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했다. 사람과 연 끊기 참 쉽다고 생각했다. 결혼 준비에 들떠 웨딩드레스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던 그녀를 본 게 엊그제 같았는데 정신 차려보니 가정법원 앞이었다. 혼인 신고서 먼저 작성하자는 말 한마디에 아무 생각 없이 그러마 했던 게 큰 실수였다. 졸지에 이혼남 딱지를 붙이게 된 저를 보며 엄마는 결국 쓰러졌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에 차마 때리지도 못하고 화만 삭이다 벌어진 일이었다.
딱히 잘못한 건 없었다. 잘못이라면 그녀 쪽에서 했지. 드라마가 현실에 기반한다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다. 오랜만에 잡힌 출장이 하루 일찍 끝나 나름 이것저것 사서 퇴근했더랬다. 불 꺼진 거실과 달리 스탠드가 은은하게 켜진 방을 보고 벌써 자나, 하며 들어갔더니 눈앞에 보이는 건 다리 두 개도 아닌 네 개였다. 무슨 21세기 처용도 아니고. 당황하면 말도 안나온다고 그랬나. 딱 그 상태였다. 뭔 짓을 어떻게 몇 번 했길래 방 한가운데까지 들어갔는데도 둘다 꿈쩍도 안 하고 잘만 잔다. 그게 더 사람 꼭지 돌게 했다.
정한은 그랬다. 화내지 마. 너도 잘 알 거 아냐. 너 같은 애들이 화나면 어떻게 행동하는지. 아, 그래. 잘 알고 있었다. 원우는 화나면 앞뒤 재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온 물건을 다 패대기치고 욕조 안에 있는 양동이에 찬물을 가득 퍼 담았다. 그리고 들이 부었다. 대참사였다. 화내지 말라니까 하는 짓이다. 정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상관없었다. 이걸 참으면 보살 아닌가. 자다가 날벼락 맞은 두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귀신 본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약혼녀 옆에 욕을 내뱉으며 눈을 부릅뜨는 사내새끼 한명이 있었다. 자기야, 내말 좀…. 그 길로 신혼집을 박차고 나왔다.
그게 벌써 삼 개월이 지났다. 어디 한국의 결혼 문화가 개인 간의 관계로 끝나던가. 집안과 집안 간의 종속임을 알기에 원우는 이혼 사유를 말하지 않았다. 스스로 쪽팔린 것도 있었고, 그녀에 대한 마지막 배려이기도 했다. 대신 깔끔하게 정리하기로 타협했다. 당연히 양가에서는 난리가 났다. 알콩달콩 깨소금 볶으며 잘 연애하더니 뭐에 씌었니. 엄마는 응급실에 실려 갔고 친구, 친척, 동료 가릴 것 없이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날파리떼들은 쉴새없이 전화질이었다. 모든 것에 환멸난 원우는 이를 갈았다. 사람 한 명 인생 좆창나게 하려고 다들 기를 쓰는구나.
모든 게 끝이 나고 법원 바닥에 거의 눕다시피 하며 우는 그녀를 겨우 택시에 태워 보냈다. 담배 한 개비 피며 숨 좀 돌리려는데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담뱃갑을 움켜쥔 손이 볼품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너 이새끼….
혁명적 연애시대
아 제가요. 잘 곳이 없어서요.
참자. 참아야 한다. 일단 덩치 차이가 쨉이 안됐다. 한 대 치자마자 돌아올 주먹은 꽤 매울 것 처럼 보였다. 키로는 어디서 꿀리지 않는다 생각한 원우였지만 남자의 갑빠를 보자마자 자존심 상하게 기가 팍 죽어버렸다. 개소리를 쉴 틈 없이 하는 남자를 지나쳐 태우지도 않은 장초를 바닥에 던졌다. 아까운데 왜 안펴요.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그쪽 약혼녀가 알려줬어요."
"그럼 걔한테 가시지 왜 저를 따라오세요."
"아 뭐…. 저기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바람난 연인 사이 아니구요. 원나잇이요. 원나잇 알아요?"
진짜 뭘까.
"그게 뭐가 중요해요. 결혼식 한 달 앞둔 예비 신부가 쌩판 일면식도 없는 남자랑 뒹굴고 있었는데."
"그건 죄송. 저도 몰랐거든요."
