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떼] 우리는 아직 젊으니깐
2021. 2. 12. 14:39

 

 

 

“야, 니네 왜 오늘따라 말이 없냐?”

  

 

  

 

  

 

평소 같았으면 시끌벅적했을 술자리가 유난히 조용했다. 여친이 어쨌네 저쨌네 떠들어댈 김민규도, 학부모들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죽을 거 같다고 푸념할 전원우도 입을 꿰맨 것마냥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오자마자 둘 다 동시에 차인 것처럼 소주 병을 까고 술잔을 기울였다. 이 새끼들 뭘 잘못 처먹었나. 재훈은 둘을 번갈아 보다 맞은편에 앉은 영민에게 눈짓을 했다. 왜 이러냐 얘네? 영민 역시 알 겨를이 없어 어깨를 으쓱이며 고기를 구웠다. 난들 알 리가 있나.

  

 

  

 

  

 

 

 

 

 

 

 

우리는 아직 젊으니까

  

 

  

 

  

 

  

 

 

 

 

 

 

 

 

사건은 정확하게 일주일 전 금요일이었다. 그날도 김민규 전원우 김재훈 박영민 넷이 술을 마셨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고등학교 동창이라서, 그게 이유였다. 

 

 

넷은 고교 3년을 내리 같이 몰려다녔다. 그렇다고 3년 내내 같은 반은 아니었다. 1학년 때는 넷이 다 같은 반이었는데 결국 찢어지고 말았다. 신기하게도 전원우와 김민규는 계속 같은 반을 했다. 뭐, 따지고 보면 그리 신기할 것도 없었다. 공부의 기역도 모르는 김민규가 제일 공부 잘하는 전원우 따라한답시고 사탐 과목을 똑같은 걸 선택해서, 같은 반이 될 확률은 2분의 1이었고 2년이니까 4분의 1로 3년 내내 같은 반이 된 거지. 

  

 

넷은 물과 기름을 한 통에 담아두고 마구 흔든 것 같은 조합이었다. 묘하게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그런 그룹이었으니까. 명석한 순서대로 나열해보자면 단연 전원우가 선두였고, 재훈과 영민은 도토리 키 재기, 민규는 인문계에 온 게 신기할 정도로 뒤에서 일이 등을 다투었다. 사고 많이 치는 순서는 역시나 성적의 역순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쳤던 김민규는 옆 학교 애들과 시비가 걸려 경찰서까지 가서 담임이 불려간 적도 있고 선배의 여자친구를 건드렸다가 맞아서 팔이 부러진 적도 있었다. (물론 맞은 만큼 때렸다) 그에 반해 전원우는 학생회장까지 한 범생이 중의 범생이. 이따금 김민규가 샌님이라고 놀려댔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전원우는 초딩 같은 민규를 상대할 시간에 수학 문제 하나를 더 풀었다.

  

 

사고 좀 그만 치고 다니라며, 영민과 재훈이 민규에게 진심이 담긴 조언을 하는 것도 한때였다. 결국엔 자기들보다 한 살 어리니까 그런갑다하고 이해하는 편이 빨랐다. 김민규는 제가 빠른년생인 걸 죽을 때까지 먼저 말 안 해줬다. 그러다가 수능 끝나고 스물이 된 해 1월 1일에 넷이서 술 마시러 갔다가, 민증 검사하고 빠꾸 먹었단 말씀. 

  

 

 

 

  

 

 

 

“아 진짜 또라이 새끼 아니냐? 왜 그걸 이제 말해.”

“굳이 말해야 될 필요가 있냐?”

“애초에 4월이 어떻게 빠른이냐.”

“6월 이전이면 다 빠른이지, 뭐.”

“니 오늘부터 우리한테 형이라고 불러.”

“뭔 개소리야.”

