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또] 무저갱 上
2021. 2. 15. 17:28

 

 

 

 

 

 

구중궁궐 안에서 가장 구석에 있는 곳. 냉궁은 유배지였다. 죄를 짓지 않았지만 왕의 시선에 멀어졌다는 이유로 죄인이 되어 갇힌 곳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았고 나오는 방법은 하나, 송장으로 장례를 치루는 것이었다. 냉궁에 갇힌 이들은 얼마 가지 못하고 싸늘한 주검으로 궐 밖으로 버려졌다.

 

그 곳에서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보낸 이가 있었다.

 

무저갱 上

 

 

 

희빈 안씨의 소생인 원우는 돌 때 녹영군이란 군호를 받고 8살에 세자 책봉이 되었다. 아직 중전이 젊은데 후궁의 자식을 국본으로 삼는 것은 이른 것은 아니냐는 말이 나왔지만 왕의 결단을 말릴 수는 없었다. 청렴한 가문의 여식인 희빈 안씨는 간택 후궁으로 입궁하여 왕의 총애를 듬뿍 받은 여인이었고, 왕에게 첫 자식이었으니 왕은 어떻게서든 원우를 세자로 삼고 싶었다. 중전은 탐탁치 않아 했으나 그 때는 도무지 명분이 없어 이렇다할 반대도 못하고 아들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세자는 영민하여 자신을 내켜하지 않은 중전에게도 효를 다 했다. 무엇 하나 빠지지 않은 완벽한 세자였다.

 

14년만에 중궁전에 원자가 태어나기 전까진.

 

원우는 자신의 손발이 생경해 마구 휘두르는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를 닮은 자신과 달리 임금의 용안을 빼다박은 이복동생이었다. 왕을 바라보았다. 세자가 된 이후 늘 엄격했던 왕은 자애롭게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우는 직감했다. 이가 나지도 않은 이 아기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적이라는 것을.

 

조정에서는 세자를 폐위하고 왕의 적자인 원자를 세자로 책봉 해야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집안이 바로서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선다는 성균관의 상소가 왕의 턱 밑까지 올라왔다. 왕은 아들을 선택해야 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는 모두가 원우를 떠받들었지만 이제는 자신을 밀어낼 생각만 하고 있었다. 원우는 점점 더 예민해져 작은 일에도 뾰족히 굴었다. 옷을 입기 싫다고 했고, 스승을 돌려보내기도 했다. 중전의 육촌인 세자빈을 더 이상 보지 않겠다고도 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서 있는 땅이 점점 더 줄어드는 불안감을 어쩌지 못했다. 희빈은 어릴 적부터 잘 놀던 배동을 입궁시켜 기분을 풀어주려 하였으나 세자는 동궁전의 문을 걸어잠구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였다.

 

세자가 온양행궁을 가는 길에 말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 말을 제 몸처럼 다루던 세자였기에 낙마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원래 세자가 타던 말이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급히 다른 말로 바뀌긴 하였으나 세자가 적응치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세자를 음해한 것이라며 진상을 규명 해야 한다 했지만 세자를 잘 모시지 못했단 이유로 관리자와 말 모두 즉시 참형을 당해 진상을 밝히기가 어려웠다. 낙마한 세자는 불행히도 다리도 허리도 멀쩡하였으나 딱 한 곳, 머리를 크게 다쳤다. 즉시 궁으로 옮겨진 세자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명의를 의술을 받고도 도통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낙마를 한 뒤 원우는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렸다. 어미인 희빈 안씨는 아들이 세자란 이유로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동궁전 앞만 서성였다. 대신 탕약을 들고 간 중전이 말하기를, 가끔 정신 차릴 때가 있었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원우는 꼬박 열흘을 앓고서야 열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간간히 뜨던 눈꺼풀은 돌덩이처럼 무겁게 가라 앉아 총명하던 눈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의는 세자가 죽지는 않았으나 죽은 이와 비슷한 상태라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은 중전의 소생인 어린 원자를 택하였다. 왕의 말 한 마디에 동궁전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래도 한 때 세자였던 이를 병든 채로 사가로 내칠 수 없어 냉궁으로 보내었다. 녹영군으로 강등된 폐세자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눈을 떴다. 깊은 땅 속에 있다 나온 듯 했다. 희빈 안씨는 아들이 눈을 떴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다. 내관을 붙잡고 아들이 괜찮은지, 어미는 기억하는지 물었다.

