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뽀] 당신이 좋아지는 시간
2021. 2. 16. 20:51

 

 

" 민규야, 형이랑 내일 하루만 방송 시간 바꿀까? 형이 오늘 석식 방송하고, 넌 내일 아침 방송. 콜? "

  

 

콜은 개뿔. 오후 청소시간, 대뜸 저를 찾아와 눈을 빛내는 3학년 엔지니어장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민규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성의 없는 감사 인사와 함께 여자친구가 기다리고 있을 등나무 벤치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저 밉상 새끼, 대체 몇 번째야. 평소에도 베짱이처럼 놀고먹기로 유명했던 선배는 동아리 활동에서도 그 기질을 감추지 못했다. 교내 동아리 중에서도 선후배 사이의 예를 중요시 여기는 방송부의 막내 기수로 살아간다는 건, 이러한 선배의 갑질에도 찍소리 못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뛰다 존나 꼴사납게 넘어져서 여친이랑 헤어져라.

  

 

민규는 신이 난 개처럼 뛰어가는 선배의 뒤통수에 대고 유치한 저주를 퍼붓고 나서야 조금은 홀가분하다는 표정을 지어냈다. 아나운서와 작가가 필요 없는 클래식 방송. 그저 엔지니어가 방송실에서 클래식 모음을 재생 시키고 일지에 기록만 하면 끝나는 간단한 일이지만 민규는 땅이 꺼져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귀찮았고, 무엇보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었다. 평소에도 늦게 일어나는 탓에 지각이 잦았는데, 내일 역시 늦게 일어나면··· 방음이 잘 되기로 유명한 방송실 안에서 동기들까지 전부 신나게 욕을 먹을 거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민규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지웠다. 그래, 김민규. 네가 설마 늦게 일어나겠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 아찔한 생각 하지 말자. 일찍 일어 나면 되는 거야. 마인드 컨트롤에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던 민규는 제 짝꿍에게 모닝콜까지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날 아침. 민규는 간 밤에 설정해 둔 수많은 알람 중 마지막 알람이 울릴 때 눈을 떴다. 5분, 10분, 15분··· 부재중 0통. 모닝콜을 부탁했던 내가 바보지... 그나마 이런 사태를 대비하여 일찍부터 알람을 설정해둬서 다행이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킨 민규는 일찍 일어난 제 자신을 칭찬하면서도 틈틈이 엔지니어장의 욕을 곁들였다. 민규야, 그런 새끼 밑에서 엔지니어 한다고 고생이 많다... 오늘 하루도 파이팅, 잘 피해 다니자. 그렇게 사기 충전을 한 민규는 침대를 벗어나 등교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잘 다려진 교복을 입으니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다녀올게요. 다들 출근을 한 탓에 썰렁한 집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온 민규는 새로 장만한 에어팟을 꽂고 피부에 스치는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만끽했다. 버스 안도 한적 했고, 귓속을 파고드는 어느 가수의 신곡 역시 제 취향이었다. 시작이 좋은 하루인 만큼, 모든 게 잘 풀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 좋아지는 시간

  

 

  

 

  

 

" ... 아, 미친. "

  

 

교문에 들어선 민규는 곧장 방송실로 향하기 위해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다 손에 잡히는 게 없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내가 방송실 열쇠를 어디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열쇠를 자신의 마이 주머니에 넣어놨다는 것을 떠올려낸 민규가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봤을 때는 이미 온에어가 채 오 분도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일찍 등교를 하면 선도부를 맞닥뜨릴 일이 없다고 생각한 그가 교실 의자에 마이를 걸쳐놓고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 아, 진태성!! "

  

 