 

 

 

 

  

 

민규는 곧은 가운뎃손가락으로 빠큐를 날렸다. 전원우면 몰라도 내가 니들한테 어떻게 형이라고 부르냐? 안경을 올려 쓰고 있는 원우 옆에 붙어 어깨동무를 하며 낄낄대던 민규가 원우를 힐긋 내려다보고서 손가락으로 볼을 톡 쳤다. 안 그래, 원우 형?

  

 

 

 

 

 

  

 

 

 

풀자면 수 백 개도 넘는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것도 무려 10년 전의 일이다. 와, 우리가 내일모레 서른이라고? 그게 지난주 술자리의 대화 주제였다.

 

 

셋은 번듯한 직장인이 되었고 하나는 아빠 빽 밑에서 아직도 용돈을 타 쓰며 돈 많은 백수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단연 후자는 김민규였다. 니는 부모 잘 만난 줄 알아. 재훈이 입이 마르고 닳도록 하던 얘기였지만 부러운 건 사실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대학 나온 김민규는 부모 잘 만나고 잘난 얼굴 하나로 직장도 없는데 차도 집도 있고 존나게 이쁘고 잘 빠진 여친까지 있으니까. 말해봤자 입만 아프고 바뀌지 않는 현실이며 되레 더 씁슬해지니 재훈은 그쯤 하기로 했다. 민규는 아직도 철이 덜 든 고딩 때 그대로였다. 술을 마시면서도 쉴 새 없이 말을 했으니까.

 

 

얘기의 8할은 여친이랑 싸웠다가 화해한 얘기였다. 가만 들어보면 하루에 한 세 번씩은 싸우는 것 같다. 가끔씩은 여친이 무슨 이벤트를 해줘서 호텔에서 뭘 했네, 하는 꽤나 적나라한 얘기도 오갔다. 아무리 바빠도 이 주에 한 번씩은 가지는 술자리였고 그 자리에 한 달에 한 번쯤은 민규의 여자친구가 데리러 오곤 했었다. 복받은 새끼. 민규가 먼저 가고 나면 영민과 재훈은 똑같이 말했다. 원우는 애초에 관심도 없다는 듯 작게 잘라진 고기만 뒤적였다.

  

 

 

 

  

 

 

 

 

 

분명 그게 지난주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생전 싸움은커녕 말다툼도 안 하던 김민규랑 전원우가 진짜로 싸우기라도 했는지 눈 한 번을 안 마주친다. 재훈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농담을 했다. 누가 보면 니네 치고받고 싸운 줄 알겠다. 30초가량의 정적이 이어졌다. 

 

 

 

 

 

 

“미친놈들아 뒤질래?”

“.......”

“싸웠으면 니네끼리 풀고 오던가, 애새끼냐?”

“.......”

“야 빨리, 김민규 전원우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악수해. 전원우도 그래 내가 용서해줄게 하고.”

“잤어.”

“야 전원우,”

“전원우가 김민규 여친이랑 잤다고?”

“아니, 야, 니 말하면 뒤진다.”

“나랑 김민규랑 잤다고.”

 

 

  

 

 

 

 

 

이번엔 3초. 정확히 3초 동안 공기가 흐르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했지만 김민규가 먼저 급히 입을 뗐다. 빨리, 술이나 따라.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김민규와,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전원우 사이에 낀 둘은 메두사와 눈이라도 마주친 것마냥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니네 몰카 그런 거 하냐? 아님 뭐, 씨발 대체 뭔 소리야. 전원우와 김민규를 번갈아가며 봤으나 김민규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있음에도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러 닦느라 바빴고 전원우는 말없이 술잔을 채웠다.

  

 

집 가는 길에 민규 만나서 잤어. 전개 위기 절정은 없고 발단과 결말만 있는 말에 재훈과 영민은 동시에 고개를 들고 반 박자 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잠을 같이 잤다고. 아 씨발, 난 또 니네가 그 뭐냐, 다르게 잤다고 한 줄 알고 존나 식겁했잖아. 반쯤 익은 고기를 집게로 뒤집고 영민이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그러자 원우가 한 번 더 태연하게 말했다. 섹스한 거 맞는데.

