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소] min9yu_k 1
2021. 2. 19. 13:12




학번이 달랐음에도 같은 학과라는 이유로 몇몇 이들에게 “김민규 알아? 어때?”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야 강의실, 도서관, 집, 가끔 헬스장뿐인 루트에서 단 한 번도 그와 제대로 눈을 마주치거나 인사를 하거나, 어쩌다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잘 몰라.”라는 대답밖에 해줄 수 없었다. 관심 가질 마음도 없었는데 친구라는 놈들은 계속 물어보고, 제대로 연락한 적 없었던 애들조차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아냈는지 카톡이며 문자며 총동원해서 물어보고. 시간이 좀 지나자 온갖 찌라시를 들고 와 사실이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다른 걸 다 떠나서, 왜 하필이면 나한테 묻는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여기저기 잘 친해지고 다니는 스타일이면 모르겠는데 딱히 그런 성격인 것도 아니었다. 그와 같은 고등학교였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한마디로, 그와 나는 접점이라고 할 만한 게 한없이 0에 수렴했다. 그 애가 입대하면 화제성도 떨어질 거고 내가 귀찮은 일도 줄겠거니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게 아니었다. 군대에 있는 사람의 소문을 대체 어떻게 듣고 오는 건지, 남들에게 그의 과거는 뭐 그렇게 화려한 가십거리인지. 무려 일 년 동안 사람들이 난리를 치니 이제는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세기의 톱스타도 아니고 그냥 좀 잘 사는 집 아들이지 않나. 여러 스펙 덕에 유명인이 된 건 이해하겠는데, 이렇게까지 오랜 기간 호들갑을 떨 일인가 의문이 들었다. 신입생 좀 내버려두면 좋으련만 다들 마음이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참다못해 그 김민규라는 놈이 궁금해진 나는 한 번 관심을 가져볼까 했다. 좀 답답했던 것 같다. 끊임없이 정보를 원하는 인간들을 봐오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게.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공부하다보면 우리 학과 머릿수가 적은 것도 아닌데 굳이 나한테만 질문이 몰리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싶었다……라고 말하지만, 정작 하는 거라곤 팔자에도 없던 SNS 아이디를 만들어서(친구의 도움을 받아 비밀계정으로 해놓았다.) 그의 계정을 사찰하는 것 정도였다. 정확히는, ‘그가 입대 전까지 올렸던 수많은 사진들을 의미 없이 확인하는 것’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문제는 앱 한 번 켜면 되는 사찰조차도 이삼 주에 한 번이 겨우였다. 고작 그런 걸로 뭘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자만했다기보다, 그 이상의 노력을 할 정도로 내가 여유롭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알아가는 것 자체를 포기했다. 당장 눈앞에 닥친 내 테스트가 중요했던 탓이다. 공부하다 시간이 나면 알아보는 거였는데 그 시간이라는 게 도저히 나지 않았다. 몰아치는 전공과목 테스트와 실험보고서 제출에 이골이 나 잠잘 시간 확보하기도 어려웠으니 말 다 했지.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끝내는 느낌이긴 했다만 나도 취업준비라는 걸 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걔처럼 이미 탄탄대로인 생도 아닌데.

그렇게 조사고 뭐고 흐지부지 지나가서 찾아온 겨울방학, 한 해를 마무리하는 크리스마스의 달이 왔다. 졸업반을 앞둔 나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시점이었고, 두 살 연상이었던 애인은 십이월 인사이동 시즌을 맞아 막 정규직으로 전환된 참이었다. 당시 나는 애인을 축하해줄 겨를이 나지 않았고 애인 또한 나를 격려해줄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일개 사원이니까 그가 맡는 것은 거의 잡일뿐이겠다만, 적응이나 이런저런 면에서 나름 바쁜 모양이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점점 서로에 대한 소식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한 연락은 무려 일 년 만에 닿은 것으로, 서로 얼굴이나 목소리를 얼추 기억이나 하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그날의 데이트가 관계의 마지막이 될 거라는 사실은, 어느 쪽이든 당연하다는 듯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대서 뭔가 특별한 일을 한 건 아니었다. 그와 나는 마치 전날에도 만났던 것처럼 별 인사도 않고 마주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사귄 우리는 이미 수험생 때나 서로가 군대에 있을 때 권태기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다 지나보냈으니 이제 헤어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 희망차지 못한 재회에는 어색함도 설렘도 없었다. 즐거워하기엔 너무 벅찬 거리의 캐럴이 우리를 더 우울하게 만들 뿐이었다. 각자 핸드폰만 하다 두어 마디 나누는 정도가 그날의 데이트였고, 헤어질 때도 별다른 것 없이 그냥 손 흔들며 헤어졌다. 한창 연애할 때 하던 “잘 들어가, 연락해.” 이런 게 아니라, 억지로 웃어 보이는 일 없이 건넨 무언의 인사였다.
