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전도사의 말이 점점 희미해져 흩날린다. 형체 없는 빛같은게 나타나 민규, 방황하는 어린양이여. 하고 부르기에 엉겁결에 대답하자 주님이 갑자기 사랑한다는 말은 않고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니, 형체 없는 빛이어서 얼굴이나 표정따위 보일리가 없었지만 굉장히 한심히 여긴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뻘쭘한 상황이 지나기만을 기다렸으나 상황이 끝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먼저 자리를 뜨려할 즈음에 주님이 미친놈아, 라고 욕을 마구 퍼붓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욕설에 울컥해 정신이 들어 눈을 뜨자 눈 앞에 있는 건 형체 없는 빛과 같은 주님이 아니라 팔짱을 낀 채로 벌레보듯 나를 보고 있는 이석민이었다.
“신성한 교회에서 뭐가 어쩌고 저째?”
“야… 뭐냐?”
뭐긴 뭐야 이 띨빡아. 신성한 교회라면서 성경책으로 머리를 툭 치는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잠결이라 버럭 화도 못내고 아픈 머리만 매만지는 채였다.
“대체 그 형이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제발 여기서는 자제해라.”
“뭐,…”
너 전도사님 말씀 시간에 형, 형 거리면서 끙끙 앓았다고 미친 새끼야. 앞으로 내 옆에 앉을 생각 하지마라. …내가 그랬다고?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석민에게 해명을 요구했지만 없는 이야기라도 지어낸 줄 아냐며 다음엔 녹음을 하겠노라 되려 큰소리를 친다. 미친, 내가 그랬단 말이야? 한숨이 절로 나온다.
출석번호가 8번인 민규는 매월 돌아오는 8일이 싫었다. 지문을 읽게 하거나, 숙제 검사를 하거나, 수학 문제를 시키는 건 모두 그 날의 출석번호가 좌우했기 때문이었다. 하필 가장 취약한 수학을 들은 날이 8일이었다. 가뜩이나 수학 시간마다 잤던 탓에 언제 걸리나 보자, 벼르고 있었던 것을 잘 알아 등교하기가 특히 더 싫은 날이었다. 아프다고 꾀병이라도 부릴까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을 알아 울며 겨자먹기로 집 밖을 나섰다. 울적한 민규의 마음과는 다르게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춥지 않고 마냥 따스했다.
따스함을 빌어 땡땡이를 결심했다. 여태까지 공부는 못했어도 사고 한 번 친적 없이 말 잘 들어왔으니, 이 정도는 넘어가주기를 바라면서. 늦은 밤에나 운동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동네 공원을 찾았다. 벌써 개나리가 피고, 벚꽃이 핀 채였다.기왕 땡땡이 치는 김에 보람찬 일을 하고 싶어서 머리를 굴리다 보니 벤치 앞이다. 벤치에 앉아 아침에 집에서 가져온 베지밀 빨대를 입에 물고 궁리하는데 옆에서 기척이 들린다.
“……”
기척의 주인공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아마 회사원인가보다. 굳이 많은 의자 중에 제 옆자리를 고른것에 아닌척 경계태세를 취하며 빨대를 쪽쪽 열심히 빨아 대었다. 혼자 노래방을 갈까, 용돈을 털어 만화 카페에 갈까.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금의 민규에게는 최고의 고민 중에 옆에 남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아, 회사 가기 싫다.”
“……”
들으라는 듯이 건네어 온 말. 대꾸를 해야할까? 슬쩍 눈치만 보다 만 민규가 다시 핸드폰에 눈을 쳐박았다.
“왜요?”
천성이 말 하기를 좋아하고, 들어주기를 좋아하는 민규는 결국 그 말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내내 핸드폰에 쳐박혀있던 눈을 돌려 남자를 쳐다본 민규가 동시에 입을 열어 묻는다.
“일하기 싫으니까.”
거창한 대답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당연한 말이다. 무슨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입에서 나온 대답은 너무 시시했다. 민규가 예… 하고 성의없이 대답하자 서운한 얼굴로 회사원 되봐라, 이만한 이유가 없지. 토를 단다.
“왜요. 회사원 멋있잖아요.”
“학생 눈엔 지금 내가 멋있어보여?”
남자의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잘생기긴 했는데, 멋있어 보이는건 뭘까. 지금 양복만 달랑 입고 있는 남자에게 예의상 멋있다고 해줄만큼 착한 학생은 되지 못했다. 아니 뭐, 하며 말을 얼버무리는 민규를 보며 남자가 웃는다.
