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잉 지이잉
새벽 2시 55분을 알리는 핸드폰 진동 알람 소리가 울리고 그 시간까지 공부하던 대한민국의 예비 수험생 민규는 붙잡고 끙끙이던 수학 문제집을 통쾌한 마음으로 탁 소리나게 덮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너저분하게 벌어져있는 가방에 대충 책을 쑤셔넣고 방바닥에 자리한 옷가지들 위를 뛰어넘은 민규는 그대로 자신의 커다란 몸을 침대에 다이빙 시켰다.
으악 이어폰 책상에 두고왔어
국가대표에 빙의해 멋지게 점프한 5초전이 무색하게 민규는 침대에서 일어나 어기적 거리며 걸어 책상위에 내팽겨져있는 이어폰을 집어 들었다. 민규는 자신의 뭉툭한 손가락 끝을 탓하며 풀수록 더 꼬이는 것 같은 이어폰 줄을 풀고 침대로 돌아와 올해 생일 선물로 꼭 에어팟을 받아내야 겠다 다짐했다.
헉 시작하겠다
겨우 이어폰 줄을 다푼 민규는 어느덧 59분을 가르키는 시계를 보고 조급한 마음이 들어 핸드폰의 라디오 앱을 실행시키고 의미없는 연타를 작렬하며 채널을 찾았다.
다행스럽게 마지막 광고를 한건지 바로 들려오는 정각 알림에 심신의 안정을 되찾자 민규는 겨울의 한기에 차가워진 이불속에서 꾸물이며 어서 자신의 체온으로 따듯해지길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청취자 여러분 드디어 2019년 기해년 새해가 밝았네요.
다들 사랑하는 사람들과 새해를 맞으셨나요? 아 그렇다면 이 시간에 라디오를 왜 듣고 있겠냐구요? 하하하 혼자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모든 새로운 시작 새해인데 너무 슬퍼하지말기로 해요 사담이 길었네요.
전원우 피디의 새해 첫 무비-무지크 지금 시작합니다.
작년 겨울 2학년으로 마지막인 종업식이 끝난 날, 예비 고삼주제에 하루종일 피씨방에서 치킨이나 먹으려 불 올리고 돌아와 집에서 맞은 거한 현타의 여파로 온갖고민이 끝없이 들어 잠이 오지 않던 새벽
이 시간에 공부는 글렀고 정리나 하자 싶어 서랍을 뒤지다 나온 구식 휴대 라디오가 시작이었다. 평소면 라디오 같은 거 들을 일도 없었겠지만 무언가를 해체하고 조립하고 만지작거리는 거에 환장 하는 민규는 그 라디오에 꽂힐 수 밖에 없었다. 건전지를 찾으러 뒤적이다 민규는 책상 위에 있던 자명종의 배터리를 자비없이 앗아가 갈아끼워 오랜 침묵을 지켰던 라디오를 소생시켰다. 손으로 채널을 돌리며 치지직 거리는 소리의 연속중에서 선명한 주파수를 잡는 재미가 쏠쏠해 돌려보다 그렇게 우연히 듣게 된게 무비무지크였고 영화와 그 ost를 간단하게 소개하는 프로그램은 새벽 세시만 되면 라디오를 키는 민규의 습관의 시작이었다.
네 지금까지 영화 킹스 스피치의 OST를 듣고 오셨습니다. 영화 킹스 스피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 국왕 조지6세의 이야기인데요. 그는 사실 어릴 적 부터 심한 말 더듬 증상을 겪으며 잔인한 독재자 히틀러의 유려한 연설을 내심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그가 어떻게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수많은 대중 앞에 서게 되는지를 중점으로 두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저는 한 나라의 국왕 또한 결국은 사람이고, 외로운 존재라는 것이 잘느껴졌네요. 매해 반복되는 작심삼일을 영화 속 주인공이 어떻게 변신을 하는지 지켜보며 여러분의 새해 다짐에 자극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오늘 방송도 즐거우셨나요? 마지막으로 킹스 스피치의 또 다른 OST를 틀어드리며 저는 이만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19년 1월 1일 전원우 피디의 무비-무지크 였습니다. 함께 해주신 청취자분들 감사드리고 내일 더 즐거운 이야기 나눠봐요.
방송은 대략 이런 식으로 하루 15분 정도 이루어졌다. 유튜브에만 들어가도 널린게 영화 리뷰인데 민규가 이 라디오에 유독 집착하는 이유는 이 라디오 디제이 때문이었다.