민규와 비슷한 시각에 등교를 하던 아이들은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3학년 베짱이의 이름에 놀라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았다. 모든 시선이 일제히 제게 꽂히거나 말거나, 흘러넘치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나 진짜 방송부 때려치운다. 내가 때려치우고 말지!! 씩씩대던 민규는 가방을 고쳐 매고 가장 높은 층에 있는 자신의 반을 향해 분노의 질주를 시작했다. 성큼성큼, 유독 많은 계단을 두세 칸씩 오르면서 다시 한 번 베짱이의 이름을 곱씹었다. 진태성... 진태성..., 이게 다 망할 위계질서로 인해 생겨난 일이다. 내가 진짜 올해만 방송부 하고, 헉, 그만 둘, 거야... 흐억... 차오르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가까스로 도착한 반의 문을 열고 제 자리에 놓인 마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찾았다...! 손에 잡힌 은빛 열쇠를 보며 뿌듯하게 웃던 민규가 방송실로 향하기 위해 한 걸음을 떼던 그 순간, 교실 앞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내가 방송실에 없는데, 음악이 왜 나와...? 눈치 없이 흘러나오는 클래식 선율 덕에 패닉에 빠진 민규는 멍하니 스피커를 쳐다보았다. 진태성이 날 위해 다른 대타를 구할 리는 없고... 오늘 순서 바꾼다고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그렇게 방송실에 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깊은 생각에 빠진 민규의 앞에 승관이 나타났다. 오, 김민규 방송한다고 일찍 나왔냐? 오늘따라 유독 빨리 등교한 승관에 민규는 감동한 듯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같은 동아리라고 의리 넘치게...! 네가 아침 방송 틀었구나...! 야 씨, 틀어줄 거면 말을 하지...! 괜히 일찍 왔네! 신이 난 듯 저를 들어 올려 이리저리 흔드는 민규를 보며 순식간에 짜증이 MAX를 찍은 승관이 그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악!! 갑자기 느껴지는 고통에 힘을 뺀 민규와 바닥에 패대기 쳐진 승관은 서로를 흘겨 보았다. 아침부터 돌았냐?!

  

 

" 친구를 위해 방송을 틀어준 착한 친구를 위해 애정표현 좀 해줬더니...! "

" 아오, 아파... 잠 덜 깼냐? 방송은 무슨! "

" 클래식 방송, 네가 틀었잖아. "

" 저거 나 아닌데? "

  

 

난 네가 아침 일찍 와서 한 줄 알았는데, 너 아니야? ··· 나도 아닌데. 등굣길에 방송부는 아무도 없었다. 현 시각, 엔지니어 민규와 작가 승관. 그들만이 교내에 존재하는 방송부원의 전부였다. 둘 사이에 흐르는 적막과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서늘함... 민규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승관을 향해 다급히 손을 내밀었다. 아까는 내가 정말 미안했다, 친구야. 같이 가자. 나 혼자서는 못 가.

  

 

" ... 혼자 갔다 와. 네 방송이지, 내 방송이냐? "

" 귀신이면 어떡해! "

"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냐? "

" 그러니까, 같이 가자고. "

  

 

... 나 큐시트 써야 돼 수고! 바닥에서 벌떡 일어난 승관에 의해 교실 밖으로 쫓겨나고, 탁― 닫히는 문과 함께 절망에 빠진 민규는 방송실을 향해 걸었다. 진짜 귀신이면 어쩌지...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나... 일단 무기를 챙겨...? 민규가 방송실에 가까워질수록, 온에어 램프의 빛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쫄지말자, 괜찮아 김민규. 귀신이 어디 있어. 심호흡과 함께 마인드컨트롤을 끝낸 민규가 방송실 문을 조심스레 열자, 아무도 없는 빈 방송실 안에는 클래식 음악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엄마, 나 진짜 무서워... 그래도 어쨌든 방송 일지에는 제 이름을 기록해야 했기에, 문틈으로 빼꼼 들여다보던 민규는 방송실 안으로 발을 한 발짝 내디뎠다.

