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분위기가 부쩍 냉랭해졌다는 걸 전원우만 몰랐던 모양이었다. 아… 진짜요? 눈을 깜빡이며 되묻자 정한이 으이구. 하고
혀를 쯧쯧 찼다. 진짜 몰랐어? 요새 다들 따로따로 점심 먹잖아. 제 몫을 다 먹은 정한이 원우의 앞에 남아있는 김밥을 콕
찍어갔다. 업무 때문인 줄 알았어요. 반은 남아있는 걸 접시 째 정한의 앞으로 밀어주며 원우가 말했다. 암튼 그래서 내가 너무
곤란해. 정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다들 나 붙잡고 연애상담하구 난리야. 나보고 뭐 어쩌라고.”
“인사팀장님이니깐….”
“인사팀장이 연애사도 정리해줘야 하나.”
이거나 드셔. 꼬투리를 집어서 원우의 입에 넣어준다. 사실 인사팀장이라서가 아니라 대표님이랑 제일 가까운 사이라서 그렇다.
IT의 I도 모르는 대표님이 미래는 IT산업에 있다는 말에 혹해서 남아도는 돈과 이과생 윤정한만 믿고 덥썩 회사를 차린 게
시작이라 그랬으니. 무늬만 이과생인 정한은 프로그래밍은 젬병이었지만 다행히 사람 보는 눈이 좋아서 전원우를 비롯하여 좋은
직원들만 잘 뽑았으니 여태 살아 남았지, 대표님 하는 꼴 봐선 반 년도 못 버텼을….
드드득. 문득 테이블 위에 올려둔 정한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대표님이신데…. 진동이 계속 되는데 모르는 척을 해서 액정을
가리키자 버튼을 눌러 무음으로 돌려 버린다. 어쩌라고,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안되겠다. 대표놈 모가지 쳐야겠어.”
젓가락을 딱, 내려 놓은 정한이 결심한 듯 말했다. 그놈 없어야 회사가 조용하지. 이게 다 대표놈 때문이잖아. 그러더니
핸드폰을 든다. 남아있는 부재중 전화에 대고 통화버튼을 누르는 걸 원우는 조용히 보고만 있었다. 뭐하는데 전화를 안 받아!
핸드폰 너머에서 소리치는 게 원우에게까지 들린다.
“됐고, 너 해고야. 내일부터 회사 나오지 마.”
뭔 소리야! 빽빽거리는 게 시끄러운지 핸드폰을 귀에서 멀리 뗀 정한이 해고야, 너 해고. 하곤 통화를 끝내버렸다. 이제 됐어.
골치 아픈 거 해결. 핸드폰을 도로 테이블 위에 집어던지고 컵을 가져와 원샷한다. 물 좀 더 드릴까요? 이미 컵을 들고
일어서며 묻자 응응.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
“여기 있었네.”
정수기에서 물을 받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려서 돌아 보았더니 대표님이다. 안녕하세요. 고개만 돌린 채로 꾸벅 숙여 인사하는
바람에 모양새가 이상해졌다. 원우씨도 있었네에.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이모 저 참치김밥. 선결제 하는 가게인데 자리에
앉으면서 그냥 소리친다. 그래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한다. 그냥 참치김밥 줘, 참치치즈김밥 줘? 그런 것만 묻지.
새 컵을 꺼내서 대표님 물도 한 잔 받아 갔다. 앞에 내려놓으니까 땡큐. 하고 눈을 찡긋. 야.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정한이 확 짜증을 냈다.
“너 그런 것 좀 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다들 오해하고 난리잖아.”
“오해는 무슨 오해를 한다고.”
“무슨 오해를 그렇게들 하고 난리가 났거든?”
정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가보겠습니다. 대표님과 인사팀장님이 마주 보고 앉아 있는데 일개 사원이 어디 옆에 앉기도
뭐하고, 선 채로 고개를 꾸벅 숙이자 잠깐 기다렸다가 같이 가요. 하고 대표님이 자기 옆자리를 툭툭 친다. 김밥 두 개씩
먹을게. 그리곤 아이우에오, 입을 크게 벌려가며 근육을 푼다. 그냥 가겠다고 고집 부리는 것도 이상한 모양새라 조심조심,
옆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할 거야, 이제.”
“뭘?”
테이블 위에 올라온 김밥을 약속 대로 두 개씩 집어 넣어서는, 양쪽 볼이 다 빵빵한 채 정한을 본다. 니가 그따위로 살아갖구
분위기 엉망진창 됐잖아. 아무리 그래도 사원이 옆에 있는데 팀장님이 대표님한테 삿대질을 막 하고 그래도 되는 걸까…. 되니까
하겠지만 그럼 직책을 팀장이라고 하지를 말지, 모양새가 영….
“내 잘못이야?”
세상 억울하다는 얼굴로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그런다. 원우는 조용히 빈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여기 왜 있어야 하는 거지.
“원우씨, 내 잘못이에요?”
그냥 투명인간처럼 물셔틀만 하고 싶은데 굳이 콕 찝어서 물어본다. 잘못이냐고 묻는다면….
“잘못인 것 같기도 하고….”
“원우씨도 윤정한한테 세뇌 당했네.”
세상 억울한 표정을 하느라 입술이 다 삐죽 나왔다.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살던 대로 살았는데 자기네들끼리 오해하고
그러는 걸 뭘 어떡해. 어느새 다 집어 먹고 꼬투리만 남은 걸 입에 쏙 넣더니 다 씹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니까 살던
대로 살지 말라고, 쫌. 짜증을 내면서도 입가에 묻은 마요네즈 닦으라고 티슈를 뽑아준다. 알고 보면 사이가 좋다. 김밥 한줄
값을 법인카드로 결제하더니 커피 마시자. 하고 대표님이 먼저 가게를 나섰다.
일 분이라도 빨리 빠져줘야 할 것 같아서 커피 안 마신다고 사양했더니 딸기주스를 쥐어줬다. 딸기는 좋아하니까 군말없이 들고 두
사람을 졸졸 따라 회사로 향했다. 가는 내내 티격태격 난리다. 그따위로 살지 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아무한테나 좀
그러지 말란 말야. 내가 뭘 어쨌는데.
