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개와 고양이의 시간 上
2021. 2. 14. 00:23

 

 

 

# 01.

 

똘기, 떵이, 호치, 새촘이, 자축인묘. 드라고, 요롱이, 마초, 미미, 진사오미. 뭉치, 키키, 강다리, 징징이 신유술해. 어린시절 만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외우게 되었던 십이지신 (十二支神).

쉬운 멜로디를 붙여 외우게 하고, 우린 아주 옛날부터 이런 전설이 있었어. 이런 신들이 있었어. 이런 것을 섬겼어. 어린이들에게 쉽게 알려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만화인 줄로만 알았던, 그저 전설인 줄로만 알았던 것.

그러나 원우가 성인이 되어 처음 맞이한 생일날. 모친은 원우를 제 앞에 불러 앉혀 이야기했다.

십이지신. 그것은 결코 전설이 아니며 실재한다고. 우리에게도 조상이 있다고.
아니, …있었다고.


“우리는 십이지신에서 억울하게 쫓겨난 조상의 몫을 찾아야해. 그게 네가 해야할 일이란다.”


말인 즉, 원우의 조상은 고양이, 묘신(猫神)이었으나 개, 술신(戌神)의 계략으로 십이지신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로부터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천신(天神)이 각 점지한 아들(子)만이 그 몫을 찾을 수 있다 하였다. 그리고 그게.


“그게 저라고, 지금 장난치시는거죠?”


모친은 원우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얼씬도 못하게 하였던 창고 문을 개방하여 퀴퀴 묵은 서적을 꺼내 왔다.

이미 닳아버린 책은 세월을 가늠할 수가 없고, 안에 적힌 글자는 모두 한자로만 적혀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원우는 건네어받은 책을 들어 봐도 모를 책장을 무의미하게 넘겼다.


“조상들은 너를 기다렸어.”


우리 가문의 명예를 위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를 너를 위해서, 대를 걸쳐 현재의 부와 명예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것도 오로지 너를 위해서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조상들의 노력을 헛되지 않게 할 사명이 있어. 그리고 그건 너만이 할 수 있는거야.

천신(天神)이 점지한 술신(戌神) 가문의 아들(子)이 성년이 되기 전, 술신 가문의 목걸이를 우리 묘신 가문의 목걸이로 바꾸면 돼. 쉽다고 느껴지겠지만 우린 그곳에 발을 들이는 것조차 힘들 수 있어.

그 아이에 대한 정보는 여기, 이걸 보면 돼.

 

# 02.

 

신문 배달, 케이블 TV 영업사원, 도시가스 점검, 교회 홍보를 비롯하여 안 해본 게 없다. 그때마다 돈 없어요, 케이블 안 봐요, 가스 끊겼어요, 불교에요. 어쩜 그렇게 똑 부러지게도 대답을 하는지.

원우는 목걸이 구경은커녕 발을 들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어느 하루는 문 앞에 내내 죽치고 앉아 기다리기도 했었는데 얼굴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감기만 얻기도 했다.

그 말도 안 되는 미신 따위에 속아 이러고 있는 제 자신도 황당하지만, 더 황당한 건 제 모친이 일러준 대로 정말 쉽지 않게 돌아가는 상황들. 그리고 진짜 더 말도 안되는 건, 바로 이 집 앞에.


“아 좀 저리 가!”


개들이 득실 거린다. 마치 경계하듯이 주변을 맴도는데, 원우는 그 눈빛이 살벌하다고 느꼈다.

개신이니, 고양이 신이니 말을 듣기 전에는 동네 개들을 보아도 별생각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괜히 덤벼들 것만 같고, 물릴 것 같아 무섭다. 혹시라도 눈을 마주치면 싸우자는 것으로 알고 덤빌까 봐 슬금 슬금, 대문 쪽으로 걸음을 옮겨본다.


“어…”


녹슨 대문에 가득 붙여진 지라시와 우편함에 가득 쌓인 고지서. 개인과 외부터 업종 불문의 식당 배달 홍보지까지 쌓여 팔랑팔랑 발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원우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왈왈! 왈!

그 순간 순식간에 몰려드는 개떼들. 다급해진 원우는 좀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제발 문 좀 열어달라고. 몰려드는 개떼를 보며 두려움에 휩싸인 순간 녹이 슬어 듣기 싫은 문소리가 귀를 찌르며 마침내 서야 열린다.


“이번엔 뭐예요?”


