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오늘은 반대과정이론에 대해 배울 거다. 모두 집중하도록 시험에 잘 나올 부분이다. 책은 15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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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싸한 느낌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 젠장.
졸아버렸다. 강의실은 이미 텅텅 비었고 앞자리의 두세 명만 노트북을 두들기며 수업내용 정리를 하는 듯했다.
시험에 나온다고 했는데 망했네…
물론 그렇다고 평소에 난 시험을 알뜰살뜰 챙기며 공부를 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다만 이번 시험까지 말아먹으면 졸업을 못 할 것 같았기에 이번엔 C를 받도록 노력하겠다고 결심한 것이 어젯밤이었다.
‘김민규 이 작심일일자식...’
속으로 자책하며 한참을 앉아있다 보니 어느새 다음 강의를 갈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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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김민규 너 차였냐?”
“엉?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왜 차여 찼으면 찼지 이 핸섬스마트맨 김민규는 어디 가서 차일 사람 아니거든? 친구한테 관심 좀 가지고 살아라”
“아니 근데 왜 종일 차인듯이 우울하게 처져있어 짜샤”
“졸았어. 심리학 수업 때”
“너 조는 거 한두 번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왜 그러냐.”
“후… 어리석은 내 친구 석민아…. 넌 모를 거다 이번에도 성적 그대로면 졸업못해...”
정 불안하면 집에 가서 자습이라도 하라는 녀석의 말을 무시한 채 나는 빠른 걸음으로 나의 아늑한 원룸을 향해 걸어갔다. 자습만큼은 싫었다. 수능 이후로 내 인생에 자습이라는 건 일절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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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아, 죄송합니다!”
앞에 가던 남자와 어깨를 부딪치고 난 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래 봬도 난 예의는 있는 사람이니까.
아니 근데 저 사람은 뭐지 사람이 사과했으면 말로만으로도 괜찮습니다 하던가 그냥 가버리네! 세상 참 매정해졌다. 근데 저 사람 좀 괜찮아 보이네 인성만 빼면… 아, 이게 아니라 어쨌든 난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달려가 붙잡았다.
“저기요 같이 부딪혔으면 사과는 해주셔야죠…!”
“아… 죄송합니다. 제가 좀 정신이 없어서.”
그러고 그는 작은 포스트잇을 꺼내 무언가 끄적이더니 자기는 바빠서 가야 하니 나중에 전화를 달라는 게 아니겠는가.
“허, 참 어이가 없어서….”
집에 돌아와 번호를 저장해보니 카톡에 번호가 떴다.
아, 이 사람 이름이 전원우구나 진짜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름이네…
그러곤 이름을 재설정했다.
[심리학]
딱 심리학 같았다. 이해할 수도 없고 붙잡아서 더 말할 수도 없었던 그는 마치 날 매정하게 버리고 떠나간 학점과 같아 보였다.
저장도 했겠다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그냥 전화를 걸지 않았다. 제대로 된 사과를 받길 원하지만 그렇다고 먼저 연락까지 해가면서 그 사람을 만나는 건 너무 갔다 싶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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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의 재회는 머지않아 다시 이루어졌다. 1주하고 반쯤 되었을까 석민이가 시험망치지 않을 미래 기념으로 술이나 사주겠다며 학교 앞 작은 포차로 날 불렀을 때다.
“어…”
“아…. 안녕하세요. 그때 바쁘시다는 일은 잘하셨어요?”
아 너무 몰아갔나. 아니 그래도 저쪽이 잘못한 건 맞으니까… 뭐 이 정도는
“아… 네… 그땐 정말 죄송했어요. 연락처 드릴 테니 연락해주시면 밥이라도 살게요.”
“전에 연락처 주셨는데요. 포스트잇에 적어서.”
정신이 없었다 한 건 사실이었나 본지 그는 자기가 한 일도 기억하지 못했다. 아…하는 작은 탄성과 함께 귀 끝을 붉히는 모습이 꽤 우스웠다.
“그럼 내일 시간 되세요? 내일 첫 시간에 공강이 있어서 그때 시간 되시면 사주세요.”
“아, 네. 내일 연락해주세요.”
그리고 그는 포차를 나섰다.
“뭐야? 누구야? 썸남? 남친? 남편?”
