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2021. 2. 13. 18:30

 

 “네?”

 “김민규 씨가 맡으라고, 이번 프로젝트.”

 “아니 저는 아직….”

 “이거 다시는 없을 좋은 기회야. 승진하고 싶어 했잖아, 계속.”

 “그건 맞지만….”

 “그럼 그렇게 알고 상부에 결재 올릴게.”

 “…….”

 

 

 너무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이거 다 김민규 씨를 믿어서 맡기는 거라니까? 민규의 굳은 표정을 보고 몇 마디 덧붙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대로 된 사고회로가 돌아가지 않았다. 좋은 기회인 건 맞지…. 상대 프로젝트 담당자에 적힌 저 이름만 아니면.

 

 알겠습니다. 대답을 독촉하는 상사의 물음에 민규는 고개 숙여 대답했다. 어떻게 거절을 하겠는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길이 멀었다. 무거운 짐을 한가득 진 기분이었다. 다른 회사와 하는 협동 프로젝트의 담당자로 선발된 게 처음이어서도 그렇지만 그 사람을 만나는 게 내키지 않아서 더 그랬다. 언젠간 벌어질 일이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내키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첫 미팅 날이 잡힌 다음 주가 오지 않길 속으로 열심히 바라는 것뿐이었다. 이번 주 주말에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원을 빌면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신은 결코 나의 편이 아니다. 요즘 들어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이었다. 특히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계속 빌고 빌었다.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지구 멸망 좀 시켜주세요. 평소에 안 찾다가 이럴 때만 찾으니까 괘씸하다 이건가, 소원을 들어줄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지구 종말은 무슨, 날씨가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함께 프로젝트를 맡게 된 전원우 팀장입니다.”

 

 

 회의실 가득 울리는 목소리.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마주치는 건 항상 상상 속에서 벌어지던 일이었는데. 실제로 눈앞에 맞닥뜨리니 짜두었던 시나리오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하얀 종이에 쓰여있던 전원우, 세 글자. 그 까만 잉크가 뭐라고 사람의 숨통을 어찌나 조이던지.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내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마주할 얼굴에 익숙해지려고 채 지우지 않은 전원우의 사진도 다시 꺼내 보았다. 몇 장 넘겨보다가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만두었긴 했다. 절대로 비굴한 모습은 보이지 말자. 김민규가 세운 시나리오의 가제였다.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내용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미팅을 마치자 넋이 나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짧게 인사를 건네며 미팅룸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그와의 첫 만남과 겹쳐 보여서. 어색한 정장을 입고 준비해온 종이와 관중들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던, 깔끔하게 끝인사를 하던, 교수님과 악수를 나누던, 그 모습 그대로 뒤풀이 자리에 나타나 제 옆자리에 앉던…

 

 

 “김 과장님!”

 

 

  자신을 불러오는 목소리에 겨우 김민규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가셔야죠. 독촉해오는 목소리에 겨우 몸을 일으켰다. 고작 몇 분 얼굴을 마주했다고 몸에 힘이 쭉 빠질 일인가. 앞으로의 일들이 막막해졌다. 정신 바짝 차리자 김민규… 손바닥으로 볼을 두어 번 두드리곤 팀원들을 따라나섰다.

 

 

 “김민규 씨.”

 

 

 회의실을 나서려는데 낮은 목소리가 붙잡아왔다. 아직도 과거의 잔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는데. 나사 하나 빠진 맹한 모습으로 그를 마주하기가 꺼려져 걸음을 멈춘 채 움직일 수 없었다. 곁에 있던 팀원들의 눈치가 보여 행동 하나하나가 불편했다. 내 이름이 저렇게 딱딱했었나. 이름에 모래주머니가 달린 것처럼 무겁다. 별생각이 다 들었다. 반응이 없자 구두 굽 소리가 가까워진다. 등을 돌려 그를 마주할 차례였다.

 

 불쑥. 손이 내밀어졌다. 나도 모르게 긴장해버려 침을 크게 꿀꺽 삼켰다. 수백 번 붙잡았던 전원우의 손. 분명 익숙해야 하는데, 눈앞에 내밀어진 것은 낯설기만 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긴장했던 게 무색하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다. 저도 잘 부탁드린다고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상대가 전원우라서.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눈에 담긴 게 전원우라서. 바지춤에 손바닥을 스윽 닦고 뻗는 일련의 행동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손끝이 향하는 게 전원우라서. 다 전원우라서.

 

 가만 지켜보던 전원우가 작게 헛웃음을 흘린다. 숨이 가득한 찰나의 소리에 정신이 확 들어서 내민 손을 마주 잡아 위아래로 깔끔하게 한 번 흔들곤 황급히 물렸다.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곤 회의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죄송해요, 저희 과장님이 몸이 좀 안 좋으신가 봐요.”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 있을 수도 있죠.”

 

 

 당분간 같이 일할 건데 잘해봐요, 우리. 등 뒤로 통성명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그렇게도 즐거운지 하하호호 웃는 소리와 함께. 거슬리고 불편하고 신경 쓰이고. 들 수 있는 모든 나쁜 감정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등 뒤로 누가 끈끈이라도 발라 둔 건지 쉬이 발을 뗄 수가 없다. 정의할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날 빼고 즐거운 얘기를 하는 게 서운하다-처럼 단순하게 매듭지을 수 없었다.

 

 이상한 기분을 뿌리치지 못하고 등 뒤를 흘끗 쳐다보았다. 이쪽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 바로 전원우와 눈이 마주친다. 눈만 마주친 것뿐인데 속을 열어 보여준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화들짝 놀라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미쳤어, 거기서 왜 뒤돌아봐 가지곤…. 전원우는 언제부터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던 거야. 진짜 짜증나….

 

 

 

 

 

 

 수능 볼 때도 먹지 않은 청심환 한 알을 꺼내 들었다. 절대로 저번처럼 긴장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물도 없이 그 큰 알을 꾹꾹 씹어 삼키자 잇새로 씁쓸한 맛이 새어 나왔다. 진정해, 진정.

 

 

 그 커다란 알 하나를 다 씹어 먹었으니 효과는 엄청났다. 전원우가 앞에서 피피티를 넘기며 준비해온 것을 발표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긴장되긴커녕 오히려 너무 찾아온 안정 덕에 잠이 쏟아지려는 참이었다. 자꾸 앞으로 쏠리려고 하는 고개를 한 손으로 받혀 지탱했다.

