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eN] 내겐 너무 멀고도 가까운
2021. 2. 9. 00:30

 

 

“아직도 무서워?”

 

민규의 물음에 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트라우마를 다 극복하지 못한 모양인지 파르르 떨리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여서 민규는 그 손에 깍지를 끼며 슬쩍 웃었다. 살짝 끌어당긴 그는 마른 볼에 입을 맞추며 작게 속삭였다.

내가 항상 곁에 있어줄 거야.

 

“이제 다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원] 내겐 너무 멀고도 가까운

- 월간민원 2020-07호의 <이제는 좀 성장했을까>와 이어집니다.

- 오메가버스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깼어?”

 

잠에서 깬 원우는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잠시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해외 거장과 국내 거장이 만나서 제법 큰 규모로 열린 쇼가 있었고 원우는 메인 모델로 섭외되어 런웨이에 섰다. 평소 원우와 함께 일해보고 싶었다는 그 해외 거장이 뒷풀이 참여를 부탁해서 클럽까지 간 기억은 있었다.

 

“어디 안 좋아?”

“…나 왜 여기 있어요?”

 

원우가 눈을 뜬 곳은 민규의 집, 그러니까 이전에 민규와 살던 신혼집이었다. 아직도 여기 사는구나. 다시 재회한 후로는 줄곧 위자료 대신 받았던 집에서 만나고는 했는데, 몇 년 만에 처음 온 집은 확실히 제 집 같지 않고 낯선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되지 않았다. 시간이라도 확인하기 위해서 숙취와 저혈압에 무기력한 몸을 뒤척이니 민규가 꼭 안고 토닥거리면서 더 자라는 듯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등에 그의 손이 닿으니 괜히 간질거려서 원우는 뺨을 붉히며 그의 허리를 꼭 안고 품에 안겨들었다.

 

“더 자자.”

“지금 몇 시예요?”

“새벽 5시. 스케줄 나가야해?”

“아니, 그건 아닌데…”

“물이라도 마실래? 머리는 안 아파?”

 

가만히 있던 원우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라고 중얼거린 민규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가만히 바라보면서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빤히 바라보다가 그 얼굴이 조금 수척하다는 점을 깨달은 원우는 손을 뻗어 민규의 볼을 살살 만졌다.

 

“왜?”

“…안색이 안 좋아요, 민규 씨.”

“새벽이잖아. 계속 얼굴 보니까 좋은데 시간이 이래서 졸리네.”

 

같이 자. 민규가 속삭이니 원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깬 원우는 고소한 견과류 향을 맡으면서 포근한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눈을 뜨고도 머리가 멍한 기분이 들어 눈을 깜빡깜빡 떴다 감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시야가 좀 트인다. 커튼 틈새로 쨍한 햇빛이 들어오는 걸 보면 이미 해가 중천일 것 같다. 몇 시나 되었을까? 전화를 찾으려고 몸을 살짝 일으키는데 힘이 안 들어가서 도로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민규가 아닐까 싶은데.

 

“민규 씨…”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작게 말했는데 들었는지 곧 문이 열리면서 민규가 들어왔다. 편한 차림새에 어디서 났는지 머리띠로 앞머리까지 싹 올린 그는 원우와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들어와 이마에 손을 짚고 안색을 살피다 안도하는 눈치로 머리를 쓸어주며 웃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어? 푹 잤고?”

“몇 시예요?”

“지금 한… 2시 넘었나? 피곤하면 더 자도 돼.”

“스케줄 있을 텐데…”

“없어, 권 실장한테 캔슬이라고 연락 와서 안 깨웠어.”

 

민규의 말에 원우가 눈을 흐리게 떴다. 매니저에게 온 연락을 민규가 대신 받았다는 말에 미간을 찡그렸다. 서로 프라이버시와 스케줄은 존중하기로 해놓고 저를 안 깨운 채로 제 선에서 컷을 했다는 말에 기분이 상해 입을 꾹 다무니 그걸 눈치 챈 민규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해, 너무 힘들어보여서 안 깨웠는데 이해해주면 안 돼? 그 말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던 원우는 제 머리를 만지고 있는 민규의 손에 좀 더 부비적거렸다.

 

“몸이 말을 안 들어요… 너무 무거워.”

“더 잘래?”

“아니, 그건 싫은데…”

“일단 쉬고 있어봐.”

 

민규는 원우를 일으켜 등에 베개를 받쳐주며 앉혔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따뜻한 모과차를 한 잔 가져왔다. 밖에서 뭔가 말을 하는 소리가 들린 걸 보면 가사도우미가 와있는 모양이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원우는 표정을 구겼다.

