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육오] I LOVE IT!
2021. 2. 16. 20:49

 

 

 

 

리모콘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 동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몇 번이고 났다. 내가 이래서 주말에 내려오기 싫다는 건데. 밥도 안 줄 거면서 왜 불렀어! 라고 찡찡거리기엔 나이를 좀 먹었어야지. 서른 살이 다 돼가는데 연애도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불쌍한 내 팔자. 심지어 이 잘생긴 얼굴에...! 누가 문제고 그에 대한 답이 있든 말든 나는 지금 배가 고픈 것보다는 연애가 고픈 것이 살짝 더 컸다. 볼 것도 없는 티비에 진작 전원을 껐다. 아. 무료한 삶. 밖에서 아이들이 꺄르르 웃는 소리는 이 시간만 되면 두 시간은 주욱 이어졌다. 처음엔 시끄러워서 창문도 꼭꼭 닫고 커튼까지 쳤지만 이젠 될 대로 되란 식이다. 뭐,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괜찮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몸을 뉘운 가죽 소파는 민규의 키를 감싸줄 수 없었다. 두 발이 소파를 벗어나 아무렇게나 튼 음악에 박자를 맞췄다. 오래 누워 있어서 그런지 별생각이 다 든다. 민규는 눈을 감고 어딘가 있을 신에게 마음속으로 소원(이라고 하기엔 억지스러움)을 빌었다. 

 

하늘에서 귀여운 애인이 짠 하고 내려왔으면 좋겠어요. 이것도 안 들어줄 거면 신이라는 타이틀은 지우시길 바랍니다. 신 안 믿는다고 막 뱉는다고? 그럼 귀엽고 예쁜 애 하나 내려보내 주든가! 

 

 

 

 

 

I LOVE IT!

 

김민규 전원우

 

 

 

 

 

이 주 전부터 본가에 내려오는 이유는 누나 일이 바빠서다. 누나 아들 현이는 유치원생인데 (몇 살인지 모른다.) 일 때문에 일찍 나가야 해서 프리랜서인 내가 쉴 때 가끔 봐주러 온다. 아침에 밥 해주고 집 아래까지 데려다주면 된다. 왜냐면 바로 옆이, 정말 다섯 걸음만 가면 아기자기한 성 모양의 유치원이 나오기 때문이다. 뭐, 그래서 선생님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평소처럼 삼선 슬리퍼에 잠옷 같은 트레이닝 복을 대충 걸치고 붕 뜬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휘적휘적 걸어갔다.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걸으니 불량배가 따로 없다. 밥도 안 주니 편의점 라면으로 대충 때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아이들 바깥 활동과 겹쳤는지 아이보리색 성안에서 제 키의 절반도 안 되는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귀를 찌르는 괴성에 저절로 목이 구부려졌다. 아. 타이밍 한 번 좇같네…. 굳이 매일 보는 조카의 얼굴을 또 보고 싶지는 않아서 뒷발에 힘을 더 줬다.

 

 

"어! 형아!!"

 

 

...걸렸다. 끼기긱 기름칠 안 한 로봇처럼 고개가 돌아갔다. 혹시나 저를 붙잡으면 도망칠 심산으로 몸은 집을 향하고 고개만 돌아간 기괴한 상태로 어색하게 웃어줬다. 예상대로 형아아! 하고 달려오려는 현이를 보니 눈코입이 팽창하려 한다. 좋았어. 이대로 집으로 직진하자, 하고 생각했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민규의 발을 꽁꽁 묶었다.

 

 

"안녕하세요, 민규씨!"

"..."

"아, 한 번도 안 보셔서 모르시겠구나. 저 현이 반 선생님이에요."

 

 

생글생글 예쁘게도 웃는다. 웃을 때 찡그려지는 코가 꽤나 귀여웠다. 민규는 선생님에게 인사를 건네며 히죽 웃으려다 문득 차마 눈 뜨고 못 볼 제 꼬락서니가 생각났다. 머리는 붕 떠서 대가리만 존나 커 보일 텐데... 게다가 어제 라면 먹고 자서 얼굴은 팅팅 부어있을 것이 분명했다. 제기랄! 민규는 앞에서 방긋 웃고 있는 선생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눈알을 이리저리 돌렸다.