 

 정신 차리자. 한숨을 푹 내쉬고 감긴 눈에 힘을 주어 크게 떠내자,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전원우와 눈이 마주쳤다. 당혹감을 느낄 새도 없이 전원우는 미간을 한 번 찌푸리곤 시선을 거두었다.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묘한 표정 변화였지만, 이건 명백한 불쾌함의 표현이었다. 몇 년을 붙어먹었는데 그걸 모를까.

 

 잠이 싹 달아나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하자는 거지 지금. 발끝부터 불쾌함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사람을 벌레 보듯이 보는 꼴을 몇 번 보긴 봤다만, 그 시선이 제게도 향할지 몰랐다. 마주치면 불쾌해하는 사이하자, 그래. 눈은 무슨 머리꼭지도 안 쳐다볼 테니까 그렇게 하자고. 괜히 유치하게 날을 세웠다.

 

 

 “질문받겠습니다.”

 “…….”

 “…김민규 씨?”

 

 

 대략적인 프로젝트의 개요 설명이 끝나고, 적막함 가운데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김민규는 깜짝 놀라서 줄곧 아래로 향하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절대로 발끝조차 쳐다보지 않으리라, 하는 자존심에 나누어준 자료에 의미 없는 단어를 나열하는 중이었다. 시선의 끝이 온기 없는 눈빛과 맞닿았다. 에? 네 도 아닌 어벙한 물음이 튀어나왔다.

 

 한쪽 입꼬리만 당겨 웃는 무시의 표현이 되돌아왔다. 급하게 괴고 있던 팔을 풀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질문, 있으십니까? 비웃음만으로도 충분히 내포하는 의미를 알겠는데, 굳이굳이 말을 덧대서 사람을 바닥으로 짓뭉갠다. 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뇨. 당황한 걸 숨기려 딱딱하게 포장한 말투였다. 역시 눈도 못 맞춘 채였다.

 

 

 “다행이네요.”

 “…….”

 “집중을 영 못하시길래,”

 “…….”

 “혹시라도 이해 못 한 부분이 생기면 안 되지 않습니까.”

 

 

 허. 돌려 까는 것 좀 봐. 저, 저 여우 같은 게. 아니, 일하다가 껄끄러운 사람 만날 수도 있는 거지 저렇게까지 사람을, 어? 그렇게 해야 하나? 사람이 참 공과 사가 확실하지 못하다니깐. 사적인 감정 담을 거면, 나도 진작에 담았겠다! 누군 못 해서 이러고 있는 거냐구.

 

 사람 좋은 척 웃어 보이는 눈빛이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챙겨주는 척, 열심히 일하는 척, 다정한 사람인 척. 몇 겹의 포장지를 덮어씌운 건지 모를 정도로 뻣뻣하게 구는 눈꼬리며, 억지로 끌어올린 입술. 다 보인다고, 전원우.

 

 

 

 

 

 

 “저 팀장 마음에 안 들어.”

 “누구요, 전 팀장님이요? 왜요 전 ….”

 “이 대리. 내 편이야, 저 편이야.”

 “저야 당연히….”

 “…….”

 

 

 째릿. 눈을 흘겨 쳐다보는 게 예사롭지 않다. 이 대리는 여기서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자신의 직장 생활이 끝장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 과장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깊게 나셨구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일단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과장님 편이죠오….”

 “그러면 내 편 들어야지.”

 “…네에.”

 “저 사람이 나 엄청 꼽주는 거 못 봤어?”

 “…그거야 과장님이….”

 “쓰읍.”

 “아 봤어요, 봤어요.”

 “사람이, 어? 다른 직원들 앞에서 사람을 그렇게 무안주나?”

 

 

 궁시렁 궁시렁. 한참을 그렇게 불만을 토로하고 이 대리에게 자신의 편이라는 확신을 꼭꼭 받아서 손가락 도장까지 찍고 나서야 김민규는 입을 다물 수 있었다. 중간에 낀 이 대리만 불쌍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에 파트너십 프로젝트 맡으신 전 팀장님 있잖아,”

 “아 L사에서 오신?”

 “엉, 그분 완전 다정하시대.”

 “진짜요? 생긴 건 날카로운데.”

 “그러니깐. 옆 부서 최 사원이 프린터기 용지 갈고 있는데….”

 

 

 자기가 하겠다면서 A4용지 박스를 번쩍번쩍 드는데, 최 사원이 완전 뻑갔잖아. 헐 진짜요? 그렇다니깐. 것뿐인 줄 알아? 저번에는 김 인턴이… 사무실 짐을 옮기는데….

 

 여기저기 전부 전원우 얘기투성이다. 이 회사 사람들은 어찌나 남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지…. 애꿎은 서류를 뒤적거려도 전 팀장님, 전 팀장님. 어찌나 귀에 쏙쏙 잘 들어오는지. 누가 전원우라는 이름에만 형광펜으로 밑줄을 직직 그어두고 반짝이 가루까지 뿌려둔 줄 알겠다. 너무 튄다 이름이.

 

 들려오는 얘기들은 또 왜 하나같이 다정한 모습인데? 나한테만 틱틱거리고, 사람들 앞에서 무안주고, 눈빛으로 불편한 티 내고… 그런 사람 아니었으면서. 언제부터 모두에게 다 친절했다고. 차라리 싸가지 없다고 욕이라도 하면 그치그치, 하면서 맞장구라도 치겠다. 이게 뭐야, 나만 이상해 나만. 친절할 거면 모두한테 다 똑같이 친절하든지 왜 나는 빼? 아니 애초에 다른 사람들한테 친절하게 굴 건 뭐야?

 

 

 결혼도 했으면서.

 

 

 “어, 전 팀장님 아직 미혼이시라는데요?”

 “뭐?”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큰 소리를 내었다. 팀원들의 시선이 김민규에게로 쏠렸다. 내색하지 않고 듣고만 있으려고 했더니. 여직원들끼리 누가 다정하다, 착하다 얘기하면 끝은 뭐겠어. 여자친구 없으셨으면 좋겠다, 미혼이셨으면 좋겠다. 하는 기회 엿보기지. 어 얘들아 전원우 결혼했어, 임자 있다구. 나만 아는 정보를 곱씹으며 정신승리를 하고 있었는데, 미혼? 미호오온?

