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우리의 결혼식엔 부케 대신 핫도그를 (1)
2021. 2. 16. 20:52

 

 

“얘들아 안,”

“선배!”

“김민규 너 뭐야?”

“……뭐가.”

“말도 없이 휴학 때리고 잠수탄 결과가 초록창 메인에 걸리기?”

“아 그게…… 나 다음주에 사인회 한다. 심심하면 오던지.”

“사인회는 지랄, 그거 진짜인지 구라인지만 말해라.”

“구라 아니거든. 인터뷰만 몇 갠데.”

 

소파에 가방을 채 내려놓기도 전에 동방이 뒤집어졌다. 정신 없는 나날을 보낸 탓에 언제 했는지 기억도 안나는 인터뷰 속 방글방글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들이밀며 이게 진짜냐고 묻는 애, 내가 잠수탄 사이에 핫도그 맛이 개밥 맛으로 변했다는 애, 동아리 부원 모집 포스터를 가져와 지금 당장 다시 뽑아오겠다며 방방 뛰는 애.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는 내 얼굴이 느끼하게 쪼개고 있다. 

 

‘오곡대 최고의 동아리 식품연구부! 187 꽃미남 회장과 함께하는 즐거운 식사! 어서오세요!’

“멘트 마음에 드네. 근데 뭘 다시 뽑겠다는 거야?”

 

이렇게 물으니 커다랗게 적힌 꽃미남 회장 밑의 작은 문구를 가리킨다. 선배님 안 오셔서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적었단 말이에요. 졸업하기 전엔 반드시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돌아와 주셔서 전 정말 만감이 교차한다구요. 다시 핫도그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랑, 포스터 수정해서 다시 뽑아야 한다는 귀찮음이랑.

 

“그냥 매직으로 지워 버리고 옆에다 적어. 회장님 여기 눌러앉을 예정이라고.”

 

네 그럴게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매직을 찾으러 총총 뛰어가는 후배를 뒤로하고 동방에 가득 쌓여 있던 핫도그 포장지를 치우던 동기가 다짜고짜 물어 왔다. 학교 다니면서도 충분히 글 쓸 수 있었을 텐데 왜 연락도 다 씹고 잠수 탔냐.닳아 없어질 것 같으니까 그만 좀 쳐다보라 말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가뜩이나 쓸모없는 동아리라고 소문 다 났는데. 선배 얼굴 하나만 믿고 지금까지 살아온 거 잊지 마요. 벌써 신입생 몇 명 넘어왔어요. 다시는 잠수 안 탄다고 약속해요.”

“알았어, 알았다고. 다 말해주면 될 거 아니야.”

“그래서 왜 잠수 탔는지 다 불어라.”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다들 잘 들어. 그러니까 나 김민규가 왜 갑자기 학교 때려치고 책을 썼는데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인터뷰를 하고 사인회를 여냐면, 사실 그게 그렇게 잘 팔릴 거라고는 나도 예상 못 했으니까 베스트셀러 얘기는 넘어가고. 처음으로 돌아가서 어쩌다 말도 없이 휴학을 했는지부터 하나하나 다 말해 준다. 책 가져왔으니까 받아. 읽으면서 들어. 그 전에,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야, 너네.”

“……네, 선배님.”

“이 얘기를 꺼낼 때마다 꼭 하는 질문이 있는데.”

 

너네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떻게 할래. 만약 그것들이 우리 곁에 살고 있었다면, 그리고 마주쳤다면?

 

 

 

우리의 결혼식엔 부케 대신 핫도그를 (1)

Written by OZ

 

 

 

