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 전형사의 No.717
2021. 2. 12. 14:39

 

 

끝이 없을 줄 알았던 지옥의 고시공부 끝에 대학합격. 이어서 몰아치는 대학등록금에 찌들어 인생도피 겸 전역. 그 후 복학하고 죽은 듯 졸업한 다음에는 곧바로 공무원시험. 그렇게 겨우 달아 본 강력 1팀 뱃지. 그 나이 28살. 연애는 개뿔, 여자 손이라곤 풀무원 월신청 했다가 아줌마가 고맙다고 악수 해준 게 전부.

 

 

5살 때부터 꿈에 그리던 강력 4팀, 그 유명한 정의의 경찰아찌. 처음으로 단상에 서서 표창을 받고, 울면서 술병을 빨던 때. 그 당시 전원우는 한 때나마 행복했다. 기세등등하게 본가에 가서 절도 올리고 내려왔다. 그런데 현실은 개판도 이 정도는 아니겠다, 싶을만큼 뭐 같았다. 강력 1팀으로 배정 받았을 때만 해도 전원우는 대한민국을 장악한 검은조직의 뿌리를 뽑나 했다. 심지어 긴급할 때 쓰라고 배급받은 권총은 그야말로 간지 그자체였다. 광 나는 번쩍번쩍 AH-4 어쩌구… 퇴근하고 권총 닦는게 삶의 미약한 도피처였던 시절. 그 시절 전원우는 당장이라도 사냥개처럼 조직 간부의 대가리를 제압 할 의향이 있었다. 그만큼 깡도 세고, 포기를 모르는 남자- 이거다. 한 번씩 시간 날 때면 마인드 시뮬레이션도 해봤다. 폐허가 된 공사장 한 가운데. 피 투성이가 된 자신. 간지 그 자체. 나를 둘러싼 부하들을 피해 잽싸게 중심으로 침투해서 그대로 보스의 정맥을 따닥…!

 

 

“딱은 개뿔. 거기. 아버님, 이빨 좀 그만 딱딱 거리세요.”

“니미 시부럴…내가 돈이없어서 그렇지….”

 

 

아 뒷골. 현실은 촌락 시장통이나 다를게 없었다. 전원우가 여기와서 배운거라곤 같은 팀 선배의 희생으로써 성사 된 평화도, 대한민국의 어두운 밑바닥도 아닌, 이따금씩 욕이 입천장까지 올라와도 웃으면서 넘어가는 법 뿐이였다. 지금 한국은 지나치게 평화로웠고, 다른 중대한 임무들은 전부 1팀 아니면 2팀이 가로채가서, 어중간한 4팀은 찬 밥 신세나 같았다. 아니, 몇 년 전만 해도 조직폭력배가 판을 쳤잖아? 왜 조용한건데? 왜? 매일 번쩍번쩍 광 나게 닦아놓던 자신의 애마 권총 AH-4는 저기 탈의실 14번 서랍에 쳐박아둔지 오래다. 쓸 일이 있어야지, 쓰던지 하지. 졸지에는 폭력팀과 같이 인사관리나 민원출동 같은 걸 하란다. 죽어도 싫다했지만 반장님이 부상을 달고 계셔서 당분간 4팀은 임무중지가 걸렸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전원우는 반평생 만져 본 적도 없는 엑셀을 쳐야했다.

 

 

 

“아버님, 나중에 보호자 오신다니까 소파에 가서 좀 쉬세요.”

“내가 왜 니 아버님이야, 이,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좀 가서 앉아줘요. 제발. PIZ. 날아오는 욕들을 안주 삼아 오징어 다리 한 짝을 씹던 원우가 빙긋 웃어보였다. 사실 엑셀만 얌전히 치면 그건 양반이였다. 수사도 같이 전담하고, 치한이나 잡업무까지 수행해야하는 탓에 요즘 원우는 이러다 과로사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도 그럴밖에 심야민원은 대부분이 만취한 꽐라들이 난동피우다가 잡혀온 경우 뿐이었고, 뭐 가끔가다 폭력사건도 있지만 그건 그거대로 시시하게 끝났다. 한마디로 전원우는 지금, 인생이 가장 의미 없다.

 

 

 새벽 2시가 지나서야 겨우 후드티로 갈아입었다. 원래라면 20분 전에 진작 집가서 맥주빨고 있어야 하는데, 보호자가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자리를 지켜야했다. 물론 그 사이에 온갖 욕을 다 들었다. 증조할머니까지 나왔으니 말 다한 셈이다. 잘 참았다. 나 자신. 정의로움의 극치에는 분명 전원우 석자가 있을 것이다. 경찰서 문을 여는 발이 가벼웠다.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려서 해외맥주 5캔 묶음을 샀다. 5캔에 만원이라길래, 충동적으로 구매하고 나니까 담배 살 돈도 없었다. 하긴 나랏밥 먹고 사는 인간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냐만은. 아쉬운대로 막대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마음을 울리는 향이 나는 거다. 달짝지근하면서도 매쾌한… 지금 딱 전원우가 말려서 뒈질거 같은 냄새. 

 

 

“딱 한 대만 빌려..?”

 

 

람보르기니인가? 아니, 말보로 블루? 연기가 자욱한 골목을 발견하고 홀린듯 커브를 돌았다. 향만 맡아도 정신이 맑아지는게, 입에 넣고 빨면 화룡점정 되시겠다. 급한 마음에 맥주캔 부딪혀가며 빠른걸음으로 커브를 돌았는데, 담배는 있었다. 담배는 있었는데 그러니까... 이게 웬...

 

 

 

“뭐야?”

“웬 아저씨?”

“…….”

