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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7월이네요. 세상에 한 여름에 이사라니. 날이 조금 선선해졌을 때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뭐 그래도 형의 뜻이라면 난 존중해요. 하지만 보통은 1월이나 2월에 이사를 계획하지 않나요? 너무 갑작스러워요. 그런데 왜 나한테는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조금 서운한데요... 물론 형은 내가 더위를 많이 타고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대답하겠지만, 나는 형을 도와주고 싶었단 말이에요. 형이 가지고 있는 물건도 같이 정리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짐도 같이 나르고.. 짐 정리하다가 점심시간이 다가와서 뭘 먹을까 배달음식을 홍보하는 책자를 보면서 음식을 시켜먹는 재미가 은근히 쏠쏠한데.. 뭐. 일단 새로운 집으로 이사해서 좋아할 형의 모습을 상상하니까 저도 기뻐요. 정말이에요.
오늘 날씨는 너무 덥고 습하네요. 차라리 시원하게 소나기가 오는 게 나은 것 같은데 우산을 쓰기도 애매한 습기 뿌려지듯 비가 내려서 기분이 안 좋아요. 가만히 있어도 불쾌지수 때문에 짜증이 나고, 머리카락도 추욱 쳐지는데다가 모르고 빨아버린 옷도 잘 안 말라서 너무 화가 나요. 근데 형은 더위를 안타서 그런지 오늘도 긴 팔 입고 있네? 신기하다..
형, 내가 아침에 밥 차려놓고 갔는데 맛있게 먹었어요? 해산물 들어간 거 아닌데 왜 남겼어요? 그렇게 많이 한 것도 아니었는데.. 형이 생각보다 예민하잖아요. 아침 잠 깨우기 싫어서 우리 집에서 요리해서 가지고 온 거예요. 맨날 밥솥 소리 시끄럽다고 깨잖아요. 게다가 불 앞에 있어서 나는 너무 더운데 에어컨 틀면 춥다고 뭐라고 하구... 그래도 잠결에 웅얼거리는 거 너무 너무 귀여워요. 하지만 역시 형이 추워하는 건 싫으니까...
내일은 날씨가 좋다고 일기예보에서 알려줬어요. 우리 같이 드라이브라도 갈래요? 내일 아침에 집 앞에서 기다릴게요. 잘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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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가족들이랑 약속이 있었으면 미리 말해줬으면 좋았잖아요. 난 그것도 모르고 전날부터 점심엔 뭘 먹고 저녁엔 어디를 갈지 혼자 열심히 고민했잖아요. 그뿐이게요? 전날 세차도 하고 기름도 빵빵하게 채워놨다구요. 솔직히 이건 사과받아야겠어요. 형은 맨날 너무 멋대로인 거 아니에요? 너무해.. 하루 종일 연락도 없고.. 전 하루종일 형 기다리기만 했는데.. 나는 늘 하는 것 없이 형을 기다리기만 하구.. 아무리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너무 하잖아요. 흥 나 오늘은 삐졌어. 그냥 집 가서 잘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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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정말 망가져버린 태엽 인형처럼 자버렸어요.. 전화도 안 해주고 너무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형도 계속 자고 있었구나. 왜인지 모르게 안심했어요! 난 그것도 모르고 서운하게 생각할 뻔했잖아요. 그런데 형, 잘 때 선풍기는 켜고 자면 안 돼요. 감기 걸릴지도 모르고 혹시 과열되어서 불이 날지도 모르잖아요. 게다가 공기 부족으로 큰일 날 지도 모른다구요. 차라리 에어컨을 약하게 틀고 있는 게 낫다니까요? 이불도 거의 내려가 버렸길래 내가 잘 덮어줬어요. 형은 모르겠지만 상관없어요! 형이 감기라도 걸리면 내가 더 아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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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없을 때 세탁기도 돌리구 설거지도 해놨어요. 음식물 쓰레기는 아무리 귀찮아도 비닐봉지에 따로 담아둬야 버릴 때 훨씬 편하다구요. 그렇다고 냉동실에 넣는 건 안 좋으니까 제가 제때 버리는 게 좋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직도 못 고치구 있어.. 물론 여름이라서 초파리 꼬이는 게 싫은 건 나도 잘 알아요. 그러니까 모이면 그때그때 버리는 게 좋다니까요? 역시 형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니까.. 게다가 양말도 뒤집어서 벗어놓구.. 귀찮아도 한 번 습관들이면 고쳐지는데 형 진짜 너무해. 조금만 생각하면 되는 건데. 그나저나 전화는 왜 이렇게 안 받는 거예요? 혹시 형이랑 친한 순영? 그 분이랑 어디 간 거예요? 그럼 말이라도 좀 해주지. 진짜 너무 한다니까? 그 형 아무래도 이상해요. 맨날 형한테 연락해서 쇼핑가자 밥 먹자 하는 거. 아무리 형이 그런 거 아니고 진짜 친구라고 말해도 그 쪽 입장은 아닐 수도 있잖아요? 난 믿을 수 없어!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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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소리가 너무 시끄럽죠? 형네 집 근처엔 유난히 매미가 많나 봐요. 가끔 비명 지르는 것 같이 소리를 지른다니까요? 근처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매미 소리 때문에 아무도 모를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전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근데 형 오늘 많이 더웠나 봐요. 왜 이렇게 땀을 많이 흘렸어요? 제가 땀 닦으라고 수건 줘도 됐다고 하구.. 안아달라고 하니까 싫다고 하구.. 모야 난 진짜 서운하다구요. 뭐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아요. 스킨십하고 싶어서 형을 만나는 건 절대 절대로 아니니까! 잘 알죠?
