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또] 논산시 은진면 딸기밭 죽마고우
2021. 2. 15. 17:24

 

 

 

민규야.

 

엉.

 

벚꽃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겨울이었다. 수능이 끝난 고3은 학교를 안 나가도 됐지만 민규와 원우는 꼬박꼬박 학교를 나갔다. 학교를 안 나가면 그대로 아빠에게 끌려가 딸기밭에서 딸기만 하루 온종일 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둘은 매일 4교시가 끝나고 버스보다 시간이 한참 걸리는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갔다. 방학식인 오늘도 늘상 그렇듯이 장갑을 야무지게 끼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집에 오고 있는데 대뜸 원우가 민규를 불렀다.

 

“나 너 좋아한다.”

 

뭐? 뜻밖의 커밍아웃과 고백에 민규가 자전거에서 내려 원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원우는 폭탄을 떨어뜨렸으면서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뒤에 오던 버스가 옆으로 지나갈 때까지 둘은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원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도 덤덤해서 누가 보면 민규가 원우에게 고백한 것 같았다.

 

“그냥 그렇다고.”

 

너무 신경 쓰지마. 그리고 원우는 페달을 밟고 민규를 지나쳤다. 엉성하게 맨 목도리가 원우의 머리 뒤로 흩날렸다. 얼이 빠져있던 민규는 숨을 들이켰다. 온통 딸기 냄새였다. 지나치게 담백한 고백이 묘했다.

 

“이눔아. 길가에서 뭘 서 있어. 얼른 밥 먹고 하우스로 와.”

 

트럭을 타고 오던 민규의 아빠가 민규를 발견했다. 아, 아빠! 나 지금 되게 중요한 장면이었는데! 뭔소리랴.

 

 

고백을 받았건, 전쟁이 났건 일단은 딸기를 따야 했다. 겨울엔 딸기에 미쳐버리는 한국인들 때문에 딸기는 늘 수요가 많았다. 그냥 딸기를 사먹는 사람도 많았지만 요즘은 까페에서 시즌 메뉴로 무조건 딸기를 내놓기 때문에 이 맘때쯤 딸기 하우스는 출하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민규와 원우네 집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대충 밥을 먹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민규는 자기보다 먼저 와 딸기를 따고 있는 원우와 마주쳤다. 예전에는 왔냐, 하고 인사하면 옆으로 가 궁시렁 거리면서 딸기를 땄을 민규였지만, 오늘은 그쪽으로 발걸음이 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멀찍히 떨어지자니 고백을 되게 의식하는 것 같구. 아니 따지자면 점심을 따로 먹은 것부터가 신경 쓰는 거였다. 민규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원우의 앞에 앉았다. 나름의 절충안이었다. 민규의 속을 훤히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원우가 웃었다. 웃어? 지금? 남의 속 다 뒤집어 놓고? 누구는 밥이 목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는데. 야, 살살 따. 망가지겠다. 건너편 원우가 핀잔을 했다. 민규가 보란듯이 강하게 딸기 꼭지를 움켜쥐었다. 흥.

 

“원우야. 그만 따고 가서 박스 포장 해.”

 

아빠가 원우를 불렀다. 원우는 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엉덩이에 매단 간이 의자가 걸을 때마다 통통 흔들렸다. 쟤는 나를 신경 쓰기라도 하는 거야? 나 좋아한다면서. 그러면 뭐, 내 대답을 기다리는 뉘앙스를 풍기거나 그래야하는 거 아냐? 쟤는 뭐가 저렇게 애가 무신경해. 민규는 일하다 말고 벌떡 일어나 씩씩 거렸다. 생각할 수록 화나네.

 

“김민규 뭐하냐. 일 안 해?”

 

“네.”

 

하지만 하나의 딸기 따는 기계가 된 민규는 화난다고 원우를 쫓아가 따질 수 없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민규는 수많은 질문에 휩싸였다. 똑, 똑, 경쾌한 소리와 함께 꼭지가 떼어지는 딸기와 달리 제 상황은 무엇 하나 명확한 것이 없었다. 하나씩 생각하자. 하나씩.

 

 

1. 김민규와 전원우는 어떤 사이인가?

 

민규는 단박에 말을 할 수 있었다. 친한 사이지, 그것도 엄청. 10년을 넘게 본 사이였다. 같이 은진초, 은진중을 다녔고 두 달 후엔 은진고 졸업앨범에 나란히 얼굴이 박힐 예정이었다. 매일 자전거를 타고 등교 했고 학교를 안 다닐 때는 점심, 저녁 중 한 끼는 꼭 함께 먹었다. 가족들끼리도 숟가락 갯수를 알 정도로 친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전원우 대학교 합격 플랜카드를 걸어준 이도 김민규였다. <경 전배윤회장 아들 전원우 연세대학교 합격! 축> 삼촌 회장이셨어? 아침 댓바람부터 사다리를 타고 원우아버지와 플랜카드를 걸던 민규가 질문했다. 날 뭘로 보구. 내가 그 은진면부흥회 회장이야. 종한 형님은 총무고! 아빠 오른쪽이 내려갔다. 원우가 딸기잼을 바른 토스트를 먹으며 위치를 조정했다. 근데 이상하다. 합격이 어제 밤에 났는데 어떻게 지금 플랜카드를 걸어? 나무에 끈을 동여맨 민규가 또 질문했다. 그, 그! 새벽에 주문했다 왜! 어쩔텨! 배윤 삼촌 얼굴이 빨개졌다. 아빠가 나 수시 넣을 때 주문했어. 플랜카드가 똑바로 걸린 걸 확인한 원우가 집으로 들어가면서 의문을 풀어줬다. 아항. 삼촌 성격도 급해. 진또배기 충남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가. 민규의 놀림에 삼촌이 내려가서 보자며 이를 갈았다. 그게 이주 전이었다.