 

 

 

손가락 사이에 끼여있는 저건, 분명 담배긴 한데. 아직 활활 타가는거 보면 돛대이기도 한데. 심지어 비싸서 잘 피지도 못하는 건데. 문제는 상대가 교복을 입었다는 점과, 열댓명 돼 보이는 집단이라는 점이였다. 직감적으로 원우는 느꼈다. 백퍼 뜯긴다. 이건 찐이야. 경찰 강력반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원우는 순간 몸이 굳었다. 하나같이 우람해보이는 덩치들에.. 저건 또 뭐야. 팔에 문신까지 했다. 그것도 고등학생이? 어쭈, 용이 있네. 아 그냥 경찰이라고 밝힐까, 해서 주머니를 더듬는데, 신분증카드를 경찰복 안에 놓고온게 그제야 떠올랐다. 젠장할, 이걸 그냥 지나칠 수도 없고.

 

 

“배짱도 좋네.  초등학교 앞에서 담배라니.”

“뭐야? 저 인간.”

“다 큰 어른도 그렇게는 안 한다. 불 꺼. 이 새끼들아.”

 

 

될대로 되라지. 태생부터가 정의로웠던건 어쩔 수 없었다. 불의를 보면 못 참았고,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헤집어놔야 분이 풀리는 성격이라. 원우는 고개를 삐딱하게 꺽어 눈만 움직였다. 한 명, 두 명.. 8명? 오질라게 많네. 마음 같아서는 옹기종기 앉아서 같이 빨고싶지만... 경찰이 가오가 있지. 전원우는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해서 인생의 고비를 맞았다. 고3 한창 중요한 시기에 관심 받고싶어서 회장선거 나갔다가 보기좋게 떨어졌을 때도, 군대에서 의기양양하게 썸타던 여자애한테 전화 했다가 퇴짜 먹었을 때도, 물론 지금도 그랬다.

 

 

“웃기시네. 지가 뭐라고. 어차피 애들도 없는데 상관 없는 거 아닌가?”

“교복 입고 담배피는 취향?”

“저희가 교복을 좋아해서요. 그 뭐냐. 코스프레 한 건데? ”

 

 

그 말에 애들이 킬킬 웃어댔다. 거기에 또 전원우의 정의가 빡 돈 거다. 어른을 무시했지 방금?  여기서 물러나면 백퍼센트 방금 산 해외맥주도 뜯길거고, 00동 경찰 잣밥이라더라, 같은 소문도 돌 게 틀림없었다. 그럼 야간 순찰이 더 늘어날테고, 야근도 기하급수적으로 잦아질거고… 나는 집에 못가고? 집단폭행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전원우에게 야근만큼은 용납이 안 됐다. 경찰서에서 야근? 이건 자살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아저씨, 멍하니 서있지 말고 그냥 갈 길 가세요.”

“…….”

“보니까 비실비실해서 남자구실도 못할 거 같은데.”

 

 

눈썹이 꿈틀. 전원우는 속에서 뭔가 뚝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군대가서 죽어라 등반하고, 눈보라 뚫고 입수하고, 밤 낮으로 팔굽혀펴기 한 게 눈물처럼 스쳐갔다. 그런데 뭐라고? 남자구실도 못하게 생겨? 물론 자기가 남들보다 슬림한 체형이란건 잘 알고있다. 그래도 어디가서 꿀리진 않는데.. 생애 최초로 그런 말을 들은거다. 그것도 끽해봐야 수학1 푸는 미개한 놈들한테. 후드 주머니에서 손을 뺀 전원우가 팔목을 걷었다. 경찰이고 잣이고, 이건 그냥 응징이다. 그 뭐냐, 그래. 파워레인저처럼. 절대악을 쓰러트리는..

 

 

“적어도 상도덕은 지켜야지. 머리에 뭐가 들었니.”

“아 좀. 가시라고요.”

“너네같은 애들 때문에 선량한 시민이 피해보는 거잖아. 특히 나같은 공무원이.”

“존나 기어오르네. 말 끝마다 따박따박…!”

 

 

가만히 기대있던 한 놈이 빡친듯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걸 보면서 손이 닿으면 당장 엎어치기를 해줄 생각이였다. 씨발.. 그래 나같은 사람들이 특히나 더 피해보지. 아마 나는 내일 폭행죄로 경찰서에 가서 시말서 쓰고 서장님한테 깨진 다음 술병 빨면서 파출소로 전근 갈 게 틀림없다. 그런데도 망할 전원우의 정의는 속에서 활활 불타올랐다. 절대악은 응징이 답!

 

 

 

“그만.”

“……?”

“담배 꺼. 가자.”

 

 

뻗어오던 손이 멈추길래 덩달아 원우도 멈칫했다. 머리 속에서 재생되던 액션씬이 뚝-,하고 끊긴다. 뒤에서 이때동안 말 한마디도 없던 놈이 입을 연거다. 그런 주제에 뱉는 말은 또 정직해서. 전원우는 걷었던 손목을 다시 내려야했다. 시선만 돌려 다른 애들을 보니 당황한 표정들이다. 

 

 

“그냥 가자고?”

“응.”

 

 

뭘 묻냐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인 애가 담배를 비벼끊다. 그러자 하나 둘씩 담배를 땅에 던지는 거다. 전원우는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니까, 쟤가 대빵인건가? 툭툭 땅으로 떨어지는 돛대들을 보며, 속으로 살짝 아깝다고 생각했다. 저거 10분은 더 필 거 같은데… 그걸 아는지 한명만 담배를 안놓고 쥔 상태였다. 보니까 제 멱살을 잡아올리려던 놈이다.

 

 

“지금 이 꼰대 때문에 그러는거냐?”

