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아침에 매니저에게 받은 시놉시스를 묵묵히 읽고 있던 원우가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휙 돌린다. 분명 별로 믿고 싶지 않은 말을 들은 것 같아서 몇 번이고 재차 물어보지만, 안타깝게도 매니저의 대답은 변화가 없었다.
“이번에 찍기로 한 드라마, 그거 상대 역 김민규라고.”
아, 씨발. 그 말을 들은 원우가 대본을 내팽겨 치듯이 집어던졌다.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매니저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기만 했지 별 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원우랑 일 해오면서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반응이었다.
“....야, 성철아, 나 이 드라마 안 한다고 해.”
“너 이미 남자 주인공 역할 확정으로 기사 다 나서 번복 못해, 계약도 다 맺었고.”
“아, 씨발... 상대역이 그 새끼인 줄 알았으면 내가 안 했을 거 아냐.”
원우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머리를 쥐어뜯으려는 기세로 넘겼다. 처음 시놉시스를 받아 봤을 때부터 너무 마음에 드는 스토리였고, 그 동안의 작품과의 분위기 반전도 필요할 것 같아서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른 드라마였다. 캐스팅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좋아서 이미 성공한 드라마나 다름없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하필, 하필 김민규라니.
“아, 너는 걔 왜 이렇게 싫어해? 너랑 딱히 긴밀한 관계도 아닌데.”
욕을 내뱉으며 유난을 떠는 원우의 모습에 성철이 답답한 듯 물었다. 긴밀한 관계도 아니라고? 어, 일단 이건 맞는 말이다. 원우에게 김민규는 같이 촬영한 경험이 있는 후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배우 생활을 하며 좆같은 선배도 겪어보고, 버릇없는 후배도 많이 만난 지라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원우부터가 그렇게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고, 작품이 끝나면 연락도 같이 끊어버리는 게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지나치게 친화력이 좋은 김민규는 촬영 첫 날부터 원우에게 달라붙으며 과도한 친한 척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른 배우들보다도 원우에게 특히 그랬다. ‘원우랑 민규는 연차가 꽤 있는데도 되게 친하네요.’ 라며 말하는 선배들을 볼 때마다 김민규의 일방적인 친한 척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왔었다.
“아, 촬영 날 김민규 얼굴 어떻게 보지?”
친한 척이야 그냥 무시하고 넘기면 된다고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드라마 종방 기념 회식 날, 왠지 모르게 기분이 평소보다 상당히 업 되어있던 때였다. 그래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내 옆자리에 딱 붙어 앉아 있는 김민규의 친한 척도 수용한 채로, 주량에 넘는 술을 잔뜩 들이부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대체 왜 그랬던 거지? 이 때 조금만 컨트롤을 했어도 술에 잔뜩 취해 그 지랄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원우는 반드시 이 때로 되돌려서 종방연에 참석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주연은 너랑 김민규, 게다가 요즘 가장 핫하다는 박 작가 대본이야. 분명히 대박 나니까, 그냥 무시하고 찍어.”
한참 예전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성철이 말을 걸어왔다. 그래, 드라마야 분명히 잘 되겠지. 나와 찍었던 작품 이후에 엄청난 상승세를 타고 있는 김민규와 요즘 가장 뜨고 있는 박시은 작가, 그리고 나까지. 잘 되지 않는 게 이상한 작품이었다. 다만, 중요한 건 내 기분이 전혀 괜찮지 않다는것이였다.
당장 내일이 촬영 전 출연진 사전 미팅이다. 중요한 첫 날부터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는 법이였다. 민규가 원우를 친근감 있게 대하지만 않는다면야 문제는 없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제발 자신이 했던 그 말을 민규가 기억에서 지워줬기를 바라는 원우였다.
*
“어, 전원우 씨 오셨네.”
대망의 첫 사전미팅 날,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사람은 다행히 김민규가 아니고 이번 작품의 메인 작가인 박시은 작가님이셨다. 약속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배우들이 하나 둘 도착하자, 원우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기에 바빴다. 본래 부지런한 성격인 민규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하고 생각하며 원우가 시계를 바라보았다.
“작가님, 저 안 늦었죠? 휴, 다행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갈한 옷차림의 김민규가 문을 시끄럽게 열며 들어왔다. 오자마자 가식적인 미소를 띤 채로 저런 말을 내뱉는 것도 너무 김민규 같아서 예전 생각이 문뜩 들자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박시은 작가님, 혹시 전원우씨는 아직 안 오셨나요?”
....뭐라고?