 

민규는 동춘 이모가 가져다 먹으라며 손에 들려준 딸기 소쿠리를 들고 털레털레 집으로 향하다가 동네 초입에 걸려있는 플랜카드를 봤다. 지금이야 서로에게 가장 친한 사람이라고 대번에 꼽을 수 있겠지만, 전원우가 서울로 올라가면? 그때도 과연 김민규가 전원우에게 가장 친한 사람일까? 민규는 가슴께를 문질렀다. 속이 꽉 막힌 게 아무래도 아까 먹은 점심이 체한 것 같았다. 이게 다 전원우 때문이야.

 

 

2. 전원우는 김민규를 언제부터 좋아했을까?

 

첫만남때부터 좋아했을 것 같진 않은디. 민규는 논산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논산 토박이였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할머니도 외할머니도 모두 논산 사람이었다. 어린 애 울음소리 듣는게 하늘의 별따기 급인 시골에서는 민규는 그야말로 온 동네의 귀염쟁이였다. 하여튼 논산의 특산품인 딸기를 먹고 무럭 무럭 자란 민규는 원우를 처음 봤을 때도 딸기를 먹고 있었다고 했다. 야무지게 자기 주먹만한 왕특급 딸기를 먹고 있던 민규는 건넛편 집으로 이사 온 사람들을 보러 갔다가 저만한 또래를 보고 함박 웃음을 지었다. 안녕! 그 때는 민규보다 컸던 원우는 살가운 인사에도 아빠 뒤로 숨었다. 어, 넌 누구니? 제 아빠보다 키가 훌쩍 큰 아저씨가 무릎을 굽혀 민규와 눈을 마주쳤다.

 

“저는 요 앞에 사는 김민규인데요.”

 

“그래, 아저씨랑 이웃이네. 잘 지내보자.”

 

우리 원우랑도 친하게 지내줘. 원우야, 인사 해야지. 원우라는 애는 영 낯을 많이 가리는 듯 했다. 억지로 옆에 선 원우는 민규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인사했다. 안녕. 거의 앙녕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대충 말을 건넨 원우는 곧바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원우가 낯을 많이 가려서. 예에. 뭐 다 그렇져. 언젠간 친해지겠져. 민규는 마저 남은 딸기를 입 안에 넣었다. 지가 나랑 안 친해지고 배겨.

 

그 뒤로도 며칠 간은 낯을 가렸으니 첫만남부터 민규를 좋아했다 판단하기는 힘들었다. 서로 잘 맞아서 베프가 된 건 아니었고 늘 얼굴을 보니까, 스며들듯이 친해진 거였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친구 없이 혼자 앉아있는 원우가 좀 안쓰럽기도 해서 선심 쓰는 것처럼 챙겨주기도 했다. 알고보니 애가 웃기도 잘 웃고 뭘 하자는 제안에도 싫다는 것 없이 웅, 그래 하는게 김민규 따까리로 제격이었다. 키만 컸지 완전 순둥이었다. 헉, 그럼 그때부터 날 좋아했나? 하지만 민규는 금방 과거가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중학교 때 원우는 분명히 민규에게 연애 고민상담을 했었다.

 

애들아, 나 옆반 미진이 좋아한다. 방과 후에 집에 가기 싫어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는데 원우가 대뜸 그런 소리를 했다. 미진이? 임미진? 공이 저 멀리 담을 넘든 말든 애들이 원우의 주위로 몰렸다. 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와악. 징그러! 그럴만도 했다. 초등학교를 다녔던 애들 그대로 중학교에 올라왔으니 서로가 어떤 애인지 훤했다. 걔가 왜 좋아? 어디가?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다. 제 또래 사이에서 누굴 좋아한다는 건 연예계 이슈보다 더 쩌는 거였으니까. 원우는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그냥, 귀엽잖아. 주근깨도 그렇고..”

 

애들이 펄펄 뛰면서 걔가 뭐가 귀엽냐, 하고 타박을 놓았다. 간지러운 걸 못 견디고 원우의 등을 때리는 애도 있었다. 미진이가 어때서. 원우의 목소리가 아녔다. 민규였다. 자기에게 쏠린 시선에 민규는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니, 니네는 친구가 좋아하면 응원을 해줘야지. 왜 걔 뒷담을 까?”

 

“누가 뒷담을 깠디야. 우리가 미진이 맘에 들어하면 그거대로 큰 일 아냐?”

 

맞어, 맞어. 애들의 동조에 민규가 승질을 냈다. 됐고, 미진이랑 전원우 잘 어울리네. 뭐. 잘해 봐. 그대로 민규는 등을 돌려 공을 주으러 갔다. 간다. 뭐야, 우리 집 가? 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만 가자. 나도 들어갈게. 원우가 민규 것까지 가방을 챙겨 뒤따랐다.

 

“너 미진이 좋아한 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자전거가 나란히 동네 입구 언덕길을 올랐다. 이때는 힘껏 페달을 밟아야 했다. 원우는 허벅지에 힘을 줬다.

 

“뭘 말해, 그냥 좋아하는 거지.”

 

“그럼 걔네한테는 왜 말했는데?”

 

민규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웬만한 일에는 허허 하고 넘기던 애가. 원우가 조금 앞서자 민규가 금세 따라잡았다.

 

“도와달라고.”

 

“니 임미진이랑 진짜 사귀게?”

 

“왜, 안 돼?”

 

언덕길을 오르면 쭉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민규가 원우의 말에 멈춰섰다. 민규의 속이 타들어갔다. 미진이는, 내가. 먼저. 따라 멈춘 원우가 어리둥절한 얼굴했다. 뭐, 할 말 있으면 해.

 

“그래, 고백 성공해서 결혼까지 해라.”

 

꼭 백년해로 해. 꽈배기처럼 사정 없이 비꼬는 민규에도 원우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뭘 해도 화내는 법 없이 무던한 태도에 민규는 열이 뻗쳐 먼저 집으로 향했다. 언덕길도 아닌데 빠르게 발을 놀렸다. 친구랑 첫사랑이 겹치는 건 암만 생각해도 빡치는 일이었다.

