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 농고 생활기
2021. 2. 12. 14:42

 

 

 

 

 

사람마다 고백하는 방법은 다르다. 누구는 달콤한 말로 편지를 써서, 누구는 자신의 재력을 뽐내면서, 누구는 전 세계인들 앞에서 사랑을 전한다. 도시 한복판에 있는 농고 인싸인 나 역시도 온갖 방법의 고백을 받아봤다. 농기구를 리본으로 묶어 선물이라고 주면서 하는 고백, 내가 사과 따다가 더워하면 소 여물 통에 물 받아와 주면서 하는 고백, 본인이 이 학교 이사장 딸인데 교장 자리 줄 테니까 사귀자는 고백까지. 언젠가 기네스북에 올라도 이상하지 않은 고백들만 골라서 받아봤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헬기를 몰고와서 낙하산 타고 뛰어내리며 고백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나 너 좋아함.”

 

밭에서 감자 캐다가 14년 지기 부랄남사친에게 수줍음이라곤 개나 줘버린 고백을 받은 상황은. 내 머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였다. 아니, 정확히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몰랐다.

 

“나랑 결혼하면 감자 평생 먹을 수 있는데.”

 

심지어 감자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무심한 표정으로 결혼을 강요하는 고백을.

 

 

 

농고 생활기

농고 라이프 위드 러브

 

 

 

김민규 인생 어언 18년 차 드디어 남자한테 고백받다. 나 남자한테도 먹히는 얼굴인가? 아니 그러면 전원우가 게이야? 그래 게이일 수 있지. 근데 왜 하필 날? 책상에 이마를 박으면서 생각해봐도 답이 안 나왔다. 옆에서 지켜보던 권순영이 미친놈이라며 욕 해왔지만 그대로 내 오른쪽 귀를 거쳐 왼쪽 귀로 빠져나갔다. 이석민한테 필통으로 뒤통수를 맞고 난 후에야 발개진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들자마자 언제 왔는지 권순영 책상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전원우하고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 얼음팩 갖다 줄까? 하고는 눈 휘어지게 웃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전원우를 보고 있자니 억울해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정말로,억울해서.

 

세수하고 거울을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작년 여름 36도 되는 날 3시간 동안 트랙터 위에 앉아있었을 때도 이 정도로 빨갛진 않았다. 이러다간 억울해서 온몸이 붉어진 채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전원우가 있는 교실을 지나쳐 그대로 밖으로 나왔고 금방 후회했다.

 

“얼굴 봐라. 옆에 토마토 있어도 구별 못 하겠어.”

 

김토마토로 이름 바꿔라. 교장도 안 웃을법한 농담을 하고는 깔깔대며 웃었다. 너 나 따라다니냐? 내가 굳이 귀찮게 뭐 하러 그러겠니. 한마디를 안 지는 전원우를 보며 환멸 나는 표정을 지었더니 큰 소리로 웃는다. 또 얼굴이 뜨거워졌다. 교실로 돌아가려는데 내 팔을 끌어당겨 지 옆에 앉혔다. 얜 정말로 아무 감정이 안 드나. 그때 나한테 고백도 해 놓고.

 

“넌 나 좋아한다고 고백했으면서 내가 편해? 난 대답도 안 했는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속마음에 그대로 입을 벌린 채 얼었다. 아 그러니까 내 말은. 당황해서 변명하는 나를 보며 전원우가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말했다.

 

“너도 나 밀어내지 않는 거 보면 싫진 않은 거 아니야? 그리고 내가 감자 평생 먹게 해준다니까. 이 정도 조건이면 나한테 장가와야지.”

 

이번엔 코까지 찡긋 거리며 웃는다. 진짜 저 또라이 새끼. 저렇게 웃으니까 내가 분해서 얼굴이 빨개지지.

 

 

전원우는 생각보다 더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내 빨개진 얼굴을 본 이후로는 숨 한 번 쉴 때마다 결혼하자를 남발해대며 도발했다. 문제는 권순영과 이석민도 장난인 줄 알고-얘네 둘은 내가 저 새끼한테 고백받은 것을 모른다-나랑도 결혼하자 민규야 거리며 난리를 피우는 것이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유명했던 내 이름 석 자는 전교에서 날리게 되었고 온실에 갔다 오기만 하면 책생 위에 감자가 놓여있었다. (날 좋아하는)14년 지기 부랄친구 덕분에 에코백까지 들고 와 감자를 담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쯤에서 드는 생각. 전원우 나 안 좋아하는 거 아니야?

