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어둠이 내리지 않는 밤 上-(2)
2021. 2. 12. 14:40

 

 

 

 

 

“이번 대청소는 다음 주에 하자. 아무래도 이지훈이 안 되겠대.”

 

 

거실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지훈이 손을 들어 보인다. 미안. 다 죽어가는 목소리에 다들 동의를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도 빠지면 안 되는 대청소에 지훈은 과제 때문에 며칠 더 밤을 새야 한다고 했다. 아직 대청소까지 안 해도 될 거 같긴 해요. 집을 둘러보던 찬이 한마디 거든다. 이번 학기에는 집에 사람이 있는 시간이 많아서 조금씩 나눠서 청소를 했더니 나름 깨끗했다.

 

 

“떡볶이 먹을래여?”

 

 

냉장고를 뒤지던 찬이 고개를 빼꼼 든다. 난 좋아. 순영이 손을 번쩍 들고, 원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오. 소파에 누워 있던 지훈도 손을 흔든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꺼내어 손질하는 동안, 한번도 열리지 않은 1인실을 가만히 쳐다 봤다. 들어온 지 몇 주나 된 것 같은데 그 날 이후로 얼굴을 본 기억이 잘 없다. 당연히 말해 보지도 않았고.

 

 

“야, 근데 너 1인실 들어온 사람 이름은 아냐?”

“김민규?”

“아네? 너랑 통 못 만나서 이름도 모를 줄 알았더니.”

“대학생이래?”

“몰라. 그러지 않을까?”

“근데 이렇게나 집에 안 붙어 있어?”

“그러게.”

 

 

하우스 메이트들과 민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누구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아는 거라곤 이름과 나이. 학교가 어디인지 뭘 전공하는지 본가는 어디인지 무슨 사연으로 여기에 들어왔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민규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사람도 없었다. 넌 본 적 있냐? 소파에 널브러진 지훈에게 물었지만 알게 뭐야. 하는 대답만 들려온다. 그래, 정말 알게 뭐야. 하지만 이 쉐어 하우스에서는 통하지 않은 슬로건이었다. 이 험난한 서울바닥에서 함께 잘 지내보자, 가 어울리는 곳이었으니까. 개인 플레이를 존중하지만 기본적으로 알고는 지내는 것이 룰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보호자니까.

 

 

“근데 우리 학교는 아닌 거 같던데. 본 적이 없어.”

“그러게영. 저보다 형이니까 그래도 3학년이거나 4학년인데, 전 입학하고 본 적도 없어여.”

“다른 학교 다니겠지.”

“그런가? 근데 이 주위에는 우리학교 말고는 다 멀리 있지 않나.”

 

 

확실히 본인이 아니면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만 쌓여가고 있었다. 보글보글 끓는 냄비로 떡볶이 냄새가 솔솔 났다. 일주일에 한 번 쉴 수 있는 날이었다. 그래도 해가 지면 다시 일을 하러 가야 했지만. 여유로운 낮이 어색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거실에 앉아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런 시간만큼은 어딘가에 쫓기거나 숨이 차거나 하지 않았다.

 

 

“형형, 밑에 받칠 것 좀.”

 

 

맛있는 냄새가 나더니 가스 불을 끈 찬이 냄비를 들고 식탁으로 걸어왔다. 야 이지훈 얼른 와! 옆에 있던 받침대를 툭 놓으며 이야기 했더니 좀비 하나가 비척비척 걸어와 앉는다. 얼른 먹어라. 손에 포크를 쥐어주자 눈은 감고 있는데 열심히 입 안으로 떡을 넣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람이 들어왔는데 환영회 좀 해줘야 하지 않아?”

“해 줘. 나야 지금 밖에 시간이 없는데, 낮에 하면 좀 그렇지 않나.”

“야, 해주려고 해도 집에 없는데 어떻게 해주냐.”

“막내야, 니가 보면 좀 이야기 이렇게 저렇게 해 봐.”

“들을까 모르겠어영.”