“오바하지마 그냥 좀 인연이 생긴 사람이야.”
“ 흠… 딱 제수씨 될 상인데...”
“개소리말고 빨리 시키기나 해 술 사주는 건 무르기 없기라고.”
석민은 알았다며 이모를 부르곤 소주 2병과 함께 안주로 호박엿 사탕을 깠다. 진짜 내 친구지만 수능 전날도 아니고 술자린데 엿을 까며 ‘제발 우리민규 시험 C 받게 해주세요’라며 손을 싹싹 빌어대는 모습이 어이없으면서도 부끄러워 잔에 따르지도 않은 소주를 그대로 한입 크게 마셔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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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석민 이 자식 내 시험성적의 상승이 아닌 유급을 위해 술을 먹인 것이 틀림없다.
아 이렇게 된 거 반대과정이론이고 뭐고다 때려치우고 1년 더 다닐까… 생각을 할 때쯤 어느 그림자가 내 앞에서 어깨를 잡았다.
“으악!!! 누구야!!!”
“저예요. 전원우. 이름이 민규 씨였죠?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데려다 드릴까요? 집 어디세요?”
“전원우? 너 이씨 사람이 바쁘면 벙어리되십니까? 왜 부딪혔을 때 죄송합니다 안하세요??”
...어... 뭐지… 나 혹시 취했나? 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 죄송해요. 민규씨 화 많이 나셨구나….”
아니요. 화 풀린지 오랜데요. 제가 왜 이럴까요…?
“아니, 내가 원래 화를 많이 내지 않는데 전원우 당신 뭔가 화내야 할 상이야… 아…머리 아파”
아니 김민규 미친놈아 그런 상이 어딨어…!!!
“그건 진짜로 미안해요. 민규씨...”
사과 그만 해요 진짜. ㅠㅠ
“전원우!!! 때문에 민규 어깨 아팠잖아!!!”
민규야 제발 그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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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침이다.
나 집 어떻게 들어왔지.
정신이 든 후엔 이미 내방 침대에 누워있었다.
과음으로 인한 속 쓰림에 물 한 잔 마시려 신음을 흘리며 꾸물꾸물 일어났을 때,
…. 나는 보고야 말았다. 죽은 듯이 내 옆자리에 누워있는 전원우, 내 옷을 입고 누워있는 전원우를.
미쳤어!!! 뭐야 이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나 어제 무슨 짓을 한 거지??? 왜 내 옷을 입고 침대 밑에 누워서 자고있는거지??? 헉, 미친 내 바지는 어디간거지????
쏟아지는 궁금증에 대한 대답은 얼마 안 있어 알게 되었다. 차라리 영원히 기억 못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포차에 겉옷을 두고 와 다시 찾고 오는 길에 날 만나고… 날 데려다주고 가려는데 내가 붙잡고 쓸데없는 한풀이를 하고… 그러다가 내가 오바이트를 하는 바람에 그는 씻고 나와 내 옷을 입고 그러다 보니 시침은 2를 가르키고 있고… 결국엔 내가 늦었으니 자고 가라는 말을 꺼냈다.
젠장 이석민이랑 술을 먹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친구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떻게 일생에 딱 2번 만난 사람이랑 이렇게…
“……. 으윽”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침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전원우가 신음하며 누워있었다.
“안 깨네… 무슨 꿈을 꾸길래 저렇게 인상을 구기는거지...”
“괜찮… 으어어”
아. 뭔가 절대 기억하면 안 됐던 기억하나가 또 떠올라 버렸다.
자고 가라는 말을 한 뒤에 바닥에 누워 자려는 전원우가 신경 쓰여 자신의 옆에서 자라고 했었다. 괜찮다는 말을 무시하고 아무리 안 좋은 일이 있었던 사이라 한들 자신을 데려다준 손님한테 푸대접은 못 한다고 전원우를 끌어다 내 옆에 눕혔었다.
그리고 나에겐 잠버릇이 있다. 옆에 있는 무언가를 꽉 껴안고자는.
‘안돼안돼안돼 설마… 설마 제발 으악!!!
앞으론 절대 술 안마신다. 절대. 절대.
“민규씨…?”
“으헉!!!”