 

돌이켜보니 고민 상담은 아니었다. 묘한 신경전이었지. 그래서 전원우가 임미진한테 고백을 했냐고? 그 날 이후 전원우가 임미진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쫙 퍼져 겨울방학 전까지 언제 고백할까 모두가 기다렸지만 전원우는 임미진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애들이 밀어준다, 어쩐다 해도 원우는 손만 내저었다. 그 날이후 사이가 좀 어색해져 민규는 도와주겠단 말도 못했다. 그렇다고 민규가 임미진에게 고백하는 건 꿈도 못 꿨다. 아무리 사랑이 중요하다고 해도 우정보다 중하랴. 아빠가 늘 강조하던 것이었다. 남자는 우정이여. 그렇게 누구 하나 첫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중3 겨울방학이 지나갔다.

 

아, 그럼 중학교도 아니고 대체 언제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보니 어느새 익숙한 파란 대문이 보였다. 원우의 집이었다. 내가 뭘 고민하고 있지? 그냥 물어보면 되지. 민규는 성의 없이 벨을 눌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원우의 얼굴이 아니라 목소리뿐이었다.

 

“나 게임 중.”

 

이럴 때만 목소리가 크지. 방에서 대문까지 들리게 말하느라 목이 아주 터졌겠다. 아니 근데, 좋아하는 사람이 집 앞에 왔는데 당연히 버선발로 나와야 하는 거 아냐? 민규는 대답도 못하고 혼란스러워 했다. 이번엔 문을 두드렸다. 원우를 한 방 먹이고 싶었다.

 

“야! 너 나 언제부터 좋아했냐!”

 

조용한 시골길에 민규의 외침이 퍼져나갔다. 한 낮이라 모두가 하우스에 있으니 망정이지, 누군가가 들었다면 동네가 뒤집어질만한 말이었다. 얼마간 침묵이 이어지더니 대문이 벌컥 열렸다. 원우가 눈을 땡그랗게 뜨고 화를 냈다.

 

“미쳤냐? 누구 들으면 어떡할라고.”

 

“아무도 없어. 아니, 너 나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그것만 말해. 나 들어가서 주간아이돌 봐야해. 민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존나 심장 뛰어서 미칠 지경이면서. 원우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건 왜.”

 

순간 내가 못 물어볼 걸 물어봤나? 싶었다. 누가봐도 언짢은 기색에 민규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알면 안 돼? 너 나 좋아하잖아.”

 

“내가 널 좋아하면 다 말해줘야 해?”

 

“그냥 알려주면 어디 덧나?”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민규는 옆구리에 낀 딸기 소쿠리를 꽉 쥐었다. 원우는 잠시 망설이더니 웅얼거리면서 대답했다. 뭐라고?

 

“못 들었으면 됐어. 이제 됐지? 니땜에 승급전 못했다.”

 

그만 가라는 듯이 손을 내젓는 원우에 민규는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쏜살같이 집으로 들어가는 원우의 귀가 좀 빨간 것 같기도 하고. 민규는 웃음소리가 새어나갈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근데 언제부터랬지. 고1 이라고 했나? 그 때 내가 뭘 했지.

 

 

3. 전원우는 김민규의 어디가 좋았을까.

 

 

내가 잘생겨서 좋아했나?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한게 아니라면 어느 순간 날 좋아했다는 거잖아. 그럼 그렇게 좋아하게 된 계기가 뭐냐고. 내 어느 곳이 끌렸지? 집으로 들어와 씻으러 가려다가 거울 앞에 선 민규는 자신의 얼굴과 몸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내가, 좀 잘생기긴 했지. 이제는 전원우보다 키도 훨씬 크고. 거기도 ... 큼큼. 이건 모르는 건가? 그러고 보니 요즘 같이 씻은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깨벗고 목욕도 맨날 했는데. 참 나, 민규는 광대를 씰룩였다.

 

“우리 민규 꼬추 다 드러내고 뭣혀.”

 

“아, 엄마!”

 

방문이 열리는 소리도 없었는데 엄마가 등장했다. 들어오면서 제대로 안 닫은 듯 했다. 민규가 곧바로 몸을 가렸다. 노크도 없이 들어오면 어뜩해! 우씨. 얼굴이 새빨개졌다. 혹시 내가 잘생긴 척 하는 것까지 본 건 아니겠지. 하이고, 엄마가 아들 몸 볼 수도 있지. 아까 하던 거 계속 혀봐. 턱 치켜들고. 꼭 모델 같던디. 흑역사가 생성되었다. 됐거든, 됐거든. 엄마한테 칭얼거리던 민규는 티셔츠로 아래만 가리고 방에서 나왔다.

 

“...니가 왜 여깄어?”

 

민규는 차라리 얼굴을 가릴 걸 하고 후회했다. 거실에는 원우가 손에 얼굴을 묻은채로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끅끅 거리는 웃음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아니, 이모가, 큽, 저녁 먹자고 해서, 흡.”

 

“너도 봤어...?”

 

원우는 대답도 못하고 배를 부여잡고 웃기 시작했다. 웃지마. 웃지 말라고, 전원우. 아 씨. 민규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자기가 지금 헐벗고 있다는 것을 알고 욕실로 튀어 들어갔다. 아악.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민규는 이상한 패배감에 휩싸였다. 똑똑. 민규야. 원우였다.

 

“됐어. 사과할 필요 없다.”

 

누굴 탓해. 가족들 들어올 시간에 벌거벗고 있던 내 잘못이지. 민규는 짐짓 어른스러운 척 하면서 물을 틀었다.

 

“아니, 너 팬티 놓고 들어갔다고.”

 

민규는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아주 약간의 틈만 남기고 문을 열었다. 흰 손이 들어와 남색 드로즈를 건넸다. 고, 고맙다. 그래, 씻고 나와. 민규는 제 손에 들린 팬티를 내려다 보았다. 근데 나 왜 섰냐.

 

 

한 명만 어색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원우는 민규 방에서 게임을 했다. 집에서 하면 아빠가 싫어한다나 뭐라나. 그런데 얜 내 몸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나. 아까전 역대급 흑역사에 몸을 배배 꼬던 민규는 눈과 손 빼고 부동인 원우를 바라보았다. 왜. 얜 눈이 옆통수에 달렸나.

 

“너는 내 어디가 좋은데.”

 

“미친 새끼. 거실에 이모 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민규가 블루투스 스피커의 전원을 키고 노래를 틀었다.

