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Swimming Fool. D(完)
2021. 2. 19. 13:11

 

 

 

 

 


신세 진 게 있으니 밥을 사겠다고 했다. 민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집으로 홀랑 가버릴 순 없었다. 민규는 아직 일이 남았다고 했다. 그럼 그냥 돌아갈까. 고민을 하는 사이에, 민규가 서둘러 말을 붙였다. 조금만 기다려줘요.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하던 민규는 직원 건물로 후다닥 들어갔다. 깨끗한 물이 다시 채워진 풀장엔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 민규가 들어간 건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얼굴이 익은 몇몇 사원들이 아는 체를 해온다. 부끄러움에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꾸벅 인사를 했다. 민규는 옷을 대충 정리를 하며 나온다. 가요.


밥을 먹는 민규를 멍하니 바라 봤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얼굴도 들지 않고 먹는다. 갈색머리가 퐁퐁 흩날린다. 내 마음인데 알다가도 모르겠다. 민규는 자기 마음을 다 알고 있을까. 어디서 확신을 얻은 거지. 툰툰한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는 민규의 손 끝에 시선이 조용히 따라붙는다.


“…뭐 묻었어요?”


눈이 마주쳤다. 줄어들지 않은 원우 그릇의 밥을 본다.


“배 안 고픈데 괜히 온 거예요?”
“아니.”


젓가락을 내려 놓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래 봤자 밥은 끝에 아주 조금 있을 뿐이었다. 궁금해서 죽을 것 같은데 물어 보지는 못하겠다. 낯뜨겁고 민망했다. 아 잘 먹었다. 모자랄 거 같아 더 시켜준 사이드 메뉴까지 깔끔하게 비운 민규는 물을 마신다. 조금 긴 앞머리를 뒤로 슥슥 넘긴다. 그제서야 원우는 밥 그릇을 끌어 당겨 입 안에 넣기 시작했다. 그 앞에서 민규는 턱을 괴고 아까 원우가 그랬던 것처럼 바라봤다.


“…정수리 따가워.”
“아까 내가 그랬어요.”
“미안해.”


푸핫. 뜬금없는 사과에 웃음을 터뜨린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니 아예 입을 가리고 웃는다. 지훈이 형이랑 있을 때도 그래요? 둘은 제법 죽이 잘 맞아서 실없는 농담으로 두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더 하지. 그랬더니 박수까지 짝짝 친다.


“다음에는 나 없을 때 들어가지 마요.”
“…….”
“또 옷 홀딱 젖으면 어떡해요.”
“…안 그래. 니가 아까 갑자기 들어와서 그래.”
“나 보고 싶어서 온 거죠?”
“아닌데.”
“맞을 건데…?”


말을 말자. 입을 꾹 닫고 밥을 욱여 넣었다. 아까 일만 생각하면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귀도 벌써 뜨거워지고. 자기 전에 침대에서 하이킥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지훈이한테는 이야기 안 했지?”
“미치지 않고서야!”
“…그래, 난 얼마나 욕을 먹겠냐. 친구 사촌동생이랑….”


이지훈 볼 면목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정신이 번쩍 든다. 내가 뭐, 김민규랑 뭘 했는데.


“나중에 형한테 등짝은 내가 맞을게요.”


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양은 날뛰기가 바쁘다.








“택시 타게요?”
“응. 너도 타, 내려줄게.”
“난 버스 타고 가면 된다니까….”
“참, 너도 희한하다. 편하게 갈 수 있는데 굳이 버스를 타.”
“버스 좋잖아요, 거리 구경도 하고.”
“그건 택시도 가능해.”


뭐라 웅얼거리는 민규 뒤로 빨간 글씨로 빈 차가 오고 있었다. 택시. 손을 들어 택시를 세웠다. 형! 더 이야기 하기 전에 문을 열어 민규를 밀어 넣었다. 구석으로 넣으며 무작정 몸을 구겨 넣고 문을 닫았다. Xx동 갈 건데요, 가기 전에 어디 좀 들릴게요. 민규를 쳐다 보자 제가 사는 동네를 이야기 한다.


