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bby] Blurred lines
2021. 2. 16. 20:53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닮은 사람인가? 거리가 좀 있었고 사이에 지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두운 실내엔 조명이 많지 않았다. 좀 더 선명하게 보고 싶어서 눈매를 찡그리게 됐다. 웃는 얼굴. 저렇게 웃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더더욱 확신이 없었다. 아니겠지.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너무 조심성 없이 바라보다 문득 눈이 마주쳤다. 내내 웃던 얼굴이 순간 멈춘다. 그제야 선명해졌다. 말도 안 돼. 

 

원우는 일단 시선을 돌렸다. 그것만으로 부족한 것 같아서 아예 자리를 피했다. 전원우 어디가? 붙잡는 손에 그냥, 잠깐. 하고 대충 대꾸하곤 몸을 돌려 걸어갔다. 진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사람이 많은 곳을 골라 비집고 걸었다. 등 뒤에서 시선이 계속해서 따라오는 오싹한 기분이 들어서 그랬다. 이쯤 오면 됐을까? 앞만 보고 걷다가 문득 돌아보았다.

 

“형 맞네.”

 

시선이 아니라 실제로 따라오고 있었다. 바짝 가까운 얼굴에 그만 숨이 다 멈추었다. 아무리 어두워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을 착각할 정도는 아니다. 나가자.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출입구를 손으로 가리키곤 먼저 걷는다. 안 따라가면 그만일 것 같은데, 뭐에 홀린 것처럼 따라가게 됐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계단을 오르기 전에 진정시키느라 시간을 좀 썼다. 천천히 올라와 입구를 닿자 먼저 나와서 담배를 피우다가 원우를 바라보곤 한걸음 물러나 준다. 입안에 고여있던 연기를 길게 뱉고선 손을 휘저어 흩트리고, 아직 반도 안 태운 걸 바닥으로 떨어트려 끈다. 

 

불씨는 이미 꺼졌는데 계속해서 짓이기는 걸 보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건 둘 다 마찬가지인 듯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안부를 물어야 하는지 이유를 물어야 하는지, 단어와 문장이 뒤엉킨다.

 

“술 마셨어?”

 

문득 묻는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가, 끄덕였다. 칵테일 한 잔. 솔직히 대답하자 여전히 담배를 짓이기며 고개를 끄덕인다. 술 한잔 할까? 바닥만 바라보던 눈을 들어 묻는다. 그래. 술이라도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이 동네를 잘 아는지 앞장서서 걸었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걷는 등을 쫓아가는 동안 자켓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계속 진동했다. 거리가 너무 벌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전원우 어디 갔어? 전화와 메시지가 여러 개 들어와 있다. 나 나왔어. 내일 연락해. 빠르게 답을 적어 보내자 단체창이 난리가 난다. 그새 나갔냐. 뜨거운 밤 보내라.

 

뜨겁긴 개뿔. 헛웃음을 흘리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무심코 눈을 들자 어느새 한참 멀어져서는 뒤를 돌아보고 있는 게 보인다. 여기 조용해. 간판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조금 빠르게 걸어갔다. 앞에 다다르자 먼저 들어간다.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뜨겁긴 개뿔.

 

이 동네에서 이 시간에 이렇게 조용한 가게가 또 있을까 싶다. 손님이라곤 저쪽 구석에 한 테이블뿐이다. 민규 왔어? 안으로 들어서자 카운터에 있던 사람이 아는 체를 하더니 곧이어 원우를 바라본다. 눈이 마주치자 의미가 불분명한 미소를 짓더니 들어와. 하고 안내를 한다.

 

제일 외진 자리에 마주 앉자 메뉴판을 주며 자꾸 원우의 얼굴을 살핀다. 민규 애인? 대놓고 묻는 말에 귀가 뜨거워지는 느낌이다.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민규가 더 빨랐다.

 

“형이야.”

“형?”

“새엄마 아들.”

“아.”

 

가정사를 다 얘기할 만큼 친한 사람인 건지 그렇게 말하니까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실수했어요. 미안해요. 진지하게 사과하곤 슬그머니 빠져준다. 그러니까 정말로 둘만 남았다. 원우와 민규만.

 

침묵만 계속되다가 그나마 술이 좀 돌고 나니까 말할 용기가 생겼다. 그래도 내가 형인데, 뭐라도 먼저 말해야지 싶다. 이렇게 술만 마시면서 시간이나 죽이자고 마주 앉은 건 아니니까.