  

 

" 일지 내가 썼는데. "

" 악!! "

  

 

제 등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민규는 그만 방송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손이 제멋대로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말간 얼굴은 민규를 향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 미안, 진짜 미안. 화장실 갔다 오는 사이에 누가 들어가길래, 장난치고 싶었어. "

" 아, 진짜!! "

" 와, 너 아까도 태성이 형 이름 막 부르던데. 초면인 사람한테도 화내는구나. "

" 아니, 지금 이 상황은― "

" 우리 처음 보는데, 곧 내 이름도 막 부르겠다? "

" ... 저기, "

" 아, 전원우!! 한 번만 해줘. "

" ... 저기요. "

" 그나저나... 너, 목소리 좋다. "

  

 

입안에 맴도는 동글동글한 이름과의 첫 만남이었다.

  

 

  

 

  

 

/

그저 방송실 문을 따고 들어간 대타쯤으로 생각했던 민규는 원우가 아나운서라는 사실을 알고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동아리 시간은 물론이고 아침 조회 시간까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그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감출 수 없었던 민규는 얼마 뒤, 점심시간에 흘러나오는 목소리와 원우의 목소리가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중에 만난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형이 점심 방송해요?

응, 왜?

  

 

원우의 대답에 민규는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진짜 만나고 싶었는데... 한창 동아리 선택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귓가에 파고들던 낮고 느긋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민규의 심장을 저격하기에 충분했다. 야, 얼굴도 모르는데 목소리만으로 반할 수 있을까...? 이미 사랑에 빠졌다는 표정을 짓던 민규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승관을 꼬드겨 방송부에 들어오고, 그 뒤로 한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다니던 민규는 방송 부장 누나의 말을 듣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걔, 점심 방송 말고는 활동 거의 안 해. 텃밭 가꾸기에 꽂혀서. ' 동해 번쩍, 서해 번쩍. 그를 찾아갈 때마다 타이밍이 어긋나 만날 수 없었는데, 이렇게 친해지기까지 하다니... 심지어 최근에는 이뤄진 방송실 개편 덕에 원우가 진행하는 점심 방송의 엔지니어 자리를 꿰차게 되자, 민규는 한동안 나사가 빠진 사람 마냥 웃고 다녔다. 밥을 먹다가도 실실, 수업을 듣다가도 실실. 그런 민규를 바라보던 승관은 고개를 젓더니 민규에게 물었다. '너 원우 형 얼굴 몰랐을 때부터 좋아했잖아. 고백은 언제 하려고?' 

  

 

" 즌비해르. "

" ... 볼펜 좀 빼고 얘기해요, 형. "

" 후우, 준비하라고. 사연 들어온 거 가져오고. "

  

 

엉성하게 볼펜을 입에 물고 발음 연습하는 저 모습도 귀여워 보이는데, 이젠 진짜 고백을 해야 하나... 괜히 까여서 사이가 멀어지면 어쩌지... 근심은 깊어져 가고, 원우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마치 지금 쏟아내리는 사연 쪽지들처럼. 사랑에 눈 뜰 십 대들답게 대부분의 내용은 사랑 고백이었다. 2학년 아나운서 오빠 좋아해요··· 2학년 6반 전모 군 사랑해요··· 대부분 사연 속 주인공은 원우였다. 수많은 쪽지들을 걸러내면서도 민규는 언짢은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 목소리 좋고... 얼굴도... 진짜 이기적이다... 내 눈에만 예쁘면 좋을 텐데... 원우 몰래 그를 향한 고백들을 걸러내던 민규는, 누군가가 잘못 넣은 듯한 빈 종이를 발견했다. 잠시만..., 나도 사연 써서 고백을 하면 되는 거잖아? 힐끔, 제 앞에 앉은 원우의 눈치를 보던 민규는 빠르게 펜으로 사연을 적기 시작했다.

  

 

「 ㅈㅇㅇ가 너무 좋은데, 고민돼요.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ㅠㅠ - 익명 >< 」

  

 

슬쩍 채택된 사연 쪽으로 종이를 밀어 넣은 민규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욕설이 적힌 사연들을 걸러냈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어느 정도 사연 검열이 끝나자 재생목록에 신청곡들을 추가시키던 민규는 아까 사연을 쓸 때 신청곡을 깜빡하고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그, 형... 민규는 원우를 향해 쪽지를 흔들어 보였다. 이거, 신청곡이 없는데 어떡하죠?