너무 오랜 비밀연애와 팍팍한 사회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 이런 결말을 맞은 걸 테지. 딱히 누군가를 원망할 필요도 없었고, 누군가가 서운할 필요도 없었다. 다 알면서도 괜히 그날은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최근 몇 년은 많이 뜸했어도 아주 예전부터 내 일생에 스며있던 인간이라, 그 존재감도 없이 넉넉히 채워져 있던 자리가 갑자기 빠져나갔단 사실에 답지 않게 센치해졌는지도 몰랐다.
나가기 직전까지 붙잡고 있던 프로그래밍과 취업관련 정보들을 다 제쳐두고 씻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이불 속에 폭 들어가 핸드폰을 봐도 알림 온 건 없었다. 다들 폐인 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 테니 이게 당연했다. 절망적이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몇 달 만인지 모르게 SNS를 켰다. 팔로잉이 걔 하나니까 온통 걔 사진으로 가득한 건 두말할 것 없는 소리였다. 간간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은 그의 친구들이겠거니 했다. 보면서 한 생각은 별거 없었다. ‘잘생겼다.’ 이 정도. 잘생긴 거 알고는 있었다. 학교 돌아다니다 한두 번 멀찍이서 보게 된 적도 있고, 애들 덕에 강제로 사진을 본 적도 있고, 전에도 SNS 몇 번 봤으니까. 난생 처음 각 잡고 보니까 새삼스럽게 느낀 거였다. 얘 진짜로 잘생겼구나, 하고.
한참을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얘도 제대하겠지. 그 생각을 왜 했느냐 묻는다면, 그야 헤어졌으니까. 내가. ……아니. 헛소리다. 아무것도 아니다.

오래도록 사귀어왔던 애인과 헤어져가면서까지 열심히 한 덕인지 뭔지 타이밍 좋게 인턴 자리가 들어왔다. 졸업반 때 인턴이라니, 그 사람과 비슷한 루트여서 한 번쯤 생각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주변으로부터 운 좋은 녀석이라고, 올해 운은 끝났다는 얘기를 수십 번도 더 들었다. 인정한다. 나는 그만큼 희귀한 확률을 뚫고 이 인생을 사는 거니까. 하지만 그해 내 운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정규직 발령. 이렇게 손쉽게 올라가도 되는 건가 싶었다. 물론 이 경쟁사회에서 내가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일을 못한 것도 아니지만, 좋은 일이 잇따르면 한편으로 불안한 게 일반적이었고, 내가 그 일반을 따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불행이 닥쳐올까, 혹시 정규직이 된 후에 금방 잘리는 건 아닌가, 별 고민을 다 했던 것 같다.
몇 번 깨지기도 하고 칭찬받기도 하면서 썩 평탄하게 지내온 정규직으로서의 계절도 어느덧 봄을 맞았다. 나는 몇 년 만에 현실의 김민규를 보았다. 소개할 때 본 그 익숙하게 잘난 얼굴에 일순 놀랐지만 나름 티내지 않으려 했고 그 또한 별말 없었다. “맞다, 둘이 같은 대학이던데?”라는 말에 그는 “아, 그럼요 알죠~” 하며 능청스레 대답하며 악수를 청했다. 그때 알았다. 얘도 곧 정규직으로 발령받겠구나. 낙하산이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정말 일을 잘했으니까 하는 말이다. 인턴이라 뭘 시켜주지도 않는데 정색하는 일 한 번 없이 싱글싱글 웃고 다녔다. 적당히 눈치 봐서 일을 만들어 했다. 뭔가를 바꾸기도 하고 밀어붙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상사 비위를 잘 맞췄다. 한마디로 사회생활 하나는 참 잘하는 녀석이었다. 뭘 해도 될 만한 애였다.