 

“이제 우리 대화 안 들려. 말 해봐.”

 

“게임 끝나고.”

 

엄멈머, 얘 보게나. 분명히 날 좋아하는 건 얘인데 어째 상황이 점점 민규가 원우에게 애걸복걸하는 것 같았다. 지금 너가 구구절절 날 왜 좋아하는지 말해도 내가 니 고백을 들어줄까 말까거든? 원우가 한숨을 쉬었다.

 

“잘생겨서. 됐지.”

 

여섯글자로 끝난 싱거운 대답에 민규는 기가 찼다. 야, 그뿐이야? 진짜 그것 뿐이냐고. 십년지기 절친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것 뿐이냐고!

 

“이모 듣겠다. 조용히 좀 해.”

 

민규는 원우가 앉아있는 의자를 자기쪽으로 돌렸다. 다시 컴퓨터 쪽으로 못 가게 팔걸이를 꽉 잡고. 고백 이후 제대로 보는 얼굴이었다. 한 쪽은 약이 올라 안달이 났고 한 쪽은 그러거나 말거나 무신경했다.

 

“그럼 뭘 더 말해. 니가 고추 커서 좋다고 해줄까?”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원우가 발을 뻗어 김민규의 앞을 건들였다. 갑작스러운 터치에 민규가 놀라 엉덩이를 뒤로 뺐다. 돌았냐, 전원우? 막 나가네. 안 그래도 아까 욕실에서 죽는 줄 알았는데.

 

“그럼 뭐.”

 

잘생겨서 좋아한다 했잖아. 존나 잘생기셨어요, 그 쪽. 완벽한 제 취향이세요. 폭격에 민규는 눈 앞이 어질했다.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제 절친이요, 제가 잘생겨서 좋대요. 어떡하죠? 고개를 푹 숙인 민규에 원우는 피식 웃었다. 됐냐? 이제 방해하지마. 의자가 다시컴퓨터 쪽으로 돌아갔다. 민규는 풀썩 침대에 누웠다. 노래가 타이밍 좋게 끝났다.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1. 김민규와 전원우는 초딩때부터 친했는데

2. 고 1때부터 전원우가 김민규를 좋아했다고 한다.

3. 왜? 잘생겨서.

 

그럼 여기서 마지막 질문.

 

4. 김민규는 전원우와 사귈 것인가?

 

원우가 집에 돌아가고 모두가 잠든 새벽, 민규는 노트에 오늘의 해답을 적다가 마지막 질문에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물음표를 세 개정도 썼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나는 전원우가, 전원우를, 전원우에게... 아, 몰라. 몰라.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 자꾸 악몽을 꾸는 민규를 위해서 원우가 붙여주었던 야광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 붙일 땐 전원우가 나보다 훨씬 컸는데. 내가 고1 때 전원우보다 크기 시작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이구, 원우야. 아빠가 초코파이 사오는 걸 깜빡했다. 민규랑 좀 사와라.”

 

영정사진을 꺼내던 원우의 아빠, 배윤 삼촌은 서둘러 지갑을 꺼냈다. 좀 있으면 제사 지내야 하니까, 얼른 가 사와. 셔츠와 바지를 정갈하게 갈아입은 원우가 돈을 받아들었다. 엄마에게 전을 받아 제삿상에 놓던 민규도 따라나섰다.

 

“엄마가 좋아하던 거 뭔지 알지? 오리온 꺼다!”

 

“알아요.”

 

다녀 올게요. 제 점퍼와 원우 것까지 챙긴 민규는 신발을 꿰어 신고 나갔다.

 

“야, 감기 걸려.”

 

“아, 응.”

 

오늘은 원우 어머니의 제삿날이었다. 원우를 낳고 몸이 안 좋아지셨는데 병이 심해져 가족 모두가 어머니의 고향인 이 곳 논산으로 내려왔다. 길어야 1년일 거란 의사의 말과 달리 어머니는 원우가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걸 보고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가 외동딸이어서 제사를 아버지 혼자 준비하셔야 했는데, 이웃된 정으로 어떻게 그러냐며 2년째 민규의 집이 도와주고 있었다.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터라 원우는 심하게 충격을 받진 않았지만 이 맘때가 되면 나사가 하나 빠진 애처럼 굴었다. 민규는 원우가 지퍼를 올린 걸 확인하고 발걸음을 뗐다. 민규는 부러 원우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슬퍼도 되는데 괜히 괜찮다며 다독여주는 것도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말 없이 슈퍼에서 초코파이를 사서 돌아오는데  원우가 입을 열었다.

 

“근데 나 대학가면 아빠 혼자 어떻게 살지.”

 

엄마가 있었으면 두 분이서 의지하면서 살면 되는데. 동생 낳아달라고 할 걸 그랬나봐. 때 늦은 후회에 민규가 콧방귀를 꼈다. 진작에 조르지 그랬냐. 민규의 농담에 원우는 웃지 않았다. 아, 이게 아닌가.

 

“뭘 걱정해, 우리 엄마 아빠도 있고. 그리고 ... 나도 있잖아.”

 

원우는 서울로 대학을 가기로 했지만 민규는 여기에 남기로 했다. 애초에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어서 괜한 돈 들이기보다는 아빠를 따라 농사를 배우고 싶었다. 아빠는 내심 기분이 좋으면서도 요즘 농사도 똑똑해야 배우는 거라며 근처 전문대학의 농과에 진학하라고 했다. 그니까 민규는 특별한 일이 없는한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논산 딸기 하우스에 있을 거였다. 그러니 혼자 남을 원우의 아버지는 걱정 안 해도 됐다. 내가 너 몫꺼지 삼촌 아들 노릇할게. 그런데 원우의 표정이 애매했다. 뭐야, 방금 되게 멋졌지 않았나. 되게 감동이었을텐데. 왜 입을 삐쭉이는 거야.

 

“그럼 나는?”

 

“어?”

 

“나는 서울에서 혼자겠네.”

 

겨울이어서 여섯시만 되어도 해는 다 넘어간다. 거기다 시골의 밤은 도심보다 더 깊다. 주황색 가로등 아래에 민규와 원우가 멈춰섰다.