  

 

" 음... 그거, 생방에서 즉석으로 선곡하면 틀어줄 수 있어? "

" 어... 네. "

  

 

혹시라도 잊을까, 큐시트에 '즉석 선곡'이라 표시를 해둔 민규는 어느덧 다가온 생방에 콘솔 앞으로 가 섰다. 형, 방송 1분 전. 민규의 목소리를 듣고 싱긋 웃어 보인 원우는 대본을 정리하고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3, 2, 1... 이내 교정에 울려 퍼지는 오프닝 시그널과 그의 목소리.

  

 

" 오늘 아침, 여러분들은 등굣길에 어떤 향을 맡으셨나요? 교복에서 나는 섬유 유연제 향, 차량 방향제 향... 저는 오늘 불어오는 가을 내음을 맡았습니다. 계절마다 느껴지는 특유의 내음들, 여러분들은 사계절 중 어떤 계절의 향을 좋아하시나요? "

  

 

이 시간은 민규가 하루 중 가장 조용해지는 시간이었다. 물론 방송 사고를 우려해 아무 말을 하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 동림고 방송국 '당신이 좋아지는 시간' 전원우 입니다. "

  

 

형이 라디오의 제목을 얘기할 때, 분명 저를 향해 말하는 것이 아닌데도 괜히 떨려와서. 민규는 몽롱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다음 곡을 틀었다.

  

 

  

 

  

 

/

어느덧 방송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마지막 사연입니다― 민규는 괜히 타들어가는 속에 생수를 들이켰다. 익명으로 적힌 쪽지를 읽어 내려가던 원우의 표정은 꽤나 심각해 보였다. 뭐지, 왜 저러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의 민규는 종이에 물음표를 그려 그를 향해 들어 보였다. 풉, 저도 모르게 터진 웃음소리에 원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입술을 깨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이게 비웃으려던 게 아니라, 앞에서 누가 방해하는 탓에... 아무도 못 본다고 저렇게 거짓말을 서슴없이― 괜히 억울해진 민규는 종이 한구석에 직선 두 개를 찍찍 그어 보이므로서 자신의 억울함을 표현했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충 고개를 끄덕인 원우는 입을 열었다.

  

 

" 음, 일단 부딛혀봐요. 마음 가는 대로. 그게 서툰 연애편지라도 괜찮고, 두서 없이 내뱉은 말이라도 괜찮아요. 마음을 전한다는 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니까. 괜히 '아, 창피하게 차이면 어쩌지?'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요. 창피함은 한순간이지만, 후회는 길게 남을 테니까··· "

  

 

내 말 맞죠, 민규야?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민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벙찐 상태로 원우를 바라보았다. 나? 갑자기? 눈을 끔뻑이는 민규를 보며 신청곡을 준비하라는 신호를 준 원우는 멘트를 이어갔다. 오늘의 끝 곡은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입니다.

  

 

" 지금까지 동림고 방송국, 당신이 좋아지는 시간의 전원우였습니다. 즐거운 오후 보내세요. "

  

 

음악의 볼륨을 높인 민규는 자리를 정리하는 원우를 향해 다가갔다. 형, 아까 나 진짜 놀랐어요. 방송 사고 난 줄 알고. 아무 말 않고 그저 싱긋 웃던 원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민규의 어깨를 토닥였다. 수고했어. 정리하고 가자. 저를 스쳐 지나가는 원우의 손목을 잡은 민규는 그를 멈춰 세웠다. 형, 오늘 학교 끝나고 뭐 하세요?

