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 눈감아줄래
2021. 2. 13. 18:24

 

“새 학기를 맞이한 기념으로 회내 규칙 하나 세워봤다.”

 

경상대 47대 학생회장 상은이 결연한 표정으로 노트 한 권을 내려놓는다.

 

“만약 우리 학생회에서 씨씨가 나오면 데스노트에 이름 나란히 정자로 쓰고 퇴회하는 걸로.”

 

데스 노트랍시고 꺼내 놓은 노트는 전 학기 대대적으로 돌렸던 학교 홍보 노트다. 경상대 전체에 돌려도 그 권수가 통 줄어들지 않길래 학생회실 귀퉁이에 쌓여 썩어가더니 나름대로 알차게 재활용한 모양이다. 데스치곤 지나치게 희망찬 색깔에 혁신 학교니 우수 논문 선정 학교니 장단도 안 맞는 문구들로 표지가 도배되어 있지만. 그런 문구들을 모조리 차치하고 정중앙에 마카로 쓰인 네 글자 ‘데스노트’. 영어도 아니고 정직하게 ‘데스노트’. 본새 안 났다. 그러나 표지에 매어진 활자들의 기저에는 어딘가 악의와 저주가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우리 다 성인이야 얘들아. 공사는 구분하자. 우리 여기 일하러 왔지 하트시그널 찍자고 온 거 아니잖아, 어?”

 

누나 왜 저래? 자과대 학생회, 씨씨때문에 개판이 났대요.

 

종강하고 열린 확대 간부 수련회. 번지르르한 이름이 무색하게 교내 단과대 학생회 임원 중 술독에 빠져 죽을 의사가 있는 임원 몇을 추려 가평의 자연을 벗 삼아 즐기는 술상. 상은은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자연과학대 학생회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습부원과 2학년 임원이 눈 맞아 생긴 기절초풍 풍비박산 씨씨 이야기를.

 

아니 지들끼리만 지지고 볶으면 몰라. 왜 꼭 헤어져서 학생회 분위기를 개죽 쒀 놓냐고.

 

자과대 학생회장 근형은 폭삭 가라앉은 얼굴로 깡소주를 재꼈다.

 

응 근형. 우리 올 때 소주 세 박스 사 왔는데 지금 니가 그중에 사 분지 일은 동내고 있어. 니가 무슨 물먹는 하마니? 소주 먹는 하마야? 지조 있게 마시자. 추하게 애기들 깨 볶는 거 뒤에서 까내리지 말고.

 

상은은 바닥 장판과 물아일체를 이루며 울부짖는 근형의 등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러나 내리치는 손바닥과는 다르게 근형의 한탄에 큰 귀감을 받았다.

 

만약에, 나의 귀엽고 사랑스럽고 가족 같은 경상대 47대 학생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비록 총무 전원우는 꼭 행사 준비물 사러 갈 때만 학교카드 잊어먹고 안 가져와서 기어이 내 카드를 긁게 만들고, 홍보부 김민규는 자기가 운전하겠다고 생색 다 냈음에도 불구하고 술 처먹고 인사불성이 되어 기어이 내가 핸들을 잡게 하지만. 그래서 가끔은 가족이고 나발이고 그냥 좆 같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학생회에도 이런 불경한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그래서 나온 대책이 이거였다. 자수하고 광명찾기. 광명치곤 상당히 파멸적인 엔딩이 도사리고 있지만. 텅 빈 학생회실에서 마카 잉크 터져라 꽉꽉 눌러 썼을 상은을 생각하니 간담이 절로 서늘해졌다. 전원우는 기억을 되짚어본다. 상은이 술에 반쯤 절여진 머리를 쥐어잡고 대책을 강구하고 있을 때 자신은 뭘 했나. 전원우는 다른 쪽으로 온 신경이 기울어져 있었다.

 

애초에 종강만 하면 방구석에 눌러 앉아있을 전원우가 거길 왜 가게 되었냐하면 별수 없었다. 김민규가 간다고 했기 때문이다.

 

-원우야. 다담주에 확간수 갈래?

 

자취방 매트리스에 꼼짝않고 늘어져 있던 원우는 상은의 연락에 맥없는 대답을 뱉었다.

 

'가도 술만 먹을 거잖아요. 안 가요.'

-얘가 배가 불렀네. 누군 술이 말라 가겠다고 온갖 깝을 다 떠는데.

'아 설마. 김민규 간대요?'

-그럼 걔가 빠진다고 했겠니.

 

씨발 민규야. 왜 하필 너는 차려진 술상 내빼는 법을 몰라서.

 

확간수 당일. 핸드폰과 지갑, 담배와 라이터만을 덜렁 들고 온 원우에게 민규가 다가왔다. 형도 티는 안 냈지 술 마시고 싶었구나? 상체만 한 나이키 보스턴백을 어깨에 둘러맨 민규는 피난 가는 것 같은 짐짝에 화보 촬영하는 것 같은 낯빛이었다. 입을 열 때마다 보이는 깨진 조약돌 같은 송곳니부터 햇빛에 번들거리는 새까만 닥터마틴 샌들까지. 민규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아니야 민규야... 형은 술이 아니라 가평의 아름다운 자연을 구경하려고...

 

민규는 섞어 마시는 건 체질이 아니면서도 술을 기가 막히게 마는 능력이 있다. 특히 예거와 토닉워터의 환상적인 비율을 이루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날도 민규는 어김없이 예거 마이스터의 뚜껑을 땄다. 이미 모든 단과대가 침 발라놓은 학교의 성실한 일꾼 민규는 임원들 하나하나 술을 말아줬다. 그만 달려야겠다는 타 단과대 임원 누나들을 위해선 갈배 뚜껑도 땄다. 어디선가 새 종이컵을 가져와 따라줬다. 어느새 빈 병이 된 예거 병을 붙잡고는

 

‘저 노래 한 곡 뽑을까요?’

 

재롱떠는 강아지. 형누나들 박수갈채 받으며 에픽하이 노래 부르는 민규. 사랑을 한 다발로 받고도 넘쳐흐르는 민규. 행동거지뿐만 아니라 얼굴도 연중무휴 성실한 민규. 사람 찾는 대나무숲에 이름 없이 경영학과 넉 자만 올라와도 댓글에 김민규 석 자가 빗발치는 유사 연예인 민규.

그리고 전원우 혈압수치 컨트롤러 민규. 왜 병나발을 불어요 속 버리게. 형 진짜 술 고팠나 보네.

 

아니야 민규야... 형은 죽어도 너 때문에 개빡쳐서 죽었다기보단 술 처먹다 죽었다고 알려지는 게 덜 쪽팔릴 것 같아서...

 

 

 

"누나아... 왜 새 학기부터 군기를 잡아요."

 

민규가 콧소리 섞인 목소리로 아양을 떤다. 개강 첫 주부터 혼자 신수가 훤하다. 남들 다 대충 주워입고 온 몰골인데 민규만 심사숙고를 걸친 번지르한 꼬라지다.

 

"너 여기서 사귀는 사람 있냐?"

 

의자에 반쯤 기대앉아 있던 원우가 물었다. 질문보단 추궁에 가까운 어조다. 날카로운 어투에 미간이 구겨졌다.

 

"말투 봐. 아주 잡아먹겠어요?"

 

그래.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입에 집어넣기엔 네 사이즈가 너무 오버사이즈지만.

 

"아님 누구 좋아하냐?"

"아, 이 형 왜 회의에서 호구조사를 해?"

"없음 말고."

 

상은이 옆자리의 원우를 흘겨봤다. 한 여름날 종강하고 별안간 긴 머리를 볶더니 개강을 앞두고 만났을 땐 앞머리가 눈썹을 드러낸 채 가지런히 놓여 있있다. 저거 딱 말년병장 기장인데. 전역하자마자 비대위 임원으로 소집됐던 때의 원우를 떠올렸다. 숫기는 없는데 요령은 있었던 시절의 복학생 전원우를.