“난 학생이 더 부러운데.”
“엥.”
“학생. 것도 고딩이잖아.”
학생 만만하게 보지 말아요. 고충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번에는 민규가 토를 단다. 그럼, 알지. 민규의 말에 훈계는 커녕 그럼, 하고 대답하는 모습이 민규 눈에는 이상적인 어른으로 보인다. 너희들 때가 좋은 때야 따위의 훈계를 들을 각오로 한 말이었는데. 어느새 경계태세를 풀어 무장해제 된 민규가 그쵸, 맞아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등교시간은 지난 후였다.
“왜 학교 안가?”
“그럼 형은 왜 회사 안가요.”
그럴려고 그런건 아니었는데 불퉁한 말투가 튀어 나왔다. 그럼에도 남자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오히려 알아채지 못하는듯 했다.
“말했잖아. 일하기 싫다고.”
“그럼 안 잘려요?”
“모르겠는데. 전화는 계속 와. 너는 왜 안가?”
“오늘 8일이라서 가기 싫어요.”
“왜?”
출석번호가 8번이라서 오늘 종일 시달릴 생각을 하니 스트레스가 몰려왔다고, 얘기를 하려다 말아버린다. 솔직한 그대로인데 왜 말하기가 부끄럽고 몸이 베베 꼬이는지 모르겠다. 머뭇거리는 민규를 보더니 남자가 대충 알겠다는 듯이 가기 싫을 때도 있지 뭐. 나도 비오는 날 가기 싫고, 과음한 다음 날 가기 싫고 그래. 하고 말을 가로막는다.
“아니요, 제 출석번호가 8번이거든요.”
“…에?,…”
“오늘 하필 수학이랑 영어 다 들었어요. 뻔히 저 시킬거 아니까 가기 싫어서 버티고 있는 거에요.”
민규의 말에 남자가 그래도 진지하게 듣는 시늉을 해준다. 그래, 8일이라서. 니가 8번이어서. 속으로 그럼 8일마다 학교에 안갈 셈이냐는 말은 넣어둔다. 오늘 하루만 마음이 동한 날이라는 걸 이해했다.
“그래도 아직 너 시킬지 안 시킬지 모르잖아.”
“…분명 시킬거에요.”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벌써 걱정해.”
말해놓고 눈치를 본다. 적어도 열 살은 어릴 민규의 눈치를. 아니나 다를까 원우의 말에 입술을 비죽이며 툴툴거린다. 그게 마냥 어려 보인다기 보다는 귀여워서, 더 놀리고싶은 욕구를 꾸욱 눌러담는다.
“사실 나도 오늘 사람들 다 모인 자리에서 PT 자료 발표해야하는게 있는데, 그게 너무 하기 싫어서 도망쳤어.”
“……”
“나도 잘할 수도 있는 일을 미리 걱정해서.”
“잘할 거 같은데, 왜요?”
“그치. 나도 내 눈에 니가 오늘 잘 버틸 수 있을것 같은데 왜 그랬나 싶어.”
모르는 남이 보기에 이렇게 멀쩡한데, 왜 스스로 못 믿어서 그랬을까. 다소 시적인 남자의 말에 민규가 그러게요. 하고 수긍한다. 하지만 이미 오늘은 결심을 했고, 늦었고, 지나고 있으니.
“형.”
공 원 화장실에서 쭈뼛대며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어색함 그 자체였다. 태어나 처음 입어본다며 제게는 조금 짧은 팔과 바짓단을 만지작 거리며 들뜬 얼굴의 민규와 10년만에 처음 입어 본다며 폼이 조금 넉넉하지만 적당한 교복을 한참 보는 남자.
이미 오늘은 늦었으니, 한번 바꿔보자고. 재미있지 않겠냐는 민규의 꼬임에 넘어갔다. 막상 화장실 칸에서 옷을 갈아 입을 때는 왜 그랬을까, 하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어른이 된 것 같다며 좋아하는 민규를 보며 왜 저는 어려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까. 그래도 이 상황이 꼭 영화에서나 나올 것처럼 특별해서 자꾸 실없이 웃음이 새어 나온다.
교회에서 먹는 밥은 늘 맛있다. 대부분이 그저 그런 심심한 간을 한 나물일 뿐인데도. 식판에 코를 박고 먹다가 야 근데 너 그날 왜 그랬냐? 묻는 이석민에 고개를 들었다. 이석민은 드럽다 드러워, 하면서 내 볼에 붙은 밥풀 몇개를 떼어 주었다.