 

 

꼰대.. 전원우는 멋쩍게 뒷목을 긁었다. 틀린 말도 아닌건가 싶다. 

 

 

“왜?”

“…….”

“병수야. 싫어?”

 

 

그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진건, 그동안 쌓아온 직감이 보낸 적신호였다. 쟤 좀 위험하다. 걔는 병수라는 애의 턱을 살살 긁으며, 입만 씨익 웃는다. 대답 해야지. 큰 키에 날선 눈매. 그 눈이 움직인다. 정적동안, 나를 훑는거다.

 

 

“……어.”

“개새끼는 주인 말을 들어야지.”

“…….”

 

 

그치? 멍멍아. 손에 들려있던 마지막 담배가 떨어지고, 애들은 자리를 떴다. 원우도 지나가는 길을 터주었다. 다음부터는 숨어서 펴라. 욕짓거리를 뱉으며 지나가는데, 나름대로 볼 만했다. 바닥에 담배꽁초를 버리고 간 건 거슬렸지만 돛대를 버린걸 보면 칭찬해줄만 했고. 그런데 한 아이가 우뚝 그 곳에 멈춰서있다. 지나 가다말고, 내 앞에서 멀뚱하게. 길을 막고 있는건가 싶어 발을 움직이는데 그대로 따라온다. 

 

 

“…무슨 할 말있냐.”

“…….”

 

 

가로등을 등지고 서있는 얼굴을 가만 보니 방금 그 놈이였다. 말 한마디에 전부 담배를 비벼 끄게 한, 눈빛이 뱀같은 애. 시비 거는건가?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선에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걔가 주머니에 넣고있던 손을 뺀다. 이거 좀, 위험한데.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칼 같은걸까. 원우는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었다. 

 

 

 

“이거. 계속 보고 계시길래.”

“……뭐야.”

 

 

주머니에서 나온 건 시퍼렇게 날 선 나이프도, 커터칼도 아닌, 하얀 담배곽이였다. 비닐 포장도 안 뜯은 게 순 날 것인. 너무 독해서 원우도 잘 안피는 기종. 원우는 멀뚱히 그것을 봤다가, 눈만 움직여 다시 걔를 본다. 꿈틀, 눈썹이 사선으로 어긋난다.

 

 

“받으라고?”

“네.”

“…무슨. 압수 해 달란거냐?”

“그건 아니지만. 담배 피고 싶어 하시길래.”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아니꼬왔지만 건내지는 담배를 마다할 순 없었다. 묵직한 그립감에 기분이 안 좋았다면 순 가짓말이다. 하지만 티를 내서도 안 됐다. 경찰이 가오가 있지…

 

 

“그래, 뭐. 고맙다. 이건 압수.”

“네. 다 가지세요.”

“…….”

 

 

압수라는 명분 하에 담배를 받아드니, 한 뼘 큰 키의 절정에 있는 잘 난 얼굴이 슥 웃는다. 그래서 나는 그 애의 가슴팍을 봤다. 이름을 보는 척. 그러자 상대를 짓누르는 듯한, 그르렁 대는 목소리로 그러는 거다.

 

 

“전부 다.”

 

 

원우는 그 애를 지나쳐 걸었다. 끈덕지게 눌러붙은 시선은 코너를 돌 때까지도 이어져서, 졸지엔 후드를 눌러써야 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3시였다. 다 식은 맥주는 냉장고에 넣고 다음 날 먹어야했다. 시간도 너무 늦어서 마실 수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 난, 무얼했나. 전원우는 가슴팍에 달려있던 석자를 곱 씹었다. 김민규. 김민규. 광기 돈 걸로 유명한 K그룹 막내아들 아닌가.

 

 

 

 

*

 

 

 

 

K그룹은 전자사업이 흥행하면서 대기업으로 급상승한 기업이라 그만큼 비리도 많았다. 이미 경찰 쪽에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였고, 이제는 시민들까지 알아채는 사태로 고조되고 있어 주가가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걸 다시 살린게 김회장이였다. 김회장은 기업을 살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벌였다. 배다른 자식 3명을 낳았고, 사업에 차질이 생기면 가차없이 죽였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증거 하나가 안 남아서, 형사 측은 아무런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 시국에 K기업 막내아들이랑 부딪힌 건 좀 이상한 일이였다. 특히나 막내라던 김민규는, 상속싸움에서 일찍 패하고 망나니처럼 논다던 인간이 아니였던가. 까딱해서 기업에대해 입이라도 잘 못 놀렸다간 어떻게 될 지 뻔했다. 그런 막내아들을 밖에 풀어둔 건 무슨 꿍꿍이인지. 전원우는 K기업 관련 수사자료를 찾아보려했지만, 전부 기소처리 돼서 볼 게 없었다. 그렇다면 언론은? 매스컴에 뜨는 거라곤 새로운 사업 추진… 대성공. 상속자는 첫째다.. 같은 흔한 기사가 전부였다. 어디에도 김민규 이야기는 없었다.

 

 

 

“전형사. 반장님 퇴원 미뤄졌대. 이번 주까지 실적 못올리면 동문동 조직폭력 사건 5팀으로 넘어간다지?”

“그럼 임무중지 당했는데 어떡해요? 우리가 뭘 할 수 있다고.”