 

 그 인간 이제 하다하다 못해 싱글인 척까지 해? 분명 결혼한다고…. 아니 근데 이 대리는 대체 그건 어떻게 아는 거야?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찼는데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게 분통했다. 애꿎은 이 대리의 동그란 눈동자가 얄미워 보일 지경이었다.

 

 

 「나 결혼해.」

 「……뭐?」

 「이번 주는 나 집에 없으니까, 알아서 짐 챙겨가.」

 「…형.」

 「…….」

 「전원우.」

 「…민규야,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 없는 거 알잖아.」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어뜨리던 전원우. 붙잡을 기회도 주지 않고서는 차 태워다 주겠다던 전원우.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나. 그걸 쳐다보지도 않던 전원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와버린, 나. 전원우와, 나. 잊고 살던 기억들이 다시금 수면 위로 존재를 드러낸다. 내가 어떻게, 가라앉히고 살았는데.

 

 

 “과장님, 괜찮으세요?”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자 이 대리가 단단하게 몸을 받쳐온다. 다정한 이 대리. 전원우, 넌 이런 사람 옆에 없지? 난 있다, 이 대리…. 아, 와이프가 있겠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확 기분이 상해버렸다. 이 대리이이. 말꼬리를 늘이며 괜히 무게중심을 이 대리에게로 쏟았다.

 

 악! 무거워요, 과장님! 난 이 대리밖에 없어어어. 알겠어요, 일단 다리에 힘 좀! 나 좀 잡아줘어어어. 과장님, 낮술 하셨어요? 으이그, 아무리 힘들어도 혼자 낮술 하는 게 어딨어요! 다음에는 같이…, 과장님, 우세요? … 과장니임. 덩달아 떨리는 이 대리의 목소리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한 뼘이나 작은 이 대리를 고쳐 안았다. 꽉, 터질 만큼. 악, 과장님! 이 대리가 다급하게 등을 두드려 왔다.

 

 내가 우는 건 이 대리 때문이야…. 이 대리가 너무 착해빠져서 그런 거라고…. 절대로 전원우 때문이 아니야…. 절대로….

 

 

 

 

 

 

 전원우의 손가락을 쳐다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마디가 두드러진 얇고 긴 손가락. 아무것도 없는, 빈손. 왼손 약지에 아무것도 없는걸 확인했는데도 자꾸 눈이 갔다. 그렇게라도 계속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 결혼반지는 빼고 다니는 건가? 결혼할 때 반지는 안 했나? 그냥 결혼을 안 한 건가? 그러면 왜? 왜? 가슴 한켠에 쌓여가는 답 모를 질문들을 반복하면서.

 

 

 “김민규 씨.”

 

 

 익숙하고도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들어도 들어도 저 딱딱한 호칭은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부러 눈도 마주치지 않고 심통을 부렸다.

 

 

 “왜요.”

 “담배 태우십니까.”

 

 

 자기가 가르쳐줘 놓고선 짐짓 모르는 체한다. 처음 담배를 입에 댄 날이 문득 떠올랐다. 형, 담배 피우는 거 섹시하다. 반 나신을 하고선 팔 한쪽을 베고 그를 쳐다보던 나와. 내가 해서 그런 거야. 넌 배우지 마. 하얀 시트로 대충 하반신을 가리곤 창틀에 기대어 담배를 태우던 그. 그렇게 얘기하곤 한 번만, 한 번만을 외치는 제게 담배 한 개비를 물려줬던, 그런 기억.

 

 난 아직도 기억 속에 사는데, 그런 식으로 들쑤시지 마.

 

 

 “아뇨.”

 “그럼 제가 태우는 거 구경하십시오.”

 

 

 미동도 없이 저렇게 얘기하고선 등을 보여 걸어간다. 너무 익숙해서 따라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등판. 한숨을 푹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나 지금이나, 끌려다니는 건 또 나지.

 

 흡연 구역이 어딘지는 아시냐고요.

 

 

 

 

 담배 태우는 걸 구경하라는 게 빈말은 아니었는지 난간에 기대어 익숙한 손놀림으로 한 개비를 꺼내어 불을 붙인다. 라이터를 쥔 손가락이 길었다. 담뱃갑을 내미는 손길에 괜찮습니다, 하고 손을 물렸다. 이럴 거면서 담배 피우는지는 왜 물어봐, 왜. 이 남자의 의도를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어졌다. 담배 연기가 얕게 흩어진다. 속앓이는 깊어져만 간다.

 

 내 앞에서 담배는 또 왜 그렇게 피워대선 이제 당신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만 봐도 그때가 생각나게 합니까. 겹쳐 보이는 장면이 수천, 수만 가지가 넘습니다. 차 문에 기대어 피우던 담배를 내 모습이 보이자마자 구두 앞 코로 비벼 끄던 당신, 관계 후에 꼭 한 개비씩 물던, 처음 내 손에 들려주던, 새벽에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연기를 내뿜던 뒷모습, 비 오던 날 우산 속에서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모습으로 물던 담배, 그리고선 나를 보자마자 내던지고 황급히 우산을 씌워 주었었죠. 당신이 서 있던 자리 주변에 가득했던 담배꽁초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내게 모든 기억을 다 떠넘기고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지 마세요.

 

 

 “…저한테 할 말 있는 거 아니셨어요?”

 “…….”

 

 

 선수 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보다 그게 나으니까. 이 공간을 채우는 그 어떠한 소음도 없이 어색한 분위기만 감도는 걸 견딜 수 없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더 생각에 잠겼다가는 이성을 잃고 이것저것 물어댈 것 같았다. 절대로 비굴한 모습 보이지 않기, 형태를 알 수 없는 시나리오는 아직도 작성 중이었다.

 

 침묵이 길었다.

 

 

 “팀장님, 제가 업무가 밀려서….”

 “김민규 씨.”

 

 

 속에서 무언가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전원우를 다시 본 그 순간부터 쭉 지속되어 오던 감정이었다. 발끝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서 이젠 가슴팍까지 가득 차 숨을 쉬는 것마저 버겁게 한다. 어디로든 쏟아내어야지 내가 살 것 같았다. 그게 눈으로든, 입으로든.

 

 이름을 불러놓고서 절대로 쳐다보려고 하지 않는 저 사람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속을 그렇게 들쑤셔놓고 담배를 입에서 살짝 떼기만 할 뿐 별다른 움직임도 없는 저 사람을.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감정이 울렁거렸다.

 

 

 “…….”

 “…혹시, 제가 불편하시면….”

 “이기적이시네요.”