  

 

 

 

 

 

“야!!”

 

 

  

 

 

 

민규가 급히 고기 한 점을 집어 원우의 입에 욱여넣었다. 잔뜩 벌게진 얼굴로 좆됐다는 걸 표현하기라도 하듯 바삐 눈을 굴리며 영민과 재훈을 살폈다. 원우는 고기를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키고 태연하게 콜라를 마셨다. 영민과 재훈은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을 번갈아봤다. 

 

 

  

 

 

 

 

 

“니네 둘이 잤다고?”

“응.”

“전원우 좀, 가만히 있어봐.”

“....... 아 이 새끼들 또 구라 치네.”

“내가 다 설명할게.”

“뭔 설명이야. 니네끼리 돈내기했냐? 박영민은 몰라도 나는 안 속아.”

“전원우 집에 데려다주다가 술김에 한 거니까 다신 그럴 일 없을 거야.”

“어, 봐봐. 박영민 이 새끼 벌써 속았다. 야, 쟤네가 진짜 잤겠냐? 너 김민규가 얼마나 여자한테 환장하는지 몰라?”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자고, 다시. 나랑 전원우도 없던 일로 하기로 했으니까.”

 

 

 

 

 

 

집단적 독백이 이뤄지고 있는 사이, 원우는 타고 있는 고기 한 점을 살짝 베어 물었다. 의외로 없던 일로 하자고 했던 건 전원우 쪽이었다. 술 마시고 그 정도 실수는 흔히들 하는 거잖아.

  

 

 

 

 

 

 

 

 

 

 

 

원우는 학창시절부터 민규를 좋아했었다. 아니, 쭉 좋아했다. 지금까지. 그렇지 않고서야 전교에서 성적으로 놀아나는 애가 양아치 같은 김민규랑 친구를 할 이유가 없었고, 죽어도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티를 내진 않았지만 제 스스로 좋아한다는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게 다였다. 10년간. 

 

 

처음으로 민규가 여자친구를 데리고 다녔을 때는 꽤나 충격이 컸다. 사실은 제가 민규를 그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던 것도 있다. 아무튼 무리에서는 원우를 제 옆에 꼬옥 붙이고 다녔던 민규였기에, 그 옆에 붙어있던 게 제가 아닌 다른 여자애라는 것이 며칠간 밤잠을 설칠 정도로 퍽 아릿한 충격이었다.

  

 

친구라는 명목으로 10년간 유지해온 관계를 저 하나 때문에 깨뜨릴 순 없었다. 제가 아무리 민규를 좋아한들 무덤까지 비밀로 안고 갈 생각이었다. 만약에 얘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영민과 재훈마저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원우는 민규가 여자친구와 헤어졌을 때마다 가까이 붙었다. 

 

 

  

 

 

 

“너 향수 뿌리냐?”

“....... 아니.”

“애기 냄새나는데.”

 

 

 

 

 

 

원체 스킨십이 많은 민규 덕에 하루도 원우의 심장이 남아날 날이 없었다. 민규는 원우를 껴안고 머리칼에 코를 묻고서 얼굴을 부볐다. 제 품 안에 끼워 맞춘 듯 쏙 들어오는 원우가 좋았다. 그러니까, 친구로서.