 

 

 

죽상이 된 선배가 꿍얼거리면서 그랬다. 원우는 노트북을 덮고 의자를 빙글 돌려, 반장님의 빈자리를 흘겼다. 휑한 부서가 4팀이 폐지되기 직전이란걸 암시하고 있는 듯 했다. 반장님은 임무 나갔다가 전치 7주를 받았고, 그나마 힘 좀 쓴다던 형사들은 다른 지서로 스카웃 돼서 이미 발 뺀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입사한지 몇 달 안 된 신입들을 바로 임무에 투입하자니, 그건 그거대로 위험했던 거다. 원우는 머리를 쓸어넘기다 말고 파티션 옆에 놔둔 담배곽을 봤다. 저걸 K그룹 막내아들이 줬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기나 할련지. 솔직히 K그룹 비리사건에 대한 증거 한 개만 나와도 경찰인생 쫙 펴는 거였다. 바로 별 하나 다는 거고, 연봉도 최소 천은 오르고.. 담배 하나 살 돈 없어서 고딩한테 기부 받지도 않을테고. 여하튼 뭐 하나라도 찾아서 밝히면 4팀 뿐만 아니라 00동 영웅이 되는건데.

 

 

사실 전원우는 김민규가 좀, 보고싶었다. 그러니까, 사적인 감정으로 말고 수단적인 경로로 만나면 어떨까, 한 거다. 기업이 꽁꽁 숨긴 막내아들의 원인이 궁금해서.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많은 날이 지났고, 전원우는 한번씩 그 골목을 지나가기도 해봤지만 김민규을 다시 보긴 어려웠다. 차라리 그 때 이름을 보고 불러세울걸 그랬나. 어차피 그러지도 못하는데, 구차한 미련만 남았다.

 

 

 

그런데 며칠 뒤. 거짓말처럼 김민규가 나타난 거다. 그 날은 구름이 잿빛이였고, 날이 우중충해서 처음으로 걔가 준 담배를 뜯은 날이였다. 그게 시동탄이였는지, 아니면 그저 우연인지. 어떤 미친놈이 사거리 골목에서 폭력을 휘두르나 했더니. 보니까 걔였던 거다. 넥타이는 어디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피가 튀어서 지저분해진 와이셔츠를 입은, 그 날처럼 무채색한 김민규가, 아무렇지 않게 그런다. 오랜만이네요, 하고. 

 

 

“한 달 만인가요? 저희.”

“…….”

 

 

목울대가 뜨끈해지는 걸 애써 억눌렀다. 보고싶긴 했지만,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그냥 스쳐가는 인연이 될 줄 알았는데, 이러면 꼭 필연이라도 된 것 마냥 생각하는 자신이 싫었다.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넣어뒀던 담배곽을 구겼다. 아직 돛대가 꽉 차있는데, 빈자리 하나 났다고 무색하게 금방 으스러진다.

 

 

 

“…강형사님. 사람 데리고 먼저 돌아가세요.”

“여기 혼자 정리하게?”

“……아는 사람이라.”

 

 

 

원우는 피떡이 돼서 쓰러져있는 사람을 흘깃 봤다가, 벽에 기대있는 김민규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지친 듯 허해진 눈빛으로 시선을 돌려준다. 주먹에만 묻어있는 피가 그리 반갑지만은 않아서, 원우는 그걸 보다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저거, 네가 그랬니.”

“그냥 뭐. 정당방위죠.”

“…….”

“그보다 경찰이셨네요. 어쩐지 정의롭더라.”

 

 

 

큭큭 웃는 얼굴이 안 어울리게 반듯했다. 원우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라서, 고개를 돌려 옆을 봤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냥 둘 다 평범하게 시내를 걷다가 마주치겠거니, 했던 거다. 어디까지 상상했냐면, 김민규는 여자친구랑 영화관에 가던 길이였고 자기는 퇴근길이였는데…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할 여유는 아니지. 막상 이런 상황에서 맞닥뜨리게 되니 머리가 새하얘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하는데, 그동안 궁금했던 걸 제압해서라도 물어봐야하는데. 정작 입안 여린 살만 씹어댔다. 그걸 지켜보던 김민규가 픽 웃더니 그런다.

 

 

 

“전원우 형사님.”

“…이름을 언제 알려줬었나?”

“이름 같은 건 쉽게 알죠.”

“……”

“그러는 전형사님은 제 뒷조사도 하셨으면서.”

“……!”

 

 

정곡. 순식간에 치고들어온 김민규의 타격은 꽤나 상당했다. 전원우는 일어나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김민규를 말없이 쳐다봤다. 가로등을 지나 다가오는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한다. 눈썹 밑으로 드리우는 그림자가 짙은게, 어딘지 모르게 서양적인 얼굴인가 싶어서. 전원우는 본의아니게 김회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다른 얼굴. 배다른 자식이 맞는듯 했다. 그 와중에 육감이 붉은 적신호를 보내왔다. 잡아 먹힐거야. 천적 앞에 놓인 영락없는 생쥐가 된 기분. 딱 걸렸네. 망할. 전원우는 곧장 얼굴을 구기며 절망했다. 자신이 한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던 거다. 얘는 그 악랄한 K그룹 막내아들이고…

 

 

“이번 일은…. 좀 만나뵙고 싶어서 그랬어요.”

 

 

광기 가득한 그 김회장이, 3명 중에 가장 아끼는 놈이란 것. 며칠 전 서류를 뒤지다가 찌라시 비슷한 걸 본 적 있다. 김회장 밑으로는 3명의 아들이 있고, 그 중 가장 늦게 들어온 아들을 제일 아낀다고. 성격이 자신과 닮아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 본인 피셜로 그랬다더라. 발 끝이 얼어붙은 듯한 기분에 전원우는 김민규 어깨 너머로 시선했다. 그런걸 놓칠리 없는 김민규가 제 손목을 잡아챈다.

 

 

“봐주실 거죠?”

“…….” 