머리는 또 왜? 김민규가 볶은 거 병약한 예술가 같대요. 넌 가만 보면 은근 민규 말 잘 들어. 그래 보여요? 원우가 짧아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안 되는데. 애 싸가지 없어지는데.

 

“어쨌든 그렇게 알고들 있어. 양심고백하고 회개하고 싶거든 거울 앞에 놔둘 테니까 언제든 쓰고.”

 

상은이 거울 앞 선반에 각 맞춰 노트를 올려놓았다. 바라보는 민규의 얼굴에 불만과 심술이 그득 붙어있다. 회의한다. 넵. 노트북 상판을 열며 민규와 노트를 번갈아 봤다. 귀엽고 싹바가지 없고 사람이 좋은 건지 사랑이 좋은 건지 구분 안가는 민규. 넘어가는 시선 끝에 걸린 데스노트.

 

좆됐다.

씨씨는 고사하고 에이에이도 못 해보게 생겼다.

 

 

 

 

 

눈감아줄래

 

 

 

 

 

사랑은 언제나 불청객이다. 초인종을 누르는 사랑은 없고 잠긴 문을 열든 찢든 뜯든 하여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사랑만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민규는 지능적 강도였다. 차라리 힘으로 밀어붙이면 모를까. 천성 같은 살가움과 지병 같은 다정함으로 녹이고 녹이고 또 녹여 구제불능의 상태가 된 몸뚱아리를 끌어안고는 ‘형. 제가 다 가져가도 용서해줄 수 있죠?’라고 속삭인다. 녹아버린 불능의 몸으로는 입도 열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전원우는 소리친다.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해바라기 김래원처럼.

그러나 사랑 앞에 장사 없는 전원우는 별수 없이 모든 걸 걸어놓고 사채까지 써가며 극진하게 대접해버리곤 하는 것이다. 모두 털린 집구석에 연필 한 자루까지 모두 내어주고도 모자라 하나 남은 심장까지도 민규에게 선물한다. 너 가져 민규야. 네 거잖아.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이름 걸어놨잖아. 상상 속의 민규는 기꺼이 받아든다. 펄떡대는 날 것의 심장을 두 손에 받쳐 들고는 입매가 도드라지게 웃는다. 형 의외로 낭만적이네요.

 

전원우의 사랑은 조심스럽다. 행동반경이 작다. 좁은 상자에 갇혀 내미는 주먹이다. 한마디 하자고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든다. 김민규를 처음 마주한 경영 전체 엠티. 커다란 덩치를 온통 구기고 앉아있는 새내기 김민규. 동이 터 오르는 술자리에 혼자만 눈에 활기가 돈다.

감상평을 남기고 싶었다. 날밤을 샌 대가리는 제대로 굴러갈 리 없다. 사랑에 빠지고 술기운에 빠졌으므로. 민규야 너 눈이 예쁘다. 좆 같고. 민규야 너 눈이 맑다. 도 믿는 선배로 낙인찍힐 게 뻔하고. 민규야 넌 지치지도 않니? 명백한 시비고. 너무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진부하지 않고 적당히 추파를 보낼 수 있을 만한 멘트가...

신중한 선별과정을 거치는 도중 불쑥 치고 들어오는 과거의 기억. 원우야. 너는 사랑을 하는 건지 사시를 보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너 이러다 연애 못 해. 우물대는 사이에 다 도망간다. 과거의 애인. 이 시발 이 새끼는 헤어져도 날 괴롭히네. 각고의 엄선 끝에 내뱉은 말.

 

‘너 라식했니?’

 

김민규는 맥락 모를 질문에도 살갑게 대답했다. 저 원래 시력이 좋아서. 라식 안 했어요 쌩눈이에요. 아, 혹시 라식하시게요? 제 친구가 졸업하고 했는데 부작용 없이 진짜 잘됐거든요. 어디서 했는지 물어봐 드릴까요?

이어지는 과거의 기억. 너 연애가 어렵지? 응? 넌 사랑이 무서운 거야. 네 뜻대로 안 될까 봐. 너 그렇잖아. 뭐 하나라도 수틀리면 거품 물고 발악하잖아. 가만히 주시하던 원우가 입을 열었다. 이리 와. 오늘 형 주둥이에 말뚝 하나 박자.

 

포문은 그렇게 열렸다. 절대 죽지 않는 두 눈에 대한 감상과 압구정 안과 주소를 남기며.

 

 

 

전원우의 사랑은 기교도 없이 흘러간다. 학생회에 입회한 김민규를 두고도 진척은 없다. 사랑을 탐내기엔 꾀어낼 재주가 없었다. 김민규의 주변만 둥글둥글 순회하는 인공위성이 되어 한 학기를 보냈다.

지나가는 시간에 이끌려 맞이한 새 학기. 근본도 없는 기대를 품고 맞이한 새 학기에 청천벽력같은 선포를 듣는다. 학생회 이념에 반하는 극악무도 씨씨 세력 타도. 반파된 기대 위로 이성이 물 밀듯 쓸려온다.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사랑 앞에 결코 궁핍해지지 않을 거다.

그러나 이 알량한 자기세뇌는 날이 갈수록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김민규는 여전히 술자리를 빼는 법이 없다. 여전히 만인에게 스스럼없고 다정한. 친절한 민규씨다. 얼굴은 날이 갈수록 멀끔해졌다. 요새는 운동도 시작했다고 한다. 어깨가 점점 옆으로 넓어진다. 개총 때 술 처먹고 엉겁결에 기댄 민규의 어깨는 짱돌마냥 단단했다. 헉 시발. 잇새 사이로 터져 나오려는 욕지기를 간신히 주워다 삼켰다. 너 운동해? 넹. 저 요새 버피 조지는 중. 원우는 그 말을 듣고 울어야 할 지 웃어야 할 지 몰라 술만 들이켰다. 형 방학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술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걱정인지 뭔 지 모를 민규의 말을 비지엠 삼아서.

 

 

 

중간고사를 코앞에 둔 전원우의 신경은 애먼 곳으로 날을 세웠다. 데스노트. 이거 그냥 찢어버릴까? 극단적인 결심이 뇌리에 냅다 날아와 박혔다. 찢자. 시험 준비로 이틀 밤을 지새운 원우는 별다른 숙고 없이 노트를 비틀어 잡았다. 양손에 힘을 주려는 순간

 

“뭐하냐?”

 

학생회실에 상은이 들어왔다. 원우는 던지듯이 노트를 내려놓았다.

 

“아무것도요.”

“이빨 까지 말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원우야. 아니지?”

 

응? 상은이 대답을 종용했다. 학생회실에 잠시간 정적이 감돌았다. 원우가 입을 열었다.

 

“아닌데요.”

 

상은이 비뚤어진 노트의 각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원우야. 너 연애에 관심 없는 거 내가 다 알아. 난 너 나중에 연애고 나발이고 속세 떠나 산에 들어가 자연인처럼 사는 거 아닐까 내심 걱정했거든. 근데 거기엔 니가 끼고 사는 게이밍 컴퓨터도 없고 하니까. 한걱정 덜었지 응.

원우의 등허리에 소름이 서렸다. 누나 걱정 마세요. 저 연애에 졸라 관심 많아요. 하지도 못할 말은 가슴에 묻어둔다.

 

 

 

시험이 끝나고 원우는 자신에게 끝내주는 테라피를 제공하고자 민규에게 카톡 했다. 뭐해. 곧바로 답장이 왔다.

 

[시험 존망해서 머리 박고 반성 중이에요]

 

오키 열심히 해. 게임을 하며 시간을 죽였다.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카톡이 왔다.