 

“잘 지냈어?”

“그냥, 뭐…. 집엔 별일 없어?”

“맨날 똑같지.”

 

안부를 주고받고 나니 다시 침묵이다. 정말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으면서 둘 다 꺼내진 못했다.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 이 어색함이 어디서부터 시작한 것인지 따져보게 된다.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좀 덜 어색했을까? 두 분이 재혼하자마자 독립해서 일 년에 한두 번 겨우 볼까 말까 한 동생을, 금요일 밤 게이바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좀 반가웠을까?

 

“어쩌다 왔어?”

 

골몰하고 있는데 민규가 문득 물었다. 응? 질문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가 아, 하고 깨달았다. 어쩌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건지, 잠깐 고민하게 됐다.

 

“나는 이쪽이야.”

“…….”

 

고민하는 동안 민규가 먼저 밝힌다. 아빠한테는 아직 말 못했지만. 굳이 덧붙이는 건 원우 역시 알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기도 했다. 고민이 더더욱 깊어진다. 나는 그쪽은 아닌데 그냥 친구 따라 왔다고 거짓말을 해서 민규를 안심시키고 상황을 무마하는 게 나은 건지, 나도 그쪽이고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걸 솔직히 털어놓고 동질감을 느끼면서 비밀을 공유하는 게 나은 건지. 저울이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한다. 뭐가 더 좋은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나도 그래.”

“…큰일 났네.”

 

솔직해지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거짓말은 천성에 맞지 않았다. 헛웃음을 터트린 민규가 잔을 들어서, 원우도 잔을 들었다. 건배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건배를 했다. 딱딱한 소리를 내며 잔이 부딪치고 차가운 술이 넘쳐 흘렀다.

 

“너 곧 생일이잖아?”

 

제일 중요한 대화를 마쳤으니 그건 더이상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 거실 달력에 표시되어 있던 게 떠올라 묻자 그치. 하고 민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올 거야? 원우의 물음에 민규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이유를 설명해주진 않는다. 젓가락으로 뻥튀기만 부수고 있다. 또다시 침묵.

 

“형은 왜 그렇게 됐어?”

 

한참 조용하더니 문득 눈을 들어 원우를 바라보았다. 뾰족한 눈매. 웃는 얼굴을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한 건 이 무심한 표정이 익숙해서 그랬다. 새아빠의 아들이고 이제 네 동생이 될 거라고, 엄마가 소개해주던 날에도 이런 표정이었다. 표정이 없는 얼굴. 원우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더니,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결혼 준비를 하는 동안 몇 번을 더 만났고, 결혼식 전에 이미 한집에서 살게 됐지만 뭐가 달라지진 않았다. 의식적으로 친절한 대화들만 조금 나누곤 했다. 의식적으로 친한 형제. 의식적인 따뜻함이 가득한 가족이었다. 그러다 민규가 독립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모두가 회피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으니 어느 누구도 그걸 말릴 수는 없었다. 

 

왜 그렇게 됐냐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원우는 다시 고민에 빠지게 됐다. 성향을 깨닫고 인정하는 데에 어떤 이유가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그런 게 아닐까 의심하다 확신이 생겼고, 인정하게 됐고.

 

“그냥, 어쩌다 보니.”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대답하니까 민규가 또 헛웃음을 흘렸다. 넌 왜 그렇게 됐는데? 똑같은 질문을 던지자 미간이 슬쩍 구겨진다.

 

“결혼 같은 거 하기 싫어서.”

결혼하기 싫어서 한 선택이라기엔 너무 극단적이다. 물론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난 가 봐야겠다.”

 

시계도 보지 않고 시간이 다 된 것처럼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민규도 따라서 일어났다. 집으로 가?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택시 타고 가. 하면서 지갑을 꺼낸다. 나도 돈 있어. 제 지갑을 꺼내서 보여주려다가, 가방을 두고 온 게 이제야 떠올랐다. 지갑은 그 안에 있다. 다시 가기도, 누군가에게 가져다 달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뜨거운 밤 보내라고 난리 치던 놈들에게 상황설명을 하고 싶진 않았다. 우선 나가자.

 

민규가 계산을 하고 나란히 가게를 나섰다. 지갑이 없다는 걸 눈치챘는지 별말 않고 지갑을 닫기 전에 지폐 몇 장을 꺼내서 원우에게 건네준다. 택시 타. 이 시간엔 버스도 없어.