 

 

이중적인 의미. 자신을 보라는걸까. 이니면 이번 사건을 눈 감아달라는 걸까. 뭐가 됐는 원우는 움직일 수 없었고, 움직여서도 안 된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김민규가 손목 중 움푹 파인 곳을 꾸욱 누르자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아, 젠장할. 단단히 잘 못 걸렸다는 게 몸서리가 날 정도로 느껴졌다. 전원우는 끈덕지게 달라붙는 시선을 또 한 번 받아내야 했다. 기분 나쁜 눈매였다. 

 

 

 

“참 철저한데, 어쩔 때 보면 참 허술해요.”

“…….”

“보안 뚫은건 칭찬할게요. 근데 개인용 컴퓨터로 접속한 건 미스.”

“…협박 할 거면 안 통해.”

“에이. 협박은 아니고.”

 

 

 

어깨에 손을 올린 김민규가 목덜미 근처를 만지작 거린다. 어깨가 움츠러 드는건, 어쩔 수 없는 반사반응일 뿐인데, 뭐가 재밌는지 노골적으로 문질러왔다. 그, 그만. 김민규의 손목을 잡아 옆으로 치우니 이제는 눈빛으로 저를 훑는다. 뱀이 똬리를 트는 기분. 순간 김민규는 진짜 뱀일 수도 있겠다, 했다.

 

 

 

“그냥 간만에 형사님 얼굴 보러온 거에요.”

“…….”

“반면에 형사님은 할 얘기가 많아 보이던데.”

“무슨 말을 듣고 싶은거야.”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

“…….”

“부탁할 거, 있지 않아요?”

 

 

 

김민규는 어떻게 된 건지 정곡만 딱딱 짚어냈다. 새가 먹이를 찾을 때 풀은 피하고, 벌레만 쪼아대 듯이. 겉은 돌려말하고 있지만 의도는 명확하게 전달한다. 누구보다 빠르고, 빈틈만 정확히 노려서, 순식간에. 전원우는 당황 할 힘도 남아나질 않았다. 처음 얘를 봤을 때부터 누가 빨아먹기라도 한 듯이 기가 쭉쭉 빠져나가고 있었다. 전원우는 문득 생각한다. 뱀의 천적이 뭐지. 아니다, 쟤는 흑곰도 삼킬 맹수다. 강한 맹독을 가진, 독사 중에 독사. 나는 그 앞에 던져진 다리를 다친 생쥐다.

 

 

 

“..말해도 안 들어 줄 거잖아.”

“들어줄게요.”

“뭐?”

“형사님이 뭘 부탁하든. 다 들어준다고요.”

 

 

그게 무슨.. 퍼뜩 고개를 들어 웃고있는 김민규를 본다. 내가 뭘 부탁할 줄 알고? 전원우는 직업상 혼란에 휩쌓이는걸 싫어했지만, 이번 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대놓고 표정을 들어낸 거다. 반장님이 범죄와 맞닥드렸을 땐 표정관리가 중요하댔는데. 아주 대차게 말아먹은 꼴이였다. 이걸 반장님이 본다면 나를 청소부로 전근 보낼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구겨진 미간 밑으로 혼동하는 눈동자가 그것을 보여줬다. 내가 당황해 하고있단 걸. 그걸 본 저 애는 웃는다. 뭐든지 들어줄게요.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가 꽤나 유혹적이다. 반쯤 이성을 잃고 요구를 하려던 그 때.

 

 

 

“대신에.” 

“……?”

“나랑 한 번만 자요.”

 

 

 

와장창. 머리 속에서 뭔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뭐라고?

 

 

 

“가는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죠. 기브 앤 테이크. 몰라요?”

“아니, 그러니까. 방금..”

“아. 돌려서 말하면 모르나? 그냥 섹스 한 번 하자는 건데.”

 

 

 

뭐? 생소한 단어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건 순식간이였다. 당황한 탓에 표정 같은 건 이미 개나 줘버린 뒤였고, 날 것 그대로의 표정이 드러나자 김민규는 더 관심을 보였다. 전형사님, 그런 얼굴 처음 보네요. 전원우는 당장 자기가 112에 신고를 하고 싶었다. 아무나 자기를 유치장 같은 곳에 쳐박아줬으면 좋겠다고. 이 미친 변태놈 앞에서 도망가게 해달라고 아무나 잡고 싹싹 빌고 싶은 심정이였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또 장소까지 으슥한 골목길이다. 마음같아선 김민규를 제압하고 싶지만, 덩치도 덩치일 뿐만 아니라 상대는 K그룹 애물단지인 막내아들 김민규라는 점. 까딱 잘 못 건드렸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확실한건, 사지가 멀쩡치 못할 거라는 것.

 

 

 

“꽤 괜찮은 거래 아닌가요? 뭐든 들어주는 대신에 하룻밤만 같이 보내자는 건데.”

“……허.”

“나 같으면 당장 알겠다고 해요. 뭐, 상대가 전형사님이면 고민 할 것도 없겠지만.”

 

 

 

이 당돌한 고딩을 어쩜 좋을까. 전원우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자길 쳐다보는 민규에 기가찼다. 잘생긴 건 인정한다만, 안에 들어찬 알맹이가 썩어 문드러진 놈이다. 여자랑 연애 한 번 안해봤는데 중간 과정 다 씹어먹고 남자한테 뒤를 대주라고? 집안 씨가 마르는 한이 있어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있어도 안 됐고. 가까이 다가온 김민규를 밀어내곤,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었다. 무전기를 찾을 셈이었다.

 

 

 

“죽어도 너한테 깔릴 생각 없어.”

“아, 그럼 제가 깔릴까요?”