그게 말이 돼? 소리 지를 뻔했다. 낯짝이 굉장히 두껍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힘이 풀린다. 더이상 소모적인 대화는 하고 싶지 않았다. 갈 길 가세요. 차키를 꺼내려는데 남자의 손이 더 빨랐다. 잠시만요.
"저도 굉장히 억울하거든요."
"저기요!"
"제 직업 신념 상 애인 있는 사람은 건들지 말자… 뭐 그런 건데 사람 앞길 예측하기 어디 쉽나요."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덕분에 저도 인생 말 먹었으니 그런 사람들끼리 잘 좀 해봅시다."
미친 새끼 맞네. 혀를 찬 원우는 남자의 손에 쥐어진 제 차키를 뺏으려 손을 뻗었다.
"한 달…! 딱 한 달만요."
"뭐라구요?"
"제가 지금 그 쪽 일 때문에 짤려서 오갈데 없는 신세거든요."
"그게 왜 제 탓입니까."
"없진 않죠."
다스려야 한다. 참아야 한다. 파들거리는 눈꺼풀을 보며 눈치를 살피던 남자는 어울리지도 않게 커다란 덩치를 꾸깃하게 접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요, 청소도 좀 하구요, 요리도 좀 하거든요. 그게 문제냐 지금? 머릿속으로는 살림까지 차린 듯싶다. 개의치 않고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쪽 약혼녀랑 잔 거는 잘못했어요. 저 진짜 몰랐어요. 욕구 불만이라고 막 그래서, 돈 필요한 제가 뭘 어쩌겠어요. 이제는 눈물까지 글썽인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저 진짜 갱생하려구요, 그니까 한 달만 저 좀 데리고 있어 주시면 안 될까요. 마무리까지 완벽하네. 원우는 남자가 경계를 푼 걸 확인하고 재빨리 차키를 도로 뺏었다. 네, 개소리 잘 들었구요. 갱생 알아서 잘 하세요. 남자는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차에 시동을 걸고 탄 다음 창문을 내렸다.
"그리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개새끼야."
결론은 조수석 행이었다. 남자는 말 끝나기 무섭게 법원 한복판에서 대성통곡했다. 누가 보면 지랑 이혼한 줄 알겠어. 법원 앞 경비원은 남자를 부축한 채 다가와 차창을 두드렸다. 죄송하지만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거든요. 네? 아니, 저랑 상관없는 사람인데요. 아 그래요? 근데 이 남자분이 그쪽이 보호자라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원우는 신음했다. 보호자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어쩌다 이런 새끼한테 잘못 걸려서…. 운전대를 잡은 민규는 싱글벙글했다. 좋은 차 타시네요. 입 좀 다물고 가자. 넵. 이름도 하필 김민규다. 넌 왜 이름도 김민규야? 원우는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을 던질 뻔했다. 한 달, 그 이상 더 있으려고 하면 발가벗겨서 내쫓을 거야. 협박성 0% 의 말에 놀랍게도 민규는 겁을 집어 먹었다. 얌전히 대답하는 모습이 보기보다 순했다. 왜 그러고 살았니, 나빠 보이진 않는데. 원우는 스스로 놀랐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단번에 얼굴 표정이 풀어진 민규가 하이텐션으로 말했다.
"제가 좀 사연 있는 남자라."
"그래. 내가 병신이지."
"형이 왜 병신이에요. 자학하지 마세요."
이제는 속까지 쓰려왔다. 여기서 우회전해. 넵.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민규는 입을 벌렸다. 그때는 정신없어서 몰랐는데 좋은데 사시네요. ……. 넵. 죄송합니다. 이젠 알아서 척척 입을 다문다.
"방은 여기 쓰고, 최대한 조용히 있어. 나 주로 집에서 작업하니까 신경 거슬리게 하면 진짜"
꿀꺽. 민규는 비장하게 침을 삼켰다.
"죽는 거야."
오들오들 떤 민규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 났다. 웬수 덩어리를 집안에 대놓고 들여놨는데 딱히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타이레놀이 여기 어디 있을 텐데. 미적지근한 물과 함께 알약을 삼키자 어디 아프세요? 하며 뻘하게 서있던 민규가 물었다. 괜찮으니까 니 할일 해. 숙면이 필요했다. 방으로 들어간 원우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고소한 죽 냄새가 난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나 보니 벌써 저녁 8시가 훌쩍 넘어가 있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정갈하게 차려진 상이 보인다. 일어나셨어요? 잠이 덜 깼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다 뭐야?"