“해준다고 할 때 좀 받아 먹어. 너 지훈이 말도 드럽게 안 듣지?”
“드럽게라니요!”
“형이 해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받는 것도 예의야.”
“…아니, 괜히 형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아이 같은 대답에 웃음이 픽 난다. 부담스러웠다면 아예 시작도 안 했다. 손에 들린 쇼핑백은 바닥이 조금씩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까만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뭘 그렇게 놀라서 흠뻑 빠지고 그러냐.


“놀러 안 가세요?”
“놀러?”
“휴가요.”
“아, 휴가.”


내일 가서 이지훈한테 한번 더 물어봐야겠다. 가르쳐준 건 기억이 나는데 언젠지 날짜가 생각나지 않았다. 매년 챙겨서 가지 않아서 달력에 표시도 안 했다.


“가려고.”
“어디로요?”
“바다 보러.”
“바다요? 지금도 맨날 보잖아요.”


그건 그렇다. 바닷가 근처에 있는 리조트에서 일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좋든 싫든 바다는 실컷 보고 있었다. 심지어 살고 있는 집에서도 바닷가가 멀지 않았고.


“제주도 바다는 다르겠지.”
“오, 제주도 가세요? 아, 저기 신호등에 내려 주세요!”


눈을 반짝이며 묻다 신호등을 가리킨다. 벌써 내리나. 조금 더 같이 타고 가고 싶었는데. 입맛을 쩝 다셨다. 택시는 거침없이 신호등 앞에 멈춰 섰고, 문을 열고 내리자 민규가 긴 다리를 쭉 뻗고 나온다.


“연락하세요.”
“왜.”
“아 뭘 그렇게 또 튕겨요.”


튕겨? 이게 진짜. 헤헤 웃으며 바뀐 신호에 건널목을 건넌다. 원우는 다시 택시에 올라탔다. 키도 크면서 팔랑팔랑 뛰어 가는 모습이 귀여워서 쳐다보다 다시 웃음이 터졌다. 하는 짓이 귀엽다. 그래서 이지훈도 그랬다. 사실은 못 미워하겠다고. 말은 소새끼, 말새끼 하는데 정작 하는 짓은 귀여워서 아이 같다고. 무슨 말인지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출발하는 택시 안에서 터덜터덜 걸어가는 민규를 계속 지켜봤다.








집으로 오자마자 기나긴 하루에 피로가 몰려왔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벌렁 누웠다. 오늘 일찍 마쳤는데 이제서야 들어오다니. 조금 억울하기도 했지만. 풀장에 빠진 생각을 하다 결국 두 다리를 들어 허공을 향해 흔들었다. 거기서 찐따처럼 놀랄 건 또 뭐야.
핸드폰 진동이 짧게 울린다. 민규다. 잘 들어갔어요? 대답을 하려는 찰나 다시 메시지 하나가 뜬다. 얼른 정하세요.


[뭘?]
[옷 주셔야 하잖아요]
[아 맞다 빨래 해놓을 테니까 너 시간 되는 날 말해]
[다우니 많이 뿌려주세용]


얼씨구, 다우니는 무슨. 대충 대답을 해주곤 핸드폰을 침대 옆으로 툭 던졌다. 그 후로 진동이 짧게 툭툭 울린다. 민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왠지 볼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번엔 진동소리가 제법 길다. 민규다.


“왜.”
[왜라니요! 첫 마디가!]
“그니까 왜, 아까도 봤잖아.”
[아니, 메시지도 안 보고 답장도 없으니까…]
“할 말 있어?”
[그냥요. 목소리 듣고 싶어서.]


…이런 건 좀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민규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는 건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징그럽다고 끊으라고 할 수도 없고. 초침 소리도 시끄러워 전자 시계가 대신한 조용한 방 안에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민규의 소리만 가득했다.


[…안 되나, 전화하면]
“…….”
[하지 말까요?]
“…누가 하지 말라 그랬냐.”
[그럼 이야기 해주세요]
“무슨 이야기.”
[그냥, 아무 이야기요.]
“나 그런 거 잘 못해.”
[거짓말. 지훈이 형이 형 엄청 수다쟁이라 그랬는데]


…이지훈 이 새끼…


“…오늘 옷 고맙다.”
[아우, 그걸 몇 번이나 말하는 거예요. 밥도 사줬고 택시도 태워줬으면 이제 잊어요. 하필 옷이 있었던 거니까. …근데 바지가 맞아요?]
“커서 손으로 잡고 왔어.”
[으하하하]
“벨트 있어서 망정이지.”