 

“무슨 말이 그래. 영영 안 올 것도 아니면서.”

 

“지금처럼 보는게 아니잖아.”

 

민규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서울 가랬나. 원우는 틈만 나면 그랬다. 자기는  무조건 성공해서 아빠 호강시켜 드릴 거라고. 그래서 어떻게든 서울로 대학을 갈 거라고 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원우의 미래엔 민규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누가 억지로 등 떠밀어 가는 것처럼 구니까 민규는 당황스러웠다.

 

“매일 연락하면 되지. 카톡도 하고, 영통도 하고.”

 

“...”

 

“그리고, 서울 가서 너 친구들 사귈 거 아냐. 걔네들하고 친해지면 내 생각 안 날걸.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민규는 말해놓고 원우 눈치를 봤다.

 

“...넌 뭐가 그렇게 쉽냐?”

 

원우는 톡 쏘아붙이고 먼저 집으로 향했다. 민규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속이 답답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맨날 느려터졌으면서 왜 이럴 땐 발걸음이 빠른지. 민규가 원우의 팔을 붙잡았지만 원우는 손을 뿌리치고 쌩하니 가버렸다.

 

그 뒤로 말 한마디 안 하고 제사를 치뤘다. 늦은 저녁을 먹고 제사상을 치우면서 아빠가 민규의 옆구리를 찔렀다. 니네 또 싸웠지? 내가 쟤랑 왜 싸워. 그리고 또라니. 내가 일방적으로 쟤 성깔 받아주고 있는 거지. 민규는 개수대에 그릇을 담궈놓다가 원우를 쳐다보았다. 원우는 병풍을 접고 있었다. 성질이란 성질은 다 내놓고 다른 사람들이랑 있으면 저렇게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잘만 굴었다. 쟤는 전기공학부가 아니라 연영과를 갔어야 해.

 

“곧 서울 갈 애한테 밉게 굴지 말고, 잘해 줘. 앞으로 보면 얼마나 본다구 그려.”

 

“아빤 왜 그런 소리를 해?”

 

알고 있는 소리여도 제 3자의 입에서 들으면 기분이 나쁘다. 여기가 뭐 시골 오지야? 땅 끝 마을이냐고. 논산에서 서울까지 두시간 반이야. 하루에도 대여섯번을 왔다갔다 할 수 있구만 뭘 그렇게 영영 못 보는 사이처럼 말을 해? 민규는 남의 집 밥그릇을 깨부술 것처럼 그릇을 포갰다.

 

“하이구, 한 번만 더 말 했다간 아빠를 안 보겠다.”

 

씨잉. 전원우 때문에 아빠랑도 싸웠다. 부자지간에 냉한 기류를 눈치 챈 삼촌이 민규에게 다가왔다. 민규야, 나머지는 삼촌이 할게. 고맙다.

 

“그래, 민규 그만 나와. 부자끼리도 시간을 보내야지.”

 

엄마가 의견을 보탰다. 민규는 한 것도 없는데, 하고 중얼거리면서 부엌을 나왔다. 곧바로 거실에서 원우와 마주쳤다. 서로를 피하는 방향도 똑같아서 더 어색해졌다.

 

“고맙다. 도와줘서.”

 

그 와중에 감사 인사는 하는 원우였다. 민규는 그저 고개만 까딱였다. 나 간다. 어. 민규는 천천히 신발을 신었다. 둘이 헤어질 때마다 한 쪽이 항상 연락해, 하고 말 했기 때문이었다. 주로 말하는 쪽은 민규였는데, 오늘은 싫었다.

 

“나 진짜 간다.”

 

하지만 원우는 문이 닫힐 때까지 연락하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민규의 등은 계속 바라보고 있었으면서.

 

 

참 나 웃기지도 않아. 민규는 애꿎은 현관의 슬리퍼를 찼다. 원우의 것이었다. 아악. 그래도 화가 안 풀려 담장 너머로 날려버렸다.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쟤인데 왜 내가 안달복달 났어?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더 아쉬운 거 아니야? 그건 그렇다 치고 넌 내가 쉽냐고? 말이야 방구야. 쉬우면, 어! 아침마다 깨워주고 밥 안 먹었다 그러면 밥 해주고! 심기 거스를까 맨날 눈치보고 그러겠냐! 남의 속도 모르고. 민규는 덮었던 이불을 발로 뻥뻥 차댔다. 죽어도 안 사겨. 죽어도 전원우랑 안 사귄다. 백번 고백해도 백번 다 거절할 거야. 그러다 문득 민규는 깨달았다. 원우는 민규에게 고백을 했을 뿐, 사귀자는 말은 안 했다. 민규는 벌떡 일어났다. 지난 기억을 모조리 헤집어 보아도 원우가 사귀자의 ㅅ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얜 고백만 하고 튄다는 거야? 이쯤 되면 누가 누굴 쉽게 생각하는 거야. 민규가 까닭 모를 원우의 마음에 허우적 거리고 있는데, 베개 옆의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원우였다.

 

[잠깐 나와]

 

내가 지가 부르면 나오는 강아지인 줄 아나. 민규는 지난 카톡에서 원우가 나오라면 쪼르르 나갔던 지난 날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왜 ㅡㅡ 싫어]

 

이쯤 되면 좀 놀랬겠지? 민규는 답장을 보내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물론 핸드폰을 꼭 쥐고. 잠시 후에 진동이 울렸다. 칼답을 좀처럼 하지 않은 원우였다. 막 속이 타지? 민규는 화면 잠금을 풀었다.

 

[사진]

 

[한 짝 어딨는지는 알려줘야지]

 

집 앞 가로등 밑에 있는 슬리퍼 한 짝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걸 고새 봤어? 민규는 잠깐 고민을 하다 창문을 내다보았다. 원우가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

 

“저 새끼가 미쳤나. 얼어 죽을라고.”

 

민규는 점퍼를 들고 곧장 뛰쳐나갔다.

 

“야! 전원우! 미쳤어? 돌았냐고.”

 

“갑자기 왜 화를 내.”