 

“모과, 맛없어요.”

“그래도 숙취에는 좋잖아.”

“…알았어요, 마실게요.”

“밥 먹을래? 금방 준비할 수 있다고 하는데.”

 

원우가 고개를 끄덕이니 민규가 다시 방에서 나갔다. 상을 차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다시 돌아온 그는 일어날 수 있겠느냐면서 안아서 주방까지 데려가겠다는 말을 하다가 핀잔들 들었다. 바닥을 딛고 일어난 원우는 머리가 어지럽다는 생각을 하다가 곧 민규의 손을 잡고 느릿하게 그가 챙겨주는대로 옷을 입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기억이 거의 없다. 다리에 힘도 안 들어가고 온몸이 욱신거리는 느낌을 떠올리자니 기억도 없는 밤에 술 먹고 민규와 진탕 굴렀나 싶을 뿐. 민규가 쩔쩔매면서 부축하려 하고 그런 모습을 보니 그게 맞다고 생각하며 방을 나섰다.

가사도우미가 인덕션 불을 끄며 그를 돌아본다.

 

“일어나셨어요?”

“…안녕하세요.”

“도련님은 오랜만에 뵙는데, 더 잘생겨지셨네요.”

“아… 감사합니다.”

 

식사를 준비하는 가사도우미는 예전에도 있었던 사람이다. 민규가 어렸을 때부터 유모일을 겸하던 사람이라더니 아직도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남자끼리의 결혼이었고 원우가 사장님이니 대표님이니 하는 거창한 호칭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그게 부담감이 덜해서 원우도 그냥 수긍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오리 드실 수 있죠?”

“…네.”

 

아침부터 푹 끓였다며 부위별로 조각조각 썰린 뚝배기를 식탁에 올린 그녀는 원우와 민규의 앞에 가슴살이 곱게 찢겨 들어간 죽도 한 그릇씩 놓고는 엄마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녹두가 숙취에 좋아요, 도련님.”

“잘 먹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죽부터 한 술 뜨니 따뜻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속이 더부룩하긴 한데 그래도 오랜만에 먹는 가정식이라는 생각에 억지로라도 계속 먹었다. 맛있는데 여사님도 같이 드셔요. 그럴까요? 그래, 이왕 많이 했는데 엄마도 같이 먹자. 원우의 제안에 민규도 맞장구를 쳤다. 얼핏 듣기로는 다섯 살부터 친어머니와 떨어져서 그녀와 살아서 민규는 종종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는 편이었다.

결혼생활 중 냉철한 사업가의 모습이 해제되는 유일한 때였다.

 

“고기도 좀 드세요, 발라드릴까요?”

“아… 제가 먹겠습니다.”

 

머쓱해서 작게 대답하니 그녀는 원우의 그릇에 다리 하나를 올려주었다. 넓적다리까지 붙어있어서 크기가 제법 있어 젓가락으로 조금씩 살을 떼서 먹으니 두 사람이 뚫어지게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요?”

“어? 아니, 잘 먹는다 싶어서.”

“그러게요, 입이 짧으신 편이라…”

 

뭔가 어색한 표정이 수상하기는 했지만, 일단 밥을 먹는 것에 집중을 하기로 한다. 어쨌거나 밥이 맛있으니까, 두 그릇은 무리더라도 제 앞의 죽과 다리만이라도 다 먹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더 안 먹을래?”

 

원우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니 가만히 보던 민규가 물었다. 정말 많이 먹어서 배가 불렀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직 제 앞의 두 사람이 식사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눈치를 본다.

 

“그만 드시는 거면 과일이라도 내올게요.”

“아뇨! 저… 진짜 많이 먹었어요.”

“그래도 좀 드시지…”

“여사님이 천천히 식사 다 하시면, 조금 소화되지 않을까요…?”

 

살가운 말투로 걱정하는 그녀를 보다가 넌지시 말하니 그럼 식사 후에 후식을 주겠다며 바지런히 밥을 먹기 시작한다. 엄마, 그러다가 탈나요. 민규가 서두르지 말라며 말린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작게 웃으니 두 사람은 또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뜬다.

 

“여전히 사이가 좋으시네요.”

“당연하지, 엄마는 나한테 소중한 가족이라고.”

“도련… 아니, 사장님이 그렇게 말해주시니 어찌나 좋은지 몰라요.”