호탕한 웃음소리에 함께 웃게 된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 했다는 민규의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수많은 질문을 하면서도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에 웃음이 났다. 오래 알고 사귄 사람들이 아니면 대화를 오 분 이상 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민규는 그렇지 않았다.


[나도 휴가 가고 싶다!]
“가.”
[알바생이 어딜 가요. 그리고 다들 놀 때 일해야 돈 많이 벌어요[
“돈 많이 벌어서 뭐하게?”
[뭐하긴요. 월세 내고 용돈하구 그러지]
“열심히 사네.”
[다 이렇게 살아요. 그래서, 제주도 갈 거예요?]
“생각만.”
[제주도가 그렇게 예쁘다면서요? 저는 한번도 안 가봤어요]
“나도 안 가봤어.”
[그럼 다녀와서 이야기 해주세요. 아님, 나 학기 중에 같이 가도 좋구.]
“…너는 사람들한테 잘 들이대는 타입이야?”
[으하하하.]


또 혼자 한바탕 웃어버린다. 그렇게 웃기냐. 입맛을 쩝쩝 다셨다.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하는 거면, 혼자 오해해서 삽질하는 건 싫으니 그만 하려고 했다.


[형한테만 그러는 거죠. 나 막 다른 사람한테 술 먹고 뽀뽀하는 사람 아닌데요.]
“야, 좀.”
[저는 진심이거든요, 그러니까…]
“…….”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지 좀 마시구요]
“내가 언제.”
[지금도 그러잖아요.]
“……..”
[기다릴게요. 아, 옷은 편할 때 주세요. 저 이번 주에는 쉬는 날 없어요]
“응.”
[더 이야기 하고 싶은데 끊어야겠죠? 형 피곤하니까]
“잘 아네, 고마워.”


잘 자요. 달콤한 말이 따라 붙는다. 너도. 그에 비하면 다소 무뚝뚝한 말투로 대답했다. 액정이 닿았던 볼이 뜨거웠다. 다른 것 때문에 열이 오르진 않았겠지. 핸드폰을 한참 바라보다 일어나 앉았다. 생각 정리가 필요했다. 그러면, 일단 좀 씻고. 입고 있던 민규 옷을 벗어 제 옷과 함께 세탁기에 넣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세탁기를 한참 바라봤다.













“나 휴가가 언제라고?”


동그란 안경을 치켜 올리며 묻는 원우를 보며 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휴가를 챙기는 직딩이가 되자. 빨간 펜을 들고 와서 원우의 달력에 크게 동그라미를 친다.


“완전 성수기네.”
“후딱 다녀와. 부장님이 너는 이 때 가도 된대.”
“오.”
“오는 무슨 오야, 명색이 리조트에서 일한다는 애가 리조트의 리을 자도 모르니까 그렇지. 어디 갈 건데?”
“제주도.”
“좋은데 가네. 어디서 묵을 거야? 아는 데 소개 시켜줘?”
“그 전에 나 비행기는 있을까.”


달력을 보며 손가락을 톡톡 치는 원우를 보며 지훈은 한숨을 푹 쉰다. 지금 그럴 때냐고. 그러면서 비행기 티켓 예매 사이트를 대신 켜준다. 휴가를 장려하는 곳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지만 일하면서 여름 휴가 당직은 늘 원우 차지였다. 다들 미안해 하는데, 그게 왜 미안한지 정작 본인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 표가 있긴 있네. 티켓 가격이 비싸긴 했지만 휴가 기간이 긴 탓에 좋은 가격에 예매는 할 수 있었다. 지훈이 알려준 곳에서 숙박도 예약했다. 가서 뭐할 건데? 제 일인 냥 초롱초롱한 눈을 뜨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웃어 보였다. 아직 계획이 없어요. 계획 없는 게 계획이었다. 실컷 바다 보고, 실컷 자고, 실컷 책을 읽다 와야지 싶어서. 재미있겠다. 처음 기간을 맞춰 가는 휴가에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극성수기는 남아 있었지만, 일이 바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한 주 내내 야근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주말 출근을 하는 날도 있었다. 날은 더 더워지고 있었고, 기분 나쁜 습기와 더위는 온 몸을 휘감았다. 여름을 잘 견디는 원우도, 올 여름은 조금 힘들었다. 제주도 휴가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고, 바쁜 생활 속에 민규에게 줘야 하는 옷은 전달하지 못했다. 바쁜 걸 알았는지 민규가 메시지 보내는 횟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조금 시간이 생겨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바쁘냐. 그랬더니 1초도 되지 않아서 답장이 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지금 쉬는 시간이요!]
[옷 언제 줄까]
[오, 이제 안 바빠요? 형 괜찮으실 때요. 사무실로 갈게요.]
[내일 줄게. 점심시간에]
[네]


