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우는 베타다. 알파와 오메가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베타는 무색무취 무미건조한 취급을 받지만 싫지 않았다. 어릴 땐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알파를 동경하기도, 오메가를 사랑해보기도 했지만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면서 '형질이란 건 특이체질' 정도로 생각하게 됐다. 요즘은 약이 좋아서 러트나 히트사이클도 약한 감기처럼 넘길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인 즉슨 약이 없다면 속된 말로 발정기와 다름 없는 시기를 달에 한 번씩은 맞이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거기다 말이 약한 감기지. 미열이 오르고 온몸이 물에 젖은 듯 무거운, 컨디션 최악의 나날이 매달 찾아온다는 건 제 한 몸 알아서 건사해야 하는 사람에겐 최악의 설정값이나 다름없었다.
평범한 베타 전원우의 꿈은 평범했다. 자신처럼 평범한 베타를 만나 -기왕이면 여성체- 가정을 꾸리고 평범하게 사는 것. 신혼집은 작은 전세로 시작해도 나쁘지 않지. 아무래도 맞벌이 해야 될 테고. 딱히 대단한 직업적 목표나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복학생 전원우가 가진 인생의 목표는 그 정도가 다였다. 너 존나 재미없게 산다. 순영이 술잔을 기울이며 황당하다는 듯 말해도 전원우는 어깨만 으쓱이고 말 뿐이었다. 인생이 꼭 재밌어야 하나. 매일 매순간 재미있으면 그게 인생인가. 드라마지. 뭐,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 전원우의 인생을 순식간에 바꿔놓은 게 김민규였다. 우성 알파에, 키도 크고 잘생겨서 교내 유명인사라고 했다. 전원우는 열심히 놀지도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적당히 학교를 다녔기에 그 명성을 몰랐겠지만 미대 우성알파 걔 김민규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페이스북 무슨무슨대학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지엔 하루 걸러 하나씩 김민규에 대한 사연이 올라왔고, 그것도 모자라 같은 대학가를 공유하는 타 대학 페이스북 페이지에도 무슨 대학 우성알파 누구 너무 잘생겼다는 구구절절문이 즐비했다. 제보글 주인공의 99.9%는 당연히 김민규였고, 급기야 김민규 손 한 번 잡아보겠다고 스토커짓을 하는 오메가까지 나왔다. 티비 뉴스까진 아니더라도 작은 인터넷 신문의 소소한 낚시 기사쯤은 됐던 사건을 전원우는 몰랐다. 워낙에 주변에 관심이 없는데다 대상이 알파며 오메가라면 더 그랬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가 전원우의 형질 인간들에 대한 기본 태도였다.
"저기요."
"…저요?"
"베타인 척하면 제가 그냥 넘어갈 줄 아시나 본데, 한두 번도 아니고 이러시면 곤란해요. 지난번 그 사람은 경찰서 보냈거든요?"
"예?"
그러니까 전원우가 김민규의 자취방 앞에 쭈그리고 앉아 문이 열리기만 기다린 건, 소문의 우성알파 김민규를 스토킹하거나 얼굴 한번 보자고 사생짓을 한 게 아니라 권순영네 집 호수를 헷갈렸기 때문이었다. 앞선 사건으로 한껏 예민해진 김민규 눈에 마스크 끼고 남의 집 문 앞에 쭈그려 앉아 개발시발 욕을 하고 있는 전원우는 충분히 수상해 보였겠지만 전원우도 전원우대로 무진장 억울한 상황이었다.
"또 이런 짓 하면 당신도 경찰서 보냅니다?"
"예?"
"예? 말고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요?"
"아니 제가… 뭘 했다고 이러세요?"
"지금 저희 집 앞에서 저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아닌데요? 당신이 나와서 놀란 건 저거든요?"
전원우가 대체 뭐 하는 건지 전화도 안 받는 권순영을 속으로 백 번쯤 죽였을 때 앞집 문이 열렸다. 머리카락이 흠뻑 젖은 권순영은 어깨에 수건을 두른 채였고 눈치 빠른 김민규는 전원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사건의 전말을 알아차렸다. 아. 나 도끼병 짓 했구나.
“너 거기서 뭐 하냐? 싸워?”
