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ia] 약속
2021. 2. 12. 14:37

 

 

 

 

 

저녁 10시. 한국의 고등학생으로 살고 있는 나에게는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간에 핸드폰이 울린다. 이런 시간에 핸드폰이 울리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나는 익숙하다는 듯 폰을 확인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발신자는 그녀석이겠지. 빙고. 내용은 자기 좀 데리러 오라는 소리겠고. 또 빙고. 이런 문자가 익숙해져버린 자신이 싫어 한숨을 내쉬어보지만 이래봤자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결국 오늘도 부모님께 독서실에 간다고 하고 간단히 짐을 챙겨 집을 나선다. 

 

 

 

 

 

  멀리 걸어갈 필요도 없다. 꼭 이 새끼는 우리 집에서 한 블록밖에 안 떨어진 술집에서 이러니. 이 나이에 만질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늘도 꽐라가 되어 널브러져 있는 그가 보인다. 그 모습에 저 테이블 위의 술을 벌컥 들이키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그가 깨어날까봐 빨리 나가버리기로 했다.

 

 

“야, 전원우. 일어나 빨리.”

 

“어? 밍구다.”

 

“그래, 나니까 일어나봐.”

 

“헤헤 밍구야 보고싶었어.”

 

“난 아니거든? 빨리 일어나기나 하시지”

 

 

짜증이 반쯤 섞인 목소리가 전해지기는 했는지 그는 일어나려고 시도하다가 술기운에 비틀거린다. 저 얇은 몸으로 쓰러진다면 또 상처 날 게 분명해서 그냥 내가 들쳐 업고 나왔다. 벌써 술냄새가 밴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는 만취 상태였다. 익숙한 듯 나에게 몸을 기대고 잠에 빠져든 그를 고쳐 업고 그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0406. 그녀석 자취방의 비밀번호다. 자기 생일도 아니고 왜 내 생일로 해놓냐고 하니까 술 취하면 자기 생일은 까먹어도 내 생일은 안 까먹는다나 뭐라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을 알면서도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뿐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아는 나였다. 솜이 다 꺼져가는 침대에 그를 눕히고 보니 하루 사이에 더 마른 것 같다. 안 그래도 마른 애가 매일 술만 퍼마시니 살이 빠지지. 몸을 일으켜 교과서 몇 권과 펜 몇 개만이 존재하는 이름만 책상일 뿐인 곳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독서실에 가는 것보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게 더 집중이 잘 되는 느낌이랄까.

 

 

 

 

 

  12시가 가까워지자 주변 소음들이 잦아들고 그와 나의 숨소리만이 조그마한 자취방을 채웠다. 펜을 내려놓고 다시 그에게로 가서 자는 모습을 구경했다. 이것 또한 내 일상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누구는 연인 같다고 하고 누구는 절친 같다고 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그 소리가 달갑게 받아들여졌을 텐데 지금은 그저 개소리일 뿐이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남들이 인정하는 절친이었다. 서로 통하는 것도 많았고 형편도 비슷했기 때문일까. 나는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어머니와 살고 있었고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와 살고 있다고 했다. 비슷한 가정환경은 우리 둘을 각별한 사이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서로의 비밀을 서슴없이 털어놓는 사이로 만들기도 했다.

 

 

“나 게이야.”

 

 

야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가 한 말은 나에게 조금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 충격도 잠시, 나는 오픈 마인드였기 때문에 딱히 상관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그 다음에 한 말이 충격이었다면 더 충격이었지.

 

 

“나 좋아하는 애 있어.”

 

 

얘가 좋아하는 애라니. 1년 동안 알고 지내면서 얘가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있었다면 게임 정도랄까. 그런 천하의 전원우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대박 사건이었다.

 

 

“미친, 누군데?”

 

“음... 비밀.”

 

“아, 뭐야. 치사하게.”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도 너만은 안 돼.”

 

“왜? 걔가 나냐?”

 

“.....”

 

“...진짜?”

 

“...아니거든? 왜 설레발 치고 난리여.”

 

“치, 뭐야. 대답 안 하니까 그렇지.”

 

“그냥 말하기 싫은 거야.”

 

“나중에 꼭 말해줘야 된다?”

 

“...생각해보고.”