 

“마마님, 송구하오나 녹영군 나으리는 ...”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모든 것을 잊으셨습니다. 희빈은 처소 앞에서 짐승같이 울었다. 차라리 죽지. 차라리 죽어 궐 밖으로 나가지. 땅을 긁어 손톱이 부서졌다. 가여운 내 새끼 어떡하나. 죽어도 한이 쌓여 구천을 떠돌면 어떡하나. 희빈 안씨의 울음 소리가 황량한 궐 안을 맴돌았다.

 

냉궁에서 깨어난 이후 아랫것들도 더 이상 자신의 주인을 모시지 않고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만 챙길 뿐이었다. 녹영군은 버석한 모래가 씹히는 밥상을 받고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입이 쓰다는 이유로 상을 물렸다. 금지된 것이 많아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제대로 된 옷을 받지도 못했고 서책을 읽는 것도,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것도 허락 되지 않았다. 그저 오후의 한 때 잠깐 들어오는 빛을 따라서 방 안을 걷는 것만이 유일한 일과였다. 녹영군이 자신의 처지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미쳐버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람의 말 대신 짐승 같이 소리내고 밤이 되면 냉궁 안을 휘젓고 다닌다고 하였다. 하지만 임금은 자신의 아들의 소식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했고 녹영군은 살아있는 귀신 같은 존재가 되었다.

 

왕이 몸져 누었다. 까닭 모를 병세가 깊어져 그저 자리만 보존하고 있는 날이 길어졌다. 중전은 내밀한 의논 끝에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원래는 양위를 하려고 했으나 주상이 승하하기 전까지는 절대 옥새를 내어줄 수 없다는 대비의 말에 한 발짝 물러선 결정이었다. 녹영군이 폐세자가 된 이후 동궁전의 주인이 된 세자는 잔정이 많고 소박한 성정이었다. 대리청정을 하면서부터 냉궁에 갇혀 있는 자신의 형에 대해 궁금해 하는 날이 많아졌다. 아버지가 있을 때는 감히 생각조차 못 하던 존재에 대하여 질문들이 늘어났다. 녹영군의 상태가 전과 다르지 않은가? 이 추운 날에는 어찌 견디고 있는가? 조정은 폐세자를 내쳐도 모자를 판에 녹영군을 챙기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통촉 해달라 하였다. 세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다 잊고 유령처럼 살아가는 폐세자가 자신을 위협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자는 더 뜻을 관철 시킬 수가 없었다. 아직 왕도 아닌데 맘대로 조정을 휘두르려 한다며 자신의 자질을 논할 것이 뻔했다. 세자는 알겠다며 손을 내저으며 형님에 대한 말을 아꼈다.

 

그러나 조정 대신 모두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자가 녹영군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안 이조판서 김순익은 그 날 밤 몰래 대비전을 찾았다. 김순익은 희빈 안씨의 숙부로 녹영군이 폐위가 된 이후 몇 차례의 숙청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자신의 조카를 입궁시킨 대비를 찾아가 세자가 녹영군을 불쌍히 여기고 있다고 전했다. 대비의 눈이 반짝였다. 며느리인 중전의 기세에 눌려 이제는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하였다는 말을 듣고 있긴 하였으나 대비는 험난한 궁궐 생활을 버텨내 궁의 최고 웃전이 된 이였다. 주상께서는 녹영군을 한 번도 들여보지 않았는데, 세자가 이리 형님을 챙기니 얼마나 우애 깊은 형제지간입니까. 대비는 자글한 주름을 접어보이며 동궁을 불러 칭찬했다. 세자 옆에는 대전에서 거세게 반대한 영의정도 앉아있었다.“허나 조정의 뜻도 이해가 됩니다. 종친이 궐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하니까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영의정은 대비를 통해 세자의 기를 꺾어놓고 싶었다. 녹영군은 더욱이 폐세자이니, 대신들이 반대할만 하지요. 세자는 녹영군이 그럴 위인이 안 된다고 하려다 이어진 대비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녹영군이 미친 자처럼 궁을 돌아다니게 둘 수도 없는 법. 그리 되면 왕실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동궁은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대비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사람을 붙여 녹영군을 보살피도록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대감. 감시의 역할도 가능하니 분명 세자에게 실은 아닐 것입니다. 호위를 지키게 하는 것이니 여차하면…여차하면? 우리 세자의 앞 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세자는 앞일을 내다보는 대비에 순진한 웃음을 내보였다. 빈틈 없는 명분이었다. 영의정은 제 뜻과 달라진 흐름에도 거스르지 못하고 수긍했다.