 

 

 이기적이라는 말 한마디에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던 고개가 나를 향해온다. 이제야 눈을 맞춰온다. 악의 없는 당신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이럴 거면서. 항상 내 앞에서 내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무너질 거면서. 남들한테 다 하는 행동, 나한테는 안 할 거면서. 왜 자꾸 되지도 않는 자존심 세워. 전원우. 내뱉지 못할 이름만 되뇌었다.

 

 

 “…네?”

 “이기적이시라고요.”

 “김민규 씨.”

 “지금 팀장님 마음 편하자고 하시는 말인 거 압니다.”

 “…….”

 “불편해하는 거 보이면 어떡하실 건데요.”

 “…….”

 

 

 제가 여기서 불편하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가 달라지기는 하는 겁니까? 쟤가 나 때문에 불편해하는 건 보이고, 가만 놔두자니 신경 쓰이고, 그래서 선택하신 게 고작 이겁니까? 업무 시간에 불러내서 불편하냐고 물어보는 거? 입이 한 번 열리니까 정도를 모르고 쏟아져 나오려 하는 말들을 틀어막으려 입술을 잘근 씹었다.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한숨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선 몸을 돌려 비상구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본 그 표정을 다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마음이 다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은 표정. 그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간 속에 있는 것들을 다 비워낼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다 쏟아내어 버릴까 봐. 다 가지세요, 하고 심장을, 건네 버릴까 봐.

 

 가슴께까지 차오른 감정이 울렁였다.

 

 

 

 

 

 

 예정된 회식이 취소되는 행운은 나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한 사람의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해서 순순히 그래 다음에 갑시다, 하고 무를 인간들도 아니었다. 전 몸이 안 좋아서…. 문장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이 대리가 팔을 잡아끌며 과장님 안 가면 무슨 재미로 회식합니까! 하는 바람에 팀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과장님 같이 가요! 신났는지 이런저런 말을 덧대어 온다.

 

 억지로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시끌벅적한 상황 속에서도 전원우 목소리는 귀에 쏙 박혔다. 아까의 그 표정은 어디 갔는지 평소의 무미건조함을 장착하곤 옷깃을 정리하며 무심하게 툭 던진 말투였다. 전원우의 말 한마디에 들떴던 팀원들의 손길이 거두어지고 눈을 굴리며 눈치 보기 바빴다.

 

 아뇨, 가겠습니다. 정말 죽기보다 싫은 회식이었지만 전원우의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럴 마음이 싹 가라앉았다. 얼굴 보고 말 몇 마디 나눴다고 기분이 가라앉았다는 걸 티 내긴 죽어도 싫었다. 비굴해지지 않기. 다시금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우리 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까지 저런 구닥다리 건배사나 하고 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참석한 회식이라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뭣 모른 채 웃고 떠들고 싶지는 않았다.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자 이 대리가 옆에서 소주 병을 뺏어 들었다. 과장님, 자작하면 3년간 장가 못 가는 거 모르세요? 평소 같으면 빠득빠득 이기려 들었을 테지만, 기분이 기분이라 잔을 가져다 대기만 했다.

 

 팀장님 한 잔 받으십시오! 아, 저는 술을 잘…. 에이, 빼지 마시구요! 전원우 관련 얘기는 어찌나 잘 들리는지. 다들 술기운이 돌기 시작해 높아진 목소리로 술을 권한다. 저거 또 거절도 못 하다가…, 에휴. 아니나 다를까 채워주는 족족 입으로 가져다 댄다. 저러면 얼마 못 갈 텐데. 내 코가 석자인데 지금 누구를 신경 쓰고 있냐. 내가 보질 말아야지, 내가.

 

 잔에 남은 술을 입안에 다 털어 넣고서 자켓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의 눈치를 보느라 묘하게 가라앉은 테이블 분위기가 그제야 보였다. 어디 가세요?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다 이 대리가 물어 온다. 담배 태우러. 자리를 잠시 비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초겨울의 저녁은 쌀쌀하다. 안과 확연히 차이나는 온도에 몸을 떨었다. 자켓을 걸치진 않고 안에 든 담배만 꺼내 물었다. 벽에 기대어 불을 붙였다. 잠깐의 온기가 손끝을 녹인다. 등 뒤로 들려오는 웃고 떠드는 소리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열 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이었다. 언제쯤 빠지면 좋을지 슬슬 타이밍을 쟀다. 마주하기 꺼려지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운이 쭉쭉 빠졌다. 고개를 뒤로 젖혀 벽에 댔더니 뒤통수에 닿아오는 한기가 뼛속까지 울린다. 눈꺼풀을 닫은 채 연거푸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

 

 술을 좀 마시긴 마셨나 보다. 눈을 감자마자 전원우 생각이 들어차는 걸 보면. 아닌가, 아까부터 하고 있었던가. 술을 마시면 항상 생각난다. 전원우, 하며 자신을 소개하던 그가. 교수님과 얘기를 나누고 늦게 등장하신 주인공이, 하필이면 딱 비어있던 내 옆자리에 앉아서는. 하필이면 그게 또 왼쪽 옆이라, 어색함이 감도는 테이블에서 뻣뻣하게 안주를 주워 먹던 두 손이 거듭 부딪혀서. 그의 오른손과 내 왼손이 거듭 부딪힐 때마다 아, 하면서 멋쩍은 웃음과 함께 손을 물리길래. 그게 퍽 귀여워 보였었는데. 별일도 아닌 게. 아마 처음 본 순간부터 콩깍지가 씌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전원우를 생각하면서 웃는 건 오랜만이지, 아마. 피식 웃으며 눈을 뜨자 형형색색의 간판 불빛들이 눈앞에서 어름거렸다.

 

 이제 슬슬 빠져야지. 반쯤 기대 있던 몸을 세웠다. 가겠다는 말은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발걸음을 가게 안으로 향하려는데, 퍽. 다리에 무언가가 걸렸다. 걸렸다기보다 내가 걷어찼다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어, 민규다아….”

 

 

 전원우. 나를 올려다보며 헤실 거리는 전원우가 있었다. 꽤 큰 소리가 났는데 인상 한 번 찌푸리곤 이내 웃음을 짓는다. 그래, 그때는 이런 게 귀여워 보였었는데. 지금은 안 귀엽다는 건 아니고. 변함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문제지. 날 대놓고 무시하는데 똑같이 싫어하지도 못하겠고.