원우의 청각에 갑작스러운 이상이 생기지 않았다면, 분명 김민규 입에서 전원우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것도 ‘전원우 씨는 안 오셨어요?’ 라니. 믿기지 않아 계속해서 되뇌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분명 저렇게 말한 듯했다. 아...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차마 첫 미팅 날부터 싸움을 벌일 수는 없었던 원우가 대본을 챙겨 대기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전원우 씨요? 오셨는데... 아, 저기 계시네요.”
그 말을 들은 민규가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느낌의 두꺼운 손이 원우의 어깨에 닿았다. 아, 씨발. 그래서 내가 이거 안 하겠다고 했는데. 원우가 최대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민규를 돌아본다.
“전원우 선배님, 오랜만이네요.”
“아... 너 진짜,”
굳은 표정으로 거친 말을 내뱉는 원우에도 민규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오히려 빙긋 웃음을 지어보았다. 제가 선배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왜 그래요. 태연하게 내뱉는 말에 온 몸에 소름이 쫙 도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이 새끼는.
“선배 저 진짜 차단했어요? 카톡도 안 읽고, 전화도 안 받고.”
“응, 차단했어.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좀 가.”
“아 진짜 선배, 나 좀 그만 싫어해요. 너무해.”
하며 삐진 듯한 표정을 짓는 김민규에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어버린 원우가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나름대로 민규를 쫓아내 보겠다며 밀어내는데, 저보다 키가 더 큰 민규는 꿈쩍도 하지 않고 실실 웃기만 했다. 원우도 181의 큰 키지만 민규와 눈을 마주하려면 항상 고개를 올려다봐야했다. 저번 드라마 촬영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성장판이 아직도 안 멈춘 건지 키가 더 커진 느낌이었다.
“이제 시간 된 거 같은데, 슬슬 갈까요? 대본리딩 하러.”
그 말에 시계를 쳐다보니 벌써 1시가 되어있었다. 여전히 김민규는 재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원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우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대기실 밖을 나선다.
*
김민규는 그래도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는 사람이었고, 대본 리딩이나 촬영 현장에서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임했다. 평상시에 능글거리고 쾌할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완벽한 각본 속 캐릭터가 되어있었다.
‘...이렇게 보니 되게 멋있네.’
민규는 데뷔 초에도 얼굴로 주목을 받았을 정도로 잘난 페이스를 가지고 있었다. 김민규를 불편하고 짜증나게 느끼며 회피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원우도 김민규의 얼굴을 보면 감탄이 나올 정도로. 다만, 항상 웃고 있는 저 표정 때문에 원우는 민규의 속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날 그 사건 이후로 민규가 자신을 기피하리라 생각한 원우인데, 민규는 오히려 생각도 안 난다는 듯 아무렇지 않았다.
“선배 왜 이렇게 취했어요, 드라마 끝났다고 신났어?”
“으, 몰라...”
“집 다 와 가요, 이제 정신 차려야지.”
길도 제대로 못 걸을 정도로 술에 취하고 김민규에게 이끌려 집에 겨우겨우 찾아온 날이었다. 나름대로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겠다며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는데 손이 떨려서인지 6번이나 틀린 후에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민규가 제 걸음도 못 걸어 자꾸 비틀거리는 원우를 애써 붙잡고 집 안까지 들여보냈다. 민규가 시간이 늦었으니 가보겠다며 인사를 하고 나가려고 하는 순간, 원우가 민규의 손목을 딱 붙잡고 멈춰 세웠다.
“이거 누구야, 김, 민규야?”
“네, 선배. 저 김민규 맞아요. 이제야 알아본 거예요? 조금 속상한데.”
“김민규..... 너 진짜 싫어.”
진득하게 민규를 바라보던 원우가 대뜸 내뱉은 말이었다. 자신의 차가운 이미지와는 다르게 늘상 짓고 있는 저 미소 때문인지, 답답하리만큼 착한 성격 때문인지 원우는 민규를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자신과 완전히 상반되어 있는 친근하고 밝은 성격 탓에 민규를 상당히 불편하게 여기곤 했었다. 그게 가식이 아니고 그냥 민규의 성격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그냥저냥 넘어가려고 하지만 말이다. 그에 민규가 헛웃음을 지으면서 대꾸한다.
“선배 나 진짜 싫어하는구나? 그러지 마요. 나는 선배 좋은데.”
“너 진짜 재수 없는 거 알지? 존나 잘생겼고, 키도 크고... 다 가진 새끼...”
“저 칭찬해주는 거죠?”
