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의 너에게
나를 기억해달라고
그 언젠가의 내가
부디 널
기억할테니
꽃 피는 옥탑방
"저거 봐서 뭣하는겨. 염병, 하루죙일 질질 짜고 앉었네."
손할배가 방구석에 앉아 혀를 끌끌, 찼다. 원우 옆에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던 염병의 당사자 윤씨 아저씨가 중얼거렸다. 저 노인네는 피도 눈물도 없어. 눈물을 연신 눌러찍는데 묻어나는 것 하나 없이 휴지가 건조했다. 그람, 피도 눈물도 다 있으문 그기 사람이지. 귀신같이 알아듣고 받아치는 손할배 뒤쪽으로 누렇게 얼룩진 벽지가 보였다.
"아 좀, 그만 싸워요."
들릴 듯 말 듯 내뱉자 둘은 금세 입을 꾹 다물었다. 원우는 조용히 화면만 주시했다. 남자에게 벌써세 번 째 따귀를 갈기는 화면 속 여자는 화장이 판다처럼 번진 채 울고 있었다.
지가 때리면서 왜 지가 더 울어. 원우는 여자의 얼굴이나 행동이나 전부 웃기다고 생각했다. 항상 저지른 사람이 더 유난인 법이다. 제 엄마도 그랬다. 사람이라기엔 유별난 저를 대뜸 낳아놓고 죽을 땐 세상에서 제일 추하고 야단스럽게 죽었다. 장례식이랄 것도 없었는데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온갖 것들이 몰려왔다.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비로운 신도 아닌 미개함의 집합들. 원우는 수억개의 목소리들에 질식할 것 같았다. 얘가 저 년 아들이야? 어쩜 좋아. 얘도 그럼 지 애미처럼 살다 가겠네. 얘, 우리 말 들리니? 비웃음들 사이에서 엄마의 말이 울렸다. 안쓰러운 운명으로 낳아서 미안해. 겨우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그 안쓰러운 운명 덕에 이 비좁은 옥탑방에서 양 옆구리에 팔자 우울한 귀신들을 매달고 있는 거다. 원우는 유산이랍시고 남겨진 자신의 괴랄한 능력과 따르는 책임이 참 한심했다.
"잘 가요. 차사들 힘드니까 중간에 자꾸 도망가지 말고."
그새 정이 들었는지 윤씨 아저씨는 빳빳한 휴지에다 코를 팽 풀었고 (마찬가지로 묻어나오는 건 없었다.) 손할배는 투덜거리면서도 뻔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몸조심하라는 말이 우습게도 참 와닿았다. 원우는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대충 끄적인 낙서같은 표정을 하고 찻잔을 내밀었다. 둘은 미련 없이 차를 들이키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곧장 뒤를 돌아 원우의 옥탑방을 나섰다. 열 번 째 망자들. 예약 종료.
***
원우네 옥탑방에는 한 해마다 한 번씩 망자들이 머물러 기억을 지우고 저승으로 떠난다. 이승에서의 49제가 그 기간이었다. 한 달하고도 보름이 넘는 시간동안 망자와 함께 지내다가, 49일째 되는 날 기억을 지우는 차를 타주는 것까지가 원우의 일이다. 차를 마시는 건 망자 본인의 선택이지만, 거의 마시는 쪽을 선호했다. 전생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똑같은 환경에서 다시 살아가는 걸 원하는 망자는 없었다. 열 살 쯤부터 십 년간 원우는 꽤나 열심히 망자들의 지우개 역할을 해왔다. 엄마가 남겨둔 추레한 운명은 받아들이기도 전에 인생에 스며든 지 오래였고, 꼬박꼬박 통장으로 들어오는 적잖은 운명의 댓가로 그나마 위안을 얻었다.
"...기요. 저기요...?"
