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디] 엔딩을 부탁해
2021. 2. 13. 18:29

밤은 낭만과 공포의 이음동의어다. 화려한 간판과 조명을 품은 야경과 으슥한 골목길을 한데 끌어안은 묘한 시간이다. 원우는 해가 질 때면 터질 것만 같은 머리를 붙잡고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베개에다 머릴 처박고 하나부터 열을 센다. 난 아무래도 생각의 정도가 도를 지나치는 거 같아. 하나를 생각해도 될 때에 열을 생각하고 있고 열을 생각해도 될 때에 백을 천을 만을 생각하고 있어. 그러면 아무 생각 말고 일부터 십까지 카운트하세요. 원우는 어디서 주워들은 야매 요법을 착실히 수행한다.

 

아홉 열.

하나 둘 셋 넷…….

 

수십 번 주문처럼 외운다. 셈의 개념이 아니라 주술의 개념이다. 말에 가속도가 붙고 야매 주문이 일 분에 열 번 뺑뺑이 돌면 숨이 차오른다. 얼굴을 더 깊숙이 파묻는다. 다섯 여섯 일곱 여덟 하나 둘 넷 일곱……. 순서마저 뒤섞인 뒤에 남는 것은 흐느낌이다. 원우는 소리 없이 운다. 축축하니 젖어드는 베개를 느끼며 운다. 상대 배우 없는 나홀로 신파극을 한참 찍던 도중에 좁아터진 세트장의 문이 열린다. 고개를 들지 않는다. 다만 다시 주문을 욀 뿐이다.

 

하나.

 

"지금 몇 시인 줄은 알아요?"

 

둘.

 

"또 울어?"

 

셋.

 

"이번엔 또 뭐가 문젠데?"

 

젖혀진 이불은 저 멀리 날아간다. 웅크리고 있던 몸은 붙잡혀 세워진다. 민규야 난 생각이 너무 많은 거 같아. 하나를 생각해도 될 때에 열을 생각하고 있고……. 구간 반복 버튼이라도 눌러둔 듯 뺑뺑이 도는 레파토리는 일상이다. 민규가 재빨리 주방으로 향한다. 위치 하나 바뀌지 않은 약봉지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 씨발 이 형 또 약 안 먹어놓고 이래."

"……아참."

 

원우는 생수와 함께 약을 꿀떡 삼켜낸다. 오후 여덟 시 삼십칠 분. 원우가 울음을 그친다.

 

 

 

 

엔딩을 부탁해

김민규 전원우

 

 

 

 

원우는 신기한 타입의 인간이다. 머릿속 나사가 꽉 조여진 것이 남들의 스탠다드라면 원우는 머릿속 나사가 미묘하게 풀어져 있는 게 기본 상태였다. 풀어지면 풀어졌지 그 이상으로 꽉 조여지지는 않는다. 난 그래도 나름 알아서 잘 하는 편이라고 생각해. 그 말 듣던 민규는 콧방귀를 뀐다. 퍽이나 그러시겠어요. 알아서 잘 한다던 원우는 정신 차리고 보면 양말이 짝짝이였고 헤어밴드가 뒤집어져 있었으며 셔츠 단추가 두어 개 어긋나 있었다. 형은 진짜 나 없음 어떻게 살라고 이래요. 그런 거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민규가 하나하나 고쳐주면 누군가 와서 넌지시 말했다. 너네 참 징글맞게도 천생연분이구나.

 

천생연분? 전혀요. 아다리 안 맞는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닌데요. 남 챙기는 건 좋아하지만 쏘 머취 귀찮은 건 절대 사양인 민규와 나사 두어 개 흐물흐물 풀어진 원우는 김치와 아이스티와도 같은 조합이다. 숨 쉴 때 뿜어져 나오는 인간 저마다의 아우라에서부터 아다리가 안 맞는단 거다. 그럼 둘이 대체 ‪왜 연애하니. ‪왜 맨날천날 지지고 볶고 니는 화내고 니는 울고 손을 잡고 입술을 부비니.

 

"저 형은 저 없음 안 되니깐요."

 

이건 민규의 대답이고

 

"그러게요."

 

이게 원우의 대답이다.

 

민규야 넌 ‪왜 나 같은 애랑 사귀니. 조금만 고개 돌려보면 예쁘고 멋진 애들이 세상 천지에 널려 있는데 왜 나랑 손 잡고 연애하니. 알아서 잘 한다던 원우는 딱 십 분 뒤에 태세전환하고서 묻는다. 사연이 넘치고 어딘가 아픈 과거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 눈을 하고서. 과거의 민규라면 형은 말을 ‪왜 그렇게 해요? 형이 뭐 어떻다고 자꾸 그런 말을 해요? 속상한 티 팍팍 내며 원우의 두 손을 붙잡았겠지만 수백 번 들은 뒤는 다르다.

 

"자꾸 그런 헛소리 할 시간에 행복한 상상을 더 하세요. 약 좀 꼬박꼬박 챙겨먹고."

 

건강한 마인드에 건강한 사랑이 깃드는 거라고요. 아시겠어요? 답잖게 멜랑콜리를 찾는 원우를 민규가 순식간에 끌어올린다. 그러면 원우는 정신을 차린다. 행복한 상상? 원우는 민규의 구릿빛 팔뚝을 상상한다.