술에 취해 정신도 못 차리는 사람을 겨우겨우 이끌고 와서 침대에 눕혀 놨더니 갑자기 험담을 가장한 칭찬을 듣고 있는 민규였다. 평상시에는 조금만 친한 척 해도 진짜 정색하는 사람이 술 몇 잔 마셨다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말끝을 늘이며 저런 말을 하고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너랑 사귀는 여자애는 좋겠다.... 이렇게 생긴 애랑 연애도 하고... 키스도 하고.... 이런저런 짓 다 하겠지...?”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선배.”
”너도 나처럼, 게이였으면 좋겠어.... 그럼 나도 너랑, 사귈 수 있는데.”
“..선배 지금 많이 취한 거 같아요. 얼른 자요.”
김민규는 이 말을 끝으로 불을 끈 채 방에서 나갔고, 저 말을 마친 원우는 쓰러지다시피 잠에 들었다. 제 방을 나서던 그 순간까지도 얕게 지은 미소는 그대로였다. 원우는 지금도 여전히 그 미소에 담겨있는 의미를 알 수 없었다.
*
그 날 이후로 절대 다시는, 이런 식으로 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 우리 드라마 시청률 20퍼센트 돌파를 위해서!”
뭐 첫 방송 날이라는 이유로 회식을 다 하냐고. 이미 음식점 내부를 장악한 드라마 팀과 시작하기 30분도 전에 방영 채널로 틀어져 있는 티비를 바라보자 헛웃음이 났다. 아... 진짜 존나 돈독한 새끼들. 원우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 착석하자 어디선가 나타난 민규가 원우의 옆 자리에 의자를 빼고서 앉았다.
“..딴 데 가서 앉지?”
가식적인 표정과 함께 원우가 민규에게 귓속말로 나지막이 속삭이자, 김민규는 뭐가 좋다고 또 실실 웃기만 했다. 이 자리가 가장 좋은 거 같아서요. 다른 자리는 불편해. 하며 너스레를 떠는데, 어찌 사람이 저리 변한 게 없을까 하고 신기하게 느껴지는 원우였다.
“그리고, 선배 술 많이 마시나 감시도 해야 되고. 오늘은 술 취해도 내가 안 데려다 줄 거예요. 알았지? 적당히 마셔.”
“야, 너.”
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김민규는 진짜 뼛속까지 배우가 맞는 것 같다고 원우는 생각했다. 내가 게이라는 것을, 그런 말을 본인에게 했던 사실을 다 기억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예전처럼 나를 대할 수 있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원우였다.
과거에도 이런 원치 않은 아웃팅을 당한 적이 한 번 있었다. 술김에 하게 된 것은 아니고, 사귀다가 헤어진 전 남자친구에 의한 아웃팅이였다. 그 이후로 한 동안 여러 가지 부정적인 시선과 말 들을 들어왔다. 더럽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고, 직접적인 말이 아니어도 전과 달라진 주위 사람들의 시선으로 충분히 원우는 느낄 수 있었고 그에 엄청나게 괴로워했다.
그래서 민규도, 당연히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 우리 드라마 첫 방송 대박을 위하여!”
피디님의 우렁찬 건배사가 원우의 복잡한 생각을 깨고, 이곳저곳에서 잔들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그에 민규도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조그만 잔을 들고 원우의 잔과 짠, 하고 마찰시켰다. 그러고서는 잔에 들어있던 술을 한 번에 들이킨 뒤 원우에게 너스레를 떨어오는 민규였다. 건배 해달라고 하면 안 해줄 거 같아서, 그냥 내가 했어요. 밝게 웃는 웃음이 어쩐지 민규에게는 평소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헉, 드라마 시작해요!”
자신의 첫 작품이라며 아까부터 줄곧 티비만 보고 있던 막내 작가가 우렁찬 목소리로 드라마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자 술잔을 들고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의 시선이 식당 벽에 붙어있는 텔레비전으로 고정되었다. 옆에서 내내 조잘조잘 거리던 민규도 어느 새 시선을 옮겼다.
*
“아, 김민규 정신 좀 차려.”
마치 몇 달 전쯤의 자신을 보는 듯 술에 잔뜩 취해 늘어진 민규를 난처하게 쳐다보는 원우였다. 덩치도 더 크면서 비 맞은 강아지 마냥 원우에게 꼭 달라붙은 민규의 모습에 원우가 휴,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어째, 이거 역할만 바뀌었지 몇 달 전과 다를 게 없는 익숙한 상황이었다.
“민규 씨 완전 잔뜩 취했는데, 어쩌냐. 민규 씨 집 아는 사람 있어요?”