 

 

미쳤냐? 순간 거짓말처럼 나체의 김민규가 스쳐지나가서, 전원우는 머리를 헝클었다. 쟤랑 있다보니까 나도 썩었어. 들을 가치도 없다. 욕짓거리를 뱉으면서 이만 복귀하려고 무전을 꺼내 들었다. 주머니에 있던 담배곽이 손에 걸렸지만 별 신경 쓰진 않았다. 전부 다 돛대였는데. 좀 아쉽긴하네. 김민규를 등지고 골목을 벗어나며, 돌아간다고 무전을 하려던 때. 버튼까지 누르고 강형사를 부르려던 그 짧은 순간. 그 찰나에, 김민규가 그런다. 

 

 

“가서 후회하지 마시고.”

 

 

짙은 숨이 귓가에 고스란히 가라앉는다. 뒤에 있던 놈이 바로 옆까지 온 거다. 당장 몸을 돌려 팔꿈치로 명치를 내려 찍을 생각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김민규가 내 뒷목을 잡은게 더 빨랐다.

 

 

 

“..읍!”

 

 

 

당겨진 뒷목은 그대로 김민규의 입술로 향했다. 얼마나 세게 당겼는지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고, 그 다음이 엉켜 들어오는 뜨거운 혀였다. 손에 들려있던 무전기가 저 끝 전봇대 밑으로 굴러가는 걸 볼 틈도 없었다. 그만큼 걔는 급했고, 나는 무방비 했다는 말이 맞았다. 김민규는 우왁스럽게 키스해오며 정신을 올곧이 자신에게만 쏟으라는 식으로 사인을 보내왔다. 나는 끝까지 부인하며, 고개를 움직여 피하고, 주먹으로 등을 마구 헤집어봐도, 이 호모새끼는 남자에 미쳤는지 놔주질 않았다. 무슨 입술에 접착제라도 발랐나? 이러다가 질실사로 죽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 발로 정강이를 걷어차자, 그제야 입술을 뗀다.

 

 

 

“아야… 전형사님 발이 험하시네요.”

“야, 이, 미친…!”

 

 

 

입술에서 알싸한 맛이 나 손으로 슥 훑었더니, 붉은 혈흔이 묻어났다. 아까 부딪히면서 찢어진 모양이였다. 고개를 들어 김민규를 보면, 나랑 똑같은 자리에 피가 송골송골하게 맺혀있었다. 씨발. 피도 공유했어? 전원우는 이런 문제에서 꽤나 예민했다. 피를 공유하면 의형제가 된다고, 누가 그랬는데. 의형제는 원하지도 않았고, 물론 게이가 되는 것도 절대 사절이였다. 그런데 금방 전에 섞여 들었던 혀도, 뒷목을 잡고 누르던 투박한 손길도 전부 전원우에게 있어 낯선 것이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김민규는 걷어차인 정강이만 탈탈 턴다.

 

 

 

“너, 이 씨발…”

“욕 쓰지 마세요. 형사님은 모르겠지만 그거 좀 꼴려서.”

“와…...”

“저 키스 잘하죠?”

 

 

 

김민규는 입술에 묻어있는 피를 닦으면서 씩 웃어보였다. 기가차서 당장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 와중에도 떠올린건, 언론에다가 K그룹 막내아들이 동성애자 라는 걸 알리면, 아마 기사는 안 올라갈 거고 뒷산에 매장당하겠지, 같은 거였다. 머리가 복잡해서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금방 있었던 일을 납득하지 못했다. 28년 인생 평탄하게 좀 보내나 했더니, 씨발 10살이나 어린 고딩한테 첫키스나 따이고… 벽에다가 머리를 박고 주저 앉는데, 옆으로 다가온 김민규가 굴러갔던 무전기를 건내면서 그런다. 피범벅이 된 손이라 덥석 받기도 좀 그랬다.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

“제 번호는 아실테고.”

 

 

그럼. 모를리가 없지. 신상을 캐냈다는 거까지 딱 걸림 셈이였다. 도망치자니 밟힌 꼬리가 너무 길다.

 

 

“뭐든지 다 알려드릴테니까.”

“……”

“아, 물론 요금은 선불.”

 

 

미친, 씨발.. 사냥개한테 물리면 이런 느낌일까. 그러고선 김민규는 방금 전 키스가 착각이라 생각이 들만큼 순식간에 종적을 감췄다. 그래서 원우는, 입술에 난 상처를 엄지로 쓸었다. 이 상처가 사라지면, 증거 또한 없어질 게 분명했다. K그룹은 증거인멸에 능했고, 거기에 항상 당하는 건 무능한 형사 측이였으니. 당장 코 앞에 초고속 승진이 있는데 나는 뭘 망설이는가. 머리 속에서 선과 악이 마구 싸우는데, 그 유명한 전원우의 정의는 어디로 갔는지 느껴지지도 않았다. 언제 한 번, 집에 인사드리러 갔다가 아버지가 그러는거다.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라. 원우야. 그 때부터 전원우의 정의는 살아 숨 쉬었는데, 오늘 김민규가 그 정의를 죽인 거다. 죽을 때까지 끌어안고 가야할 것. 그게 원우는 정의인줄만 알았는데. 머리가 복잡했다. 무전기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원우는 반응하지 않았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밝은 곳에서 본 저 애의 얼굴이 생각보다 멀끔해서 그랬다던가, 아니면 쟤의 말 마따나 키스를 잘 해서 그랬다던가. 뭐가 됐든 평범한 이유는 아니였고. 

 

 

이건 그동안 잠잠했던 육감이 알려주는 적신호다. 천적을 맞닥뜨린 식물이 향기를 뿜는 것처럼, 지금이라도 도망치라고 다른 식물들에게 경고하는. 마지막 남은 나의 정의.