낮은 동굴 저음에 놀라 고개를 드니 전원우가 깨어서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올리고 있었다.
“아…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리고 정적
“저...”
“...네”
“...바지… 안 입으셔도 괜찮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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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잘못한 일로 인해 일어난 일이니까요.”
결국엔 쌍방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대화를 이어갔다.
“이렇게 된 거 하기로 한 식사는 해장할 겸 감자탕으로 할까요?”
“앗, 네네. 그러죠….”
아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지… 처음엔 그래도 내가 우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어찌 된 것인지 전원우가 내 위에 있는 것 같다.
“저… 원우 씨는 왜 화 안 내셨어요…? 제가 무례하게 굴어서 기분 나쁘셨을 텐데… 제가 잘못한 건 팩트잖아요”
“...죄송해요… 그냥 가볍게 넘겨도 되었을 일을 제가 너무 질질 끌어서…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거… 사과드릴게요….”
일이 뭔가 엄청나게 꼬여버렸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것인지… 머리가 띵해져 왔다.
“…. 밥, 제가 살게요… 원우씨보단 제가 사는 게 더 옳은 일인 것 같아요.”
“아…. 아뇨. 아니에요. 민규씨”
앞에 놓인 감자탕을 편히 먹을 수 없었다. 저 사람도 그런 것 같았고.
“이만 일어날까요…?”
“아…. 네…
그러죠”
아아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이 의도치 않은 드라마틱은 우리 엄마가 보는 아침드라마 뺨치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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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런데 그때 무슨 일 있으셨길래 그렇게 급히 가신 거예요?”
“그때 제가 강의실에 노트를 두고 와서요… 시험 범위 적어둔 정리 노트거든요. 심리학.”
“아, 헐 저도 심리학 수업 듣는데… 왜 몰랐을까요… 혹시 지난번 모임 때 안 오셨어요? ”
“아, 그때 복학생들은 안 불러줘서요… 민규씨 더 보다 동생인가 보네요.”
젠장, 선배였다니… 군대까지 다녀온 건가… 전혀 그렇게 안 보였는데… 어휴 이번 생의 인연들은… 참…
“뭐… 좋게 시작한 인연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된 거 친하게 지내요. 민규씨랑 잘 지내보고 싶어요.”
“아… 네… 뭐 저야 좋죠ㅎㅎ”
그래 이렇게 된 거 만날 때마다 인사하게 될 사람이니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것 없다. 전원우랑 친해져 손해 볼 것도 없고 보아하니 성적 열심히 챙기는 사람 같은데 언젠가 떡 주워 먹을 일이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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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우와 다닌 지 2주쯤 되었을까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아….”
“민규야, 왜 그래?”
“아, 형”
물론 그사이에 반말 쓰는 사이가 되었다.
“나 사실 수업때 졸아서 시험 내용 수업 못 들었어… 그… 반대이론…. 이었나… 근데 나 이거 망치면 졸업 못 할지도 몰라.”
“너 졸업하려면 아직 1년 더 다녀야 하는데 뭘 그리 걱정해. 음… 정 안되면 내가 예전에 쓴 노트 보여줄까? 그 반대과정이론 말하는 거 같은데.”
“아, 고맙지만 그래도 그건 좀… 민폐 아닐까.”
“선물이라 치고 받아도 괜찮아. 나랑 친구 해주니까.”
김민규 감동했다. 교재는 싫지만, 노트 보는 거라면 자습 2시간쯤이야 해줄 수 있다.
이렇게까지…. 해주는건 이석민도 안해줬는데... 물론 이게 우정에서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만…
“형… 그럼 받아도 괜찮아요?”
“응응. 메일로 보내줄게”
늘 생각하는 건데 이 형 이렇게 아무한테나 다 퍼주면 눈독을 들이는 나쁜 놈들이 들러붙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내가 아무도 아니고 나도 처음에 조금 잘못된 희망을 품고 형이랑 손을 잡은 거지만... 지금은 아니란 말이다.
이러다 형이 손해라도 볼까 걱정이다.
“형.”
“왜??”
“다른 사람한테는 이렇게 퍼주지 마요. 나랑 그 친한 권순영 선배한테만 이렇게 대해야 해요.”