 

원우는 보라색 슬리퍼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슬리퍼를 던지는 놈이 어딨어. 내가 그렇게 밉냐. 그게 아니라, 민규는 변명을 하려다 이내 말을 삼키고 갖고 온 점퍼를 원우에게 입혔다.

 

“감기 걸리면 어떡할라고 이렇게 돌아다녀.”

 

“죽기야 하겠어?”

 

민규가 든든하게 모자까지 씌워주자 원우는 헛기침을 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술냄새가 은근하게 풍겼다. 술 마셨냐? 엉. 아빠랑 한 잔. 입으로 똑, 소리를 내며 눈꼬리를 접는게 한 잔이 아닌 듯 했다.

 

“왜 불렀어. 술 마셨으면 자든가.”

 

“민규야 우리 약속 하나 할까.”

 

“무슨 약속.”

 

원우는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민규는 저 입에서 나오는 말이 결코 좋은 말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됐어, 우리가 뭐 약속이 필요한 사이야?”

 

민규는 원우의 어깨를 쳤다. 추운데 집에 들어가 자라. 아빠가 내일 아침부터 딸기 따러 오래. 주절 주절 말이 길어졌다. 원우는 땅에 박혀있던 시선을 끌어올려 민규와 눈을 마주쳤다. 뭐, 뭐.

 

“나 서울 올라가도 너랑 제일 친한 사람은 나야.”

 

“당연한 걸.”

 

“너가 누굴 사귀어도 널 가장 잘 아는 건 나야.”

 

“전원우.”

 

“너가 결혼해도 부부싸움하고 찾을 사람은 나야.”

 

알겠지. 원우는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하지만 민규는 그 손가락을 바라볼 뿐 맞잡지 않았다.

 

“너 이래서 나한테 사귀잔 말 안한 거냐?”

 

원우는 대답 하지 않았다. 민규는 머리만 쓸어올렸다. 둘 사이에는 주황색 불빛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내가 못 사귄다, 그러면 친구 사이도 뭣도 아니게 되니까?”

 

“민규야.”

 

“그럼 고백도 하지 말았어야지.”

 

그렇게 친구 사이가 중요했으면, 너 맘 한톨도 비추면 안됐지. 원우가 코를 들이켰다. 민규는 습관적으로 얼굴을 들어 우는 걸 확인 하려다 이내 손을 내렸다.

 

“...”

 

“돌 던져놓고 맞을 줄은 몰랐어요, 하는 거랑 뭐가 달라.”

 

민규는 가로등 밑에서 먼저 빠져나왔다. 원우는 못 박힌 듯이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민규는 커튼을 쳤다. 방 안까지 들어오는 주황색 불빛이 신경 쓰인다는 핑계였다. 아직도 전원우는 그 자리에 있었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 전원을 끄려 화면을 켰다. D-45. 전원우 서울 가는 날. 화면에 띄워진 위젯을 삭제했다. 가거나, 말거나. 감기 걸리거나, 말 거나. 흥칫뿡이다.

 

 

애석하게도 감기에 걸리는 사람은 원우가 아니라 민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원우는 민규의 야상 점퍼를 입고 있었지만 민규는 원우랑 있는 내내 얇은 반팔 차림 하나였다. 엄마가 민규의 이마를 쓸어주고 있는 사이 아빠가 들어와 죽을 책상에 뒀다.

 

“엄마가 옆에 있어주고 싶은데, 워낙 일이 바빠서..”

 

“괜찮아. 얼른 가셔. 아침부터 트럭 온다며.”

 

“얼른 일 끝내고 올게. 좀만 있어라, 아들.”

 

민규는 기침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감기 옮아. 이내 방문이 닫혔다. 민규는 뜨거운 피부 아래 맴도는 홧홧한 열감에 몸을 떨었다. 눈꺼풀이 감겼다.

 

얼굴을 쓸어주는 손이 원우인 줄 알았다. 민규는 손목을 낚아챘다. 깜짝이야. 하지만 엄마였다. 민규는 김이 샌 목소리로 다시 눈을 감았다. 원우는?

 

“원우? 낮에 일 도와주고 약속 있다고 나간 모양이던데.”

 

뭐? 민규가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난 탓에 눈 앞이 핑핑 돌았다. 내가 아픈 거 말했어? 아들이 하루 종일 앓다가 대뜸 하는 소리가 저거였다. 하지만 아들의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가 있어서 엄마는 그런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떠올려야 했다.

 

“아프다고는 안 했고 그냥 오늘 쉰다고만...”

 

“아, 아프다고 했어야지! 열도 막 펄펄 나고 아파서 병원 부르기 일보 직전이라고 했어야지!”

 

아 몰라. 엄마가 말 했으면 전원우가 헐레벌떡 뛰어왔을 거란 말야. 민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시큰거리는 코를 훔쳤다. 새벽에 열이 나고 목구멍이 부어서 따끔거리기 시작했을 때 원우가 질질 짜면서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아픈데 전원우는 탱자 탱자 놀고 있다고. 변덕스러운 아들의 성질에 엄마가 혀를 차고 나가자마자 민규는 꺼놨던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그래도 문자는 왔겠지. 어제 그래놓고 연락 한 통 없으면 진짜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원우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카톡도, 문자도, 전화도. 민규는 뒷목이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잠시 고민하더니 원우에게 카톡을 보냈다.

 

[나 아퍼]

 

전화할 걸 그랬나. 혹시나 원우가 바로 확인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초조했다. 다행히도 금방 답이 왔다. 입술을 뜯던 민규의 얼굴이 밝아졌다.

 

[많이?]

 

당장 가겠다는 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걱정하는 것 같은 답장에 민규는 실실 웃었다. 어, 완전. 짱 아파. 그렇게 보내려다가 민규는 지우기를 눌렀다.

 

[몰라 너 어딘데?]