어슴푸레한 새벽녘, 잠에 취해 있던 탓인지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느껴지는 한기에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현관을 열어젖히고서야 펑펑 붓는 눈송이가 소리를 삼켰다는 걸 알았다. 해가 바뀌고 처음 오는눈이었다. 덜 깬 잠에 사고 회로가 잠깐 멈췄다. 추운 줄도 모르고 현관에 서서 눈을 꿈뻑이는데 다시금 목소리가 추위를 비집고 들어왔다. 계세요오. 비척비척 걸어가 계단 난간에 고개를 내밀고 보니 동그란 정수리가 하나 있었다. 인기척에 고갤 드는 얼굴은 소년이었다. 붉은 코가 파묻힌 붉은 목도리가 있고. 원우는 웅크렸던 어깨와 목을 좀 더 길게 뺐다. 쇠난간을 붙잡은 손이 아려올 때 쯤 소년의 맨발만 확대한 듯이 시야에 치였다. 발 아래 쌓인 눈이 지저분하게 진흙과 섞이는 중이었다.
"어? 나오셨네요!"
"...왜 안 들어오고 있어요."
"음... 불쑥 찾아왔는데 집까지 불쑥 들어가면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아."
별 귀신 다 보네. 원우는 호흡을 잠시 쉬고 빤히 소년을 내려보다 도로 몸을 틀어 계단을 올랐다. 으. 춥다. 소년도 별 말 없이 대문을 들어와 원우를 따랐다.
같은 높이에서 시선을 맞추고 보니 소년은 원우보다 족히 한 뼘은 더 컸다. 덩치 때문인지 요 바로 전의 손할배와 윤씨 아저씨 둘이 있을 때만큼이나 옥탑방이 꽉 찬 느낌이었다. 소년의 크고 뭉툭한 발이 칙칙한 마룻바닥에 붉게 대비되어 눈에 걸렸다. 소년이 내뿜는 한기를 탓하며 보일러 온도를 조금 높였다. 원우는 추위를 잘 타지 않았다.
"이름이 뭐에요."
"민규요. 성은 김씬데, 민규야. 해주는 게 더 듣기 좋아요."
다물고 있던 입이 오밀조밀 말을 만들어내고 다시 꼭 닫혔다. 검은 눈이 반짝이는 게 꼭 얼른 뭘 더 물어봐달라고 하는 모양새였다. 통성명 하나만으로도 원우는 민규가 죽음과는 참 어울리지 않는단 생각 따위를 했다. 볼에 홍조로 보나 가무잡잡한 피부로 보나 생기로 가득한 아이었다.
"아, 민규... 어떻게 왔어요."
"음. 목 매달았어요. 나 혼자. 아, 그래서 엄마가 그 자국 밉다구 이거 둘러준 거에요. 가는 길 따뜻하라고도 해줬구요. 이쁘죠!"
"어...네."
민규가 목에 감겨진 붉은 털실 뭉치를 만지작거렸다. 예상치 못한 물음에 대답이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아 원우가 마지 못해 대답한 것 같았다. 그래도 민규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히, 하고 웃었다. 말려올라간 입새의 송곳니며 방싯 웃을 때마다 꾸물대는 눈썹이며, 그 하나하나가 눈에 띄어 다음 생은 강아지가 딱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자꾸 했다.
민규는 교복을 입은 채였고 원우는 이제 스물이 되었는데, 숨 다한 사람에게 형 소리는 듣기 뭐해서 그냥 원우라고 부르라 했다. 민규. 하는 것처럼 원우. 하고. 원우, 원우 잘만 부르는데 문장 끝은 존댓말로 떨어지니 말투가 어눌해보였다. 그렇게 불편한 말투로 민규는 참 속 편히 대해서. 불편하라고 제한한 호칭이 말도 안되게 편해지니 원우는 그것대로 또 불편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욕심은커녕 관심조차 없던 원우였지만, 핏기 없는 존재들 사이에 있다보면 문득 한 번씩 생명에 대한 강한 집착이 울컥 역류하곤 했다. 지쳐 고장날 듯 헐떡이는 맥박이 안타까워 원우는 최대한 벽을 높이 쌓았다. 산 사람들을 보면 목숨을 아껴가며 고집스레 살고 싶어질까 봐, 죽은 사람들을 보면 저도 꼭 그렇게 죽어갈까 봐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런데 고작 열아홉 밖에 안 돼서 숨이 끊겨버린 망자가 그 오랜 벽을 자꾸만 허물으려 하는 거다. 이십 년동안 한결같이 얼어있던 원우에게 낯선 온기는 방해만 될 뿐이었다.
