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가 불어닥쳤다. 매년 하락세를 거듭하는 기온에 사람들이 익숙해질 때 즈음이었을 거다. 야, 올해는 몇 도까지 떨어졌다고? 영하 20도? 와, 미쳤다. 내년에는 막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거 아니냐? 그러게 존나 에반데. 패딩 장사 존나 잘되겠다. 그냥 다들, 영 탐탁잖은 날씨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제 할 일을 했다. 평소와 같이.
"어느덧 4월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기온은 영하 40도 안팎을 유지하며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11월부터 계속해서 하락세를 보이던 기온은 현재 영하 46도애 달했습니다. 이는 지난달 최저기온인 영하 38도보다 5도 이상 떨어진 수치로···"
그해 겨울은 유난히 길고 추웠다. 다 돌려받는 게지. 할머니께선 그렇게 말씀하셨다. 갑작스럽게 닥친 기상 이변으로 전 세계 수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수십만 종의 동식물이 별종하는 동안 아무도 대책을 찾아내지 못했다. 신문에서는 매일같이 지구 멸망설에 대해 떠들어댔고, 뉴스에서는 매일같이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서로 제 탓이라며 싸우는 모습만 주구장창 틀어댔다. 그땐 다 거짓말 같았지··· 아마 다들 그랬을 게다. 할머니의 눈은 그 먼 옛날 어디쯤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현실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불어닥쳤다. 평균 기온 영하 70도, 전 세계의 기온이 북극에 가까울 정도로 떨어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간신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인류는 선택해야만 했다. 가만히 앉아서 종말을 기다릴 것인가, 대비책을 찾아낼 것인가. 그렇게 '신세계 프로젝트'가 탄생했다. 세계 1위 군수기업 신화에서 기획한, 거대한 방벽과 인공 하늘로 구성된, 기상 이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프로젝트.
"···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신세계 프로젝트'로 계획되었던 베타 시티 외벽에 추가로 3개의 구역을 설정하여···"
"예, 또··· A, B, C 세 개의 구역은 1에서 20까지의 세부 구역으로 분리해 관리할 수 있도록 하여···"
"외곽으로 갈수록 중심부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이상기후로부터 완벽하게 안전을 보장드리지는못할 것으로···"
"베타 시티를 제외한 세 개의 구역은 일반 시민들에게 추첨권을 통해 추첨하는 방식으로 구역을 배정하고··· 이주 당일 추첨권이 없는 경우 이주가 불가능하며···"
한정된 기술로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들은 공간을 늘리는 대신 안정성을 낮추기로 했다. 기존의 신세계 프로젝트로 구성한 '완벽하게 안전한' 베타 시티와 외곽의 세 구역. 거대한 장벽으로 구분 지어진 세 개의 구역은 중앙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원래의 목적을 잃었다. C구역은 실상,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의 추위라는 것만 제외하고는 외부와 똑같았다. 무슨 의미냐고? 베타 시티를 제외하고선 그냥 존나 살기 힘들다는 뜻이다. 죽을 정도만 아니라는 뜻이지.
'신세계 프로젝트'를 통해 완성된 새로운 세계. 사람들은 이곳을 낙원이라 칭했다. 스스로를 선택받은 자들이라 생각하면서, 마지막 구원이 된 신화 그룹에게 감사하면서.
신세계로부터
from new world,
上
"그게 가능할 것 같아?"
기어이 원우가 소리를 높였다. 김민규. 답답하게 네 의견만 주장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 말 좀 들어. 네가 잡히면 끝이야. 아무런 단서조차 남기면 안 되는, 그런 일이라고, 이게. 그럼에도 상대는 미동조차 없었다. 할 수 있다니까, 나. 나 혼자 할 수 있어. 평소 같았으면 이게 농담 같지도 않은 말을 한다며 한 대 때리고 말았을 테지만, 진중해 보이는 시선은 어딘가 묘하게 날 선 구석이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진심이야?"
그래, 결국 지고야 마는 건 원우였다. 애초에 민규가 시작한 일이었고, 민규의 말대로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큰 것 역시 당연지사였다. 제 친구를 믿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욱 보낼 수 없었다. 어떻게든 돌아올 걸 알아서. 설령 김민규 자신이 다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알잖아, 기회는 한 번뿐이야. 내가 농담이나 할 상황이 아니라고."