 

“대비마마의 뜻이 그렇다면, 녹영군 호위를 맡을만한 사람을 제가 알아보겠습니다.”좋은 재목으로 부탁합니다. 대비는 선선히 그리 하라며 식은 차를 마셨다. 쓸만한 장작이 와야할 텐데. 불씨는 살렸으니 제 몸을 태워 불길을 만들어 낼 이.

 

며칠 후 평생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냉궁의 문이 열렸다. 녹영군은 정좌를 하고 자신의 호위무사의 인사를 받았다.

 

“녹영군 나으리를 뵙습니다.”

 

선비의 얼굴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이목구비를 지닌 김민규는 대대로 무관을 해온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비변사의 낭청으로 등용된 인재였다. 변방에서 오랑캐들을 잡던 할아버지를 따라 무관이 되고 싶었으나 더 이상 문관들에게 무시를 당하기 싫다는 아버지에 민규는 뜻을 꺾고 문관으로 조정에 들어왔다. 영의정은 그런 민규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왕의 밀명을 받아 일을 처리 할 수 있는 비변사의 관리. 조정에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싶은 정 3품 당상관의 손자. 민규는 여러모로 쓰기 좋은 패였다. 세자가 직접 불러다 앉혀 녹영군을 잘 보필해달라 하자 민규는 충직하게 명을 받들었다. 예로부터 북방 사람들이 거칠어도 왕께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민규를 낙점한 영의정이 만족스럽게 웃어보였다.

 

‘대외적으로 너의 임무가 녹영군의 호위를 맡는 것이긴 하나 언제라도 녹영군을 끝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야. 녹영군은 세자 저하의 적이니라. 네 집안의 영화가 네 칼끝에 달려있음을 항시 명심하거라.’

 

“오늘부터 녹영군 나으리의 호위를 맡게 된 김민규라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들리는 소문과 달리 나긋한 말씨에 민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녹영군을 바라보았다. 통성명을 해야겠지요. 난 원우라고 합니다. 왕족이라면 군호가 있어 웬만해선 자신의 자를 말하지 않는데 원우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왕족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무례임에도 원우는 타박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내보였다. 그것이 둘의 첫만남이었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목숨을 쥐고 있다 하기에는 평화롭고 잔잔한 시작이었다.

 

 

냉궁은 쥐죽은 듯이 고요하다. 소주방에서 음식을 가져오는 일을 빼면 사람이 드나드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 말은 즉슨, 호위를 맡은 민규가 할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처소 앞을 지킨지 며칠이 지났지만 이따끔씩 먼지만 굴러다닐 뿐이었다. 민규는 지루해질 때마다 허리를 곧게 펴며 잡생각을 지우려고 했다. 예를 들면 녹영군에 대한 소문이 거짓이 아닌가, 하는. 민규가 지켜본 바로는 원우는 미쳐버렸다 하기에는 지극히 얌전하고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날이 추우니 안 쪽으로 들어오세요.”

 

그 때 민규가 서 있던 옆 쪽에서 창이 벌컥 열렸다. 원우였다. 작은 창에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말하는 투가 왕족이라 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다 잃고 방치되었으니 규범또한 까먹었겠지. 민규는 괜찮다고 하며 한발짝 물러섰다. 문고리를 쥔 원우가 가까이 오라며 민규에게 손짓했다. 그 명까지 어길 수 없기에 민규는 원우에게 다가갔다.

