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는 운명 따위는 믿지 않았다. 길 가다 눈이 마주쳐 한순간에 사르르 사랑에 빠진다? 그런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연애를 하고 싶긴 했다. 그렇지만 길 가는 아무나를 붙잡고 연애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가까운 지인과 관계를 발전시키거나 새로운 누군가를 소개받지 않는 이상, 애인을 사귀는 것은 불가능했다.
민규도 그걸 알았다. 알았지만 하루에 몇 번씩은 들어오는 과팅 연락은 보고도 씹었다. 연락을 씹은 이유는 민규 자신도 몰랐다. 그냥 싫었다. 답장을 하면 한 번만 나와라, 머릿수만 채워 달라, 하며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게 뻔했기에 그게 싫은 게 그나마 이유가 될 것 같았다. 민규는 그런 귀찮은 답장을 하기 보다는 학교 근처의 숨은 맛집을 검색하고 후기를 살펴보기 바빴다. 동기들에게 시달리느니 차라리 원우 형에게 밥을 먹이는 편이 훨씬 나았다.
전원우. 민규가 지금껏 봤던 이들 중에 가장 한결같은 사람. 표정이 없으면 눈빛으로 말하고, 눈빛이 없으면 표정으로 드러나는 사람. 자기 할 일은 알아서 다 하면서 남 일엔 하나도 관심 없는 사람. 언제나 같은 명도와 채도의 색을 지니고 있는 사람. 처음부터 신기했지만, 지금은 더 알 수 없는 사람.
민규는 머릿속으로 원우의 얼굴을 그리며 뭘 먹이면 좋을지 블로그를 뒤지기 시작했다. 양평 해장국이 좀 맛있어 보인다. 몇 자 읽으니 괜찮은 것 같아 그대로 원우에게 톡을 보냈다. 형 우리 오늘 양평 해장국 먹을래요? 한참 뒤에나 읽음 표시가 떴다. 간결한 답장이었다. 그래.
*
민규가 원우를 처음 본 곳은 개강 파티였다.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한국에 들어와 23살에 경영학과 신입생으로 입학한 민규는 모든 게 생소했지만 흥미로웠다. 원래 성격보다 더 활발히 떠들었더니, 남자든 여자든 민규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은 끊이질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도 확연히 우월한 비주얼은 그를 소위 말하는 인싸로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다 저 구석에서 벽에 기대 술을 홀짝이고 있는 허여멀건한 남자가 민규의 눈에 들어왔다. 얇고 검은 테 안경을 끼고, 회색 후드를 뒤집어 쓴 채 세상만사 귀찮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사람. 민규가 궁금증을 못 참고 누구냐 하니까 전원우랜다. 저번 학기에 복학한 16학번 선배. 학과 내에서는 얼음 왕자라고 소문나 나름 유명한 축에 속했다. 얼음 왕자라니, 웃긴 별칭이었다. 왜냐고 물으니 여자들이 냉미남이라고 하도 난리를 쳐서 그런 것도 있고, 평소 무표정이라 옆에만 가면 찬바람이 쌩쌩 불어서 그렇단다.
이유는 더 있었다. 학과 특성상 조별과제가 많은데 맡은 거 제대로 안 한 놈, 참여 제대로 안 한 놈, 했어도 대충 한 놈, 무임승차한 놈 다 잡아다가 가차 없이 교수한테 명단 제출해서 사람이 존나 단호하다고 얼음 왕자란다. 이름 뺀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민규가 의아해 되묻자 원우에 대해 일일이 설명을 하고 있던 동기가 이 형이 뭘 모르네, 하고 혀를 쯧쯧 찼다. 어쩌고 저쩌고 뭐라고 막 하는데 하나도 귀에 안 들어왔다. 원우를 다시 보니 깨작깨작 감자튀김을 입에 넣다 그마저도 몇 개 안 먹고 내려놓는다. 민규는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말을 걸었다.
“형, 안녕하세요.”
아니, 뭐, 같은 교양 수업이길래. 시야로 들어오는 거대한 그림자에 원우가 민규를 올려다봤다. 옆에 있던 동기들은 경악했다. 김민규가 원우 선배님한테 인사를 했어. 둘이 친한가? 꽤나 가까운 둘의 거리가 남들에겐 그들이 친해보이게 했지만 실은 초면인 사이였다. 특히나 원우에게는.