나하고 그가 같은 팀에 있으면서 무슨 대화를 한 건 아니었다. 사교성 만점 인턴은 그 나름대로 바빴고, 이제 겨우 사원 달고 일하는 나는 말단인 만큼 노가다 일처리로 바빴으니까 사실 둘이 무슨 얘기를 할 짬이 나지도 않았다. 가끔 회식 자리에서도 상사들 사랑 독차지하며 자리를 주도해나가는 그와, 적당히 받아주며 어울렸다 가는 나하고 무슨 말 틀 기회가 생길 리 없었다. 나하고는 다른 존재니까 그 정도 거리가 맞는 것 같았다.

내가 막 대리를 달았을 때쯤, 입사 이래 처음으로 김민규와 단둘이 휴게실에 있게 됐었다. 우연히 그랬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마침 회사에 알게 모르게 ‘김민규’에 대한 가십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어디서나 너는 이런 걸 몰고 다니는구나. 피곤하겠다. 그런 식의, 조금의 연민도 느끼고 있었다.
“뭐……힘든 건 없어요?”
그때 나의 질문은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업무든 인간관계든 벅찬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은 거였다. 나중에 생각하면 좀 꼰대 같았나 싶지만.
“힘든 건,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업무도 많고 소문도 많고, 계속 사람들한테 치이는데 버겁지 않아요?”
“그거 대리님 얘긴가? 지금 버거워요?”
“……말을 말자.”
“왜요, 더 말해줘요. 저 대리님이랑 영원히 한마디도 못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걸 왜 걱정해요. 저랑 대화해도 재밌는 거 없어요.”
나는 손에 든 커피를 홀짝 마시며 담담히 대답했다. 시선은 여전히 정면의 베이지색 벽지에 두고 있었다. 그에 김민규 사원은 느긋하게 턱을 괴고, 의자 하나 건너 앉아 있는 나를 빤히 응시했다. 정면을 봐도 시야에 그의 행동이 다 들어오는데, 사람 시야가 원래 이렇게 넓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무의식적으로 김민규 쪽으로 시선을 틀고 있나 싶기도 하고. 그랬었다.
“지금 너무 재밌고 즐거운데 왜요.”
“별말 하지도 않았는데 그러면 가식적으로 보여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잘 먹혀요?”
그를 흘끗 쳐다봤다가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고, 그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재밌어서 웃을까.
“저 대리님한테만 이러는 건데요?”
“그게 무슨,”
“가봐야겠다. 말 끊어서 죄송해요. 또 대화할 기회 생겼으면 좋겠네요. 그땐 내 얼굴 좀 봐주고.”
하여간 처음 말해본 소감으로 김민규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게 뭐 하자는 건가 싶은 사람. 특별히 불쾌한 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 의도를 알 수 없어서 물음표만 가득 생기게 하는 타입이었다. 사무실로 돌아가서도 문득 생각나는 “저 대리님한테만 이러는 건데요?”가 나를 자꾸만 고민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크게 남아 있는 빈자리가 계속 누군가를 원하고 있기 때문일까. 유난히 추운 겨울을 맞아서 그 자리가 아물다가도 다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일까. 별 생각도 없이 던졌을 말에 이러는 걸 보면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가끔가다 그의 SNS를 사찰하면서 혼자 마음속 친분을 쌓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나를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얼굴이 익숙했으니까, 그가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도 대충 아니까, 나도 모르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것일 수도 있다. 멋대로 그 사람의 말에 의미를 부여할 만큼 단단히.

그날을 기점으로 김민규하고는 하루에 한두 마디쯤 나누는 사이가 됐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첫 대화는 좀 이상했어도 그로부터 두어 달 지나자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퇴근까지 같이 할 정도로 친해졌다. 그가 정말 같은 방향이라 같이 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항상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고, 나는 늘 그러려니 하며 받아쳐주었다. 그게 전부다. 우리가 친해지는 과정이라는 게 딱히 거창하지는 않았다. 그냥 말하고 걷고,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면서 친구로 발전했다. 아니, 친구라고 얘기하는 건 어폐가 있으려나. 일반적으로 친구라고 하면 이런 관계하고는 조금 다르지 않나 싶다. 아니면, 그것들 모두를 ‘김민규의 성격’이나 ‘친한 사이 간의 장난’ 같은 걸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어느 해 십일월의 어느 금요일. 사시사철 변함없는 골목 퇴근길은 이제 눈 감고도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한 달째 하얀색 가로등이 깜빡이는, 구청의 게으름을 볼 수 있는 이 지겨운 길에서 그는 뜬금없이 별난 소리를 했다.