 

[반성 끝]

[고기 먹으러 가용]

 

중간고사가 모두 끝난 금요일 저녁. 두 사람은 학교 앞 대폿집에 마주 보고 앉아 고기를 먹었다. 고기가 구워지기 무섭게 민규가 갈매기살을 원우의 접시에 떨어트렸다. 한 점 떨어지기 무섭게 또다시 접시에 떨어지는 고기. 민규야 너 많이 먹어, 형인 티를 내보려고 입을 열다가 바로 다물었다. 굽기도 먹기도 잘하는 민규는 이미 볼이 불룩했다. 원우는 느지막한 젓가락질로 고기를 집어 들었다. 고기를 먹는 건지 잇새로 육질을 잘근잘근 씹는 하악운동을 하는 건지 모를 행동을 취했다.

 

“팍팍 좀 먹어요.”

 

민규가 한 소리한다. 엉. 건성으로 대답했다. 집게를 독점한 채 고기를 굽는 민규는 시험의 기막힌 난이도와 교수의 악랄함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리는 민규를 바라보며 느긋이 고기를 씹었다. 테라피 제대로네.

 

 

 

 

 

중간고사가 끝나고 열린 가을 단과대학 축제. 민규는 행사장 입구에 서서 행사방문자들의 방명록 작성을 요구했다. 정확히는 얼굴을 팔았다. 영 부실했던 가을 단과대 축제 행사 사업 기획안. 상은은 행사일을 앞두고 기획부를 채근했다. 방명록? 뭐 더 좋은 거 없어? 기획부장 소정은 곤란한 투로 말꼬리를 늘렸다. 저희가 일주일을 머리 싸매고 고민해봤는데요... 어차피 다들 술 마시러 오는 게 목적이라... 관심 끌 만한 기획안을 생각해내기 어렵더라고요… 사실 이것도 제대로 참여해줄지 미지수고…

그리하여 홍보부는 민규를 투입했다. 민규는 홍보의 치트키 같은 존재다. 일단 행사지에 세워놓기만 하면 목표한 인원은 필히 담보가 됐다. 방명록 작성 한 번씩 부탁드려요. 스태프 명찰을 매고 입구에서 펜을 배부하는 민규. 행사장 입구에 늘어선 줄은 민규의 얼굴을 알고 오는 학생이 반이고 얼굴을 모르고 오는 학생이 반이다. 후자는 소문의 주인공을 구경하기 위해 왔다가 아예 눌러앉을 심산인지 빈 테이블을 찾아 헤맸다. 단김에 들어차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대외협력부장 대균이 상은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 저 민규의 문제점을 찾았어요.”

“뭐. 벽 없는 거?”

 

상은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것도 그건데, 쟤는 저렇게 사람을 몰고 다니는데 연애에는 영 관심이 없어 보여요. 사람은 그렇게 좋아하면서 누가 바운더리 넘어 들이대기만 하면 슬금슬금 내뺀다니까요.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물어봐도 싹바가지 박박 긁는 태도로 ‘그걸 형이 알아서 뭐에 써먹게요’ 이래. 어쩌면 우리 민규 고자가 아니일, 억.”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대균의 몸이 앞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넘어질 듯한 몸을 바로 세우며 뒤돌아보자 불퉁한 얼굴의 원우가 서 있다.

 

“애 가지고 헛소리 좀 하지 마.”

 

대균이 밀쳐진 어깨를 부여잡았다. 왜 니가 승질이세요 시발놈아. 니가 무슨 김민규 클론이냐? 어 대균아. 나 김민규 클론 넘버 세븐이다. 나머지는 다 일본 중국 미국 날아가서 연예인하고 인스타 셀럽하고 난 한국에서 등록금 축내는 중이다. 상은이 귀찮은 투로 성을 냈다. 야. 니네 싸우려면 나가서 싸우고 들어와. 정신없어. 대균이 툴툴거리며 멀어졌다.

 

“사람 안 가리고 정 주는 게 문제 아니야? 쟤 보면 가끔 겁나. 눈물 좀 빼면 보증도 서줄 것 같어."

 

상은이 대저 방문객 인원수를 헤아리며 중얼거렸다. 원우의 눈길 끝에 민규가 걸린다. 아는 체를 해오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하고 여기저기서 물어오는 질문에 빼지 않고 자세히 답해주고. 함께 일하는 임원들과 간간이 농담을 주고받다가 길게 늘어선 대기 줄을 정리하다가도 누군가 부르면 달려가 대답한다. 네 민규 여깄어요! 정 무서운 줄 모르는 맑은 얼굴을 하고.

 

 

 

입구에 세워둔 지 한 시간이 채 못 미치는 시간이 지나자 민규가 달려왔다. 원우는 엉킨 앰프 선을 푸느라 삼십 분을 할애하고 있었다. 줘 봐요. 손에 들린 앰프 선을 가져가고 대신해 빼곡한 방명록을 쥐여줬다. 전지만 한 종이에 가지각색 글씨들이 어수선하다. 경상대 47 학생회(띄고 하트), 혁신 경영, 경제 파이팅, 김민규 잘생겼다, 실무 24기 놀러옴(타 단과대생이 우리 축제엔 무슨 일인가), 입구에 남자스탭분 어느 과 누구예요? 밑에 답글로. 경영학과 김민규요. 그 밑에 덧붙이는. 민규야 좋냐? 부럽다 행복해라.

 

“다 채웠네.”

“네. 아니 상은누나가 못 채우면 얼굴을 팔아서라도 채우라길래…”

“너 입구에서 끼 부렸냐?”

 

원우가 질겁하여 물었다. 경직한 어조에 꼬인 선을 풀던 민규가 더러 놀란다.

 

“예? 아뇨 그럴 필요 없던데? 그냥 써달라고 하니까 다 해주던데.”

 

다 풀어낸 앰프 선을 원우에게 쥐여줬다.

 

“내가 그냥 노파심에 말하는 건데… 너 어디 가서 함부로 끼 떨고 그러지 마라.”

 

순간 와작 구겨지는 민규의 미간.

 

“내가 언제?”

 

 

 

밤이 되어 어두운 교정에 경상대학 건물만이 조명을 받아 형형하다. 피로에 쩔은 원우는 상념에 사로잡힌 채 뒷무대에서 댄스동아리의 무대를 지켜봤다. 아침부터 무대 장비를 옮기고 지하창고에서 소주를 궤짝으로 나르고 동아리 공연 리허설을 점검하느라 기가 다 빠진 채였다. 목에 건 스태프 명찰이 바람에 맥없이 흔들렸다.

옆의 민규가 타임테이블을 확인한다. 이미터에 육박하는 덩치를 이유로 오늘 하루 제일 힘을 많이 썼으면서도 지친 기색 한 점 보이지 않는다. 주변은 빠른 무대 음악으로 정신이 없다. 눈앞에는 댄스동아리 부원들이 뒷모습을 보인 채 춤을 추고 있다. 높은 무대 위에서 원우로서는 알 수 없는 노래를 배경으로. 옆에는 민규가 같은 스태프 명찰을 목에 건채 느슨하게 뒷짐을 지고 있다. 사위가 모조리 축축한 밤 냄새인데 민규만 새파란 향이다. 너 향수 뿌렸니. 넹. 다시금 무대로 시선을 돌린다. 흐트러지는 향수 향에 영양가 없는 의문을 품는다. 왜지.

 

“형. 끝나고 술 마셔요.”

 

민규가 몸을 붙여와 속삭였다. 뭐지.

 

“안 그래도 누나가 이따 끝나고 모이랬어.”

“말고요. 형이랑 저랑 만요.”

“왜?”

“왜냐니? 웃기는 형이네. 같이 마시고 싶으니까 그렇죠.”

