했다. 설마 꼬박꼬박 야자를 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차별하는 건가? 냄새를 먹어준다는 하마는 이미 그 얼굴이 희미해진지 오래고, 아마 수업시간에는 나왔을 것 같은 에어컨은 이미 퀴퀴한 냄새를 남긴 채 바람을 멈추고 있었다. 더워. 냄새나! 이동수업도 없어 하루종일 쾌적한 상태로 있던 민규는 그 상황을 견딜 재간이 없었다. 안 되겠어. 오늘은 탈주다.
아마 이쪽 문은 잠겨있겠지. 두 동으로 나뉘어져있는 민규의 학교는 보안을 위해서 학생들의 하교 이후 야자시간에는 한 쪽 문만 열어놓고 있었다. 가방을 싸러 교실로 돌아온 민규는 야자실 쪽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기에 2층에 있는 구름다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투덜거리면서 삐죽 나온 입술을 여즉 들어가지 않은 채였다. 귀찮게 이게 뭐야.
"뭐야. 왜 불 켜져있지?"
2층의 구름다리는 도서실 앞에 있다. 이미 학생들의 이용시간이 다 끝났기도 했고, 야자실로 가는 길에 불이 꺼져있는걸 이미 보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앞 도서실이 환하게 불이 밝혀진 채로, 에어컨까지 켜져있는 것 같았다. 문 앞으로 다가가자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방금까지 덥기만 했던 민규의 몸이 간절하게 시원함을 원하고 있었다.
설마 귀신이 에어컨 틀어놓고 놀고있기야 하겠어. 문을 열자마자 훅 느껴지는 시원함에 그대로 직진, 쇼파처럼 푹신한 소파에 푹 누웠다. 이게 천국이지. 하루종일 의자 위에 쪼그려있어 혹사당했던 186cm의 신체는 누울 곳을 찾자마자 급격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정도 되면 으레 들려야 할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어떤 쌤이든, 어떤 일이냐고 묻거나 나가라고 하거나 해야하는데. 어쩐지 몰려오는 피곤에 눈을 감고 있으려다 뜬 순간, 민규는 당장 뛰어오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처음 보는 사람. 그런데 계속 보고싶은 사람.
코에는 안경을 걸쳐놓고 이미 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책으로 내리깐 눈이 단정했다. 하얗고 까매. 어떻게 저렇게 생겼지? 수묵화로 그려놓은 듯 새까만 눈을 지나, 안경을 지나, 단정한 콧대를 지나. 계속 쳐다보고 있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치고 책에 가려졌던 얼굴을 완전하게 보게되었다.
민규는 욕을 싫어했다. 딱히 언어가 그 사람을 상징한다거나 그런 거창한 의미보다는,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한 말들에 섞이는 거친 발음들이 싫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놀라운 것을 발견했을 때 무심코 욕을 해 버리고 마는 제 친구들을 이해할 것 같았다. 신을 믿는 것도 아니지만 뭐라도 외쳐야만 할 것 같은 기분, 정의내리지 못하는 반짝거림에 대한 안타까움.
다 집어치우고 너무 예뻐서, 무심코 요정님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책 반납하려고?"
와씨, 대박이다. 들려오는 목소리도 수묵화 같았다. 점점이 퍼져나가는 까만 먹물같은 거. 가만히 서있다가는 나도 금방 물들여져 버릴 것 같은 그런 거. 그런데 피하고 싶지가 않아서 뭐라 말하지도 못 할 거면서 우물우물 머뭇거렸다. 그런 나를 뭐라고 생각했는지 금세 시선이 돌아간 그 요정님은, 참 위험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더우니까 있다가 가. 대신 이 시간에 도서실 열려있다는 건 비밀."
당연히 비밀이지! 모범생 코스프레는 하지 못하고 신나서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쑥 들어가 에어컨 바람부터 쐬던 저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분명 주저앉고 말았을거다. 한껏 뛰어온 열기에다 전원우를 본 순간부터 까만 피부 위가 붉어졌다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 이후로 방과 후 내기축구를 모두 포기하고 끝나자마자 도서관으로 향했다. 책을 빌리러 잠시 머무는 학생들이 다 가고 나면 그 후 부터는 민규와 원우의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관심도 없는 책을 뽑아다 읽고, 책장 사이를 거닐며 제목만 읽고는 했다. 그렇지만 책을 집어들든 도서관을 종횡무진 누비며 카운터에서 멀어지든 시선이 자꾸 원우의 쪽으로만 향했다.