매번 두꺼운 철문 사이로 들었던 목소리가 바로 제 머리 위에서, 이번엔 뭐냐며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묻는다.


“구청에서 수험생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외 봉사를 하고 있거든요.”
“네?”
“김민규 학생 맞으시죠?”
“저 그런거 신청한적 없는데 어떻게 아신,”
“아니요. 신청한적 없으셔도 저희가 매년 수험생 학생들을 취합해서 선발하거든요. 일단 들어가도 될까요?”


애초부터 대답 따위 들을 생각도 없었다. 원우가 말릴 새 없이 몸을 욱여넣고는 마치 집주인이라도 된 양 행동하자 슬리퍼를 끌며 뒤따라온 민규가 저기요, 하고 원우를 부른다.


“김민규 학생. 싫어도 어쩔 수가 없어요. 나도 봉사활동 점수를 따야 학점을 이수할 수 있거든요.”
“그게 아니라요.”
“네.”
“신발에 개똥 묻었어요.”
“…아,…아, 악!”


개똥이라는 말에 기겁을 하며 발을 들자 민규가 큭큭, 웃는다. 그 웃는 얼굴에 울컥 화가 난 원우는 신발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깽깽이 발로 아슬아슬하게 서있자 민규가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원우의 앞에 가지런히 놓아주고는 신발은 왜 던지세요? 물었다.


“물로 헹구고, 집에서 빨면 되는데.”


그리곤 던져진 원우의 운동화를 주워 호스 앞에 쪼그려 앉고는 솔로 닦아낸다. 비위가 상할 만도 한데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벅벅, 소리를 내며 운동화를 닦다가 슬쩍 원우를 쳐다본다. 원우 역시 민규를 보고 있었던 터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저희 집 좁아서 불편하실텐데.”
“에, 네? 응?”
“과목은 다 해주시는거예요?”
“…아, 음, 그,…”
“저희 집은 세금도 못내고 있는데 이런 혜택을 받아도 되나? 민망하네요.”


아무리 생각해봐도요. 저말고 성실 납세자들 우선으로 해줘야하는거 아니예요?

정말 순수한 눈과 순수한 의도의 질문에 원우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약삭빠르게 꾀를 내어서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동안 숱하게 봐왔던 우편함에 고지서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배움의 기회는 평등해야지.”
“……”
“……아마도.”


다 했어요. 신발 여기에 두면 가실 땐 마를 거예요. 들어오세요. 근데 진짜 좁고, 좀 그런데, 누추한데, 괜찮으실까요? 

아까의 날선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부드러운 말투로 묻는다. 눈치를 보는 듯이 망설이는 모습에 원우가 상관없다고 대답하자 그럼 어서 들어오시라며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들어오면 상관있으실 텐데, 집 좀 치워둘걸. 가뜩이나 좁은데 어질러져 있어서.. 들리도록 하는 혼잣말에 원우가 미소를 지었다.

 

# 03.

 

요즘 세상에도 교과서만으로 공부하는 애가 있구나. 아니, 공부를 안한 건지도 모르겠다.

전 과목을 다 하기엔 원우도 학업을 병행해야 했기에 무리라고 판단해 가장 취약한 과목을 도와주기로 했다. 한 손에는 오는 길에 서점에서 구입한 수리영역 문제집을 들고, 이제는 낯익은 대문 앞에 선다.


“나 왔는데에.”


원우가 오는 시간에 맞추어 나와있었는지, 망설임 없이 열리는 대문에 원우가 당황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며 웃는다. 바로 전까지 원우의 발치에서 알짱거리던 개들은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만 낑낑 소리를 낸다.


“마중 나올까하다가 부담스러우실까봐 기다렸어요!”
“잘했어요.”
“아! 문제집 사오신거예요?”
“서점에서 사왔는데, 이정도는 어렵지 않게 같이 풀..”


풀 수 있을 거야. 말을 다 맺지 못하고 원우가 휘청였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두통과 어지러움, 그리고 이명. 넘어지려는 원우의 허리를 겨우 받쳐 안은 민규가 형.. 형? 원우를 부른다.


“…어, 왜이러지.”


원우를 안으며 숙여진 몸과 동시에 민규의 목에서 반짝이는 목걸이. 원우는 민규의 목에서 반짝이는 목걸이를 한참이나 보았다.


“괜찮으세요? 무리하신거 아니에요?”
“아니, 괜찮아. 잠깐 어지러웠는데..”