 

 

그나마 어리고 서글서글한 찬이 넷 중에서는 말을 제일 많이 해봤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름과 나이 밖에 몰랐다. 환영회라고 하기엔 거창하고, 같이 앉아 밥도 먹고 술도 한 잔 하는 게 이 쉐어 하우스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김민규는 그게 좀 어려웠다.

 

 

“야, 속 시끄러워. 떡볶이나 먹자.”

 

 

첫 인상이 안 좋게 박혀있는 지훈은 인상을 팍 찌푸린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사는데 계속 안 좋은 상태로 지내는 것도 분명 서로에게 좋지 않을 거다. 떡 하나를 오물오물 물고 민규의 공간인 1인실 방문을 계속 쳐다 봤다. 뭐 하는 사람이길래 학교도 모르고 집에 붙어 있지도 않지?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넘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나 이상한 일을 하거나 나쁜 사람이진 않을까.

 

 

“…….”

 

 

그 새벽의 민규와 나눴던 짧은 대화가 생각났다. 아니겠지. 그런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들이 드글드글한 쉐어 하우스에는 들어오지 않았겠지.

 

 

“너 오늘 오후에 나가지? 레스토랑?”

“엉.”

“몇 시에 들어와?”

“글쎄, 막차 안 놓치고 타면 집 오면 새벽 한 시쯤 되겠다.”

“내일은 학교 가고?”

“엉.”

“와서 나 자고 있으면 깨워라. 라면 먹게.”

 

 

오랜만에 먹는 새벽 라면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있을 수업 과제도 해야 하니까. 콜. 요즘 새벽에 라면을 안 먹었더니 사두었던 게 제법 많이 남았다 뭐 먹을까. 몇 시간 뒤에나 먹을 라면 생각에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다. 

 

 

 

 

 

 

 

 

 

 

 

 

다녀 와.

 

모처럼 셋이 집에 있는다고 하여 마당까지 원우를 배웅한다. 잘 다녀와영! 찬이 두 손을 붕붕 흔들며 인사하고 억지로 햇빛이라도 봐야 한다며 끌려 나온 지훈은 인상을 찌푸리고 손을 흔들었다. 돈 많이 벌어와, 원우야악! 장난스러운 순영의 말에 픽 웃었다. 에휴, 그러고 싶냐. 옆에 있던 지훈이 등을 짝 때리고 들어간다.

저녁 아르바이트는 싫었다. 차라리 아침 일찍 갔다가 돌아오는 게 좋았지만 심야라 수당도 더 쳐줘서 나름 쏠쏠했다. 게다가 레스토랑이라 기본 시급도 좋고 가끔 운이 좋으면 팁을 받기도 했다. 막차를 놓치면 그날 일당의 반이 택시비로 날라가긴 했지만. 어, 버스 왔다. 레스토랑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가 눈 앞으로 지나간다. 오늘은, 출근길부터 뜀박질이었다.

 

 

 

 

 

 

 

 

 

 

 

 

주말 저녁은 사람들이 늘 많았다. 이 많은 사람들은 평일에 열심히 살고 쉬러 온 사람들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제 자신과 비교하게 되었다. 평일에도 열심히 사는 전원우는 주말에도 열심히 살아야 했다. 누군가가 쉬라고 해줘도 쉬는 방법을 몰라서, 가슴이 뜨끔거릴 정도로 불안해서 쉬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좋은 밥을 먹고 좋은 곳에 가는 것이 어색해서 견디기 힘들기도 했다. 

 

 

“이 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홀 매니저의 목소리에 물을 따르던 원우가 힐끔 쳐다 본다. 

 

 

“…….”

 

 

익숙한 얼굴.

너무나 익숙한 얼굴인데 그의 이름을 떠올리기엔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김민규. 

 

 

“어!”

 

 

김민규를 보느라 따르고 있던 물이 넘쳤다. 죄송합니다. 얼른 주전자를 세우고 허둥지둥 사고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다행스러운 반응에 얼른 수건을 꺼내어 탁자를 닦았다. 원우. 홀매니저가 원우를 부른다. 