“혹시 바쁘세요?”
“...별로.”
“그럼 저랑 점심 드실래요?”
“...내가 왜?”
원우의 얼굴에 잠시 당혹감이 일었다. 각도상 민규만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민규가 원우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형이랑 친해지고 싶어서요.
“나랑?”
“네.”
“왜?”
“그냥요.”
친해지고 싶으니까 친해지고 싶다 하지, 그럼 뭐라 해? 민규의 생각이었다. 원우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처음 보는 애가 다짜고짜 다가와서 밥 먹자고 한 적은 처음이라. 불편해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러기엔 쟤가 너무 설레하는 표정이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 무슨 강아지 같은 게, 만약 제가 여기서 싫다고 하면 쟤 눈꼬리가 초라하게 처질 것 같다. 결국 원우는 그러자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붙어 다닌 지 삼 주. 매일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카페를 가고 같이 도서관을 갈 만큼 친해지기에는 가히 짧은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규는 비어 있던 원우의 옆 자리를 자연스레 차지했다. 평소 끼니를 잘 챙기지 않는 원우에게 꼬박꼬박 밥을 먹이고, 원우의 전공 수업이 끝날 때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데려다 주는 건 일상이 되었다. 둘이 고작 삼 주만에 그럴 만한 사이가 되었거나, 민규의 정성이 갸륵하거나, 원우가 민규를 그냥 내버려 두거나. 그 중 하나였다. 굳이 꼽으라면 민규는 앞의 두 가지를 이야기 했겠지만 사실 원우는 뒤의 한 가지를 이유로 봤다.
원우는 민규를 그냥 내버려 뒀다. 하는 모양을 보니 떼어내려 해도 떼어질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놔뒀다. 피하고 싶은 상황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성격이지만 그러기엔 민규가 맛집을 너무 잘 알았다. 해산물을 못 먹는 자신의 식성을 완전히 파악한데다, 취향까지 맞춰주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따라다니는데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으니.
솔직히, 원우는 민규가 곁에 있는 게 괜찮았다.
*
“형, 기훈이가 복학한 형이 술 사주신다고 하는데. 가도 돼요?”
민규는 이상하게도 원우에게 자잘한 허락을 맡았다. 대부분의 주제는 술자리에 가도 되냐는 것이었지만 사실 민규가 그에 대해 일일이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었다. 원우는 민규의 부모님이나 또는 애인 같은 게 아니니까. 그냥 아는 형일 뿐이었다. 원우는 이럴 때마다 민규를 한 번 슥 쳐다보고는 “그러든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었다. 민규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던 원우의 손이 멈췄다.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민규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원우가 이상해 다시 물었다.
“형, 왜 그래요?”
“......”
“어디 아파요?”
원우는 민규가 말하는 ‘복학한 형’이 누군지 알았다. 피가 차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이승호. 열등감인지 뭔지, 항상 내가 하는 일에 트집을 잡고 뒤에서 욕을 하던 놈. 내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며 반드시 약점을 잡아 그 잘난 코를 눌러주겠다고 말하고 다니던 놈. 심지어는 날 스토킹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내 치부를 끝끝내 알아낸, 개새끼.
신고는 하지 않았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그 새끼랑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범죄를 저지른 것인데도 이승호는 학교에서 정상인인 척 행동했다. 역겨웠다. 원우는 사회대 3호관 뒷골목에서 기뻐 죽겠다는 눈동자로 자신의 치부를 가지고 협박하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건 원우가 학기를 다니던 도중 휴학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고개를 들자 민규의 얼굴이 보였다. 꽤 걱정스런 눈빛이다. 갑자기 가슴이 싸하게 일렁인다. 원우는 민규에게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 술자리에 가지 말라고. 그 새끼를 만나지 말라고. 그 미친놈이랑은 상종도 하지 말고, 내 옆에 있으라고.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내 옆에, 계속 내 옆에...
민규의 눈에 순간 하얗게 질린 원우의 얼굴이 보였다.
“괜찮아요?”
원우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니, 괜찮지 않았다. 이건 괜찮은 게 아니었다. 민규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 생각보다 괜찮은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원우가 기다랗게 떨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알았다. 이게 무슨 마음인지.
“...가.”
“네?”
“가라고. 김민규.”
“...어딜 가요.”
“술 마시러, 가라고.”