그러니까, 내가 어쩌다 휴학을 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려면 일단 2년 전 여름으로 돌아가야 한다. 2학년 여름의 어느 밤, 나는 평소처럼 핫도그를 사서 자취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 핫도그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내가 만든 오곡대 최고의 동아리 얘기부터 해야겠다. 사실 나는 전국의 모든 핫도그를 먹어보는 게 꿈이다. 핫도그를 같이 먹어줄 사람들이 필요해서 동아리를 만든 거다. 전국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혼자 있으면 외로울 게 뻔하니까. 처음 한 명을 데려오니 나머지 동료를 모으는 건 쉬웠다. 동아리 포스터를 보면 알겠지만, 내가 봐도 정말 잘생긴 얼굴 덕분이다. 동아리 이름이 식품연구부인 이유는 좀 멋있어 보임을 위해서다. 동아리 이름을 핫도그라고 지으면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핫도그 먹으러 다니는 동아리임을 학교의 모두가 알게 되었고 ‘오곡대 최고의 쓸데없고 이상한 동아리’ 타이틀을 얻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자취방으로 돌아가던 이야기를 하면, 그날 나는 평소보다 기분이 좋았다.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며 핫도그 하나를 서비스로 더 주셨기 때문이었다. 못 본 새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으니 많이 먹고 건강해야 내 기분이 좋다는 말은 덤으로. 설탕 케첩 듬뿍 뿌리고 돌아서며 했던 말도 전부 기억난다. 분명 핫도그 많이 사먹고 토실토실해지겠다고 했다.하나는 손에 들고 나머지 하나는 봉지에 넣어 폴짝폴짝 뛰어가고 있었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핫도그를 도둑맞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설탕 위에 뿌렸던 케첩을.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 허전해진 핫도그를 보면서 그날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알만 도르륵 굴렸더랬다. 봉지에 넣은 서비스 덕에 우울해지는 일은 면했지만, 나는 잠을 설쳤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을 포함한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느라. 명탐정 코난도 아니고, 정말 괴도 키드가 세상에 있나?

 

그 다음 날은 조별과제를 마무리하느라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포장마차 옆을 지나갔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동방에서 세 개를 해치우고 돌아오는 길이었으니까. 피곤에 쩔은 걸음걸이는 이미 오징어가 되기 직전의 상태였다. 그러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것은 막 편의점 옆을 지나칠 때였는데, 까만 옷의 마른 남자가 담벼락에 쪼그려 앉아 나를 불렀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저기요……”

“네? 저요?”

“저 좀…… 살려 주세요……”

 

살려 달라고? 나 김민규 성격 상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지나칠 수는 없지. 그 남자를 도와주자 마음 먹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어디가 아픈지 알 수가 없으니 일단 원활한 대화를 하고픈 마음에 살며시 남자의 손목을 잡았는데, 이상할 만큼 차가웠다. 심각한 저체온증인줄 알고 무작정 남자를 등에 업었는데, 난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 밤 편의점 옆에서 만난 남자를 도와준 것을 나는 몇 주를 두고두고 후회했다.

 

“저기요, 그쪽 몸이 너무 차가운데요. 일단 가까운 응급실로 갈게요. 알겠죠?”

“……안돼……”

“네? 뭐라고요?”

“병원…… 가면 큰일 난다고……”

“아 그럼 어디로 가라고요!” 

“병원은…… 안돼……”

“아니 그러니까 왜요? 저기요? 저기요? 야!”

 

남자는 ‘병원은 안 돼’만 연신 남발하다 내 등에서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아니, 몸이 이렇게 차가운데 병원이 안 되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나에겐 아주 뻔한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 병원은 죽어도 안 된다는 남자의 말을 개무시 하고 응급실에 데려다 놓는 것, 두 번째는 남자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것. 아까 몇 주를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말했듯이 나는 남자를 집에 들였다. 사실 집까지 데려와 소파에 눕혀 놓고는 혼자 당황한 탓에 잘 기억나진 않지만, 그때의 나는 체온이 올라가면 눈을 뜰 거란 생각에 무작정 보일러를 켜고 나는 부채 하나로 버텼던 것 같다. 한여름이었는데도. (낯빛이 거의 백색이었던 것 같았는데.) 남자는 얼마 후 눈을 뜨긴 떴다. 세상 제일 빡친 표정으로.

 

“……뭐야, 더워……”

“일어나셨어요?”

“덥다고.”

“괜찮으세요?”

“너 때문이야.”

“네?”

“너 때문에 속이 뒤집어졌단 말이야.”

“저기요, 왜 초면에 반말이세요? 저도 억울하거든요? 생명의 은인에게 할 소린가.”