 

이 화목한 분위기에는 예나 지금이나 끼기 어려워서 원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결혼생활보다는 그저 섹스를 위한 동거에 불과하다 생각하고 지냈던 집이었고, 그래서인지 그녀를 불편하게 생각했었다. 제대로 하는 일도 없이 돈 잘 버는 민규에게 얹혀사는 자신을 뭐라 생각할까 무섭기도 하고 신경도 쓰리고 해서. 원우가 크게 상처를 받고 방에서만 지내던 시기에도 그녀는 뭐라도 먹고 쉬라고 했지만 그가 입을 꾹 다문 채로 지내왔던 시간도 있었다.

늘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이었지만 원우에게는 불편한 사람.

 

더 들어가지도 않을 것 같은 위장에 과일까지 몇 조각 먹으니 속이 더부룩해서 이제 그만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실에 가만히 누워있으니 영 제 몸에 맞지 않은 침대가 불편했다. 가디건 안에 휴대폰과 지갑이 있는 걸 확인하고 이만 집에 가서 쉬고자 현관으로 향하니 민규가 그를 붙잡았다.

 

“어디 가?”

“집에요.”

“왜?”

“쉬고 싶어요.”

“여기서 쉬어, 침실 안 들어갈게.”

“…내 집에서 편하게 혼자 있고 싶어요.”

 

원우가 차분하게 말했지만 민규는 잡은 손목을 놓지 않았다. 대체 오늘따라 왜 이런가, 평소에도 소유욕 강한 사람이긴 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아서 억지로 손을 뿌리치고 현관문을 열려고 했다.

 

“가지 마!”

“…민규 씨.”

“하루만, 나랑 하루만 더 있어줘.”

“오늘따라 왜 이래요, 갑자기 날 여기로 데려오질 않나…”

 

말은 이렇게 해도 기억은 흐릿하다. 술에 취한 자신이 여길 찾아왔나, 아니면 민규가 불러서 왔나. 어떻게 여기에 온 지도 모르겠고 일단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한데 민규의 눈빛이 이상하다.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집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민규가 문을 닫고 억지로 원우를 침실로 잡아끌었다. 벗어나려는 원우와 붙잡으려는 민규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면서 큰 소리가 났다. 바둥대는 원우를 침대 위에 억지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던 민규의 얼굴에 결국 매서운 손길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일었다.

 

“…원우야.”

“당신, 내가 우스워요?”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널-”

“아니긴 뭐가 아니야, 차라리 하고 싶으면 하고 싶다고 말을 해!”

“전원우!”

 

민규가 소리를 지르자 눈시울이 빨개진 상태로 씩씩거리던 원우가 제 니트를 벗으려 끌어올리니 민규가 억지로 내리고 이불을 목까지 덮으면서 씩씩거리면서도 그를 놓지 않았다.

 

“그냥… 오늘은 그냥 나랑 있어, 불편해도 여기서 쉬어.”

“집에 가고 싶어요.”

“원우야, 제발…!”

 

갑자기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을 보면서 원우는 반항을 멈췄다. 민규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만 같은 얼굴로 가만히 바라보다가 곧 등을 보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정말, 방에 안 들어올 테니까 여기 있어.”

“민규 씨, 무슨 일 있었어요?”

“오늘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쉬면 안 될까?”

 

소리 질러서 미안해. 민규는 한숨을 쉬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은 원우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말해줘요, 왜 그러는 거예요?”

 

적막이 흘렀다. 곧 민규의 어깨가 떨리면서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애써 우는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 같았지만 그 떨림이 강해서 놀란 원우가 벌떡 일어나 민규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찔러서 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이 울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원우가 그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바라보니 민규가 원우를 꽉 끌어안으면서 애써 울음을 참는 모습을 보였다.

 

“민규 씨…”

“일 그만두고 집에만 있으라고 하면 네가 화를 내겠지?”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으스러질 것처럼 아프게 꽉 안고 있던 민규가 눈물을 닦고 원우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손을 꼭 잡았다.

 

“너 좀 아팠어, 3일 동안.”

“…네?”

“3일 가까이 안 깼어.”

 

정말 푹 쉬어야만 한다고 말하던 민규는 원우를 다시 눕히고 곁에 누워서 살살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뒷풀이 파티에서 사고가 조금 있었다고 한다.