“대리님, 저 어떻게 생각해요?”
“네?”
“저랑 이제 좀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네, 그런데요.”
“그럼 저한테 좀 살갑게 해주실 때도 되지 않았어요?”
“충분히 살가웠다고 생각하는데요?”
“한 번도 저한테 먼저 연락하신 적 없잖아요.”
“……다음엔 먼저 연락할게요.”
“진짜요?”
느낌표가 사람이 되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내가 먼저 연락하는 걸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별 상관없는데 왜 그런 적 없냐면, 항상 김민규가 먼저 연락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먼저 연락해오니까. 여태까지의 나는 두 가지 시간을 보내왔다. 비밀연애 안 들키겠다고 문자내역을 항상 지우고 고작 삼십 초 남짓한 통화를 몰래하던 때와, 곁에 아무도 없이 그저 밤낮 다 바쳐가며 일만 하던 때. 그걸 지내온 나에게는 끊임없는 그의 물음에 답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었다. 그게 싫었다는 건 아니고, 내가 거기서 김민규보다 먼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규 씨는 저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요?”
“많으면 안 돼요?”
“그건 아닌데, 좀 궁금해서요. 저한테 매일 연락하시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저희 예전에는 눈도 제대로 안 마주쳤잖아요.”
“옛날 얘기 하나 해도 되죠.”
“네? 네.”
“대리님 신입생 때 축제 무대 올라간 적 있죠.”
“와 그 고릿적 흑역사를……어? 설마 봤어요?”
“오래 알았다고 했잖아요. 그때 처음 봤어요. 근데 너무 멋있는 거예요. 와, 사람이 어떻게 이러지. 막 이러면서 봤어요. 그게 진짜, 그날이. 그날 대리님이 너무 예뻐서.”
“저 그날 아무런 세팅도 안 하고 나갔는데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요. 그냥 그때 무대 위에 서 있는 대리님 혼자 컬러로 보였어요. 무슨 로맨스 영화 연출처럼 아무것도 안 들리고 다른 건 아무것도 안 보이고, 정말 딱 대리님만 보였어요. 결혼할 상대는 그냥 느낌이 온다잖아요. 그런 것처럼 느낌이 온 거죠, 저한테는. 저 사람이랑 잘돼야겠다.”
“결혼…….”
“근데 그런 적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꼬시기에는 대리님이 항상 바빴고, 물론 지금도 바쁘시고. 사실 제대하고 나서는 저까지 바빠지기도 했고요. 그래서 계속 주변만 맴돈 거고, 그래서 회사도 여기로 들어온 거예요. 다 그래서예요. 대리님이라서. 제가 대리님을 좋아해서.”
졸업하고 오랜만에 교수님께 연락 온 적이 있다. 안부전화 같은 거였다. 잘 지내냐, 아프진 않냐, 회사는 어디 다니냐, 일은 할 만하냐. 그런 얘기로 한 이십 분 남짓 통화한 것 같다. 강의 때 학생들한테 직장 얘기해주려고 전화하신 줄 알았는데, 설마 김민규가 내 직장을 물어본 게 계기였나.
“전 대리님이랑 친한 형동생 같은 걸 하고 싶진 않아요.”
“그럼 친한 직장 선후배 해요.”
“계속 그러실 거예요?”
“뭘요.”
말하려 입을 벌릴 때마다 서리는 입김 덕에 한층 더 겨울 같은 가을이었다. 내 옆에서 나의 보폭에 맞춰 걷는 김민규 사원은 오늘을 봄으로 착각이라도 한 양 온통 분홍빛으로 가득했다. 조금 시무룩해 보이는 표정으로, 언제나처럼 사랑 가득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곧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떠오르는 게 없어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화악 퍼진 새하얀 입김은 곧 사라져버렸으나, 내게 진득하게 붙은 그의 시선은 나를 떠날 줄 몰랐다. 천천히 걷는다고 해서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뭐가 떠오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빨리 걷는 것보다는 낫겠거니, 하며 걸음을 늦춰갔다. 동일하게 걸음을 늦추는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일 분여 만에 입을 뗐다.
“저한테 민규 씨는 연예인 같은 거였어요. 별로 관심 없는데 주변에서 계속 김민규, 김민규 하고 떠들어댔거든요. 근데 하도 그러니까 또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요?”