"원우. 원래 이렇게 말이 없어요?"
"...그닥 없어요. 근데 민규야,"
"네?"
"그, 한 달정도만 지나면 안 볼 사인데 괜히 정 붙이려고 하지 마요. 난 정 붙이는 법도 모르고, 그게 정인 줄도 모르니까. 힘만 빠지잖아요."
원우 딴에는 최대한 상냥하고 친절하게 한 말이었다. 나름 미안한 것처럼 눈썹까지 한 번 으쓱해줬다. 낮고 단조로운 음으로 뱉어지는 제 이름이 따스해서 절로 올라갔던 민규의 입꼬리는 고장 나버린 듯 내려올 타이밍을 못 잡았다. 그런데 눈은 또 지나치게 반응이 빠른 거다. 축 처진 눈꼬리와 갈피를 못 잡고 여전히 삐죽 드러난 송곳니가 어울리지 않아 원우는 진심으로 미안해지는 것 같았다. 서둘러 민규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렇긴 한데... 우뚝 서서 풀이 잔뜩 죽은 꼴이 어수선했다. 머리 꼭대기에 먹구름을 매달고 돌아서는데 원우는 애꿎은 텔레비전 채널만 꾹꾹 돌려대며 돌아볼 겨를이 없는 척을 했다. 뒤늦게 슬쩍 기지개를 펴며 둘러본 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후에도 민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굳이 찾아 나서지도 않았다. 도망가서 환생 못하면, 지 손해지 뭐. 쫓겨난 한기가 저만치서 사라질 것처럼 희미하게 맴도는 게 느껴졌다. 멀리는 안 갔네. 제자리를 찾아가는 온기에도 오히려 옷을 더 꺼내어입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서는 흐드러지는 햇빛에 눈 대신 비가 쏟아지듯 내렸다. 그새 세상은 벌써 계절을 갈아입을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비 많이 오는데.
추적추적 떨어지며 눈을 밀어내리는 빗방울만 하염없이 눈으로 좇던 원우가 모호한 제 말에 되레 놀라 열었던 창문을 꽝 닫았다. 비가 많이 오는데. 뭐. 한 번 물꼬를 트니 그동안 눈치만 보던 생각들이 여기저기서 퐁퐁 솟아올랐다. 뭘하든 옆에서 쉴 새 없이 종알대던 목소리가 없어진 뒤로 허전한 건 사실이었다. 그 큰 덩치를 하고 쫄래쫄래 따라다녔는데, 어디서 잔뜩 불쌍하게 비나 맞고 있는 건 아닌지 하고 (물론 비에 젖어 감기를 얻을 일 없었으나, 맨몸으로 비를 맞는다는 사실 자체가 참 우중충하지 않은가.) 걱정 비스무리한 것들이 마구 침입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강아지 한 마리가 빗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까지 머리에 그려지는 거다. 나가서 산책이나 해야지. 비 많이 오니까. 어쩌면 길 잃은 강아지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잖아. 길 잃은 강아지도 웃을 핑계를 곱씹으며 원우는 산책 치곤 비장하게 몸 만한 우산을 챙겨들었다.
"어."
강아지는 예상 외로 많이 가까운 데에 있었다. 정말 많이 가까운 곳에. 온갖 고민의 흔적이 드러난 커다란 우산이 민망할 정도였다. 녹슬어 페인트칠이 남아나지않은 대문 옆 담벼락 아래에 어울리지 않게 쭈그리고 있던 민규의 시선이 올라와 맞물렸다. 어. 나오셨네요. 눈이 오던 그 날, 기시감이 들었다. 눈동자를 자주 마주한 건 아니지만 거의는 원우가 올려봤던 터라 민규를 내려다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원우는 괜히 어색해 질문인지 모를 문장을 던지고 입을 다물었다. 왜 안 들어오고 있어요. 그마저에도 대답을 하기 위해 고민하느라 정수리가 갸웃거렸다. 동그란 머리카락이 여전히 보송하게 흩뜨려졌지만 원우는 맹한 척 우산 한 켠을 내었다. 혼자 쓰기엔 우산이 너무 크다는 핑계로. 민규는 쑥 일어나 발끝만 바라봤다. 빗방울들이 맨발 위를 힘없이 통과해 바닥으로 부서졌다. 나란히 선 원우의 운동화를 보니 문득 웅덩이 위를 참방이며 발장난을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요. 원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슬쩍 구른 발에 웅덩이가 관심도 없다는 듯 빗방울에만 일렁였다. 우산을 써서 그래. 위안할 게 있어 다행이었다.