“야, 너 그냥 연애를 해. 되면 결혼을 하든지.”
“그럴까?”
“어. 할 수 있음 해라. 그럼 조용해질 것 같으니까.”
“누구랑 하면 되는데? 형이 골라줘.”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데 정한의 얼굴은 심각하다. 그 직원은 안 되고. 그 직원도 안 되고. 대표님을 사이에 두고
자기네들끼리 기싸움 중이라는 직원들은 일단 제끼는 건지 하나둘 꼽아보는데, 어째 결혼한 직원들 빼고 다 나올 기세다. 진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대표님을 좋아하고 있단 말야?
“뭐야, 그렇게 다 빼면 원우씨만 남겠다.”
대표님이 다시 원우를 돌아보았다. 그러게 말야. 정한도 원우를 돌아보고. 그러게요, 저만 남겠어요. 딸기주스를 쪽 빨아들이는데
음. 하고 문득 정한이 걸음을 멈추었다. 괜찮은 거 같은데? 정한이 다시 원우를 바라보았다.
“원우씨, 얘랑 연애하는 거 어때?”
“…팀장님.”
“어, 난 찬성.”
대표님이 손을 번쩍 든다. 가만 있는 사람은 왜 끌어들이려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전 반대합니다. 손을 휘휘 내젓는데 덥썩,
정한이 원우의 손을 잡았다. 표정이 지나치게 간절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매일 같이 연애 상담을 해댔으니 피곤했던 건 얼마든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건 좀….
“시늉만 하자. 시늉만. 그 사람들 다 마음 접을 때까지만.”
“아, 말도 안돼요. 전 사내연애 같은 거 안 해요. 게다가 상대가 대표님이면 더 싫어요.”
“원우씨 나 싫어해요?”
“아니, 대표님이 싫은 게 아니라 대표님이 대표님이니까,”
말을 할 수록 꼬인다. 암튼 전 싫어요. 단호하게 말하곤 아직도 제 손을 붙잡고 있는 정한의 손을 떼어냈다. 그래. 싫음 할
수 없지. 전혀 할 수 없지 않은 말투로 그런다. 방금 전까지 어느 애니메이션의 고양이 같은 눈을 하고 있더니만 그새 찬바람이
쌩쌩 분다. 연기를 하셨어야….
“대표라곤 말썽만 부리고, 도와주는 사람도 하나도 없고 힘들어서 회사 못 다니겠다. 나 사표 쓸래. 대표님 니 연애사 니가
알아서 하세요. 원우씨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의리도 없구 애사심도 없구 실망이다.”
반박할 틈도 안 주고 와르르 쏟아붓더니 휙 돌아서서 혼자 가 버린다. 연애를 하라면서 무슨 의리에 애사심을 찾아. 앞뒤 안
맞는 거 뻔히 아는데도 저렇게 온몸으로 마음 상한 티를 내니까 맘이 안 좋다. 형 그만 두면 안 되는데! 정한도 듣고 원우도
들으라고 대표님이 소리친다. 빨리 가서 잡아요. 자기가 하면 되지 원우를 부추기고. 네네. 얼결에 떠밀려서 정한에게 달려갔다.
“팀장니임.”
팔을 붙들고 세우니까 됐거든. 하고 밀어낸다. 나 없이 잘 먹구 잘 살아. 다 필요없어. 평소에도 좀 틱틱거리고 짜증 많이
내긴 하지만 장난이랑 아닌 거랑은 구분이 된다. 지금은 장난 아닌 상황인 거고. 팀장니이임. 말꼬리를 늘여가며 들러붙자 마음이
좀 녹는지 입술만 삐쭉삐쭉한다.
“그럼 원우씨가 도와주는 거지?”
“당연하죠. 뭐든 도와드릴게요.”
없는 꼬리 열심히 붕붕 흔들어댔더니 정한의 표정이 금세 활짝 폈다. 그럼 얘랑 연애하자. 그제야 느릿느릿 따라온 대표님을
가리키면서 그런다. 아니, 그거 말구요…. 반대로 원우의 표정이 가라앉자 이번엔 정한이 다급해졌다.
“아니, 아니, 시늉만. 진짜 시늉만. 다른 사람들 마음 접게 그냥 하는 척만. 나 진짜 너무 피곤하단 말야. 면담이랍시고
하루에도 열 명씩 찾아와. 일을 못해.”
“걍 함 하죠?”
여기 두 사람은 심각한데 세상 심각함이라곤 없는 대표님이 헤헤 웃으며 그런다. 나 쫌 괜찮은 사람인데. 돈도 많구. 이 와중에
자기 어필을 하고.
“대표님이라서 싫으면 그냥 김민규랑 연애한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연애 아니고 연애 시늉.”
“그거나 그거나.”
“한 달만 하자. 응?”
“한 달 너무 짧은데….”
“…….”
티격태격하는 사이에서 원우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내가 사표를 낼까…?
미동의 로맨스
사표를 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큰 맘 먹고 지른 할부가 남은 사람으로서는 더더욱 어렵다. 그래도 그날 들어오자마자 사표를 냈어야 하는데.
“원우씨, 잠깐만.”
어영부영 지나갔더니 두 분의 계획에 동의한 게 되어버린 모양새다. 정한은 요새 사내 비밀연애를 지켜주며 두 사람의 사이를 적극
지지하는 의리와 정이 넘치는 팀장님 역할에 푹 빠져 있는 것 같다. 툭하면 원우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 모양새만 귓속말이지
옆자리 직원은 다 들리도록. 직원 수 다 합쳐도 스무 명이 다 안되는 회사라 대표님이 직원을 바로 호출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한 달에 한두 번이지 매일 꼬박꼬박 불러대면 모양새가 이상할 수밖에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자리 직원이 의아한
눈으로 원우를 올려다 본다.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인데 짐작되는 게 있으니 정말 묻지는 못하겠는 그런 얼굴. 눈이 마주쳐서
어색하게 웃고선 자리를 벗어났다. 대표님 방으로 향하며 슬쩍 돌아보자 모든 직원들이 파티션 아래로 납작하게 숙이고 빠르게
타자를 치는 게 보인다. 이 한 몸 희생하여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굴던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메신저를 주고 받게
되었으니 잘 된 일인 걸까….