 

[미진이랑 만났어]

 

뭐? 미진이? 중학교 때 전원우가 좋아했던 임미진? 민규는 머리를 쥐뜯었다. 서울 간다고 하니까 첫사랑 생각이라도 났나.너가 좋아하는 애는 이렇게 아프고 죽겠는데. 민규는 눈알이 뜨거워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니가 걔랑 왜 만나]

 

[미진이 한양대 붙었대 아프면 쉬어]

 

엄마 나 서울 보내줘. 민규는 3년간 왜 공부에 충실하지 않았는지 지난 날을 떠올리며 후회했다. 임미진이랑 서울 가서 사귀는 거 아냐? 머릿속으로 임미진과 전원우가 결혼하는 것까지 시나리오를 돌린 민규는 침대에 엎어져 곡소리를 냈다. 최후의 수단을 쓸 때였다.

 

[나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린다]

 

 

 

동네에서 버스 정류장은 좀 걸어야 나왔다. 어디 가냐는 부모님의 만류에도 민규는 패딩과 목도리까지 둘둘 감고서 집을 나왔다.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 때문인지 정류장이 더욱 먼 것 같았다. 겨우 도착한 민규는 카톡을 들어가보았다. 원우는 카톡을 읽고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민규는 오기가 생겨 정류장 간이의자에 앉아 죽치기로 했다. 진짜 너가 안 오나 보자.

 

삼십분쯤 지났을까. 원우에게서 짤막한 답장이 왔다. 너 정말 기다리고 있냐? 민규는 손가락을 두번 놀렸다. ㅇㅇ. 손가락이 금세 차가워져 얼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어, 눈 온다. 함박눈이었다. 좀 막히려나. 눈이 삽시간에 도로에 쌓였다. 십분 뒤 마을 버스가 정류장 앞에 섰다. 012-1. 시내에서 동네로 오는 버스였다. 원우를 기다리면서 몇번이나 보냈었다. 이번엔 원우가 내렸다. 화내거나 걱정하는 얼굴일 거란 생각과 달리 원우는 침착했다. 열은. 병원은 갔어? 하고 민규의 몸 상태만 물어볼 뿐이었다.

 

“물어볼 게 그거뿐이야?”

 

“그럼?”

 

주변을 맴도는 대화였다. 속시원하게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원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갈게 뻗어져 나갔다.

 

“민규야. 내가 널 좋아한다니까, 너가 뭐라도 된 것 같아?”

 

“뭐?”

 

“너가 아프다고 하면 내가 하던 거 다 접고 와야 하는 거냐고. 너가 나보다 위에 있는 것 같지.”

 

“나 진짜 아퍼.”

 

“알아.”

 

원우는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민규는 가슴이 시려왔다.

 

“진짜 아프다고. 그리고 우리 친구잖아.”

 

민규는 울컥하는 감정을 겨우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제일 친한 친구니까 아프면 와서 들여다봐야지. 나도 그랬잖아. 나도 너 아프다고 하면, 무슨 일이든 다 제끼고 왔어. 그것 뿐이야? 난 너에 대한 일이면 아무것도 생각 안하고 달려왔다고. 제일 친하니까. 아, 씨 쪽팔리게 왜 눈물이 나. 민규는 볼에 흐르는 눈물을 마구 닦았다.

 

“아무도 안 그래. 민규야, 친구들 아파 뒤져도 그냥 아프구나, 쉬어. 하지 이렇게 미친놈처럼 안 온다고. 민규야, 내 말 모르겠어? 좀. 내 속 모르겠냐고.”

 

“몰라, 모른다고. 너 자꾸 왜 나 밀어내. 난 싫어. 너 좀 있으면 서울 가는데. 우리끼리 시간 보내기도 모자른데 왜 넌 나한테 자꾸, 자꾸 정 떼려고 하는데.”

 

“난 너 좋아하니까.”

 

“...”

 

“난 너 좋아하잖아. 넌 아닌데. 우정이 사랑으로 될 순 없잖아. 미안해. 너한테 고백한 거 미안하고, 내가 서울 가도 가장 친하게 지내자고 한 것도 미안해. 그냥 다 잊어. 어떤 미친놈이 너 좋아했다고 술안주로 씹어버려. 그냥 우리, 그냥 친구 사이로 지내자. 어?”

 

먼저 들어갈게. 몸 조리 잘 해. 원우는 머리 위로 쌓인 눈을 털지 않고 등을 돌렸다. 원우야. 원우야. 민규는 몇 번이고 원우를 불렀다. 민규는 항상 원우가 자신을 부르면 어떤 일이어도 돌아봤으니까. 소리 지르고 싸워도 원우가 제 이름을 부르면 똥 씹은 표정을 하고 다시 갔으니까. 하지만 원우는 묵묵히 눈발을 헤치고 집으로 갈 뿐이었다.

 

민규는 꼬박 일주일을 앓았다. 유행하는 독감이라고 했다.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도 열에 들떠 흘리듯 보내버렸다. 원우에게선 연락 한 통 없었다. 집이 코 앞인데 벌써부터 서울과 논산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겨우 핸드폰을 들어 알림을 확인해보면 원우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에게 연락이 온 것 같아 화가 나서 핸드폰을 던져버린 적도 있었다. 이 정도 아프면 그냥 친구라도 카톡 한 번은 했겠다. 짜증을 내는 것도 지겨워서 민규는 눈을 억지로 감았다. 그래도 눈을 뜨면 원우에게서 카톡 하나는 왔겠지, 하면서.

 

꿈을 꿨다. 행복한 꿈이었다. 원우와 민규가 늘상 그랬던 것처럼 방에 누워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민규가 귤을 까주면 원우가 새처럼 받아 먹었다. 순간 그게 너무 이뻐서 뽀뽀를 했다. 원래도 그랬던 것처럼 익숙했다. 원우도 민규의 볼을 감싸쥐고 부리처럼 통통한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 혀가 안 으로 들어오는 순간, 민규는 잠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방 안. 민규는 땀으로 축축했고 원우는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전원우를 많이 좋아하고 있구나. 내가 몰랐었던 때부터 원우를 아주, 많이 좋아했구나.

 

민규는 애처럼 울었다. 목이 퉁퉁 부어서 울음 소리도 안 나오는데 꺽꺽 울었다. 사랑을 하지도 않았는데 사랑을 잃은 것처럼 앓았다.