“ㅎㅎ 알아,알아. 민규 너 나 걱정되지? 이렇게 퍼주다가 손해 볼까 봐.”
“그것도 있고...”
“다른 이유도 있어? 뭔데??”
“아, 기억 안 나요...”
아, 뭔데에! 알려달라며 어깨를 당기는 손을 뒤로 제치고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 이유가 뭔지 나도 모르겠다. 내가 왜 그런말을 했을까. 무의식적으로 이유를 한 가지 더 생각해낸 걸 텐데 그게 뭐였을까. 왠지 모르게 간질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집을 향해 뛰었다.
-
민규야, 나 너 좋아해. 넌 날 어떻게 생각해?
-
아, 뭔가 엄청난 꿈을 꿔버렸다. 요새 사랑놀음 그만둬서 그런지 꿈에 나오면 안 될 사람이 나와버렸다. 내가 정신이 나갔지 왜 하필 형을 떠올린 거야.
“아”
젖었다. 티셔츠 밑단이. 그렇다는 건….-
-
“미쳤어!!!!!”
“왜 그래 민규야? 어제 보내준 노트로도 공부 힘들어?”
“아니야..아뇨...아닙니다.”
말 못한다. 절대로. 네버. 이건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사건이다.
내가 진짜 미쳤나 보다. 미치지 않고서야 같은 남자인… 그것도 같이 다니는 학교 선배인!!! 전원우를!!! 상대로 몽정이라니… 중학교 2학년 때 친구 집에서 본 야동이 꿈에 나왔을 때도 안 했다. 그런데 전원우를… 그것도 그냥 고백하는 장면만 나왔는데 몽정이라니? 김민규 뭔데 그걸로 흥분한 거야??
“형, 저 오늘 속이 좀 안 좋아서 집에 가서 혼자 공부할게요. ”
“어…그래… 집에 가서 푹 쉬어 민규야.”
미안한 마음에 형을 제대로 쳐다볼 용기가 나오지 않았다. 형이랑 부딪힌 건 쨉도 안 된다. 이게 진짜 욕먹을 짓이니까.
“나 진짜 어떡하지.”
-
그날 이후로 쭉 형을 피해왔다. 미안하지만 어떡해 형만 보면 그날의 꿈이 떠오르는데…
아무리 수위 없는 꿈이라 할지라도 난 이미 대역죄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시험을 겨우 하루 남겨뒀을 때도 언제 형과 마주칠 줄 모른다는 긴장감에 공부도 잘되지 않았다.
게다가 형이 준 노트.. 노트 앞에 쓰인
전.원.우 세글자만봐도 심장이 요란을 떠니 노트도 안 꺼내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는? 당연하게 시험을 망쳤다. 딱 한 문제 풀고 남은 공간에는 교수님을 향한 모순된 사랑의 메시지를 써내려갔고 결과는 뻔하지 뭐 이젠 종강을 기다릴 일만 남았다.
“민규야.”
아, 형도 옆 강의실이었지.
“아, 형… 저 그… 그…”
“미안해.”
“네?”
“내가 친하게 지내자고 말해서… 불편했다는 거 알아. 난 네 마음도 모르고 그렇게… 친하게 지내자고 말 꺼낸 거... 미안해”
“형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형이 왜 미안해요 내가 더 미안해요.. 형 자꾸 피해서.”
“진짜 그런 거 때문 아니야…?”
“네, 전 오히려 좋았어요. 비록 좋게 시작한 게 아니라 해도 형이 잘 대해줬으니깐...”
“그럼 나 왜 피한...거야?”
“아, 그건… 이유가 있어서...”
어떻게 말하나 그걸… 형이 꿈에 나와서 고백했더니 그걸로 스물두 살 건장한 남성 김민규가 몽정해버렸습니다.- 라고는 절대 말 못하지…
“민규야, 혹시 힘든 일 있으면 말해 언제든지 들어줄 수 있어.”
“...네, 알겠어요 저 형 싫은 거 절대 아니고 형 좋으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응응”
다음 일정 때문에 먼저 가보겠다며 뒤돌아 지퍼가 다 내려간 롱패딩을 날리며 도도도 달려가는 모습에 미안하기도 했고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내가 왜 이럴까...”