 

 

“이거 나 주고, 지금 들어온 6번 테이블 담당해.”

“네.”

 

 

새로운 물이 가득한 깔끔한 주전자를 내어준다. 6번 테이블을 바라 보니 김민규와 예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애인인 듯 간단한 스킨십도 어색하지 않고, 둘이 주고 받는 대화들도 연인들의 그것이었다. 유리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주문 하시겠습니까?”

“여기는 뭐가 맛있어요?”

 

 

당황하지도 않은 듯 오히려 원우의 얼굴을 빤히 보며 김민규가 그런다. 아무렇지 않게 추천 메뉴를 알려주자, 원우가 했던 말을 똑같이 여자에게 건넨다. 여자의 허락이 떨어지자 코스를 주문하면서 와인 또한 추천한다. 어울리는 레드 와인을 말해주자 더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메뉴판을한 손으로 건넨다. 재수없어.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툭 들었다. 아니다, 그러지 말자. 여기에 오면 하우스 메이트들도 다 손님들이니까.

 

요리가 나올 때마다 서빙은 원우 담당이었다. 에피타이저부터 후식까지. 여자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김민규에게 눈을 떼지 못했고, 김민규 또한 그걸 잘 아는 듯 가끔씩 앞머리를 매만져 주며 환심을 사는 행동을 했다. 꼴 보기가 싫다고 해야 하나. 냉정하게 생각하고 제 할 일만 하면 되는데, 자꾸 신경이 쓰였다. 집에선 그렇게 개차반으로 굴더니, 여자 앞에서는 멋있는 사람인 척. 그런 모습에 어이가 없이 입 꼬리 한 쪽이 올라가려는 걸 겨우 끌어 내렸다. 그리고 어딘가 자꾸 안심하게 됐다. 적어도, 적어도. 난 김민규처럼 생각 없이 사는 놈은 아니구나.

 

후식으로 시킨 커피와 딸기 케이크까지 서빙이 끝나자 안도의 숨을 후 내쉬었다. 그래도 이것만 끝나면 된다. 

 

 

“…..”

 

 

민규와 눈이 마주쳤다. 얼른 달려갔다. 빌즈 좀 주세요. 네. 카운터로 뛰어가 빌즈를 받아 식탁 앞에 내려 놨다. 얼마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일어나더니 잠시 멈칫한다.

 

 

“너무 잘해주셔서,”

“…….”

“덕분에 편하게 식사했어요.”

 

 

자켓 안 쪽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현금을 꺼낸다. 신사임당이 그려진 지폐 두 장. 탁자에 내려 놓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가만 보기만 하는 원우에게, 받아요. 김민규는 지폐 두 장을 들어 건넨다. 고맙습니다. 두 손으로 받으며 인사를 꾸벅 하는 모습이 갑자기 토악질이 날 정도로 짜증이 솟았다. 자신을 보호하고, 합리화 하기 위해 한심하게 생각했던 김민규에게 물질적인 것으로 갑과 을이 확연하게 나뉘어지는 순간이었다. 자신에게는 없는 경제적인 여유. 

 

익숙하게 여자가 팔짱을 끼고서 출구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일하자. 지폐 두 장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버스 어플로 확인한 막차는 오늘도 뛰면 딱 맞는 속도로 오고 있었다. 먼저 갈게요! 정류장을 향해 또 열심히 달렸다. 그 사이 지나친 거 아니겠지? 열심히 어플과 버스 도착 정보 안내판을 번갈아 보다 저 멀리 오고 있는 버스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오늘은 유독 더 지친다. 손목도 아픈 것 같고. 버스에 올라타 늘 앉는 뒷자리에 앉았다. 팔목을 살살 돌리다 말고 지훈의 카톡이 생각났다. 올 때 메로나. 라면은 집에 있고 간식거리나 좀 사서 가야겠다. 그러다 문득 바지 안에 있는 지폐 두 장이 느껴졌다. 꺼내자마자 아까 그 재수없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은 일하는 중이 아니니까, 재수없다는 생각을 마음껏 해야지. 재수없어.