 

택시가 많이 다니는 큰길까지 같이 걸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걷기만 했다. 큰길에 닿자마자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았고, 들어가. 갈게. 하는 짧은 인사를 주고받고선 택시 문을 닫았다. 목적지를 말하고 나니 갑자기 흘러내리는 것처럼 기운이 빠진다. 마주 앉은 시간은 겨우 한 시간 남짓인데 까마득하게 오래된 기분이다. 차창을 지나치는 도시를 바라보며 뒤엉킨 생각들을 하나씩 풀어가기 시작했다.

 

독립해서 거의 연락도 되지 않는 동생을 만났다. 금요일 밤 게이바에서. 결혼하기 싫어서 게이가 됐다고 한다. 부모님에게는 비밀. 뒤늦게 헛웃음이 터진다. 동생이 생긴다고 했을 때 막연히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쟤는 결혼을 하겠지. 쟤는 우리 엄마한테 손주를 안겨주겠지. 

 

전부 틀렸네.

 

 

 

 

 

 

 

 

 

 

 

 

Blurred lines

 

 

 

 

 

 

 

 

 

 

 

 

주말엔 내내 쉬었다. 딱히 체력적으로 힘든 일도 없었는데 그냥 기운이 없어서 그랬다. 딱히 밥 생각도 없어서 종일 침대에 누워있다가 엄마가 두 번 세 번 불러서 마지못해 저녁 식탁에는 앉았다. 아버지는 모임이 있다고 했다. 엄마랑 단둘이 밥을 먹는 건 오랜만이었다.

 

“너 혹시, 민규랑 연락해?”

“어?”

 

기계적으로 젓가락을 움직이다 눈이 동그래져서 엄마를 바라보았다. 민규, 다다음주에 생일이잖아. 엄마로선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한데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지 괜히 짜증을 냈다. 집에도 안 오는 거 뭐하러 챙겨줘? 원우의 말에 엄마가 눈을 흘긴다. 하나뿐인 동생인데 챙겨주는 척이라도 좀 해. 뭐라고 대꾸를 하고 싶은데 어떤 말이든 목 안쪽에서 걸리고 말았다. 생일에 별일 없음 집에 오라구 문자라도 한번 해 봐봐. 엄마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도로 침대로 돌아와 핸드폰을 가져왔다. 의식적으로 친한 형제일 때 받았던 민규의 번호는 여전히 저장되어 있다. 민규. 간결하게 적어둔 이름을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문자 보내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망설이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선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가 말한 그대로. 생일에 별일 없으면 집에 오라고 엄마가 그러시네. 전송되는 것까지 보곤 핸드폰을 내렸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뭐가 딱히 손에 잡히지 않아서 게임도 하고 책도 읽고 그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지이잉, 지이잉. 어디선가 핸드폰이 계속 진동해서 반쯤 깼다.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 귓가로 가져왔다. 여보세요. 졸음이 잔뜩 묻어서 먹먹한 목소리로 받자 잤어? 하고 너머에서 묻는다. 어, 잤어. 대답을 하며 억지로 떴던 눈을 다시 감았다. 이불 속으로 파묻히다 문득 정신이 든다. 낯선 목소리.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민규. 이름을 확인하고 나니 눈이 커다래졌다. 무슨, 무슨 일이야? 당황스러워서 말을 다 더듬게 됐다. 문자 보냈길래. 문자를 봤으면 답장을 하면 되지, 그건 통화의 이유로는 불충분했다. 밖이야? 주위가 시끄러운 것 같아 묻자 어. 하고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다.

 

- 자다 깬 거 같은데 다시 자. 집에 가는 건 좀 생각해볼게.

“……그래….”

 

끊는다. 짤막하게 말하곤 이내 통화가 끊어졌다. 정말로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야? 화면이 까맣게 꺼지고서도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전원우우. 월요일 오전, 캠퍼스 정문을 지나는데 뒤에서부터 어깨를 감아온다. 무게를 실어 매달리는 통에 몸이 다 휘청였다. 재미 좋았냐? 귓가에 속삭이는 물음에 뭔 소리야, 하고 밀어냈다. 금요일 밤에. 지들 멋대로 상상하고선 원우를 추궁한다.

 

“그런 거 아니야.”

“뭐가 그런 게 아냐. 너 김민규랑 나갔다며.”