혹시 이곳이 술신 가문이어서 그런건 아닐까. 원우는 민규의 부축을 받으며 속으로만 생각했다.

 

# 04.

 

원우는 제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수고로움과 피로에 힘들어하면서도, 수백 년도 더 된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 이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겠지, 라며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과외해?”
“네.”
“너는 집도 잘살면서 참 열심히다.”
“그게 제 돈은 아니니까요..”
“철든 소리 하고있네.”


원우의 과외 아르바이트 소식에 친구들은 의문을 가졌다.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집안도, 할 위인도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 그랬을 것이다. 

더구나 쉽게 그만둘 거라고 했던 예상과는 다르게 꽤나 꾸준한 원우를 보며 혹시 경제사정이 어려워졌느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친구도 있었다. 

할 수밖에 없는, 뭐라도 해야만 하는 황당한 속 사정을 말할 수 없어 성인이니 용돈벌이는 스스로 하라고 하셨다고, 원우는 그렇게 대충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 05.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러움과 이명 증상이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대체 왜 그랬는지, 원우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술신 가문의 기운이었다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 다 풀었어요!”
“봐봐.”


한 문제를 알려주고, 같은 유형의 문제를 푸는 식으로 반복하다보니 금방 풀어내곤 한다. 아무래도 머리가 나쁜 모양은 아니야. 원우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민규가 푼 문제를 보며 다시 한번 저가 풀어내면, 같은 공식과 답 두개가 문제집에 나란히.


“이것도 맞다. 맞았어.”
“.. 헤.”
“너 학원 다닌적 없지?”
“네! 없어요.”
“근데 되게 잘한다. 너, 머리 되게 좋은것 같아.”


나야 어릴 때부터 과외며 학원이며, 머리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다지만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하지. 

원우는 정말 과외 선생이라도 된 양 민규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엄지를 들어 주었다. 예기치 않은 쓰담 쓰담 행위에 흠칫 놀란 민규가 상 아래로 손을 꼼질꼼질.

민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 06.

 

혀엉!

아직 언덕을 오르기도 전인데, 멀리서 원우를 알아본 민규가 대문 앞에서 붕붕, 손을 흔들며 맞이한다. 부르는 소리에 괜히 빠르게 가야 할 것만 같아 디디는 발에 힘을 주어 속력을 내자 그러다 넘어져요! 하며 크게 외친다.


“안에서 기다리지.”
“이미 대문서부터 집까지 다 치우고 기다리는데도 시간이 안가잖아요.”
“학교 안갔어?”
“다녀와서 치운거죠. 형 오는 날이니까.”


어제까지는 완전 개판, 돼지우리였는데 오늘은 정말 깨끗해요. 그리고 형 드시라고 음료수도 사놓고, 선물도 준비해 놨는데 너무 안 오는 거예요. 그래서 시계를 봤는데 아직 시간은 한참 남았고, 기다리기 지루해서요.


“선물?”
“네. 형 덕분에 모의고사 점수도 올랐고, 구청에서 하는거라지만 도움도 많이 받았잖아요.”
“야아, 내가 그런거 바라고 그런 것도 아닌데.”


현관문을 열자마자 상쾌한 향이 가득 퍼진다. 처음, 그리고 여태까지는 환기도 잘되지 않아 꿉꿉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었는데 
전혀 상반되는 향기에 신발을 벗지 않고서 머뭇거리자 민규가 손으로 신발장 위에 디퓨저를 가리킨다.


“뭐야?”
“그리고 방 싹 치우면서 창문도 열어놓구요.”


원우가 신발을 벗음과 동시에 현관문을 닫은 민규가 곧장 부엌으로 달려가더니 한참을 달그락 소리만 들려준다. 매일 앉던 곳에 앉아 깨끗해진 집을 신기하게 보는데 어디서 났는지 모를 찻잔에 노오란 오렌지 주스를 따라온 민규가 눈을 반짝이며 원우를 쳐다본다.


“어머니꺼 꺼내온거 아니야?”
“엄마 잔은 맞는데 한번도 안 쓴 새거에요!”
“그러니까, 그게 어머니꺼잖아.”
“안 쓰시는거라서 괜찮아요. 손님용.”


거짓말하구있어. 원우가 민규의 머리를 쥐어 박으며 눈을 흘기자 히잉, 진짜 손님용인데. 하며 시무룩한 척을 한다. 