세 사람 사이에 흐르던 어색한 침묵을 깬 건 권순영이었다.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전원우가 일언반구 말도 없이 권순영네 집으로 들어가 버린 후에야 김민규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스토킹 사건으로 예민해져 있긴 했지만 죄 없는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간 건 잘못이 맞았다. 하지만 전원우가 황당한 만큼 김민규도 할 말이 있었다. 그러게 왜 사람 오해하기 딱 좋은 꼴로 남의 집 초인종을 눌러대고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요. 딱 봐도 집 호수 착각한 건 그 쪽이구만. 상황을 곱씹다 보니 아주 약간의 미안함까지 빡침으로 변해서, 김민규는 그날 밤 잠을 못 잤다. 간죽간살. 간지에 죽고 간지에 사는, 타고난 하드웨어와 형질의 우월함으로 좌우명대로만 살아온 김민규 인생 최악의 쪽팔림이었다. 고작 이게? 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사실이었다. 먹이사슬 꼭대기에서 내려와 본 적 없는 김민규는 아이러니하게도 남에게 피해를 준(비록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했다 할지라도) 상황을 견뎌낼 면역이 없는 인간이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며칠 지나지 않아 전원우와 김민규는 다시 만났다. 전원우가 알바하는 학교 후문 카페에서였다. 알파와 베타. 표면상으론 없어졌다고 하지만 실은 아직 만연한 알파-오메가-베타의 계급 피라미드를 재현하는 건지 김민규는 손님, 전원우는 가련한 노동자인 상황이었다. 전원우는 군대에서 익힌 상명하복 노동자 자아를 십분 발휘해 김민규에게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았으나 김민규는 그 미소를 받아들일 감정 상태가 아닌 모양이었다. 아아메요. 한 마디에 가까운 한 문장을 툭 던지고 돌아선 김민규 뒤통수에 대고 전원우는 샷 내리는 컵을 던질까 말까 고민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지막하게 욕을 읊조리더니 크레마 다 뒤진 탄 맛 나는 샷으로 아아메를 제조하는 전원우에게 알바 동료가 물었다. 너…저 사람 알아요? 동료는 오메가였고 설렘까지 담긴 질문이었지만 전원우는 간만에 느껴보는 순수한 분노에 타인의 감정까지 살필 여력이 없었다.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르고.”
“싸웠어요?”
“쟤가 시비 걸었으니까 싸운 건 아니겠죠? 저는 선량한 피해자.”
“싸울 정도면 친한가 보네요?”
“싸운 거 아니라니까요.”
“에이.”
에이는 무슨. 에이는 네 성적표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게 에이고. 전원우는 사장님이 맛봤다면 경을 쳤을 사약 맛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레귤러 한 잔 나왔습니다를 다섯 번쯤 외쳤다. 타성에 젖은 간호사처럼 기묘한 높낮이로 일곱 번째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레귤러 한 잔 나왔습니다를 외칠 때까지 김민규는 오지 않았다. 이 새끼 가지가지 하네? 알파나 오메가에게까진 아니더라도 뭇 베타들에겐 청순, 섹시, 지적임까지 커버 가능한 껍데기로 소소하게 인기 있었던 전원우는 이미지와 인지부조화 오는 욕을 되는대로 퍼붓고 있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저 개망나니같은 놈은 저잣거리에 매달아놓고 비오는 날 먼지 날 때까지 두드려 패야 한다느니 어쩌구 하는 말을 들었다면 라비앙뜨 카페는 욕쟁이 청년 카페로 재개업 할 수준이었다.
“손님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다고-습니다.”
인내심에 한계가 온 전원우가 반쯤 이성을 잃고 나왔다고요-라고 말할 뻔했을 때야 김민규는 주문한 커피를 찾으러 왔다. 유리컵 표면엔 이미 물방울이 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똥 싸고 왔나? 전원우의 원초적인 궁금증은 거의 곧바로 해결됐다. 김민규가 가는 길마다 따라 붙는 눈동자들. 수군대는 사람들. 전원우 귀에까지 들릴 만큼 의미 없이 커다란 귓속말 (“진짜 잘생기긴 했다”) 그리고 김민규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다가가 말을 거는 오메가임이 분명한 선녀 같은 남자애까지. 확인사살로 알바 동료는 전원우가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던 정보까지 알려주었다.