그러면서 귀여운 이모티콘을 하나 보낸다. 민규다운 강아지 이모티콘이었다.







까먹지 않으려 현관에 놔둔 쇼핑백을 들었다. 다행이었다. 살짝 늦잠을 자는 바람에 하마터면 맨 몸으로 나갈 뻔 했다. 지각은 면했다. 출근 전 쌓인 서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이번 주만 버티면 간다. 제주도 사진을 보며 원우는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흐르는 시간에 점심시간도 금방이다. 민규에게 메신저를 받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여기로 와줄 수 있어? 미안해. 답장으로는 달려가는 이모티콘이 온다.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혹시라도 지훈이 지나갈까 발을 동동 굴렀다. 빨리 와라. 저기 멀리서 문이 열리고 민규가 들어온다. 긴 앞머리가 팔랑팔랑 흔들린다. 햇빛을 많이 봤는지 팔이 또 새카맣게 탔다.


“미안해, 여기까지 오라고 해서.”
“아니에요, 오면서 이지훈을 만나서.”


이지훈? 마침 문이 열리며 통화를 하며 지훈이 들어온다. 민규에게 눈을 매섭게 뜨며 검지와 중지를 브이자로 만들어 제 눈에 가져갔다가 민규에게로 가져간다. 민규는 에베베, 하며 혀를 내밀었다가 다리를 한 대 툭 맞았다.


“나 이번 주에 제주도 가.”
“헐. 언제요?”
“금요일.”
“몇 시 비행긴데요?”
“아침에. 열 한 시.”
“데려다 주려고 했는데 일하는 시간이네요.”
“뭘 데려다 줘.”
“잘 놀다 와요, 출발 전에 전화 해주세요!”
“…그래.”


안녕! 손을 흔들다 말고 들고 있는 서류를 원우 품에 안긴다. 저 인간 꺼. 그러면서 사무실로 들어간 지훈을 가리킨다. 진짜 안녕! 그리고는 호텔 로비 쪽으로 후다닥 뛰어 나간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지훈에게 서류를 건네자 갔어? 하며 묻는다.


“뭐 줬어?”
“아, 민규한테 빌린 게 있어서.”
“빌려? 저 녀석한테 니가 빌릴 것도 있어?”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혼자 찔려서 대답을 얼버무린 채 자리에 앉았다. 더 물어본 것도 아닌데 심장이 괜히 쿵쾅 뛴다.













비행기를 처음 타는 게 아닌데 왜 이렇게 떨리는지 모르겠다. 국내선이라 할 것도 별로 없어서 시간을 맞춰 온 게 다행이다 싶었다. 다들 한껏 들떠 있는 표정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놀러 가네. 보딩을 기다리다 민규 생각이 났다. 전화 달라고 했는데 지금 전화해도 되나. 흠, 한참 액정을 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꽤 길었다. 끊을까. 해외 가는 것도 아닌데 몇 시간 후에 전화하는 건 또 어떠나 싶었다.


[여보세요?]


숨을 급하게 몰아 쉬며 받는다. 바빠? 그랬더니 아니요! 하고 또 헐레벌떡 대답을 한다. 바쁜 것 같은데.


“나 이제 비행기 타려고.”
[안 잊고 전화 줬네요!]
“…달라며.”
[감동이다. 사실 일하느라 바빠가지고 전화할 틈이 안 나는 거예요. 나중에 해야지 했는데, 형이 먼저 줬어요.]
“많이 바빠?”
[조금요. 단체 손님이 와 가지고.]
“얼른 들어가 봐.”
[잘 놀고 조심해서 와요. 괜히 다치지 말고요.]
“응.”
[그리고….]