평소 도서관에는 발도 대지 않는 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얼마 전부터 출산휴가를 나가신 원래의 사서 선생님 대신 간단하게 대출, 반납과 책 정리 업무 정도만 맡기고 있다고 한다. 현재 휴학중인 대학생. 저와는 세 살 차이가 났다. 군대까지 다녀왔다는데 어떻게 저렇게 뽀얗고 예쁠 수가 있지. 여학생들의 출입 빈도수가 급격히 늘어난 것도 원우 형이 온 즈음이라고 했다. 저렇게 생겼으니 남자나 여자나 전부 인기가 많은 건 당연하지. 저를 한심하게 보는 석민의 뒤통수를 조용히 갈겨주었다.
꾸준히 도서관을 찾은 지도 2주가 지났다. 빠듯하게 다가온 시험기간에 색색으로 필기한 교과서와 정리노트를 가지고 도서실로 출근도장을 찍게 되었다. 노트를 펼쳐도 글자보다는 원우의 얼굴이 먼저 들어오는 건 같았지만 보고싶은 사람이 근처에 있으니 공부가 더 잘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엔 꼬박꼬박 늦게 들어오는 저를 미덥지 못하게 여기던 엄마도 빼곡하게 채워진 제 필기 노트를 보고서는 이제 용돈까지 쥐어주게 되었지. 배 안 고프다는 형을 억지로 졸라 같이 떡볶이를 먹은 것도 크나큰 행복이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한테 자랑하고 싶어. 좋아한다는 감정이 뭔지 알기도 전에 원우를 보자마자 뛰는 심장 때문에 시작하게 된 이 짝사랑.
그렇지만 비밀이니까, 남자를 좋아한다는 일도 그 남자가 학교에서 사서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는 것도, 무려 저를 가르치는 사람의 사촌동생이라는 것도 전부 누군가에게 말하기에는 망설이게 되는 사실이라서 그 사실을 숨기고 또 숨겼다. 형이 알게되는 순간 정말 요정처럼 사라질까봐.
그래도, 이제는 자꾸 찾아오는 귀찮은 학생 1이 아니라 귀여운 구석이 있는 남동생같은 학생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내 인상이 어떤지 안다. 빠르게 내려오던 중이라 땀도 났을거고 숨도 몰아쉬고. 책이라고 들여볼 것 같지도 않은 남학생이 자꾸 도서관에 오니 이상하게 생각했겠지. 어쩌면 이런 생각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아주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날의 형은 모든것에 무관심한 시선이었으니까.
책을 읽기에 방해되는 사람이었겠지. 늘 제가 올 때마다 새로운 책을 들거나 두꺼운 책의 책갈피를 쭉쭉 뒤로 미는 중이었다. 고요한 이 공간에서 책 읽는 것이 취미인 사람에게 있어서 책 여러 개를 집었다 놓고,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는 학생이란 얼마나 큰 방해일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알지도 못하는 형의 이상형과 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울해졌다가도 형만 보면 웃음이 났다. 사랑하면 닮는다고 했던가, 요즘에는 꽤 얌전히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가끔 형이 읽어주던 시의 시인을 찾아 시집을 읽는 것이 나름 하나의 취미가 되었다. 시험기간에는 일부러 문학공부를 열심히 하면 와서 조곤조곤 알려주곤 했으니까, 확실히 미운 정도는 아닐거다.
아, 정말 하기 싫다. 그나마 문학은 형 덕분에 흥미가 생겼는데 이놈의 수학은 알아먹을 도리가 없다. 수식을 쓴다는 건 알겠는데 이 간단한 것도 수가 늘어나니 문제에 써먹기가 힘들었다. 이것도 써보고 저것도 써보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던지 결국 형 생각으로 빠지다가 잠이 들었나보다. 얼마나 잤는지 뻐근한 목에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헉!
"왜 그렇게 놀라. 내가 너 잡아먹어?"
"어, 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그..."
말이 나오질 않는다. 단순함을 넘어서는 떨림이라고, 19년 평생 이렇게 격렬한 적 없던 심장이 말해줬다. 첫사랑의 자각, 꽤 로맨틱한 시작이다.