"아프신 것 같아서 죽 끓였어요."
"부탁하지도 않은 걸 잘도 하네."
"요리 잘한다고 아까 그랬잖아요."
저 밥값은 해요. 또 저 표정.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져서 얘기한다. 한숨을 쉬고 자리에 앉았다. 너는 안 먹어? 같이 먹어두 돼요? 알아서 해. 민규는 헐레벌떡 수저를 챙겼다. 간은 일부러 안 했어요. 너무 심심하면 간장 넣어서 드심 돼요. 울 엄마도 이렇게까진 안해. 그래도…. 만난 지 이제 막 다섯시간 됐는데 느낌상으로는 이미 10년은 더 보고 지낸 룸메이트다. 자다가 열불이 나도 모자랄 판에. 갑자기 화가 나 숟가락을 집어 던졌다. 맛이 그렇게 없어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나는 조용히 숟가락을 주웠다. 손이 미끄러져서.
설거지하는 민규를 두고 겉옷을 챙겼다. 어디 나가세요? 친구 만나러. 늦으니까 먼저 자. 네에.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따듯해진 배를 문질렀다. 괜찮은가.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돈했다. 나 괜찮나 봐.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 정한을 만나러 가는 길 내내 끊임없이 생각했다. 나 괜찮은 건가 봐.
먼저와 소주를 홀짝이는 정한을 발견하고 마주 앉았다. 얼굴을 보자마자 정한이 웃어 재꼈다. 너 꼬라지 좀 봐. 남의 불행 서사를 저렇게 행복해한다. 기분이 팍 상해 맥주잔에 소주를 들이부었다.
"괜찮다면서 꼴이 그게 뭐야?"
"들어봐."
"뭘."
"이혼 사유와 한집에서 살면 어떨 것 같아?"
"설마 재결합?"
"오늘 이혼하고 오늘 결혼하냐? "
"그럼 뭔데."
집에 남자를 들였어. 정한은 고기 굽던 집게를 바닥에 떨궜다. 이 미친 새끼가 뭐라는 거야. 정색한 얼굴이 무섭다. 남자를 들였다니까, 이거 맨정신으로 얘기 못 해. 정한의 멘탈이 산산조각나는 게 눈에 보인다. 10억짜리 롤스로이스를 전봇대에 꼬라박고도 멀쩡했던 사람인데.
"나 때문에 직장 잃었다고 한 달 동안 같이 살자고 하잖아."
"그걸 예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 죄를 졌네요 하면서 넙죽 오케이하냐?"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널 바보로 키우진 않았는데, 돈 떼먹으려 작정하고 들어온 거면 어쩔려고 무모한 짓을 해?"
"아, 거기까진…."
"니가 뭐 나이팅게일이라도 돼? 불쌍한 척하는 사람들 보면 그냥을 못 지나쳐 왜?"
"그건 내 잘못이…."
"이혼남 딱지 붙여놓고 아직도 한심한 짓을 잘도 한다 씨발. 이 정도면 학습 능력 수준을 의심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 좀 심한 것 같…."
"나가라고 해. 다시 생각해보니 잠시 미쳤었다고, 같이 있으면 둘 중 하나 디질 것 같으니 꺼지라고 말해 그냥."
거의 랩 수준이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어버버거리자 어지간히 속이 문드러지는지 다 타버린 고기를 뒤적거린다. 원우야 내가, 사람 조심하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아무도 너 착하다고 생각 안 해. 호구 병신 반푼이로 보면 모를까."
맞다. 정상적인 인간관계는 딱히 없었던 것 같다. 그녀와도 오래 사귀긴 했다만 끝이 좋지 않았으니.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정적이 흐르는 분위기를 참지 못해 다시 술을 들이켰다. 나도 내가 미친 것 같아. 제정신 아니었어. 정한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리하는 게 나라고 쉽겠냐. 4년을 넘게 만났는데. 장난도 아니고."
"그 새끼랑은 왜 뒹굴었다니."
"욕구불만이었다는데."
"뭐라 할 말이 없다."