 

쟤들은 영 이상해. 겉껍질은 멀쩡하면서 속에 든 알맹이는 어딘가 변질이 돼 있어. 유통기한 오십 년 지난 햄 통조림을 보는 기분이야. 그렇담 우린 오십 년 전으로 거슬러 가보아야 한다. 고쳐 말하면 삼 년이다. 핀트 나가고 아다리 어긋난 연애가 장장 삼 년 째란 거다.

 

우리 연애해요. 민규가 원우 어깨를 붙잡고 폭탄 발언을 했던 건 어느 날의 술자리였다. 온 테이블이 술렁였다. 너희 둘이? 네 저희 둘이요. 확인 사살 제대로 당한 사람들은 돌돌 머리를 굴렸다. 긍정충 건강 멘탈 김민규와 한국판 이모키드 전원우가 연애를 한다니? 천지가 개벽하고 모든 동식물들이 놀라 쓰러질 이야기다. 인간은 본디 정반대의 상대에게 끌린다지만 이건……. 양극단의 인간을 한데 묶어놓은 것만 같았다. 니네 이거 몰카 아니지? 당근 아니죠. 두 번의 확인사살 끝에 다들 생각하길 멈추었다. 축하한다, 오래 가라. 넵 감사함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술을 넘겼다.

 

자고 일어나면 온사방이 뒤바뀌어 있을 줄 알았는데 세상은 그대로였고 김민규와 전원우만 달라져 있었다. 평생 접점 없이 따로 살아갈 줄로만 알았던 놈 둘이서 꼭 붙어 거리를 활보했다. 민규가 어깨에다 팔을 얹으면 원우는 영쩜일미리 민규 쪽으로 움직였다. 민규가 홍대 9출에서 원우를 기다리고 있으면 원우는 느릿느릿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걔 그렇게 미적지근해서 연애할 맛은 나냐. 에이 형이 몰라서 그래요. 원우 형이랑 친구 먹은지 그렇게 오래 된 것도 아님서 은근 아는 척 하시네. 속삭여지는 좆같은 소리에 은근슬쩍 물먹이며 민규는 턱을 괸다. 바깥에서 말 수 적던 원우는 민규 앞에 서면 말문이 트였고 민규가 슬쩍 손을 잡을 때마다 귀 끝이 붉어졌다.

 

그 표정과 몸짓들은 평생 나만 알고 있을 테다.

 

민규는 다짐한다.

 

소량의 우울함을 기본 스탯처럼 품고 있는 원우에게 민규는 종일 자신의 럽유어셀프 니 스스로를 사랑하세요 강의를 늘어놓았다. 민규야 너 같은 애가 뭣하러 날 만나 하는 소리 나오자 마자 민규는 원우의 입에다 스푼 가득 뜬 휘핑크림을 쑤셔넣었다. 단 걸 먹으면 사람이 기분이 좋아진대요. 어딘가 축 처진 전원우에게 설탕 먹여 슈가 하이 상태로 만들어 놓겠단 의지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고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사랑이 깃든다. 민규의 신조였다.

 

그러나 원우는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민규야 넌 나랑 ‪왜 사귀는 거야?"

"좋아하니깐 사귀죠. 뭘 그런 걸 물어요?"

 

처음 한두 번은 넘긴다.

 

"실음과 해영이가 너 좋아한다던데."

"근데요."

"걘 노래도 잘 하고 예쁘기까지 한데 너는 ‪왜 나랑 연애를 해."

"아유 진짜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가요."

 

그 다음 번도 넘긴다.

 

"민규야."

"왜요?"

"너 혹시 나랑 사귀는 이유가 나 불쌍해서 사귀는 거면……."

"아 진짜 꼭 그 얘길 이거 보면서 해야겠어요?"

 

얼마 전 끊은 넷플릭스로 맘마미아 틀어놓았던 참이다. 티비에서 댄싱퀸이 흘러나왔다.

 

훌쩍. 원우가 코를 들이킨다. 콜린 퍼스 잘생겼다 그치. 말 돌리기엔 아주 도가 텄다.

 

그러던 어느날, 민규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고 만다.

 

"민규야 넌 왜……."

 

이름만 불려도 뒷목에 소름이 돋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민규가 한참 쥐고 있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엎어둔다. 형. 그리고 이어지는 건 나직한 호명이다.

 

"형은 저랑 사귀기 싫어요?"

"어?"

"내가 형이랑 씨발 사귀는 게 막 그렇게 꼽고 좆같은가? 왜 자꾸 그딴 질문을 하지?"

 

악셀을 밟는다. 미필적 고의다. 브레이크는 고장난 지 오래다.

