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ia] 새빨간 거짓말
2021. 2. 16. 20:50

 

 

  GM 조직. 생긴지 10년이 넘어가는 조직으로써 나름 뒷세계에선 존재감 있는 조직이었다. 물론 그것도 벌써 3년 전이 되어버렸지만. 3년 전, 조직을 만든 1대 보스가 WW 조직과의 거래 중에 사망한 이후로 우리 조직은 거의 몰락하고 말았다. WW 조직의 감시와 통제 아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 이에 우리 조직원들은 점점 지쳐갔다. 그런 GM 조직에 3개월 전 패기있게 들어온 신입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나, 김민규이다. 왜 이딴 곳에 들어왔냐고? 5년 동안 이 조직에 들어오기 위해 산 속에 틀어박혀 체력을 키우는 동안 그 유명했던 GM 조직이 몰락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도 거의 폐가와 같은 건물에서 담배만 뻑뻑 피워대는 선임들의 시다바리를 하는 것을 기대하고 이곳에 들어온 게 아니란 말이다. 우씨, 생각하니까 또 짜증나네? 아직 23살 밖에 안 된 나를 찾는 곳은 많았지만 그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찬 게 나 자신이니. 이미 체념하고 산 지도 오래다. 스스로를 탓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좌절할 때 쯤이면 이곳저곳에서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어이, 신입! 불 좀 붙여봐!"

 

"..아직도 저 신입입니까?"

 

"당연한 소리 아니냐? 다 무너져가는 우리 조직에 누가 새로 들어오냐?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네가 미친놈이라니까?"

 

"....."

 

"그래서 불은?"

 

"이씨, 가요, 가!!"

 

그래, 이게 나의 현실이다. 이 모든 것들이 처음에는 그저 신고식이라고만 생각했던 내가 한심하다고 느껴질 때쯤 드디어 나에게 첫 임무가 내려왔다. 바로 WW 조직의 스파이로 들어가서 그쪽의 약점을 알아내는 것. WW 조직을 치려는 것이었다. 그것만 하면 이 조직은 내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된다. 하지만 누가봐도 목숨을 거는 임무가 확실하기에 다른 조직원에게 시키라고 하려 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그 조직에 새로 들어온 신입이라고 둘러댈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에 그냥 입을 다물고 하겠다고 했다. 어차피 나밖에 못하는 임무라면, 이런 망해가는 조직에서 내 청춘을 태울거라면, 목숨 하나쯤 거는 도박을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첫 임무가 시작되었다.

 

 

 

 

 

D-46

 

  WW 조직 잠복 첫날. 들어가서 신입이라고 인사하자마자 선임들이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어깨를 토닥여주더니 통성명도 안 하고 다짜고짜 나를 보스실로 끌고 갔다. 이렇게나 이쪽 보스를 빨리 만날 줄이야. 개이득이라고 생각하며 따라가는데 나를 안내해주던 두 사람 중 덩치 큰 사람이 조금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정신 바짝 차려야 할거여. 보스는 아주 그냥 첫날부터 혼을 쏙 빼놓는당께?"

 

"...네?"

 

대체 그 보스란 놈이 어떻길래 이 난리인건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벌써 그의 방으로 추정되는 곳 앞까지 와버렸다.

 

"그럼 우리는 이만 돌아가지. 신입, 왔던 길 기억하지?"

 

"네."

 

"ㅋㅋㅋ 혼 안 빨리게 조심혀!"

 

...또 저소리다. 저 인간 때문에 안 하던 긴장도 하게 될 판이네. 한숨을 푹 내쉬고 두어 번 노크한 후 문을 열었다. 그런 내 눈 앞에 이런 어두운 조직에 절대 없을법한 새하얀 피부와 얇은 몸을 가진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왜 그 둘이 그런 말을 했는지. 정말 그는 같은 남자가 봐도 매혹적이게 생겼다. 마치 구미호처럼. 자칫하면 혼이 진짜로 빨릴 수도 있겠다고 잠시나마 생각하다가 앉으라는 그의 손짓에 겨우 정신차린 나는 그의 앞에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까 피부가 더 하얬고, 입술은 빨간 것이 정말 홀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가 그 입술을 떼는 순간,

 

"너 키스 잘하니?"