 

원우에게 뒷풀이에 꼭 와달라고 말한 디자이너가 그의 술에 호르몬 증폭제를 탔다고 한다. 해외에서도 처방이 있는 경우에만 복용이 가능하고 국내에서는 위험도가 높다며 유통 자체가 금지된 약으로 호르몬을 과다 분비시켜 히트 사이클을 억지로 끌어내고 복용자에게 리스크가 상당한 것이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술을 마신 원우는 평균적으로 효험이 도는 시간보다 훨씬 일찍 반응이 왔고, 호르몬 증폭보다는 발작에 가까운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해 현장에 있었던 권 실장이 빠르게 대처해 병원에 보내져 위세척과 해독을 했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병원에서는 페로몬이 폭주할 수 있으니 격리실에 보내거나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꺼냈고, 어쩔 수 없이 권 실장은 원우에게 동의를 구하지 못한 상태로 회사에 두 사람의 재결합을 보고했다.

연락을 받은 민규는 그래도 원우를 배려해서 대외적으로는 밝히고 싶지 않다며 회사에 양해를 구해 그를 집으로 데려오게 되었다. 주치의를 통해 링겔을 맞고 경과를 살피는 동안에도 원우는 발작을 일으켜서 민규의 가슴을 졸이게 만들었다. 몸이 뜨거워져서 옷을 벗으려고 하는 그를 벗겨놓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제 몸을 자꾸 만지려 손을 뻗기에 같이 벗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유모에게 그가 깨어나면 언제든 바로 먹일 수 있도록 해독에 좋은 음식들을 준비해두도록 지시했고 원우의 몸이 진정되도록 딱 옆에 버티고 페로몬 샤워를 해주면서 희미하게 풍기는 그의 페로몬에 정신이 나가려는 것을 꾹 참으며 들뜬 몸을 달래고 또 달랬다. 그렇게 3일을 꼬박 밤새고 나니 원우가 정신을 차린 것이다.

설명을 다 들은 그는 잠시 멍하게 있었다.

 

“…괜찮아?”

“나는… 나는… 민규 씨는요, 많이 놀라지 않았어요?”

“우리 원우가 괜찮으면 나는 다 괜찮아.”

 

원우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눈치를 보니 5년 전에 원우 혼자 겪었던 일은 아직 민규가 모르는 모양이라, 원우에게는 이번일이 지난 일보다는 덜 충격적이라서 오히려 덤덤했다. 업계에 나쁜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별 생각이 없었다.

 

“많이 걱정했어요?”

“나는 정말, 너 잘못 되는줄 알고…”

 

원우가 피식 웃다가 민규를 안고 등을 살살 토닥였다. 제겐 늘 차갑고 근엄하기만 한 우성알파였는데, 이렇게 울고 약해진 모습을 보니 이제야 저보다 어린 사람이 맞긴 한가 싶어서. 그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볼에 입을 맞추니 민규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 하나도 안 아파요.”

“그래도 조금 쉬면 안 될까?”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어요?”

 

해당 디자이너는 불법 약물 소지 및 오남용과 관련해 바로 회사차원에서 고소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소속사에서 하지 않았더라면 직접 나섰을 거라면서 원우가 깨어나서 밥도 먹고 괜찮아지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이니 다행이라고 그는 웃었다. 수척한 볼을 쓰다듬으니 민규가 더 해달라는 듯이 제 얼굴을 내민다.

 

“좋다,”

“뭐가요?”

“원우가 깨서 날 보고 있으니까.”

 

조심스럽게 볼에 입을 맞추는 그를 꼭 안으면서 원우는 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일로도 제게 조바심을 내는 사람인데, 지나간 다른 일을 들추고 싶지 않아서. 정말 저 혼자만 아는 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원우는 그를 더 꽉 안았다. 이렇게나 겁이 많은 사람인 걸 처음 알았다. 제가 가진 비밀들을 지키면서 정말 온전하게 사랑만 나눌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다. 자신을 꽉 안고 어리광을 부리는 민규를 토닥거리던 원우는 피식 웃었다.

 

“당신, 이런 사람이었어요?”

“내가 뭘?”

“그냥… 귀여워서요.”

“…이참에 귀여운 짓 좀 해도 돼?”

“네?”

 

민규가 대뜸 원우의 볼을 꼭 잡고 입을 맞췄다. 두어번 쪽쪽 입술을 부딪치고 떨어지더니 그는 울어서 발갛게 부은 얼굴로 말했다.

 

“나랑 결혼해줘.”

“민규 씨.”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도, 네가 먼저 말해야 하는 것도 알아.”

 

아직 시간이 필요한 거 아는데 내가 너무 불안해. 그의 말에 원우도 괜히 숙연해져서 그를 가만히 안고 등을 토닥였다.

 

“너 내 사람이라고, 건들면 가만 안 둔다고 세상에 말하고 싶어.”