  

 

원우는 민규의 집안 사정을 다 알고 있었다. 가장 많이 붙어있으니까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민규 스스로 말을 했다. 민규가 제게 제일 먼저 말한 이야기를 한 일주일 뒤에나 재훈과 영민에게 말하는 걸 보고선 원우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민규와 제일 친한 사이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루는 여자친구와의 기념일과 원우의 생일이 겹친 적이 있었다. 그래도 가볍게 만나는 민규 치고는 꽤나 오래 만난 여자친구였다. 그래서 원우는 평소와 같이 공부를 했다. 재훈과 영민이 매점에서 맛있는 걸 사준 것 빼고는 딱히 그렇다 할 선물을 받은 것도 없었다. 같은 반이었던 민규는 하루 종일 퍼질러 잤다. 엎드려 있다가도 학교가 끝나는 종이 치면 가장 먼저 튀어나가는 민규였지만 웬일인지 그날은 교실 뒷정리를 하는 원우가 가방을 멜 때까지 가만히 교실 뒤편에 서 있었다. 안 가고 뭐해? 가방을 메고 뒷문으로 나서던 원우가 민규를 쓱 보며 물었다. 민규는 원우를 뒤따라갔다. 니 생일파티해야지. 어깨 위로 자연스레 민규의 팔이 올라왔다. 그래서 원우는 민규를 안 좋아할 수 없었다. 

  

 

 

 

 

 

  

 

 

 

지난주 일은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꼬신 게 맞았다. 민규의 여자친구가 민규를 데리러 와서 민규는 먼저 나갔다. 셋이서 술을 마저 마시는 것도 얼마 가지 못하고 쫑이 났다. 민규는 여자친구 차 조수석에 앉아서 창밖을 빤히 보다가 걸어가고 있던 원우를 발견했다. 그래서 차를 세웠고, 원우를 집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그때부터 원우는 취한 척을 했다.

 

 

실은 넷 중에서 제일 술 잘 마시는 건 전원우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취할 정도로 마신 적이 없었다. 원우의 집에 도착하고 나서 민규가 뒷좌석을 보니 원우는 잠들어 있었고, 깨워, 하는 여자친구의 말에도 민규는 원우를 업어 집까지 향했다. 

  

 

 

 

 

 

“금방 눕혀두고 올 테니까 주차장에서 기다려.”

 

 

 

 

  

 

가벼운 원우를 업은 채 민규는 핑핑 도는 머리로 생각을 했다. 전원우는 왜 이렇게 살이 안 찔까. 제가 10년 동안 그렇게 먹여놨는데. 그러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민규는 10층을 눌렀다. 

 

 

민규에게 업혀있던 원우는 눈을 살짝 떴다.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민규의 목을 좀 더 세게 끌어안았다. 민규는 익숙하게 원우의 집 도어락을 열고 들어갔다. 멀끔하게 정돈된 거실을 지나 안방 침대에 편히 눕혀두고 원우를 내려다봤다. 잘 자라. 나가려던 순간 원우가 민규의 손을 잡았다. 내치지 못하도록.

 

 

  

 

 

 

 

 

 

 

 

 

“....... 우리는 형제 아니었냐?”

“니랑 박영민은 형제였나 보네.”

“니랑 전원우도 존나 형제 같거든?”

“술이나 따라.”

  

 

 

 

민규는 원샷을 하고서 미간을 살짝 구겼다가 금세 표정을 풀었다. 그날 원우와 있었던 일들이 일주일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으나, 원우는 표정 하나 안 변하고 고추를 베어 먹었다. 

 

 

우리 친구지. 전원우가 그날 물었던 말에 민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움직였다. 그럼, 친구지. 뒤늦게 친구 사이에 이런 것도 하나 싶었지만 민규는, 원우에게 다른 무언갈 원할 수도 바랄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더 이상 친구가 아닌 게 되니까.

 

 

그래서 어땠냐. 술기운이 조금 오른 재훈이 낄낄대며 김민규를 툭 쳤다. 누가, 그러니까, 누가 깔렸냐? 너? 손가락으로 민규를 가리키다 돌았냐는 표정으로 저를 보는 민규에 다시 손가락 끝은 원우를 향했다. 대답이 없는 걸 보아하니 전원우가 그, 바텀이었네. 재훈은 다시 소주를 입에 털었다. 전에 다 같이 찜질방 갔었을 때 와, 나 김민규 보고 놀랐잖냐. 영민도 웃음을 터뜨리며 전원우를 힐끔 보았다. 너네도 참 대단하다. 