 

“날 감시하려면 나와 같이 있는 것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원우는 분노에 휩싸인 것도, 그렇다고 민규를 조롱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사실을 나열하듯 차분하고 명확했다. 민규는 들켰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원우는 그 얼굴이 재미있었다. 장원이라더니, 꽤 순진하십니다. 나으리, 그 것이. 얼른 들어오세요. 찬 바람 들어옵니다. 원우는 말을 마치고 다시 고개를 집어넣었다. 남겨진 민규는 고민을 하다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원우는 민규를 영의정이 보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대리청정을 하게 된 세자가 혹시 모를 변수를 대비해 민규를 보냈다고 알고 있었다. 세자 저하 수가 밝으시네요. 첫날과 다르게 묘하게 흩어진 자세로 민규의 존재를 묻는 원우는 딱히 민규를 경계하진 않았다. 대신 민규의 허릿춤에 차고 있는 칼을 주길 원했다. 내게 들킨 벌입니다. 민규는 명을 거둬달라 고개를 숙였다.

 

“이걸 드리면 저는 무슨 수로 나으리를 지켜드립니까.”

 

비록 원우가 말했던 것처럼 민규가 원우를 감시하는 것이 맞았지만 민규는 정말 원우를 지키는 것도 제게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세자가 직접 그러지 않았던가. 제 형님을 잘 보필해달라고. 영의정보다는 앞으로 제가 모시게 될 왕의 명이 더 중한 법이었다. 허리의 차고 있는 칼을 꼭 쥐고 있던 민규에게 원우가 물었다.

 

“내가 칼에 맞을까 두렵습니까.”

“네?”

 

말갛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녹영군은 민규를 바라보지 않고 창 밖 높은 담을 내다보며 말했다.

 

“난 그것이 소원입니다.”

 

칼이든, 사약이든 기쁘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내 안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죽음에 초연한 원우에 민규는 까닭모를 안쓰러움을 느꼈다. 원우의 목숨을 쥐고 있는 사람이 느끼기엔 다소 감성적이었다. 아직 민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날 이후, 칼을 차는 것이 금지된 것을 시작으로 민규의 행동에는 몇가지 제약이 생겼다. 이왕 감시도 하고 호위도 해야하는 것이라면 침소를 옮기라고 하여 원우와 같은 방에서 자야 했다. 민규는 왕족과 함께 자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이어진 원우의 간단한 협박으로 민규의 말을 무시했다.

 

“그럼 지금 세자께 가서 정체를 들켰노라고 고하세요.”

 

그 뿐이 아니었다. 침소를 함께 쓴단 이유로 책 읽는 것도 금했다. 민규가 독서하는 것을 보면 따라서 읽고 싶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말도 안되는 억지라 하기엔 정말로 원우가 폐세자이기 때문에 뺏긴 것이어서 억울할 듯 싶었다. 민규는 고민했다. 서책을 읽는다고 원우가 왕위를 탐내게 될 것 같진 않은데. 이건 어떠십니까, 나으리.

 

“제가 소리 내서 책을 읽겠습니다.”

 

그러면 나으리께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니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민규는 원우의 답을 기다렸다. 좋습니다. 만족스러운 결과에 민규가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 웃을 줄도 안답니까. 동그랗게 올라왔던 광대가 다시 내려갔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순진했다.

 

그 뒤 원우는 민규가 읽어주는 것을 들으며 소학을 익히고, 중용과 대학, 논어를 배워가기 시작했다. 혹시 소리가 담너머로 넘어갈까, 서로 무릎이 닿을 정도로 붙어 앉아 책을 읽었다. 하루는 원우가 어디서 구했는지 야한 서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왕가의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나으리. 원우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모른체 했다.

 

“이게 뭔 책인데요? 상궁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고 해서 받은 책인데...”

 

나는 책을 읽을 수 없으니 얼른 소리내 읽어보세요. 더는 명을 어길 수 없어 민규는 귀와 목덜미를 새빨갛게 붉힌채로 책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너무 야해서, 듣던 원우가 책을 황급히 덮은 것은 둘만 아는 비밀이었다.