 

 그래서 이건, 그냥 술김에.

 

 

 왜. 무시해도 될 말에 굳이 답을 해주는 것. 너도 취했고, 나도 취했으니까. 그래서 할 수 있는 거야. 꼴에 아직 자존심은 남아 있어서 눈높이를 맞추지는 않았다. 한 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전원우를 내려다보았다.

 

 

 “민규야.”

 “…왜.”

 

 

 술을 많이 마시긴 마셨는지 눈이 반쯤 풀려 맹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쳐 온다. 발음도 잔뜩 꼬여 웅얼거리는 게 반이었다.

 

 

 “…민규야아.”

 “……어.”

 “나 불편해하지 마….”

 

 

 이름만 세 번 불리자 슬슬 대답하는 게 귀찮아져서 건성으로 답했더니 대뜸 불편해하지 말란다. 진심인지 술기운에 떠오르는 단어를 아무거나 조합하는 건지 모르겠다. 불편하다고 한 게 그렇게 신경 쓰였나. 그래놓곤 얼굴을 볼 자신은 없는지 머리를 푹 숙이고는 흔들흔들. 곧 넘어갈 것처럼 위태롭다.

 

 

 “아.”

 “이럴 줄 알았어.”

 

 

 쪼그리고 앉아서 흔들거리는 게 위태해 보이더니, 결국 고꾸라질뻔한 걸 겨우 잡았다. 마음이 급해서 잡히는 대로 힘을 줬더니 아팠는지 미간을 찌푸린다. 미안. 짧은 사과를 뱉자 뭐가 그렇게 좋은지 피식거리기만 한다.

 

 일어나. 잡은 팔에 그대로 힘을 주어 올리자 어…? 하는 어벙한 물음과 함께 순순히 딸려온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비틀거리는 몸을 단단히 붙잡았다. 가자. 한 손은 전원우의 팔을 어깨에 둘러 잡고 한 손으론 허리춤을 잡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몇 발자국 옮기니 영 맥을 추지 못한다. 중력을 이겨내지 못하는 얇은 다리가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렸다.

 

 

 “업혀.”

 

 

 안 되겠다 싶어서 전원우 앞에 등을 보인 채 무릎을 굽혔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등 뒤로 닿아오는 무게가 느껴졌다. 왜 이렇게 가벼워. 땅에서 발을 뗐는데도 버겁지가 않다. 가벼운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어째 더 마른 것 같냐…. 목 언저리에 팔을 둘러오는 이는 가벼우면 가벼웠지 절대 무겁진 않은데 발걸음이 늦어지는 건 모를 일이었다.

 

 

 

 

 

 

 대리기사를 불러 전원우 집으로 가는 동안에도 전원우는 영 맥을 못 추렸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다시 전원우를 들쳐 업었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으응…. 뒤척이며 얕은 신음을 뱉는다. 어쩌다 술 취한 전 애인을 집에 데려다 주는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전원우,”

 “……으응.”

 “비밀번호.”

 “…너…, 새ㅇ일….”

 

 

 뭐? 집 문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대라 재촉하니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내 생일이란다. 생각하지도 못한 답변에 되묻지도 못하고 가만 서 있었다. 반응이 없자 귀에다 대고 공…사…공…육…. 숫자를 더듬더듬 불러댄다. 육. 마지막 숫자를 부르며 쭉 내민 입술이 귓바퀴에 닿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정신을 차리고 네 자리 숫자를 입력하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내 발로 여길 직접 걸어들어온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짐을 싸 들고 나오면서 네가 알아서 해라, 하는 심정으로 두고 온 물건이 곳곳에 보였다. 신발장 한켠에 놓여있는 운동화, 식탁 위에 놓인 신혼부부처럼 맞췄던 머그컵, 소파 등받이 위 전원우를 닮았다고 보이는 족족 뽑았던 여우 인형, 장식장 안엔 내가 선물해 준 향수까지. 그제야 실감이 났다. 내가 지금 전원우 집에 들어왔구나.

 

 정신을 차리면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지금 물어봤자 못 알아들을 게 뻔해서 굳이 묻지는 않았다. 맨정신으론 답을 피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잠시 했지만 일단 지금은 침대에 제대로 눕히는 게 먼저였다. 누가 전원우 침대 아니랄까봐 단조로움의 극치를 달리는 회색빛 시트 위로 조심히 내려놓았다. 으응…. 뒤척이며 앓는 소리에 쉬이, 더 자자. 하며 가슴께를 두드려 주었다.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라 자연스러운 일련의 과정을 의식하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하루 종일 걸치고 있었을 정장이 불편해 보여 자켓을 벗겨 내었다. 넥타이도 걷어내고 셔츠는 단추 몇 개만 풀었다. 그대로 내린 손이 벨트에 가까워지자 나도 모르게 숨을 헉, 들이쉬었다. 민규야…. 날 부르는 전원우의 목소리. 온전히 날 받아내던 작은 몸. 귓가에 쏟아내던 숨가쁜 소리. 위험하다. 여긴 너무 당신이 많다. 내 손길을 받아내는 족족 반응하던 당신이, 너무 많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손길을 거두었다. 고개를 내리자 반쯤 선 아래가 보였다. 하. 한숨을 내뱉고 전원우에게 걸쳐주었던 자켓을 집어 들었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고 등을 돌려 침대를 벗어나려던 순간, 휘청, 옷 끝이 당겨지고, 몸이 기울어졌다.

 

 

 “…민규야….”

 “…….”

 “가지 마….”

 “…….”

 “응? 자구 가….”

 

 

 고민은 사치였다. 끝말은 삼켰다. 삼켜졌다고 하는 게 맞겠다. 나를 붙잡고서 셔츠가 다 풀어 헤쳐진 채로 나를 쳐다보는 전원우,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전원우. 전부, 내 꿈에서만 나오던 거였는데. 나도 모르게 전원우의 입술을 삼켰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위로 올라탄 뒤였다. 머릿속에선 술 취한 사람 상대로 이러면 안 된다는 경고를 울려대는데, 입술 끝에 닿는 전원우는 너무 달아서. 방금까지 술을 머금고 있었던 사람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달아서. 입술이 닿아 있는데도 모자라고 목말라서 혀를 더 깊이 내어 입안을 탐했다. 등허리께로 손을 넣어 허리를 살짝 들어 올려 단단해져만 가는 아래를 맞댔다. 흐응…. 입술 사이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딘가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네가 잡은 거야, 전원우. 난 분명 가려고 했어.