 

 

 

 

 

 

 

 

 

 

사실 재훈과 영민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원우가 게이라는 것쯤은, 얼추 짐작은 하고 있었다. 종종 짙은 향수 냄새가 나긴 했는데 매번 다른 향인 데다가 하나같이 아저씨들이나 쓸 법한 남자 향수였거든. 그래도 물어보는 건 쫌 그러니까, 원우가 화장실에 갔을 때 둘이서 소근거린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래도 지금이 구한말도 아니고, 제일 친한 녀석이 게이라는데 우리가 뭐라고 할 수가 있겠냐, 하며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축하나 해주자 하곤 했는데 잠자리 상대가 김민규였을 줄이야. 

 

 

니 여친은 아냐? 

 

 

민규는 고개를 저었다. 미쳤냐, 알면 나 개박살 나. 괜스레 원우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바로 여친이랑 쫑 안 난 거 보면 둘이 진짜 몸만 섞었나 보다 싶었다. 담배 피울 사람.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트리려 영민이 일어났다. 재훈도 따라 일어났다. 원래대로라면 전원우와 김민규도 일어나야 되는데, 웬일인지 둘 다 엉덩이에 본드라도 발라놓은 것마냥 의자에 딱 붙어 앉아있었다. 니네 뭐냐? 재훈이 얼빠진 표정으로 둘을 내려다보자 민규가 고개를 반쯤 돌리고 흘리듯 말했다. 나랑 전원우 담배 끊었어. 

 

 

 

 

 

 

“아주 지랄들을 하세요.”

“빨리 피우고 와.”

“니네 사귀면 죽여버린다 진짜.”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딴 일 없으니까 걱정 마.”

 

 

 

 

 

 

재훈은 끝까지 영 께름직한 눈빛으로 둘을 번갈아 보다 담뱃갑과 라이터를 들고 영민과 함께 나갔다. 시끌벅적한 술집도 그 테이블만 조용했다. 그날 이후로 둘은 처음 마주친 것이다. 원래 둘이 있을 때 대부분은 민규가 말을 했던 지라 조용한 건 사실이었으나, 전에는 조용해도 어색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맞선 보는 사람들처럼 섣불리 한 마디를 꺼내지 않았다. 원우는 가만히 앉아서 빈 잔을 만지작거렸다. 이러한 분위기가 답답했는지 민규는 결국 재훈의 의자로 옮겨 앉아 원우의 옆으로 갔다. 야. 낮게 부르자 원우가 느릿하게 고개를 제 쪽으로 돌렸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으나 더럽게 예뻐 보였다. 

 

 

 

 

 

 

 

 

“계속 이럴 거야?”

“뭘.”

“아무 말도 안 할 거냐고.”

“나 원래 말 없는 거 알잖아.”

“....... 나 여자친구랑 헤어질까?”

  

 

 

 

 

 

민규가 원우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예상 밖의 말에 당황한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원우는 눈을 피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김민규는 소주 병을 쥐었다 폈다를 몇 번 반복하다가 원우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 제 잔을 채웠다. 나 맨날 너한테 물어봤잖아. 원우가 뒤늦게 제 허벅지를 꾹 눌렀다. 맞아, 김민규는 항상 제게 물어왔다. 연애에 대한 모든 결정을. 

  

 

알아서 해. 민규가 잔을 부딪히려고 하기도 전에 원우는 먼저 술을 삼켰다. 목구멍이 따끔했다. 괜한 기대였고 착각이었다. 고작 섹스 한 번 한 거 가지고 여자친구와 헤어질 김민규가 아니지. 그렇게 오래 봐놓고도 아직도 잘 모른다. 원우는 시선을 돌려 담배를 태우며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친구들을 보았다. 