 

평소 같았으면 꼬치꼬치 캐물어서 상대를 알아냈을 텐데 그 이야기를 하는 전원우의 복잡한 표정을 보니 말을 걸 수가 없어서 그만뒀다. 차라리 그 때 물어볼걸. 그냥 그 때 아프고 끝낼 걸 왜 지금까지 이러고 있는 걸까.

 

 

 

 

 

  내가 어렸을 때의 아버지는 온화하신 분이셨다. 종종 나에게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시던 분이셨던 걸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해 주신 말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은 이혼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 주신 말씀이었다.

 

“민규야. 사랑은 어떻게 시작하는지 아니?”

 

“음.. 좋아하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거 아니에요?”

 

“그것도 맞지. 근데 아니야.”

 

“그럼 사람? 사람이 있어야 사랑이 있잖아요.”

 

“ㅋㅋㅋ 그것도 맞지. 그런데 아빠는 사랑은 피하고 싶은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해.”

 

“엥? 왜요?”

 

“각박한 현실, 친구들의 애인 독촉, 부모님의 결혼 독촉 등 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으면서도 피하고 싶은 것들이잖니. 그런 것들을 피하다보면 어느새 사랑이 찾아온단다. 그리고 그 사랑은 무엇보다도 달콤하지.”

 

“...그래서 이혼하는 거예요?”

 

“뭐?”

 

“사랑하고 싶어서 한 사랑이 아니라 어쩌다가 한 사랑이라서 이렇게 끝내는 거냐고요.”

 

“푸흐, 아니야. 그냥 살다보니 취향도 성격도 변해서 헤어지는 거란다. 엄마 아빠가 지금은 이혼하지만 연애하고 결혼할 때만 해도 얼마나 행복하고 서로 사랑했는데.”

 

“...전 사랑같은 거 안 할래요.”

 

“나도 그게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쉽지 않더라.”

 

“그래도 난 안 할 거예요. 특히 우연히 찾아온 사랑이라면 더더욱.”

 

 

지혜로운 아버지의 말씀은 거의 틀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아직까지 사랑 자체가 무서운 건 사실이다. 부모님의 이혼을 통해 사랑이라는 건 한순간의 감정일 뿐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약속까지 했다. 아버지의 앞에서. 아버지는 약속을 안 지키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고, 어기는 경우 꽤 크게 혼내셨다. 그런 아버지의 앞에서 약속을 했던 거 보면 나의 의지가 꽤나 확고했나보다.

 

 

 

 

 

  그런 내가 학교 화장실에서 우연히 들은 내용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야, 9반 전원우 걔 게이라며?”

 

“뭐, 난 대충 알고 있었음.”

 

“그게 문제가 아님. 걔가 좋아하는 애가 누군지 아냐?”

 

“누군데?”

 

“5반 김민규. 걔 전원우랑 완전 절친이잖아. 근데 전원우가 걔 좋아한대.”

 

“헐 미친. 걔는 아냐? 전원우가 자기 좋아하는 거?”

 

“모르는 듯. 그러니까 아직도 같이 다니지. 나 같으면 절대 얼굴도 못 봄.”

 

“인정. 어떻게 친구로 계속 지내냐? 완전 친했던 애가 자길 좋아한다는데.”

 

 

처음엔 그저 친근한 이름이 나와서 계속 듣고 있었다. 중간 즈음엔 나도 완전히 모르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계속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나의 이름이 나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이름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머리 속에서 종이 하나 뎅 하고 울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종의 파동은 다음 수업 시작 종소리보다 강력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자 평소에 교칙 때문에 단 한 번도 올라가보지 않았던 학교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겨있을 줄 알았던 옥상 문은 예상과 달리 잘만 열려있었다. 평소에 교칙을 잘 지키던 내가 할 수 있던 최고의 일탈이라 그런지 옥상에 들어서자마자 머리가 조금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와 별개로 내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전원우는 얼마 없는 친구들 중에서 오래 만난 축에는 끼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 마음을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아이 중 한 명이었다. 그 아이에게도 내가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었고. 불과 오 분 전까지는. 그가 나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귀차니즘과 철벽의 대명사라고 불리던 그가 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내 이야기 또한 들어준 것부터 나에 대한 마음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아, 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거지? 적어도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 한 순간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서로의 모든 걸 아는 사이라고 자부했던 내 자신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을까, 운동장에 아이들이 한두 명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나름의 신호였다. 아, 전원우가 나 찾을 텐데. 그 녀석 밥 나랑만 같이 먹는데. 이 순간에도 그만을 걱정하는 내가 우스웠다. 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야, 김민규. 너 어디야? 너 수업도 쨌다며? 어디 아픈거야? 조퇴했어?”