“그 날 왜 학교 늦게 왔냐고. 나는 알아야지 않겠냐?”
“니가 뭔데.”
뭐긴 뭐야 니 형님이지. 대답을 회피하는 내 의도를 눈치채고 장난으로 넘어가준다. 밥이나 먹어라, 개맛있다. 나 역시 다른 말로 회피하듯 피해버렸다. 섭섭한지 난 이미 다 먹은 거라며 숟가락을 놓는 이석민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에이 씨, 나도 그만 먹을래…”
“야 뭐야. 기다릴테니까 다 먹어.”
“안 먹어.”
뭐야, 개복치냐 너. 장난으로 하는 말인거 아는데도 이석민의 말처럼 개복치라도 된 양 예민해서는 숟가락을 팍 놔버렸다. 땡그르르, 굴러가는 숟가락. 놀란 이석민의 두 눈. 저지르고 후회하는 나.
벤치에 앉아 교과서를 얼굴에 덮고 잤다. 눈을 떠보니 민규의 손이 남자의 손 위에 겹쳐져 있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세상 편하게 잠든 남자의 옆 모습을 보던 민규가 다시 고개를 젖혀 기대었다. 강렬한 햇빛에 게슴츠레 눈을 뜨고 가만히 하늘을 보았다. 꼿꼿한 개나리와 다르게 이리 저리 바람따라 흔들리던 벚꽃이 흩날려 교과서 위에, 그리고 남자의 머리 위에 살포시 얹어졌다. 떼어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팔을 뻗어 앞머리 위에 자리한 꽃잎을 떼어주는 순간 남자가 제 얼굴에 덮어져 있던 교과서를 내렸다. 눈이 마주쳤다.
“너 잘생겼다.”
“……”
잘생긴 애가 자꾸 쳐다보니까 잠을 못자겠어. 그래놓고 다시 교과서를 얼굴 위에 덮어 잠만 잘도 잔다. 괜한 말에 쿵쿵거리는 건 오히려 민규 쪽이었다. 이상한 형이네 진짜. 떼어주려던 것도 멈추고 민규 역시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았다. 방금 마주친 눈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석민은 겉으로만 센척하지, 사실 속은 여린 놈이 분명했다. 아까 내 행동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 피시방에 가자는둥, 아님 노래방을 쏘겠다는둥 하기에 거듭 괜찮다고 사양했다. 아님 대체 뭐냐고오, 이대로는 보낼 수 없다는 듯이 바짓 가랑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나 교회 그만 다닐까.”
“뭐?!”
“생각이 많아졌어.”
“야 왜그래 대체…”
마치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과장하는 이석민에 그냥 하는 말이야 뭘 또. 하고 둘러 대었다. 니가 그런 말을 그냥 할 애가 아니니까 그렇지. 뒤따라오는 말에 그건 또 그거대로 일리가 있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 형을 본 이후에 내가 여태까지 배워왔던 교리에 혼란을 느끼게 되었다. 심지어 오늘은 말씀 시간에 졸면서, 졸면서…
“야. 담배 피고 술 마시고 섹스해도 교회 다 잘만다녀. 범죄자도 교회 잘만 다니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너 진짜 이상하다.”
“……”
“아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이 있긴 있나보다 싶은지 이것 저것 말은 해주는데 그 와중에 또 문득 서글프다.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나 요즘 사춘기인가봐. 애써 아무렇지 않은척 웃으며 결국 가고싶지 않았던 피시방에 가자고 반대로 이석민을 달래었다. 이석민이 말한 위로 중에 같은 남자 좋아하는 사람도 교회 잘다닌다고, 그 말이 없는게 이렇게 서운할 수가 없다. 안중에도 없는건지, 아님 그것만은 아닌건지 알 수가 없어서.
민규보다 먼저 일어난 남자는 민규의 교과서를 읽는 중이었다. 새빨간 직선이 가득한 교과서는 민규가 이 과목에 얼마나 취약한가를 가늠하게 해주기도 했다. 가끔 코까지 골며 자는 민규를 슬쩍 슬쩍 보며 웃은 남자가 교복 바지에 있던 펜으로 풀이 과정을 써내려 가본다. 나도 이때는 이게 그렇게 어렵고, 할 줄 몰랐는데. 하면서. 답은 알려주지 않은 채로 풀이 과정을 뒷 페이지까지 풀어주고 뿌듯하다는 듯이 웃어본다. 지긋한 시선에 결국 눈을 뜬 민규가 흘러 마른 침을 빨개진 얼굴로 닦으며 언제 깼느냐 묻는다.
