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원우형이랑 싸웠냐?”
“...왜?”
“왜는 무슨 왜야. 너 존나 티나. 형도 티나고.”
몰려오는 허기짐에 하겁지겁 베어 물었던 핫도그가 갑자기 맛이 없게 느껴졌다. 더 먹고 싶지 않은 기분. 요 근래 민규는 먹는 양에 비해 살이 쭉쭉 빠지고 있었다. 섭취한 칼로리가 어마어마했지만 운동량이 그 배는 넘어버렸기 때문. 알바시간이 오픈이던 마감이던 간에 헬스장에 가서 모든 정력을 쏟아내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먹는 시간과 운동하는 시간동안은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들어오지 못 했기 때문에 선택한 극단적인 행보였다. 굉장히 미련했다. 그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다 한들 어쩔 수는 없었다. 이 방법아니고서는 인생 첫 실연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딱히 싸운 거 아니야.”
“아니면 뭔데? 눈도 안 마주치고 헤헤 웃던 애가 한마디도 안 하고 원우형도, 너만 보면 안절부절 하잖아.”
“.....그냥 그런일이 있어서 그래. 조금만 이해해줘.”
“이해는 무슨. 사실 나는 그렇다 치고 조만간 지훈형이랑 순영형은 못 참고 일어나실 것 같던데. 숨막히는 분위기의
직장은 사절이라고.”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석민이 핫도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냥 할 말을 했을 뿐인 석민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시라 밉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우리 둘이, 아니지. 내가 모두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는 걸 확인사살 당한 느낌이랄까?
결국 체끼가 올라올 것 같은 거북함에 쓰레기통에 핫도그를 버렸다. 에? 야! 안 먹을 거면 나 주지! 석민이 민규의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 했는 지 툴툴 거렸다. 하긴 알리가 없지. 민규는 그냥 한숨을 쉬는 걸로 마무리했다. 미주알 고주알 사정을 말하기도 애매했고 딱히 슬픈 일울 되새김질하는 취미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의도치 않게 카페사람들의 입장을 전해들은 덕에 알바가는 길이 더욱 가시밭이 되었다. 안 그래도 마음을 접는 노력을 하느라 카페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변해버린지가 오래였지만 이제는 그 곳이 불편함의 지옥으로 느껴질게 뻔했다. 난 어쩌면 좋지. 그렇다고 그만둔다고 하면. 애초에 내가 마음을 접는다고 말은 했지만 형을 안 보고 살 수 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민규는 그냥 체념해 버렸다. 자신이 없었다. 아직은.
아직은 준비가 되지 못 했다. 노력을 하고 있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못 해 아예 매가리가 없었다. 눈물겨운 제자리걸음같은 자신의 마음정리의 행보에 민규는 한 숨만 늘었다.
사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마음정리라는 핑계로 원우를 일방적으로 피하는 짓은 정말 어린애 같았다는 걸. 본인이 더이상 애가 아니고 어른이라고 말해 놓고는 정작 행동은 어린애만도 못 한 찌질한 행동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이딴짓은 진짜 꼬맹이들도 잘 안하겠다. 굉장히 비겁하고 이기적이니까.
한심하다. 김민규. 사실은 자신을 보며 안절부절 못 하는 원우의 모습을 보며 일말의 기대감을 키우고 있는 것도, 남들이 자신들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것도 너무 이기적이었다. 나이가 25살먹으면 뭘하냐. 25살의 원우형은, 나같지 않았는데. 그때도 지금처럼 멋있고 어른스러웠다. 지금의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게.
“야. 이석민.”
“응, 왜.”
“너도 눈치 보이고 그랬어? 나 때문에.”
“뭐...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정확히는 너랑 원우형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다른 형들의 눈치를 보는 거지만.”
아예 네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니까. 석민이 마지막 남은 핫도그를 입에 털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멍하니 가만히 있던 민규가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안으며 쭈구려 앉아 버렸다. 아아악! 별안간 소리를 지르며 마음껏 창피해 하는 모습이 바보같았다. 민규는 속으로 자기 자신을 매우 치고 있었다.
