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고작 글씨로 채워져 있는 종이 뭉치에 푹 빠져서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소비하고, 어떤 사람들은 유치한 영화를 보면서 열광하고 심지어 장난감까지 수집합니다. 잔디밭에서 22명이 작은 공 하나를 차려고 발버둥 치는 행위에 수십억 명이 열광하고,매일 저녁 TV앞에 모여 앉아 눈물을 훔치기도 하죠. 퇴근 시간은 아직 멀었는데 벌써부터 시계를 보고, 나를 사랑하는지 확신조차 없는 사람을 위해 선물을 고민합니다. 이 중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어요. 이 모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총합을 우리는 삶이라 부릅니다. 그러니 떳떳하게 원하는 곳에 애정을 쏟으세요.그것이 삶을 합리적으로 만들어주진 못해도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는 있으니까요. –부기영화 中-
나는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 아 그러니까, 이름이랑 생김새, 어디 사는지 같은 기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내가 누군지, 뭐하는 사람인지, 혹은 뭘 하고 싶은 사람인지를 모르겠다는 거다. 확신할 수 있는 몇가지는, 머리 속에는 진리를 찾는 심오한 철학부터 소모적이고 쓸데없는 생각까지 무수한 고민거리를 껴안고 있다.항상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 채 흘려 보낸다. 턱을 괴고 창문 밖을 쳐다보면 세상은 참 넓고 다양하다는, 그런 새삼스러운 생각부터 시작한다. 둥그런 고무로 된 공 하나에 괴성을 지르며 미친듯이 즐거워하는 남학생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회전초밥처럼 그저 운동장을 뱅글뱅글 돌기만 하는 여학생들. 다리에 깁스를 하고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아이. 그런 아이를 땡볕 아래에 서서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는 또 다른 아이. 이렇게 작은 고등학교의 운동장 안에서만에도 작은 세계가 존재하는데, 세상은 얼마나 또 넓고 어지러울까. 그리고 그 넓은 사회에 던져질 나는, 또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며 고민하고 있을까. 벌써부터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야 전원우! 어딘지 모르게 항상 신나 있는 허스키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반짝이는 눈망울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매점 가자, 매점.”
“쉬는 시간 5분 남았는데.”
“아 3분컷 되잖아, 가자!”
“혼자 가.”
그거 좀 같이 가주는게 어렵나, 전늘보 진짜.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머리 속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3층을 내려갔다 올라 가야하는 일과, 덩치에 안 맞는 칭얼거림을 듣는 일. 무엇이 더 성가신 가.
“갈 거면 빨리 가.”
“아싸!”
마른 몸을 느릿하게 일으키자 팔목에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종 치겠다 얼른! 늦게 가자고 한 게 누군데 재촉하는 게 어처구니 없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해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그게 중요해 지금?”
“아 됐고 빨리!”
같은 얼렁뚱땅한 반응투성이일 테니까. 안 들어도 들은 것 같은 뻔뻔한 대답에 살짝 웃으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래 빨리 가자 종치겠다. 김민규는 항상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책 나간 강아지처럼 뛰었다. 빠질 듯이 흔드는 꼬리가 그 애의 칭얼거림처럼 안 봐도 보이는 것 같았다. 단단하게 잡아오는 손길에 못 이기는 척 매점으로 향하면 물 만난 물고기로 변해서 이것 저것 바쁘게 집어 들기 시작한다.
“그만 골라, 곧 있으면 점심 시간이야.”
“밥 먹고 또 금방 배고픈데……”
“그럼 그때 사, 미리 사지 말고.”
“너가 오후엔 매점 같이 안 가줄 거잖아.”
“가 줄게.”
“잠들어서 안 일어날거면서?”
“가준다고!’
일부러 성질을 긁는 듯한 대꾸에 정직하게 반응해버렸다. 배시시웃는 얼굴을 한껏 째려보고 관심도 없는 매점을 둘러보고 있다 보니 계산을 끝낸 듯 품에 빵과 우유를 한아름 들고 온다.
“덜어낸 게 이거야?”