“민규 씨, 나는 아직…”

“내가 다 맞추고 다 이해할게. 네가 힘든 거 내가 다 받아줄게.”

 

어쩌면 좋을까. 원우는 결혼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냥 평생 이렇게 연애만 쭉 하다가 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그가 제게 질리거나 하면 헤어지고 조용히 숨어서 지낼 생각이었다. 도무지 결혼이라는 것에 용기가 나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해버렸던 계약결혼과는 얘기가 다르다. 계속 이렇게 민규와 지내게 되면 5년이나 숨긴 제 상처도 그에게 말해야만 하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민규를 놓기가 싫었다.

 

“원우야, 정말 그렇게 싫어?”

“…미안해요.”

“대외적으로 발표 안 해도 돼. 혼인신고도 싫어?”

 

이런 일이 또 생기면 내가 법적으로 나설 수 있게 해줘. 그의 간절한 목소리에 원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제 짐을 그에게 나눠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결혼하면…”

“응.”

“당신 가족들은 어떡해요…?”

 

원우의 물음에 등을 토닥이던 손이 멈춘다. 계약결혼을 했던 시기에는 민규가 굳이 어른들과 섞이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아직 두 사람은 그의 본가에 정식으로 인사를 올린 적이 없다. 아무리 그가 식구들에게서 독립한 사업가라고는 해도 제대로 가정을 꾸리고 살 생각이라면 교류를 안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거칠 일들이 많다. 분명히 서로 알고 있는 일이었다.

민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원우를 꽉 안았다.

 

“부담되면 건너뛰어, 어차피 다들 나 신경 안 쓰실 거야.”

“민규 씨.”

“나 정말 잘할 수 있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주면 안 될까?”

 

며칠간 민규의 집에서 쉬면서 원우는 계속 고민에 빠졌다. 이혼하기 전처럼 침대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고 잠을 자거나 멍하게 있는 상태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게 되었다. 민규도 그가 혼란스러울 것을 알고 있기에 무언가를 더 강요하거나 다시 제안을 하는 모션은 취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주 조금씩이지만 하루에 두 끼는 밥을 먹는다는 가사도우미의 전언이었다.

한동안 민규는 고민을 하는 원우가 흡사 우울감에 빠진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에 눈치를 보기는 했다. 그는 제 집이면서도 원우가 편히 쉬게 해주려는 목적인지 시간을 두고 생각하게 하려는 목적인지 침실에는 일절 접근하지 않았다. 퇴근 후에는 거실에서 TV를 보거나 신문을 읽다가 새벽 늦게 원우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곁에서 조용히 자다 나가는 것 같았다.

새벽 어스름에 들어와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을 모른 척 가만히 느끼고만 있었던 건, 조심스러워진 그가 그마저도 하지 않을까봐.

 

“해요.”

“뭘? 섹스?”

“…결혼이요.”

 

보름이 조금 안 지난 어느 날, 민규가 퇴근했을 때 원우는 주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깨어있는 상태로 얼굴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대뜸 하자는 말에 민규가 더 뜬금없는 답을 내놓자 원우는 과일을 준비하는 도우미의 눈치를 본다. 결혼이라고 작게 말하자 민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곁에 앉으니 다시 차분하게 밥을 먹던 원우가 마지막 한 숟가락을 꼭꼭 씹어 삼키고 말했다.

 

“대외적으로는 알리고 싶지 않아요. 서류만 제출하고…”

“응, 그래. 그렇게 하자.”

“재혼에 굳이 식 올릴 필요도 없을 거고…”

“전에도 식 없이 조용히 때웠는데 괜찮겠어?”

“딱히 로망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상관없어요.”

 

담담하게 말하는 원우를 가만히 바라보던 민규는 허리를 확 끌어당겨 볼에 입을 맞췄다. 조금 놀란 눈치를 보이니 커다란 손이 원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고마워. 또 하고 싶은 건 없어?”

“…당신 본가에 허락 받고 진행했으면 좋겠어요.”

“그래, 찾아뵌다고 연락할게. 다른 건?”

“미리 말해둘 게 있어요.”

 

이따가 따로 좀 봐요. 원우는 민규를 가만히 보다가 곁눈질을 했다. 상을 치우고 과일을 테이블에 올려놓던 도우미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5년 전의 일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원우의 고민을 먼저 들어주고 민규에게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며 조언을 해주면서 분명 다 이해해줄 거라고 확신을 가지며 말했다.

 

그래, 이제 그를 믿어야지. 더 가까워져야지. 할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