 

 

 

 

 

 

*

 

 

 

 

 

본론부터 말하면, 전원우는, 연락하지 않았다. 바빴느냐고? 아니. 그럴리는 없었다. 김민규가 지나간 이후로 이 동네는 민원 하나 들어오지 않을만큼 잠잠했다.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00동에 평화라니. 변화는 의심을 낳고, 의심은 불화를 이끌었다. 그러니까, 경찰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된 일이다.

 

 

 

“전형사. 할 말이 있는데…”

“네?”

“이번 K그룹 금융지주 사건에 우리 00동 형사들이 묶여있다고….”

“…뭐라고요?”

 

 

 

쓰고있던 안경 다리를 접어 앞주머니에 꽂아넣은 원우가 다시 물었다. 자세하게 얘기 좀 해주세요. K그룹 이야기는 김민규가 자신에게 키스했던 날 이후로 처음이여서, 전원우는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경찰서 내에서 김회장 이야기는 항상 끝이 좋지 못했다. 사건 나간 반장님이 전치 7주를 달고 온다던가, 아니면 끌고갔던 현장 차량이 박살 난다던가, 같은…. 

 

 

 

“나도 들은건데. 이번 k금융 쪽에서 우리 부서를 찍었나봐.”

“…경찰서를요?”

“아니, 우리 4팀이랑 3팀만. 3팀 막내가 잠복 나갔다가 꼬리가 밟혔다나 뭐라나. 그러고나서 실종됐대.”

 

 

 

그게 무슨… 꼬리가 밟혔다는 말에 벌써부터 뒷목이 뻐근해져서, 원우는 의자를 뒤로 누웠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신입을 보내요? 톡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자기도 신입인건 마찬가지라. 묵묵히 들을 뿐이다.

 

 

 

“그럼 3팀만 잡으면 되는거 아닌가.”

“아 그게…….”

“왜요?”

“그 쪽 사람들 입에서 전형사 이름이 나왔나봐.”

 

 

 

 쿠당탕. 의자에 기대서 반쯤 누워있다가 삐끗, 발을 잘 못 떼서 웃긴 꼴이 됐다. 그걸 지켜보던 강형사가 급하게 일어나 원우를 일으켜 세우려했다. 하지만 돌처럼 굳은 전원우는, 멍하니 강형사만 볼 뿐 다른 말이 없었다. 그 찰나에 피가 싹 식는 느낌이다.

 

 

 

“…제 이름이 왜 나와요?”

“그러니까! 들리는 말로는 그 누구지. 걔가 그랬다더라. 있잖아. 정신 나간…”

 

 

전원우는 즈레 숨을 멈췄다. 강형사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차라리 듣지 않는걸 택한 거다. 정신 나간 K그룹 관계자. 매스컴에 얼굴을 내비친 적은 없지만,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그런 사람은 딱 한 명 뿐이지 않나.

 

 

“김민규? 걔가 전형사님 아냐고, 물었대.”

“…….”

“안다고 하니까, 무슨 말을 하더라? 그, 기다리는 건 안 좋아한다고. 조만간 찾아간다고 했었나?”

 

 

 

듣지 않기로 다짐해놓고, 언제나처럼 흘러들어오는 석자는, 더이상 전원우가 제어할 범주가 안 되었다. 처음부터 걔는 이런 식으로 살살 자신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다만 나는, 그걸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라 끝없이 도망가고, 벗어나고, 귀를 막는 거다. 

 

 

…전형사, 괜찮아? 

 

 

괜찮을리가. 머리를 쓸어올린 원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

 

 

 

 

“…….”

“……어.”

“…….”

“먼저 찾아오실 줄을 몰랐는데.”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던 김민규가 멈칫 굳어서는 그랬다. 당황했는지 눈썹이 일렁이길래, 원우는 올커니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태연하게 행동하는 거다. 안녕. 안부인사를 건낼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지만. 당황해하는 녀석의 표정이 볼만했다. 그도 그럴밖에, 여긴 김민규의 방이라.

 

 

 

 

 

“드디어 제가 보고싶어졌나요?”

“그건 아니고.”

“흐음. 이상하네.”

 

 

 

 

책상에 발을 올린 원우가 가죽의자를 빙글 돌렸다. 고딩 주제에 이런 의자를 쓰다니. 자기는 싸구려 가죽으로 된 의자에만 앉아봐서, 원우는 조금 배가 아팠다. 푹신한게 맘에 들었으나 다가오는 민규 때문에 오래 앉아있지도 못했다. 

 

 

 

 

“뭐가 이상해?”

“저랑 키스하고 안 찾아온 건 형사님이 처음이에요.”

 

 

 

푸흡. 직구로 날라오는 불건전한 단어에 원우가 고개를 숙였다. 미친…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김민규는 그걸 굳이 들쑤신 다음에 헌팅트로피 마냥 벽에 걸어 전시까지 해댔다. 귀가 발개진 전원우가 흘끔 눈만 움직여 민규를 봤다. 즐거워 죽겠다는, 괴롭히고 싶어하는, 그런 금욕적인 얼굴. 전원우는 몸을 더 움츠렸다. 녀석한테 한 번 휘말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걸 알면서도, 왜 계속 끌려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귀 발개지셨네요.”

“……아닌데.”

“좀 솔직해지는건 어때요?”

 

 

 

무슨… 그때처럼 또 휘말릴것 같아진 원우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온 민규가 더 빨랐다. 어깨를 꾸욱 눌러 일어나려는 걸 저지시킨 민규가 한 손으로 귓볼을 만지작 거리는데, 어깨가 움츠러드는 건 어쩔수 없는, 반사작용이다. 반쯤 기울어진 의자시트가 불안해서 민규를 밀치려는데 문득 혈흔이 묻은 손가락이 눈에 띈다. 쿵, 몸 속에서 무언가 떨어진 느낌. 