난 신경쓰지 말고. 넌 나처럼 되면 안 되니까.
민규는 평소 그렇게 좋아하던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좀처럼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눈은 처음 봤다. 아프면서도 깊고, 따뜻하면서도 차가워지려 하는 눈빛.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려 뭘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마치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았다. 소주가 가득 따라진 술잔 속에선 이상하게도 원우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생각 없어?”
“......”
“형, 민규 형!”
“어?”
꽤 거세게 어깨를 흔드는 행동에 민규가 멍청하게 앞을 바라봤다. 기훈이 왜 그러냐는 듯 손바닥을 내밀어 허공을 휘휘 젓고 있었다. 벌써 취한거야? 이거 몇 개?
“안 취했어, 인마.”
“뭐야, 난 또. 그나저나 생각 있냐고.”
“무슨 생각?”
“과팅! 형 진짜 한 번만. 딱 한 번만 나와주라. 이번에 내 친구가 지인짜 예쁜 애들로만 모았단 말이야. 실음과 김수연 알지? 왜 그, 음대 여신 있잖아. 걔가 형 안 나오면 과팅 안 한다 그랬대. 형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건 아는데! 진심 딱 한 번만 나오면 안 될까? 어?”
기훈의 흥분한 말투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가만히 있던 민규를 은근슬쩍 주목했다. 반면 민규는 음대 여신이고 뭐고 모를뿐더러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그냥 오지 말걸.’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민규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공짜 술에 혹했다가 꼼짝없이 애매해진 상황이었다. 솔직히 웬만한 부탁은 들어주겠는데, 과팅 같은 건 왠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예의상 조금은 고민하던 민규는 결국 거절의 의사를 밝히려 입을 열었다. 역시, 싫은 건 싫은 거고 아닌 건 아닌 거니까.
그러나 그보다 먼저 들린 목소리가 있었다.
“뭘 고민해, 그냥 하지.”
승호였다. 민규가 알기론 군대에 다녀왔다가 이번에 복학한 선배로, 민규와는 들어오자마자 고작 가벼운 인사 한 번 하고 테이블의 끝과 끝에 앉은 사이였다. 그는 조금 히죽거리며 능글맞은 어투로 말했다.
“민규라고 했나? 내가 선배로서 얘기해줄게. 이야- 너 인마, 한창 좋을 때야. 과팅 또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 새내기 때 많이 즐겨봐야지.”
테이블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가라앉은 분위기임에도 승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몇 마디를 더 얹었다.
“심지어 상대도 예쁘다며? 와, 부럽다 부러워. 내가 너였으면 바로 오케이 했을 텐데. 민규야, 이런 기회 흔치 않다? 형 말 잘 새겨 들어.”
누가 봐도 전형적인 꼰대 발언이었다. 민규의 눈이 정확히 승호에게로 향했다. 표정에 점차 웃음기가 사라졌다. 다들 슬금슬금 뒤로 빠지던 와중 가운데서 눈치를 보고 있던 기훈이 멋쩍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 에이, 승호 형도 참. 민규 형 생각보다 연애에 관심 많아요. 아마 이래놓고 과팅 나갈,”
“조언 감사합니다만.”
“......”
“전 별로 내키지가 않아서요.”
그렇게 말하는 민규는 정색의 기미가 다분했다. 기훈도 다른 누구도 아닌 승호에게 한 말이었다. 저 덩치 큰 어린놈이 꽤나 건방지다고 생각되자 승호의 눈이 양 옆으로 길게 찢어졌다.
민규는 재수 없는 얼굴을 보기 싫어 앞에 놓인 술잔으로 눈을 돌렸다. 원우의 모습이 여전히 아른거리고 있었다. 술 때문인지 심장이 뛰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가볍게 원샷을 했다. 조용한 와중이라 탁- 하고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선배님.”
이 자리에 ‘선배님’이라고 불릴 인물은 한 명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십 개의 눈동자가 민규에게 향했다. 분위기를 망쳐 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는 꼴이란. 민규는 다음 날 동기들에게 욕 먹을 각오를 하며 옆에 놓아 둔 핸드폰과 지갑을 챙겼다. 기훈이 민규의 옷 끝자락을 붙잡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혀, 형. 벌써 가게...?”
“응. 곧 원우 형 도서관에서 나올 시간이라. 갈게.”