문앞에 서서 노크를 하려는데 벌컥, 먼저 열린다. 이리 와 봐요. 목적을 잃어서 멍청하게 허공에 멈춰 있는 원우의 손을 잡더니
그대로 끌어당긴다. 탁. 등 뒤로 문이 닫히는 그 짧은 몇 초 동안 등에 꽂힌 시선들이 여름 햇살처럼 따가웠다.
“왜 부르셨어요.”
“그냥. 보고 싶으니깐.”
대표 김민규. 명패는 그럴싸하게 파놨는데 하는 짓과 직함의 괴리가 심하다. 이 분도 요새 다른 직원들 몰래 부하 직원과
연애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지만 사랑이 넘쳐서 주체할 수 없는 젊은 대표님 역할에 푹 빠졌다. 가끔은 이게 연애하는 척이
아니라 정말로 전원우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오해할 정도로. 그렇게 오해 살 짓만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걸 매일매일
상기해야 할 정도로.
저 업무 많은데요. 불퉁한 얼굴로 말하자 이잉, 잠깐만. 하고 씨알도 먹히지 않을 애교 같은 걸 부린다. 책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아서는 앞에 선 원우를 올려다 보는데, 정한이 그렇게 살지 말라고 소리소리 친 이유를 좀 알 것 같다. 분명히 눈꼬리가
뾰족한데 둥글다. 그런 눈매에 세상 온갖 긍정과 행복과 사랑을 가득 담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바라보는데 오해 안 하는 게
이상하지.
“대표님 진짜 그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아요.”
“왜?”
계속 보고 있으면 홀릴 것 같아서 손을 내밀어 눈을 덮어버렸다. 주제 넘나? 뭐 어때. 어차피 연애 시늉 중인데. 블라인드 안
내렸는데. 무슨 상상을 하시는지 헤헤 웃으면서 그런다. 고개를 돌리자 이쪽만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후다닥 아닌 척 하는 게
보인다. 더 빨라진 손들. 이제 나가보겠습니다. 손을 내리고 물러서는데 원우씨, 하면서 또 얼른 붙잡는다. 뜨끈뜨끈 열이 많은
손바닥과 손가락이 쉽게 얽혔다. 벌써 한두 번이 아닌데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감촉. 도톰한 엄지가 손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끝나구 저녁 먹자.”
“약속 있는데요.”
“누구랑?”
“대표님은 모르시는 친구랑요.”
“어디서 만나는데요?”
“집 근처에서요.”
“그럼 내가 데려다 줄게.”
“싫은데요.”
“이잉, 왜애.”
“…….”
또또 씨알도 안 먹힐 애교를. 사내 자식이 자꾸 그러면 고추 떨어진다. 할까말까 고민하다 그냥 삼켰다. 이놈의 연애시늉 끝나면
몰아서 앙갚음 당할지도 몰라. 근데 대표님, 손 좀 놔주시면 안 될까요. 손가락 사이사이 깍지를 단단히 낀 채 놓아줄 생각을
안 한다. 시른데 시른데. 어디서 혀짧은 소리를 하고 있어…! 손가락 하나하나 펼쳐서 빠져나왔더니 또 히잉. 이런 사람이
어떻게 사업을 하고 한 회사의 대표 씩이나 하고 있는 걸까….
여섯 시 반 되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게 퇴근해서 건물을 나서는데 원우씨! 하고 후다닥 쫓아온 옆 자리 직원이 뒤에서 저를
부른다. 못 들은 척 도망치고 싶었지만 빠르게 쫓아와서는 아예 팔을 붙잡아 세우는 바람에 실패했다. 어디 가요? 붙잡고선 묻는
말이 그래서 퇴근…. 하고 지하철 역 쪽을 가리켰다. 바빠요? 작정한 모양새라 잡히면 안 되겠다 싶어서 네에.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대표님이랑요?”
“아뇨, 대표님 아닌데.”
진짜 아닌데 하도 무서운 얼굴로 물어보니깐 반사적으로 황급히 손을 내저었더니 의심만 더 짙어졌는지 입술을 꾹 다문 채 원우를
바라본다. 진짜 아닌데…. 무슨 말을 한들 별로 도움은 안 될 것 같지만 어쨌든 결백하니 결백을 주장하긴 했다. 원우씨.
이렇게까지 심각할 이유가 대체 뭔가 싶을 정도로 심각하다.
“다른 직원들은 다 의심하고 그러는데 그래도 저는 원우씨 믿어요. 무슨 말인지 알죠?”
“…….”
전혀 모르겠는데요…. 그렇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의심하시라고 대표님과 인사팀장님이 다 깔아주고 있는데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 빨리 이 연애시늉 다 끝나고 다들 잘 지내게 된 다음에 인사팀장님이 사실 다 연극이었지롱! 하고 발표하는 날이 왔음
좋겠다. 우리 회사의 평화를 위해 전원우 사원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모두가 알아야 하는데.
빵빵. 문득 클랙슨 울리는 소리가 들려서 동시에 돌아보았더니 눈치라곤 쥐뿔도 없는 대표님이다. 원우씨! 조수석 창을 내리고선
다른 직원은 안 보이는지 원우만 부르면서 손을 붕붕 흔들어댔다. 데려다 줄게, 타요! 피가 식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흘깃
돌아본 옆자리 직원도 피가 식은 것 같다. 골치야….
“지하철 탈 건데요.”
“그럼 지하철 역까지 데려다 줄게.”
“지하철 역 여긴데요.”
열 걸음만 가면 입구인데 헛소리를…. 그래두 타. 또 이잉. 하는 얼굴로 그런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은 나한텐 씨알도 안
먹힌다니깐. 내일 뵙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리는데 탁, 팔이 붙잡혔다.
“대표님이 데려다 주신다는데 그냥 타요.”