 

하루종일 원우와 붙어있게 된 민규는 원우에게 연민을 느낄 때가 많아졌다. 가령 계절에 맞지 않게 얇은 옷을 입고 있어 옷을 더 챙겨 입으라 말하면 원우는 잠깐 부끄러워하다 이내 웃으며 답했다. 옷이 없어서 그럽니다. 옷을 받은 적이 몇 해가 지났다고 했다. 또 언제는 밥을 늘 남기길래, 밖에선 밥을 먹지 못하는 백성들이 많다고 했다. 원우는 조용히 자신의 밥 안쪽을 들어 보여줬다. 모래와 돌이 군데 군데 섞여 있었다. 일을 하는 사람은 몇 없는데 밥을 삼시세끼 챙기는 것이 얼마나 번거롭겠습니까. 원우는 홀대를 받아도 화내는 법 없이 온화했다. 민규가 종친을 무시하는 것은 곧 왕실을 능멸하는 것입니다, 해도 원우는 손을 저으며 괜찮다고 할 뿐이었다. 누가 나를 왕족이라 생각할까요. 민규는 그럴 때마다 가슴이 철렁였다.

 

그래서 지켜보기만 한다는 것이, 맴돌기만 한다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기어코 손을 뻗어 옷고름을 매어주고 뒤척이느라 내려간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이유 없는 호의를 받아본 적 없는 원우는 예민하게 받아드렸다. 민규는 뻔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는 녹영군 나으리의 호위니 챙겨드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불쌍해서는 아니구요.”

 

민규는 정말 아니라고 말 하려다가 관두었다. 정말 아닌 것 같아서.

 

원우는 이따끔씩 밤 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일이 있었다. 민규는 황급히 원우를 찾아 나섰다. 원우는 멀리 가지 않고 처소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나으리”

 

원우는 잠이 오지 않아서 나왔다고 했다. 속에서 불길이라도 난 것처럼 뜨거운데 달랠 길이 없어 이렇게 걷는다고 했다. 찬 바람을 쐬면 좀 낫습니다. 민규는 원우의 속마음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곁에 다가가니 원우가 버선발인 게 눈에 들어왔다. 민규는 원우의 앞에 무릎을 접고 등을 내보였다. 눈이 녹아서 땅이 무릅니다. 원우는 괜찮다고 했지만 민규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원우는 민규의 등에 업혔다. 제가 나으리의 발이 되어 걷겠습니다. 탁한 음성이 조용히 밤이슬을 타고 퍼졌다.

 

“무겁지 않습니까. 그래도 내가 사내인지라 꽤 무거울텐데.”

“가볍습니다. 밥을 잘 챙겨 드셔야합니다. 그래야 살이 오르지요.”

“잔소리가 많아 장가는 어찌 드려나.”

“제 부인이 나으리 같다면 하루종일 옆에서 잔소리를 하느라 하루가 다 갈 것입니다.”

“지금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서로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입을 앙 다물었다. 원우는 민규의 목덜미를 껴안고 킥킥 거렸다. 둘은 실 없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처소 주변을 돌았다. 이윽고 후에 말이 없어진 원우에 민규가 자리에 섰다. 고른 숨소리가 아주 가늘게 들렸다. 등에 붙은 가슴팍이 부풀고 가라앉길 반복했다. 민규는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깨지 않게 자리에 눕히고 잠든 원우의 얼굴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이토록 욕심 없고 착한 사람이, 세자마마의 정적이라니. 이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냥 두어도 괜찮을텐데. 조금만 더 행복하면 좋을텐데. 사념이 점점 바닥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깊어졌다.

 

연민이 가여운 사랑으로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마음을 한 번 쓰기 시작하니 무서운지도 모르고 원우에게로 온 마음이 기울여졌다. 집채만한 파도처럼 커져 삼키기가 힘들었다. 민규는 부정하고 또 부정하려고 해봤지만 커진 마음을 저 조차도 감당할 수 없었다.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밝은 달이 방 안까지 들어와 원우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민규는 그 달빛이 제 눈이 된 것처럼, 제 손이 된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요?”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원우가 민규쪽으로 몸을 돌렸다.  

 

“주무시지 않구요.”

“누가 너무 뚫어지게 보아서요.”

 

민규는 부러 반박하지 않았다. 호위의 역할입니다. 하고 변명하지도 않았다. 이제는 그런 마음이 아닌 걸 알았으니까. 원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규도 따라 일어났다.

 

“날이 춥습니다.”

“좀 걸을까합니다. 보름달이 떴잖아요.”