 

돈 많은 집 아들내미가 맞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1인실도 살고 이런 데에 밥도 먹으러 오고 그러지. 10만원을 벌려면 하루 종일 일해도 될까 말까인데, 김민규에게는 이 돈이 그저 팁으로 줄 수 있는 금액인 듯 했다. 덜컹거리는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반짝반짝 빛나는 도시에서 괜히 이상한 곳에서 기가 죽는다.

 

 

 

 

 

 

 

 

 

 

 

 

수고하세요. 버스에서 내려 일부러 일하는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지금 시간에는 사장님이 카운터를 보고 있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할 겸. 아이스크림 한 아름, 간식거리를 샀더니 폐기를 앞둔 도시락도 몇 개 얹어 줬다. 감사합니다. 아이스크림이 녹을까 헐레벌떡 집까지 뛰어왔다.

 

 

“왜 그렇게 뛰어요?”

 

 

대문 문고리를 여는 순간, 김민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헐떡이는 저와 다르게,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지 차분한 김민규였다. 

 

 

“몇 시에 마치길래 지금 와요?”

“왜요?”

“거기 마감 때까지 해요?”

“네.”

“택시 타고 오지. 내가 오늘 팁 많이 줬잖아요.”

 

 

악의 없는 말투. 가끔은 이런 말들에 찔리는 제가 너무 싫었다. 그만큼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쳤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으니까. 김민규에게는 없어도 될 10만원, 택시비로 허망하게 날려도 되는 그 돈은 자신에겐 너무나 어려운 금액이었다.

 

 

“그걸로 이거 샀어요.”

“야식? 나도 먹어도 돼요?”

“아까 밥 먹었잖아요.”

“제가 배가 커서. 거기 코스 요리라서 조금씩 나오잖아요.”

 

 

눈치도 없이 쫑알거리며 원우 뒤를 따라온 김민규는 자연스럽게 거실 식탁에 앉는다. 어울리지 않았다. 평범한 쉐어 하우스에, 브랜드 옷과 주얼리를 하고 있는 김민규는. 어디를 봐도 어울리지가 않았다. 사온 아이스크림은 얼른 냉동실에 넣고 지훈의 방을 노크했다. 라면 먹자. 거실로 나오던 지훈의 발걸음이 툭 멈춘다. 안녕하세요. 생글생글 웃으며 식탁에 앉아 있는 김민규 모습에 얼떨떨한 듯 예에, 대충 대답을 하고 라면이 있는 서랍장을 연다.

 

 

“야 권순영이랑 이찬도 있는데 나오라고 해.”

“그래? 없는 줄.”

 

 

방문을 다 두드렸더니 찬과 순영이 거실로 나왔다가 김민규 얼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다 모였으니까 환영회 하자.”

“와, 환영회도 해줘요?”

“그냥 술 먹고 밥 먹고 하는데 형이 안 보여서요.”

“아, 요새 좀 바빠서.”

 

 

바쁘다는 말에 물음표를 띵띵 머리 위로 새겼다. 그럼 음식 좀 할게요. 찬이 서랍장을 열고,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김민규 얼굴 위로 아까의 그 김민규가 자꾸 겹쳐 보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가운 물을 맞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격지심 갖지 말자. 자기 연민에도 빠지지 말자.

 

 

“형, 다 됐어요. 얼른 와요.”

 

 

식탁 위에는 라면과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맥주 안주들, 술들이 늘어서 있었다. 내일 다들 수업 없어? 그랬더니 있어도 먹고 가면 된단다. 그러다가 훅 간다, 느네.

 

 

“민규도 내일 수업 있지?”

“네? 아 뭐… 그렇죠.”

“이렇게 마셔도 돼?”

“못 일어나면 그냥 땡땡이 치려고요.”