민규는 긴 다리를 휘적휘적 저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술집을 빠져나갔다. 그 때문에 승호의 입에서 가만히 읊어지는 말을 듣지 못했다. 민규가 알았다면 후회할 일이었다.
“...하. 전원우?”
*
불가항력. 아무리 피하려 해도 결과로부터는 도피할 수 없다는 것.
*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물함의 문을 닫고 뒤돌아서자, 원우는 자신을 힐끗거리며 쳐다보다 화들짝 놀라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전공 책을 들고 복도를 걸어가자 대충 뭐라고 쑥덕거리는 것 같았다. 필시 자신을 향한 눈길이 맞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눈치가 있는 건지 신경을 안 쓰는 건지, 평소처럼 강아지마냥 원우를 쫓아다니는 민규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잘대기 바빴다.
“형, 오늘도 도서관 갈 거예요?”
“아마도.”
“아마도? 헐. 잠시만. 형 저 과방에 옷 놓고 왔나 봐요. 우리 들렀다 가요.”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민규의 손이 원우의 가는 팔목을 잡아 끌었다. 원우는 아무런 반항 없이 얌전히 끌려갔다. 머릿속엔 지금 이게 뭘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었다. 왜 시선이 집중되며, 왜 말이 돌아다니며, 왜 그 모든 것이 나를 향해 있는지. 커져가는 긴장감에 원우의 손바닥에 땀이 찼다.
민규가 과방의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원우는 단번에 모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왜 혼란 속의 주인공으로 서 있었는지를.
“...이승호.”
“이게 누구야. 전원우 아니야?”
낯익은 선배들과 후배들 사이에서 승호가 다리를 책상에 걸쳐 놓고 앉아 있었다. 원우의 입술이 핏기 없이 하얗게 질렸다.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설마, 정말 설마 했지만 이렇게까지 미친 새끼인 줄은 몰랐다. 대체 어디까지 내 인생을 망치려고.
원우의 시야에 승호를 중심으로 모여 경멸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무리와 키가 큰 민규의 단단한 등이 보였다.
“뭐야, 왜 그래.”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민규가 그들에게 물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원우는 아직도 민규의 손에 붙잡혀 있는 자신의 손목을 힘주어 빼냈다. 저들 중 한 명이 민규를 향해 툭 질문을 뱉었다.
“야, 김민규. 너 저 형 게이인 거 알았어?”
원우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얇은 테 안경 뒤로 보이는 눈동자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승호를 쳐다보자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머물렀다. 전원우, 넌 이제 끝이라는 것처럼.
“...뭐?”
민규의 목소리가 답지 않게 떨렸다. 원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원우는 자신의 앞에 선 널찍한 등과 커다란 어깨를 마지막으로 바라보다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반대편에 있을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두려웠다.
결국 원우는 민규가 고개를 돌리기 직전,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길고 긴 복도를 뛰어갔다.
멀어져 갔다.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승호와,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낸 그들과,
자신이 피할 수 있었음에도 피하지 않았던, 유일한 민규로부터.
민규가 원우를 다시 만난 건 원우의 집 앞에서였다. 마주한 눈꼬리가 축 처진 것은 원우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심지어 가까이도 아니고, 저 멀리 서 있다가 원우를 발견하고 뛰어와 놓고선 민규는 우물쭈물하며 아무 말도 못했다.
“...원우 형.”
“......”
“괜찮아요?
원우는 머리 한 쪽이 아파오는 걸 느꼈다. 얘는 대체 왜 계속 나에게 다가와서 괜찮냐고 물어보는 걸까. 기가 막혔다. 이제 말도 안 걸고 피할 줄 알았는데. 동정이야? 아님 연민?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어. 차라리 모멸이나 경멸, 혐오 따위를 주지 그랬어. 그냥 이대로 널 끊어버릴 수 있게.
“그대로 가 버려서 놀랐잖아요.”
“......”
“엄청 찾았어요. 도서관, 카페, 다 돌았는데 없어서. 그러니까 다음부턴 어디 갔는지 말하고,”
“왜 왔어.”
“......형. 전 신경 안 써요 그런 거.”
멈칫하며 민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떤 걸 의미하는 말인지 알기에 원우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형은 그냥... 형일 뿐이니까,”
“니가 뭔데.”