  

 

민규도 그의 시선을 따라 술집 바깥을 힐긋 보다가 다시 찰방거리는 제 잔을 보았다. 안 헤어지면 걔랑 결혼해야 돼. 민규는 원우가 헤어지라고 답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항상 그랬듯이, 원우는 옅게 웃었다. 좋은 사람이잖아. 민규는 허탈함에 실소를 내뱉었다. 분명 그날 나눴던 체온과, 느낌과, 시선과, 그 모든 것들은, 단순히 욕정을 풀기에 급급해서 했다기엔 무언가 달랐다고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짜 친구일까. 

 

 

  

 

 

 

전원우에게 묻고 싶었다. 우리는 진짜 친구일까, 원우야. 민규는 10년 전부터 쭈욱 그랬다. 친구는 맞는데, 친구라는 단순한 관계보다는 뭔가 더 깊었으니까. 반쯤 돌아간 원우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민규는 천천히 술을 마셨다. 전원우가 없던 일로 하자고 했는데. 없던 일로 하기 싫었다. 

 

 

 

 

  

 

 

 

민규에게 원우는 제 유년기의 전부하고도 플러스알파였다. 가벼워 보이는 성격상 누군가와 깊이 친해질 수 없었기에 묵묵히 제 옆에 있던 전원우가 오버 조금 보태서 제 학창 시절의 모든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돈독했기 때문이다. 

 

 

몸만 자랐지 철은 하나도 안 들어서, 제가 하는 짓이 애새끼 같은 건 제 스스로도 잘 알았다. 선생과 부모가 다그칠 때에도 전원우는 가만히 제 말을 들어줬다. 그래서 민규는 원우에게 모든 걸 말했고, 모든 걸 물었고, 모든 걸 주었다. 분명 친구였다.

  

 

그랬던 전원우와 맨살을 맞대고 체온을 나누었을 때 김민규는, 어쩌면 제 여자친구와 했을 때보다 더 최선을 다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영민과 재훈이 돌아오기까지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민규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서 핸드폰을 했다. 그들이 돌아오자 마치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던 지지난 주처럼, 제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며 시답잖은 얘기를 했다. 야, 이 모델이 나 인스타 선팔했다. 맞팔 해 말아? 재훈은 어깨를 퍽 치며 여친도 있는 새끼가 아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나댄다고 핸드폰을 뺏어 액정이 뚫어져라 사진들을 보았다. 죽이지. 두 남정네가 손바닥만 한 핸드폰 하나를 사이좋게 쥐고 감상하는 꼴을 보자니 영민도 호기심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나도 보여줘. 핸드폰 속으로 들어갈 양으로 사진을 넘겼다. 

 

 

원우는 집게를 쥐고 고기를 뒤집었다. 그러고 나서 반쯤 베어 물었던 고추를 다시 한 입 씹었다. 아릿한 매운맛이 혀끝을 쿡쿡 들쑤시다가 금세 사그라들었다. 제 마음과도 같았다. 

 

 

  

 

 

 

 

 

“친해지면 나 소개 좀.”

“이 새끼 쫑 나면 그다음에는 나.”

“얘가 미쳤다고 너네를 만나겠냐?”

“왜 이래, 우리 엄마는 내가 강동원보다 잘생겼다고 했거든?”

“언제?”

“나 6살 때.”

“병신.”

 

 

  

 

 

 

웃음을 터뜨리며 저들끼리 신나게 노가리를 까다가 고기를 작게 자르는 원우를 보고선 민규가 집게를 가져갔다. 크게 크게 잘라야지. 집게와 가위를 넘겨주며 손이 살짝 스쳤지만 둘 중 그 누구도 피하지 않았다. 피하는 게 더 이상하니까.

 

 

먹음직스레 익은 고기를 오물거리다가 민규가 재훈에게 물었다. 너네 형 결혼식장 많이 비쌌냐? 재훈이 가격을 귀띔해주자 민규는 오, 하고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정도면 호텔에서 해도 되겠네. 했더니만 일제히 너 결혼하게? 하는 목소리가 양쪽에서 쏟아졌다. 해야지, 나도. 민규가 답했다.