다녀올게. 그냥 애들이랑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신호 주면 터트리는 거 잊지 말고. 짓궂게 웃어 보이고선 손을 흔들어 보이는 민규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야. 사고 치지 말고. 덜렁거리지 말고. 너나 잘해. 원우의 말에 대강 알겠다고 답한 민규는 금세 골목길로 내달렸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 민규의 뒤로 알 수 없는 불안이 자리하는 것을 원우는 막을 수 없었다.
격변의 전조였다.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그러길 기원했다.
-
낡은 레코드판이 맞물려 소음을 냈다.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한동안 계속되더니 조금씩 섞여 나오던 노랫소리가 이내 제 자리를 찾았다. 그에 창문 아래로 펼쳐진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던 남자의 시선이 레코드판 위에 새겨진 글씨로 가닿았다. 드보르작, 멋진 신세계. 제2악장.
"이사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정 비서였다. 밤을 새기라도 했는지 영 피곤해 보이는 낯으로 서류철을 건네왔다.
"요청하신 자료입니다. 비밀리에 활동 중인 단체이다 보니 찾을 수 있는 자료도 얼마 없더군요. 그쪽에 직접 사람을 보내지 않는 이상은 힘들 것 같습니다."
남자의 나른한 시선이 서류의 내용을 천천히 훑었다. 발생 지역 B - 19구역. 최초 사건 발생일 2134년 4월 10일 새벽 3시. 감시원이 교대하고 있던 시간에 맞추어 식량 창고를 습격. 촬영된 cctv로 짐작하건대, 습격 인원은,
···단 한 명.
20대 남성으로 추정.
"식량 창고의 감시가, 고작 한 명의 습격을 막지 못할 정도로 허술했나?"
"그건 아닐 겁니다. 아무리 교대 중이었다고 해도 식량창고가 있는 19구역 경계 방위청에만 1개 부대가 수비를 맡고 있습니다. 내부인의 협조가 있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생각합니다."
톡, 톡, 톡. 남자의 유려한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묘하게 음악에 맞춰 떨어지는 모양새다. 남자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정 비서의 불안함 역시 커져만 갔다. 원체 변덕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라 무슨 말을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직접 가 봐야겠어.
정 비서는 속으로 그의 일정을 계산했다. 막아봤자 포기할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아서,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었다. 조율해야만 하는 일정이 다섯 개였다. 더욱 바빠질 터였다.
-
한참을 달린 탓에 지칠대로 지쳐 거칠어진 숨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총알에 맞은 한쪽 다리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를 쫓는 듯 요란스런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민규는 나오려던 욕을 짓찝은 채로 제 호흡을 가다듬었다.
성공이었다.
-
과거와 환상은 기억 속에서 제멋대로 얽혀 혼돈을 키우곤 했다. 처음 작전을 수행했던 날 이후로 민규는 계속해서 그 꿈을 꿨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식량 창고다. 꿈이 시작된 장소. 습기를 머금은 싸늘한 새벽 공기조차 여전했다. 마지막 장면이 시작됨과 동시에 새어 나오는 매캐한 연기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엄청난 열기에 온몸이 녹아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 그랬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떠오르는 잔상의 마지막은 폐건물처럼 보이는 어떤 장소였다. 짧은 인생에 기억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던, 제 어린 시절의 기억. 환상과 제멋대로 뒤섞인 채 기억을 흐리게 하는, 유일한 세계.
눈을 깜빡이자 보인 건 아무렇게나 그어진 빗금들이 가득한 거친 시멘트 표면이었다. 이질감에 내려다 본 손에는 언제 주웠는지 모를 돌이 놓여 있었다. 배고픔 때문인지, 돌을 주워든 손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떨려왔다.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그 틈새 어딘가에 몇 번이고 돌을 들어 긁어대고 나서야 또 하나의 빗금이 새겨졌다.
언제부터였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었다. 애초에 민규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단지 기억나는 것은 시린 추위와 배고픔, 그것뿐이라서. 환상인지 모를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 그는 항상 혼자였다. 홀로 서서, 그저 가만히, 벽에 적힌,
무언가.