팔을 꽉 쥔 악력 만큼이나 이를 꽉 악물고선 웃으면서 그런다. 이렇게 억지로 태우고 바로 돌아서서 메신저 난리나게 할 거
뻔한데, 후폭풍 감당할 자신이 없다. 제 대신 타고 가실래요? 손을 떼어내며 권하자 대번에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진다. 원우씨
나 놀려요? 어지간히 속이 꼬였는지 빽 소리를 치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린다. 아니, 놀린 거 아닌데…. 등 뒤에서
변명해 봤자 안 들릴 거 뻔하고.
“끝났어요?”
“…….”
돌아보자 언제 내려서는 차체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다. 아직 안 가셨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냥 좀 가지…. 꾹꾹
눌러삼키고 바라보고만 있었더니 가자아. 하고 눈을 찡긋. 그 얼굴 보니까 몰랐던 피로가 갑자기 몰려오는 기분이다. 그래,
타자, 타….
“대표님, 저희 이거 언제까지 해요?”
차에 타니까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메어 주려고 해서 마다하고 제 손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더니 뭘요? 하고 되묻는다. 연애하는
척이요. 길어질 수록 피곤해질 것 같은데 언제까지만 하자는 기약도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글쎄, 평생?”
“장난치지 마시구요.”
“내가 잘하면 되잖아요.”
원우는 심각한데 대표님은 웃기만 한다. 어디로 데려다 주면 돼요? 내비게이션을 켜면서 딴 소리를 하는 걸 대답 없이 얼굴만
빤히 보았더니 사실 어딘지 알아요. 하고 원우의 집 근처 지하철 역을 꾹꾹 눌러 입력한다. 데려다 주는 건 처음이다, 그쵸?
안내를 따라 유연하게 핸들을 돌려 안쪽 차선으로 들어가며 그런다. 부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길 바랍니다….
“근데 진지하게, 나 좀 괜찮지 않아요?”
한참을 조용히 가다가 뜬금없이 쉰소리를 한다. 네네, 괜찮으십니다. 창밖을 바라보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아니, 진지하게. 전혀
진지할 수 없는 질문을 진지하게 대답하라 그런다.
“진지하게, 원우씨가 나랑 만나는 사이라고 생각해 봐요.”
“진지하게 안 만날 건데요.”
“아니, 만약에, 예를 들어서,”
“안 만나요.”
“…나 상처 받았어.”
돌아보자 입술이 삐죽하게 나온 게 보인다. 귀엽네. 웃음을 흘리며 생각했다가 얼른 고쳐먹었다. 귀엽긴 뭐가 귀여워. 에비, 지지.
“원우씨는 괜찮은 사람인 거 같아요.”
“…….”
또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내 직원으로도 괜찮고, 진지하게 만나도 괜찮을 것 같고. 다시 눈이 마주치자 한쪽 눈을 찡긋, 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디서 정한이 튀어나와 너 그렇게 살지 말라고 소리치면 좋겠다.
근데 괜히 귀가 뜨거운 느낌이다. 만져보니까 진짜 그렇다. 왜 이래, 창피하게…. 이렇게 뜨거운 거 보면 분명히 빨개졌을 것 같은데, 모르겠지?
저 그 자료 좀 주세요. 부탁할 게 있어서 말을 걸었더니 눈을 치켜 뜨고 원우를 올려다 본다. 그거 저한테 없는데요. 담당자
이름 확인하고 간 건데 쌀쌀맞게 그런다. 그럼 누구한테 있어요? 그냥 사람 곤란하게 만들려고 그러는 게 티가 나서 원우도 말이
불퉁하게 나갔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까 저쪽도 더 그러고. 담당자가 알지 누가 알아요? 원우도 더더 그러고.
아, 짜증나. 할 말 없으니까 신경질이다. 찾아서 메일로 드릴게요. 그만 꺼지라는 소리를 그렇게 한다.
스트레스 별로 안 받는 성격인데 요샌 스트레스 받는다. 대표놈은 계속 눈치없게 다정을 퍼붓고, 정한은 어느 순간 발 뺀
모양새고. 원우 말고 다른 직원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된 것 같은데 이제 좀 그만 하면 안 되나. 업무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이러니까 더 스트레스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숨이 다 막혀서 자리 박차고 나와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난간 붙잡고 서서 심호흡을 한참 했다. 내가 왜. 내가 왜애. 내가 왜애애애애애. 세상 억울하다. 의리가 뭐야, 애사심이
뭐야. 역시 사표를 냈어야 했다. 할부가 얼마나 남았는지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퇴직금은 얼마나 나오지? 그걸로 안 되나.
“뭐 해?”
묻는 목소리에 돌아보았더니 정한이다. 팀장니임. 정한을 보니까 우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팀장님이 계획 세운 거니까 팀장님이
책임 좀 지세요. 하는 우는 소리.
“저 너무 스트레스 받아요….”
정한이 곁에 오자마자 말했더니 왜? 하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선 묻는다. 요새 다른 직원들이 저한테 얼마나 쌀쌀맞게
대하는지 모르시죠? 저 쫌 전에도 자료 부탁하러 갔다가아. 우는 소리를 하면서 미주알고주알 일러 바치니까 정말? 진짜? 하고
눈이 동그래져서는 되묻는다. 나는 요새 나 찾는 사람들이 없어서 다 좋아진 줄 알았지. 정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진짜로 대표님하고 뭐가 있어서 그런 것두 아니구….”
“으음….”
“한 달 정도 된 거 같은데 이제 그만 하면 안 돼요?”
“으음….”
“대표님한테 얘기 좀 해주세요….”
“으음….”
팀장니임. 매달리니까 알았어.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얘기해보자.
사무실로 돌아가자마자 정한은 바로 대표님 방으로 들어갔다. 한참 얘기를 하더라니 곧 원우를 불렀다. 들어가니까 둘 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다. 전원우가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이제야 안 눈치다. 엄청엄청 스트레스 받고 있다구요. 엄청엄청엄청.
“원우씨,”
대표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스트레스 많이 받아요? 손끝으로 이마를 긁적이며 묻는데, 좀처럼 볼 수 없는 진지한 모습이었다.