 

민규의 이름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어떻게 알아? 원우의 물음에 뭘 어떻게 알아. 하고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한다. 요새 김민규 모르는 애가 어디 있냐? 걔 완전 죽인다며. 저질스러운 얘기가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다. 그런 거 아니라고. 아직 제 어깨를 감싸고 있는 팔을 밀어내곤 걸음을 옮겼다.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뭐야, 안 잤어?”

 

금세 따라잡고선 물었다. 아, 좀. 신경질을 내니까 의아한 눈으로 원우를 살핀다. 걔랑 무슨 일 있었어? 걔가 뭐 너한테 어떻게 했어?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손을 휘저어 그만하라는 표시를 했다. 걔 얘기 하지마. 그리고 나 한동안은 놀러 못 나갈 것 같아. 이어지는 선언에 눈이 커다래져서는 원우의 앞을 막아선다. 야, 솔직히 말해.

 

“김민규가 너한테 무슨 짓 했어?”

“아무 짓도 안 했어.”

“아무 짓도 안 해서 그래?”

“무슨 개소리야.”

“아니, 그렇게 나갔으면 당연히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데, 안 해서 그렇냐구.”

“아, 됐어. 그만 말해.”

“걔 텀이야? 벗고 나니까 넣어 달래?”

“미친놈아.”

 

냅두면 끝도 없이 떠들 기세라 정강이를 걷어찼더니 악! 캠퍼스가 울리도록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는다. 너 다른 애들한테 개소리 하지 마라, 알았어? 주저앉아 있는 머리 위로 차갑게 말하고선 걸음을 옮겼다. 야, 그냥 가냐! 뒤에서 소리치는 건 못 들은 척했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당장 삼십 분 후부터 단체창에 불이 난다. 전원우 금요일에 김민규랑 나간 거였어? 와글거리는 게 싫어서 창을 나갔더니 금세 다시 불러들인다. 짜증 나게. 대화창 자체를 차단을 박아버리고 나니까 이제 개인창으로 난리다. 진짜 김민규야? 김민규 어때? 얼굴값 하냐?

 

차단을 하다 하다 귀찮아서 메신저 어플 자체를 삭제해 버렸다. 짜증 나게. 강의고 뭐고, 기분이 왜 이렇게 더러운지 모를 일이다.

 

그랬더니 아예 죽치고 원우만 기다린 모양인지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건물을 나서다 현관에서 바로 붙잡혔다. 썰 좀 풀어 봐. 김민규 후기 좀 듣자. 둘러싸고 지랄들을 한다. 너네 나 다신 안 보고 싶냐? 너무 화가 나니까 오히려 차게 가라앉게 된다. 나지막이 묻자 다들 슬그머니 물러나 줬다. 왜 화가 나는지도 모르면서 잔뜩 화가 난 채로 캠퍼스를 빠져나갔다.

 

집으로 향하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황당하다.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지? 원우의 가정사를 아는 친구들이다. 재혼으로 없던 남동생이 생겼고, 걘 따로 산다는 것까진 얘기했었다. 그게 김민규고, 그런 데에서 만난 건 여러 가지로 복잡한 사안이니 둘이 얘기를 좀 했다. 그렇게 말했음 그냥 끝나는 일이었다. 그럼 더이상 아무도 원우에게 민규 얘기를 하지는 않았을 텐데 다들 오해하게 뭘 그렇게까지 화를 냈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해져서 괜히 툭, 툭, 이마를 창에 부딪쳤다.

 

 

 

 

 

 

 

 

 

 

 

 

민규. 이미 여러 개의 수신전화에 떠밀려 목록의 아래쪽까지 내려갔는데 일부러 찾아서 보게 된다. 민규. 어젯밤 짧은 통화시간. 이게 왜 이렇게 자꾸 눈에 밟히는지 모를 일이다. 이상해. 점점 더 알 수 없는 기분이 되는 것 같아 일부러 핸드폰을 멀리 밀어두었다.

 

뒤척거리다 겨우 잠이 들었는데 지이잉, 지이잉. 핸드폰이 진동했다. 곁을 한참 동안 더듬어 핸드폰을 가져왔다. 수신을 알리는 화면이 지나치게 밝아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꾹 감은 채 손등으로 몇 번 문지르고 천천히 다시 떴다. 핸드폰은 내내 손안에서 진동했다. 겨우겨우 눈을 뜨고 발신자를 봤다.