 

 

...다른 아이였다면 너는 어떤 반응을 했을까? 지금 나처럼 걱정을 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냥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 옥상이야.”

 

“옥상? 열려있어?”

 

“응, 열려있더라. 올래?”

 

“밥 안 먹어?”

 

“응. 밥 먹을 기분이 아니라서.”

 

“웬일이야. 천하의 김민규가 밥을 거부하고.”

 

“그냥 오늘은 그러네.”

 

“...알겠어. 올라갈게.”

 

 

우리 둘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이 문제를 더 이상 오래 끌고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확실히 거절하자. 난 적어도 전원우를 좋아하는 마음은 없어. 그러니 받아주지 못해. 여기서 거절하는 게 걔한테도 나한테도 좋을 거야.

 

 

 

 

 

  끼익. 오래된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가 들어섰다. 하아, 그의 마음을 알고 나니 얼굴을 못 쳐다보겠다. 애써 눈을 피하면서 먼저 말을 꺼내기로 했다.

 

 

“야, 전원우.”

 

“왜?”

 

“너 요즘 소문 돌고 있는 거 아냐?”

 

“뭐, 내가 게이라는 거? 틀린 말도 아니고 너도 알고 있잖아.”

 

“아니. 그거 말고.”

 

“또 무슨 소문이 도는데?”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

 

“...뭐?”

 

“맞냐?”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뭐에 대해서?”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거에 대해서.”

 

 

...맞구나. 막상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나니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가 더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이러려고 부른 게 아니었는데. 시원하게 끝내려고 부른 거였는데. 그냥 끝내자. 끝내고 평범한 친구로 돌아가는 거야.

 

 

“...난 너 못 받아줘.”

 

“...생각도 안 해보고 거절하는거야?”

 

“미안하지만 난 네가 계속 내 친구였으면 좋겠어. 그 이상의 관계는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아. 미안하다.”

 

“...알겠어. 네가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고마웠다. 김민규”

 

“...응.”

 

 

 

 

 

  오히려 홀가분한 듯이 나에게 악수를 청하고 학교로 돌아간 그는 그 날 이후로 학교를 잘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질 나쁜 아이들과 다니며 학교를 빠지기 일쑤였고, 술도 입에 대기 시작했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가끔씩 이렇게 술에 취한 날이면 그의 친구들이 전화번호부에서 가장 위에 있는 번호로 연락해 데리러 오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나였던 것이다. 정말이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녀석 때문에 나의 조상님을 원망하게 되었다. 친구들이 아니더라도 오늘같이 그가 직접 부르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럴거면 그 때 붙잡기라도 하지 왜 쿨한 척 한 거야. 미안해지게. 내가 그의 마음을 너무나도 단칼에 거절해버려서 그가 삐딱선을 타게 된 것만 같아 나름의 죄책감이 있었던 나는 그를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에 이렇게 집에 데려다주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녀석은 이 점을 이용하여 매일 나를 볼 구실을 찾는 것 같지만. 

 

 

 

 

 

  이 상태가 언제까지 갈 지는 나도 모르겠다. 한 달? 일 년? 어쩌면 영원히? 아, 그건 싫은데. 이대로 전원우와의 관계를 끊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이 상태로 계속 가는 건 더 싫고. 아아, 난 지금 그 무엇보다 네가 가장 필요한 걸지도. 원우야, 난 네가 부르면 어디든지 갈게. 그러니 아프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나 미워하지도 마.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그냥 다시 내 옆으로만 와줘라. 허전해서 못 살겠다, 야. 잠에 든 그의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내뱉은 말을 알기는 하는지 실실 웃으며 자고 있는 전원우를 다시 한 번 눈에 담고 조용히 그 곳을 나왔다.

 

 

아빠, 미안해. 지금까지 착한 아들이었으니까 아빠랑 한 약속 한 개만 어겨도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