 

한두 번이야 참지 이거 지금 몇 번째 물어보는 거야? 나 진짜 노이로제 걸릴 거 같애요. 이니 형이 맨날 똑같은 질문 받아 봐. 민규야 나 사랑해? 이런 거였음 내가 걍 아 이 형이 지딴엔 나한테 애교 부린다고 이러는구나 하고 넘어가지 형이랑 나랑 손 잡고 입술 존나 비빈 다섯 달 동안 저 형한테 질문 들은 거 넌 왜 나랑 사귀어? 왜 쟤랑 안 사귀고 나랑 만나? 이딴 게 끝인 거 알아요? 이런 씨발 진짜……. 그렇게 좆같고 싫음 걍 헤어져요. 근데 형 진짜 그 지랄하는 거 무슨 병 아니에요? 어디 가서 상담 좀 받아보고 약 좀 받아먹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원우가 대꾸하기도 전에 민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걍 연락하지 마세요. 형 니가 원하는 대로 실음과 해영이 만나고 그 담엔 서양화과 민경이랑 손 잡을 테니깐요 알아서 잘 사세요. 근데 병원 가서 상담은 진짜 좀 받아봐요 나 이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원우 집 현관문이 닫혔다. 민규는 그날 곧장 집으로 가 소주 깠다. 구차하게 혼술하는 거 가오 죽는데 오늘은 그런 거 신경 쓸 기분이 아녔다. 소주 세 병 안주 없이 비운 민규는 꿈에서 원우를 봤다. 너 해영이랑 결혼할 거라며 민규야. 잘 어울린다. 축하해. 원우가 웃었다. 아주 좆같은 꿈이었다.

 

종일 붙어다니던 놈들이 남남처럼 떨어지니 주변에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쟤들 무슨 일이래? 몰라 낸들 아나. 난 쟤네 얼마 못 갈 줄 알았다. 아무리 반대가 끌린다지만 저건 좀 극단적이잖니. 수민이 슬쩍 민규에게 물었다. 너희 무슨 일 있어? 그러면 민규는 대답한다. 저한테 묻지 말고 저기 계시는 전원우 선배님한테 가서 물어보세요. 원우 형 원우 형 뒤에 꼬박꼬박 형형 붙어대던 게 엊그제면서 이름 석 자에다 선배님 하는 존칭까지 붙여버린다.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던 원우는 못 들은 척 이어폰 볼륨을 키우더니 고갤 푹 숙였다.

 

"원우야 너희 혹시……."

 

코 고는 소리가 퍼진다. 아 그 그래 자는구나 미안. 민규가 뒷자리를 흘겼다. 진심 개빡쳐. 민규도 책상에다 고개를 처박았다.

 

이틀 쯤 지났을 때 원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민규는 씹었다. 사흘이 지나고 부재중 전화가 스무 통이 되니 메시지가 쏟아졌다. 내용이 뻔할 뻔자라서 확인도 안 했다. 나흘이 지났다. 연락이 끊겼다. 걍 이정도였구나. 모든 의욕 상실한 민규는 그 뒤로 집에 틀어박혀 영화만 봤다. 언젠가 원우가 함께 보자고 했던 아이다호를 틀었다. 이 씨발 이 형은 뭔 이런 걸 보재. 찝찝한 결말에 텔레비전 끄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꿈에 원우가 또 나올까 싶어서 베개만 존나 팼다. 그 형 안 나오게 해주세요. 제발 제발.

 

연락 끊고 산지 일주일이 지났다. 민규는 텔레비전 채널만 연신 돌려대며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어디 한 구석이 좀 허했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틀어도 원우가 가끔 던지던 노잼 드립이 떠올랐고 채널 씨지브이에서 재방영하는 로맨스 영화를 틀어도 원우와 함께 보던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열 가지 이유가 머릿속에 자동 재생 됐다. 나 이런 병신 미련충 아녔는데 왜 이러지. 민규가 결국 와이티엔 뉴스 채널에서 리모컨을 내려놓았을 무렵 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대답이 없다. 현관문 너머의 누군가는 쿵쿵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민규가 조심스레 다가가 안전고리를 걸곤 문을 열었다. 어 씨발 깜짝아.

 

민규는 놀란 마음을 다 잡는다.

 

"여긴 또 왜 왔어요."

"민규야 김민규……."

 

키 백팔십 거뜬히 넘는 원우가 눈물을 뚝뚝 흘린다. 형 왜 울어요? 아니 진짜 울어요? 민규가 허겁지겁 안전고리 풀더니 활짝 문을 열었다. 현관문 앞에 서서 눈물 벅벅 닦는 원우를 일단 집 안으로 들인다. 형 진심으로 울어요? 어디서 연기 배워온 거 아니고? 당황한 탓에 헛소리 제대로 뱉던 민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내 연락 왜 안 받아?"

"아니 형이 내가 형이랑 사귀는 게 좆같고 꼽다매요……."

"내가 언제 그랬어 난 그런 식으로는 말한 적 없어."

 

그래도 담부턴 그런 말 안 할게. 니 왜 나랑 사귀냐고 그딴 거 안 물을게 민규야. 혹시 니 설마 진짜 해영이랑 만났니? 진짜 해영이랑 사귀고 있고 그런 거 아니지? 민경이랑 손 잡고 씨발 니네 집 불러서 침대에서 이런 거 저런 거 한 건 아니지? 아니라고 해 왜 대답이 없어 김민규 미친놈아. 진짜 그랬음 니 죽고 나 죽을 거야. 그래도 니가 맨날천날 말하던 럽유얼셀프인지 뭔지 실천할 테니까 우리 헤어지진 말자. 니가 약 좀 먹어보라길래 나 약도 받아왔단 말이야. 원우가 내민 건 약봉지다. 민규는 원우가 뱉은 말을 한참간 되뇌이다 헛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아하학. 학. 그리곤 원우를 끌어안는다.

 

이 개또라이 같은 새낄 정말 어쩜 좋지.