민규가 말을 얼버무린다. 그와 동시에 원우가 타야 하는 제주행 비행기의 탑승을 알리는 안내가 뜬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우루루 일어나 탑승구로 걸어간다. 옆에 놔뒀던 가방을 어깨에 맨 원우는 잠시 전화에 귀를 기울였다.


[거기서 내 생각 조금만 해주면 안 돼요?]
“뭐?”
[나는…형이랑 만나보고 싶은데, 형은 아직 대답을 안 했으니까…. 그거 생각해주시면 안 돼요?]
“…….”


탑승구에 서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 원우도 일어나 천천히 줄을 섰다. 민규도 대답이 없다. 어느 새 줄은 줄어들어, 원우 차례가 되었다. 표를 확인한 직원이 손을 뻗어 안내한다. 목례를 가볍게 한 원우는 결국 입을 열었다.


“응, 생각해 볼게.”


이번 휴가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바다에만 있었다. 묵고 있는 곳도 바다 앞이었다. 하루는 방안에서 바다만 보고 있거나, 가지고 온 책을 읽었다. 또 하루는 가 볼만한 곳을 추천 받아 하루 종일 돌아다니기도 했다. 또 하루는 모래 사장에 앉아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해가 뜨거워 금방 들어오긴 했지만. 틈틈이 민규에 대한 생각도 빼놓지 않았다. 어쩌면 해답을 빨리 줘야 했다. 키는 원우가 쥐고 있었다. 이 관계를 어떻게 끌고 나갈 지는 오롯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던 거다.

제주의 날은 다행히도 맑았다. 비는 하루 정도 왔고, 다른 날은 모두 다 맑았다. 하늘이 깨끗하고, 구름이 예쁘고 바다는 반짝였다. 문득 민규와 함께 왔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맛있는 걸 먹는 모습이 상상이 갔다. 이런 마음이 ‘진짜’인 지 헷갈렸다. 좋아한다고 왕왕거리는 민규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 건 아닌지. 반대로, 신경 쓰이는 것도 일종의 ‘시작’이 아닌지. 이지훈의 얼굴도 떠올랐다. 좋은 친구에게 못하는 짓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으아, 모르겠다. 머리 식히러 온 제주에서 오히려 큰 고민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혼자 여행을 하면서 민규 생각이 자꾸만 난다는 거였다.

어쩌나.
민규를 생각할수록 대답은 떠오르지 않고 결과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답이 없는,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를 하루 종일 들여다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여행을 다녔다. 아주 반대편으로 가보기도 하고, 하루는 묵는 숙소의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길을 잃어 호스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씻고 누워, 금방 잠이 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정신이 또렷하다. 핸드폰을 확인하다 민규의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했다. 밥 먹었냐는 내용이었다. 조금 고민을 하다 전화를 걸었다. 받을까. 여보세요. 어, 받았다.


[살아있어요?]
“그럼.”
[재미있어요? 어디 갔는데요? 흑돼지는 먹었어요? 회는? 아…형 해산물 못 먹지.]
“하나씩 물어봐”
[궁금하니까 그렇죠. 바다는 잘 봤어요?]
“맨날 봐. 지금도 보여.”
[좋네, 좋아.]
“일은 다 끝났어?”
[네! 지금 옷 갈아 입고 나가는 중. 수고하셨습니당]


애교 섞인 목소리에 웃음이 난다. 얇은 이불을 몸 위로 덮었다. 에어컨 온도를 조금 높였다.


[이번 주에 오죠? 몇 시 비행기예요?]
“세 시?”
[마지막 날에 뭐 아무 것도 못하겠다.]
“다음에 또 오지 뭐.”
[나도 제주도 가고 싶어요.]
“와, 재미있더라.”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뿐이었다. 이지훈은 여전히 바쁘고 회사에서 만나면 꼭 한대씩 치고 가고, 점심 식단이 어떤 게 나왔고 연예인이 누가 놀러 왔더라 그런 이야기들. 분명 지루한 이야기들 뿐인데 왜 재미있게 느껴지지. 눈이 까무룩 감긴다. 잠이 안 올 것 같았는데 이야기에 집중하니 잠이 쏟아진다.