 

밤바람이 불었다. 두 사람의 명찰이 흐트러졌다. 습기 먹은 밤 냄새 대신 새파란 향수 향이 코 밑을 훑고 지나간다. 노래는 점차 잦아지더니 이내 멎는다. 박수 소리와 함께 작다란 함성이 터졌다. 원우는 속에서 씹어낸 무수한 의문 중 단 하나도 답을 도출해내지 못한다. 그보다는 다른 갈림길에서 골몰한다. 내가 후진을 해야 하나 아님 가만히 있어야 하나? 그런 게 아니라면 앞으로 나아가야 하나?

 

 

 

전원우는 앞으로 나아가기를 택한다. 김민규를 자신의 자취방으로 데려온다. 사심을 충족하기보다는 일종의 도전에 가까웠다. 머릿속에서 오버랩되는 목소리. 너 연애가 어렵지? 응? 넌 사랑이 무서운 거야. 이 씹새가 누구한테 어렵니 무섭니 마니 가스라이팅이야. 서슬 퍼렇게 덤벼대는 속내치고는 좌식테이블 다리를 펼치는 손이 마구잡이로 떨렸다.

민규가 두 눈으로 한 번 슥 훑으면 끝일 좁은 자취방을 돌아봤다. 원우의 집에 발을 들인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지금에 비하면 아직 서먹했던 학기 초. 술에 취한 민규를 자취한다는 이유에서 원우에게 떠맡긴 선배와 동기들에 의해서. 원우야 수고 좀 해줘라. 꼭두새벽에 걸려온 전화에 싫은 소리 하나 못했다. 형 사실 제가 걔를 짝사랑해서요. 같이 있기만 해도 신경 곤두서서 진이 다 빠지는데 걜 제 자취방에 데려다가 재우라고요? 것도 이 새벽에? 취해서 떡이 된 애를? 고문도 아니고 뭐에요 그게? 차마 내뱉지 못할 말들이 잇새 사이에 끼였다. 휴대폰을 귓가에서 멀리 떼어내고 한숨을 쉬었다. 피로한 몸만 겨우겨우 일으키며 답했다. 어디요?

새벽 세 시. 술집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는 민규를 부축하여 겨우겨우 자취방에 밀어 넣었다. 갑작스러운 고강도 육체노동으로 인해 좁은 방에 함께 있어도 간지러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걸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민규야. 벽에 기대 주저앉은 민규를 불렀다. 힘이 딸려 매트리스에도 눕히지도 못했다. 김민규 너 괜찮아? 취객이 무겁게 눈을 떴다. 눈앞에 집주인을 바라보더니

 

원우형?

 

부른다.

어. 나 원우형. 너 과 선배. 뭐 잃어버린 건 없지? 주머니 봐봐. 굼뜬 팔짓으로 과잠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이랑 핸드폰 다 있어? 네. 아 다행. 민규가 원우를 응시했다. 굴곡 없는 눈빛으로 뚜렷하게. 마주 보고 주저앉아 마른세수를 하는 자신의 과 선배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형. 저 안양 살아요.

 

시선이 부딪쳤다. 취기 오른 기색이 역력한데도 발음은 마주하는 시선만큼이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골격은 앳된 티를 모두 벗어 던졌는데 얼굴 위로 흐르는 기류는 여전히 소년이다.

 

저 부모님이랑 동생이랑 살고요, 개도 키워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십 오 년도 더 살았어요.

 

주사가 자기 얘기 늘어놓기인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응 그렇구나. 반쯤 휘발된 정신으로 말을 이어갔다.

 

저 어린이집을 일찍 들어갔어요. 두 살 좀 안 됐을 때부터 들어갔고 유치원은 안 다녔어요. 초등학교 땐 육 년 내내 반장 했어요. 중학교 들어가선 수영 선수 잠깐 했다가 말았어요. 적성에는 맞았는데 진로에는 안 맞아서 관뒀어요.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방송부 했어요. 원래 아나운서 하고 싶었는데 촬영부로 들어갔어요. 근데 해보니까 재밌어서 계속했어요. 고삼 되기 전까진 경찰공무원 하려 했는데 고삼 되니까 생각이 바껴서. 수능 쳐서 여기 왔어요.

 

그래 민규야. 마주치는 시선이 경망이라곤 티끌도 찾아볼 수 없이 묵직하다.

 

저 농구 하는 거 좋아하고요, 뭐 만드는 것도 좋아해요. 영화 보는 것도요. 싫어하는 건 딱히 없어요. 찾아보면 있긴 할 텐데 일일이 단정 짓고 싶진 않아요. 학생 때 연애도 해봤고요. 끝이 안 좋은 건 없었어요. 적어도 제 기억엔 그래요. 술은 중학생 때 애들끼리 몰래 마셔본 게 처음이었고 가장 큰 일탈은 고등학생 때 담배 피운 거요. 끊긴 했어요. 전 거짓말을 잘 못 해서… 속이기가 힘들어서 끊었어요.

 

늘어놓던 이야기의 허리를 끊고 묻는다. 형. 궁금한 거 있어요? 줄줄이 자기 얘기 하다가 대뜸 물어오는 질문이 궁금한 거 있냐니. 잠긴 목소리로 묻는 그게 뜬금없어 원우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궁금한 거 이미 반은 얘기한 것 같은데. 민규가 따라 웃었다. 뱉어낸 웃음이 취기에서인지 조금 달떠있었다. 벽에 기댄 몸을 뒤척였다.

 

관심 좀 가져봐요… 맨날 나만 물어봐…

 

입술 사이로 흘린 말이 꿈결인지 현실인지 부유한 정신은 가려내지 못하고 눈꺼풀만 서서히 침전한다. 아래로, 아래로. 그러다 바닥에 닿으면 바닥을 박차고 올라가

 

다시 수면 위로. 맨정신의 민규는 술병이 든 봉지를 조악한 좌식테이블에 올려놓는다. 백 팔십 오가 족히 넘는 신장을 구겨 앉는다. 시퍼런 향수 향이 일곱 평 남짓한 자취방에 파도쳤다. 소주병 뚜껑을 돌려 깐다. 따닥.

전원우는 이 소리를 신호총으로 긴장이 몰아쳐 옴을 실감한다. 덧없이 후회를 했다. 난 정말 사랑이 무서울지도. 아니면 그냥 얘가 무서운 건가? 감당 못 할 것 같아서? 책임도 전가해봤다. 내 사랑의 원인은 다 너 때문이다. 네가 어울리지도 않은 경영학과에 와서. 하루가 멀다 하고 놀기나 할 것을 부지런히 일 한번 해보겠다고 학생회에 들어와서. 술은 도통 빼는 법이 없어서. 이런다고 멎을 사랑이 아님을 알면서도.

 

 

 

전원우는 일어난다. 화장실에서 세면대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경을 찾아 쓰고 우두커니 일어난 그대로 몸을 기대어 앉았다. 바닥은 지난 끽주의 흔적 하나 찾을 수 없이 멀끔했다. 몽롱한 정신을 한 채로 멀끔한 방바닥을 주시했다.

 

“일어났어요?”

 

화장실 문이 열렸다. 민규가 말리지 못해 물기 먹은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얽어 털어낸다. 형 자는 동안 화장실 좀 썼어요. 어…

굴곡 없이 향해오는 눈빛에 차오르는 기억. 새벽녘에 유언처럼 뱉은 말. 민규야 화장실 쓸 거면 써. 형은 좀 쉬어야겠다. 형 잘 거예요? 안 자. 쉬는 거야... 안 잔다면서 왜 기어 올라가 눕는데요? 아 씹 민규야. 내가 자면 누가 죽어?