딴에는 생각해서 한 걸 텐데 또 마음이 살짝 약해진 원우가 아무튼 잘 마실게, 잔 예쁘다. 주스도 맛있고. 하며 말을 덧붙였더니 아직 더 있어요! 하며 벌떡 일어난다.


“짜잔.”
“꽃?”


그리고는 협탁 위에 올려두었던 꽃가지를 내민다. 하교하는 길에 아프지 않게 꺾어왔다면서.


“아프지 않게 꺾어오는게 어디있냐?”
“그치만 예쁘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꽃을 꺾으면 어떡해.”
“형 주고싶어서 그런건데..”


형이 좋아할 줄 알았단말이예요. 디퓨저보다, 예쁜 찻잔보다, 오렌지 주스보다 더. 다신 안그럴게요. 시들어 버리기 전에 예쁜 모습 선물하고 싶었어요.

..죄송해요.


“너가 그러니까 내가 너무 그렇잖아.”
“.. 죄송해요오..”
“다시는 그러면 안돼 알았지?”
“.. 네에.”
“그래도 예쁘긴 해. 고마워.”


민규가 제 옆에 내려놓은 꽃가지를 들어 꽃잎이 흐드러지지 않게 살짝 흔들어 보였다.


“예뻐요. 진짜.”


씨익 웃으며 예쁘다고. 원우인지 꽃가지인지 모를 것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혔다.

 

# 07.

 

“어떠니?”
“민규 말씀이세요?”


민규, 정도 많고 착하고, 공부도 곧잘 하고 똑똑한 것 같아요. 예의도 바르고요.


“원우야.”
“……네.”
“엄마는 그런걸 묻는게 아닌데.”
“……네.”
“네가 해야할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지?”


원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집에 개냄새가 많이 나는것 같아.”
“……”
“목적이 뭔지는 잘 알지? 우리 아들은 똑똑하니까.”

 

# 08.

 

오늘은 여기까지. 고생했어.


“형.”
“응?”


형 오늘 좀 이상해요.


“뭐가?”


그냥. 뭔가 혼자 말하듯이 진도 나가구, 쳐다봐주지도 않구. 아니, 쳐다봐주긴 하는데 얼굴은 안보고 자꾸 그냥 제 목 쪽만 보는것 같아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나 아무 일도 없는데.”
“그럼 다행이지만..”


그럼 나 가볼게.


“저기, ..형.”
“어?”
“데려다줄게요. 같이 나가요.”
“아니 괜찮은데 나는..”


원우의 말을 듣지도 않고 앞장서 대문을 연 민규가 어서 나오라며 손짓한다. 어쩔 수 없게 됐네. 먼저 나온 원우가 문을 걸어 잠그는 민규를 빤히 본다.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민규가 혀엉, 하며 뒤를 돌자 원우가 응? 대답한다.


“아 알았다!”
“뭘?”
“형 눈높이가 내 목쪽이구나.”
“……”
“아직도 성장하고 있어요 저.”
“.. 좋겠네.”


좋겠네, 그 말을 끝으로 꽤 긴 거리를 말없이 걷는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춤추는 나방 그림자만 큼지막한 거리. 조금은 쌀쌀한가, 싶은 그런 날. 

민규는 괜히 코끝을 한번 훔치며 근데 형. 하고 원우를 부른다.


“오늘 좀, 좀 쌀쌀하지 않아요?”
“그런가. 나는 워낙 껴입고 다녀서.. 너 추워?”
“음.. 조금요.”
“야 어떡해. 감기 걸리기 전에 들어가.”
“아, 아니 근데!”
“응?”


혹시나 지금 순간을 놓칠까, 원우의 손을 잡은 민규가 그 손 그대로 제 외투 주머니에 쏘옥 넣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말릴 새가 없어 그대로 손을 잡힌 원우가 야, 야, 당황한 듯 민규를 불러보지만 이미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민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다.


“.. 참나.”


따뜻하긴 하네.

 

09.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온다.


“노래 가사에요?”
“아니이. 내가 만든 자작 시야.”
“형이.. 갑자기요?”


응. 요즘으은, 감성 시대잖아. 메마른 콘크리트 빌딩숲 속 피어난 감성 한 송이. 너무 멋있지 않아? 나랑 지인짜 잘 어울리지.

주말 사이 탈색을 하고 온 정한이 원우에게 트리트먼트를 추천해달라며 조르더니 하는 말이다. 기승전, 트리트먼트에서 결, 갑작스러운 자작 시에 원우가 역시 이상한 형. 중얼거렸다.