“원우 씨 몰라요? 민규 씨랑 친하셔서 알 거 같기도 한데.”
친하다고요? 아니요, 얘 집을 제가 어떻게 알아요. 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이미 분위기는 원우가 민규를 책임지고 데려다주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결국 원우는 거의 반강제적으로 민규의 집이 어딘지도 모른 채 민규를 끌고 나오게 되었다.
“김민규, 정신 차려. 집 주소 좀 말해봐.”
“집 주소요....? 내 집 주소가 뭐였더라....”
아직 정신이 흐릿하게 남아있긴 한 모양인지, 랩이라도 하듯 빠른 속도로 제 집 주소를 읊어대는 민규였다. 그 탓에 여러 번의 재촉 후 4번 정도 들은 후에야 겨우 정확한 주소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예상보다 꽤나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여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장소였지만, 차마 체감 상 이미터가 넘는 김민규를 끌고 거기까지 갈 자신이 없어 택시를 잡았다.
“나한테 적당히 마시라 할 때는 언제고, 지는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취했네.”
“원우 형, 원우 형이야?”
어느 새 선배라는 호칭까지 생략하고 형, 형, 거리며 원우를 빤히 쳐다보는 민규였다. 민규는 원우와는 다르게 술에 취하면 말이 없어지는 타입이었다. 평상시의 시끄럽고 능글맞은 상태가 아닌, 다소 조용하고 목소리 톤도 낮아진 상태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민규에 원우는 조심스레 시선을 피했다.
“형, 왜 나 피해요.”
“...”
아.. 존나 잘생겼다. 육성으로 나올 뻔한 진심을 원우가 애써 속으로 삼켰다. 자신을 향한 민규의 시선에 제 얼굴이 완전히 붉어져있는 지도 모른 채 원우가 말을 돌렸다. 아, 도착했네. 주머니에서 대충 지폐 몇 장을 꺼내 기사님께 건낸 원우가 민규를 끌고 황급히 택시에서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알아서 집 찾아가라고 내버려둔 채 가고 싶었지만 왠지 처량한 강아지 같아 보이는 김민규의 눈동자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원우 형, 나 버리고 가려고? 가지마...”
과거에 민규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민규의 집 안까지 들어온 원우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민규가 저런 말을 꺼냈다. 아, 얘 진짜 왜 이래. 결국 타의적으로 거실 소파에 함꼐 앉은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가지 말라고 자신을 붙잡던 민규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원우는 이 어색한 침묵 속에 불편해하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정적을 깬 사람은 민규였다.
“형은 나 어때요?”
“...뭐라고?”
아무래도 김민규가 제대로 취하기는 한 모양이다. 긴 정적 끝에 낮게 깔린 목소리로 건넨 말이 저 말이라니.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고?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원우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했다.
처음에는 그냥 귀찮은 후배였고, 가식적인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며 싫어했었다. 그러나 그 짜증나던 친한 척에 익숙해지면서는 김민규와 조금 가까워졌고, 술에 취해 얼떨결에 커밍아웃까지 했다. 그 이후부터는 민규를 죽을 듯이 싫어하며 피하기 위해 번호도 지우고 차단까지 했지만, 우연인지 아니면 김민규의 의도인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민규는 지금 원우에게 이런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형 왜 자꾸 나 피해요, 연락처도 지우고, 카톡도 차단하고.... 나는 형이랑,”
더 가까워지고 싶은데.
민규가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라면, 원우는 민규의 얼굴에 취할 대로 취해서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강아지 같던 애가 이런 눈빛을 하고서는 저런 드라마 같은 대사를 던지는 데 정신을 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 이래, 너.”
원우에게 김민규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원우가 왜 자꾸 민규를 피하려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원우 본인조차도 정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원우는 민규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김민규를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결코 완전히 떼어놓을 수는 없는 이유가 뭘까. 옆에 있기만 해도 자꾸 거슬리고, 그렇게 신경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몇 번의 큰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다 민규는 술기운에 먼저 잠들어버렸고, 원우는 잠든 민규를 어렵게 침대로 옮겨주었다. 원우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잠든 민규를 쳐다보면서 서 있었다. 예전처럼 여전히 민규를 싫어하는가, 이건 아니었다. 솔직히 자신도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느껴본 이 뭔지 모를 감정이 어쩌면 민규를 처음 본 순간부터 원우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고, 이제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해답을 찾을 타이밍이었다.
“...나, 너한테 완전 말린 거 같은데.”
어쩌면 조금은,
전보다 조금은 김민규가 좋아져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