디제이는 자신은 라디오국 신입 피디이고 우스갯 소리인지 진담인지 도저히 이 시간대에 펑크 내지 않을 디제이를 구하지 못해 라디오국의 가장 막내인 본인이 맡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냥 피디라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배우인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할 정도로 듣기 좋은 저음을 갖고 있었다. 사연 같은 것을 받는 방송도 아닌데 그런 저음으로 쾌활하게 디제이 혼자 만담을 하는 것 같을 때도 있고 때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들을 넘나드는게 매력적이었다.
목소리만 매일 듣던 민규는 그 피디의 정체가 너무 궁금했다. 편성표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아나운서도 아닌 피디였기에 방송국 홈페이지에는 회색의 사람 형체 기본 이미지와 전원우 피디 라는 직급 정도만 떴고 아쉽게도 민규는 그 어디에서도 그 남자의 머리털끝 하나 볼 수 없었다.
뭐 그런 까닭으로 전원우 피디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건 포기한 민규는 매일 새벽 잠들기 전 이 시간을 이렇게 꽉 채우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들었다. -가끔씩은 눈을 감고 목소리를 들으며 남자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이렇게 짧은 방송이 끝나면 민규는 항상 탁상 옆 달력을 집어들고 자신이 쓸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을 들인 글씨로 그 날 추천 받은 영화 제목을 적으며 수능이 끝나면 볼 수 있다는 희망을 마음에 가득채웠다. 또 거기에 그 날 들은 ost를 자신의 플레이 리스트에 추가하고 그걸 들으며 잠들어야 비로소 완벽한 하루를 완성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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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 보내 시그널 보내 근데 전혀 안 통해 눈빛을 보내 눈치를 주네 근데 못 알아듣네♪
"뭐야 96.7 맞는데?"
그 날도 민규는 2시 55분에 울린 알람소리를 듣고 어김없이 잠자리에 누워 라디오를 틀었다. 하지만 새벽 3시 정각을 알리는 알림 소리 후 (지난생일에선물받은) 에어팟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것은 당황스럽게도 익숙한 디제이의 부드러운 저음이 아닌 새벽에 듣기 해괴망측하기 짝이 없는 철지난 가요의 향연이었다. 내가 공부하다 졸았나 싶어 새벽 3시 2분이 맞는지부터 확인한 민규는 설마 편성시간대가 바뀐 거 겠지라고 생각하며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라디오앱의 편성표를 뒤적 거렸다.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전원우 피디의 무비 무지크라는 타이틀은 보이지 않았고 아무리 새로고침을 해봐도 추억의 가요 탑 10이라는 제목만 편성표의 매일 새벽 세 시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니 분명 어제도 내일 이 시간에 보자고 했었으면서...
수능이 백일 남은 시점 나름의 고민들로 별게 다 속상할 때라 그런지 민규는 이 변화에 마치 먹고 있던 사탕을 빼앗간 아이에 빙의해 상실감에 잔뜩 빠졌다. 요즘시대 라디오면서 다시 듣기도 없고 반년 넘게 계속해왔던 습관이라 그런가 아무것도 없이 잠드려니 어색하고 그렇다고 다른 라디오는 들어도 성에 차지 않아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내일 공부는 망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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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밤을 꼴딱새는 바람에 초췌한 몰골을한 민규는 그 누구보다 먼저 방송국에 문의전화를 걸기 위해 1교시 도중인 9시가 되자마자 -배아프다 양호실 좀 다녀오겠다-를 시전했다. 성공적으로 교실에서 빠져나간 민규는 복도 끝 쪽 화장실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한 후 마지막 칸에 들어가 전화를 걸기위해 몰래 내지않았던 핸드폰을 키고 전화를 걸었다.
제발 누구오기 전에 빨리 받아라 전원우를 세 번 외치면 이루어지지 않을까 전원우 전원우
-네 문화방송 SVT 라디오국입니다~
"저...전원우...어...그니까"
전화를 받는가 받지 않는가에 정신팔린 나머지 민규는 전화연결이 되었지만 순간 머리 속이 엉켜 어버버 거리고 말았다.
뭐라고 말하지 전원우 피디님 어디 숨겼어요?
-네? 문의사항을 말씀해주시겠어요?
"아 큼큼 그 혹시 전원우 피디님의 그거 있잖아요 새벽 세시에 하는 거"
-무비 무지크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 그거요 그거 혹시 편성표가 바뀌었나요?"
아 드디어 할 말 했다
민규는 시원하게 질문을 했지만 답변을 듣게 될 거란 걸 아니 6월 모의고사 보기 전보다 더 떨리기 시작했고 김민규 초불안 상태에 빠졌을 때 증상을 보이며 손톱을 물어 뜯고 초조하게 좁은 화장실 칸에서 종종 제자리 걸음을 걸었다.
-아 그 방송은 어제가 마지막 방송으로 폐지 되었구요 추억의 가요 탑10으로 대체 되었습니다~ 더 찾으시는 거 있으신가요?