“내 것도 있고 뭐……”
자 먹어. 너는 서툰 손길로 슈크림 빵과 초크 우유를 건넨다.
“나 빵 안 좋아하는데……”
“그래도 이건 먹으면서. 안 그래?”
입도 짧고 식욕도 없는 원우가 그나마 종종 먹는게 슈크림 빵이었다. 용케 기억하고 집어 온 게 놀라우면서도 민망했다. 잘 먹을게.모기만한 목소리로 속삭였고 돌아오는 건 팔을 잡아 끄는 따뜻한 손길이었다. 진짜 종 치겠다, 가자.
그 애와 나는 어릴 때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져 있었다. 놀이터 구석에서 금방 쓰러질 듯한 모래성을 함께 쌓아 올렸고,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병아리가 그려진 이름표를 달고 유치원을 다녔고, 고등학교의 마지막 학년을 바라보는 18살의 지금까지 왔다. 뭐 하나 닮은 점, 공통점도 없으면서도 연결되어 있는 끈이 끊이질 않았다.서로가 서로에게 있어서 당연한 존재였고, 그게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왔다. 그리고 살아갈테지.
“여기서 54페이지 3번째줄부터, 민규가 읽어보자.”
“켁, 저요?”
그래, 몰래 빵 먹고 있는 너.
선생님의 한심하다는 타박에 반 전체가 와하하 웃음바다가 되었다. 양 볼 가득 빵을 머금고 큰 눈을 깜빡이는 모습에 나도 그만 웃어버렸다. 빵을 사서 교실에 도착하기 무섭게 수업이 시작됐으니 김민규 성격상 몰래 먹을 만도 했다. 눈 앞에 먹을 수 있는 빵과 우유가 있는데, 못 먹는다니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었겠지. 눈 감고도 그려지는 상황에 입 꼬리가 내려갈 줄 몰랐다. 진짜 단순한 김민규.
나는 김민규를 잘 알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서 나고 자랐는지 같은 기본적인 문제부터 시작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속에 무슨 마음을 머금고 있는지도. 어쩌면 나 자신보다 김민규를 더 잘 알고 있다. 누가 봐도 알기 쉬운 단순한 성격이지만, 남들이 얕게 봐서 알고 있는 정도와 차원이 다르게 나는 김민규를 간파하고있다. 다른 사람 챙겨주고 싶어서 안달 난 미련한 오지랖도, 울컥하고 쏟아지면 주체하지 못하는 눈물도, 즐거울 때 찡긋거리는 콧잔등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듯이 웃는 환한 얼굴도. 전부 다 알고 있다.
뻔하고 알기 쉽지만 결코 민규를 쉽게 생각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그게 나 혼자만의 약속이다. 쉽게 오만 해지는 나에게 항상 거는 자기최면이다. 김민규를 소중히 할 것. 또 혼자 두지 않을 것.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겨우 교과서를 읽어 내려가는 조금 곱슬 진갈색머리칼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리고 까무룩 잠들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어린 김민규는 낡은 골방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작은 몸을 최대한 구겨서 둥글게 말아 꼭꼭 숨어있었다. 그래 그건 아주 오래됐지만 선명한 기억. 빛나던 눈망울에 잠시 생기를 잃었던 시기.나는 있는 힘껏 나보다 한 뼘 큰 민규를 안아주었고. 내 좁다란 어깨는 금방 축축해졌다. 괜찮아. 괜찮아. 떨리는 목소리로 전혀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했다. 뭘 안다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그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 옷자락을 붙잡은 여린 손가락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원우야 원우야.나 어떡하지? 꽉 잠긴 목소리를 쥐어짜낸 울부짖음. 나도 그만 왈칵 울고 말았다. 서로를 품고 하염없이 울었던 비가 아주 많이 내리던 날.
“괜……찮아 민규야.”
“원우야.”
“내가 있잖아 민규야, 괜찮아.”
“원우야……”
원우야
원우야?
“전원우!”
어? 크게 들리는 외침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몽롱한 기운에 주위를 둘러보자 이미 종례가 끝난 지 오래된 듯 교실은 텅 비어있었다.
“……나 얼마나 잤어?”