너랑 연애하면 몸에 사리 50개쯤은 나오지 않을까. 아니 뭐, 그렇다고 바람 핀 걸 정당화 시키는 건 아니고. 웃음이 나왔다. 일 중독 전원우. 그녀도 많이 힘들었을 거다. 근데 한 번 핀 바람, 두 번은 못필까. 대충 넘어가 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래가 뻔히 그려졌다. 혼자 삭히며 불안해할 나. 눈치 보는 그녀. 상상만 해도 숨이 막혔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돈 떼먹을 것 같으면 바로 연락해."
"내쫓으라는 말은 이제 더 안 하네."
"니 성격에 퍽이나."
"…."
"대신 그 새끼 마주치면"
"마주치면?"
"나 깜빵 갈 수도 있어."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당분간 우리 집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마. 원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친구가 전과자 되는 건 죽기보다 싫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정한이 웃었다. 이거 진심이야. 아마 그라면 말한 대로 하고도 남을 거다.
약혼녀는 궁합 보러 다니는 걸 좋아했다. 이런 거 다 미신이라고 툴툴거렸지만 결국에는 못 이긴 척 따라가 줬다. 홍대, 명동, 가로수길, 익선동 핫플이란 핫플은 다 돌아다니며 점을 봤지만 판에 박힌 대로 일정하게 나오는 답변들이 맘에 들지 않았나 보다. 좋다고 하면 좋은 거지 뭐. 아무리 달래봐도 이러면 다 사기 같잖아 하며 화를 낸 그녀는 결국 산속 깊은 곳에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갔다. 아니 그깟 궁합 보러 굳이 이렇게. 네비도 잘 안 터지는 곳으로 운전하려니 멀미가 저절로 올라와 구토만 세 번을 했다. 그렇게 개고생하며 찾아간 으스스한 점집에서 신이 난 약혼녀는 겁도 없이 혼자 이리저리 둘러보았고, 나 혼자 서있던 와중에 마주친 나이 지긋한 할머니는
너 남자 조심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대환장의 시작이었다. 창백해진 안색에도 괜찮냐 한 번 물어보지 않던 그녀는 짐짝 마냥 저를 질질 끌고가 마루에 앉혔다. 할머니는 어느새 방석에 앉아 읽지도 못할 한자로 빽빽이 채워진 책을 훑어보고 있었다. 저희 궁합 좀 봐주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나온 대답은 가관이었다.
"상극인 둘이 만났네."
"네?"
"빨리 헤어져."
"아니 그게 무슨…."
"둘 다 남 좋은 일 하고 있는 거야."
기분이 팍 상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는 거야. 이대로 가다간 정말 싸움 날 것 같아 대충 달래고 바람 좀 쐬고 오라며 외투를 둘러주었다. 그렇게 내보내자마자 이때까지는 입 꾹 다물고 있던 할머니가 봇물 터지듯 말을 내뱉었다.
"너 남자 조심해."
"아까부터 자꾸 그러시는데, 저 게이 아닌데요."
"잘못 걸려서 인생 저당 잡힐 수 있어."
"아니 그럴 일이 없다니까요."
"쟤랑은 빨리 헤어져. 좋은 역할 해줄 사람 아니야."
"…."
얼른 가. 얼떨결에 내쫓기고 잠시 멍해 있다가 이미 조수석에 타 있는 약혼녀를 향해 걸어갔다. 오빠, 할머니 진짜 재수 없다 그치. 어어, 그러게. 얼버무리며 대답했지만 머릿속에는 의미 모를 아까의 대화가 둥둥 떠다녔다.
그것도 잠깐이었고 다 잊고 있었는데.
"나보고 남자 조심하라 그랬어…."
"술 너무 많이 드신 거 아니에요? 눈이 이상해요."
"할머니가…나한테…남자 조심하라고…."
"약 먹고 술 마시면 안 좋은데. 잠시만요. 물 드릴게요."
"내가 씨발…내 손으로 남자를 집에…."
여기 물 드세요. 유리컵을 조심히 들고 온 민규가 정신도 못 차리고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원우를 고정시켰다. 입 좀 벌려봐요.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가만히 입을 벌리자 미지근한 물이 넘어온다. 잘했어요. 이깟 걸로 칭찬은 무슨.
"어떤 할머니가 나한테…."
"네."
"인생 저당 잡힌다고…."
"누구한테요?"
"…남자한테."
"아."