***
"계속 거기 있었어요?"
"네? 네."
"그냥 며칠동안 거기서?"
"...네."
"어떡하려고."
"금방 들어가려고 했어요... 비 내리니까 괜히 추운 것같구 그래서..."
"그래도 민규는 안 도망갔네요."
"아... 도망갈 걸 그랬어요?"
"뭐라구요?"
한결 편안한 얼굴로 이부자리에 누운 원우가 목소리 나는 쪽을 짐작하여 얕게 흘겼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려도 꼬박꼬박 대답이 돌아와 은근 들떴다. 실컷 비를 흘리던 하늘은 겨우 진정했지만 아직 달이나 별을 보여줄 생각은 없는 듯 흐리멍텅했다. 때문에 불마저 꺼진 옥탑방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민규의 낮고도 환한 목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고 방 안을 빙빙 돌기도 했다. 저 먼 곳에서 소리치는 것 같다가도 금세 귀 옆께를 간지럽히며 마음으로 흘러들어왔다. 다시 거세진 한기에도 이상하게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허공을 유영하는 대화들이 그대로 꿈에 나올 것만 같았다. 가물가물 눈이 감기는 와중에도 계속 떠들었다. 그 즈음 민규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머물렀다.
"원우. 자요?"
"아아뇨."
"졸리죠."
"아아아뇨오."
"졸리면 자요. 원우는 모르겠지만 나 지금 열심히 토닥토닥해주고 있어요."
"으음. 알아요..."
"뭘 알아요?"
민규가 하는 토닥토닥... 다 알아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른 숨소리가 퍼졌다. 알긴 뭘 알아요. 알았으면 참 좋겠네. 민규가 밉지 않은 핀잔을 주며 원우를 감싼 이불을 쓰담았다. 온통 검어진 시야가 익숙해지자 원우의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원우 옆에 비스듬히 누워 가만가만 희고 고운 얼굴을 쓸어보았다. 느껴지지 않는 촉감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방이 비좁은데도 원우는 제 옆에 굳이 필요 없을 민규의 이부자리를 마련해놓고 잠이 들었다. 만난 날부터 줄곧 그래왔다. 어쩌면 환상인 민규를 자꾸 산 사람처럼 대했다. 끊어진 숨에 버려도 될 사소한 것들을 버리지 못하게 굴었다. 모질게 저를 내쳐봤다가도 약해진 마음을 피부 밖으로 드러내고야 마는 원우에 민규는 몇 번이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작은 마음이 너무 커다랗게 민규를 찌르고 지나갔다. 저를 더 이상 미워하고 싶지 않아 죽었는데, 이젠 죽은 자신마저 미워졌다. 정 같은 거 모른달 땐 언제고. 제 손으로 놓아버린 목숨을 지금에야 주워담고 싶은 거다. 민규는 습관적으로 붉은 목도리를 만지작거렸다. 엄마. 아들 괜히 죽은 것 같으면 어떡하지. 시간이 더뎌서 먼저 왔는데, 시간을 돌리고 싶으면 난 어떡해야 해. 나, 엄마까지 두고 왔는데. 이제 와서 아쉬워지면 어쩌지. 유독 기나긴 밤이었다.
***
꽃은 잔뜩 피기 시작했는데 미련이 남았는지 겨울이 봄에 걸터앉아 마지막 심술을 부렸다. 뉴스에선 꽃샘추위가 기승이라는 작년에도 본 듯한 기사를 어김없이 내보냈고, 민규의 붉은 목도리가 슬슬 더워보이기 시작했다.