 

민규. 순간 잠이 다 달아난다. 벌떡 일어나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민규야. 대답을 하고서 시계를 봤다. 새벽 세 시가 넘었다. 잤어? 어제와 똑같은 질문을 한다. 그리고 똑같이 시끄러운 주변.

 

“밖이야?”

- 나 지갑 잃어버린 거 같아.

“뭐?”

- 아무리 찾아도 없어. 집에 가야 하는데.

“…….”

 

말투가 미묘하게 늘어진다. 또박또박 말하려고 애쓰는 게 느껴졌다. 취했어? 말하면서 원우는 다시 한 번 시계를 보았다. 세 시가 넘었다. 어, 좀. 들키니까 순순히 인정한다. 어디서 없어졌는지 모르겠어. 인정하자마자 발음이 잔뜩 풀어진다.

 

“…어디야?”

 

지갑이 없어졌다는 걸 보고하려고 전화한 건 아닐 거다. 김민규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더니 막상 이런 상황에선 도움을 청할 데가 없는 건가, 하고 생각하니 한숨이 다 나온다. 갈게, 어디야? 침대에서 내려왔다. 여기가 어디냐면. 주변에 있는 제일 큰 건물을 얘기한다. 아는 곳이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거기 있어. 알았지. 바쁘게 전화를 끊었다.

 

택시에서 내리기 전부터 보인다. 도로에 가깝게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민규. 바로 앞에 택시를 세우고 문을 열자 옆으로 비키다 택시에서 내리는 원우를 보고선 담배부터 끈다. 진짜 왔네. 별로 기대를 안 했다는 말투다. 그럼 가짜로 와? 말하면서 무심코 내려다본 민규의 발치에 짓이긴 담배가 여러 개 흩어져 있었다.

 

“이럴 때 택시비 빌릴 친구도 없어?”

 

짐짓 형 같은 소리를 해 본다. 저 멀리 정지 신호에 멈춰 있는 빈 택시를 발견하곤 손을 드는데, 민규가 손목을 잡아 내렸다. 왜, 집에 가기 싫어? 술버릇이 이런 건가 싶어 돌아보자 눈이 마주친다. 취했다더니, 술기운이라곤 하나도 없는 눈매.

 

“택시 안 타도 돼.”

 

그리고선 먼저 걸음을 옮긴다. 따라오라는 듯이. 몇 걸음 멀어지더니 이내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목적지도, 목적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선. 얼마간 떨어진 채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냥 갈 거야?”

 

한참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다. 순간 숨이 다 멎는 기분이다. 그냥 가지 말라는 얼굴을 하고선 선택을 원우에게 미룬다. 너 많이 취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차도로 내려선다. 손을 뻗어 택시를 잡곤 뒤쪽 문을 열고 원우를 다시 바라본다.

 

“가, 늦었다.”

“…….”

 

아무것도 안 했는데 숨이 찬다. 어느 순간부터 심장이 너무 뛰어서 그런 모양이다. 모든 게 너무 명확해서 외면해야만 했다. 그래, 갈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열어준 문 대신 조수석 문을 열었다. 너도 조심히 가고. 몸을 숙여 안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건넸다. 연락해. 문을 닫자 곧 뒤쪽 문도 닫힌다. 쾅. 차체가 흔들릴 정도로 세게 닫은 탓에 귓가가 다 멍해졌다. 차가 출발하고서야 길게 숨을 뱉을 수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하던 얼굴이 머릿속에 완전히 박혀서 점점 더 과장되고 왜곡되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많은 말을 했다.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매엔 분명히 무언가 일렁였다. 택시를 잡기 전에 한숨을 쉬었던가? 문을 닫기 전에 그랬던가? 사실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랬던 것 같다고 떠올린다. 발치에 짓이겨진 담배들.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 같으면서도 전부 여지를 남겼던 것 같다.

 

미쳤어. 강의를 듣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버스에서도, 자기 전에도, 몇 번이나 얼굴을 다 가리고선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미쳤어. 전원우 미쳤어…. 미치면 안 된다는 최면이었고, ‘여지’ 같은 단어를 떠올리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였다.

 

두 번째 통화마저 목록에서 가장 아래까지 내려가 버렸다. 한 번의 통화만 더 한다면 아예 사라져 버린다. 그만큼 수신통화가 쌓이는 며칠 동안 민규에게선 전화가 오지 않았다. 한 번의 통화만 더 하면, 이 두 글자는 목록에서 아예 사라져 버린다.

