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쉬] 시험장
2021. 2. 13. 18:29

 

우리는 유치원다니는 꼬꼬마 시절부터 사랑을 시작한다. 그래서 모두 사랑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막상 사랑을 글이나 그림 등으로 표현하라고 하면 뭘 해야할 지도 모르겠고 암무것도 하지 못하고 서있기만 할 것이다. 사랑이란 정의 내리기도 표현을 하기도 애매한 과목이다. 그런 시험을 치기도 애매한 과목을 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시험장에 뛰어드는 것일까. 심지어 결혼한 부부도 처음에는 사랑으로 시작하지만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사랑이 아닌 정이라는 감정만으로 살아간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구름한 점 없이 맑던 날씨였는 데 어제부터 신이 노하신건지 까만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다. 교실 안에 책상들은 시험대형으로 띄엄띄엄 떨어져 있고, 30여개의 책상을 지키는 사람은 고작 10명 정도 밖에 안 됐다. 나는 문제를 풀다 말고 애꿎은 샤프만 돌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운동장은 떨어지는 빗방울로 젖어 곳곳에 작은 웅덩이들이 생겨 자신의 모습을 잃어 우울해 보였지만 나무와 꽃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 지쳤던 몸을 녹이는 것인지 행복해보였다. 나에게 여름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려줌과 동시에 아프다라는 새로운 감정을 알려준 딱히 좋다고 하기도 싫다고 하기도 그런 애매한 계절이었다.

 

그 애매한 계절 내 인생에 들어왔던 한 사람이 있었다. 넓은 사막판 위의 생명인 오아시스 같았고, 끓어 넘치던 마그마가 지표를 뚫고 올라와 만든 새로운 땅같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온 그는 내 안에서 새로운 땅을 만들었고, 내가 쉴 수 있는 오아시스가 되었다고 느꼈다. 나는 그랬다.

 

 

 

 

너를 처음 만날 날부터 나는 너에게 내가 가진 사랑을 나누어 주었고, 너도 나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사실 정확한건 알 수 없었다. 마냥 나 혼자만의 생각이고 환상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학교가는 길에 생긴 작은 사고때문이었다. 마치 뮤지컬에서 극적인 만남을 위해 작가가 대사와 행동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늦잠을 자고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가던 내 뒤로 너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내 한쪽어깨에만 걸쳐있던 가방은 지나가던 자전거손잡이에 의해 떨어졌고, 쉴 틈 없이 돌아가던 자전거 바퀴도 떨어지는 가방에 의해 멈춰섰다.

 

“괜찮아? 다친곳은 없어?”

 

흔히 순정만화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을 만났을 때 건네는 뻔한 대사같은 말을 했다.

 

“어, 가방만 떨어졌어.”

“다행이네. 어? 우리학교 교복이네? 그럼 너도 늦었겠네, 얼른 가자!”

 

내 어깨에 가방을 다시 매어 주고는 자신의 자전거 뒤에 앉히고, 페달에 발을 올리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허리춤에 있는 와이셔츠만 살짝 쥐고 있던 내 손을 잡더니 자신의 허리에 올려 허리를 감싸게 했다. 꽉 잡아야지. 그러다 넘어지면 내 책임으로 돌릴거잖아. 니가 했던 말 한마디에 나는 기분이 뭔가 이상했다. 말로 설명을 하자니 이 기분을 정확하게 형용할 수 있는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그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학교를 도착하고 보니 너와 나는 같은 반이었고 그렇기에 우리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이동수업을 하든 밥을 먹으러 가든 어딜가나 항상 너의 옆에는 내가 있었고, 나의 옆에는 니가 있었다. 맨날 붙어다니다 보니 애들은 ‘김민규랑 전원우가 사귄다’는 헛소문까지 퍼졌다. 어딜가든 헛소문은 다른것보다 제일 빠르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 내리락했다. 사실 남고에서는 누가 누구랑 사귄다, 쟤 게이다 등등의 소문들이 많이 돌아다니기에 그 소문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너는 그 소문을 즐기는 듯 했었지.