근데 있잖아. 그게 너면 어떡하지 민규야.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물어봤지만 불이 꺼져있어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왜 갑자기 기억나서….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민규가 뭐라 대답한 것 같은데. 푹신한 침대에 눕자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형은요. 제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행복했을까요.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이 허전하다. 괜히 반지 모양을 따라 둥글게 원을 그렸다. 모르겠어.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 애매한 대답에 민규는 입을 달싹였다. 죄송해요. 망칠 생각 없었어요.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왜 하필 날 찾아왔어? 내가 널 죽이려 했으면 어쩌려고. 그 정도로 사랑했어요? …잘 모르겠어. 근데 그냥. 왜 나였나 싶어서. 내 약혼녀한테 갈 수도 있었잖아.
"애인 아녔다구 했잖아요."
"그래."
"그냥 막막해서요. 이제 아무것도 없는데 나도 살고 봐야겠고. 마지막 남은 연락처는 형 약혼녀였고 그래서… 무작정 전화했는데 따지려면 형… 찾아가라고 해서…."
"친구도 안 사귀고 뭐 하고 살았어?"
"…그러게요. 뭐 하고 살았을까요."
말에 모순이 있다. 넌 도대체 뭐야? 지구에 떨어진 외생물체 같다. 원우는 의심 살 만한 말들을 골라 하는 민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걔가 너 찾아 갔구나. 깽판 부렸어? 비슷해요. 더 심했나 보네. 낮은 웃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민폐 끼친 것도 죄송해요. 지금 보면 진짜 발악을 했구나, 그 생각 밖에 안들어서. 이번에는 원우가 웃을 차례였다. 웃기지. 원수 같은 놈이 하는 신세 한탄을 듣고 있다는 게. 얼마나 걸어 다닌 건지 복숭아뼈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톡 튀어나온 것을 살살 문지르자 몸을 꾸깃하게 접는다. 이쯤 되면 습관인 것 같다.
"일은 구했어?"
"네. 그냥 이것저것."
"알바?"
"네."
"그전에는 무슨 일 했는데?"
"그냥 홀 매니저요."
아. 대충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 잘생긴 얼굴 잘 써먹었구나. 저 잘생겼어요? 그래. 옆에 찰싹 붙어오더니 실실거린다. 저 법원 앞에서 형한테 그런 말 하고, 막 차키 뺏고… 그랬을 때 사실 무서워서 죽을 뻔했어요. 그때라면 믿지 않았겠지만, 민규의 대부분을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된 지금은 그러고도 남았을 성격이라는 걸 안다. 원우는 잊으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좋은 기억도 아닌데 뭘. 붉어진 복숭아뼈를 멈추지 않고 쓸어내렸다. 여기 멍들었어. 안 아파요 하나도. 꾹꾹 누르자 움찔거린다. 거짓말. 손장난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약속한 한 달이 지났다. 민규는 짐을 챙기더니 빈 쪽지를 내밀었다. 계좌번호 좀 알려주세요. 의아하게 쳐다보자 얼굴을 붉힌다. 제가 맨몸으로 와서 이것저것 다 사주셨잖아요. 그냥 받을 수는 없고 해서…. 됐다고, 어린애 돈 뜯어먹을 생각 없다며 거절을 해와도 민규는 꿋꿋하게 쪽지를 들이밀었다.
"핑계 만드는 거예요."
"뭐?"
"…."
"…."
"민규야."
"네?"
"그럴 때는 연락처 달라고 하는 거야."
아. 쪽지를 뺏어 번호를 휘갈겨 적어주었다. 필요할 때만 연락해. 시도 때도 없이 불필요하게 하지 말고. 민규는 고개가 떨어져 나가도록 끄덕였다. 귀찮게 안 할게요. 정말 사람 하나 갱생시킨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누가 돈 줄 테니까 자자고 해도 무시해 알았어? 그럴 때 전화하라고 준 거야 이 번호. 끄덕끄덕. 말은 참 잘 듣는다.
신혼집이 하숙집이 되어본 경험은 나쁘지 않았다. 민규가 해주는 밥은 따듯했고, 건네는 말은 다정했다. 생각보다 애정에 굶주려 있었던 것 같다. 연애를 하고, 결혼 준비를 하면서도 못느껴본 감정은 생소했다. 이상한 분위기에 휩쓸려 문을 열고 나가려는 민규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나도…"
"네?"
"나도 고마웠어…."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마주 봤다. 순식간에 입술이 맞닿았다. 뭐지. 생각할 틈도 없이 멀찍이 떨어진 민규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죄송해요 아, 제가 그니까 저도 모르게… 죄송해요! 닫힌 문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이런.
