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내내 같은 생각을 했다. 조금 멍한 채로 김민규와 그의 엉킨 말들을 밀어내면서도, 한밤중 혼자 걷는 골목길의 적막함 속에서도.
네가 날 무어라 생각하든 좋았다. 조금 불투명한 사람이더라도, 때론 불안하더라도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불확실함이 김민규에겐 견딜 수 없었던 거고.. 그냥 다른 거다. 질책할 부분도, 부정할 필요도 없는 차이. 맞지 않으면 만나지 않으면 된다.
이 정도의 명료한 결론이 오늘의 전원우를 비참하게 한다.
김민규를 사랑?
한 번도 그런 감정은 아니었다.
남들 앞에서 보다 미묘하게 긴장하고, 활동 중이 켜져 있으면 메세지를 날려볼지 약간이라도 고민하게 되는 사람. 이게 사랑이라면 만나기 전에서부터 설레였어야 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연락했을 터였다. 전원우는 고작 무심한 인상일 때의 김민규가 무슨 생각인지가 때때로 궁금할 뿐이었다. 예고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꼬박꼬박 받고, 갑작스레 잡히는 약속에 순순히 얼굴을 비출 때마다 딱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 그 조금의 감정이라도 없었다면 아마, 다른 대답들로 응했을 테고.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불러내지 마.
항상 무언가 넘쳐나는 너와 공백에 안주하는 나. 호감을 티내다 못해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 친하지도, 친해질 일도 없는 내게 굳이 불필요한 연락을 하는 이유가 빤히 비쳐 보였다. 그저 이해할 수 없을 뿐이었다. 굳이 적극적으로 굴고, 속내를 다 내보인다고 얻는 게 있을까. 이렇게 억지로 약속을 만들고, 몇 번 만난다고 변하는 게 있을까. 나는 네 웃음 섞인 목소리를 들은 처음부터 알았다. 우리는 많이 달랐다. 그냥, 성향 자체가.
네가 속한 무리는 과 전체였고, 책을 펼친 지는 1년이 다 되어간다고 그랬고, 놀 때는 당구고 사격이고 볼링이고 그런 것들을 항상 동반했다. 나는 동기들에게 관심 자체가 없었고, 외출에서는 서점, 옷 가게, 하다 못해 맛있는 디저트 앞에서 각자의 이야기나 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 간극이 네가 끼어들지 않은 하루를 온전한 나의 것으로 지켜냈다. 네게 드는 기분들을 적당히 가슴 한구석으로 밀어둘 수 있었다. 다 괜찮았다. 이대로만, 우리가 아닌 나와 김민규로 두면 되었다.
그런데도, 알 수 없는 사람. 너는 연락에서의 아이같은 말투와 맞대면에서의 피식 웃는 낯이 너무도 달랐다. 딱히 무언갈 하지 않아도 우주를 쌓아 올릴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이 넘쳐흐르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끌어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차이를 굳이 상기하던 날들이 빠르게 증발했고, 남는 것은 김민규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다정한 눈매 뿐이었다. 나는 김민규가 꺼내는 말들의 낭만을 곱씹다가도, 그 만남이 멎고 혼자 정류장으로 걸어갈 때면 우리의 전부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과 cc가 최악이라던데. 넌 나 때문에 캐릭터를 알지도 못하는 마블 영화를 같이 봐주고, 단 걸 먹지도 못하면서 인기 있는 디저트 카페를 검색해오는 게 지치지도 않을까. 능숙한 사람은 질색이었던 난데.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오늘 입고 올 옷을 고민했다는 따위의 작업을 거는 김민규의 어디가 좋았을까.
좋아하는 건 맞겠지. 너 때문에 면도를 조금 더 꼼꼼히 하고, 모르는 사람들만 가득한 개총 종총 뒤풀이를 나간다. 그렇다고 김민규와 연애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일종의 자존심 같은 거였다. 네게 먼저 연락하고, 보고싶다고 연락하지 않을 거라고. 전부 내 손해인 걸 알면서도 그랬다. 우린 대부분의 날에 마주치지 않고. 내 하루는 네가 없인 구멍이 나니까. 며칠만 지나면 가로등 불빛에 비쳐 환하던 네가 흐릿해졌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연락을 기다리고, 버벅댔던 순간들을 후회하며 하루를 보내느니 떨쳐내는 게 나았다. 애초에 내가 아니라도 널 찾을 사람들은 많았고, 그 현실이 와닿을 때면 네 여유와 다 안다는 듯한 웃음이 못 견디게 싫었다.
그 괜한 감정이 꼭대기까지 차오른 게 계기였다. 이번에도 김민규가 먼저 전화했고, 어쩌다 형 동네 근처라며 잠깐 보자고 그랬다. 어디 연애백과의 첫번째 장에 적혀 있을 법한 수법도, 갈아입을 옷을 찾고 있는 나도 어이없어 헛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있다. 언제나처럼 대화를 주도하는 건 너였고, 내 쪽은 이 관계의 어느 부분도 결정짓지 못한다는 사실이 마냥 거슬렸다. 그래서 어느 시점부터 관심도 없는 여자 아이돌의 신곡이라던가, 교양 수업이 끝나고 번호를 물어보던 타과생 이야길 이어나갔다. 잘생긴 얼굴이 조금씩 웃음기를 거두는 게 눈에 빤히 보이는데도.
실수였다. 네가 눈물 한 방울 없이도 울 수 있는 줄은 몰랐다. 무너진 세상을 붙들려는 표정도 처음 봤다. 형은 진짜 나한테 하나도 관심 없구나? 잘 알았어요. 내가 눈치라곤 없어서 이제서야 알았어요. 꼭 이런 식으로 티내야 해요? 아예 톡을 씹던가, 전화를 받지 말던가 하지. 사람을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들어요?
심장이 찢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무 말을 못했다. 미안해, 그 흔한 사과 한 번 못하고 도망치듯 돌아섰다.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네 음성이 귓속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김민규가 나를 좋아한다. 알고 있었는데도 네 이야기가 버겁다. 그러니까, 넌 나랑 연애라는 걸 하고 싶은 거지? 내가 지금 너한테 실수한 거지? 술이라도 마신 듯이 네 프로필 사진을 멍하니 봤다. 지금 연락한다면 뭔가 달라질까.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나는 우리가 하나도 가볍지 않은데.. 나도 우리라는 그 말의 무게가 벅차다. 호기심보다 중요한 게 서로에 대한 이해이고, 함께할 때의 안정감이고, 더 나은 만남을 위해선 변치 않는 연애관이라는 게 필요하니까. 아직까지 널 이해할 수 없다. 너 같이 활발한 애가 한 박자씩 느린 나와 무얼 하려고, 로맨스라는 걸 써봤자 어색함만 가득할 역사에 매달려서 어떡하려고..
너는 내내 너무 많은 말들을 하고, 너무 거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그래서 널 사랑할 수 없고, 그게 내가 우는 이유는 아닐 거라며 합리화하는 하루. 우린 끝이에요? 아니야, 아니야 민규야. 시작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마지막일 수가 있겠어. 내가 과거는 전부 던져버리고 너와 제대로 맞춰 나가본다면 말이 될까? 너와 함께 이 밤길을 걸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