 

민규는 원우에게 신을 신기고 그림자 뒤를 따랐다. 상궁에게 아득바득 우겨 야장을 얻어온 게 이럴 때 쓸모가 있었다. 높은 돌담을 따라 걷는 원우의 어깨에 긴 야장을 걸쳐주었다. 궁을 제대로 관리를 한 적이 없어 담 근처에는 다칠 것들이 많았다. 달이 다른날 보다 밝긴 하나 수풀이 우거진 곳은 꽤 어두웠다. 잘 걷고 있던 원우가 돌부리에 휘청였다. 재빠르게 민규가 원우의 손을 잡아 넘어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조심하셔야죠, 나으리.”

 

그런데 손이 얼음장 같습니다. 민규는 원우의 다른 한 손도 가져와 자신의 손으로 감싸쥐고 입김을 불었다. 남들보다 체온이 높은 탓에 금방 원우의 손이 따뜻해졌다. 원우는 그 모습을 유순한 낯으로 지켜보았다.

 

“이리 잘해주시면 안됩니다.”

“네?”

“이렇게 다정하면, 나중에 절 죽이기가 힘들어질텐데요.”

 

명백하게 선을 긋는 것이었다. 원우는 민규에게 잡힌 손을 빼내고 등을 돌려 걸어갔다. 민규는 심장을 뺏긴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매일 보는 등인데도, 오늘따라 그 등이 사무치게 냉랭했다.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차갑게 멀어지는 원우가 한 없이 야속했다.

 

“전 나으리께서, 제게 귀한 분이시니까...”

 

원우가 발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니 민규가 못 박힌 듯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원우는 저 멀리 잠들어 있을 세자가 원망스러워졌다. 저리 맘 약한 사람을 어찌 저에게 보내셨습니까. 어찌 저 사람을 제가 욕심내지 않길 바라십니까. 원우가 밝게 달이 비추는 길을 따라 민규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손을 들어 볼을 쓸었다.

 

“얼마나 귀한데요? 내가?”

 

민규가 자신의 볼을 매만지는 원우의 손을 겹쳐잡았다. 금세 또 차가워져 있었다. 늘 이렇게 원우는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 자신의 처지에 초연해보여도 실은, 누구보다 정을 그리워하는 원우. 민규는 원우의 허기를 채워주고 싶었다. 허락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세자 저하보다 더 귀해요?”

“...이 세상 어떤 존재보다 귀하십니다.”

 

끝끝내 토해낸 감정이었다.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민규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쌓아왔던, 알고있던 모든 규범과 원칙들, 도리와 책무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원우 하나만을 따를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버려도 괜찮았다. 원우는 남은 손으로 민규의 얼굴을 감싸고 까치발을 했다. 그리고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민규는 멀어지는 원우의 고개를 잡고 이내 깊게 입을 맞췄다.

 

둘은 한 사람이 눕는 요에 같이 누웠다. 민규는 자신이 항상 단정히 매어줬던 옷고름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제 자를 알려줬었지요. 원우는 민규의 손에 움찔거리면서도 말을 이어나갔다.

 

“불러보세요. 듣고 싶습니다.”

 

툭하면 체통을 지켜야 한다, 그것은 도리가 아니다, 라는 말을 하던 민규는 반항 없이 나지막하게 녹영군의 자를 불렀다. 원우야. 이토록 냉랭한 곳에 갇혀 있기엔 둥글고 따뜻한 이름이었다. 원우야, 우리 원우. 민규가 이름을 말하며 원우의 몸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따뜻한 열감이 퍼져나갔다. 원우는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민규의 손목의 입을 맞췄다. 민규는 원우를 부르고 나서야 원우가 보이기 시작했다. 폐세자에 가려져 있었던, 녹영군에 밀려 있었던.

 

“원우야.”

“민규야, 마지막 기회야.”

 

원우가 간절하게 속삭였다. 나를 죽이려면 지금 죽여야 해. 민규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두려운 눈을 하고서 죽이라는 말을 어찌 그리 쉽게 해. 원우의 얇은 눈매에 입술을 내렸다. 원우는 민규의 목을 끌어안았다. 민규가 원우의 목덜미를 깨물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너가 내 목숨을 쥔거야. 원우는 자신이 갖고 있던 두려움과 수치, 불안이 저 아래로 수몰되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을 뺏기고 처음으로 가져본 것이 숨막히도록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