“그냥, 너무 잘 자길래 조금 기다렸어.”
“바로 깨우지 왜 기다렸어.”
몰라? 어깨를 으쓱 이고 내 가방을 매는 손을 붙잡았다. 내가 들게. 내 부드럽게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얼른 가자. 오늘 저녁 불고기.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거친 손가락이 부드럽게 뒷목을 쓸었다. 문득 내 옷을 부여잡던 여린 손이 떠올랐다.
“민규야.”
“어?”
“곧 기일이지.”
“……응, 또 그 꿈 꿨어?”
“……그건 아니고, 갑자기 생각나서.”
가늘고 긴 손가락이 어깨를 감싸왔다. 덤덤한 얼굴이지만 작게 일렁이는 씁쓸함을 보았다. 원우는 민규의 부모님 기일이 다가오면대신 아파하기라도 하는 듯 매번 그 때의 꿈을 꾼다고 했다. 작고 마른 몸으로 어디까지 생각하고 걱정해주는건지. 오랜 시간 지켜봤지만 원우의 복잡한 속내를 알 턱이 없다. 품이 커서 팔랑 이는하복 셔츠에 허수아비처럼 끼워진 마른 몸. 가끔 바람이라도 세게불면 저대로 가루가 되어 날라가 버릴 것 같다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하곤 했다. 괜 시리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어 팔목을 꽉 잡아오면, 뿌리칠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 미동도 안 한다. 민규가 자신이 잡은 게 아니라, 원우가 잡혀준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이번에도 혼자 갈 거야?”
“응, 그러려고.”
“같이 가도 괜찮은데.”
“됐어, 우리 엄마 아빠 나만 볼 거야.”
허, 실소를 터트리는 모습에 같이 씨익 웃어 보였다.
“생각 바뀌면 말해.”
멋쩍어 하는 작은 중얼거림을 흘려 보내지 않고 확실하게 들었다.
너의 말 하나 하나에는 깊은 고민이 있는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전부 귀담아 듣는게 습관이 되었다.
“고마워.”
그리고 그 신중한 생각에 또박 또박 대답해주는 것도.
너도 들었지 원우야?
할 말 없을 때 꼼지락거리는 버릇이 있는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부모 님들끼리의 친분이 깊었는지 갈 곳 잃은 나를 거둬간 건 가까운 친척이 아닌 원우네 가족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남의 집에서 살겠냐는 주변의 만류에도 원우네 아주머니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내가 있잖아. 어린 날 작은 속삭임은 굳게 깨지지 않는 약속이 되었다. 정말 원우가 있었다. 절망에 빠져서 울기만 할 때도,마음을 가라앉히고 부모님을 보내주던 날도, 괜한 고집으로 국화꽃 대신 하얀 안개꽃을 사 들고 눈시울을 붉힐 때에도. 아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다시 학교에 등교할 때도, 떠도는 말에 마음이 다쳐서 울음을 터트렸을 때에도, 빠지지 않고 너가 있었다.민규랑 같이 있어야해요. 지독한 감기에 걸려 방문을 닫고 앓아 누웠을 때도, 겨우 잠든 나를 깨울까 방문 앞에 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실 난 잠들지 않았는데, 깨어 있다고 말할 기운도 없었던 건데. 아무 소리도 인기척도 없지만 말 없이 내 곁에 있는 너를 생각하고 애틋한 마음에 눈물 한 방울이 콧잔등을 타고 흘렀던 기억이 있다. 땀과 눈물로 적시던 베개. 방 안의 더운 공기. 나를 위한 죽을 끓이는 잔잔한 소음. 가끔 들리는 문 앞의 부스럭거리는 작은 존재감. 가끔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지면 그 날의 공간을 되새김질 하면서 마음을 달랜다.
“저 왔어요.”
여전히 국화꽃은 드리기 싫어서. 지금도 어딘가에서 나 모르게 잘 지낸다고 믿고 싶어서, 이번에도 안개꽃을 들고 왔습니다.