 

홧김에 뱉은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전원우. 드라마 주인공처럼 니 죽니 나 죽니 좆도 타격감 없는 살해협박을 눈물과 함께 쏟아내는 전원우. 덩치 있는 남자새끼 주제에 울어제끼며 매달리는 전원우. 형은 진짜 나 없으면 뒤지겠어요 아주.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딱 일주일 뒤 둘은 재결합과 동시에 살림을 합쳤다. 어이고 지랄 염병 커플 나셨어요. 지난 냉전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다시 현재로 시점을 돌린다. 원우는 여전히 약을 먹고 민규는 원우를 챙긴다. 원우는 여전히 럽유얼셀프가 뭔지 모르는 사람처럼 민규야 넌 진짜 날 왜 만나니? 하는 질문들을 던져대지만 민규는 자연스레 먹금한다. 형 그래서 오늘 약 제때 먹었어요 안 먹었어요. 그러면 원우도 입 다물고 민규의 물음에 대답을 한다. 어 알람 울렸을 때 바로 먹었어. 진심 구라 아니고? 민규야 니는 내가 피노키오고 니가 제페토 할배인 줄 알지. 니가 무슨 방황하는 전피노키오를 바로잡으려는 김제페토인 줄 알지. 형은 진짜 졸라 비비 꽈서 생각하는 거 고쳐야 돼요. 그니까 정신 건강이 좆창나는 거야.

 

"원우야 니는 진짜……, 민규한테 꽉 잡혀사는구나."

"뭐라고?"

 

이따금 전원우를 무슨 김민규에게 꽉 잡혀사는 남편 즈음으로 캐해하는 새끼들이 있었다. 그러면 원우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갤 끄덕인다. 나 아무래도 민규한테 잡혀사는 거 같애. 민규가 내 모가지에다 목줄 하나 채우고 있는 거 같애.

 

"그런 우울축축한 눈깔로 자꾸 쳐다보지 마세요. 긍정적 눈깔로 보란 말이야."

"응."

 

김민규가 하라면 하고

 

"형은 진심 양말 짝짝이로 신는 건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정신머리 좀 딱 차리고 살아봐요."

"그래야겠다."

 

김민규가 챙겨주면 챙겨주는 대로 살고.

 

이거 순전히 손 한 마디에 앞발 내미는 개새끼 아닌가? 원우는 잠시 고민한다. 고양이도 손 하면 앞발을 내밀던가 하는 시답잖은 잡념이다.

 

"와 그 형이 지 입으로 그래요?"

 

그런데

 

"지가 나한테 잡혀산다고?"

 

아무래도 민규의 생각은 좀 다르다.

 

잡혀사는 건 오히려 저 아녜요? 그러니까 원우가 민규 말 곧이곧대로 듣고 행동하는 겉껍데기 모습만 보고 그렇게 오해하는 건 좀 억울하단 거다. 저 형 까딱하면 어떻게 될까 싶어서 전전긍긍하는 게 누군데. 머릿속에 손 집어놓고 내 뇌를 꽉 쥐고 있는 게 누군데 저래.

 

울증 '또' 도질까 싶어서 속으로 전전긍긍한다. 저 형 나 없음 죽어버릴 거라고 '또' 지랄염병쑈를 벌일까 싶어서 신경을 곤두세운다. 민규는 원우의 생각 하나하나 다 원격조종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원우가 이상한 생각할 때면 이 버튼을 눌러서 행복했던 순간을 강제 상영시키고 원우가 몰려드는 우울감에 울어제낄 때면 저 버튼을 눌러서 눈물을 뚝 그치게 하고 싶다. 그러질 못하니 옆에 딱 붙어서 신경쓰게 되는 거다. 저 형 요절 않게 내가 평생 옆에서 살펴야겠지. 그래야 하겠지.

 

민규가 원우의 '또' 도진 울증과 '또' 벌인 지랄염병쑈를 걱정하는 건 당연지사다.

 

약 일 년 전 일이다. 원우는 민규를 사랑하지만 니 자신을 사랑하라 럽유얼셀프는 여전히 실천 못하고 있었다. 나같은 우울의 화신(자기객관화가 상당히 잘 된 편이었다)이랑 사귀는 게 이상하지 암 그렇고 말고 김민규는 언제 다른 애랑 사귀어도 이상할 게 없어. 침착한 척 괜찮은 척 다 떨며 결론 지었지만 원우는 손톱 딱딱 물어뜯었다. 쟤 저러다 정말 웬 새끼 하나 데려와선 헤어지자 할까봐. 형 같은 새끼 더이상 못 만나겠어요. 전 저 닮은 긍정충 한국판 캘리포니아인 만나야겠어요. 끔찍하다.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시절 원우의 예민함은 맥스를 찍다 못해 천장을 뚫고 우주에 닿았다. 형 그래서 내가 오늘 서재희 걔랑 뭘 했냐면……. 서재희가 누구야? 걘 또 뭐하는 애야? 너 걔랑 무슨 일 있고 이런 거 아니지? 의처증 쩌는 남편처럼 구는 원우에게 민규는 엥 뭔 개소리예요 접때 형이랑 나랑 걔랑 셋이서 술 마셨던 거 기억 안 나요? 한다. 그럼 그제서야 아아 그 친구 말하는 거구나. 안심하는 거다.

 

그러다 일이 한 번 터졌다. 민규에게 술 약속 잡혀 있던 날이었다.