 

미친 것 같은 기분을 지우고 싶었다. 나가서 놀지 않겠다고 선언한 게 무색하게 금요일 밤엔 친구들을 찾아갔다. 생각 없이 놀았다. 그러니까 좀, 잊어버리게 된다. 머릿속에 박혀있던 것들이 점점 희석되어 묽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 맞아, 그랬다.

 

 

 

 

 

 

 

 

 

 

 

많이 취해서 친구들에게 끌려 누군가의 집으로 왔다. 목이 말라 눈을 떠보니 좁은 방 안에 여럿이 뒤엉켜 자고 있었다. 물을 좀 마셨으면 좋겠는데 일어날 기운이 없다. 몇 시나 됐지? 핸드폰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곁에서 자던 녀석이 뒤척이다 몸을 굴려 원우에게 팔다리를 감아왔다. 더워. 밀어내고 싶은데 생각만 그랬다. 끌어안는 대로 안겨서 다시 눈을 감았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바짝 가깝게 들려서 신경 쓰이는 것도 잠깐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다시 잠이 밀려온다.

 

이제 좀 일어나라며 흔들어 깨우는 손에 눈을 떴다. 해가 중천이라 사방이 환하다. 몇 시야? 아직 이불에 파묻힌 채 묻자 오후 두 시 넘었다. 하고 누군가 얘기해주었다. 내 핸드폰…. 오후 두 시라니. 엄마가 연락했을 게 뻔하다. 사방을 더듬자 옜다, 하고 누군가 얼굴 근처로 던져준다. 땡큐. 아직까지 잠이 덜 가신 눈가를 문지르곤 액정을 밝혔다. 잠금을 풀자 알림이 쏟아진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민규. 마지막으로 떴다가 금세 사라지는 알림메시지에 손이 다 멈췄다. 메시지. 다급히 아이콘을 누르고, 이름을 찾았다.

 

생일에 집에 갈게

 

몇 글자 되지도 않는 걸 두 번, 세 번 읽었다. 생일에. 집에.

 

 

 

 

 

 

 

 

 

 

 

 

엄마는 신이 난 눈치였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챙기는 민규의 생일이다. 아침 일찍부터 아버지에게 물어가며 민규가 좋아한다는 음식을 준비했다. 엄마가 부산을 떠는 탓에 원우 역시 일찍 일어났지만 오후까지 침대에 파묻혀 있었다. 생일. 토요일이라 핑계를 대고 나가기도 애매하다. 원우야, 잠깐만 나와 봐. 바깥에서 엄마가 크게 부른다. 원우야. 두 번째 부르는 데도 못 들은 척했다. 민규, 아니, 원우야. 머릿속에 민규 생각뿐인지 잘못 부르고선 깔깔 웃는다. 원우야, 아직도 자?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가서 케이크 좀 사와. 민규 초코케이크 좋아한대. 엄마의 말에 순순히 집을 나섰다. 빵집은 집 근처에도 있었지만 오래 걷고 싶어서 번화가까지 걸어갔다. 돌아오는 길엔 묵직한 초코케이크를 들고 또 한참을 걸었다. 걷다가 문득문득 숨이 차서 걸음을 멈춰야 했다. 미치겠다…. 한숨처럼 작게 내뱉고선 다시 걸었다. 도망갈 수는 없었다.

 

민규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왔다. 초인종이 울리자마자 엄마가 나가서 열어주었다. 민규 왔어? 친아들보다 더 반갑게 맞이해준다. 민규 키가 더 큰 거 같네. 살도 좀 빠졌어? 안으로 들어서는 내내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애를 쓴다. 키는 안 큰 거 같고 살은 좀 빠졌어요. 미지근하게 대답을 하며 뒤늦게 현관에 나선 원우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은 곧 원우의 뒤에 선 아버지에게 향했다.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하곤 자연스럽게 원우를 지나친다. 다 매끄럽다. 연습하고 온 것처럼.

 

저녁 식탁엔 민규의 안부에 관한 이야기만 계속됐다. 의식적인 따뜻함. 학교에 다니지 않는 민규는 아는 형과 함께 편집샵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오프라인 샵도, 온라인 샵도 매출이 좋아서 곧 규모를 늘릴 거라는 얘기. 형은 아직도 공부한다구 저러고 있는데 민규는 자기 앞가림을 다 하고 있네. 엄마는 일부러 원우를 깎아내리고 민규를 치켜세웠다. 공부 열심히 하는 게 낫지. 아버지가 원우의 편을 들어주고. 도저히 입맛이 돌지 않아 손장난처럼 젓가락을 움직이게 된다. 시선을 내리면 곁에 앉은 민규의 손이 보인다. 원우만큼이나 줄지 않는 그릇들.