 

 

 

“…피?”

“네? 아, 못 지웠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겁을 먹었나? 아니다. 그럼 혐오하는 건가? 그것도 아니다. 자기가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기억하자마자, 원우는 혈흔이 묻은 손을 잡아챘다. 일종의 직업병이기도 했고, 설마- 하는 불안이기도 했다. 잠복하던 3팀 막내형사의 실종사건부터, 잠복 대상이 K그룹이란 것,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홍수처럼 범람했다. 과도한 의심은, 신뢰를 떨어트린다. 그렇게되면 결국 확신하게 되는 거다. 

 

 

 

“…너야? 납치한 거.”

“글쎄요. 아닐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고.”

“미쳤어?”

“진심인데.”

 

 

 

올라탄 김민규를 밀치고, 멱살을 잡아올린건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이 김민규의 멱살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책상 위로 엎어진 김민규가 아픈 소리를 냈다. 아야… 형사님 아파요. 아닌 와중에 그런게 들릴리 없다. 원우는 거친 숨을 가다듬는 법을 몰랐다. 씩씩거리는 원우를 흘끔 본 민규가 픽 웃더니 그러는 거다.

 

 

 

“형사님, 지금 절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

“…….”

“형사님은 절대 못 죽이세요.”

“……..”

“후폭풍이 무서워서? 아니.”

“…….”

“해결 할 방법을 아니까. 그게 무서운거지.”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본 원우는 당장이라도 울고 싶어졌다. 김민규 말이 백 번 맞는 말이라. 부정할수도 없었다. 이번에도 또 정곡. 김민규가 실제로 3팀 형사를 납치한지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실마리와 동시에 열쇠를 가진 게 김민규였고, 그래서 전원우는 민규가 필요했다. K그룹을 망하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코 앞에 있는데, 계속 망설여 했다. 더이상 내려갈 바닥이 두려워서, 끝도없이 굴러 떨어지면 나는, 어쩌지 싶은 거다. 그건 너무 좀. 비참하지 않나.

 

 

 

 

“형사님. 나 이용하고 싶잖아.”

“…….”

“어떻게 하는지도 알려줬는데. 나는.”

 

 

 

다 도와준다니까요. 뭐가 문제야. 바들거리는 손을 우왁스래 감싸 쥔 민규가 그대로 손등에 입술을 붙였다. 말캉한 느낌에 어깨를 움츠린 원우가 민규로부터 물러나려고 하자, 이번에는 역으로 민규가 원우를 잡아 세웠다. 파티션과 책상에 갇혀 꼼짝달싹도 못하게 생긴 원우가 곤란한듯 민규를 봤다. 불안한지 눈동자가 마구 요동쳤다. 

 

 

 

“우리 아빠는 날 위해 기업도 버릴 사람이야. 근데 나는 형사님 말이면 뭐든 들어준다 했으니까. 실질적으론 전형사님이 제일 높죠.”

“…무슨 말이야.”

“지금 당장 키스 할 거라는 말이에요.”

“……”

“싫으면 피하던지. 아니면 나 좀 이용해보던지. 딱 정하라고.”

 

 

그말에 처음에는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봤다. 자꾸 귓볼을 만지작거리는 느낌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냥 못 듣고 안 느끼는 척 했다. 하지만 변수는 멈출 줄 알았던 김민규가 멈추지 않았던 거다. 입술이 포개지는 그 순간까지도 원우는 고민에 빠져있었다. 나는 뭘 위해서 이러는 건지. 내가 형사라서 그런거였는지. 정직하게만 살면 다 될 줄 알고 원우는 28년을 버텼다. 정의는 배신하지 않아, 11살 때 본 파워레인저 중 한 대사다. 전원우는 그걸 보면서 정의는 언제나 강하다고 소리쳤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내 앞에 있는 이 놈음 뭘까. 절대 악? 하지만 내편인데? 그럼 절대 선은 누구지? 전원우는 포개진 입술 사이로 깔짝거리는 혀를 멈추게하고 싶었다. 뱀이 똬리를 트고 올라온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런 걸 생각하면 자꾸만 나락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였다. 그야말로 끝자락.

 

 

웅웅 울리는 목소리는 소음으로 분류 되고, 김민규, 오직 그 석자만 선명했다. 전원우는 온힘을 다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머리가 복잡했고, 더이상의 모든 사고회로가 녹슨 것처럼 행동했다. 삐걱, 소리를 내며. 제가 알고 싶었던건 대한민국의 밑바닥이지, 자기 이성의 밑바닥이 아니였단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술은 옴짝달싹을 못했다. 그게 굉장히 절망적이라서, 원우는 민규에게 혀를 내어줬다. 여전히 넘어진 채였고, 한참을 질척하게 혀만 섞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김민규를 이용하자. 이거였다. 김민규가 절대 악이라면, 나는 선한편인가-. 싶기도 했고. 김민규가 키스할 때 충분히 고개를 돌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 있었던건, 별 다른 이유가 없었다.

 

 

 

입술이 떨어진 사이로 김민규가 그르렁 거리는 듯한 거친 숨을 내뱉었다. 민규의 귓볼에 손가락을 가져다가 댄 원우가 귀 옆에다가 속삭였다.

 

 

 

“K그룹 비리 전부 찾아와.”

 

 

 

그 말에 픽 웃는 김민규다. 여전히 금욕적인 얼굴로. 괴롭히고 싶어서 안달 난 표정이다. 구겨진 미간 밑으로는 그림자가 져있다. 전원우는 그걸 이용하는 거다.

 

 

 

“분부대로.”

 

 

 

입술을 다시 한 번 감춰 문 김민규가 나즈맣게 그런다. 

 

 

바닥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