 

형 저 오늘 늦어요. 왜? 친구들이랑 술 마시기로 함. 전화 못할 수도 있으니깐요 알람 맞춰서 꼭 약 챙겨먹고요 눈물 또 날 거 같음 일부터 십까지 줄줄 외우다가 꼭 일찍 자고요. 럽유얼셀프 기억하세요. 민규야 그래도 너무 늦게 들어오진 마. 넵넵. 원우는 현관문 닫고 나가는 민규 뒷모습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다. 형 그건 상상이 아니라 망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민규의 목소리가 스쳐지나간 것도 같다. 장장 십 분간의 막장드라마가 원우 머릿 속에서 상영되고 원우는 끝내 식탁을 콱 내리친다.

 

이 씹새끼 술 마시고 인사불성 돼서 집 안 들어오는 거 아냐?

담날 아침에 형 죄송해요 저 지금 모텔에서 눈 떴음 이지랄하는 거 아냐?

저 어젯밤에 얘랑 결혼을 약속했어요 짐 싸서 나갈 테니깐 잘 사세요 요딴 말 씨부리는 거 아냐?

 

원우는 하나를 생각해도 될 판에 열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민규는 건전히 술 마시고 안주를 씹은 뒤 새벽 한 시에 집으로 향했다.

 

문 열었더니 집이 환했다. 지금쯤 형 자고 있을 시간인데 또 불 켜놓고 자는 건가. 또 약 깜빡해놓고 질질 울고 있나. 거실 불 끄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주친 건 칼 들고 벌벌 떨고 있는 원우였다. 지금 이게 뭐지? 찰나의 순간 동안 상황파악을 한다. 알딸딸하니 남아 있던 술기운이 단번에 날아갔다.

 

"형 니 지금 진짜 뭐하는 거예요?"

"김민규 너 이 씨발……."

"미쳤어요? 그건 또 왜 들고 있어?"

"나밖에 없다면서 누구랑 술 처마시고 온 거야 민규야……."

 

내가 니 다른 새끼 만나면 니 죽고 나 죽을 거라고 그랬지. 원우가 던진 말에 민규는 빠른 속도로 과거를 스캔한다. 해영이랑 사귀고 있고 그런 거 아니지? 진짜 그랬음 니 죽고 나 죽을 거야. 니 죽고 나 죽을 거야. 그 때 그 타격감 제로던 살해 협박을 한참 지나 또 듣게 되는구나. 또라이에 미친놈인 줄은 알고 사랑했지만 진짜 칼까지 들고서 지랄하는 새끼인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전원우씨. 민규가 한 발짝 다가간다.

 

"혹시 그걸로 나 찌를라고?"

"이 개씨발놈아. 졸라 패죽일 놈아."

"진심 형이 이러는 거 걍 기력 없는 고양이가 하악질하는 걸로 밖에 안 보여. 근데 칼 들어놓고 왜 패죽여요? 찔러죽이는 게 정상 아닌가?"

"나밖에 없다고 해. 결혼을 해도 나랑 암스테르담 가서 간지나게 식 올릴 거라고 해."

"그래그래 알겠어요. 난 형 말고 다른 년놈들한텐 노관심이라고요."

 

원우는 결국 또 눈물을 떨구고 칼을 떨군다. 날붙이가 바닥에 떨어지며 내는 소리가 날카롭다. 형 또 지랄 좆같은 영화 보고 이러는 거죠. 이번엔 뭐에 꽂혀서 이래요. 그때와 같이 민규는 원우를 끌어안는다. 민규야 너 나 정말 사랑하니? 원우는 확인을 원하고 민규는 원하는 답을 내어준다. 제가 형 안 사랑하면 지금 이러고 있겠어요. 112 신고해서 형이랑 같이 경찰서 갔지.

 

건강한 정신 좀 가져주세요 형은. 난 우리 사랑이 웰빙 식품처럼 존나 좀 건강하고 프레시했음 좋겠어. 아니 근데 럽유얼셀프가 그렇게 어렵냐고요. 화해섹스 거하게 치룬 뒤 원우 어깨를 깨물던 민규가 그런다. 사람마다 힘든 게 하나씩 있는 거야. 형은 참 말은 잘 해요. 맨살을 부비며 민규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좆됐구나. 나 저 인간한테 아주 꽉 잡혀버렸구나.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음음 지금 생각하면 다 추억이지. 민규는 출타한 어이를 겨우 붙잡고 헛웃음을 날린다. 형 혹시 그 말 진심? 걍 그런갑다 하고 넘어가라 민규야. 원우가 민규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우 딴딴해. 아파트 현수막 거는 데다가 크게 플랜카드 만들어서 김민규 복근 소문 내야 돼. "

"방금 존나 나이 오십 처먹은 아저씨 같앴어요."

"민규야 내가 그 말 해줬니? 옆집 사는 고딩이 나보고 아저씨래."

"그건 형 몰골이 그 지랄이니깐 그렇죠. 면도도 제때제때 하고 살라고요. 설마 내가 숟가락 젓가락에 이어서 전동면도기까지 들이밀어줘야 하는 거?"

"내 나이가 스물다섯이다."