"원우. 이제 봄 다됐나봐요. 저기 꽃 엄청 많죠."
"그러게요. 신기하네."
"태어날 때부터 여기서만 살았다면서. 꽃 처음 보는 사람 같이 말하네요."
"꽃 같은 거에 관심이 없어서..."
으유. 누가 들으면 원우야말로 인생 다 산 줄 알겠네. 원우의 쭈그러든 목소리에 민규가 들으라는 듯 한숨을 던지고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죽어서 그런가. 살아나는 건 다 이뻐보이네. 오늘이면 49제가 끝나는 날이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지만 마지막 길이 꽃나무 아래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원우. 원우는... 그 뒤로는 생각을 잇지 못했다. 눈 닿는 곳에는 원우가 항상 자리했기에. 생각할 틈 없이 줄곧 그 굳지만 여린 선을 지켜보았다. 목도리를 매만지며 질질 짜던 신세 한탄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걸 알고 남은 시간이라도 맘껏 눈에 원우를 담겠다는 마음을 먹은지도 오래였다. 그런데 질긴 제 시선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해주는 원우가 훤히 보여 그게 데일 듯 따스해서, 거기서 또 다른 신세 한탄이 시작되곤 했다. 그치만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 실컷 풀어놓은 어리광이라도 마지막만큼은 덤덤한 어른이고 싶은 맘이었다.
원우가 찻잔을 내어왔다. 오늘 안에만 가면 되는데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참지 못하고 민규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러건 말건 물을 덥히는 원우의 감정 없는 얼굴을 빤히 보다가 불쑥 걱정이 튀었다.
"원우는 차 안 마셔요?"
"마시면 안되죠. 다 까먹는데."
"그럼 여기 지내던 망자들은 다 기억해요?"
"음... 하긴 하죠. 잘은 못하고."
"안 아파요?"
"네?"
같이 있던 사람들이 원우 기억 못하고 다 떠나가면. 안아파요?
안 아프냐 물어보면서 자기가 더 아픈 표정을 짓는 민규다. 그러니까 꼭, 아프다고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원우는 당황한 낯으로 기억력이 안 좋아서 괜찮다고 둘러대었다. 어째 달래주는 꼴이 됐다. 아플 리가 없잖아. 귀신 취급만 열심히 해줬는데.
"그러면요... 그러면..."
"그러면?"
"내가 차 마신 다음에 원우 까먹어버리고 아무렇지 않게 떠나도 안 아파요?"
이번엔 꽤 단단한 얼굴로 묻는다. 아까만큼 흐물대는 표정이 아니라 그런지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민규가 나를 잊어버리면. 잊어야지. 그게 맞는 건데. 괜찮을 것 같아요? 생각을 비집고 들어와 다시 한 번 못을 박는 민규의 목소리. 뜬금없이 그 목소리가 미워서 대답을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그제야 민규에게 꼬박꼬박 사람 취급을 해준 저가 원망스러워지고. 감정을 모두 제 탓으로 돌린 뒤에야 말이 나왔다.
"내가 기억하면 되죠, 뭐."
"나만 기억하고 있을게요. 귀신 사는 집 같던 옥탑방 사람 사는 집으로 만들어 놓고 간 귀신. 뭐 그렇게."
심각하던 민규의 얼굴이 풀어지고 송곳니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흐흐. 그거 괜찮네요. 그 입가 끝 송곳니만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 반사적으로 슬쩍 입꼬리가 당겨졌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에 금세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지만.
"다 됐다."