폐지라니 어제 분명히 내일 또 만나자고 했으면서 한마디도 없이 이게 뭐야
민규는 설마했던 단어 폐지라는 말을 직접들으니 밑도 끝도 없이 속상해져 눈물이 왈칵 나오려는 걸 꾹 눌렀다.
"혹시 그럼 그...전원우 피디님이랑 연락 할 수 있는 그런...그 어...."
-연락처요?
"네! 바로 그거요!"
"그건 피디님 개인"
"어떤 놈이 화장실에서 전화하는 거야!"
아 망했다 이건 백퍼 학년부장 목소리잖아
화장실 쪽으로 걸어오는 쿵쾅거리는 발걸음 소리에 민규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연락처라는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 빙빙 돌려 말하던 민규는 상담원의 대답에 간지러운 곳을 긁은 듯한 쾌감을 느낀나머지 그거요!!!라고 복도까지 울리도록 소리친게 근원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다가 그냥 미친 척 혼잣말 했다고 해야겠다라고 결심한 민규는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으면 태가 날테니 철저하게 바지의 허리춤에 끼워넣고 티나지 않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당장 나오라고 쾅쾅 두드리며 호통치는 학년부장 쌤의 앞으로 갔다.
침착하게 하자 민규야
"안녕하세요 학년부장 선생님 저는 통화 안했고 단지 용변을 보며 관동별곡을 외"
-여보세요? 학생? 뭐라고 말씀하신거죠?
"핸드폰 일주일 압수"
망했다
핸드폰도 뺏기고 처음에 거짓말을 하려했다며 괘씸죄까지 추가되는 바람에 반성깜지까지 써낸 민규는 감각이 사라진 것 같은 팔목을 달랑이며 교무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굳은 결심을 했다. 대한민국 고삼 김민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게 된 이상 현피를 떠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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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민규는 담임과의 설전 끝에 오후 현장체험학습이라도 따냈다. (((고삼이 무슨 방송국 현장체험학습이야 허튼짓 하지말고 수능 끝나고 놀러갈 때 써라 민규야/ 아 쌤 제 미래가 걸렸다니까요? 방송국 견학이 평일밖에 없는걸 어떡해요)))
오전 수업을 끝내고 (먹기위해 사는 민규가 무려) 점심도 스킵하고 희망에 가득찬 상태로 상암을 향한 버스에 올라탔다.
일반인이 방송국에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다 가이드와 함께하는 방송국 체험 프로그램 그런 걸 신청했기에 민규의 곁에는 유치원생 꼬꼬마들이 가득했다. 내가 이게 뭐라고 이러고 있는 거지 적지않은 현타를 느낀 민규는 가이드 선생님 죄송해요를 외치며 대열에서 탈주했다.
민규의 목표는 라디오국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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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어디지?
방송국이 얼마나 넓은지를 간과한 민규는 라디오국을 찾기 위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기어코 길을 잃고 말았고 헤맨지 꼬박 삼십분 째였다. 아무래도 통제구역인 것 같긴한데 사람이라곤 하나 보이지도 않았고 만약에 사람을 찾더라도 쫓겨날게 분명했기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거기 뭐예요? 외부인은 여기 들어오시면 안되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리자 민규는 누군가가 자기를 발견했다는 것보다 그 저음이 굉장히 익숙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반년을 넘게 밤마다 들었던 목소리인데 모를 수가 없었다. 마음은 그 사람이 맞다고 맞는 것 같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마주치려니 뒤돌기가 무서워 민규의 몸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누가봐도 수상한 움직임이었으니 전원우 피디라고 추정되는 그 남자의 발걸음이 민규를 향해 다가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바로 뒤에서 발걸음이 멈췄고 남자는 민규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더니 몸을 자신의 방향 쪽으로 틀게 살포시 당겼다.
"아 방문체험 신청 하셨구나 이쪽은 오시면 안돼요 저 건물 까지만."
남자는 민규의 목에 걸린 방문카드를 보자 알겠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의 커피를 홀짝이며 말을 했다. 민규가 그동안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생각보다 키가 크고 마르고 날카로운 인상이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저 계단으로 내려가서 나가면돼요 알겠죠 학생?"
"혹시...그..."
앞에서 뭐라고 하던 민규의 귀에 내용이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렇게 찾던 목소리의 주인을 찾은 것 같아서 기쁘면서도 싱숭생숭한 기분이지만 일단 이 남자가 전원우 피디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민규는 뒤집혀있는 남자의 사원증를 힐끗거렸지만 하얀 와이셔츠 위에 달랑이는 카드는 뒤집힐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더 이상은 못 꾸물거려 정면돌파다.
"혹시...전원우 피디님이세요?"
"어 저를 아세요?"
찾았다 전원우 피디님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