산재한 기억은 더듬어 갈수록 뚜렷해졌다. 부분부분 끊긴 기억 끝에 돌아가는 씬. 늘어지는 몸을 모로 눕힌 자신과 긴 다리를 뻗고 앉아 마저 잔을 비우는 민규. 민규야. 민규를 향해 몸을 돌아 누우며 부른다. 취기에 반쯤 감긴 눈이 막연히 흐려진다.

 

자고 가.

 

알콜에 잠식한 목울대가 고양이 골골거리듯 울린다. 자고 가 민규야... 자고 가라… 왜인지 애원에 가까운 어투로. 내려오던 눈꺼풀이 시야를 완전히 뒤덮고는 암전되는 기억. 정신을 차려보면 환해진 배경 안에서 민규가 웃옷을 꿰어 입고 있다. 어디서 잔 걸까. 좁은 방엔 여벌 이불 하나 없는데. 부러 묻지 않고 다른 질문을 한다.

 

“나 뭐 실수 안 했지?”

 

눈을 마주쳤다. 아침 댓바람에도 눈에 총기가 선하다. 즉각적인 대답은 없고 정적만. 생기 돋는 두 눈이 피로한 두 눈을 바라봤다. 흐트러짐 없는 시선이 닿아오자 원초의 감각이 치민다. 불안. 왜 대답을 안 해…

 

“네. 그냥 자던데.”

 

해장하러 갑시다. 원우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기운 없이 딸려 일어난 원우가 모자를 눌러썼다. 아 근데 형. 어? 형 코골이 해요?

 

 

 

전원우는 펄펄 끓는 뚝배기에 고개를 처박으려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민규 덕인지 탓인지 때문에.

 

“묻겠당.”

 

고개가 기울어지며 뚝배기에 닿을 듯한 모자챙을 민규가 손등으로 막아냈다. 들어 올린 시야에는 한 숟갈 가득 양평해장국을 올려 먹는 민규가 들어왔다.

벽에 기대 잠들어버린 민규의 옆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던 묵은 기억. 등허리 밑으로 딱딱하게 배기던 장판. 이 애가 주는 애정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말자던 불안한 다짐. 그럼에도 때를 놓치면 동이 나 버릴까 촉박하게 눈에 담고 머리에 찍어냈던 장면들. 날이 밝고 일어나더니 허겁지겁 사과부터 하는 민규. 두통이 이는 머리와 갈라진 목을 등에 지고 홀린 듯 뱉어낸 말.

 

나 관심 많은데.

 

미적이는 감정을 뒤로 한 채 첫 숟갈을 들었다.

 

“넌 내가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요? 그런 게 있어. 민규가 웃으며 마저 밥숟가락을 든다. 네. 형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영 지지부진하게 한 계절이 지나가고 새 계절을 맞이했다.

겨울. 때 이른 첫눈이 터졌다.

 

“눈 온다.”

 

눈? 민규의 말에 회의 중이던 학생회 전원이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창 너머엔 싸라기 같은 눈이 펄펄 흩날리고 있었다. 바깥에는 첫눈 소식에 학생들이 하나둘 뛰어나오는 중이었다. 일제히 창가에 시선을 고정한 학생회 임원들을 보고 상은이 노트북을 덮었다.

 

“눈도 오는데 이만하자.”

 

임원들이 환호하며 하나둘 건물을 나섰다. 얘들아 너네가 초딩이니? 애정 섞인 면박에 돕바를 주워입던 원우가 웃었다.

 

눈은 땅바닥에 닿자 바로 녹아 사라졌다. 살을 에는 추위에 입고 있던 롱돕바를 여몄다. 주머니 안에서 담뱃갑과 라이터가 부딪치며 절그럭거렸다. 주머니에 굴러다니는 것들을 움켜쥐며 시선으로는 내내 민규를 좇았다. 머리카락에 눈싸래기가 얽힌 채로 사진찍기에 바빴다. 남들 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데 혼자만 오금에도 못 미치는 학생회 롱돕바를 몸에 둘둘 감고 있다. 또래 임원들과 사진찍기에 여념 없기를 한창. 눈이 마주치자 달려왔다. 영하의 온도에서 돌아다니느라 손이고 귀고 온통 새빨갛다.

 

“뭐가 그렇게 좋아.”

“첫눈이잖아요.”

“그러면 뭐 해. 중간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기말인데.”

“어이구? 인상 좀 피죠? 넘 팍팍하게 생각 말고. 가끔 낭만적인 생각도 하고 살아야 정신건강에 좋아요.”

 

민규야. 짝사랑은 각개전투 비슷한 거라 낭만이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더라. 매시간 긴장해야 되고 경계해야 되고 바빠. 네가 알 턱이 있겠냐마는. 넋두리를 뱉지 않고 그대로 삼켰다. 민규가 빨갛게 식은 손에 든 휴대폰을 건넸다.

 

“나 사진 찍어줘.”

“방금 오천 장은 찍지 않았니?”

“또 오바해서 말하네. 빨리요.”

“나 데세랄 아니면 안 찍는데.”

“장인은 도구를 안 가려요.”

 

휴대폰을 받아들자마자 촬영 버튼을 눌렀다. 미처 포즈도 잡지 못한 채 프레임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뒷모습이 연속적으로 찍혔다. 민규가 화면 안에 들어선다.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놓고 한 손은 건성으로 휴대폰을 잡은 채 프레임에 들어선 민규를 눈에 담았다.

 

“아 형. 제대로 좀.”

 

원우의 한 손 주머니 한 손 핸드폰 자세에 불만을 토한다. 민규야. 너는 내가 앞구르기 하면서 찍어도 상관없을걸. 차마 내뱉지 못할 말을 주워 담는다. 주워 담은 말로 속이 부대꼈다. 짝사랑은 이런 이유에서 결핍이 아닌 과부하에 가깝다. 미처 내뱉지 못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안에서 곪는다. 케케 묵은 흔적들이 소화되지 못하고 새것들이 위에 얹히고 얹혀 속을 불쾌하게 메운다. 감정이고 말이고 한데 섞여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휴대폰을 바로 잡는다. 프레임 안에 민규가 들어온다. 웃는 입매 안으로 송곳니가 드러난다. 흐트러진 머리칼 위로 눈이 가라앉았다. 쌓이지도 않는 눈이 민규 주위로만 새하얗게 튼다. 바로 보아도 사위는 잿빛인데 모로 보아도 민규만은 환하게 일렁인다. 고쳐 잡은 손끝으로 엇박자의 맥이 뛴다.

 

민규야. 나 앞으로 어떻게 할까.

 

원우는 이 말도 삼킨다. 체할 것만 같다.

 

 

 

그날 밤. 민규가 사진을 보내왔다.

 

[이런 건 왜 찍은 거?]

 

열 장이 넘도록 찍힌, 프레임에 담기기 위해 달려 가던 뒷모습이었다. 팔다리가 흔들려 불안정한 잔상이 남아있다. 연달아 사진 한 장이 전송됐다.

 

[잘 찍었다]

 

머리에 녹아가는 눈을 얹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민규가 사진에 있었다. 매트리스에 기대 누워 사진을 바라봤다. 한참을 사진만 바라보고 있을 때 또 다른 사진이 전송됐다. 롱돕바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놓은 채 프레임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 자신이었다. 이건 또 언제 찍었대… 부옇게 흐린 안경알이 애니메이션 영상효과 같았다. 알이 산산조각 나도 생채기 하나 안날 것 같은.

민규는 곧 프로필 사진을 새롭게 올렸다. 초점이 맞지도 않은, 움직이는 팔다리의 잔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뒷모습이었다.