요망한 강아지로 키웠나 봐.
민규가 나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혼했을 때보다 더 안 좋아진 안색에 오랜만에 만난 정한은 원고를 들이밀며 비웃었다. 그 새끼 나갔다면서 왜 니가 나간 것 마냥 시체처럼 그러고 있어. 원우는 정한의 말을 한귀로 듣고 흘렸다. 요망한 강아지. 전화 한번을 안 해. 필요할 때만 하라니까 진짜 착실히 지키는 건 뭐지. 쓸데없이 말만 잘 듣는다. 짜증 나. 얼음을 콰득 소리가 나게 씹어먹자 정한은 혀를 찼다. 미친놈.
"내가 진짜 미친 거야."
"빨리도 알았다."
"왜 전화를 안 하지?"
"전화번호를 줬어?
와. 상상 이상인데. 정한은 이제 욕도 아깝다는 듯 멸시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천장만 멍하니 응시하던 원우가 몸을 일으켰다. 술 마실래. 정한은 벌써 옷을 챙겨 들었다. 그 말 언제 하나 기다리고 있었어. 울리지 않는 핸드폰에서 관심을 떼야 한다. 멍청이. 번호를 받았어야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소주? 맥주? 아님, 간만에 양주?"
"뭐든."
"돈은 니가 내라."
"남는 게 돈인 새끼가."
"칭찬 고맙다."
괜히 투덜거리며 정한의 차에 올라탔다. 역시 외제 차는 승차감부터 다르다. 시트에 몸을 묻었다. 도착하면 깨워라. 이젠 대답도 안 한다.
"야, 야 너 전화 와."
"…뭐?"
"얼마나 깊게 잔 거야. 핸드폰 터지는 줄 알았어. 깨워도 안 일어나고."
미친.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모르는 번호다. 김민규? 별것도 아닌데 손이 떨린다. 허, 참.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은 정한은 그런 원우를 묵묵히 쳐다봤다.
"여보세요? 김민규?"
- …형….
"너 뭐야, 목소리가 왜 그래?"
- 저 형네 집 앞인데요….
"비밀번호 알잖아. 들어가면 될 걸 왜 그러고 있어?"
한 달 지나면…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멍청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다급하게 정한의 팔을 잡았다. 야, 미안하다. 우리 집으로 빨리 가줘. 꿈쩍도 하지 않는 정한에 애가 탔다. 아 빨리 가달라고!
"너 나중에 내 탓 하지 마."
"……."
"니가 벌인 일 알아서 책임지라는 말 하고 있는거야 지금."
정적이 흐른다.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은 차를 돌리고 엑셀을 밟았다. 친구 잘못 사겨서 지금 이 지랄을 하고 있지 내가. 중얼거리는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연락 없던 애가 갑자기 무슨.
"내려."
"미안하다. 전화할게."
"하지 마 그냥.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가라."
차 문을 닫고 전속력으로 뛰었다. 꼭 이럴 때 엘리베이터는 가장 끝 층까지 올라간다. 씨발 급해 죽겠는데. 거지 같은 체력에 엄두도 못 냈던 계단을 두 칸씩 밟고 올라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헉헉대며 도착하자 쭈그려 앉아있는 민규가 보였다.
"너 꼴이 그게 뭐야?"
"그게요, 설명하려면 길구요… 그냥 생각나는 곳이 여기 밖에 없어서…."
"너 뭐 사채 썼니?"
"아뇨."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사과부터 하는 민규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성한 곳이 없었다. 울컥함이 올라온다. 넌 도대체 뭐야? 민규를 볼 때면 항상 드는 의문이었다. 울먹이는 민규를 달래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안 내쫓으니까 긴장 풀고 누워. 대충 후시딘을 덕지덕지 발라주며 말했다. 내일 병원 가자. 잠이 몰려오는지 눈이 반쯤 풀려있다. 자꾸 폐만 끼쳐서…. 알면 조용히 하고 자. 대답이 없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눈 감자마자 입 벌리고 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해 죽을 것 같았지만 참았다. 내일이 있으니까.
너 남자 조심해.
갑자기 떠오른 한마디에 웃음이 났다. 몸을 숙여 자고 있는 민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 생에 남자가 너 말고 또 있으면 골병 나서 뒤질 수도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니가 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
인생이 저당 잡혔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