“처음엔 마음과는 다르게 너무 바빠서 무산되다시피 했어요. 제일 제대로 본 건 애인이랑 헤어진 날 집에 돌아와서? 그날은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민규 씨 SNS만 들여다봤거든요.”
“SNS를 해요?”
“안 해요. 관심을 어떻게 가져야 할까 고민하다 친구들 도움을 받은 거라서 계정만 있는 수준이에요.”
“아쉽다……. 그래도 희망은 가질게요. 그날 제 얼굴 보고 어땠어요?”
“잘생겼단 생각만 계속 했던 것 같아요. 민규 씨가 군대 가 있을 때라서, 얘도 곧 제대하겠거니 하는 생각도 했고.”
“군대? 그렇게 예전이에요?”
“네. 그 뒤로는 계속 논문 쓰고 일하고 그랬죠. 감상에 젖을 만한 시간은 없었어요.”
“그럼 뭐야. 저를 어떻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옛날부터 잘생겼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끝이에요?”
“끝인데요.”
“그럴 거면……아니에요. 그거라도 어디야. 어쨌든 저는 대리님 좋아했어요. 지금도 좋아하고.”
그때쯤 집 앞에 도착한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좋아한다는 말, 오랜만에 듣네요.”
“…….”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오래 좋아하는 게 어딨어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
“불가능할 건 뭐예요. 저 대리님이랑 깊게 대화해본 적은 없었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대충 알았어요. 얘기 많이 들으니까. 제가 직접 본 것들도 있고요.”
“민규 씨 좋은 사람이에요. 착하고 열정적이고. 그러니까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거절이에요?”
“저는 민규 씨가 봐온 것만큼 멋진 사람이 아니거든요. 저랑 무슨 사이가 된다면 분명 실망할 거예요. 민규 씨의 기대에 못 미칠 테니까. 내 말 이해하죠?”
“제가 멋대로 이미지 만들어서 그런 거죠. 근데 그건 대리님도 마찬가지잖아요. 착하고 열정적인 사람 아니에요, 저. 대리님이 멋진 사람 아니라고 쳐요. 그래서요? 저는 대리님이 멋진 사람이라서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단순히 계기 같은 거. 저는 대리님이, 뭐랄까, 그냥 전원우라서 좋아하는 거예요.”
“저를 다 모르는데 어떻게 저라서 좋아할 수 있어요.”
“다 아는 건 아니겠죠. 그래도 제가 지금까지 봐온 면은 다 좋아해요. 다 좋고, 그래서 다 닮고 싶었어요. 근데 안 되더라고요. 그냥 내 이상형인 거구나 싶었어요, 그때. 새로운 면을 볼 때마다 ‘이런 면도 있구나,’ 하고 좋아졌어요. 대리님이 아직 감추고 있는 면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대화 한 번 안 하고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게 이상하죠, 그럴 수 있어요. 이해해요. 저도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면 당황스럽고 안 믿길 거예요. 근데요. 대리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한테 물어봐요. 그 사람들은 하나도 안 놀랄 테니까.”
“네?”
“추운데 밖에 오래 세워둬서 미안해요. 이제 들어가세요. 기왕이면 제 말은 잊지 말고요.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 연락해주세요. 그때까지 저는 가만히 있을게요.”
“아니, 민규 씨.”
“잘 자고 잘 일어나요. 주말 잘 보내고.”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뒷걸음질로 멀어지다가 허리 숙여 한 번 더 인사했다. 어정쩡한 목례로 인사를 받아준 나는 그가 완전히 멀어져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번개가 치고 간 듯했다. 소나기보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선 내 속을 술렁이게 하고 금방 사라진 사람. 번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시 월요일이 되었을 때 당연하게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게 득일지 해일지는 모르겠지만.
“하아.”
샤워를 마친 후 침대에 눕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머릿속에는 김민규만이 활보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며 목소리나 얼굴, 나에게 했던 행동들, 어쩌다 일방적으로 공유 받은 SNS 속 네 일상들까지 다. 좋아한다, 좋아한다. 나를. 내가 나라서 좋다고. 그가 했던 말들을 몇 번씩이나 곱씹으며 눈을 감았다. 어쩌면 대학시절에 풀리지 않았던 몇몇 가지 사실들이 풀릴지도 모르는 타이밍이었다. 다른 말로, 쉬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밤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