  

 

" 나? 야자 째고 피시방 갈 건데, 왜? "

" ... 같이 가실래요? 맛있는 거 쏠게요. "

" 진짜? 나야 좋지. "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원우를 마주 본 민규는 말을 덧붙였다. 이거... 그,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아니, 물론 연애하는 건 아닌데, 무조건 받아달라는 건 아니고요, 아니 그... 뭐가 그리도 무서운지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떨군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은 원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두서없네. 고개를 들어 올린 민규는 어리둥절한 듯 되물었다. 뭐가요?

  

 

" 너. 두서없다고. "

" ... 아. "

" 두서 없이 말하라고 했다고 진짜 그렇게 말하냐... "

  

 

당황한 민규는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게, 아까 그 사연 제가 쓴 거 아니거든요! 작게 한숨을 쉰 원우는 그를 지나쳐가 마이크 전원을 내렸다. 누가 너라고 했어? 괜히 발끈해서는... 콘솔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원우는 민규를 째려보았다. 김민규, 방송 끝나면 마무리 제대로 하라고 했지.

  

 

" ... 잠시만, 저, 마이크 안 껐어요? "

" ... 덜렁이도 이런 덜렁이가 없다 진짜. "

" 이거 방송 사고 맞죠. 헐, 형, 우리 어떡해요? "

" 뭘 어떡해. 반성문 쓰러 가야지. "

  

 

... 데이트는요? 이 와중에도 데이트 소리가 나와? 잔뜩 기죽어선 복도를 걷는 원우의 뒤를 따라나섰다. 괜히 제 실수로 기회가 날아갈까 안절부절하던 민규는 금세 들려오는 원우의 목소리에 활짝 웃었다.

  

 

" 너도, 야자 째. "

  

 

  

 

.

.

.

  

 

  

 

" 태성이한테 안 미안하냐? "

" 태성이 형도 도와준다고 한 거거든? "

  

 

청소시간, 사물함 위에 걸터앉아 발을 동동 구르던 원우를 보며 정한이 혀를 쯧, 찼다. 불쌍하네, 김민규... 원우의 책상 옆에 걸린 쇼핑백 안에는 잘게 찢긴 사연들이 한가득이었다. 뽑히지 않은 사연들은 파쇄기에 들어가야 마땅했지만, 저 가방에 모여있는 사연들은 좀 '특별' 하다.

  

 

' 1학년 김민규 좋아한다고 전해주세요♡ '

' 민규야 누나가 너 많이 아낀다 ㅠㅠㅠㅠㅠㅠ '

  

 

" 저건 언제 갖다 버리게? "

" 화날 때마다 찢으려고. "

" 그건 좀 심했다. "

" 어차피 파쇄기에 들어가도 갈려서 나올 텐데. "

" ... 그래서, 민규한테 고백은 언제 하려고? "

" 그래서, 내가 오늘 형을 우리 반으로 부른 거잖아. 딜 하자고. "

  

 

무슨 딜인데? 사물함에서 폴짝 뛰어내린 원우는 정한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민규 점심방송 주자, 콜? 형이 정희 누나한테 말해주면 되잖아. 헛웃음을 지은 정한은 원우의 손을 곱게 접어주었다. 윤정희를 내가 무슨 수로 이겨? 

  

 

" 누가 이기라고 했어? 말로 잘 타이르면 되는 거지. "

" 전원우 진짜... 김민규 꼬시겠다고 별 짓을 다한다... "

  

 

그래, 콜. 내가 윤정희한테 말해볼게. 졌다는 듯, 원우의 손을 감싸잡은 정한은 문득 궁금해졌다. 근데, 김민규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데? 같이 석식 방송할 땐 모르겠던데. 그의 물음에 잠시 지난 날을 떠올리던 원우는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 큰 애가 놀라서 기겁하는데, 그게 너무 귀여웠어. 날 찾겠다고 작은 텃밭에 서 있던 김민규도, 꽤나 귀여웠고. 그 모습이 귀여워서 몇 번은 일부러 숨어 있었는데··· 형, 이건 비밀이다? 김민규한테 절대 말하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