"형이 나잇값 못하는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

 

암튼 한 마디도 안 진다. 원우가 민규를 흘긴다. 왜 또 꼴아봐요? 존나 반사. 반에 사랑하는 애 있다고? 이 씨발 걘 또 누군데? 또 뭔 개소리예요 졸라 짱나.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 건강한 몸은 밥 먹어야 만들어진다. 밥 안 먹고 소파에 퍼질러져 있는 원우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민규야 나 입맛 없어……. 입맛은 밥 한 술 뜨면 샘솟듯 생기니깐 정신 좀 차려요. 흐물흐물 슬라임 같은 원우를 끌고 식탁 앞에 앉힌 뒤 접시를 들이민다. 가라아게와 전에 만들어둔 반찬들 그리고 밥과 젓갈이다.

 

"젓갈은 왜 또 꺼냈니? 나 해산물 못 먹는 거 알면서? 설마 일부러?"

"저한테도 입 달렸거든요."

 

하얀 쌀밥 한 숟갈 뜬 민규가 젓갈 올려 씹는다.

 

"어우 맛있어. 밥 누가 지었어."

"밥솥이 지었겠지."

"꼭 이렇게 초를 쳐야 속이 시원해요? 빨리 한 숟갈 뜨라고요."

 

원우의 손에서 숟가락을 뺏어들더니 가득 떠선 입에다 들이민다. 입 열어요. 어어 아이고 잘 씹는다. 형 나중에 틀니 안 해도 될듯. 민규야 너……, 나랑 육십 칠십 될 때까지 살 생각을 했구나. 그때쯤이면 너도 걍 날 버리고 다른 여자랑 결혼을……. 밥맛 떨어지니까 걍 조용하고 밥이나 먹기. 응 그래.

 

밥 좀 잘 챙겨 먹어요. 약은 제때제때 먹고 햇빛 좀 보고 살아요.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자꾸 암막 커튼 쳐놓고 웅크리지 말고 계속 움직여요. 내가 이 말 매번 해야 돼? 형이 다섯 살 먹은 아랫집 얼라도 아니고 참나 진짜. 이래놓고 민규는 매번 시간마다 원우에게 문자했으며 전화했고 이불과 혼연일체된 원우를 꺼내와 강제 광합성 시켰다. 이런 걸 보고 뭐라고 하더라…….

 

"츤데레?"

"이건 또 뭔 신종 개소리지."

 

따 딱히 널 걱정하는 건 아니니까! 원우는 귀 끝 빨개진 채로 좆같은 대사치는 애니캐를 생각했다가 접었다. 김민규 쟤는 걱정 않는단 부정 같은 건 안 한다. 날 걱정하고 있는 게 눈을 감고도 보일 만큼 쟤는 걱정이 많은 애다. 그걸 알면서 이러시겠다? 민규는 원우한테 꿀밤 한 대 먹여주고만 싶다. 그래놓고 또 입을 연다. 형 얼른 일어나요. 밥 먹어요. 그러면 원우는 또 대답한다. 나 입맛이 없어.

 

백날천날 말을 하면 뭐하나. 화를 내서 무엇 하나. 알아서 잘 할 수 있다던 원우는 알아서 밥을 챙겨먹은 적도 광합성을 한 적도 손에 꼽을 정도다. 아침에 일이 생겨 나갔다 저녁에 돌아왔더니 해놨던 볶음밥은 다 식어 있고 약봉지도 그대로고 민규는 화를 꾹꾹 눌러참았다. 화 참으면 병 생긴다던데 마지노선이 얼마 남지 않은 거 같다. 방문을 열어제꼈다. 전등을 키고 이불을 젖히는 건 걍 일상이 됐다.

 

"니 또 밥 안 먹었죠."

 

끄덕끄덕.

 

"걍 방에 처박혀서 잠만 자고 폰만 하다가 질질 짰죠."

 

또 끄덕끄덕.

 

구라 하나 안 치고 순순히 털어놓는 걸 착하다 해야 할지 개빡친다고 해야 할지 민규는 고민이다. 약은 먹여야겠으니 해뒀던 볶음밥을 렌지에 넣고 돌린다. 식은 거 다시 데워 먹으면 맛없는데. 하자마자 바로 먹어야 하는데. 갓 만든 볶음밥을 갖다바치면 뭐하나. 입맛 다 뒤지신 전원우는 입에도 안 대는데. 먹여야 산다. 살아야 사랑을 한다. 김 모락모락 나는 접시를 식탁에다 내려놓는다. 아 해요. 아. 한 숟갈. 씹는다. 넘겼다. 또 아 해요. 아. 또 씹는다. 또 넘겼다. 또 아 해요. 아……, 우욱. 원우는 고작 두 숟가락 넘겨놓고 화장실로 달려가 웩웩 속을 게워냈다. 노란 위액만 나오는 꼬라지 보다 못한 민규가 원우를 일으킨다. 어우 씨발 진짜 이 형 어쩜 좋아 정말.

 

곧장 향한 곳은 병원이다. 응급실에 밀어넣고 걍 젤 좋은 수액 놔달라고 했다. 팔뚝에다 링겔 주사 꽂은 원우 옆에 앉아 몇 시간을 기다렸다. 그렇게 잠을 자놓고 또 고롱고롱대는 원우를 보며 민규는 고민한다. 정신 차리라고 뺨을 쌔려야 하나. 사랑의 매라는 명분 하에 진심 꿀밤을 졸라 먹여야 하나. 그러다 지 혼자 고개를 젓는다. 아유 씹 내가 참아야지. 원우가 눈을 뜬다.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건 눈 주변 퀭한 김민규다.