 여기서 인사를 받아주면 대화가 이어질 것이 확실했다. 제 이름은 또 어떻게 알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아냐, 이 꼴을 계속 보여주느니 차라리 인성 없는 새끼가 되는 게 낫지 않을까? 굳게 결심한 민규는 안녕하세요. 와 안녕히 계세요 를 연달아 말하는 미친놈이 되고는 뒤를 돌아 부리나케 뜀박질했다. 아. 도망쳤다고 하는 게 나으려나? 원우는 긴 다리로 열심히 뛰어가는 민규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 체육 선생님이신가보다.

 

 

현아, 현아. 너네 선생님 이름이 뭔데? 뽀로로를 시청하는 현이 옆에서 대답해 줄 때까지 물어봤다. 귀찮다는 듯 째진 눈이 민규를 향했다. 콩알만 한 눈으로 째려봤자 타격감 조금도 없거든... 

 

 

"알려주며는 모 해줄 겅데?"

"어?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분명 뭘 바라고 한 말이다. 아니고서야 뭘 해줄 거냐 는 물음이 나올 리 없었다. 뭐. 조카 선물 하나 사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민규는 뽀로로 인형 3만 원에 선생님 이름이 '전온우' 라는 것을 알아냈다. 직접 만나 알려달라 채근하기엔 시간이 늦었다. 오늘은 이쯤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민규는 잠이 들기 직전까지 입안에서 전온우 세 글자를 굴렸다. 아니 이름도 존나 예쁘잖아. 나 금사빠 아닌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손을 왼쪽 가슴에 대고 억지로 감은 눈을 번쩍 떴다. 현이의 방에 있던 싸구려 별자리 무드등이 천장 한가운데를 촘촘히 빛냈다. 

 이름을 굴릴수록 사탕도 먹지 않았는데 느껴지는 단맛에 똑쟁이 민규는 단번에 알았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이야? 난 사랑에 빠졌어!

 

여섯 개의 눈동자가 민규를 향했다. 개의치 않는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대며 젖은 머리를 말렸다. 현이를 데려다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아니 실은 어젯밤 제 머리를 계속해서 괴롭히던 전온우의 얼굴을 다시 보려고 원래 일어나는 시간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다. 피곤에 쩔어 부은 눈을 꾹꾹 마사지 하면서도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사랑이 사람을 이렇게 부지런하게 만든다. 

  본가에 내려오기 전 머리에 조금의 투자를 한 것이 다행이었다. 머리 말리기만 해도 자연스러운 펌이 완성되어 있었다. 좋아, 좋아. 검정색 반팔티에 무난하게 찢어진 청바지. 옷 태를 살피던 민규는 이 나이에 좀 오바 했나? 싶었지만 츄리닝을 입고 만났던 그때를 떠올리면 이 정도의 이미지 변신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렴 어때. 나는 잘생겼고, 결국 전온우랑 연애할 것이다. (무논리)

 

 

"스읍 하- 오늘 공기가 왜 이리 신선하지?"

"형아. 오느른 미세먼지가 만타구 했능데..."

 

 

그, 그래? 하지만 민규는 그런 거로 멋쩍어할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이쯤 되면 김민규의 좌우명은 '아무렴 어때' 가 아닐까? 현아, 우리 심호흡 좀 하고 들어갈까? 그렇게 말하고 현이의 표정을 보니 딱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창피하게 굴어? 그래도 민규는 좋다고 히히 웃었다. 아기자기한 성안에는 처음 들어가 봤기 때문에 어떻게 생겼는지 관찰하기에 바빴다. 아이들이 신발장에 아무렇게나 붙여놓은 발자국 스티커가 귀여워 흐흥 콧소리가 나왔다.

 그나저나 온우 선생님은 어디 계시지? 민규는 그때 봤었던 둥그런 갈색 머리를 찾으려 뒤꿈치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그래도 보이지가 않아 현이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이미지 친구들을 찾아 반으로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음. 존나 뻘쭘하네…. 길 잃은 기다란 몸이 방황하고 있을 때쯤 뒤에서 누군가가 톡톡 어깨를 두드렸다.

 

 

"민규씨?"

"아, 안녕하세요 온우씨!"

"...네? 온우?"

"아. 성함은 현이한테 물어봤어요... 혹시 기분 나쁘신 건,"

 

 

눈이 동그랗게 변하면서 재차 묻기에, 함부로 이름을 알아낸 것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죄송하다는 뜻으로 눈썹을 내리면서 쭈뼛쭈뼛 물어보는데, 들려온 답은 민규의 영혼이 반쯤 날아가게 만들었다.