 

아직 몸은 무거웠지만 그거 빼고는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매년 새해 카운트 다운을 같이 했었는데. 거기다 올해가 지나면 민규와 원우는 성인이 된다. 언젠가 수능이 끝나기전 성인이 되는 날에 시내에 나가 술을 마시자고 했었다. 이마에 민증을 붙이고 맥주를 원샷하자고 했었다. 그리고 떡국으로 해장을 하자고. 이젠 그럴 수가 없는건가. 그냥 친구니까..? 민규는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난 이제 아닌데. 원우여? 원우? 방 밖 대화소리에 민규가 누워있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네, 삼촌. 이모가 오늘 망년회 있다고, 민규 혼자라고 하셔서요. 잉. 우리 민규 밥만 좀 챙겨줘. 엄마는 왜 그런 거까지 부탁 했어! 민규는 아들 속도 몰라주는 엄마때문에 가슴을 내리쳤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애 같잖아. 엄마 아빠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민규는 재빨리 거울을 확인했다. 살이 빠져서 좀 잘생겨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방문이 벌컥 열렸다.

 

“넌 내가 올 때마다 거울을 보고 있냐.”

 

“뭔, 뭔 상관이야!”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민규야 아파서 살이 좀 내린 거라고 해도 원우 역시 볼이 헬쓱해보였다. 원우는 잠시 민규의 얼굴을 훑더니 방 안에 들어와 겉옷을 벗었다.

 

“이제 좀 괜찮아 보이네.”

 

“아팠을 땐 한 마디 말도 없더니. 그냥 친구면, 친구가 아파 죽어도 연락 안 하는 거야? 그것도 코 앞에 살고 있는 친구인데.”

 

안 그러려고 했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대하고 싶었는데 자꾸 맘과 다른 말이 튀어나갔다. 원우는 의자에 앉더니 다리를 쭉 뻗어 침대 위에 올렸다. 타격감 제로란 얼굴이었다.

 

“야.”

 

“왜.”

 

“너 이제 나 안 좋아해?”

 

원우는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한테 연락을 하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민규는 그것까지 신경이 쓰여 죽을 지경이었다. 귀찮다고 내 카톡까지 답장 안 하는 애가 나랑 있는데 다른 사람이랑 연락을 해? 한 번 사랑이란 감정을 알고 나니 원우와 관련된 모든 것이 신경 쓰였다. 원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려고 노력 해야지.”

 

민규는 명치께를 손으로 문질렀다. 이제 자길 안 좋아하겠다는 말을 들으니 여기가 꽉 막힌 것처럼 아팠다. 민규는 이제야 알았는데. 원우는 뭘 시켜먹자고 했다. 민규는 그 말이 귓등으로도 안 들어왔다.

 

“노력을 하면 다 돼? 사람 마음이 종이 접기처럼 접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럼 어떡하라고. 너가 날 좋아하기만을 기다릴 순 없잖아. 3년을 기다렸는데 이제 그만 하자, 나도.”

 

원우는 정말 지겨운 표정이었다. 민규는 원우가 그런 얼굴을 할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시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안 돼, 나 다시 좋아해.”

 

“이게 무슨 억지야.”

 

“나도 너 좋아하니까, 너도 다시 나 좋아하라고!”

 

민규 컴퓨터로 게임을 하려고 전원을 키려던 원우의 손가락이 그대로 정지했다. 뭐? 나도 너 좋아해. 언제부터. 몰라. 장난치지 마라. 다시 버튼을 눌렀다. 모니터 화면도 킨 원우는 손을 풀었다. 옆에 서 있던 민규는 미치고 팔짝 뛰었다. 민규는 의자를 돌려 원우와 마주봤다.

 

“왜 장난이야? 너가 좋아하는 마음은 진짜고, 왜 내마음은 가짠데.”

 

“말이 되냐? 너 친구 잃기 싫어서 그런 거잖아.”

 

“아냐. 나 진짜 너 좋아해.”

 

민규는 원우가 다시 게임을 할까봐 모니터 화면을 잽싸게 껐다. 민규는 어떻게서든 자신의 진정성 백프로인 눈빛을 보내려고 노력 했다. 원우는 특유의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증명해봐.”

 

뭘 어떻게 증명하지? 눈빛으로? 아님 이 뛰는 심장으로? 민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때, 원우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저 얇은 입술을 꿈에서 봤다. 꿈에서, 뽀뽀하고...

 

“야, 내가 들었는데.”

 

“어.”

 

“내가 어떤 사람이랑 사귈 수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이 그거래.”

 

“뭐.”

 

“내가 이 사람이랑 키스할 수 있는지 없는지.”

 

원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래서? 가만 있어. 원우가 뭐 하는 거냐고 입을 열기 전에 민규는 재빨리 입술을 내렸다. 아파서 까쓸해진 입술이 립밤을 바르고 온 원우덕에 반질해졌다. 립밤 발랐냐? 어, 응. 원우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러더니 금세 눈꼬리가 올라갔다.

 

“야, 근데 이건 키스가 아니지.”

 

“어?”

 

원우가 민규의 멱살을 잡고 다시 입술을 부딪혔다. 이번에는 입술 사이를 가르고 혀가 들어왔다. 이건 꿈에서도 못 한 건데.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둘은 서로 정신 없이 입술을 빨고 혀를 얽었다. 원우가 민규의 후드티 아래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손이 갈비뼈를 쓰다듬었다. 민규가 흠칫 떨면서 물었다.

 

“어때? 좀 증명이 됐어?”

 

“응, 증명은 됐는데. 그래서 너, 나랑 사귈거야?”

 

민규는 원우의 볼에 뽀뽀를 하고 웃었다. 키스까지 했는데? 어떤 애들은 키스하고도 안 사귄대. 크림색 가디건을 입고 순진하게 말하는 얼굴이 퍽 야해보였다. 원우는 무릎에 올려진 손을 꼭 말아쥐었다. 민규는 잠시 고민하더니 후드티를 벗었다. 뭐해?

 

“그럼 못을 박아야지.”

 

다시 민규의 입술이 원우에게 향했다. 이번에는 원우가 민규의 목을 감쌌다. 우리 이제 친구 아냐.

 

4. 김민규는 전원우와 사귄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