네…. 알아주니까 울컥 서러움 같은 게 몰려왔다. 그러게 괜히 나는 왜 끌어들여서.
“진짜로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다른 직원들이 막 그러니까 스트레스 받는구나.”
“네….”
“그럼 진짜로 연애하면 되지 않을까?”
“…네?”
“진짜로 연애를 하면 약간, 그런 기분 들지 않겠어요? 늬들이 아무리 날 괴롭혀 봐라. 난 김민규하고 연애하거든, 메롱. 같은.”
“…….”
저게 무슨 개소리람. 저 분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정한을 바라보았다. 난 그거 괜찮은 거 같애. 저 분 좀
말려달라고 바라본 건데 정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로 하지 말고 그냥 대놓고 연애하면 그렇게 유치하게 괴롭히는 것도 없어지지
않을까? 전혀 좋은 방법이 아닌데 되게 좋은 방법인 것처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 그러니까 원우도 헷갈리는 거다.
이게 좋은 방법인가…?
“아니, 근데 저는 대표님하고 연애할 마음 없는데요…?”
“원우씨, 얘가 이래 보여도 애는 괜찮아.”
“맞아. 나 되게 괜찮은데. 키도 크고, 잘생겼고, 돈도 많고.”
“…….”
말이 안 통하는 인간들이다. 아뇨, 싫습니다.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면 이렇게 또 한없이 말릴 것 같아서 딱 잘라 얘기하니까
히잉. 하고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소리를 낸다. 그래야 하면 저 그냥 그만 둘래요.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그냥 질렀다. 자를
테면 잘라라. 해고 사유가 이상해서 자르진 못할 것 같지만. 대표랑 연애 안 하니까 해고.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더 망했다. 다른 직원들하고 여전히 냉랭한데 대표님과도 사이가 애매해졌다.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하긴 하니까, 정한이 다른
직원들에게 대표님과 원우씨 아무 사이 아니라고 얘기했다는데 안 믿는 건지 더 오해하는 건지 도무지 나아지는 게 없었다. 누가
직접 물어봐야 아니라고 말하지, 묻는 사람도 없는데 전원우가 먼저 나서서 저랑 대표님은 아무 사이가 아닙니다! 그거 다
연극이었습니다! 하는 것도 이상해서 잠자코 있었더니 점점 더 고립되는 느낌이었다. 혼자만 섬이다. 아무하고도 연결되지 않고
동그라니 떨어져 있는 섬.
그 와중에 회사는 잘도 굴러간다. 개인이야 이렇고 저렇고간에, 회사 차원에서 반 년을 공들인 프로젝트 하나가 아주아주
성공적으로 끝났다. 런칭도 안 했는데 계약금만으로 작년 한 해 수익을 뛰어넘어서, 계약이 성사된 날 대표님은 자기 방에서
덩실덩실 춤까지 췄다. 우리 오늘 회식할까? 문을 벌컥 열고 직원들에게 외칠 때까지는 다들 기립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원우도
그랬고. 윤팀장님 장소 섭외 좀. 우리 오늘 비싼 거 먹자. 정한에게 지시한 대표님이 다시 문을 닫고 들어가고, 다들 제자리에
앉고서 원우는 문득 깨달았다. 아, 나 요새 왕따 당하고 있지….
팀장님,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퇴근길에 슬그머니 정한에게 가서 얘기하자 왜? 하고 눈도 목소리도 커져서는 물었다. 집에
일이 좀 있어서…. 마땅히 핑계 댈 게 없어서 대충 둘러댔더니 거짓말인 걸 대번에 눈치 챈 정한의 눈매가 잔뜩 찌푸려졌다.
“애야?”
“…네?”
“애냐구. 이런 날 이런 식으로 빠진다고 하는 거 어른스럽지가 못하잖아.”
“…….”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팀장님이 지금 저한테 그런 말씀 해도 되는 거예요? 화가 울컥 솟았는데 뱉어내지는 못했다.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더니 얼굴은 비추고 가. 그런다. 것도 엄청 봐줬다는 식이다. 자기들 작당모의에 동의한 적 없는 사람을 어거지로
끼워맞춰 놓고선 이제와서 어른스럽지 못하다느니 그런 말 하는 거 좀 너무하는 거 아닌가. 꾹꾹 눌러서 참았지만 좀
울고싶어졌다. 사회생활이 원래 이런 거야? 최악이다.
내일 아침에 사표 내야지. 그때까지는 그래,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할 만큼 했으니 사표 내겠습니다, 하면 솔직히 어떻게
말려. 따지고 보면 전원우가 그렇게까지 회사에 필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프로그램이야 누구든 짤 수 있는 거 아냐? 코딩
같은 거 누가 못 해? 정 안되면 이과생 윤정한 팀장님이 하시겠지. 팀장님도 그럴 마음 있으니까 지금 나한테 저렇게 하는 거
아냐? 생각이 아주 끝도 없이 뻗어 나갔다.
회식자리에 도착해선 제일 끄트머리, 통로와 가까운 쪽에 앉았다.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 관심이 없는 유부남 직원들만
죄다 모여 있는 테이블이다. 원우씨 이번에 고생 많았어. 원우씨 없었음 다 빠그라지는 거였잖아. 프로그래밍 하는 건 지금
속앓이 하는 거에 비해서 고생도 아닌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건배 하자, 건배. 아직 사람들이 다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이 테이블은 벌써 술이 돈다. 그래, 마시자 마셔.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평소 주량이 얼마나 되냐면, 맥주 한 잔이다.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온몸이 다 발갛게
달아오르고 눈앞이 깜빡깜빡하는데 소주잔 가득가득 채워주는 걸 바로바로 원샷했더니 금세 눈앞이 핑핑 돌았다. 와, 나 취했다.
눈앞이 막 접혔다가 기울었다가 코앞까지 다가왔다가 멀어졌다가 그런다. 사람들 목소리는 이미 아득해진지 오래고, 갈 곳을 잃은
기분은 점점 더 점점 더 가라앉았다. 어느 순간 보니까 웃지 않는 건 전원우 뿐이었다. 구석자리에 오도카니 앉아서, 왁자지껄한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다들 신났네. 역시 나는 없어도 되나봐.