 

"어우 민규야……."

"몸 좀 괜찮아요?"

"내가 진짜 먹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고 나도 먹고 싶었는데……."

"네네 다 알아요."

"니가 어쩌다 나 같은 모자란 새끼랑 만나갖고."

"아저씨 입 다물고 수액이나 마저 맞아요. 밥 먹을 기력은 없음서 말은 졸라 해대 아주."

 

민규야 진심으로 미안. 알겠다고요. 진짜 미안. 아 이 말만 대체 몇 번 듣는 거지. 저기 조용히 좀 해주세요. 간호사의 일침에 둘은 입을 다문다.

 

 

멘탈의 건강함만큼은 죽여준다 자부할 수 있는 민규에게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어딘지 모르게 원우를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이다. 소파 침대 바닥 곳곳에 늘어져 있는 원우를 보면 있던 기력이 빠져나가고 충만했던 행복감이 모습을 감추는 듯했다. 이 씨발 사라지지 마. 돌아와. 뺨따구 척척 때려가며 마음을 다 잡는다. 우울충 정신병자 커플이 되고 싶진 않았다. 내 럽유어셀프 높은 자존감은 죽어도 옮겨가질 않더니…….

 

"혹시 정신병도 옮나?"

"그건 또 뭔 개소리야."

"형 보고 있으면 나도 우울해지는 기분이라서요. 형한테 내 긍정적 에너지아 옮겨가야 되는데."

"세상 일이 맘처럼 잘 풀리면 내가 이러고 있겠니."

"또또 저 비관적인 태도. 그러니까 대가리가 아픈 거 아녜요."

"닌 날 진짜……, 병자새끼로 보는구나."

"아파서 약 받아먹으면 병자 맞지 뭘."

"병자랑 뭐할라고 사귀니 그럼. 뭣하러 병자랑 입 맞대고 끌어안고 벗기고……."

"아오 씨발 사랑해서 그런다 왜요."

 

민규야 나 금방 좀 감동. 그래요 감동 많이 먹으세요. 배부를 만큼 드세요. 이 영양가 뒤진 대화 정말 어쩜 좋을까. 한참 티키타카 주고받던 둘은 얼씨구 즐겁다 대화 마무리하며 텔레비전을 튼다. 영화 채널로 돌리자마자 프리티 우먼 워킹 다운 더 스트리트. 귀여운 여인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볼 게 없네. 볼 영화가 부족하네. 이 새끼들은 주구장창 텔레비전만 틀어놓으면서 반복되는 프로그램들이 재밌길 바라는 병신이다.

 

침대에 엎드려 책 읽던 원우를 끌고 나왔다. 어딜 또 갈라고 그래. 나 간만에 생산적인 일 함 해보려는데 꼭 이렇게 방해를 해야겠어? 따라오면서 조잘조잘 말이 많길래 어우 형 딱 일 분만 조용해봐요. 말을 딱 잘랐다. 그랬더니 입술이 대빨 튀어나와선……. 민규는 조수석에다 원우를 태운 뒤 얼음 땡이라도 하듯 원우의 묵언수행에다 땡 처리를 한다. 우리 그래서 어디 갈라고 그래. 가보면 알아요. 민규가 차를 몬다. 해가 쨍쨍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으며 그날 미세먼지 농도는 낮은 편이었다.

 

차가 도로를 달린다. 양 옆의 창문을 모두 내렸더니 바람이 차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원우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차 시트에 머리를 기대었다. 날씨 좋죠. 지금 기분 어때요. 민규가 묻는다. 기분 나쁘진 않아. 원우가 노래를 틀었다. 멜론 팝송 차트 메들리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꼬부랑말이 멜로디에 매달려 스피커를 타고 흘렀다. 흥얼댄다. 형 이러니까 졸라 세상 건강한 이십대 남자 같애요. 나 이십대 남자는 맞아 민규야. 민규는 괜히 원우를 흘긴다. 한 마디를 안 져 아주.

 

"사람이 이렇게 바람도 맞고 햇빛도 보고 살아야 된다구요."

"나 그 말 오천 번은 들은 거 같애."

"바깥세상 구경도 하고 돌아다니면 우울한 생각할 틈이 없다니깐요."

"그 말은 만 번 들은듯."

"우울한 생각을 하니깐 자꾸 이상한 걱정이나 하고 죽을 생각하고 그러는."

"혹시 그거 다 녹음본이야? 버튼 누르면 자동재생 이렇게 되고 그러는 거?"

"열라 짱난다 진짜. 걱정을 해줘도 지랄 안 해주면 죽니 마니 칼 들고 지랄."

 

우울한 생각하는 건 니 같애. 우리 과거는 들추지 말고 앞날만 바라보고 살자. 당연한 말이긴 한데 저 말이 원우 입에서 나오니 민규는 헛웃음만 픽픽 샌다. 와 나 그 말을 형 입으로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네. 누구보다 과거 들추기 좋아하는 사람이 저럴 줄은 꿈에도 몰랐네. 민규야 나 슬슬 춥다 문 닫아주라. 이 사람아 춥긴 뭐가 추워요 좀 있음 유월이에요. 그래놓고 민규는 창문을 올린다.