 

 

23년 인생 최고의 미친놈을 보았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난 거의 주저앉을 뻔 했다. 들어가자마자 하는 소리가 이름이나 나이, 잘하는 것을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키스 잘하냐라니. 그 말에 말문이 막혀 가만히 있던 내가 웃긴지 입꼬리를 올리면서 하는 소리가

 

"침대에서 힘 좀 쓰니?"

 

라니... 제대로 미친놈이라고 확신했다. 그 질문에도 역시 대답을 안 하고 있자 질문할 때는 웃으면서 반달처럼 예쁘게 접혀있던 눈이 위로 확 올라가면서

 

"요즘 보스에 말에 대답 안 하는 신입도 있나?"

 

라고 말하는데, 와 그때는 무슨 구미호가 아닌 진짜 여우를 보는 것 같았다. 야생의 피가 그대로 묻은 여우.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대충 대답을 해줬다.

 

"죄송합니다. 경험이 없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지원서에 그렇게 쓰여있던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고 널 지원서도 안 보고 뽑은 건 아니야."

 

"....."

 

"보긴 봤지, 너의 얼굴."

 

"네...?"

 

"축하해. 너 얼굴로 뽑혔어."

 

...저 인간 뭐래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싶었다. 뭐 예전부터 좀 잘생겼다는건 알았지만. 그럼 이 조직은 얼굴이 기준인건가 싶었지만 다른 조직원들 얼굴을 생각하니 그 생각도 쏙 들어가버렸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우리 조직 들어오는거 빡센거 알지? 하루에도 수십명씩 지원하고 앵간한 실력이 있어도 잘 못 들어오는거. 근데 그 수많은 인간들 중에 내 눈을 만족시켜줄 인간이 한 명도 없더라. 그 와중에 지원서들을 뒤지는데 네 얼굴이 보이는거야. 좀 잘생겼더라고. 그래서 뽑았지."

 

"....."

 

"즉, 네 얼굴이 내 취향이라고."

 

 

...나 방금 플러팅 당한건가.

 

 

 

 

 

D-30

 

  이곳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2주가 지났다. 그동안 여러 쏠쏠한 정보들을 얻었지만 무엇보다 잘 알겠는건 이곳 보스가 또라이라는 것. 첫날 그의 방에서 나온 후 선임들의 말을 들어보니 자기들에게는 여러 사소한 것들을 끝까지 잡고 물어봐서 나한테 충고한 거라고 했다. 근데 왜 나한테는 그딴 말만 한거냐고. 이상한 점은 이것 말고도 차고 넘쳤다. 그날 이후로 그는 하루에도 몇번씩 나에게로 와서 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가는 것이 아닌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은

 

"잘생겼잖아."

 

이 말 뿐이었다. 이러니 내가 미쳐, 안 미쳐? 아, 그리고 하나 더. 그는 조직원들의 생일을 미친듯이 챙긴다는 점과 타로를 맹신한다는 것. 그래서 아무리 말단 직원이더라도 케잌을 챙겨주는 것은 물론이고 타로를 쳐서 그날 운이 안 좋은 직원은 임무를 빼준단다. 참내, 어이가 없어서. 내 인생에 그와 같은 또라이는 더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뭣같은 타로가 내 운이 계속 없다고 해서 덕분에 2주째 임무에 안 나가는 중이다. 이거 하나는 괜찮네. 아, 또 왔다. 저 또라이.

 

"안녕, 오늘도 잘생겼네?"

 

"대체 왜 자꾸 오시는 겁니까?"

 

"네가 좋아서."

 

"...장난이십니까."

 

"내가 지금 장난하는 것처럼 보이니?"

 

"...아닙니다."

 

쳇, 저럴때만 진지한 건 반칙이잖아.