 

 

 

 

 

책상 위에 너저분한 짐들을 밀어놓는다. 종류도 가지각색인 짐들이 한 품에 가득하다. 구겨진 서류 무더기, 가위와 테이프, 유통기한 지난 주전부리들, 컵홀더, 대협부 상익이 회계원론 교재, 총무부 채영이 노트북 파우치, 분명 처음 봤을 땐 흰색이었는데 회색이 된 상은누나 필통, 그리고 익숙한 파일책. 원우의 것이었다. 정확히는 연초 전원우의 것이었다. 이거 여깄었네. 왠지 집을 다 뒤져도 안보이더라. 한 자리분의 공간만을 마련하곤 자리에 앉는다.

 

오전 아홉 시. 상은에게서 카톡이 왔다.

 

[학생회실 열어둠]

 

기말 시험 기간. 도서관 열람실은 안 봐도 그림이 뻔히 그려지고 정원이 백의 자리를 배회하는 대형과 치곤 턱도 없이 비좁은 과방은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게 득실득실한 정수리다. 상은은 학생회 임원들을 위해 시험 기간 동안 학생회실을 자유롭게 개방해두었다. 그러나 밤샐 곳 있고 공부할 곳 있는 자취생 전원우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거기 더러워서 어떻게 공부해요]

[그러는 댁은 얼마나 깨끗하시길래]

[열심히 공부하시고 막 학기 꼭 과탑하세요 누나]

 

이 이상의 대꾸 없이 가방을 싸 학생회실에 왔다. 아무도 없는 오후 네 시. 먼지 냄새가 부옇게 흐린 회실은 난방이 꺼져 쌀쌀했다. 입고 있던 돕바를 목 끝까지 걸어잠궜다.

 

 

 

오후 다섯 시. 내부 소음 한 점 없이 잠잠하던 학생회실의 문이 열렸다.

 

“있었네?”

 

민규다. 응. 원우는 표적에 박힌 듯 노트북 화면의 교양 피피티에 시선을 고정한다. 웬 우연? 민규가 백팩을 벗어 빈 의자에 던져놓는다.

 

“과방 사람 엄청 많아요. 채영이 지금 도서관인데 거기도 대기 걸어둬야 한다는데.”

 

아 그래. 통일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조잡한 피피티. 인간사회와 중독의 역사. 철학과 백수효 교수. 목차 밑에 숫자 일 띄고 사랑. 백수효 교수님. 사랑은 고차원의 우연이 아닐까요. 이 우연 저 우연 다 합치고 보면 사랑의 형태가 나오지 않을까요. 악법도 법이듯 따지고 보면 악연도 우연이고 우연도 운명인데. 민규가 거울을 보고 얼굴을 돌려보다 거울 밑 데스노트를 발견한다. 빈 종이를 넘겨봤다.

 

"형. 나 몰골 봐. 구려요?"

 

민규가 몸을 돌려 원우를 향한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으로 빗었다. 머리카락이 속눈썹에 걸렸다가 떨어진다. 원우는 가만히 시선을 훑었다.

 

“응.”

“진짜?”

“구라 안치고 걸어 다니는 시체같아.”

 

표현이 넘 적나라하고 기분 더럽네용. 민규가 원우의 앞자리로 걸어왔다. 책상을 정리한다. 책상 하나를 다 정리해버릴 기세로. 책은 책대로 모아 책장에 꽂아두고, 쓰레기는 분리수거하고, 구겨진 서류는 눌러 펴 파일철에 철한다. 원우가 자리만 겨우 내기 위해 밀어뒀던 무더기까지 모두 정리한다. 행동도 얼굴도 입도 매 순간 성실한 민규. 수요일 야식 사업 싸이버거요. 그거 남으면 남는 거 상은누나가 회실에 둘 테니까 배고프면 주워 먹으래요. 어수선한 책상이 구색을 갖추자 원우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밤샐 거죠?”

“아마.”

“아싸. 이따 밤에 곱창 시켜 먹자.”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피피티를 집요하게 바라본다. 교수님. 아니어도 그렇다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전문가가 그렇다고 말씀해주시면 왠지 맘 편해질 것 같아서요.

 

 

 

오후 다섯 시 삼십 분. 회실 문이 다시 열린다. 상은이다. 짐 치울까요? 원우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려 한다. 상은은 손사래를 친다. 아니, 난 뭐 가져갈 게 있어서. 책장을 뒤적이던 상은이 민규를 곁눈질해 본다.

 

“민규 여기서 공부하게?”

“네. 우리 과방에 사람 넘 많아요.”

 

그래? 상은은 계속해서 책장을 뒤졌다. 민규는 백팩을 뒤적여 노트를 꺼낸다. 원우는 피피티를 바라본다. 계속. 활자들은 무형의 모습을 한 채 머리에서 튕겨 나락으로 떨어진다. 상은이 책장에서 책을 찾아 꺼낸다.

 

“아까 전원우 회실에 있냐고 물어보더니.”

 

순간 모든 잡음이 까무러친다.

앞자리의 민규는 어깨를 굳힌다. 죄진 것 마냥.

 

“네... 그랬죠 제가?”

 

회실의 공기는 가로세로 모두 각이 진 사각형이 되어 굴러다닌다. 민규는 필기도 안 하면서 펜 잡은 손가락을 꿈지럭댄다. 모난 공기에 치인 상은이 눈치를 본다.

 

“난... 간다?”

 

상은이 책을 챙겨 들고 회실을 나간다. 원우는 여전히 피피티에. 멀쩡히 빛을 내는 모니터가 원우의 눈에는 점멸하며 읽힌다. 생사의 기로에 선 상황에서 보내오는 모스부호처럼. 모든 사랑은 철저히 계획의 산물, 우연은 없다, 운명은 모두 계략적, 그러니 사랑에 대한 논의는 운명을 재정의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럼 제가 오해를 좀 해도 심적으로 법적으로 어떠한 불리도 겪지 않을 수 있나요? 의자에 파묻힌 몸을 바로 하고 앉았다. 밀도 짙은 어색함에 부러 소리 내어 읽어보는 활자들.

2장 종교. 다음의 실례는 칼 마르크스가 남긴 격언으로써 설명 가능하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이거 왜 이러지?”

 

기획부 소정이 접합부가 부러진 테이블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한다.

 

“언니 이거 봐요. 다리 부러졌어요.”

 

상은이 다가가 테이블을 바로 세워본다. 부러진 다리 탓에 상판이 한쪽으로 무너졌다. 딴 데서 못 빌리나? 다른 단대도 지금 다 야식 사업 중이라... 새로 사야겠네. 역 앞 철물점에 이런 거 팔아요 접이식으로 된 거. 지금 몇 시야? 다섯 시 좀 안 돼요. 빨리 갔다 오면 얼추 맞겠다.

 

“민규 갔다 와.”

 

천막에서 박스를 나르던 민규가 상은의 부름에 돌아봤다.

 

“저 왜요?”

“니 차가 젤 크잖어.”

“아하.”

 

민규는 군말 없이 차 키를 가지러 학생회실로 들어갔다. 상은은 고개를 돌려 다른 테이블의 다리를 고정하던 원우를 바라본다. 부른다. 총무야. 너도 따라가.

 

“전 왜요?”

“왜긴. 돈 쓰러 가는데 총무가 따라붙어야지.”

 

아. 원우는 별 말없이 테이블을 바닥에 내려놓고 목장갑을 벗었다. 학생회실에서 민규가 차 키를 들고나왔다. 너 나랑 같이 가래. 그래요? 상은은 발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원우를 불렀다. 원우야. 돌아보는 얼굴은 무심할 정도로 잠잠했다. 파동 한 점 없이 조용하고 차분해서, 상은은 순간 자신이 무언가를 오해했다고 생각한다. 행정실에서 카드 가져가는 거 잊지 마라. 원우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철물점 앞은 영 평수가 나지 않아 주차 공간이 마뜩잖았다. 민규는 핸들을 연달아 돌려가며 버겁게 주차했다. 까만 suv 한 대가 좁은 주차구역에 겨우 끼워 들어갔다. 주차 거지 같다. 기어를 조정하던 민규가 중얼거렸다. 원우는 말없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냥 큰 거 살까요?”