*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는데, 이건.
첫,
사랑입니다.
*
"...아, 깜빡 졸았네. 어깨 무거웠겠다. 미안. 뭐 하던 중이었어?"
제가 무슨 마음을 품었는지도 모르고 저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다행스러웠고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웠다. 티도 낸다고 냈는데, 같이 있던 시간도 오랜데.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나, 애인으로 괜찮은 사람 아닌가. 덜렁덜렁하는 형과 다르게 꼼꼼하고, 밥도 잘 챙겨줄 수 있고 체력도 좋은데. 형이 옮겨달라는 무거운 책 전부 옮겨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엄청 사랑해줄 수 있는데.
아무 말도 없으면서 표정만 울망하게 변하니 원우 형이 손을 뻗어 제 얼굴을 감쌌다. 하얀 피부도 좋고, 조금 약한 손도 좋고, 뭉툭한 것과 다른 예쁜 손 끝도 좋은데.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같은 공간에서 숨만 쉬어도 좋은데. 꼭 사귀는게 아니더라도 말하고 싶어. 순간적인 충동을 이길 재간이 없었다.
"형, 나 형 좋아해요."
"어?"
"좋아해요. 아주 많이. 친한 형 동생 이런 거 말고, 그러니까, 형을 보면 설레요."
정말로 몰랐다고? 형 눈이 생각보다 크다는 걸 안지도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커다래진 눈은 또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예쁘고 귀여워. 진짜 예뻐. 어차피 없는 말재주로 고백해봤자 얼마나 멋있게 했겠느냐만은 어쩌면 오늘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는 건 꽤 많이 슬펐다. 조금 더 나중에 할 걸 그랬나. 조금 더 어필해보고.
후회가 길었나 짧았나, 형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내가 참 좋아하는 얇은 입술이다. 그 입술 새로 나오는 시를 듣다보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시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성대의 울림 때문인지, 입술 사이의 속삭이는 것 같은 바람 때문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당황함이 역력한 말도 달게 들리는 것 보면 어지간히 내가 빠지긴 빠졌나보다.
그나저나 대답은 언제 들을 수 있는거지. 뺨을 때리고 싶은데 너무 친해서 망설이는 건가? 아니지, 착한 원우 형이니까 어떻게 대답해야 제가 상처를 덜 받을지 고민하고 있는걸지도 모르고. 두려움에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형을 봤봤다. 커진 눈부터, 내가 좋아하는 콧대부터 피어난 붉은 홍조가, 어, 홍조?
"민규야, 하나만 확인해봐도 돼?"
무슨 확-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입이 막혀버렸다. 그러니까, 원우 형의 입술로. 몰래 바라보며 내가 변태인지 아닌지 고민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맞닿은 입술의 감각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고, 있을 리 없는 상황에 대한 비현실적인 감각이 나를 지배해 꿈인 것만 같았다. 형, 형이, 왜.
"민규야, 어떡하지?"
"뭐, 뭐가, 아니, 형. 왜 그랬, 왜 입맞췄어요?"
"너 좋아하나봐."
"네?"
"진짜로, 내가 너 좋아하는게 맞았나봐. 어쩌지. 심장 엄청 뛴다."
제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지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혼자 중얼거리더니 내 손을 끌어다 자기 가슴에 얹는다. 쿵쿵쿵쿵. 내 것과 별 다르지 않은 떨림이 느껴졌다. 설마, 진짜로? 정말로 날 좋아하는 거야? 그제서야 놀란 내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지 코에 주름이 잡히도록 웃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다.
그렇게 예쁘게 웃으며 미안해, 하고 말하면 내가 용서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을까. 꼼지락거리며 뭘 하나 했더니 내 손을 잡아다 깍지를 끼운다.
"그럼 우리 사귀는 거야?"
"어, 그죠. 그렇게 되겠죠."
"와아, 이제 민규 내 애인이네."
차마 바라도 될까 망설였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지나치게 메르헨적인 사고라며 매일 밤 꿈꾸던 스스로를 말렸던 바로 그 일 말이다. 운명적인 만남, 운명적인 상황, 운명적인 이 고백의 순간. 마주잡은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온통 내 모든 감각이 너에게로, 내 평생의 요정인 당신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