형이 꼬맹이 꼬맹이 하고 놀리니까 너 정말 정신연령이 애가 되버린 거냐고 김민규. 내가 형이라도 나같은 어린애한텐 전혀 매력따위 못 느끼겠다. 그런 주제에 원망스럽다는 듯이 몰아부치기나 하고.
“진짜 못났다. 김민규.”
“미친놈이 왜 갑자기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너 못난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아니까 그만 일어나지? 알바 시간 늦겠다.”
결국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와버리자 석민이 초를 쳤다. 뱁새눈을 뜨며 석민을 흘겨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 땡그란 놈이 가늘게 떠봤자 동그랗거든.
“그만 애같이 굴고 일어나.”
“이석민 진짜 존나 싫어.”
석민이 속을 후벼파는 말을 하자 민규의 마음이 삐뚤어 졌다. 그래. 나 어린애다. 뭐 어쩔래. 다짐은 곧 삐뚤어졌다. 결국 애같이 구는 자신이라면, 그냥. 형이 원하는 대로 지내주는 게 맞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렵게 말을 늘어놓았지만 그냥 곧이 곧대로 말하자면 예전처럼 대하는 게 어떨까, 라는 결론이었다. 형이 예뻐하던 동생의 모습으로. 지금처럼 찬바람 날리면서 제대로 되지도 않는 포커페이스하지 말고.
민규가 자리에서 일어나 석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가자! 친구야! 아악 무거워 미친놈아. 네가 쪼꼬미라 팔걸이로 딱인걸 나더러 어쩌라고. 이 새끼가! 나 키 큰 수준이거든? 너 새끼가 멀대같이 존나게 큰거지. 키만 큰 어린애 주제에. 석민과 티격태격 하며 정신사나웠던 생각을 나름 정리했다. 오늘부터는,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부터는 형한테 예전처럼 대하겠다고. 멋대로 태도를 이랬다 저랬다 거리는 것도 우스웠지만 그러는 편이 원우에게도 또 다른 이들에게도 나을 것 같았다. 민규 자신은 점차 깍여가겠지만, 말 그대로 잠시뿐일거다. 서서히 정리가 되면, 나중에는 이것도 추억이겠지. 음, 좀 많이 아련하게 느껴질 추억.
석민이 팔꿈치로 민규의 옆구리를 퍽 쳤다. 꽤나 아픈 감각에 민규가 인상을 찌푸리자 석민이 통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석민 처럼 정신없는 친구가 옆에 있다면 딱히 우울할 틈도 없겠지. 합리화를 하며 민규가 석민에게 달려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원우의 카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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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들, 저희 왔습니다~”
“응~ 그럼 그대로 다시 돌아서 나가~”
“잉. 너무해요.”
우리 없으면 디너랑 마감 어떻게 치려구요? 석민의 발랄한 인사에 지훈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장난인 건 알지만 나 상처 받는다구요. 석민이 직원실쪽으로 이동하며 아양을 떨었다. 평소처럼 또 지훈과 석민이 티격대며 평상시의 카페 모습이 보여졌다. 하여간 저 재간둥이 성격은 어딜 안 가요. 민규가 혀를 끌끌 차며 직원실 가는 도중 결국 지훈에게 제대로 잡혀버린 석민을 지나쳐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아마 10분 이상은 더 잡혀있을 게 뻔했다.
“아...민규. 안녕?”
문을 열자 원우가 유니폼을 갈아 입으려 했는지 아무것도 입지 못 한 상체를 와이셔츠로 가린 채 어색하게 인사를 건냈다. 분명 계속 평소처럼 대하자며 다짐에 또 다짐을 하며 왔는데 민규는 보기좋게 제대로 굳어버렸다. 원우의 벗은 몸을 본 건 처음이라 이럴때는 평소라면 어떻게 했을지를 떠올리려 했지만 머리 속이 새하애져버렸다.
미친. 김민규. 그러니까 고백하기 전의 김민규야. 너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 것 같니. 이 미친놈아. 시선을 좀 돌려봐. 너 지금 형을 너무 뚫어져라 보고 있어. 자신의 시선을 자각 하고는 티나게 시선을 돌린 민규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 어...안녕. 형 오늘 미들 출근인가 보네.”