 

야, 누구 하나 불타 죽기 직전까지 만들어 놓고 생명의 은인 소리가 나와? 속이 뒤집어졌다는 남자는 배를 부여잡고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계속해서 짜증을 냈다. 슬슬 짜증이 올라와 그럼 약이라도 드려요? 진통제? 소화제? 화를 냈더니 그게 뭐냐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 나보고 어쩌라고. 그럼 속이 왜 뒤집어지셨는지 설명해 주시던가요. 나는 남자를 노려봤다.

 

“배고파.”

“근처에 편의점 있어요. 나가서 사 드세요.”

“거기에 피 있어?”

“피요? 피자는 있는 걸로 아는데요.”

“피자가 뭔데? 피야? 빨간 피?”

“피는 안 팔아요.”

“피 아니면 못 먹어. 피 줘.”

“……기다려 봐요.”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마침 냉장고에 엄마가 아들 몸보신 하라며 보내 준 선지가 있었다. 이거 국 끓여 먹으려고 아껴 둔 건데, 당신이 정말 의심스럽지만 일단 피 달리니까 주는 거에요. 피 달라고 장난 친 거면 진짜 쫓아낼 거니까 그리 알아요. 알았어요? 노려볼 때는 언제고 어느새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남자의 손에 선지를 쥐어 줬는데,

 

“미친, 먹네.”

 

순식간에 먹어치우고는 더 달라는 듯이 입맛을 다신다. 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제 아프지 않다며 활짝 웃기까지 했다. 나는 정말 마지막으로 물었다. 배 아픈 게 왜 제 잘못이죠? 지금은 왜 쌩쌩하죠? 기절했다 깨어나셔서 그런 건가요, 아님 방금 드신 선지 덕분인가요?

 

“네가 그런 걸 들고 가니까 헷갈린 거잖아.”

“그런 거요? 그게 뭔데요?”

“나도 몰라. 어제 네가 먹던 거 있잖아. 길쭉한 거 위에 피 묻은 거.”

“피......? 아, 그거 피 아니고 케첩인데요.”

“역시 피 아닐 줄 알았어. 내가 먹는 게 아니니까 배가 아픈 거였다구.”

“뺏어먹은 당신 잘못이지 저는 핫도그 들고 집에 가던 죄밖에 없거든요?”

“아니야! 난 정말 피 인줄 알았단 말이야.”

“이게 듣자 하니까 빡치네. 도대체 당신 뭔데 자꾸 피 타령인데요?”

 

나?

 

“사람 아니야. 뱀파이어야.”

 

1. 누군가 창백한 얼굴로 길거리에 앉아 있다면 조심하세요.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

 

 

 

내가 물었다. 그쪽 이름은 뭔데요. 그랬더니 남자가 태연한 얼굴로,

 

“드미트리.”

“헤일.”

“유우카.”

“알렉산드로스.”

“아 빡치네. 지금 나랑 장난 쳐요?”

“전원우.”

 

한국 이름, 전원우라고. 전, 원, 우. 어때, 이름 멋지지 않냐? 진짜 잘 지은 거 같단 말이야. 판타지 소설이나 웹툰에서 미지의 존재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기 때문에 이름이 여러 개라는 설정을 본 것도 같은데, 설정 아니고 진짜였구나. 알렉산드로스 존나 구려요 하려다가 말았다.

 

“이제 나가시지 그래요. 경찰 부르기 전에 당장.”

“일단 내 말 한 번만 들어 봐. 그 다음에 쫓아내면 안 될까?” 

“또 무슨 말을 하시려고요. 피 더 달라고요?”

“아니……”

 

전원우가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열고는 개미 더듬이 만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정말 내가 사람이 아닌 건 믿어 줬으면 좋겠어. 너랑 다르게 엄청 차갑고 케첩 먹었다고 기절하고. 이름도 여러 개인 데다가 어디 아픈 것 마냥 창백하잖아. 원한다면 송곳니도 보여 줄 수 있어. 응? 일단 막무가내로 병원은 안 된다고 한 건…… 인간은 무서워, 부모님이 그랬어. 병원엔 우릴 죽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무기가 많대, 그리고 우리랑은 안 어울리는 하얀 조명에 하얀 옷을 입고 다니잖아. 그래서 이렇게 된 거고…… 미안. 정말 가고 싶지 않았어. 인간이랑 가까이 지내면 안 된다고 배우기도 했고……

 

“인간이랑 가까이 지내는 게 안 되면 왜 여기에 온 건데요? 원래 어디 사는데?”