“저 사람 우리 가게 들어온 다음에 번호 세 명한테 따였어요.”
김민규만큼은 아니더라도 먹고 살만큼은 돌아가는 눈치와 논리력을 동원한 결과 전원우는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커피 찾으러 안 왔나?”
“네. 사이비한테 걸린 줄 알고 쫓아내러 갔더니 엄청 시달리고 있더라고요.”
“대단하네요.”
여러모로…. 편한 차림에 노트북에다 책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걸로 봐서 공부하러 온 것 같은데 김민규는 도무지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김민규는 노력했지만 세상이 협조하지 않았다. 컵을 닦으며 김민규를 바라보던 전원우는 ‘그럴 수 있지’가 말버릇인 사람 답게 금세 김민규를 이해하게 됐다. 그때도 누구 경찰서 보냈다고 하지 않았나? 이 정도로 시달리고 집 앞까지 사람 찾아오면 미칠 만도 하겠네. 아니 근데 알파 오메가 쟤네는 원래 저런가? 잘생겼으면 사람 졸도할 때까지 들이대고? 맹하게 컵을 닦던 전원우가 김민규를 진심으로 불쌍해하기 시작했을 때쯤 김민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눈 밑이 시커먼 게 컨디션도 안 좋아 보이는데 카페에 들어온 직후부터 은근한 페로몬 샤워에 시달려서 이성을 잃은 모양새였다. 핏줄 선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린 김민규는 크게 한숨을 내쉰 다음 멀쩡하게 자기 할 일 하고 있던 전원우를 가리켰다. 그리고….
“저 저 사람이랑 사귀니까 그만 좀 하세요!”
네? 뭐라고요? 한 박자 늦게 김민규가 자신을 가리킨다는 걸 알아챈 전원우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대가리를 굴렸다. 사귄다고요? 누구랑 누가요? 님이랑 제가요? 이래서 시발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것들은 안 된다. 뚱딴지같은 사태에 카페는 일순 고요해졌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전원우를 향했다. 전원우는 닦던 컵을 살포시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아닌데요.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순간 김민규의 잘난 얼굴에 떠오르던 표정을 전원우는 관짝 뚜껑 닫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김민규에게도 사정이 있었다. 1. 최근 들어 더 심해진 수군거림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플러팅에 지쳐 있었다. 2. 심지어 과제 러쉬 기간이었다. 3. 며칠 전 전원우와 있었던 사건이 본인 생각보다 훨씬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4. 근데 카페인 빨러 카페 왔더니 전원우가 있고 사람들은 공공장소인 걸 망각하고 페로몬 풀면서 번호 따러 왔다. 5. 좆같다…. 라는 일련의 이유였다. 그렇다고 대뜸 얌전히 일하던 알바생 전원우가 자기 남친이라며 온 카페에 대고 구라를 깐 게 잘했다는 건 아니다. 다만 김민규가 미친놈은 아니고 많이 힘들어서 그랬다는 거다.
전원우를 가리키며 말한 건 큰 의미 없었다. 전원우 옆에 예쁘장한 오메가 알바생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내 남친이다, 그래서 이 카페에 공부하러 온 거라고 던졌어도 될 일이었다. (타인의 동의를 받지 않고 서동요 짓 하는 건 상대가 누구든 하면 안 된다) 근데 자리에 앉은 후 계속 뒤통수가 따가웠고 따가운 눈빛을 따라가니 전원우가 있었고. 며칠 전 김민규 인생 최악의 쪽팔림 사건의 잔상인지 그 순간 전원우만 머릿속에 꽉 차서… 손이 먼저 나갔다.
불행히도 전원우의 ‘아닌데요.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는 큰 효과를 얻지 못했다. 되려 김민규와 함께 뫄뫄대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지에 이름을 올리는 처지가 됐다. 그 미대 알파분 애인 있으신 것 같던데. 후문 카페 알바생이랑 사귄다고 하던데. 싸우고 헤어졌다던데. 베타만 만난다던데…. 이름을 제외한 전원우의 모든 신상이 페이스북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 미대 알파 김민규가 만난다는데, 전원우가 그날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