“점심 시간에는 들어가야지.”
“어,… 들어간다고요?”
“진짜 땡땡이치면 답도 없어. 옷 갈아입고 가자 얼른.”
애써 무시했던 부재중 전화와 문자 메세지에 결국 타협하게 되는 현실이다. 안 잘리냐는 말에 모르겠다고 했지만 자꾸 드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는거다. 남자의 채근에 민규가 할 수 없이 일어나 다시 화장실에 들어간다. 옷을 벗는 소리가 아까와 달리 조급하다.
다시 갈아입고 나온 민규의 얼굴에 근심, 걱정이 가득이다. 모를리 없는 남자가 혼날까봐 그러느냐며 민규를 달랜다. 막상 저지르고보니 무섭긴 하다. 오늘이 됐든, 내일이 됐든. 그런 민규에게 남자가 학교에 전화해둘테니 걱정 말라고 그런 말을 한다.
“어떻게요?”
공원 끄트막에 세워져있는 차 한대. 너는 나랑 병원에 다녀온거야 알았지. 남자의 말에 민규가 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편한 차 두고 왜 벤치에 앉아 그렇게 있었냐고. 궁금함이 가득한 민규의 눈.
“너 만나려고 그랬나보지.”
무심하게 던진 말에 민규가 또 흔들린다. 학교에 데려다줄까? 이번에는 자동반사적으로 고개를 젓는다. 혼자 갈 수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말고, 잘할 수 있어.”
“형도요.”
민규의 말에 남자가 빙글 웃는다. 누가보면 엄청 유난이라고 하겠어. 뒤이은 말에 민규가 유난 맞죠 뭐. 하고 의연한 척을 한다.
“갈게.”
“아…”
“잘가 민규야.”
민규야? …갑작스러운 제 이름 호명에 놀란 민규가 어느새 몇 걸음 떨어져있는 남자를 보며 어떻게 알았냐 되묻는다. 내내 명찰을 달고 있었으면서, 교과서에도 크게 제 이름을 써놓았으면서. 남자가 민규 몰래 손에 쥐고있던 명찰을 쭉 뻗어 보이며 손을 흔든다.
“니 이름 내가 훔쳤어.”
그러는 형은 이름이 뭐냐고 묻고싶었는데, 그마저도 까먹어버렸다. 차를 세워둔 곳과 버스 정류장은 정 반대인 상황이 얄미울 정도로 아쉽기만하다. 훔쳤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그깟 명찰 새로 받으면 되는거지만. 정말 이상한 아침. 그 끝에는 그저 두근거림 뿐이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는데.
“너 머리 위에.”
이제는 조그마하게 보일 정도로 멀어진 남자가 큰 소리로 너 머리 위에, 하면서 머리를 터는 시늉을 해보인다. 얼떨결에 제 머리를 털자 발 아래로 분홍색 꽃잎이 날린다.
피시방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미친듯이 게임만 했다. 좋아하는 컵라면도 마다하고 열중하다보니 곧 가야할 시간이 다가왔다. 야 이제 가자. 다크서클이 퀭하게 내려온 이석민이 황급히 컴퓨터 전원을 끄고 계산을 하러 뛰어간다.
“봄은 봄인가봐. 안추워.”
“어 그러게.”
“…너 지난 주부터 왜그러냐?”
“뭐가 또.”
“뭔가 이상해. 야 여자 소개라도 해줘?”
“니가 여자가 있다고? 너나 사겨.”
본의아닌 일침에 이석민이 입을 쩝 다시며 그르게, 나나 사겨야지. 하고 제 코를 퍽 치더니 내 코가 석자라고 웃는다. 웃기냐 그게. 혀를 끌끌 찼더니 더 냉정해졌다며 고개를 젓는다.
“나 아빠랑 갈건데, 데려다 줘?”
“아니. 나 먼저 간다.”
“어. 내일 봐.”
가게 앞에 멈춰선 이석민과 헤어졌다. 꼬불 꼬불 엉켜있는 이어폰을 가까스로 풀어내 귀에 꽂고는 음악을 재생 시켰다. 피시방을 나올 때만해도 피곤한 마음에 빨리 씻고 자야겠다 생각 했는데 막상 혼자 밖에 있으니 공원에 들르고 싶어졌다. 어떤 기대없이 간다면 그건 거짓말일테고. 걸음을 재촉했다.