“산 속. 여기서 제일 높고 험한 산 아주아주 깊은 곳. 웬만한 사람은 절대 못 오는 곳이랄까? 우리 가족은 한국에 남은 몇 안 되는 뱀파이어 중 하나야. 아주 오래 전에 선조들이 인간에게 사냥을 당한 적이 있어서, 인간을 좋아하는 뱀파이어는 드물어. 그런데 내가 좀 유별났나 봐. 인간은 무서운데 재밌어. 사슴 피 같아. 묘하게 끌리는 그런 게 있단 말이야. 인간이랑 어울려 살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했는데, 이렇게 내려온 건 처음이고. 사실 집에 말 안 하고 내려온 거라서 여기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어. 집에 돌아가긴 너무 무서워. 나 며칠만 신세지면 안 될까?”

“그러다가 또 케첩 먹고 쓰러지려고?”

“에이, 내가 아직 어려서 변별력이 약해서 그래. 케첩 뺏어간 날에 난 건물 옥상에 있었는데, 멀리서 보니까 빨간색만 눈에 들어오더라.”

“몇 살인데요?”

“음…… 대충 200살.”

 

미친. 초면에 반말 찍찍 해댄 이유가 이거였구나. 근데 200살이 어린 거라고? 나도 모르게 의심이 가득한 눈을 해 버렸다. 그랬더니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우리 아빠는 내 두배보다 많을걸, 한다. 그럼 저기요, 아저씨, 전원우씨 중에 뭐로 불러야 하냐고 물었더니 형이란다. 형? 형은 무슨.

 

“사람 나이로 치면 너보다 한 살 많을걸. 그럼 형이지 뭐.”

“……하하.”

“그래서 나 여기 있어도 돼?”

“만약에 집에 가면 어떻게 되는데요?”

“대를 못 이을지도 모르지. 싹둑.”

“미친……”

 

그렇게 해서 나의 자취 인생 첫 번째 룸메이트는 같은 과 선배도,어릴 적 친구도 아닌 미지의 존재 그러니까 피 빼고 아무것도 못 먹는 뱀파이어가 되어 버렸다. 이게 내 휴학의 이유라고 보면 된다. 피를 못 먹으면 집에 있는 거 아무거나 주워 먹을 거고, 그래서 아프면 약도 안 들을 거고. 혹시나 자는 사이에 목덜미라도 물렸다가 나도 미지의 존재가 되어 버리면 큰일나니까.

 

자취방에서 지내는 것을 허락하자마자 전원우는 당연한 듯 냉장고를 열었다. 우리 엄마도 아니고 한 칸씩 눈이 빠질 것처럼 들여다보더니 대뜸 그런다. 내가 먹을 건 이게 다야?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니, 냉장고에 피 쌓아 놓고 먹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그리고 누가 선지 준다고 했어요? 그거 우리 엄마가 보내준 건데 당신이 다 먹겠다는 말이에요? 그랬더니 먹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선지 한 덩이를 더 집어 먹는다. 난 이런 거 아니면 못 산단 말이야. (우물우물)

 

밤새 전원우랑 뱀파이어 얘기를 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오래 전에는 인간에게 우호적이었지만, 갑작스런 사냥 때문에 아주 깊이 숨어 들어가거나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했다. 사촌이 영국에서 살고 있는데 미세먼지 때문에 죽어도 한국엔 안 올 거라고 했다나 뭐라나. 아무튼 사냥은 인간에 대한 증오를 낳았고 뱀파이어들은 대대로 인간을 가까이하지 말라고 교육 받아왔다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인간을 싫어하는 거라고 전원우는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정말 유별나다고 다시 강조했다. 인간은 재밌고, 너도 재밌어. 

 

“그럼 정말 산에서 안 내려와요?”

“가끔. 아---주 가끔 내려가. 잠도 많이 안 자고 화장실도 인간의 몇 배로 덜 가고. 그래도 옷은 입어야 하니까 사러 가. 그런데 그냥 가니까 어디 아프냐는 말을 많이 듣더라고. 그래서 가렸더니 수상하다 그러고. 비위 맞춰주는 건 솔직히 짜증나는 일이야.”