[졸리죠.]
“어떻게 알아.”
[목소리가 졸린대?]
“…뭐 너는 다 잘 아냐 그렇게.”
[형에 관한 건 다 알지.]
“누가 보면 너 나 한 십 년은 알고 지낸 줄 알겠다.”
[그만큼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웃기네.”
[진짜거든여! 그리고 형 오는 날에 나 오프인데 데리러 가도 돼요?]
“뭘 데리러 와. 나 애 아냐.”
[아니, 조금만 더 일찍 보고 싶어서 그렇죠.]
“대답 빨리 들으려고 하는 속셈 모를까 봐.”
[아이, 알면 그러라고 하세요]
“생각해보고.”


참나, 생각해 보고라니요. 툴툴거리는 민규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감사했습니다.”


캐리어를 끌며 나와 택시에 올라탔다. 오늘도 날이 좋다. 벌써 돌아간다니 아쉽지만 제대로 쉬어서 뿌듯했다. 아까부터 민규는 난리다. 데리러 가요? 가지마? 나 가면 좋겠죠? 나 짐꾼 할 수 있음! 티켓팅을 하면서 메시지를 확인하고 웃어버렸다. 참지 못하는 똥강아지네. 서울로 돌아가는 티켓을 손에 들고 전화를 걸었다.


[결정했어요? 나 가요? 말아? 어떡해?]
“시끄러워.”
[힝. 가지 마요?]
“예상 도착 시간이, 네 시 오 분이래.”
[아싸! 지금 출발할게요!!]
“뭐야, 너 준비 하고 있었어?”
[당연한 거 아니에요? 데리러 오라고 할 줄 알았지! 느낌이 빡 왔지!]


나중에 봐요! 귀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이야기를 하고 끊는다. 잘한 일일까. 조금 후회가 되긴 했는데 이내 웃어버렸다. 결심한 이유는 크지 않았다. 여행을 하면서 민규 생각이 가장 많이 나서 그랬다. 제주에 올 때와는 반대로 마음이 가벼웠다.








“형!”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고 있는 민규를 보며 웃음이 샌다. 가방 주세요. 달려와 캐리어를 뺏어 간다. 꼬리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귀도 이렇게 펄럭펄럭 하고. 약 일주일 가까이 못 본 민규는 그간 좀 큰 것 같았다. 피부는 더 까무잡잡해지고. 햇빛을 얼마나 본 거야. 이미 팔에는 이렇게 경계선이 지어졌다.
원우 집 근처에서 뭘 먹기로 했다.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지갑만 들고 나왔다. 들고 왔던 선물을 건네자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술 한잔 할까. 분명히 지겹게 보고 온 바다인데, 집 앞에 있는 바다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모래사장, 적당한 곳에 앉았다.


“형 없는 동안 심심했어요.”
“내가 맨날 놀아준 것도 아닌데.”
“사람이 들어온 자리는 티가 안 나도, 없는 자리는 티 나는 거랬어요.”
“똑똑하네.”


뭔가를 묻고 싶어하는 표정인데 부러 모른 척 했다. 생각한 걸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맥주를 반 정도 비우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민규야. 기다렸다는 듯 네, 하고 대답을 한다.


“많이 생각했는데….”
“네.”


아마 그 작은 풀에 빠질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어쩌면 처음 민규를 본 날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에 빠져 홀딱 젖은 것처럼, 민규한테 홀딱 빠질 거라는 걸.

원우의 말에 민규가 웃는다. 고개를 돌렸지만 으쓱으쓱 움직이는 어깨가 보인다. 고개를 묻고 한참을 웃는다. 얼굴이 빨개졌다. 아 광대야. 그러면서 주먹을 쥐고 제 광대를 매만진다. 옆에서는 사람들이 터트리는 불꽃이 빛을 내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터트리는 불꽃처럼 좋은 게 없다. 푱푱 소리를 내는 것도 좋았다. 평소에도 좋아했었나. 불꽃놀이를 좋아한 적이 없다.


“형.”
“응?”
“뽀뽀할까요?”


터지는 불꽃을 턱짓으로 가리킨다. 죽는다. 아직 날이 밝았다. 모래 위로 올려진 원우의 손 위로, 민규의 두툼한 손이 덮어진다. 올 여름은 기억에 평생 남겠지. 지루한 일상에 던져진 소중한 사람. 잔잔한 물결은 어느 새 큰 파도를 만들어내기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