비교적 선명한 기억 속에서 누군가가 일부로 지워 내기라도 한 듯 흐릿한 무언가가 있었다. 뭐였을까, 그 벽에. 적혀있던 하나의 문장.
경계가 모호해진다. 민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곳에 다시 선 채다. 살을 엘 듯한 추위. 잊을 수 없는, 그 옛날의 감각. 돌을 쥔 손이 또다시 떨려왔다. 제 용도를 다한 돌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잔뜩 얼어붙은 바닥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굴러가는 돌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아무렇게나 굴러가던 돌이 부딪혀 멈춰 서자 바닥에 놓여 있던 날붙이의 선연한 냉기와는 다르게 쨍-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무작정 칼을 집어 들었다.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칼날을 감싸 쥔 손에 온기가 돌았다. 온기와 함께 피가 흘러 바닥을 적셨다. 두려울 게 없었다. 이미 나락이었음에도 더 떨어질 그곳이 두렵지 않았다.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아주 먼 과거가 그대로 석민을 몰아세웠다.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도. 밀려오는 물결처럼 민규는 흔들렸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민규야?”
원우가 민규를 붙들었다. 휘몰아치며 다가오던 거친 파도가 한순간에 점멸했다. 추락하던 궤도가 회귀했다. 민규는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는 원우가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현실이다, 이건.
“내 말 듣고 있었어?”
어? 응. 듣고 있었어요, 형. 급하게 내뱉은 말에 시선이 유해진다. 그때 너 고작 열셋이었어. 그래요? 대화를 따라잡기 바쁜 민규가 아무렇게나 대답하자 원우가 키득대며 말을 이었다. 나보다 작은 애가 나한테 칼을 겨누더라. 얼마나 추위에 떨었는지, 비쩍 말라 가지고, 애가. 빨개진 손으로 덜덜덜 떨면서 칼날을 겨누는데···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 싶기도 하고, 뭐. 기억은 나니?
밥 먹어요. 민규는 딴소리를 했다. 원체 밖에서는 과묵한 척을 해대서 오랜만에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작은 입을 볼 수 있는 건 좋았는데, 소재가 영 아니었다. 그걸 잊냐··· 치사하게. 애초에 전혀 기대하는 투가 아니었는데 이제야 섭섭한 티를 내는 걸 무시하고선 상을 내왔다.
손이 빨갛네. 추웠겠다.
기억하고 있다. 자신도 추위에 떨었던 주제에, 제 손을 꽉 맞잡아오던 두 손의 온기를. 서러움을 몰랐던 자신을 대신해 흘러내렸던 두 눈의 눈물을. 원우가 입고 있던 보라색 츄리닝과 카키색 야상, 묘하게 어울리는 핑크색 부추, 오른손 검지에 나 있던 이상한 모양의 상처까지 전부 다.
나락을 감수하고 겨눈 칼날이 되레 저를 구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섭섭해하는 걸 모른 척했더니 원우가 삐져서는 계속 중얼댔다. 아니 어떻게 그걸 잊냐 완전 존나 섭섭해. 볼이 빵실해져서는 해봐야 몇 살 더 많은 걸 가지고 어른 흉내를 낸다고 안 삐진 척 입을 오물거리는데 그게 또 웃겼다. 눈에 뵈는 게 전원우밖에 없던 김민규는 그대로 의자에서 일어나 전원우에게 허리 숙여 키스했다. 괜히 원우만 당황해서 눈이 동그래졌다. 맞닿은 숨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숨이 찬 원우가 먼저 입을 뗐다.
“안 잊어버렸어요, 형.”
형이 어떤 표정을 지었었는지, 어떤 옷을 입었었는지, 맞잡은 손의 온도는 어땠는지, 나를 담은 눈동자는 어떤 빛을 띄고 있었는지 전부 다. 뒷말은 삼켰다. 형을 만난 이후의 모든 순간을, 전부. 잊어버린 적 없어요. 이 말도 삼켰다. 언제 이렇게 컸냐··· 의미 없는 투정 소리가 다시 맞닿은 입술에 먹혀들어갔다. 삼켜낸 진심이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