 

 

 “민규야….”

 “…….”

 “김민규….”

 “왜.”

 “보고 싶었어….”

 “…….”

 “너는…?”

 

 

 나도.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입술 위로 입술을 겹쳤다.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눈앞에 놓인 전원우를 탐하는 데 바빠서. 웅웅 경고음을 울리는 머릿속은 무시한 지 오래였다. 더듬더듬 등 허리께에 닿아오는 손길엔 잔뜩 저녁 공기가 묻어있어서. 내 손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길이 닿아오는 건 오랜만이라서. 그래서 그랬던 거다. 차가운 손끝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익숙한 것이라.

 

 

 

 

 

 

 중천에 걸린 햇살이 눈을 찔렀다. 무겁기만 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애를 썼다. 엎드려서 오른팔을 베고 잤는지 손끝부터 저릿저릿한 기운이 타고 올라왔다. 아. 왼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 보이는 회색빛 시트.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아, 전원우 집. 방금 일어나 상황파악이 더뎠다. 오른손은 점점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옆자리를 쓸어내렸더니 차가운 시트만 손에 감겼다. 자리를 비운 지 좀 된 것 같았다. 서운함이 마음 한 켠을 차지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의 빈자리는 아직 무겁다.

 

 

 입안이 텁텁해 물을 마시러 바깥으로 나왔다. 내가 쓰던 컵에는 손을 대고 싶지 않은 이상한 심보가 발동해 누가 봐도 전원우가 사두었을 것 같은 무미건조한 머그컵 하나를 꺼냈다. 냉장고를 열고 안에 든 생수를 열어 컵에 따르는 과정이 어색하지 않았다. 이 집에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처럼.

 

 물을 들이키며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던 집 안을 눈으로 훑었다. 문을 열어두었는지 거실 한편에 매달린 커튼이 흩날렸다. 어쩐지 쌀쌀하더라니. 컵을 식탁에 내려두고 문을 닫으려 다가갔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전원우가 보였다. 어딘가로 간 건 아니었구나. 찰나의 안도감이 몸에 서렸다.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꺼내물고 있는, 너무나 익숙한, 그런 모습.

 

 아침에 곁을 지키지 않았다고 온갖 생각이 다 들게 만든 전원우가 얄미웠다. 따지자면 내가 만들어 낸 생각이지만 그 몇 시간 같이 있었다고 예전처럼 돌아간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라도 했다는 게 우스웠다. 그건 내 망상이고 꿈이고 바람인데, 현실은 지금 전원우와 나의 거리처럼 우리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에 서 있는 것 같아서. 나도 나지만 누구라도 탓해야 혼자 부끄럽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괜히 심통이 나 들리라고 슬리퍼를 지익직 끌었다. 슬리퍼와 바닥의 마찰음이 거실을 울렸다.

 

 

 “일어났어?”

 

 

 베란다로 나서자 이쪽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일어났냐고 물어온다. 어. 또 말이 딱딱하게 나갔다. 아침이라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건지 머릿속에 생각이 꽉 차서 그런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막막하고 답답한 기분. 해결할 것 같았던 문제가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한 것만 같았다.

 

 전원우가 물고 있던 담배를 뺏어 들었다. 생각 정리할 때 담배만 한 게 없다. 난간에 기대어 그대로 입에 가져다 대자 전원우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나를 향했다. 그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눈을 감은 채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안 핀다며.”

 “…뭐?”

 “안 핀다며, 담배.”

 “아.”

 

 

 펴. 누구 때문에 끊지도 못하고. 탓하려는 의도가 가득 담긴 말인데도 전원우는 피식 웃고는 시선을 뗀다. 몇 초 닿았던 시선이 뭐라고 그 끝까지 매달리고 싶어진다. 웃기지, 이 공간이 사람을 너무 솔직하게 만들어. 구질구질하고 미련이 남게.

 

 

 “결혼은,”

 “…….”

 “왜 안 했어.”

 

 

 속 깊숙이 꾹꾹 담아 두었던 물음을 꺼냈다. 꺼내기 전에도 물어볼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던 물음이었다. 이젠 돌아오는 대답이 차갑지만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전원우는 느린 손짓으로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낸다.

 

 

 “…그때는,”

 “…….”

 “그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

 “지금은 아니어서.”

 “…무슨.”

 

 

 겁을 먹었던 게 무색하게 돌아오는 대답은 단순하다. 무슨 변명을 그렇게 하냐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전원우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길다. 감도는 적막함에 무어라 쉬이 입을 뗄 수 없었다. 점점 무게를 더해가는 공기가 숨통을 턱턱 막아댔다. 그럼 나는 뭐였냐고 주말연속극에 나오는 여자들처럼 그를 잡고 흔들어 대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그저 그의 마음 놀이에 놀아난 피해자에 불과한가. 그렇게 빨리, 아무렇지 않게 정리해 버릴 거였으면 시작이나 하지 말지. 내게 모든 짐을 떠맡긴 사람 치곤 홀가분하지 않아 보이는 표정을 하곤.

 

 

 “너는,”

 “…….”

 “그때는 틀린 줄 알았는데,”

 “…….”

 “지금은 맞아.”

 

 

 지금 내가 들은 말이 무슨 말인가 싶어서 전원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딱히 표정 변화는 없는 것으로 보아 장난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한참을 그저 전원우만 바라보았다.

 

 주어는 다 빠진 말이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는 건 어렵진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전원우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일에는 능숙하다. 대답을 종용하는 물음은 아니었지만 헤어진 지 3년이 넘은 옛 연인에게 들어서 썩 좋을 만한 말은 아니었다. 어쩌란 말인가, 이미 다 끝나버렸는데. 전원우가 날 버리고 떠나간 사실은 바뀌지 않는데.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랬지만, 사랑이라는 게 원체 감정이 그득그득 쌓인 산물이 아닌가. 모순적이게도 전원우가 한없이 원망스러우면서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모순적이라 표현하기도 뭣했다.

 

 난 지금 원망스러운 사랑을 하고 있다.