 

"흐음... 우리 신입이 나한테 궁금한 게 많나보네? 내 방으로 가서 얘기할까?"

 

내키진 않았지만 조금의 정보라도 나에게는 귀했기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의 방으로 갔더니 나에게 오기 전까지 타로를 친 모양인지 타로카드가 널려있었다. 여러 알 수 없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것 뿐인 카드들로 어떻게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건지. 조금은 호기심 있는 눈빛으로 카드들을 쳐다보던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며 말하는 그였다.

 

"왜, 타로가 궁금해?"

 

"...왜 그렇게 타로를 믿으십니까?"

 

"운명적이잖아. 난 그런 거 은근 좋아하거든. 이게 생각보다 잘 들어맞기도 하고. 맞다, 신입님의 생일은 언제지? 챙겨줄게. 지원서에 안 쓰여있더라고."

 

"...없습니다. 그런거."

 

사실이었다. 그런 거 잊고 산지 오래였으니까. 애초에 부모가 날 버려서 알 수조차 없었으니까.

 

"흐음... 그럼 내가 하나 만들어줄게. 타로 쳐서 좋은 날로 하루 잡아주지."

 

"...감사합니다."

 

생일이라.. 한 번도 생각해본 적도, 생각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버려져 이곳 저곳을 떠돌며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자란 내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날이라니. 생각만 해도 속이 메스꺼워지는 날이다. 죽지 못해서 산다. 정확히 내가 그랬다. 꿈도 희망도 아무것도 없는 이 삶을 내 손으로 끊어버리자고 생각한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쓸모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18년을 살았다. 그리고 18살이 되던 해에 우연히 주먹질에 맛을 들인 후로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하여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이런 나 따위가 뭐가 좋다고 생일을 챙기겠는가. 그래서 지금까지 생일을 알아보지도, 만들지도 않았다. 그것은 나의 인생에 모순적인 존재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의 앞에서 흔들리는 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무슨 생각해?"

 

"아,아닙니다."

 

"또 궁금한거 있니? 너라서 내가 특별히 대답해주는거야."

 

"...생일은 왜 챙기시는 겁니까?"

 

"뭐, 너도 알다시피 우리들이 서로를 축하할 일이 없어. 우리 직업은 사람을 죽이는 게 일이잖아. 실적을 축하해주고 싶어도 사람 많이 죽인 게 축하할 일이냐. 그래서 적어도 조직원들이 태어난 날이라도 축하해 주고 싶어."

 

그냥 궁금했다. 이런 조직에 들어와 버티고 있다는 것은 보통 떨어질 대로 떨어져 더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일텐데. 그런 사람들에게 생일을 챙겨준다는 것은 그닥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느끼는 것처럼. 하지만 돌아오는 그의 대답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렇게나 의미가 있는 행동인 줄 몰랐기 때문에. 평소에 보여주던 가벼운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웃음기 쫙 빼고 얘기하는 그의 모습에 대형 조직의 보스가 맞나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치고는 꽤나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소문이 났던 그였기에. 우리 둘 사이의 침묵이 짧지 않은 시간동안 이어지고, 그의 전화기가 울리는 탓에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나와야만 했다.

 

 

 

 

 

D-17

 

  그 이후로 또 2주가 지났다. 이전보다 GM과 WW조직 모두 바빠졌다. GM조직은 WW조직을 칠 준비를 하기 위해, WW조직은 갑자기 생긴 SS 조직을 없애기 위해. 확실히 바빠져서 그런지 보스란 놈도 전보다 나에게 오는 횟수가 적어졌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SS 조직 보스의 목을 따고 조직 단체 회식이 열렸다. 정말 이런 개판이 있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모두 부어라 마셔라 하다가 나에게로 오는 술잔이 줄어들 때쯤 주위를 둘러보니 거의 다 쓰러져 있었다. 술이 센 것도 있었지만 막판에는 주는 술을 거의 다 버려서 그런지 난 다행히도 알딸딸한 정도로 나올 수 있었다. 나와보니 만취 상태로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보스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인기척에 내 쪽을 돌아봤고 나를 발견하자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밝게 웃으며 나에게 달려왔다.