“너 아직도 과외해?”
“네 왜요?”
“되게 꾸준하구나 너.”
“안 꾸준할건 뭐예요 제가.”


그르치. 근데 나 아무 말도 안했는데? 

달려드는 원우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이 킬킬, 웃는다. 한 손엔 핸드폰으로 여전히 트리트먼트를 검색하면서. 오늘 교양 지인짜 지겹겠다. 계절과 철학이 웬 말이야. 원우 역시 그 말에는 동의하는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우리 토깽이 지수는 언제 오지?”
“토끼와 거북이 안봤어요? 꾀부리다가 늦잖아요.”
“우리 지수를 그런 토끼에 비교하지마.”
“네에. 어련하시겠어요.”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문을 열고 들어온 지수가 정한과 원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역시 빠르네 두 사람? 하며. 정한은 제 옆자리에 두었던 가방을 치우며 기다렸어, 다정히 말하고 원우는 두 사람을 보며 그러려니, 한다.


“밖에 날씨 정말 이상해.”
“왜?”
“꼭 봄날씨같아.”
“봄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지구 온난화 때문인가.”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니고, 봄같은 날씨. 원우는 오늘따라 햇살이 유별나게 비춰지는 창 밖을 보았다.


“원우야.”
“네?”
“봄은 금방 와.”


정한의 의미심장한 말에 원우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10.

 

천신(天神)이 점지한 술신(戌神) 가문의 아들(子)이 성년이 되기 전, 술신 가문의 목걸이를 우리 묘신 가문의 목걸이로 바꾸면 돼.

 

“봄은.. 금방 와.”

 

민규의 생일은 봄이었다.

 

11.

 

겨우 목걸이를 바꾸는 행위로 정말 운명이 바뀔까? 조상들의 억울함이 풀릴까? 원우는 저를 기다리다 잠이 든 민규의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어느새 자란 앞머리가 눈을 찌를 듯 했다.

민규를 따라 마주 엎드린 원우가 머리칼을 넘겨주던 것을 멈추곤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았다. 튀어나온 눈썹 뼈, 콧대, 콧망울, 입술. 그리고 다시 올라와 감긴 눈과 긴 속눈썹까지.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 민규의 뺨을 쓰다듬으려던 것을 겨우 멈추곤 화끈해진 두 볼의 열을 식히기 위해 부채질을 해대었다.


“……”


그리고 시선을 내리깔자 민규의 목덜미 위로 보이는 목걸이.


“.. 뭐가 바뀔까.”


원우는 조심스레 팔을 뻗어 민규의 목걸이를 풀었다. 목걸이는 아주 손쉽게 풀렸지만, 잠든 민규에게서 빼낼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다시 목걸이를 채우려해도 자꾸만 손이 미끌어져서, 그 순간 정신이 들어 지금 내가 뭘 하는건지 싶어서 다시 한번 목걸이를 채워주려는 순간.


“형.”


민규가 눈을 감은채로 원우를 불렀다.


“아, ..민규야.”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민규가 가만히, 어느새 제 손에 쥐어진 목걸이를 보다가 원우를 본다. 아직 아무것도, 무엇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원우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된 양 고개를 들지 못한 채였다.


“형.”


그냥 목걸이가 신기해서, 예뻐서 구경하려고 했다고. 늘 꾀를 부리며 상황을 모면했던 것처럼 그러면 되는데 이상하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담긴 실망의 무게가 너무 커서, 원우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그리고 그런 원우를 보면서, 민규는.


“제가.. 이걸 형한테 주는건 쉬워요. 그런데.”


이미 알고있다는 듯이, 혹시나.. 형 뭐해요? 라는 천진난만한 물음이 뒤따라오길 바랬던 것과는 다른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줘버리면, 이제 형은 저를 만나러 오지 않겠죠?”
“……”
“그렇겠죠?”


그렇겠죠, 라는 말에 아니라는 말을 기대하면서도, 그럼에도 제 목걸이를 원우의 손에 쥐어준다.


“형은 나를 볼때 내 눈이 아니라 내 목걸이를 봤어요.”


이게 뭔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건가봐요. 형에게.


“.. 민규야, 아니야, ..”
“저 잠깐 나갔다 올테니까 저 나간 사이에 빨리 가요. 알았죠?”


그리구..


“오늘 모의고사.. 진짜 잘봤어요. 잘했죠 형.”


한번만.


“잘했다고 한번만 더 칭찬 해주세요.”


그때처럼요.

 


/ 上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