 

 

 

 

 

 

 “수고하셨습니다.”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팀원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협동 프로젝트의 마지막 날이 오긴 왔다. 시작할 땐 방대한 업무량을 보고 이걸 언제 다 끝내냐 하는 마음뿐이었는데. 어떻게 끝내긴 끝냈다. 잘 마무리한 건진 알아서들 판단하겠지. 지금으로선 끝낸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과장님! 의자에 기대어 한숨 돌리고 있는데 이 대리가 해맑은 목소리로 불러왔다. 너무너무 수고 많으셨어요- 이 대리답게 아양을 떨어댄다. 응, 이 대리도. 같이 장단을 맞춰 줄 힘이 나지 않아 대충 대답하고 말았다.

 

 

 “끝나고 우리 팀원들끼리 소소하게 밥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가실 거죠?”

 

 

 시선을 피하고 자리를 정리하는데 고개를 들이밀면서 물어댄다. 흠칫 놀라 대답을 얼버무렸다. 또, 또 거절 못 하게 불쌍한 눈빛을 해온다. 가실 거죠? 어? 어어. 확답을 바라는 물음에 그만 간다는 대답을 표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구워삶을지 잘 안단 말이야, 이 대린. 웃음이 슬며시 새어 나왔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로 돌아오니 못 보던 상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백화점이라도 가서 포장을 부탁한 것인지 고급진 로고가 박힌 선물상자였다. 아니 뭐 우리 팀원들은 프로젝트 마쳤다고 뭘 이런 선물까지 주나- 내가 진짜 부하직원들 하나는 잘 뒀다니깐. 이제야 처음 담당한 프로젝트의 마무리가 실감 났다. 수고했단 인사를 나눌 땐 얼떨떨하더니 이 작은 상자 하나가 뭐라고 그렇게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포장을 뜯으니 돌돌 감긴 넥타이가 들어있었다. 평소에 목이 갑갑해 잘 안 매거나 어쩌다가 하고 온 날엔 살짝 끌러 두거나 이내 풀었는데. 이제 좀 단정하게 다니란 의미인가. 의도를 알 수 없는 선물에 살짝 어리둥절했다. 그래도 준 사람 성의가 있지. 오늘 입고 온 정장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걸쳐 보기나 하려 했다. 거울도 없고 넥타이를 안 맨지 너무 오래돼서 매듭짓는 게 쉽지 않았다. 혼자 끙끙거리고 있으니 팀원들이 하나둘씩 자리로 돌아왔다.

 

 이 대리! 이것 좀 해 줘! 만만한 이 대리에게 넥타이를 해 달라 건넸다. 다른 사원들이랑 얘기를 나누고 있다가 부르니 금방 달려왔다. 얌전히 목을 맡기고 이 대리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역시, 넥타이 맨날 하고 오는 사람은 달라.

 

 

 “근데 과장님, 갑자기 웬 넥타이에요?”

 

 

 이 대리가 줘놓고 웬 시치미야? 고마워, 잘 쓸게. 누가 줬는지 참 예쁘다, 그치. 갑자기 표정 변화 없이 웬 넥타이냐고 물어오길래 생색을 내고 싶어 저러나 생각이 들어 얼른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치, 하며 동의를 구하는 말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더니 대뜸, 제가 선물한 거 아닌데요? 란다. 이 대리가 준 게 아니면 뭐야.

 

 

 “팀원들 다 같이 준비한 거 아니었어? 나 수고했다고?”

 “…아닌데요?”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게 머쓱했는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올려다본다. 이 눈빛은 장난기 담긴 눈빛은 아닌데…. 그러면 대체 누구야. 누가 줬는지는 몰라도 돈 꽤나 쓰셨겠는데요?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 대리가 말을 덧댄다. 뭐?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더니 S 브랜드 신상이란다. 평소에 정장 관련 브랜드에 관심을 가졌어야 알지…. 프로젝트 끝, 선물, 백화점 브랜드, 무난한 포장 상자, 발신인 불명….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 대리가 S 브랜드가 어떻니 저떻니 하는 구구절절한 설명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지 오래였다.

 

 

 “이 대리, L사 직원분들은, 가셨어?”

 “아까 인사하시고 바로 가시는 것….”

 

 

 한가하게 말을 끝까지 듣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 대리를 밀쳐내고 냅다 밖으로 달렸다. 과장님, 저희 회식이요! 뒤에서 이 대리가 황급히 불러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시가 급했다. 왜 몰랐지, 왜.

 

 

 「내가 매줄래, 넥타이.」

 「할 줄 알아?」

 「아니, 어떻게 해?」

 「으이그. 너 취업하면 그때 가르쳐 줄게.」

 「왜, 형이 아침마다 매주면 되잖아.」

 「내가 그때까지 너 만날 것 같아?」

 「형, 무슨 말을 그렇게…」

 「김민규 표정 봐, 완전 웃겨.」

 「뭐야, 또 나 놀렸어!」

 

 

 출근하려 넥타이를 매는 모습이 어찌나 멋있던지 그걸 해주고 싶어서 매는 법을 물었는데. 장난 어린 얼굴로 되려 놀리기나 하고. 말 한마디에 시무룩해진 얼굴을 보며 코를 찡긋거리며 웃던 모습. 그대로 안아 들어 침대에 던져 눕히곤 간지럼을 태웠었는데. 숨이 넘어갈 듯 웃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 생생하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우리 팀원들이었으면 넥타이 선물은 안 했겠지. 평소에 안 하고 다니는 걸 아는데. 그리고 이 대리였으면 포스트잇에 온갖 이모티콘은 다 써서 수고하셨다고 메모를 남겼을 거고…. 밋밋한 포장지에 보낸 사람도 안 쓴 선물이면 뻔한 거 아니냐고, 김민규야…. 진짜 대체 어떻게 그걸 몰라….

 

 

 

 

 방금 떠났는지 한없이 내려가기만 하는 엘리베이터를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계단을 내달렸다. 만약에 차가 고장이 났으면, 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그가 탄 것이라면, 입구에서 담배 한 개빌 피고 있다면, 그렇다면, 얼굴을 한 번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한참 전에 떠난 걸 알고 있지만 만약에 가 꼬리를 물고 또 물어서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점점 차오르는 숨에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내었다. 잡아 뜯듯이 벗어 내고서야 그가 준 것이란 생각이 들어 어디 흠집 난 곳이 없나 살폈다.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손에 조심히 움켜쥔 채로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로비에 도착해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도, 흡연 구역을 살펴봐도, 아무 데도 없었다. 눈으로 구석구석 모든 곳을 다 살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협력 회사에 연락하거나 받은 명함을 뒤져보면 전원우의 연락처 하나쯤이야 찾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오늘이 아니면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이 지나면 연락도 하지 못하고 만날 기회조차 없을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하는 그런.