 

빙빙 도로를 돌아 결국 도착한 곳은 집에서 십 분 거리인 대형 마트였다. 이럴 거면 뭐하러 차를 타고 나왔어 민규야 환경도 지키고 우리 건강도 지킬 겸 걍 걸어오지. 형 진심 형 입에서 그런 소리 나오면 기분 이상하다니깐요 그 누구보다 건강 안 지키는 사람이 뭔 소릴 하는 거예요. 죽어라 티격대다 백원 넣고 카트를 잡았다. 오늘 저녁은 된장찌개로 해볼까 생각 중이다. 두부 담고 파도 담고 이것저것 담았더니 금세 반이 찼다. 형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물으려고 뒤를 돌았더니 원우는 온데간데 없다. 어. 일이 좀 꼬인 듯했다.

 

과자라도 담으러 갔나 싶어 과자 코너로 갔더니 머리카락 한 올도 안 보인다. 아님 군만두 시식이라도 하러 갔나? 시식코너로 갔다가 원우는 찾지도 못하고 떡갈비 한 조각 얻어먹었다. 총각 이거 하나 사가. 헉 네넵. 결국 두 봉지 담았다. 여길 뒤져봐도 없고 저길 뒤져봐도 없고. 이 형이 땅으로 꺼졌나 아님 천장으로 솟았나. 지하 일층 한참 돌아다니던 민규는 일층 가전제품 코너 앞에서 원우를 발견한다. 형 진짜 뒤질래요? 크게 소리친 탓에 시선이 한데 모였다.

 

"사람 많은 데서 소리 지르는 건 어느 나라 예의범절이야?"

"지금 그거 따져야겠어요? 진짜 말도 안 하고 이렇게 돌아다닐래요?"

"전화하면 될 걸 왜 찾아다녀 찾아다니길……."

"형 니 아까 차에다 폰 두고 왔잖아요."

"아 맞다."

 

존나……, 걱정 좀 시키지 말라고요……. 잡고 있던 카트 버려두고 원우를 끌어안았다. 난데없는 호모들의 애정행각에 사람들이 헛기침 남발한다. 니가 내 걱정을 뭣하러 해 민규야. 내가 걱정 돼? 난 니가 걱정 돼. 이 상황에 아가씨 대사 치지 말라고 했죠 내가. 낮은 목소리로 원우가 그런 말을 뱉으면 민규는 울고만 싶다. 형 진심 개빡쳐요. 저녁 굶고 싶어요? 말은 그렇게 해도 민규는 안다. 된장찌개 먹음직스럽게 끓인 뒤 원우와 두부 하나씩 건져먹게 될 것이다. 약 부작용으로 입맛 뒤진 원우에게 밥숟가락을 들이밀게 될 것이다. 지금처럼 말도 없이 사라진 원우를 사방팔방 뒤져 찾아낼 것이다. 저 형이 눈 앞에서 사라지는 꼬라지는 못 보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민규가 그랬다. 아무래도 형 때매 내 대가리도 지랄난 거 같애요. 창문에 머리 기대고 있던 원우는 한참간 대답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 담부턴 언질 주고 돌아다닐게. 미안하단 사람한테 더 지랄하는 취미는 없는지라 민규는 묵묵히 핸들을 쥔다.

 

사랑하면 닮는다던데 아무래도 우린 서로의 좆같은 점만 따다 흡수했나 보다. 민규는 원우의 지랄난 머릿속을 원우는 민규의 말대꾸 실력을 꼭꼭 씹어 소화까지 시켰다. 밥에다 된장찌개 비벼 한 입 삼키던 원우가 말한다. 민규야 있잖아. 민규는 반찬 집어먹으며 형 일단 다 씹고 말해요. 한다. 응 그래. 원우는 납득이 빠른 편이다. 꿀떡 삼킨 뒤 다시 말한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 우리 애기로 영화를 만들면 존나……. 막장이라고 욕 개처먹고 상영관 전국 열 개로 막을 내릴 거 같애. 당연하죠 형이 칼 들고 지랄한 순간부터 우린 이미 개막장이에요. 제발 그건 이제 좀 잊어주라. 쪽팔린 건 알아서 다행이네요.

 

"영화면 엔딩이 어떻게 날까."

"와 말 돌리는 거 봐."

"밥상 엎기 전에 대답해라."

"내가 그걸 어케 알아요. 팔십 먹은 노인 둘이서 한국인의 밥상 챙겨보는 걸로 끝날라나."

"너 진짜 나랑 팔십까지 같이 살 생각이야?"

"예 저 해영이랑 안 만날 거고요 미주랑도 안 만날 거예요."

"미주는 또 누구야. 너 죽을래?"

"이거 봐. 이러는데 어떻게 안 살아? 내 생각엔 팔십 전에 내가 형 손에 죽을 거 같애요."

 

니 졸 짱나. 형이 더요. 어 무지개 반사. 무지개는 굴절이거든요. 아랫집 초딩도 하지 않을 듯한 대화를 자연스레 나눈다. 냉수 들이킨 원우가 떡갈비를 집는다. 그러면서 갑자기 분위기를 잡는다. 밥상머리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그런 건 원우의 안중에 없다. 큼큼. 헛기침. 민규는 애호박을 씹다 말고 턱 움직이던 걸 멈춘다.

 

"민규야."

 

꽤나 진지해보이는 얼굴.

 

"그래도 너라면 내 인생의 엔딩을……."

 

부탁해도 될 거 같아.

 

 

컷.

 

크레딧이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