“그건 사람한테도 똑같아요.”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같이 살았던 건 다 이유가 있다니까.”

“왜 또 그렇게 흘러가요. 잠이나 자요 해 뜨겠네.”

“안 졸린데.”

“그럼 눈 감고 누워만 있던가요. 나 학교 가야 돼요.”

 

뜨는 해를 보고 나서야 잠든 탓일까 결국 세 시간도 못 잤다. 꼭 피곤한 날은 오전 수업이다. 아니, 피곤한 날에 오전 수업이 있는 게 아니라 오전 수업인 날 유난히 피곤하다는 소리다. 일찍 일어나야 하는 걸 알면서 꼭 전날에 딴짓을 하게 되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습성. 또 도졌네.

 

“아 왜 그러고 있어요!”

“왜 옆에서 소리가 나는데도 안 일어나고 그래. 깨울까 말까 고민하는 중이었어.”

 

눈을 떴는데 깜짝 놀랐다. 평소 같으면 천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와야 하는데, 천장 대신 전원우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기 때문이었다. 급성 심장마비로 저 세상 갈 수도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고맙게도 창백한 얼굴에서 느껴지는 냉기 덕분에 평소보다 일찍 침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때 새삼 느꼈는데, 왜 뱀파이어 영화에서 주인공 뱀파이어는 잘생긴 사람만 하는지 대충 감이 왔다. 사람 근처에 살았으면 나름 번호 엄청 따였을 얼굴인데. 가까이서 보니까 더 그렇고. (아니 지금 뭐라는 거야 내가?)

 

대충 아침을 먹기 위해 먹다 남은 밥 위에 계란프라이를 얹고 고추장을 꺼냈다. 가만히 지켜보던 전원우를 뒤로하고 고추장 뚜껑을 열어 한 숟갈을 뜨자마자…… 없어졌다.

 

“배 아파.”

“설마 고추장 먹은 거에요? 왜?”

“빨갛잖아.”

“빨갛다고 다 피가 아니라고요! 세상에 빨간 게 얼마나 많은데!!!”

 

아침부터 선지를 꺼내야 했다. 그게 명약이라나 뭐라나. 전원우 챙기랴 밥 먹으랴 허둥지둥대다가 결국 몇 숟갈 먹지도 못하고 집을 나서야 했다. 소파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전원우에게 나 없는 동안 제발 아무거나 꺼내 먹지 말라고 하긴 했는데, 학교에 있는 내내 불안했다. 혹시 온 집안을 풍비박산 내놓을까 봐 두려워 수업도 어떻게 들었는지도 모르겠고 낮술 하자는 동기의 제안도 거절했다. 그냥 수업이 끝나자마자 냅다 집으로 달려갔다. 딱히 전원우 걱정 때문은 아니고, 자취방이 월세였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기절이 아닌 폭주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그날 아싸를 자처하고 냅다 달려간 집은 다행히 평화로웠다. 뭐 하나 부서지는 일은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냉장고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전원우였다.

 

“또 선지 먹게요?”

“아니.”

“……미친.”

 

우리 집에 있던 모든 빨간 것들이 테이블 위에 줄을 서 있었다. 빨간 잉크, 초장, 고추장. 딸기시럽, 아침에 먹은 고추장, 선지, 먹다 남은 떡볶이, 빨간 물감…… 등등. 식량을 잔뜩 늘어놓고 흡족해 하던 전원우는 내가 집에 들어오던 순간 막 냉장고에 있던 마지막 빨간 것을 꺼내는 중이었는데, 뭔가 했더니 스트레스 받는 날에만 떡볶이에 넣어 먹으려고 샀던 캡사이신. 

 

“당장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놔요.”

“어이 인간, 나 굶어 죽으라는 거야? 선지 질려.”

“진짜 골로 가고 싶구나.”

 

그날은 고집 센 어린 뱀파이어에게서 빨간 것들을 빼앗기 위해 달려들었다가 아랫니 하나를 부러뜨린 날이었다.

 

2. 붉은색 액체를 보면 입에 넣으려고 할 수 있습니다. 각별한 주의를 요합니다. 사람의 약은 소용 없거든요.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