 

생일 케이크 가져올까? 어느 정도 식사가 마무리되자 엄마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틈이 생기면 금세 어색함이 들어찰 것 같으니 더 바지런히 그랬다. 원우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 정리하는 걸 도왔다. 다 치운 식탁 위로 원우가 사온 케이크가 올라왔다. 커다랗고 묵직한 초코케이크. 나이에 맞게 초를 꽂고, 불을 붙이며 엄마가 형광등은 끌까? 하고 물었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위의 불을 끄자 어두운 가운데 가느다란 촛불만 여러 개 흔들렸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민규. 모두가 박수를 치며 축하 노래를 불렀다. 민규, 소원 빌어. 촛불에 어스름이 밝은 얼굴로 엄마가 두 손을 맞잡았다. 이제 조금만 더 장단을 맞춰주면 이 어색한 생일파티가 다 끝난다. 민규는 순순히 두 손을 기도하듯 마주 잡았다. 눈을 감길래, 원우도 눈을 감았다. 무슨 소원을 빌까. 가늠한다고 답을 알 수는 없었다.

 

촛불을 끄고 케이크를 나눠 먹었다. 식사와 디저트 타임까지 끝났으니 이제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됐다. 제 몫으로 덜어 온 케이크를 포크로 긁적이는데, 저…. 하고 문득 민규가 입을 열었다. 간다는 모양이다. 세 사람의 시선이 민규를 향했다.

 

“…자고 가도 돼요?”

“어?”

 

예상외의 질문에 하나같이 눈이 커다래졌다. 당연히, 당연히 되지. 엄마는 완전히 감격한 눈치였다. 근데 어디서 자야 하지? 민규는 집을 나갈 때 제 침대를 빼 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그랬었다. 주인이 없는 방은 은연중에 창고처럼 쓰이고 있었다. 철에 맞지 않는 옷가지들이 가득 차 있어서, 금방 치우긴 어려웠다.

 

“형이랑 같이 잘래?”

 

엄마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돌아보게 된다. 눈이 마주쳤다. 막연히 그러지 말아야 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못 하겠다. 형만 괜찮으면…. 눈을 마주한 채 민규가 말했다. 입안이 순식간에 메마른다. 또다시 원우에게 선택을 미룬다. 나는…. 말을 잊은 사람처럼 몇 글자 뱉기가 어렵다.

 

 “…나는 괜찮아.”

 

이게 무슨 뜻인지는, 원우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럴 의사가 있다고 반드시 실현되는 것만은 아니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정말로 그런 건 아니었다. 침대 아래에 두터운 이부자리를 깔고 따로 누웠다. 그래도 손님이니까, 민규에게 침대를 양보했다. 차례로 씻고 원우의 옷을 빌려 입고선 불을 끄고 누웠다. 완벽한 어둠과 완벽한 침묵. 이럴 거라면 거실에 나가서 자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침대를 등 뒤에 두고 돌아누워 쉽게 눈을 감지 못했다. 초침소리가 점점 더 커다래진다.

 

“요샌, 그쪽엔 안 와?”

 

어둠 속에서 문득 묻는다. 친구들과 진탕 논 이후론 일부러 가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마주치거나 혹은 남들이 말하는 이야기들을 듣게 될 것 같아서 그랬다. 응. 짤막하게 대답하자 왜? 하고 이유를 물었다. 나 때문이야? 먼저 답을 찾아내고 확인한다. 아니, 꼭 너 때문은 아니고. 몸을 좀 일으키는지 침대가 삐걱인다. 돌아볼 것 같아 눈을 더 꾹 감고 이불을 끌어올렸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주 오랫동안 느껴졌다. 차라리 빨리 잠 들고 싶다.

 

“만나는 사람 있어?”