 

"안녀엉, 밍구씨이"

 

"...안녕하십니까."

 

"우리 밍구씨는 생일 선물로 뭐 받고 시퍼?"

 

"글쎄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래? 그럼 이런 건 어때?"

 

그러더니 나에게 다가와 지긋이 바라보더니 나의 목에 팔을 두르고 내게 입을 맞추는 그였다. 그 순간 처음 느껴보는 입술의 감촉에 온 몸의 신경이 굳어버린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짧고도 긴 입맞춤이 끝나고 나를 배시시 웃으며 쳐다보는 그를 보니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한 번 나에게로 다가오는 그를 겨우 밀어냈다. 그제서야 자신이 한 일을 자각이라도 한 듯 한없이 까만 그의 동공이 약간 흔들렸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차라리 그가 취해서 그런 거라고 변명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나와 달리 그는 변명은 커녕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들어가서 쉬십시오."

 

"민규씨는 아무렇지도 않아?"

 

"네?"

 

"나 생각보다 자존심 센 사람인데.. 내가 내 입으로 말해야 아나?"

 

"....."

 

"나 민규씨 좋아해. 진심으로."

 

"....."

 

"거절하는 건 상관없는데 모르는 척은 하지 마. 은근 마음 아프다 그거."

 

"...쉬십시오."

 

"그래, 내일 보자."

 

티는 내지 않았지만 상처받은 것이 분명한 그의 마음마냥 비틀대는 몸을 이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그림자까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내 인생 왜이렇게 꼬이니.

 

 

 

 

 

D-15

 

  그렇게 고백 아닌 고백을 한 후에 그는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쪽팔려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그의 성격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나였다. 오랜만에 GM 조직에 가서 정보를 정리하고 있던 중에 그가 생각나서 선임께 여쭈어보았다.

 

"선배, 매일 찾아오던 사람이 고백하고 안 찾아오는 건 뭘까요?"

 

"오오, 우리 신입 가서 연애하니?"

 

"아,아니거든요!"

 

"기다리는 거지 뭐."

 

"네...?"

 

"드라마같은 데 보면 상대방이 자신의 고백에 답을 직접 해주기를 바라면서 끝까지 기다리는 미련탱이들 있잖냐. 뭐 그런거 아니겠어?"

 

답이라... 어차피 보름 후면 나는 그를 죽여야 한다.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은 사치였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그를 좋아할 일은 없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그를 거절한다면 더이상의 중요 정보들을 얻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그건 안된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모은 정보들인데.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하면 GM과 WW 모두 내 손 안에 넣을 수 있다. 실패는 없어야만 했다.

 

 

 

 

 

  WW 조직으로 돌아간 나는 가장 먼저 그의 방 앞에 섰다. 두어 번 심호흡을 한 뒤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저녁 10시 밖에 안되는 조금은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취해있었다. 책상에 뒹구는 양주병들만 봐도 그가 과음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누가 들어왔는지도 안 궁금한지 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창 밖만을 바라보며 술잔을 비우고 있던 그였다. 무슨 용기였는지 그런 그에게 다가가 양주잔을 뺏었다.

 

"이게 무슨...!"

 

그의 말이 나의 입술에 의해 먹혀들어갔다. 더이상의 시간 낭비는 안된다. 한시라도 빨리 그에게 나의 마음을 표현해야만 했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무작정 입술을 부딪혔다. 짧고도 긴 입맞춤 후에 그의 얼굴은 터질 것 같이 빨개졌다. 지난번의 나도 저런 우스운 모습이었을까. 정리가 되지 않는 듯 나를 어벙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였다. 결국,

 

"좋아합니다."

 

이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설명이 필요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지만 이렇다 할 변명이 떠오르지 않은 나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에게 전보다 더 진한 입맞춤을 하면서 그를 눕혔다. 그의 취기가 나에게까지 전해진 듯한 몽롱한 기분으로 그의 하얀 살결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많이 당황한 듯 뻣뻣하게 굳은 그의 몸이 충분히 녹을 때까지. 곧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리라는 흔적을 온 몸에 새기며 우리는 그렇게 밤을 보냈다.