 

“야, 그 소문 진짜냐? 어디까지 해봤는 데?”

“몰라. 니네들 알아서 믿어라.”

“전원우 너라도 말 해봐. 진짜냐? 친구끼리 비밀이 어딨냐.”

“맞아. 맞으니깐 조용히 좀 해줄래.”

“까칠하기는,,,”

“저게 매력이다 새끼야~ㅋㅋ”

 

 

 

애들이 소문에 대해서 물어오면 항상 너는 모른다고 했고, 나는 맞다고 대답했다. 늘 그런식으로 얼버무리듯 넘겼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덧 1학년의 끝을 알리는 겨울방학이 시작되었고, 그 날도 너와 나는 함께였다. 학교를 마치고 나오자 우리집에 가고 싶다며 때를 쓰던 너였다.

 

 

“진짜 영화만 보고 나갈게! 진짜로! 알았지? 그래, 가자!!”

 

막무가내로 혼자 자문자답하며 나의 손을 잡고 우리집으로 끌었다. 원우야, 나 입을 옷 좀. 집에 도착해서 옷을 달라던 너에게 내가 입는 사이즈 중에서 제일 큰 사이즈를 꺼내 주었다. 방에서 갈아 입는 모습을 보고 나는 옷을 들고 화장실로 나가려 했다.

“아, 니가 여기서 갈아입어. 내가 화장실갈게.”

“아니야, 그냥 여기서 입어. 나는 뒤로 돌아서 입을 게.”

 

뒤를 돌아서 옷을 입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렸다.

 

 

“영화볼래?”

“마음대로.”

“조금 정성을 담아서 대답해주면 누가 뭐라하냐,,”

“어. 신이 노하신다.”

 

 

내 대답에 삐진건지 영화를 고르지도 않고 계속 이리저리 리모컨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답답해 보여서 리모컨을 뺏으려 하자 손에 힘을 주어 놓치지 않으려 했다. 볼거면 빨리 좀 보자 민규야. 누가 마음대로 하라해서 나는 빨리 볼 수가 없네.

 

너의 대답에 그냥 포기하고 핸드폰을 보려고 전원 버튼을 누르니 배터리가 없어서 꺼져있었다. 어쩔수 없이 옆에 있던 너의 핸드폰을 들었다. 평소에도 서로의 핸드폰을 많이 사용했던 터라 별로 신경은 쓰지 않았다. 볼 것 없이 돌아다니다가 갤러리에 들어가 보니 너와 찍었던 사진들이 보였다. 사진들을 보고 있으니 혼자 기분이 좋아져서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 중간에는 언제찍었는 지 몰래 찍힌 사진들도 끼여있었다.

 

 

“나랑 찍은 사진이 그렇게 좋냐?”

“어. 존나 좋아.”

“어..?”

“그래. 너 좋다고.”

 

 

내 대답이 니가 예상했던 대답이 아닌건지 너는 그저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너는 항상 그랬었지. 뭔가 자신의 마음대로 풀리지 않거나 당황을 하면 아무말도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봤었다.

 

 

 

“신이 노하시겠다. 빨리 영화나 보자.”

“아, 어..”

 

영화를 보는 동안 집안에서 영화대사 말고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밥을 먹고 가라는 나의 제안에도 너는 괜찮다며 교복과 가방을 챙겨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옷은 빨아서 내일 문앞에 두고 갈게.”

 

니가 떠난 자리에는 그 공간만 잘라서 사라진 듯 공허함이 남아 돌았다. 현관문 앞에 서서 가만히 니가 떠난 자리만을 바라 보고 있으니 그 공간에는 많은 감정들만이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그 날뒤로 방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만나지 않았다. 만남뿐만 아니라 연락도 뜸하게 잊을 법하면 한번씩 전화하고 문자하는 게 끝인 정도였다. 원래도 겨울방학이 더 길긴 하지만 그때의 겨울방학은 내 인생 최고로 길었던 방학이었다. 긴 공허가 끝나고 2학년이 되었을 때 너와 나는 다른 반을 배정 받게 되었고, 복도에서 만날때면 아무일 없었다는 듯 그냥 인사를 하거나 매점을 같이 가거나 그런 것이 다였다. 하나 작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의 옆에는 더 이상 니가 없었다.