확 속이 상해 따지듯 말했다.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에 민규가 놀라 원우를 바라봤다. 감정을 애써 감추고 있는 발개진 눈이 민규의 입을 다물게 했다.
“니가 뭔데 날 위로해.”
“원우 형.”
“왜, 그동안 내가 좀 받아줬다고 니가 내 뭐라도 된 것 같아? 전엔 별 생각 없었는데, 게이라고 하니까 이런 식으로 한 번 꼬셔보게?”
“형 지금 무슨 소리를,”
“너 나랑 자고 싶니?”
둘 사이에 침묵의 기운이 맴돌았다. 실언했다. 홧김에 나온 말에 원우는 그대로 민규의 눈이 커지는 걸 목격했다.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던 민규는 내밀던 손을 다시 거두어 갔다. 원우의 공격적이면서 방어적인 말투에 어느새 한 걸음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자 원우는 순간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그래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민규의 앞에서만큼은 절대 안 되었다. 오히려 더 강하게 내치면 내쳤지, 여기서 울어버리면 안 된다. 더는 안 된다. 민규가 더 엮여버리면 안 된다.
제발. 더 이상 다가오지 마.
원우가 떨리는 입술을 겨우 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야.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
고개를 숙이고 있었더니 민규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맺혀 있던 눈물이 곧 떨어질 것 같아 얼른 몸의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더욱 차갑게 말했다.
“이제 할 말 없을 것 같다. 가.”
*
필히 사랑은 불가항력이랬다.
*
민규는 일주일 동안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거의 몸 길이만한 침대에서 내내 뒹굴다가 오후 2시에 느긋하게 라면 하나를 끓여 먹었다. 계속 오는 연락에 귀찮아서 꺼 놓은 핸드폰을 켜니 동기 남자애들 단톡방에 표시된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미친놈들. 무슨 할 얘기가 이렇게 많아.
정정하자면, 민규는 일주일 동안 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이유는 자신도 몰랐다. 집에만 처박혀 있는 생활을 하니 기분이 내내 구렸다. 티비를 보려니 집중이 안 됐고, 게임을 하려니 그것도 집중이 안 됐다. 그렇다고 멍을 때리자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원우의 마지막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민규는 그냥 계속 잠만 잤다. 고작 몇 시간씩만 자다 깨다 해 꿈을 꿀 시간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꿈을 꿨다면 원우가 나올 게 분명했다. 물론 아직까지 꿈에 원우가 나온 적은 없지만 왠지 그럴 것만 같았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
민규는 뒤죽박죽인 마음속에서 고뇌하고 있었다. 자신의 주변에 그러한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여태컷 없었기에, 원우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좀 많이 당황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규도 나름대로 생각해서 내린 결론을 원우에게 꺼낸 거였다. 나는 상관없을 것 같다고. 신경 안 쓴다고. 그런데 원우는 격하게 화를 냈다. 민규는 생각지도 않았던 이야기까지 하며, 다가가던 자신을 결국 끝까지 밀어냈다.
왜일까. 왜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 걸까. 분명 상처 받았을 텐데, 원우는 모든 걸 혼자서 감내하려고 했다. 민규가 괜찮냐고, 괜찮다고 했는데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민규가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로 달려가 세수를 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엉망이었다. 형이, 과연 울지 않았을까? 아니. 민규는 알았다. 원우가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속은 썩어 들어가고 있을 사람이란 걸. 원우 형은 왠지 뒤 돌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몰래 울었을 것 같다. 외롭게 혼자서 펑펑 눈물을 흘렸을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민규가 샤워기의 물을 세게 틀었다. 찬물이 온 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온도가 뜨거워질 때까지 기다리기엔 성질이 너무 급했다. 눈을 감고 물을 맞고 있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차가운 김이 거울에 서리는데도 민규의 몸에선 열이 났다. 답답하고, 짜증이 나고, 미칠 것 같았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
민규는 이제야 대입을 해 보았다. 원우 형이, 남자를 좋아한다.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미지수에 숫자를 대입하는 느낌. 그래서 전제를 역으로 뒤바꿔봤다. 남자가, 원우 형을 좋아한다.