“ 잘 지내고 있어요. 여전히 원우랑 함께. 몸만 컸지 늘 똑같아요.아닌 척 하면서 누구보다 나를 생각해주는 원우랑, 아주머니랑 아저씨랑, 그리고 저는 여전히 철 없이 그런 관심과 챙김을 다 받고 살아요. 저 정말 몸만 큰 것 같죠? 여전히 그립고 생각나고……슬프지만. 당연한거겠죠. 앞으로도 계속 그럴테고. 저를 그리워해도 걱정하지는 말아주세요. 저도 그럴게요. 그리워해도, 어딘가에 잘 지내고 계시겠지. 아, 저를 지켜보고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냥 잘 계신다고 생각하고 걱정은 안 할게요. 보고싶은 건 정말 어쩔 수 없잖아요. 너무 어릴 때 였으니까…… “
“….”
“그거 알아요? 기억 속 엄마 아빠 얼굴이 흐릿해질 때마다 억장이 무너져요. 이제는 닳고 닳은 사진 몇 장으로 다시 머릿속에 새겨넣는게 무서워져요. 사진 몇 장이 없으면 영영 떠올리지 못하게 되어버릴 까봐. 이렇게 찾아왔을 때 보는 차갑고 딱딱한 모습의 사진이. 낯설게 느껴질 까봐.”
“….”
“있죠 그래서 원우가, 어디서 찾았는지 엄마 아빠 사진을 저한테 주는거에요. 그리고 여러 장 인화해 뒀으니까 없어지거나 닳아버리면 말하라고. 그러는 거 있죠.”
“….”
“저 진짜 사랑받고 있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사랑해요 정말로.”
“집에 가자.”
“……그래”
한 뼘 뒤에 있을 너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늘 서로 모른 척 숨어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아닌, 나란히 밝게 웃으면서 손 잡고 오자.구석에 서서 딱딱하게 굳어있는 너에게 성큼 다가가 와락 껴안고 말았다. 품에는 조금 벅차게 들어맞는 마른 몸을 천천히 토닥였다.
“울지마, 마음 아파.”
“……응, 안 울게.”
나는 마음의 상처가 흉터로 바뀌었는데, 너는 피딱지가 앉아 조금만 건드려도 툭하면 덧나나보다. 붉어진 눈시울을 벅벅 닦는 손을 잡아 내렸다. 빨갛게 붓잖아. 축축한 눈꺼풀을 살살 매만졌다.
“매년 지치지도 않고 따라오네?”
“혼자 청승 떨 까봐 그랬다 왜.”
“지금의 너처럼?”
마른 주먹이 명치께를 가볍게 건드렸다. 푸스스 웃음을 터트리자너도 웃는듯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이제는 숨소리만 들어도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고마워.”
“됐어.”
약속한거잖아. 어떤 사람들은 형식적인 위로의 말로 쉽게 뱉어낼 말들을, 전원우는 목숨을 걸고 지키고 있다. 아침엔 해가 뜨고 저녁엔 달이 뜨는 자연의 섭리처럼, 사람의 삶에는 결국 끝이 있다는 당연한 진리처럼 김민규 옆에는 전원우가 있다. 우정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엔 깊고 따뜻하며, 사랑이라고 하기엔 그 이상의 것으로 끈끈하게 묶여있다. 어떤 사람은 이상하다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부러워할 수도 있지만, 그 사람들의 시각에 좌지우지할 필요는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당연하면서도 가장 축복의 존재이니까.잔잔하게 흘러가는 연애, 혹은 언성을 높이고 서로 상처를 주는 연애, 서로를 열망하는 뜨거운 연애, 우리는 어떤 연애를 하고 있는 걸까. 아니 꼭 연애라고 지칭해야하는걸까? 때로는 있는듯 없는듯 고요하게, 서로의 품이 필요할 때는 그 누구보다 애틋하고 절절하게. 눈물 나게 소중하다가도 가볍게 거리를 두고 웃으면서 나란히걸어갈 수 있는. 어떤 연애라고 지칭할 수 없지만. 세상의 모든 형태가 우리 사이에 담겨있다. 친구, 가족, 사랑하는 사람…… 우리 안에는 작은 세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이해할 수 없는 형태를, 이해 받을 필요 없는 형태를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