 

 

니가 없는 내 옆자리는 여전히 공허했고,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감정들만이 나를 따라 다녔지만 너의 옆자리에는 공허함이 아닌 다른 누군가로 채워지고, 더 많은 감정들이 들어가 나의 자리를 채워주고 있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너의 인생에서 나는 그저 지나가는 작은 태풍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처음에는 모든 요소들이 합쳐져 끝없이 커질것만 같았던 태풍이 한순간에 없었던 것처럼 눈앞에서 사라지는 태풍이었던 것이지. 그런 너의 태풍에 비해서 나의 인생에 생긴 태풍은 작아질 줄 모르고 오히려 더 큰 먹구름들을 불러와 내 마음속에 많은 비들을 쏟아 부었다.

 

 

 

 

비 내리는 오후 세 시_박제영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 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니

 

비가 내린다, 그대 부디, 조심하기를

심하게 젖으면, 젖어들면, 허물어지는 법이니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마침내 무너진 당신, 견인되고 있는 당신

 

한 때는 ‘나’ 이기도 했던 당신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나를 견인하고 있는 당신

 

 

 

방학동안 너를 잊기 위해 많은 것들을 했었고, 그 중에 하나가 시집을 읽는 것이었다. 책꽂이에 있던 수많은 시집중에서 박제영 시인의 [뜻밖에]라는 시집을 읽었었고, 그 안에서 1부 6번째에 자리하고 있는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그 시를 읽을 때는 화자의 마음과 같이 너를 떠나보내지도 못하고 그저 너가 비에 젖을 까, 비에 젖어 다칠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비에 젖어 허물어졌으면 했다. 서로 상반되는 감정이었지만 온통 너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차라리 너가 아닌 내가 비에 젖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한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젖어 니가 생각이 나지 않게. 내 빈자리에 남아있는 감정들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 아무런 감정이 남아있지 않았으면 한다.

 

 

처음에는 왜 사람들이 시험치기도 힘든 과목을 치기 위해서 무모하게 시험장에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시험장에 나는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갔었다. 당연하게도 그 시험의 등급은 좋지 못했다. 그리고 시험은 역시 쳐봐야 안다는 것을 느꼈다. 시험을 치기전에는 무슨 문제가 나올지, 내가 무엇을 기억할 지, 문제의 난이도가 높을지 낮을지도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오로지 그 시험지를 만드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ㅇ...야!”

“어?..”

“야자끝났다니깐 뭐해. 빨리 집에 가서 영화 보자.”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서있는 너. 나를 다시 시험에 들게 하려는 것일까. 차라리 이 상황이 꿈이었으면, 니가 나를 쓸어 내리고 이 관계에 마침표를 찍고 너와 나의 모든 것을 마감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내 몸은 아닌 것 같다. 이럴 때 쓰는 말이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고 하는 표현인 것 같다. 내 마음속에서는 지표위로 올라와 생긴 땅을 소멸시키려 하지만 내 몸은 소멸시키지 못하도록 너에게 다가가서 마음을 흔들어 버린다.

 

그렇게 다시 시험장의 문을 열고 시험을 치기 위해 발을 들인다.

 

 

 

 

“어느 하루 비라도 추억처럼

흩날리는 거리에서

쓸쓸한 사람되어 고개 숙이면

그대 목소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어느 하루 바람이 젖은 어깨

스치고 지나가면

내 지친 시간들이 창에 어리면

그대 미워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그립던 말들도 묻어버리기

못다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류근[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中)

 

그래. 우리 이제 다시는 사랑이라는 행동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지 말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에. 그런 사랑은 더 이상 느끼지도 말고 그로 인해서 아파하지 않기를. 신이 노하시기전에.

 

‘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