간다는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나가려고 엄청 애써야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걸음도 가다듬고. 어디 부딪치지
않으려고 엄청 집중해서 걸었다.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가게를 나올 때까지 아무도 원우를 붙잡지 않은 게 다행이고 서운했다.
지하철은 못 타겠다. 사실 방향도 잘 가늠되지 않았다. 일단 그냥 큰 길로 향했다. 눈이 자꾸 감겼다. 전원우 정신차려.
정신차려어…. 혼잣말을 하면서 볼을 막 꼬집고 팡팡 두드리고 그랬다. 그래봤자 아주 잠깐. 금방 또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걸어갈까? 우리집이 이쪽인가? 이쪽인가? 두리번거리니까 어지럽다. 아무래도 그냥 택시 타야겠다.
인도 끄트머리에서 손을 막 휘저었다. 항상 택시가 많은 동네라 별 걱정은 되지 않았다. 붕붕 손을 휘두르니까 곧 차 한 대가
앞에 선다. 뒷좌석 문을 열고 오르면서 죄송함다…. 하고 사과부터 했다. 제가 넘 취해갖구….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걸
설명하곤 동네를 말했다. 제가 넘넘 많이 취해가꾸우. 시트에 깊숙이 파묻혀서 눈을 감으면서도 계속 중얼중얼 말했다.
취했어어….
반짝, 문득 눈이 떠졌다. 흔들흔들하는 게 아직 차 안인 모양이다. 머리 아파. 물이라도 사 올 걸 그랬다. 두 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선 몸을 바로 세웠다.
“깼어요?”
“…….”
익숙한 목소리에 행동도 숨도 뚝 멈췄다. 으악! 그리곤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깜짝아. 어지간히 컸는지 운전을 하면서 어깨가 움츠러든다.
“…대표님….”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파악하려니 머리가 쪼개질 것 같다. 대표님, 저 잠깐만. 갑자기 토기가 몰려와서 입부터 틀어막고
말하자 시선을 들어 룸미러로 원우를 바라보고선 눈이 커다래졌다. 잠깐만, 잠깐만! 다급하게 핸들을 돌리는 바람에 차체가 다
휘청거렸다. 우욱. 그러니까 속이 정말로 울렁거리고. 헛구역질을 했더니 쫌만 참아! 쫌만! 하고 난리다. 부아앙, 속도가
갑자기 올라갔다.
닫히지 않은 어느 지하철 역 화장실에서 속을 말끔하게 게워냈다. 먹은 것도 없이 술만 주구장창 마신 탓에 뱉어내는 것도 술이
다였다. 가라앉았던 취기가 도로 올라와서 눈앞이 또 번쩍번쩍했다. 정신차려, 정신. 나가면 대표님이 있다. 등 두드려 주겠다는
거 거의 발로 차다시피 해서 쫓았다. 이미 이보다 더 한 진상이 없으니 제발 정신 좀 차려. 문에 기대어 선 채 양 쪽 볼을
막 두드렸다. 아무리 내일 출근하자마자 사표 쓴다고 해도, 마지막이 이런 식인 건 좀 너무하지 싶다.
한참 동안 추스르고 겨우 좀 진정하고 나왔다. 더 쏟을 건 없는 것 같은데 걸음은 좀 오락가락 불안했다. 화장실을 나서자 내내
기다렸던 대표님이 얼른 다가왔다. 이거. 그새 어디서 사왔는지 숙취 해소제를 내민다. 감사합니다. 어차피 진상인데 체면 차릴
것도 없고,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마시니까 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곧 막차가 온다는 방송이 연신 흘러나오는 역사 안 벤치에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좀 괜찮아요? 한 뼘쯤 사이를 두고 곁에 앉아서는 원우의 얼굴을 살피며 물어와서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 탈 수 있겠어요? 가다가 또 이럴까 봐 걱정되는지 조심스레 묻는다.
“…대표님 근데, 회식 자리는 들르셨어요?”
기억이 드문드문하긴 한데, 나올 때까지 못 본 것 같아서 물었더니 고개를 저었다. 가다가 원우씨 봐서 멈췄지. 그리고선
핸드폰을 꺼내 보여준다. 부재중 전화 윤정한 49통.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가 보세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어차피 망했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원우씨 데려다 주고 가도 되고, 안 가도 그만이고.”
“…….”
안 가도 그만이라니. 춤까지 추고 회식하자고 먼저 말한 건 대표님인데. 회식 자리 오다가 저를 발견해서 이렇게 됐다고 하니,
그 거리에서 혹시 다른 직원 누군가가 봤을 수도 있다. 그럼 또 해명할 기회도 없이 오해만 커지겠지. 한 편으로는 우울한데 한
편으로는 신경질이 돋았다. 못 본 척 하고 그냥 좀 가지. 그럼 아무 일도 없잖아. 역시 답은.
“저 내일 사표 낼게요.”
“…….”
뭐라고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만다. 그리곤 한숨만 폭. 이쯤 되면 미안하다 소리는 할 줄 알았는데 그런 말도 없으니까
갑자기 성질이 난다. 저는 대표님이랑 팀장님이랑 처음에 저 끌어들이실 때 무슨 대책 있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아니잖아요.
저만 중간에서 이 모양이구. 대표님도 팀장님도 요새 귀찮게 구는 사람들 없으니까 편하시죠? 근데 전 진짜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거든요.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쏟아내는데 눈물이 솟았다. 이미 진상짓 맥스 찍었는데 울기까지 하면 사표가 아니라 죽어야 할
것 같아서 벌떡 일어났다. 눈가를 북북 닦고 간다만다 말도 없이 그냥 아무 쪽으로나 걷는데 덥썩 팔이 잡혔다.
“데려다 줄게요.”
“…그냥 갈게요.”
“데려다 줄게요.”
“…….”
“낼 사표내는 거면 오늘이 마지막이잖아요.”
“…….”
놔 줄 마음 없는 사람을 이기려고 하니 원우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래봤자 이내 주르르 끌려가고 말았지만. 마지막이잖아요.