일요일 늦은 저녁이라 사람이 많이 없을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사람은 많았다. 그 많은 사람중에 내가 찾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괜히 실망스럽다. 주위를 둘러보다 그때 앉았던 벤치가 비어 있어 엉덩이를 붙였다. 지난 주만해도 풍성하던 벚꽃이 벌써 앙상해졌다.
“김민규 안녕.”
앉아있는 앞으로 그림자가 지기에 고개를 들었다. 내심 예상한 채로 든 고개. 마주친 건 생각했던 그 사람이 맞았다. 말로 할 수 없을만큼 기분이 좋고 기쁜데 앞에 선 형은 마냥 즐거워보이지 않아서 웃으며 반겨줄 수가 없었다.
“그 날 학교는 잘 갔어?”
“네. 형은요.”
“잘 갔지. 좀 혼나긴 했지만 안 잘렸어.”
만나면 이름을 훔쳤다는게 무슨 말인지, 그리고 형 이름은 뭔지 묻고 싶었는데 그런 생각이 하나도 안 난다. 당장 보고싶었던만큼 많은 말이 나올거라 생각했는데 꽁꽁 얼어붙어 묻는 말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근데 형, 살 더 빠졌어요?”
“그래 보여?”
“더 막, 안좋아 보이는데 아닌가.”
보았던 그 날보다 살이 더 빠져 헬쓱하다. 주제 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영 좋아보이지 않는 얼굴에 안부를 안 물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심 어쩌면 나와 같은 이유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어린 기대가 자꾸만 샘솟았다. 아닌척 기대하며 찾았던 공원에 마침 형이 있었고, 먼저 아는척을 해온 것처럼.
“공부 잘했어?”
“공부야 뭐, 늘 그렇죠…”
“난 일이 손에 안 잡히더라고.”
“……”
“모르겠어.”
모르겠다는 말투가 새침하다. 내내 무표정으로 툭툭 뱉던 얼굴이 점점 울것처럼 일그러져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어쨌든 너 봐서 이제 됐다. 맨날 출근도장 찍느라 피곤해 뒤지는 줄 알았어.”
“맨날 왔다고요?”
“응. 허탕이긴 했지. 니가 안와서인지, 타이밍이 안맞아서인지.”
“……”
“근데 막상 보니까 양심에 뭐가 찔려.”
교복이랑, 양복. 너무 아닌것 같애. 아닌것 같다는 것에 대한 기준이 뭘까. 무엇을 기준으로 말하는걸까. 물론 어른이 어린애를 꼬셨다는 생각 따위 할 수 있겠지만 결국 그런걸 다 깨고 보러 왔다는 건 결심했다는거잖아.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하필 주일에 유년부 시절부터 다녔던 교회에 대한 교리의 혼란을 겪고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왔다는건 나도 결심했다는 건데.
“뭐가 찔려요.”
“그러게.”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벌써 걱정해요 형.”
지난 번 형이 말했던 말을 그대로 써먹고 눈치를 보았다. 이러나 저러나, 이 말은 누가 하든 눈치를 보는건 내 몫이구나. 형이 동글 동글한 머리를 굴리더니 엇. 하고 소리를 내며 나를 쳐다본다.
“그거 내가 했던 말 같애.”
“맞아요.”
그 뒤로 말이 없다. 나도 말없이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어,…”
바람이 불면서 또 위에 있던 꽃잎이 형 머리 위에 앉았다. 그때 차마 떼어주지 못했던 게 생각이 나 머리에 있던 꽃잎을 떼어 주고는 형의 앞에 내밀었다. 또 있을거라 생각한건지 머리를 탈탈, 제 손으로 털어낸 형의 머리가 엉망이 되었다.
“이거.”
“네?”
한참 가만히 있던 형이 먼저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 준다. 작은 종이. 명함이었다.
“거기에 다 있어. 내 이름도, 번호도.”
“……”
“가져 너. 줄게.”
서툴다. 몸을 꼬면서 말하는데 귀가 새빨갛게 익어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일주일 내도록 마음이 거슬리고, 저리고, 예민했던거구나. 다시 한번 자각하며 내민 명함을 빤히 보았다.
“전원우. 네요. 이름이.”
“…엉,…”
“나도 형 이름 훔쳤어요 이제.”
아까만해도 봄이 왔다고, 이제 춥지 않다고 했는데 바람이 세차게 부니 아주 안 추운것도 아니다. 덕분에 벚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흩날린다. 봄을 알리는 것은 벚꽃이라더니. 꽃잎 하나가 마음에 안착해 간질거리는 것만 같다.
봄은 비로소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