 

물론 얘가 하는 행동을 보면 날 좋아하기는 하는 것 같다. 이석민은 뭐가 달라졌냐며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고 계속 물었지만 암튼 미묘하게 달라졌다. 전에는 내가 무슨 스킨십을 해와도 그냥 받아주었고 지금은,

 

“나랑 결혼할 거야?”

 

시발. 너무 많이 달라졌다. 얜 정말 날 지독하게 좋아하나 보다.

 

 

한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밭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왔다. 오랜만에 비를 맞을 생각에 들떴다. 이론 수업을 끝으로 종이 울리자마자 우산도 없이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다. 이석민이랑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빗물을 받아먹었다. 권순영이 너네는 18살이나 먹고 그런 짓을 하고 싶냐며 한 소리 했지만 못 들은 체 하고 이십분을 더 뛰어다니다가 학교를 나섰다. 자기 집에서 대충 몸이라도 닦고 가라는 전원우의 말을 거절하려 했지만 권순영이 계속 잔소리 해대서 하는 수없이 따라갔다.

 

“너네 이제 이러다가 감기 걸린다.”

“나 절대 감기 안 걸리는 거 않잖아. 이석민이면 몰라도.”

“되게 건강한척하네. 너 작년에 식중독 걸려서 앓아누운 거 기억 안 나냐? 그때 전원우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쓸데없이 기억을 상기시키는 이석민한테 수건을 던지며 째려봤다. 그 모습을 보던 전원우가 안경의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그때 진짜 힘들었다고. 나랑 결혼하려면 건강해지는 게 우선이겠다 민규야.”

 

약간 젖은 머리를 하고 입꼬리를 올려 보인다. 김민규 놀려 먹는게 재밌긴 하지. 이석민의 깐족대는 말에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안경을 고쳐 쓰는 전원우만 보였다. 화끈거림이 느껴졌다. 열 기운이 있는 것하고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계속 뜨거워지는 게 분한 감정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전원우가 계속 거슬렸다. 전에 고백하고 나서 신경 쓰이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거슬림이었다. 걔가 아무렇지 않게 결혼하자라는 말을 할 때는 진짜 죽을 것 같았다. 전원우는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 오케이 해줄 거냐며 징징거렸다. 지금 상태면 백 번이고 해 줄 수 있는데. 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확신이 없나. 내가 얘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전원우의 웃는 모습만 보면 빨개지는 얼굴이 아니라고 증명해줬다. 거기에다가 요즘은 걔가 무슨 짓을 해도 귀여워 보였다.감자를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도, 결혼하자고 말하는 것도, 밭에 쪼그리고 앉아 무를 뽑는 것도. 심지어 사다리에 올라가 전정하는 모습을 볼 때면, 섹시하기까지 했다. 안다. 나도 내가 단단히 돌아버린걸. 하지만 고2가 되도록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고 고백만 주구장창 받아본 남학생이 뭘 알겠는가. 원래 좋아하는 상대는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그리고 전원우도 나를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해 왔다는 것을.

 

 

주말 동안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다. 내가 전원우를 좋아하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전원우도 나를 좋아한다.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질질 끌며 안 받아줘서 이미 마음이 식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없진 않다. 그래도 그의 꾸준한 청혼 덕분에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남이 보면 그냥 네가 결혼하자는 말에 좋다고 답하면 되는거 아니야? 하면서 답답해할 문제를 밤까지 새가며 이면지에 휘갈겼다. 그래서 나온 결론. 내가 먼저 고백한다. 종이를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느낀 것은, 내 자존심 때문에 이 지경까지 온 것은 아닐까.