라니. 그만 두지 말라는 말 한마디를 안 하네. 힘으로 못 이길 것 같아 체념하고 따라가는데 계속 눈물이 난다. 꾹꾹 눌러
삼키는 것도 한계다. 정말 이제 그냥 될 대로 돼라. 대표님 차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통곡을 하고 있었다. 서러워 죽겠다.
다 가라앉을 때까지 같은 거리를 몇 바퀴나 돌아준 건 좀 고마웠다. 슬그머니 한강 어느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건 모른 척
해줬다. 소매가 젖을 만큼 젖었고 눈이 퉁퉁 부어서는 창밖만 보고 있었더니 슬쩍 생수를 내민다. 이것도 고맙긴 하다.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서 뚜껑을 쥔 손이 자꾸 헛돌자 도로 가져가서는 열어준다. 이것도 고맙긴 하고.
“대책 있었는데 싫어했으면서….”
“…….”
설마 지금 이 상황에 팀장님과 함께 개소리했던 걸 대책이었다고 우기진 않겠지. 말없이 바라보았더니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진짜로 연애하면 되지 않을까? 눈동자를 반짝이며 진지하게 묻던 얼굴이 떠올라서 헛웃음이 다 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을 한모금 삼켰다.
“정말 그만 둘 거예요?”
“네.”
마음이 가라앉았는데도 바뀌질 않는 거 보면 그만 두는 게 맞는 것 같다. 간결한 대답에 정적이 따라붙는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
됐다. 근데 나 언제 내리지. 여기는 어디지. 깔끔하게 털고 가야할 것 같은데 맨날 팔랑팔랑 가볍게만 굴던 사람이 말 한마디
없이 조용하니까 괜히 눈치가 보여서 아무것도 못하겠다.
“원우씨.”
“네?”
문득 부르는 목소리에 지나치게 놀랐다. 민망해서 물만 꼴깍 삼키는데 음… 하고 대표님이 말을 고른다. 틈이 길어지니까 이상하게
긴장하게 된다. 왜 그러지? 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서 저렇게 망설이지? 관두지 말라고 하려나? 아님 그 얘기 또 하려고
그러나? 진짜로 연애하자구…. 쓸데없는 상상에 귓바퀴가 홧홧한 게 느껴진다. 어두워서 안 보이겠지? 안 보여야할 텐데. 어쩐지
마주 보질 못 하겠어서 고개를 숙이니까 기어 레버만 만지작거리는 손이 보인다. 손가락 사이사이 얽히고 손바닥이 닿았던 게
떠오른다. 뜨겁고 단단한 피부. 하필 이 순간에 그런 감촉이 떠오르고.
“…고생했어요.”
“…….”
그렇게 오래 망설이더니 하는 말이 그렇다. 이건 생각하지 못했던 거라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니까
웃는다. 둥글게 휜 눈꼬리와 입꼬리. 어떻게 웃을 수가 있어? 저 얼굴만 봐서는 서운한 건지 미안한 건지 아무렇지도 않은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만 두겠다고 계속 말한 건 전원우면서 이 순간에 왜 이렇게 배신감이 몰려오는 지
모를 일이다. 그만 두지 말라는 소리도, 미안하다는 소리도 없네. 나쁜 사람. 좀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일렁일렁,
어지러워진다.
저 가볼게요. 일단 멀어져야 한다. 계속 이러고 있음 또 울 것 같아.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그냥 가로등 많은 데만 찾아서, 불빛만 보고 꾸역꾸역 걸었다.
문득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표지판 같은 게 어딘가 있을 텐데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사방을 헤매듯이 둘러보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사표고 뭐고, 도저히 출근할 꼴이 아니어서 병가를 냈다.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침대에 누워있자니 자꾸 어제 일만 되뇌게 된다.
길고 길고 긴 하루였다. 차 안에서 잠 들었을 때 빼곤 빠짐없이 다 기억나니까 약간 죽고 싶다. 전원우의 생각 같은 건 오로지
전원우만 알고 있는 거지만, 대표님이 말을 고르던 그 몇 분 동안 제 머릿속에 우르르 쏟아졌던 짐작들을 다시 떠올리면 그냥
가루가 돼서 사라졌음 좋겠다.
짐작 뿐만 아니라 기대했던 게 분명해서 더 쪽팔리다. 것도 엄청엄청 기대했으니까 그렇게까지 배신감이 들었던 거지….
종일 꼼짝도 안 하고 누운 채 하루가 다 갔다. 내일이 가까워졌다. 너무 싫다….
다 죽어가는 몰골로 회사에 들어서니 다들 흠칫 놀라서는 바라본다. 꾸벅꾸벅 인사를 하곤 곧장 정한에게 향했다. 사표부터 쓸 거다. 사표부터….
“전원우씨.”
뒷덜미를 잡아채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미적미적 돌아보곤 고개를 숙이자 나 좀
봐요. 하고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묘하게 차갑다. 네…. 천천히 따라가는데 그동안 다정하게 굴던 게 익숙해서 그런지 새삼
서운하다.
대표님 방에 들어서서 문을 닫자 대표님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원우는 방 한가운데 오도카니 선 채였다. 창마다 꼼꼼하게
블라인드를 내리고서야 원우를 돌아본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시선을 내렸다. 앉아요. 의자를 끌어다 주곤 제 자리로 돌아간다.
대표 김민규. 의자에 앉아서는 명패만 자꾸 읽었다. 대표 김민규.
“그저께는 잘 들어갔어요?”
“…네….”
“어제는 잘 쉬었구요?”
“…네….”
그리곤 얕은 한숨. 이어지는 침묵. 숨도 제대로 못 쉬겠다. 속에 뭐가 자꾸 얹히는 것처럼 불편했다.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네….”
“정말로 그만 둘 거예요?”
“…….”
그럴 마음으로 출근한 건데 막상 그렇게 물어보니까 입이 열리질 않는다. 고개만 자꾸 아래로 떨어졌다. 무릎 위에 맞잡고 있는
손만 한참 내려다 보았다. 이렇게 된 마당에 아니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우스워지는 건 전원우일 테니.