 

또다시 질문한다. 자는 척을 하고 싶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없어? 침묵을 제멋대로 해석한다. 빨리 자. 다른 말을 하며 몸을 웅크려 이불 속으로 좀 더 파묻히자 짤막한 한숨을 내뱉는다. 다시 침묵. 고집스럽게 감은 눈꺼풀이 가끔 바르르 떨렸다. 청각이 자꾸만 예민해진다. 숨소리, 움직임. 모든 신경이 온통 등 뒤로 쏠렸다. 고집스럽게 돌아누운 탓에 한쪽 어깨가 다 아파왔다. 편두통이 올라 머리가 지끈거린다. 약이라도 찾아볼까. 생각만 그렇지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문득 침대가 크게 삐걱였다. 아예 바닥을 딛는 맨발의 소리. 원우는 그제야 눈을 떴다. 어둠에 익숙해져서 밝아진 시야에 민규가 움직이는 게 보인다. 옷장을 열더니 편하게 입으라고 준 티셔츠를 아래에서부터 끌어올려 벗는다. 뭐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집에 가야 할 것 같아서.”

 

걸어두었던 제 옷을 꺼낸다. 왜? 질문은 입안에 고였다. 정적 속에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몇 번 쓸어넘기더니 방을 나선다. 갈게. 부모님이 깨실까 싶은지 조용히 인사를 하곤 문을 열었다. 잠깐만. 그제야 쫓아가게 된다.

 

“자고 간다며.”

 

현관까지 쫓아가자 센서 등이 밝게 켜진다. 환한 불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민규가 원우를 돌아보았다.

 

“잘 마음 없잖아.”

“…….”

“나는 아냐.”

“…….”

 

새벽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든다. 민규는 과다하게 용감해졌다. 또다시 선택은 원우에게 미뤄졌다. 정적이 내려앉는 것과 반대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 사방이 다 아득해졌다. 수많은 것들이 뒤엉킨다. 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하고 싶은 모든 걸 하고 싶다. 

 

문득 센서 등이 꺼지며 사방이 어두워졌다. 낮은 한숨이 툭, 바닥으로 떨어진다. 민규야, 나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연 순간 어깨가 잡혔다. 당기는 대로 끌려가며 센서 등이 다시 켜진다. 환하게 밝아진 현관에서, 입술이 부딪쳤다. 입안을 헤집는 혀끝에 몸이 다 녹아내린다. 어깨를 잡은 손이 등허리를 안고, 마침내 몸이 바짝 달라붙고 만다. 여기서 이러면 안 돼. 젖은 소리가 좁은 공간에서 지나치게 크게 울렸다. 여기서 이러면 안 돼. 아무리 깊은 새벽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위험하다. 밀어내고 싶은데 생각처럼 되질 않는다. 자꾸만 흘러내려서, 겨우 민규를 붙잡고 매달렸다. 타액이 섞이고 숨이 찬다. 몸이 부푼다. 맞닿은 아래가 조금씩 단단해졌다. 숨이 모자라서 겨우 밀어냈다. 여전히 환하게 밝은 현관. 비좁은 공간의 차가운 타일을 밟은 채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뜨겁고 가쁜 숨소리만 가득 찼다. 밀어내려면 지금이었다. 유일한 타이밍이다. 아직 이성이 있을 때.

 

등허리를 안고 있던 손이 그대로 미끄러져 엉덩이를 쥐었다. 아. 움켜쥐는 악력에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지고 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혀가 섞인다. 유일한 기회가 날아갔다. 그만, 그만. 허벅지 아래를 받쳐 들어 올리는 손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단단해진 성기가 몇 겹의 섬유를 두고 완전히 달라붙었다. 노골적으로 비벼대는 아래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만…. 여전히 현관은 밝고, 타일은 차갑다. 형체를 알 수 없게 뭉그러진 이성을 겨우 가다듬어 민규의 어깨를 잡았다. 민규야. 금세 다시 달려들 맹수의 눈을 하고선 원우를 마주 본다.

 

“…….”

 

수많은 말이 입안을 맴돈다. 그만해. 더 해줘. 들어가자. 그만 가. 실수야. 진심이야. 사방이 자꾸만 아득해진다. 새벽의 탓인지 접촉의 탓인지, 모든 게 흐릿하게.

 

“…같이 가….”

 

하지만 여기선 안 된다. 그게 마지막 이성적인 판단이다. 민규가 손목을 꽉 잡아온다. 나 옷 좀. 이런 차림으로는 나가고 싶지 않은데 민규가 고개를 저었다. 편한 차림에, 슬리퍼를 겨우 신고, 민규가 연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건조한 새벽의 한기와 다르게 원우의 손목을 꽉 잡은 손바닥은 뜨겁고 습했다. 가자. 민규가 가볍게 잡아당기자 손쉽게 끌려가고 만다. 문턱을 밟고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