몸의 물기를 닦는 손길이 빨라졌다. 민규는 망설임 없이 옷을 꺼내 입었다. 원우의 마른 어깨가, 하얗고 날카로운 얼굴이, 무던하던 그 눈빛이 보고 싶었다. 책장을 넘기던 곧은 손가락도, 눈썹까지 살짝 덮는 생머리도, 높은 코끝에 걸려 있는 안경까지도. 너무 오래 걸렸다. 자신이 학교에 가지 않은 동안 원우는 귀찮아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을 것이다. 챙겨줘야 했다. 준비는 허겁지겁 하는 중이었지만 긴장이 먼저 앞섰다. 민규는 신발을 신으며 남은 한 손으로 단톡방의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했다.
[야 근데 승호 형 원우 선배한테만 좀 심한 거 아니냐]
그리고 굳은 얼굴로 현관문을 나섰다.
*
뒷자리에 앉으면 화면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원우는 그냥 앞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어디에 앉든 자신을 보며 수군대는 건 똑같았다. 원래도 남들과 친밀히 지내는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게이라는 게 소문난 이후로는 주변에 더욱 사람이 없어졌다. 항상 원우를 따라다니던 민규까지 학교에 나오지 않으니 혼자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도통 나타나질 않아 원우는 민규가 자신을 피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선 솔직히 걱정이 조금 되기도 했다. 그래도 민규가 더 이상 자신과 엮이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원우의 목표는 수업 꼬박꼬박 듣고 학점 적당히 받고 조용히 지내다 졸업하는 것이기 때문에, 달라붙는 남들의 시선이 학교생활에 있어 큰 불편함이 되진 않았다. 다만, 매번 들려오는 이승호의 시비를 제외하곤.
“하, 쟤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자기 얘긴 줄 뻔히 알면서 얼굴색 하나 안 변하냐?”
무시가 답이었다. 반응해봤자 저 미친놈은 더 신나서 날뛸 테니까. 원우는 뒤에서 다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하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하여튼 지 잘난 맛에 사는 새끼.”
언제나처럼, 조용히 넘기면 된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귀찮게 괜히 휘말릴 필요 없다. 원우는 언짢은 기색조차 보이지 않고 그저 자기 할 일만을 해 나갔다. 원우가 아무 반응이 없자 오기에 불탔는지 승호가 크게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얼음 왕자는 무슨.”
“......”
“더러운 게이 새끼 주제에.”
그때였다. 쿠당탕- 하며 뒤쪽에서 무언가 나뒹구는 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더불어 신음과 고함소리도 함께였다. 원우는 시끄러워진 저 편에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써 의자에 몸을 붙이고 앉아 있었다. 분에 가득 찬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야 선배님.”
“큭... 너, 너 뭐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냐?”
“이 새끼가!”
“니가 뭔데 원우 형에 대해 그렇게 얘기하고 다녀.”
원우가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주위의 놀란 사람들과, 한 쪽에 널브러져 있는 의자와 이승호, 그리고 그 앞에서 화를 못 이겨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는 민규가 보였다. 누가 봐도 민규가 앉아 있는 승호를 발로 걷어찬 상황이었다. 승호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민규에게 소리쳤다.
“씨발, 그러는 너는 뭔데! 네가 무슨 전원우 남친이라도 되냐?”
“어.”
예상치 못한 광경에 얼이 빠져 있는 원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김민규 너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아직은 아닌데, 어차피 내가 할 거야 그거. 전원우 남친.”
“뭐?”
“그러니까 왈왈대지 말고 닥쳐, 개새끼야.”
이제는 모두가 넋이 나가 있었다. 하물며 둘의 싸움의 원인인 원우까지도. 강의실 안은 적막으로 가득 찼고, 민규는 원우가 서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쯤은 화가 나 있고 반쯤은 씁쓸한 얼굴이었다. 얼어버린 원우의 눈과 그제야 조금 누그러진 민규의 눈이 마주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둘이었지만 민규는 원우의 표정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대체 왜, 어쩌려고 그러냐는 혼란스러운 눈빛. 오히려 민규는 담담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될 거였다는 듯이.
민규에게 맞아 바닥을 구른 승호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이, 이 미친 새끼. 전원우가 너도 꼬셨냐?”
그리고 원우는, 그 말을 듣자마자 또다시 도망쳤다. 누군가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웠다. 그렇게 또 멀어져 갔다. 넘어진 승호와, 굳어버린 사람들과,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던 민규로부터. 그러나 민규는 저번처럼 멀어져 가는 원우의 뒷모습을 눈에서 떼지 않았다.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선배님.”