 

 

그 말에 순영이 와하하 웃는다. 나랑 좀 비슷하다. 술 한 잔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마음에 들었나 보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말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원우 맥주? 순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냉장고에서 금방 꺼낸 듯 차가운 맥주를 건네주자 얼른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야, 짠도 안 하고.”

“뭘 그런 걸 해.”

 

 

목욕하고 난 후의 맥주가 제일 맛있었다. 으으. 머리가 깨질 정도로 시원한 맥주 한 모금에 놓여 있는 과자를 입에 넣었다. 아, 좋다. 피곤했던 탓에 금방 취기가 올랐다. 몸도 노곤노곤 해지고. 자기들끼리 금방 친해져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테이블을 멍하니 바라봤다. 낄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러한 시간에도 불안하기만 했다. 이런 불안은 저를 좀먹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들고 있던 맥주 캔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렇다고 씹히지도 않았고, 찌그러지지도 않았지만. 버릇처럼 씹어대는 캔을 누군가가 툭 건드리며 제지한다. 김민규였다. 다른 애들은 수다떨기 바쁘고, 김민규는 그걸 듣느라 바빴다. 그러면서도 맥주를 든 원우 손을 잡아 탁자로 내렸다.

 

 

“이 상해요.”

“네.”

 

 

괜히 민망해서 아랫니를 혀로 쓸었다. 어른스러운 척을 하지는 않았지만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들킨 것만 같았다. 다 비어버린 맥주 캔을 옆으로 밀자, 김민규는 기다렸다는 듯 새 맥주 캔을 밀어준다. 여자들한테 인기 많겠다. 하는 짓이 딱 그래. 속으로만 생각하고 준 맥주 캔을 땄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들 모두 일찍 방에 들어갔다. 말은 그렇게 해도, 다들 졸업이 급급한 학생으로써 다음 날 강의가 신경 쓰이긴 했나 보다. 뒷정리는 제가 한다는 민규 말에 다들 얼른 방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기긴 뭣해서 옆에 서서 쓰레기를 정리했다.

 

 

“얼른 들어가서 자요.”

“이것만 치우고요.”

“원래 술 잘 안 먹어요?”

“네, 별로.”

“난 형이랑 술 많이 마셔보고 싶은데.”

“왜요?”

“그냥. 오늘 말도 잘 안하고 그래서. 형 이야기 많이 들어보고 싶거든요.”

 

 

뭘 대답할 말이 없어 말문이 막혔다. 치우고 있는 쓰레기를 모아 버리고, 잔들을 싱크대에 내려 놨다. 

 

 

“여자들한테 인기 많죠?”

“왜요?”

“그럴 거 같은데.”

“…….”

“아까 같이 왔던 사람은 여자친구예요?”

“음, 비슷한?”

“..비슷한?”

“어, 섹스파트너?”

 

 

예상 외의 대답에 놀라 들고 있던 잔을 놓쳤다. 어이쿠, 다행히도 바닥이 아니라 김민규가 얼른 잡았다. 안 다쳤어요? 묻는데 아닌 척 고개를 끄덕였다. 미끄러워서.

 

 

“여자친구 인줄 알았어요?”

“하는 거 보니까 딱 커플이던데. 레스토랑에 커플들 많이 오니까, 그런 거 잘 보이거든요.”

“형은 여자친구 있어요?”

“…아뇨.”

“왜요? 형 인기 많을 거 같은데.”

 

 

현실 사는 게 바빠서 연애는 사치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다. 그런데 그런 감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가진 게 많이 없어서, 줄 수 있는 게 이 노래 밖에 없다는 노래의 가사처럼은 되기 싫어서 안 만들려 애썼다. 그랬더니 남들은 청춘이고 낭만이라는 캠퍼스 생활이 버석버석 하기만 했다.

 

 

“그런 거 할 여유가 없어서요.”

“…여유가 필요한가.”