 

 

우정이냐 사랑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의 그것과 같은 명대사를 읊조리는 재훈을 보며 저 새끼는 이미 취했구나 싶은 민규와 원우와 영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넷이서 여섯 병을 비웠으니 재훈이 저럴 만도 했다. 민규와 영민도 알딸딸한 건 사실이었다. 원우는 민규의 입에서 쏟아진 결혼과 관련된 말들을 들은 이후로 도통 알코올이 체내에 흡수가 되질 않는 듯했다. 

 

 

 

 

  

 

 

 

우, 욱. 재훈의 헛구역질에 영민은 조금이나마 올라왔던 취기가 한 번에 가셨다. 야, 화장실 갔다 온다. 영민이 재훈을 부축하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다시 둘이 되었다. 

  

 

민규는 가만히 앉아서 핸드폰을 보았다. 원우도 핸드폰을 보았다. 둘 다 마땅히 할 것이 없었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간 더 어색해지는 게 불 보듯 뻔했기에 멀찍이 떨어져 앉은 채 눈만 끔뻑였다. 야, 전원우. 민규가 핸드폰을 내려두고 원우를 불렀다. 원우는 고개만 반쯤 돌렸다. 

 

 

  

 

 

 

“나랑 섹스할래?”

“어?”

“아니면 섹파할래?”

“갑자기.......”

“원우야.”

“응.”

“나 여자친구랑 헤어질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쉬이 답할 수 없었다. 원우야. 전원우. 원우는 민규가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와 동그랗게 모아지는 입술이 좋았다. 한창 지독하게 짝사랑을 했을 때는 미친 척하고 입술이라도 비벼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나, 생각은 생각으로 그치기로 하고 못 본체 하던 것이 수 년이다. 민규가 다시금 제 이름을 불렀다. 어이, 반장.

  

 

반장이 아니라 회장이라고, 등신아. 민규가 원우를 반장이라고 부를 때마다 재훈은 어깨를 퍽 쳤다. 반장이 더 입에 착착 붙잖냐. 회장은 좀, 늙다리 아저씨 같은 느낌 아니냐? 의미 없는 말을 뱉어내고 큭큭 웃으며 원우의 어깨에 얹힌 손을 살짝 움직여 감쌌다. 원우는 회장보다는 반장이지. 그 말에 원우는 반장을 할 걸 후회하기도 했었다. 

 

 

  

 

 

 

“내가 그 뭐냐, 게이는 아니거든.”

“....... 어.”

“여자가 좋다고, 근데.......”

 

 

  

 

 

 

니가 자꾸 생각나. 조금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민규가 읊조렸다. 아니, 야, 오해하지 마. 너랑 한 섹스가 떠오른다는 게 아니고, 니가, 머릿속에서 막 붕붕 떠다닌다니까. 

 

 

실제로 취했을 때는 진담을 하기보다는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늘어놓을 확률이 크다고 믿는 원우였지만 당연하게도 민규의 말에 심장이 쿵쿵 요동쳤다. 날 좋아한다는 거야?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물었더니 이윽고 제 손을 꼭 잡아왔다. 좋아. 좋아하는 것 같아, 전원우.

 

 

 

 

 

 

 

 

반쯤 넋이 나간 재훈을 부축해 자리에 영민이 돌아왔을 땐 이미 네 자리가 비어있었다.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이야. 영민이 술집 안을 두리번거리다 직원을 붙잡고 물으니 이미 술값 계산하고 짐 챙겨서 나갔단다. 저 미친 새끼들. 다음번에 만나면 족쳐버리라 다짐했다. 그들에게 다음은 3년 뒤인 게 문제였지만. 혼인신고가 되는 나라로 이민까지 갔다는 말 아니겠냐. 아직 젊다, 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