 

민규가 매대 한켠에 기대어진 접이식 테이블을 뒤적였다.

 

“사이즈 재고 사.”

“작은 것보다야 널널하고 좋잖아요.”

“사이즈 재고 사라고.”

“사장님 이거보다 큰 거 있어요?”

“…”

 

민규야. 네 맘대로 할 거면 왜 물어봤니?

민규의 고집대로 산 대형 테이블을 트렁크에 욱여넣었다. 사이즈가 지나치게 크고 길어 트렁크를 가로질러 운전석 카시트 뒤까지 들어찼다. 운전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던 민규가 룸미러로 뒷자리를 본다. 근데 형. 저거 천막 다 삐져나가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가 사이즈 재보라고 했지. 저거에 가려져서 뒤가 안 보여요. 고개 빼고 봐. 너 인내심 빼고 다 길잖아. 이 형은 내가 무슨 팔척귀신인 줄 아나.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상체를 반쯤 빼고 뒤를 돌아봤다. 좁은 주차공간은 시야가 꽉 막혀있다. 아니, 진짜 안 보인다니까... 원우는 영수증을 읽어내려가며 눈대중으로 연말 정산을 계산한다. 테이블 삼만 사천 원, 야식사업 싸이버거 백 오십 개해서 오십 일 만원, 어제 학관 책방에서 박스테이프 산 거 천 이백육...

 

쿵.

 

뒷범퍼가 주차 턱에 들이박는다. 묵직한 충돌에 몸이 반사적으로 앞으로 쏠린다. 기울어지는 몸 앞으로 팔 하나가 불쑥 들어온다. 민규가 뻗은 팔이다. 앞으로 나가던 몸이 민규의 팔에 막힌다. 헉, 하는 꺾인 숨을 들이켜기도 전에 반동으로 뒷머리가 헤드레스트에 부딪친다. 악! 골이 둔탁하게 울린다. 다쳤어요? 단발적인 고함에 놀라 민규가 허겁지겁 안전벨트를 풀었다. 졸라 아파 썅... 부딪친 고통에 뒷머리를 싸매며 웅크렸다.

 

“헉. 대가리 박았어요? 괜찮아요? 멍든 거 아니야?”

 

봐봐요. 민규가 손을 뻗는다. 원우가 고개를 든다. 대가리가 뭐니, 대가리가. 말 좀 이쁘게…

써...

 

라.

 

민규의 몸이 조수석으로 기울어있다. 뻗어온 손이 목을 넘어 뺨을 감싼다. 선명한 시야에 드리워지는 쌍꺼풀이 진 눈과 눈썹 위를 넘실거리는 갈색의 머리카락에 심장께에서 경보를 울린다. 위협이 몰아친다. 여기서 더 가면 혈관을 막아버릴 거야. 피를 다 말려버릴 거야. 목과 뺨을 감싸는 손의 온도에 살이 타고 녹아내릴 것 같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민규의 두 눈은 들뜬 기류가 가시고 곧 고요한 긴장으로 빛을 내고. 코 끝에 맴돌던 차량 방향제의 향은 이제 민규의 향수 파랗게 발하는 향이고 심장은 엇갈린 박자로 발을 구르고 한 길목으로만 흐르던 감정은 온데 섞여 갈피를 잃고 목울대부터 치밀어오르는 것은 지난날의 껍데기 같은 감정의 부스러기고

 

까딱하다간 또 사랑이고

속수무책으로 내몰릴 테고

매몰될 테고

후회할 거고

그러니까

 

“...민규야. 내려서 뒷범퍼 확인해봐.”

 

천천히 멀어지는 감각들. 민규가 묻는다. 다 찌그러졌겠죠.

 

적어도 나는.

 

 

 

 

 

전원우는 대강의실에 앉아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있다. 인간사회와 중독의 역사. 팔 십명 남짓한 정원의 수업이 어느덧 시험 종료 시각에 임박하여 원우를 포함한 단 다섯 명의 학생들만이 남아있다. 거진 a3 사이즈에 육박하는 답안지가 활자들로 앞뒤 모두 빽빽했다. 전원우는 철학과 갔으면 선방했다. 농처럼 얘기하던 동기들의 목소리가 신경을 건드리다가 불타 사라졌다.

학생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난다. 커다란 강의실엔 소음이 크게 울린다. 답안의 마지막 한 문장까지 모두 적어 내렸다. 끝났습니다. 백 교수의 목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진다.

답안지를 건넨다. 백수효 교수는 얼굴을 마주하며 사람 좋게 웃더니 답안지를 걷어간다. 수고했어요. 원우가 묵례했다. 감사합니다. 강의실을 나섰다.

 

 

 

“사랑하는 우리 경상대 47대 학생회 찌끄래기들. 종강 축하하고 일 년 동안 수고 많았어.”

 

상은이 잔을 든다. 좁은 테이블에 복작하게 모여앉은 학생회 임원들이 잔을 부딪쳤다. 술집 안에 웃음소리가 와르르 쏟아졌다. 누나. 이거 진짜 누나가 사요? 하하. 우리 대균이는 어쩜 이리 의심이 많을까. 그리 의심이 많아서 여지껏 대협부는 어떻게 굴렸니? 야 상익아. 매화수 시켜 매화수 빨리. 상익이 짬뽕탕을 들이키다 말고 부리나케 소리를 지른다. 사장님! 여기 매화수 다섯 병만 깔아주세요! 옆자리 사무부 수린이 귀를 틀어막았다. 아 오빠가 무슨 폭음룡이에요. 그게 뭔데. 있어요 포켓몬 중에. 소란스러운 가운데 점원이 매화수 다섯 병을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민규야. 링겔주 해주라.”

 

총무부 채영이 체크카드를 꺼내 민규에게 건넸다. 민규는 매번 자기만 시킨다고 불평하면서도 주변에서 내밀어오는 카드들을 하릴없이 모아들었다.

 

“형 학생증.”

 

불쑥 내미는 손. 잔을 털어 넣으려던 원우가 조금 놀란 투를 한다.

 

“다른 거 써.”

“빨리요.”

 

안 주면 끝까지 버티고 서있을 것 같아 지갑을 뒤져 학생증을 건넸다. 고집하고는. 매화수병을 카드를 걸친 소주병 입구와 맞물리게 뒤집는다. 차례대로 카드를 뺀다. 밍숭맹숭한 색을 한 두 술이 아지랑이 같이 피어오르며 뒤섞였다. 멍하니 뒤섞이는 액체들을 쳐다보며 잔을 비웠다. 원우야. 옆자리의 기획부 소정이 물었다. 너 휴학해?

 

“확실한 건 아니고 고민 중.”

“그래?”

“어떻게 알았어?”

“상은언니가 너 요새 몰골이 끽하면 휴학할 것 같은 몰골이라 하던데 진짜네? 언니는 취직이 아니라 돗자리를 깔아야겠다.”

 

복채로 강남에 건물도 올릴걸. 원우는 웃었다. 빈 잔에 술을 메우려 소주를 찾았다. 형 거. 그때 앞에 놓이는 잔. 귀엽고 싹바가지 없고 사람도 좋고 사랑도 좋은 민규가 제조한 링겔주. 잔을 받아들어 마셨다. 달고 쓰고 맛이 줏대 없다. 민규는 각자 카드들을 가져가라고 채근하는 와중에 원우의 학생증만은 휴지로 깨끗이 닦아 건넸다. 학생증을 내려놓는 손가락이 증명사진 속 스무 살의 전원우를 향해있다. 숫기도 없고 요령도 없어서 찌르면 찌르는 대로 팩 넘어갈 것 같았던. 그래도 흐물흐물 넘어가는 게 딱해 주변에서 일으켜주면 가식 없이 말갛게 웃던.