얼마 전에 엄마가 형에 대해서 물어봤어요. 잘 있냐고, 여전히 말랐냐고 물어보더라구요. 제가 그래도 요즘엔 살이 좀 붙었다고 거짓말해버렸어요. 우리의 관계를 친구로 알고 있는 엄마는 형에게 애인이라도 생겼냐고 물어보셨어요. 그 애인이 나인데.. 그렇다고 내가 응 엄마 내가 바로 그 애인이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형이 화낼까 봐 그냥 잘 모르겠다고 했어요. 잘했죠? 칭찬해 줘요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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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사스날이라는 작가 기억해요? 작년 이맘때에 우리 전시 보러 갔었잖아요. 비 피하려다가 들어간 미술관. 생각해보면 우리 그때 정말 좋지 않았어요? 이 작가랑 비 오는 날씨랑 정말 잘 어울렸다고 생각해요. 그때 바깥 날씨와 잘 어울리는 그림 '쇼아(숲)' 이라는 그림이었죠 아마? 나 그 그림 너무 마음에 들어서 엽서도 샀잖아요. 이번에 또 샀어요. 형은 그림에 별로 관심이 없어했지만 원래 좋아하는 건 같이 공유하는 게 좋잖아요? 그래서 두 장 샀어요. 형 하나 주려고. 오늘 날씨도 딱 이 그림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바람도 부는 이 날씨의 여름. 공중에 물기가 가득해서 제 몸에도 이끼가 자랄 것 같은 이런 이상한 기분. 그런 가운데에 서 있는 우리 같았어요. 그래도 나는 형이랑 함께 있으면 이런 찝찝하고 싫은 기분에도 같이 누워서 살을 맞대고 싶어요. 그러면 정말 기분 좋을 것 같아요. 형이랑 키스하고 싶다. 미끌미끌하겠지? 달팽이라도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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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오늘 늦게 갔더니 형이 먼저 자고 있더라구요. 깊이 잠들었는지 이번에도 내가 가도 모르구. 안심했어요. 형 깨면 내가 미안하잖아. 침대 머리맡에서 형 얼굴 쳐다보고 있으면 너무 행복해요. 항상 이렇게 쳐다보고 싶어. 형 목덜미에서 좋은 냄새가 나요. 목에다가 살짝 뽀뽀했는데 몰랐죠? 그리구 안경은 침대에 두지 마요. 떨어지거나 자다가 눌러버릴 수도 있잖아요. 내가 책상에다가 올려둘게요. 어제 산 엽서랑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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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왜 집 비밀번호 바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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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왜 다른 사람이 집까지 찾아와요? 게다가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아요? 왜 형이랑 친한 듯이 원우야, 이렇게 불러요? 누구예요? 왜 친한 듯이 장난쳐요? 왜 그 사람 말에 웃어줘요? 왜 아침에 같이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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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형이 일부러 이런 행동을 하는지 생각해봤어요. 그리고 알았어. 형 내가 질투해 주길 바라는 거죠? 아님 더 같이 있어주길 바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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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내가 없으면 안 되는데.. 나 너무 걱정돼요. 형 기침 하는 것 같던데 병원은 갔어요? 여름 감기가 더 독하잖아요.. 집 문고리에다가 약사서 걸어놨어요. 꼭 먹어요!
민규는 원우의 집 앞 편의점에서 소다맛 아이스크림을 하나 샀다. 밤이라 낮보다는 덜 더웠지만 입안 가득 시원함을 입에 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민규는 계단에 앉아서 아이스크림 껍질을 까서 한 입 가득 물었다. 두 시간쯤 기다렸을까? 다 먹은 막대를 그대로 입에 물고서 왼 손목에 있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불안한 듯이 주위를 살피며 저 멀리서 원우가 안심하는 표정으로 건물로 들어왔다. 자동으로 켜지는 전등과 막대를 문 채로 계단에 앉아있는 김민규를 확인하고서는 눈에 띄게 움찔 놀라 했다.
"형"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머리가 아픈 듯이 한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민규야 우리 작년 여름에 헤어졌어. 제발 그만... 그만하자. 나 진짜 너무 힘들어"
".. 형 또 이런다? 또 나한테 뭐가 서운한 거예요"
민규는 웃으면서 말했다.
"...웃기니?"
웃기다니? 민규는 정말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고 눈만 깜빡 깜빡 거렸다.
"찾아오지 말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
"여길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이사한 이유 모르겠어?"
"...내가 편지도 썼잖아요. 못 봤어요? 왜 이사할 때 도와달라고 안 했..."
"경찰에 신고했어. 일종의 경고야. 다시는 오지 마"
민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문질러서 닦았다.
"...형 나 너무 더워요"
"네 상황 안 궁금해. 제발 가"
".근데..형.. 여름이 끝나가요. 곧 있으면 매미소리도 안 들릴 거고."
"... 제발 부탁이니까 가 줘.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마 제발.."
민규는 계단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원우는 다가오는 민규의 그림자에 움찔 놀라며 뒤로 한 걸음 조심스럽게 물러난다.
매미는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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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속 더웠고, 어째서인지 손이고 머리고 옷이고 온통 뜨겁게 젖어있었어요. 그 상태로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어요. 나두 상처받아요.. 언제나 형의 거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한다구요...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몇 명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왜 인지 흠칫 놀랐는데, 왜 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두운 집에 도착해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는데 옆에 형이 있는 것 같기도 한 거예요. 그래서인지 얼굴도 갑자기 화악 뜨거워졌어요. 조금 슬펐는지도 몰라요. 형은 바라만 봐도 좋지만 동시에 나를 슬프게 하는 이상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렇게 간단하게 여름이 끝나버릴 줄은 몰랐어요. 나는 이제 잘 거예요. 잘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