구태여 잘 가란 말은 안했다. 내가 기억할 건데, 인사는 왜 해. 까먹을 사람한테나 하는 거지. 이상한 데서 고집스러운 원우였다. 불어서 마셔요. 뜨거우니까. 아무렇지 않게 걱정까지 얹으며 찻잔을 건네었지만 민규는 받아들지 않고 가만히 피어나는 김만 바라보았다. 잘 마실게요. 원우는 대강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뒤에서 따라붙는 시선에 얽힐 힘이 없었다. 느긋하게 방을 나선 후엔 단숨에 현관을 열고 계단까지 뛰어내려갔다. 짐승이 우짖는 소리가 날 정도로 대문을 열어젖히고 민규가 쭈그리고 있던 담벼락에 다다라서야 숨을 고르며 주저 앉았다. 추운 바람에 비가 내렸다. 물방울이 아니라 꽃잎이 내렸다. 어깨 위로 흐르는 꽃의 촉감이 생경해 서러웠다. 불투명한 몸이 화가 났다. 눈물이 볼을 따라서 굴러가는 게 맘에 들지 않아 옷소매에 벅벅 문대었다. 그게 또 닦여지는 것조차 슬퍼 아예 울음을 참았다. 시야가 잔뜩 흐려진 채로 멈춰있으니 대문을 나서는 인영이 있었다. 민규의 발 아래로 흰 눈 대신 꽃잎이 쌓였다. 겨우 팔을 뻗어 옷자락을 잡아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 손 새로 빠져나가는 민규를. 눈 바로 앞을 지나가는 민규인데 너무도 멀었다. 한 생이나 꼬박 멀었다.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원우는 민규를 부르지 못했다. 내내 울음만 삼켰다. 꽃길이 지독하게 아름다운 날이었다.
***
지구가 태양을 스무 바퀴 돌았다. 계절은 지치지도 않고 쉼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또 다시 꽃이 피었고, 원우는 창가로 날아들어오는 꽃잎마저 곱게 보았다. 그 아이가 떠난 뒤로, 꽃을 좋아하게 되어서. 옥탑방 현관 앞에는 어느새 수 개의 화분이 놓여있었다. 제법 큰 화분들도 있어서 얼핏 보면 화원 같기도 했다. 요 며칠 간 봄비 소식이 없어 손에 물뿌리개를 쥐고 일어섰다.
기억하겠노라고 큰 소리 떵떵 치느라 작별인사조차 않았는데. 그 감각조차 없는 다정함에 익숙해져 벗어나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지 아직도 미련에 머물러 있었다. 눈비가 오는 겨울이면 줄곧 대문 옆 담벼락을 살펴보곤 했다. 길 잃은 강아지는 소식을 전할 턱이 없는데도. 너는 애정하지 않을 수 없는 아이였으니까, 누구를 탓하기도 애매했다. 기억해왔고, 지금도 하며, 앞으로도 할테지만 그게 다 혼자라 의미가 없는 걸 몰랐다. 아무리 너를 닮은 꽃들을 가득 들여와도 정작 대답해주는 음성은 없었다. 네 개구진 말의 빈자릴 재미도 없는 내 목소리로 채워넣는 것조차 습관이 되어버렸다. 혼잣말은 짝을 잃고 비로소 완벽한 혼잣말이 되었다. 많이도 자랐다. 봄은 봄인가보네. 화분은 목이 말랐던 듯 잘도 물을 삼켜냈다.
그러게요. 봄이 다 됐네요.
별안간 뚜렷하게 귀에서 울렸다. 내가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 거라면, 잊혀질세라 귀에 잡아놓았던 익숨함이 맞았다. 옥탑방 창문으로 내려앉던 달빛보다 환하던, 꿈 속에서 내내 손을 그러쥐고 얘기를 나누던. 밤새 허공을 떠다니며 옥탑방을 어질러도 마냥 자장가 같던 그 목소리. 불안한 기대가 마음에서부터 범람해 눈물로 새어나왔다. 차마 돌아볼 자신이 없어 고개만 푹 숙였다. 눈 앞에서 아른거리는 꽃잎들-
꽃잎은 목도리와 잘 어울렸던 홍조가 되어 떠다니고
왜 그러고 있어요. 저번에도 얼굴 안 보여주고 나가버리더니.
맑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 다가오고
사람 사는 집 같네요. 다행히.
운동화는 꽃잎을 밟아올라서서 시선을 들춘다
나 기억해준다고 약속했죠.
나도 기억했어요.
"...원우야."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