“…네.”
자그맣게 대답을 하자 이번엔 좀 길게 한숨을 내쉰다.
“내가 안된다고 하면요?”
“…….”
안 된다고 해도 그만 둬야 하는 상황인 것 같은데. 눈을 들자 테이블 너머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대표님이 마주 보인다. 전에
없게 심각한 얼굴. 미간을 살짝 구기고 입술을 물었다가 놓는다. 내가 안 된다고 해도 그만 둘 거예요? 다시 한 번 물어서,
원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주하고는 대답을 못할 것 같아서 도로 시선을 내렸다.
“…그만 두고 싶어요.”
“안돼요.”
“…….”
“다른 방법 생각해 봐요. 그만 두는 건 안돼요.”
“…….”
다른 방법이 뭐가 있어. 대표님이 나서서 전원우씨와 나는 아무 사이 아니니까 오해들 하지 말고 예전처럼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하고 공지라도 할 건가. 어차피 다 꼬였고 이제 회복 불가능인데. …대표님은 다른 방법 있으세요? 대표 김민규. 명패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냥 나랑 진짜로 연애해요. 그럼 내가 다 책임질게요.”
“…….”
기이임미이인규우우. 까만 획을 따라 눈으로 선을 긋는데 그런 어이없는 소리를 하니까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따질 기운도 없어서 혼잣말처럼 물었더니 왜 말이 안 돼요? 하고 되묻는다. 말이 안 되죠,
당연히….
“누가 연애를 이런 식으로 해요….”
“연애는 어떻게 하라고 누가 법으로 정해놨어요?”
“대표님 저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나도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눈을 들자 시선이 부딪친다. 표정 보니까 농담 아니라는 건 잘 알겠다. 나는 원우씨 다른 데로 못 보내요. 절대 안 돼.
또박또박 하는 말에 자꾸 헛웃음만 난다. 제가 그래도 회사에 필요한 직원이긴 했나 봐요….
“필요한 직원이라서가 아니라 전원우씨라서 안돼요.”
“…….”
이게 뭐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속은 일렁일렁한다. 다정이 병이고 듣기 좋은 말이 습관인 사람이라는 거 아는데
그런다. 귀가 또 뜨거워지는 것 같다. 눈치없는 귓바퀴. 자꾸 한숨만 나온다.
“아, 답답해.”
잠깐 정적이 내렸다가, 대표님이 갑자기 자기 가슴팍을 내려쳤다. 알았어, 알았어요. 그만 두고 싶으면 그만 둬요. 사표 써,
괜찮아. 딱히 원우의 대답을 바라진 않는지 혼자서 막 쏟아붓기 시작한다. 아냐, 아니야, 사표는 쓰면 안 되는데. 아니야,
상관없나. 정리는 자기가 좀 해야 할 것 같다. 오락가락 혼잣말을 하는 걸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 진짜 안 좋아해요?”
“……네?”
“나랑 막, 손잡구 그럴 때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진짜 한 번도 막 좀 이상한 기분 들고 그런 적 없어요?”
“……없는….”
“아냐, 아냐. 그렇게 경솔하게 대답하면 안 돼요.”
“…….”
“있죠?”
“…….”
“있잖아요.”
“…….”
“있을 건데….”
점점 말꼬리가 말려들어가면서 대표님도 흘러내릴 것처럼 쪼그라든다. 있는 줄 알았는데…. 세상 억울한 얼굴. 입술이 뾰족해지고
눈매가 다 내려앉았다. 또 헛웃음이 난다. 저러니까 있었어도 없다고 하고 싶다.
“나만 있었나봐….”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긴 그거였으면서. 원우는 그냥 웃고 말았다. 단어 하나가 머릿속을 막 떠다니는데 붙잡고 싶지가 않다. 이런
기분 드는 거 인정하기 싫다. 대표님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는 있었어요. 많았어요. 닿으면 좀 찌르르 하고 그랬어. 연애하는 척이라고 선 그을 때마다 조마조마했어. 아닌데, 진짜
해야 하는데. 언제 진짜 하자고 말하지. 말해 봤자 먹히지도 않았지만….”
“…….”
“좋아, 그럼 내가 양보할게요. 내가 욕심 안 낼게. 하나만 하자, 그러면.”
“…….”
“사표 쓰고 나랑 연애하든지, 사표 쓰지 말든지.”
“…사표 안 쓰면 연애 안 해요?”
“…….”
그건 아닌데…. 마음 다잡은 것 같더니만 도로 가라앉는다. 기가 막혀서 웃음만 나온다. 숨이 툭 터지는 것처럼 나온 웃음이
금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기어이 깔깔, 웃어버렸더니 대표님은 더 울상이 된다. 왜 웃어요. 왜.
“상황이 너무, 웃기잖아요.”
너무 웃었더니 열이 오른 얼굴에 팔랑팔랑 손부채질을 하는데 대표님은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쵸, 그렇긴 해요. 지금
상황이 좀 웃기지…. 원우씨 웃어서 다행이네…. 시무룩한 얼굴.
“그럼 뭐해, 나 안 만날 거면서….”
축 쳐진 어깨를 바라보는데 전원우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러니까 결론은 ‘전원우씨 좋아합니다, 우리 연애해요.’
이건데 지금 그 말은 한 마디도 안 하고 있잖아. 진짜,
“누가 연애를 이런 식으로 해요?”
“몰라요, 암튼 나한테는 이런 식인 것두 연애거든요?”
불퉁해서는 그런다. 이게 연애가 아님 뭐가 연애야. 진짜 바보야. 사람 마음도 몰라주고. 사표는 내가 써야겠다, 쪽팔려서 이제
회사 못 다녀. 쉴 새 없이 중얼중얼.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머릿속에 빙빙 떠다니는 문장. 그 기분, 그 느낌.
“귀여워….”
입을 열어 말할 것까진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톡 튀어나오고 말았다. 입술이 뾰족한 채로 눈을 들어 원우를 본다. 사표 쓰러
출근한 거였는데 결론이 이상하게 날 것 같다. 다 책임진다는데, 한 번 믿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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