“왜 그러긴 사랑이지”
“악!!! 이석민 너!!! 아니거든 그런 거??”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인연이 이런 인연이었구나? 장하다. 우리 민규…”
훌쩍훌쩍 소리를 내며 없는 눈물을 훔쳐내는 석민에 어이가 없었다. 이 자식은 맨날 헛생각만 하고..어후
“크흑… 아니긴 뭐가 아니니… 너 얼굴 완전 빨개 거의 딸기 맛 하리보야”
“더워서 그렇거든?!!”
“여기 히터도 안 틀어져 있는데?”
“아 덥다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해!! 난 갈 거야!”
젠장 얼굴은 또 왜 빨개진 거람…
화장실 거울로 내 얼굴을 보니 정말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바보 같잖아”
집에 돌아와 이불 한 장 깔려 있는 바닥에 대자로 누워 쉬려니 아까의 일이 계속 생각났다.
사랑이네.
아아악!! 이석민 쓸데없는 말만 해가지고!!
사랑은 무슨 사랑 난 한 번도 형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단…
민규야, 나 너 좋아해.
아… 설마. 에이 아니겠지 그래… 그냥 요즘 연애를 못해서 외로워서 내 머리가 비틀어 진 거야 그래… 암 그렇고말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부정할수록 더 심장이 뛰어왔다.
말도 안 돼. 우린 그렇게 좋게 만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그러겠어. 절대 아니지.
답답해진 가슴에 폰을 들고 찬바람을 쐴 겸 현관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카톡 알람이 울렸다. 보낸 사람 [심리학]. 아, 아직도 안 바꿨네 이름. 땀에 절어 축축해진 손으로 알림 바를 눌렀다.
-민규야, 잠깐 나랑 만날 수 있어? 너희 집으로 갈게. 할 말이 있어서.
할 말? 내가 이 상태에서 어떻게 형을 만날까… 지금 형을 만났다간 마음에도 없을 고백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네, 지금 오셔도 괜찮아요.
물론 생각만 들었지 손은 이미 오케이 사인을 보낸 뒤였다.
“무슨 일이에요?”
“아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말해요.”
“너 혹시… 애인 있어? 아 그냥 내 친구가… 너랑 얘기해보고 싶다 해서… 그냥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아… 없어요.”
“그렇구나… 다행이네...”
“형 그런데 저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아… 그래…?”
꽤나 놀랐는지 토끼 눈을 하고 마시라고 내어준 녹차 컵을 만지작거렸다.
“형도… 아는 사람일걸요.”
“정말…?”
“...네”
이젠 생각과 몸이 따로 논다. 머릿속으로는 더이상 말을 이어가지 말라 했지만. 입으로는 말을 이어갔다.
“저 형 좋아해요. 형은 저 어떻게 생각해요?”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형을, 선배를, 전원우를 좋아한다는 것을.
꽤나 부끄러웠던 건지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딸기 맛 하리보 같아 귀엽게 느껴졌다.
“그냥..그렇다고요. 제 말 무시하셔도 돼요.”
막상 뱉어내고 나니 나 역시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막상 정적이 되니 어색해져 이석민이 자주 하던 말을 쓰며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돌려놓으려 했다.
“...-야.”
“네? 잘 못 들었어요. 뭐라고 했어요?”
“나도라고. 나는 너 좋게 생각해. 그냥 선후배로서가 아니라 김민규로”
아 설렌다 라는게 이런 기분이었던가 심장이 세게 뛰다 못해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 그 친구분은...”
“없어.”
“네?”
“그런거 물어본 친구 없다구…! 그냥 궁금해서… 핑계였어...”
역시 귀엽다. 난 전원우를 좋아하는 것이 맞다.
카톡에서의 이름은 아직도 심리학이었다. 물론 지금은 심리학의 뜻이 바뀌어버렸다. 시작한 뼈대는 같지만, 뼈대를 덮은 자음 모음이 바뀌면서.
[사랑해]
나에게 있어 심리학은 알 수 없음에도 끌리는 것이었던 것이다.
시험때 풀었던 단 한 문제
반대과정이론의 예시에는 무엇이 있나.
노트공부 중 가장 눈에 잘 들어왔던 형의 정리
ex)분노로 시작했던 감정 뒤로 호감이, 사랑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