“마음의 여유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에 고개를 휙 돌렸다. 더 말하다간 속이 터지겠구나, 싶었다. 애초에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상황이나 생각을 구구절절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을 테니 수고할 필요가 없었다. 다행히도 김민규는 더 묻지 않았다. 싱크대에 올려진 빨간 고무장갑을 꼈다. 아까 그 반짝 빛나던 시계가 빨간 고무장갑에 가려져 불룩하게 티가 났다. 어떤 게 과연 진짜 김민규일까. 궁금했다. 학교는 어디 다녀요, 무슨 과예요, 몇 학년이에요? 가끔은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저 질문들이 하고 싶어 입이 간질간질 했다. 

 

 

“계속 옆에 서서 봐줄 거예요?”

“네?”

“아니면 나 잘하나, 못하나 감시하는 건가?”

 

 

설거지라고는 한번도 안 해본 사람처럼 보였는데, 능숙하게 해나가는 게 신기해서 오래 서 있었다. 수북하게 쌓여 있던 그릇들과 수저들에게 하얀 색의 거품이 씌어지고 있었다. 볼수록 신기하네. 

 

 

“이렇게 잘하면서 첫 날엔 왜 그랬던 거예요?”

“몰라요. 관심 받고 싶었나 봐요.”

 

 

억지스럽지도 않은 이유에 웃음이 터졌다. 고개를 돌리고 픽 웃었더니 헤헤, 같이 웃어오는 소리가 순수했다. 

 

 

“형이 일하는 레스토랑 자주 가도 돼요?”

“아니요.”

“왜요?”

“주방에 쥐 나와요.”

“에이....”

“진짠데.”

“진짜로요?”

“뻥.”

 

 

아, 뭐예요. 투덜거리면서 입술을 삐죽 내민다. 물을 틀어 거품을 씻어 내리는데 여간 깔끔한 게 아니다. 구석구석 거품 하나 없도록 몇 번이나 헹궈낸다. 어쩌면 김민규를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봤던 게 아닐까. 비싼 향수, 비싼 가격의 저녁을 먹고, 자유로운 연애를 하니까 위 아래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김민규 보다는 내가 낫지, 하는 오만.

 

 

“형 농담도 잘 하네요.”

“…….”

“얼른 안 자도 돼요? 안 피곤해요?”

 

 

시계를 확인했더니 벌써 새벽 두 시가 넘었다. 아침 일찍 학교로 나가야 했다. 학교 가까우니까. 대충 얼버무리고 마지막으로 식탁을 닦았다. 행주 주세요. 건네 받은 김민규는 행주도 여러 번 헹궈 잘 마르라고 잘 펼쳐둔다.

 

 

“아, 이번 주 주말에 대청소 해요.”

“아침에 하죠?”

“네. 다들 오후에는 약속 있다고 해서요. 토요일요.”

“알겠어요.”

 

 

순순히, 알겠다고 하는 모습에 또 놀랐다. 도대체 김민규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최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끝도 안 보이는 이 마음은 어디까지 내려가 있었던 걸까. 먼저 들어갈게요. 잘 자요. 설거지가 다 끝났는데도, 싱크대에 서서 그릇들을 정리하는 김민규 뒷모습을 바라보다 방으로 들어왔다. 순영이 코를 고롱고롱 골고 있었다. 안경을 책상 위에 내려 놓고 침대 위로 누웠다. 피곤함에 얼마 마시지 않은 술에 취기가 돌아 천장이 뱅글뱅글 돌았다. 조용한 방 안으로 간헐적으로 거실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집중했다. 이내 정리를 다 했는지 불을 끄는 소리가 나더니 방문을 열고 닫는 소리가 났다.

 

 

“후……”

 

 

생각이 많은 밤은 이제 별 다르게 새롭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늘의 일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을 것 같았다. 맥주 캔 대신 제 손톱을 물었다. 김민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해야 하나, 싶다가도 김민규가 뭐라고 다시 생각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이 상해요.

 

 

맥주 캔 입구를 이유 없이 툭툭 깨물던 저를 말리던 김민규가 생각났다. 물고 있던 손톱도 내려 놨다. 얼른 자야지.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불을 코 끝까지 당겼다. 그렇지만, 계속 김민규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