 

"근데 왜 휴학하려는 거?”

 

소정이 묻는다. 사람에 뒤섞여 피어오르듯이 웃는 민규를 바라보며 대답한다. 끝을 보든 뭘 하든 마무리해야 될 게 있어서...

 

 

 

민규가 다가온 원우를 올려다본다. 입에도 손에도 담배는 없다. 사람 없는 흡연구역에서 담배 없이 앉아있고 서 있는 두 사람의 입에선 담배 연기 대신 희뿌연 김이 나오다가 흩어졌다. 차 고쳤어? 원우가 물었다. 네. 조지게 혼나고 싹 갈았어요. 민규가 도보 블럭 위 야트막하게 쌓인 눈을 운동화로 긁어냈다. 혹한에도 대학가 술집들은 종강을 맞이한 대학생들로 만원이다. 술집의 불빛이 민규의 얼굴 위로 미끄러진다. 조명을 쬐던 민규가 깔깔해진 목소리로 물어온다. 형 휴학해요? 라고. 날은 갈수록 추워져서 돕바 하나 가지고는 가시 같은 추위를 이겨내지 못한다. 걸치고 있는 돕바를 단단히 여맸다. 보고. 짤막한 한 마디가 입김처럼 흘러나오다 흐트러졌다.

 

“형. 저 내년에 휴학하려고요.”

 

비명인지 환호인지 모를 고성방가가 터져 나오는 저 너머의 술집을 바라보며 묻는다. 왜?

 

“누가 휴학할 생각이라고 해서…”

 

고개를 돌려 벤치에 걸터앉은 민규를 바라본다. 민규의 시선이 곧다. 곧게 원우에게로 돌진하며 꽂힌다.

 

“뭐라도 같이 하고 싶어서요.”

 

민규야.

 

“그래서요. 네.”

 

그 말을 왜 날 보면서 해?

 

민규야. 사람이 성장하려면 어려운 것에 도전해야 한대. 내 성정이 어려운 거 골라다가 스스로 시험해보고 도전해보고 이런 류는 아닌 거 아닌데. 넌 그렇잖아. 넌 꼭 개구멍을 앞에 두고 호랑이굴로 쳐들어가잖아. 내가 숨구멍을 찾아 헤맬 때 너는 꼭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머리를 처박잖아. 내가 굳게 닫힌 성문 앞에 주저앉아 지나가는 세월만 셈할 때 넌 손이 으스러져라 주먹질을 하잖아. 그렇잖아 민규야. 근데 넌 날 종용하지도 않지. 그럼 나는 그게 또 부끄러워서

 

“민규야 내가 고백을 하면."

 

발걸음을

 

“눈감아줄래?”

 

내딛나?

 

"혹시 전에 머리 박고 이상해진 거 아니죠.”

“대가리 멀쩡하던데."

 

민규가 손을 뻗는다. 원우의 소맷자락을 붙잡는다.

 

“형. 저 이거 상은누나한테 다 말할 거예요.”

 

올라가다

 

"어차피 연말이야. 임기 다 끝났어."

 

손을 잡고

 

"데스노트에 이름도 쓸 거예요."

 

손가락이 얽히다가

 

"써. 이왕 쓰는 거 빨간색으로 써. 깜지를 쓰든 삼백 포인트로 쓰든."

 

팔로

 

"우리 쫓겨나도 괜찮아요? 불명예 아니에요?"

 

허리로

 

"군바리를 업으로 삼을 거야? 명예 불명예 따지게."

 

근데 민규야. 네. 왜 웃어? 민규가 부서지게 웃는다. 아 혀엉… 원우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앵앵거린다. 또 비음 섞인 소리. 얘는 원래 이렇게 깜찍한가? 죽을 때도 이잉 죽기 시러잉 이딴 소리 할 것 같다. 그게 또 꼴값같지도 않고 귀여워 죽겠다. 할 수만 있다면 다 받아주고 싶다. 그렇구나. 우리 민규가 죽기 싫었구나. 형이 어떻게, 악마를 모셔다가 계약서에 지장이라도 태워볼까? 진심으로 그래 달라고 하면 좀 착잡하겠지마는.

차게 식은 손으로 민규의 얼굴을 감싼다. 민규야. 네 형. 눈 감아.

 

입 맞추고

 

얽히다가

 

넘어가는

 

 

 

 

 

 

 

 

“퇴회는 그렇다쳐도요.”

 

민규가 말했다. 펜촉이 종이 긁는 소리가 선명하다. 벅벅벅.

 

“우리 죽는 거 아니겠죠?”

 

종강한 경상관 건물은 냉기가 가득했다. 난방이 끊긴 학생회실도 못지않게 냉골이었다. 감기 걸린다며 자기가 입고 있던 학생회 롱돕바를 벗어 원우에게 둘러준 민규는 오 분이 넘게 데스노트에 이름을 쓰는 중이었다. 이름 여섯 자 쓰는데 무슨 오 분이나 걸려? 본인 거 하나 민규 거 하나 총 두 개의 돕바를 어정쩡하게 몸에 두른 원우가 불평했다. 민규는 아랑곳 않고 도자기 빚는 장인마냥 펜을 놀렸다. 죽는 게 무서워? 죽는 건 좀… 우리 사흘 전에 막 사귀기 시작했잖아요. 턱을 괴고 보고 있던 원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다 방법이 있어. 어떻게 모셔오느냐는 고민을 좀 해봐야겠지만...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졌다. 두 사람은 뒤엉켜 입 맞춘다. 스프링이 다 꺼진 원우의 매트리스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른다. 끼익, 끼익, 끼익. 민규의 손이 원우의 후드 아래로 기어 올라온다. 허리를 감싸 잡고 고개를 목에 파묻는다. 귀밑으로 갈색 머리칼이 자박하다. 열 오른 숨이 목 위에서 터진다. 맥박 뛰는 목을 입술이 내리누른다. 들이치는 고온의 감각에 자신을 올라탄 민규의 어깨를 힘주어 잡는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눈을 감고 입을 맞추고. 매트리스는 소리를 지르고. 끼익, 끼익. 여지없이 뜨겁고 건조한 손이 맨 배를 더듬어 올라가고. 끼익 끼익. 다시 열리는 입. 혀가 얽히고. 틈 사이로 고인 숨이 터지고. 매트리스는 여전히.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민규의 허벅지가. 아랫입술을 깨무는 원우의 윗니가. 매트리스는 여전히.

 

카톡.

 

오른손을 겨우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든다. 상은이다.

 

[방명록 쓰냐?]

[하트는 씨발]

 

사진은 민규가 장인정신으로 총 칠 분의 시간을 할애한 데스노트의 첫 장이. 대청소를 마친 회실에는 촉 굵은 마카가 없고 잉크가 다 떨어져 가는 세필의 잉크펜 뿐이라. 빈 틈없이 얇은 심으로 칠한 큼지막한 글씨. 김민규 석 자 뒤 손바닥만 한 새빨간 하트 뒤 전원우 석 자. 저주 서린 데스노트가 순식간에 과도한 러블리 뽕을 주사받는다. 진짜 방명록 같다. 구색 맞출 겸 밑에 학생회 했다감 쓸걸. 민규야. 오래 걸린다고 불평해서 미안. 너는 아트를 하고 있었던 거구나. 사진을 보며 실없이 웃는다. 휴대폰 든 손을 잡아 오는 열감 어린 손. 천천히 아래로 멀어지는 화면. 시야를 독점한 민규가 콧대를 맞대온다. 형. 응?

 

눈 감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