 

 

 

 

 

D-13

 

  어제 아침까지 몸을 섞은 우리는 그대로 꼬박 하루를 잠들고 말았다. 그동안의 피로가 쌓여 생긴 결과였다. 당분간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옆에서 자고 있는 그의 모습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혼돈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대충 옷을 입은 후 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 날이 올 때까지 다시는 그의 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곧장 나의 방으로 들어가 씻고 나오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의 방에서 잘만 자던 그가 내 방 안 침대에 누워 찜질팩을 허리에 올린 채로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자빠질 뻔 했다.

 

"ㅁ,뭡니까?"

 

"...원래 이런 뒷처리는 한 사람이 해줘야되는 건데 말야. 내 방엔 찜질팩이 없어서. 그렇다고 다른 조직원들 방에 들어갈 순 없잖아? 했다는 거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아, 네."

 

"그나저나 어제의 그 일은 내 맘대로 생각해도 되는거니?"

 

"네?"

 

"나는 네가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 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 판단이 틀린건가?"

 

...정곡을 찔려버렸다. 막상 그의 말을 들으니 지금이라도 실수였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속으로 참을 인을 새기며 이성을 간신히 붙들어 맸다. 내가 어떻게 잡은 기횐데...! 당신 하나 죽일려고 내 동정까지 포기한 거를 알기나 할지. 하아, 깊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막고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받아주었다.

 

"...다 알면서 떠보시는겁니까."

 

"푸흐, 아니. 그렇게 철벽 치던 사람이 웬일인가 싶어서. 사실 조금만 더 튕겼으면 내 인내심이 바닥을 칠 것 같았거든."

 

슬며시 웃으며 나의 품으로 파고드는 그였다. 아오 이걸 뗄 수도 없고. 지금은 조금만 더 하면 내 인내심이 바닥을 치겠다. 애정행각 쯤이야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조금 전의 나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아, 진심 이 작전 시작하고 나서 한숨을 몇 번을 쉬는 건지. 이러다 조만간 진짜로 땅이 꺼질 것만 같았다.

 

 

 

 

 

  벌써 두 시간 째 내 옆에서 쫑알쫑알 얘기를 하고 있는 그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얼굴만 쳐다보는 예전이 더 나은 것 같았다. 그의 시시콜콜한 어릴 적 이야기는 나를 지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또 원하는 건 더럽게 많아서 허리 안마도 해주란다. 이런 건 원래 애인이 해주는 거라나 뭐라나. 이럴 줄 알았으면 엊그제 분위기에 휩쓸려 하는 게 아니었는데.

 

"민규야."

 

"네?"

 

"근데 갑자기 내가 왜 좋아진 거야?"

 

"...그냥요. 좋아하는 데에 이유 없다잖아요. 갑자기 좋아진 거죠 뭐."

 

드라마나 소설에서 한 번쯤은 봤었던 대사를 쳐주니 그런 형식적인 대답이라도 좋은지 나를 웃으며 쳐다보는 그였다. 차라리 드라마나 하나라도 더 봐둘 걸. 연애 경험 전무인 내 머릿속에서는 고작 이런 말밖에 나오지 않으니 까딱하다가는 들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의 조직에 잠입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이렇게 사람 사이의 관계나 마음을 이용한 작전은 예전부터 감정 표현에 서툴렀던 나에게 더 치명적이었다. 이런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나만의 가짜 외나무다리 연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D-6

 

  그와 사귄지도 벌써 일주일 정도 됐나? 다행히도 꿀같았던 잠깐의 휴가가 끝나고 곧바로 새 임무가 생기는 바람에 그의 발걸음은 다시 끊겼다. 하지만 연인이 된 티라도 내는 듯 그는 아무리 늦어도 매일 일이 끝난 후 밤에 나의 방으로 찾아와 나에게 안겨왔다. 하아, 이 짓을 6일을 더 해야한다니 악몽이 따로 없었다. 업무 보고를 보고서로 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말하는 거로 바꿨나 싶을 정도로 하루의 업무를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게 나에게 알려주는 그였다. 그 임무에 투입된 인력은 몇 명이며 어떤 방법으로 해킹하고 작전을 짰는지 등을 말이다. 미련하게도 말이지. 뭐, 덕분에 우리 쪽은 그 쪽을 치기 더 쉬워졌지만 말이다.