 

 

"아…. 그게 아니라 제 이름은 전원우 인데요..."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정적에 휩싸였다. 그리고 잠시 뒤 온우, 아니 원우씨가 웃음을 참는 듯 어깨가 들썩였다. 그러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푸하하 하고 입을 벌려 웃었을 때, 민규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또 한 번 반하고 말았다. 시간이 조금, 아주 조금 있다고 원우씨는 커피 한 잔을 내어줬다. 조그만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커피를 식히려 입술을 모으는 게 왜 이리 귀여운 건지. 민규는 제 앞에 있는 커피는 먹을 생각도 안 하고 후루룩 소리를 내며 커피를 입에 담는 원우만 쳐다봤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원우씨가 고개를 휙 들었다.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식히지도 않은 커피를 입에 댔다. 앗 뜨거! 혀를 데어버린 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래도 괜찮아요? 하고 걱정어린 눈으로 봐주는 원우씨 덕에 뜨거운 열기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멋진 모습만 보여줄 것이라 다짐했건만, 괜히 덜렁이라고 티를 내고 온 것 같아 마음속으로 제 머리에 몇 번이고 꿀밤을 놓았다. 한참을 자책에 빠져있던 민규를 보던 원우가 흐흐 하고 웃더니 앞치마 리본을 묶으며 말했다.

 

 

"민규씨 되게 귀여운 거 알아요?"

 

 

아. 심장. 민규는 저 밑으로 굴러떨어진 심장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잘하려고 할수록 자꾸 엇나가서 짜증이 밀려오던 찰나였다. 하하 어색하게 웃으면서 커피잔 손잡이만 꼼지락 꼼지락 만졌다. 워낙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니까 뭐든 잘 귀여워하는 게 천성 아닐까? 아악. 자꾸만 붉어지는 얼굴에 신경을 쓰다 보니 생각해 온 질문들이 모조리 삭제되어 백지가 됐다. 분명 저보다 나이가 어릴 것이 분명한데 대화를 이끄는 기술이 좋았다.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그냥 다 예쁘다. 자신감 폭발하던 아까와는 달리 지금은 그저 원우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꼭 칭찬을 받고 싶었던 어린 아이처럼 말이다. 

 

손목에 찬 가벼워 보이는 시계가 원우씨와 잘 어울렸다. 아, 이제 애기들 몰려올 시간이라 가봐야될 것 같아요. 단지 몇 분이라도 내어준 시간에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사람은 자신인데 어째 원우씨의 표정이 꽤 미안해 보였다. 김민규는 직진이다. 갑자기 자신감이 솟았다. 싱크대에 커피잔을 담그던 원우의 뒤로 발을 걸음해 아까 원우씨가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톡톡 노크했다. 

 

 

"...혹시, 주말에 시간 돼요?"

"주말이요?"

"시간 되면, 우리 만나요."

"아... 왜요?"

 

 

뭐지. 이건 상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민규는 뭐라고 딱히 답할 말이 없어 눈동자만 도륵도륵 굴렸다.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 아니면 조금 돌려서 말을 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한 10초 정도 거듭했다. 무작정 돌진하는 사람한테 끌리는 타입은 아닌가 보다. 방향을 잘못 잡은 건가 싶었다. 관심을 받기 원했고, 미움은 받기 싫었다. 원우는 예쁘게 진 민규의 쌍꺼풀을 보다가 문득 웃음이 터졌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어려워하지? 실은 천천히 알아가 보고 싶은 사람이기는 했다. 다만, 이렇게 적극적일 줄은 몰라서...

 제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상당한 장난기를 보유하고 있다. 머뭇거리는 모습이 보기에 안쓰럽기 까지 했다. 민규씨는 놀리는 대로 예상했던 반응이 따라와 줘서 더 웃겼다. 짐작 가능한 사람. 이젠 울리고 싶기 까지 하네, 어떡하지. 원우는 다음을 기약하며 이쯤 하기로 했다. 

 

 

"아 정말... 장난이에요, 민규씨. 그럼 토요일에 데이트하자는 거죠?"

"아, 네. 네? 데이트요?"

"싫으면 말고요."

 

 

그리고 매정하게 등을 보이려는 순간 여린 팔목을 잡아채는 두터운 손이 부드러웠다. 긴장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그렇게 허물어지게 웃으니 되려 제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아. 나 금사빠 아닌데. 민규씨가 아뇨, 좋아요. 하고 말을 했을 때 작은 송곳니가 언뜻언뜻 보였다. 흐음. 원우는 의미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귀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