 

  주차장에는 있겠지. 아직 이 건물 안에는 있겠지.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지하로 내려갔다. 그의 차 번호라도 눈에 보이면 그 앞에 서서 죽어라 기다리기라도 할 작정이었다. 눈이 빠져라 차 번호를 훑으며 세 바퀴쯤 돌았을 때, 기를 쓰고 외면하려 했던 현실이 그제야 보였다. 전원우는 이미 떠났다. 나에겐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결론을 내리자 마음이 가벼워져야 하는데 오히려 배로 무거워졌다.

 

 

 이럴 거였으면 얼굴이라도 좀 오래 봐 둘 걸. 못 본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그의 얼굴을 그려내는 게 쉽지가 않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지한 얼굴로 일하는 모습부터 누군가 던진 농담에 피식거리는 모습까지 다 담아둘걸.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가락 끝까지 찬찬히 뜯어볼걸.

 

 그와의 마지막이 어땠더라. 사실 비추어질 내 모습이 어떤지 줄곧 신경 쓰느라 전원우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수고했다며 한 사람 한 사람 인사를 나누다 전원우를 맞닥뜨리자마자 온몸이 굳어 버린 것으로 기억한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짧은 말 한마디에 살갑게 인사할 엄두가 안 나서,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는 싶은데 눈을 마주쳤다간 온갖 말을 다 꺼내버릴 것 같아서, 손을 더 오래 잡았다간 끌어안아 버릴 것만 같아서. 온갖 이유를 다 대며 그의 발끝만 눈에 담곤 짧은 악수만 나눴다. 결국 다 내가 용기 내지 못했던 건데.

 

 항상 이렇게 다 잃고 나서야 후회한다. 다 잃고 나서야 이땐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든다. 다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다. 매 순간순간이 후회의 연속이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혹시나, 했다가 기대로 부푼 마음에 상처만 더 생길까, 이내 생각을 떨쳐버렸다. 역시나, 핸드폰 액정에 뜬 이 대리 세글자가 빛났다. 응. 아니, 아니야. 응. 곧 갈게, 미안해. 응. 짧게 전화를 마치고 끊어진 전화 화면을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자동 화면 잠금 시간이 되어 꺼진 핸드폰 화면을 오래, 오랫동안 빤히 들여보았다.

 

 미련이 붙잡는 무거운 발을 간신히 떼었다. 걸음걸음마다 후회가 한 번, 안타까움이 한 번, 혹시나가 한 번, 번갈아 가며 발끝에 채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뒤를 돌아 주차장 전체를 훑어보았다. 별다를 바 없는 평범한 주차장.

 

 안녕, 전원우. 받는 사람이 없는 인사를 건넸다.

 

 

 

 

 

 

 삐빅- 경쾌한 소리가 주차장을 울리고 어스름한 빛이 들어오는 지하에 자동차 전조등이 깜빡였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곤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구두 굽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와 손에 든 자켓이 정장 바지와 스치는 소리만 가득했다. 자동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꽉 쥔 채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여기만 오면 그때가 생각난다. 주차장을 가득 메우도록 거친 숨을 내뱉으며 전원우를 찾던, 그날. 귓가에 울리던 소리는 멎었는데 머릿속은 계속 울려대기만 했다.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겁쟁이들은 시작도 끝도 제대로 맺을 줄 모른다. 누가 잘못했다 탓할 수도 없다. 둘 다 별다를 바 없기에. 누군가는 두려움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사랑에 대해 진지하기에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곤 한다. 다 변명이고 포장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니는 사람은 사랑에 대해 진지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냥 겁에 질린 사람들일 뿐이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뭔데.」

 「…….」

 「…형. 나랑 어쩌고 싶은데.」

 「민규야,」

 「…….」

 「지금 맞아도,」

 「…….」

 「나중에 아니면 어떡해?」

 「…….」

 「난 못해….」

 「…….」

 「그걸 어떻게 다시 해….」

 

 

 밤을 함께 보내고 맞은 아침에, 전원우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작은 몸짓부터 내뱉은 말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 상기했다. 하. 짧은 한숨을 뱉었다. 파르르 떨리던 목소리, 갈 곳 잃은 두 눈동자와 힘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팔, 곧 부서질 것만 같은 모습을 하곤. 밀어내는 사람치곤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다. 여기서 위태롭다 표현하는 건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의 심중을 반영하였기에 회상할 때 그렇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위태로움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온몸으로 밀어내려 애쓰는 그를 보는 난, 줄을 타는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속에 있는 불안함을 내비쳐서도, 관중들이 느끼게 해서도 안 된다. 무너지려 하는 정신을 붙잡고 두려움을 온전히 감싼 채 안정감으로 무장해 관중에게 속내를 들키지 않는 것. 앞으로 해야 할 과제임에 동시에 이미 제출한 숙제이기도 했다.

 

 

 우리 둘 다 겁쟁이다. 사랑하지만 두려워서 잡지 못하는 사람이나, 도망가는 게 무서워 이번에는 다를 거라 잡지 못하는 사람이나.

 

 변명은 하고 싶지 않다. 속에 있는 걸 쏟아내면서도 상처받길 원하지 않은 건 전원우였지만, 그 이야길 들으면서 잡을 생각을 하지 않은 건 나니까. 잡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누구보다도 그가 주었던 익숙함에 다시 몸을 던지고 싶은 건 나다. 하지만 선을 긋는 자기가 더 아파 보이는 얼굴로, 그렇게 얘기하면…. 대체 누가, 네 생각이 틀렸다고 단호하게 잘라낼 수 있을까. 누가 이번엔 다를 거라고 말할 수 있냔 말이다.

 

 전원우에게 탓을 돌리고 싶지도 않다. 이번에도 나중에 생각했을 때 아닌 사랑을 하면 어떡하냐는 걱정 어린 말을 들어서 우리가 어긋난 게 아니다. 되려 나만 그때 그 이별로 인해 힘들어했던 게 아니라는 걸 증명받는 것 같아서, 힘들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내쳤고 누가 내쳐졌는가. 이젠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다. 서로의 바람을 서로가 이루어주지 못했으니까. 그냥 여기서 끝날 인연이다, 생각하는 게 마음 편했다.

 

 

 그래도 얼굴 봐서 좋았어. 전원우가 온전히 나에게만 건넨 마지막 말.

 

 나도. 닿지 못할 대답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