 

 

오늘은 꼭 전원우에게 고백한다. 이 다짐을 농약 뿌리면서 하는 게 좀 모양 떨어지지만 마음만큼은 비장했다. 평소와 다르게 말이 없는 나를 보고 권순영은 김민규가 아니라며 중얼거렸고 이석민은 감자를 쥐여주었다. 전원우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 이마에 손을 대뜸 짚었다. 그러고는 열은 없는데 하면서 마스크 너머로 작게 말했다. 아, 나 얼굴 또 빨개졌겠다. 표정관리도 못 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자 전원우는 마스크를 내리고 말했다.

 

“너 장화 신고 농약 뿌리는 것도 귀엽다.”

 

나 죽으라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하네. 진짜 미쳐버리겠다.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전원우와 자연스레 감자밭 쪽으로 빠졌다.쉬는 시간 다 끝나간다는 전원우의 말에 한 바퀴만 돌다 들어가자고 졸랐다. 전원우는 킥킥 웃으면서 내 손에 끌려왔다. 바람이 옅게 불어왔다. 근처 나무 아래에 자리 잡고는 옆자리를 두드렸다.전원우는 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누르면서 앉았다. 머리 다 흐트러졌네. 전원우는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확 달아오르는 얼굴을 진정시키기 위해 마른 세수를 하고 전원우를 바라봤다.

 

“원우야.”

“새삼스럽게 이름을 불러. 왜?”

“너 아직도 나 좋아해?”

 

내가 이름을 부르자 전원우는 어깨를 살짝 밀며 민망한 듯 웃었다.그러다 내가 진지한 얼굴로 물어보자 안경을 벗고 나를 봤다. 그 순간 불안감이 밀려왔다. 내가 계속 가지고 생각이 터져버렸다. 나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던 전원우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민규야. 차분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전원우를 빤히 쳐다봤다. 나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귀가 약간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 너한테 엄청 진심인데.”

“......”

“감자 평생 먹게 해주겠다는 것도 장난 아니야.”

“......”

“너가 나 피할 때까지 난 포기 안 할 건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은 해봐야지.”

 

전원우 특유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보다 바람이 약해졌다. 전원우의 머리카락이 내 눈앞을 왔다 갔다 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전원우의 머리를 한 번 쓸었다. 전원우는 또 민망한 듯 어깨를 밀었다. 이번엔 좀 세게. 내가 중심을 잃고 옆으로 넘어지자 당황하며 일으켜줬다. 계속 웃음이 났다. 전원우는 뭐가 좋아서 웃냐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야 말도 미안한 느낌으로 해 봐. 표정 하고 너무 다른 거 아니냐.”

“아니 너가 먼저 머리 쓰다듬었으니까 그렇지. 이게 내 탓은 아니잖아?”

 

아 진짜로 한 마디를 안 져 아주 그냥. 원래대로라면 얄미워야겠지만 이미 전원우한테 미쳐버린 나는 마냥 웃겼다. 웃음을 안 멈추는 나를 보며 전원우는 이거 물어보려고 부른 거냐며 약간 짜증 냈다.더 놀리고 싶었지만 이러다간 머리를 한 대 맞을 것 같아서-전원우는 자기가 좋아하는 애라고 봐주는 거 없다-진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에 전원우가 그랬던 것처럼 일어나려는 전원우의 팔을 잡고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전원우는 당황하면서 빠져나오려고 힘을 줬다. 물론 나한테 먹힐 일은 없었다. 전원우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나한테 고백할 때도 멀쩡했던 사람이 내가 먼저 끌어안았다고 부끄러워하자 나 역시도 뜨거워졌다.

 

“원우야.”

“......”

“원우야아.”

“...왜.”

“전원우.”

“아 왜 자꾸 불러. 할 말 있으면 빨리해.”

“우리 졸업하고 귀농하자.”

“어?”

“너가 나 감자 평생 먹게 해준다며. 그럼 시골 내려가서 밭 하나 장만하는 게 낫지 않겠어?”

 

전원우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눈이 마주치자 내가 전원우가 웃듯이 코를 찡긋 거리며 웃어 보였다. 전원우는 내 무릎 위에서 일어나 나를 끌어안으며 미치겠다만 반복해서 웅얼거렸다. 내가 앞머리를 쓸어 넘기자 고래를 들어 찡긋 거리며 웃었다.

 

“내가 말했지? 너랑 나랑은 결혼하게 되어 있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