 

"맞다, 민규 생일 알려줘야되는데."

 

"딱히 안 알려주셔도.."

 

"뭐.라.고^^?"

 

"아,아닙니다. 나왔습니까?"

 

"응, 근데 생각보다 가까워서 그냥 그 날 깜짝 이벤트로 알려주려고!"

 

"푸흐, 그러십시오."

 

"그 날 꼬옥 놀라줘야된다?"

 

"걱정 마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놀란 척 해드리겠습니다."

 

"ㅋㅋㅋ 좋아!"

 

세상에 애도 아니고 생일 축하에 놀라주기까지 해야하는거야? 정말 저 인간의 뇌는 어떻게 생겨먹었는지가 궁금하다. 대충 대답해주니 좋다고 나를 보며 웃는데..어? 원래 저렇게 웃었던가? 거의 맨날 보던 저 웃음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달라보이는 걸까.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눈동자. 다른 곳은 다 웃고 있는데 눈동자만이 슬픔으로 가득 차있었다. 슬픔만이 아니었다. 뭔지 모를 그의 복잡한 심정이 그 눈동자에 가득 담겨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씻으러 가는 그의 뒷모습에 그냥 기분탓이려니 넘겼다.

 

 

 

 

 

D-DAY

 

  4월 6일. 우리 GM 조직의 WW 조직 소탕 작전 개시 날.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이 날이 다가왔다. 나의 희생 덕분에 충분한 데이터가 모여 예상했던 시기에 맞춰 작전을 실행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평화로운 WW 조직으로 들어가면서 오늘도 이곳으로의 출근이 마지막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드디어 후련해지겠다고 기뻐하는 마음 한 켠으로 굉장히 걸리는 것이 하나 있다. 그가 이상하다. 굉장히 이상하다. 그 전에는 날 못 봐서 안달이더니 요 근래에 발길이 완전히 끊겨버린 그였다. 6일 전 쯤 마지막으로 보고 전혀 보지 못한 그였다. 설마 우리의 작전을 눈치 채기라도 한 것일까 생각했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조직원들의 모습을 보고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왜 그는 코빼기도 보이지를 않는걸까. 나의 사랑을 그렇게도 갈구했으면서. 이럴거면 고백하지나 말던가. 사람 신경쓰이게. 잠깐, 나 지금 뭐래니. 그 인간 생각하지 말고 작전에 집중하자 김민규.

 

 

 

 

 

  탕. 이곳저곳에서 총소리와 신음소리가 난무했다. 아무리 큰 WW 조직이라고 해도 각 잡고 준비해온 우리 조직에게 당해낼 수가 없었다. 선임들에게 조무래기들을 맡기고 보스의 방으로 향했다. 없을 줄 알았던 그가 너무나도 차분하게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안 사람 마냥 앉아있었다. 그 모습에 놀라기도 잠시, 일어나는 그의 모습에 그에게로 총을 겨눴다. 그런 내게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총을 꺼내는 그였다. 경계를 풀지 않고 계속 겨누고 있는 나에게 그는 웃으며 자신의 총을 머리에 가져가며 말했다.

 

"선물이야, 민규야."

 

탕. 믿을 수 없는 총성이 울리고 그는 나의 앞에서 힘없이 쓰러졌다. 그제서야 그의 뒤에 있던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널려있던 타로카드들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단 한 장의 엽서만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말끔한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 새하얀 엽서에는 단 두 줄만이 적혀있었다.

 

 

 

 

 

04.06

Happy Birthday Mingy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