로봇도 이것보단 자연스럽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어색하게 말이 나가버렸다. 멋대로 나와버린 어색함을 배로 증가시키는 말에 민규는 할 수만 있었다면 자신의 입을 확 때리고 싶었다. 못난 놈. 이게 네 역량의 끝이냐.
“응. 나 오늘 미들 마감. 거기 서 있지 말고 들어올래?”
“어, 응.”
당황한 민규와는 다르게 원우는 민규가 인사를 받아줬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요 근래에는 민규와 인사는 커녕 대화 비슷한 것도 나누질 못 했으니까. 어색하게 상체를 가리고 있던 셔츠를 입으며 원우가 민규에게 다가섰다. 자신도 모르게 뒷 걸음질을 한 민규가 아까의 다짐이 떠올랐는지 걸음을 무르고 문을 닫고 들어왔다.
민규가 문까지 닫고 아예 한 공간으로 들어오자 원우가 영 읽을 수 없는 표정을 했다. 다가오던 발걸음도 멈췄다. 설마 문을 닫아서 이상한 생각을 하나. 민규는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을 어필 하기 위해 그대로 등을 돌려 자긴의 캐비넷으로 향했다.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저렇게 단절된 공간에 함께 있으니 변해버리는 원우의 표정에 다시 입이 썼다.
“형 그렇게 겁 안 먹어도 돼.”
“겁먹은 게 아니라..”
“....그럼?”
“둘만 있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래. 좀 어색해서.”
민규 네가 나 엄청 피했잖아. 원우가 자신의 캐비넷 쪽으로 몸을 돌리며 흘리 듯 말했다. 원우는 성격이 유하고 귀찮음이 많은 성격이었다. 하지만 당하고 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래도 할 말은 다 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민규의 잘못을 콕 찝어 말하는 원우에 민규가 침을 삼키다 사래가 들리고 말았다.
“괜찮아?”
“어, 응. 괜찮아.”
격한 기침소리에 원우가 단번에 다시 민규의 옆으로 와 등을 두드려 주기 시작했다. 짜증나. 여전히 다정하다. 이 형은, 내가 그리 못 되게 애 마냥 굴었는 데도 동생이라고 챙겨주려고 한다. 근데 딱히 달갑진 않다. 체온이 몸에 닿으면, 또 헛된 생각이 되풀이 되니까. 민규가 티나게 몸을 뒤로 뺐다. 잠시 멈칫한 원우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민규의 등을 쓸어 주었다.
“어색한 기분이 드는 것 조차 어색해. 속상하기까지 해.”
“...형.”
“너랑 내가 어색함을 느낀 다는 게, 너무 이상하단 소리야.”
아아, 또 저 눈이다. 민규가 좋아하는 원우의 수 많은 모습 중 하나. 어쩌면 전부. 아무런 거짓도 없는 깨끗한 눈동자. 원우는 늘 사람과 대화를 할 때 눈을 바라봤다. 이게 참 별거 아닌 데도 민규에겐 항상 늘 크게 다가왔다. 뭐랄까 원우와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만큼은, 오롯히 그가 자신의 것 같다는 착각이 쉽게 일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착각이지만. 그래서 참 착잡했는데. 지금도 같은 장면이 반복 중이다. 한참을 말 없이 원우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둔 민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안 그럴려고. 미안해. 형.”
“민규.”
“나도 우리가 어색한게 너무 이상해.”
우리 거의 친 형제 이상 존재잖아. 내가 미안했어. 그냥 잊어 줄 거지? 민규가 원우의 말보다 앞서 질러 결론을 내듯 말했다. 무언가를 말 하려던 원우가 입을 다물었다. 앞서 말 했던 서두가 너무 길었던 탓일까, 민규는 대화를 그만 하고 싶다는 듯 등을 돌려 버렸다. 갈 곳을 잃은 원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꽉 깨문 입술은 빨갛게 부어 오르기 시작했다.
닫혀 버렸다. 민규의 마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