승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민규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 뒤에 나온 말은 거기에 있던 모두를 까무러치게 만들었다.
“딱 보면 모릅니까? 내가 매달리는 입장인 거.”
원우 형이 날 꼬신 게 아니라, 내가 전원우 꼬시는 중이라고.
민규는 큰 보폭으로 원우의 발걸음을 무난히 따라잡았다. 쫓아가는 모양새에 지나가던 이들이 둘을 흘긋흘긋 쳐다보았다. 민규의 손에 마침내 원우의 얇은 손목이 잡혔다. 원우가 돌아보기도 전에 민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형 바보예요? 멍청이야?”
“놔.”
“왜 거기서 가만히 듣고만 있는데!”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참견하지 마.”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어. 그러니까 내 인생에 이제 그만 끼어들어.”
원우가 뿌리치기 전에 민규가 먼저 손을 놓았다. 그리고 원우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워 양손으로 짓눌렀다. 아직도 남아 있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였다.
“어떻게 안 끼어들어요. 그 새끼가 무슨 자격으로 형을 욕해. 내가 그걸 어떻게 보고만 있어!”
“김민규.”
원우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에 역정을 내던 민규가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허망함, 죄책감, 슬픔, 분노, 미안함. 그 외에도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인 눈이 민규의 가슴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아파.”
그 말에 민규가 여태컷 원우의 어깨를 짓누르던 손을 자각하고 내려놓았다.
“미안해요. 너무 흥분해서.”
원우는 자신 대신 화를 내주다 이내 안절부절해하는 민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쓸데없이 미련했다. 밀어내려고만 했지 이해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막상 이해해 보려고 하니 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그래도, 기분이 이상해지는 저 처진 눈꼬리를 보고 있자면. 큰 키에 맞지 않는 애교를 부리고, 신날 땐 곁에서 방방 뛰고, 진심으로 나를 위해주고, 지금처럼 저렇게 걱정 어리고 따뜻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민규를 보자면.
원우는 이번엔 정말 한 없이 울고 싶었다.
“민규야, 너 이러면 안 돼.”
“제가 뭘요.”
“나랑 엮이지 마. 너는 나처럼 되지 마.”
“......”
“그런 눈으로... 나 보지 마.”
내가 자꾸 울게 되잖아.
민규가 그새 눈가에 물기가 가득한 원우를 바라봤다. 벅차게 울렁거리고 가슴 한 쪽 어딘가 아파오는 느낌이 들었다.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혼자 둬서 미안하고, 그동안 상처 받았을 것이 안쓰러웠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원우를 가득 품에 안고 싶었다. 안아주고 보듬어 주고 싶었다. 이젠 괜찮다고.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민규는 마침내 깨달아 버린 자신의 마음이 어색하기는커녕, 왜 이제야 알았는지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형, 나 남자 안 좋아해요.”
민규가 고개를 살짝 숙여 원우와 눈높이를 맞췄다. 담담한 얼굴이었다.
“알아.”
원우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민규가 잠시 후-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다. 아무래도 이 감정은 제대로 정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근데, 전원우는 잘 모르겠어.”
“......”
“전원우는, 모르겠어. 눈에 계속 보이고, 안 보이면 계속 찾게 돼. 어디서 험한 말이라도 듣고 있으면 내가 다 빡쳐서 돌아버리겠고, 울기라도 하면 미칠 것 같아. 그런데 그게 또 존나 예뻐서,”
“......”
“지금이라도 안경 벗기고 키스해버리고 싶어.”
조금의 거리와 안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갑작스런 고백에 놀란 원우에 비해 민규는 속이 후련했다. 이게 맞았다. 이 마음이 맞았다.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 할 감정들이 치밀어 올랐다. 민규가 원우에게 부드러우면서도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물었다.
“키스해도 돼요?”
원우가 민규에게만 들릴 만큼의 목소리로 말했다.
“...돌이킬 수 없을텐데.”
이에 민규가 손을 뻗어 원우의 뒷목을 조심스레 감쌌다. 가까워진 얼굴에 서로의 숨이 닿았다. 둘은 오직 서로에게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젠 피하고 싶어도 결코 피할 수 없다. 이윽고 입술이 닿기 직전, 민규가 원우의 안경을 가볍게 빼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
“......”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