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관계
w. 라뽀
김민규. 편맥할래? 오전 내내 시안을 만들곤 침대에 누워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을 새로 고침 하기를 여러 번. 상단에 뜬 이름을 확인한 민규는 벌떡 몸을 일으켜 바닥에 던져 놓았던 츄리닝 바지에 다리를 끼워 넣었다. 딱 기다려. 꽤 오랜 시간 누워있던 탓에 엉망이 된 머리 위에 모자를 눌러 쓴 그는 밖으로 나와 언덕에 위치한 편의점을 향해 걸었다. 전원우가 오늘은 또 무슨 일로 나를 찾을까―... 말에 요상한 멜로디를 붙이며 발에 채이는 돌멩이를 이리저리 굴렸다. 꼭 지 필요할 때만 찾지. 이주 전에는 회사 사수에게 깨졌다는 이유로, 엊그제엔 그냥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이유로. 정작 원우는 민규가 만나자고 할 때는 만나 주지 않았다. 거, 생각하니까 서운하네. 민규는 까만 점으로 보이던 인영이 점차 선명해져 오자 미간을 좁혔다. 편의점 앞 테이블의 흰 비닐봉지와 안주 하나 없이 맥주만 꺼내고 있는 남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전원우. 차고 있던 시계를 풀고 손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그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민규를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너인 줄 알겠더라. 동네 시끄럽게 슬리퍼 직직. 그런 원우의 말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된 민규는 자연스레 캔을 손에 쥐며 말을 돌렸다. 또 안주 안 샀지, 너. 속 다 버린다고 몇 번을 말해.
" 오자마자 잔소리. "
" 잔소리할 짓만 골라서 하니까 그렇지. 퇴근했으면 옷이라도 갈아입고 오던가. 안 불편해? "
그런 민규의 말에 벗어둔 블레이저를 괜히 한 번 바라본 원우는 고개를 저으며 베이지색의 캔을 잡았다. 그닥? 입고 다니면 익숙해지더라. 칙 소리와 함께 그대로 원우의 입으로 향한 맥주는 목구멍을 타고 꿀꺽꿀꺽 잘도 넘어갔다. 저러다 분명 목구멍이 따갑다는 둥 난리를 칠 것이 분명했다. 아니라 다를까 잠시 후 캔을 내려놓은 원우는 목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한껏 구겼다. 아, 따가워. 어쩜 사람이 저리 변하지 않는 건지. 픽 웃은 민규는 자리에 앉아 녹색 캔을 잡았다. 그래서 오늘은 왜 불렀어?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원우는 손을 떼고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 깊이 들어앉았다. 그냥... 술기운 좀 퍼지면 얘기해 줄게. 그 말을 들은 민규는 비닐 안을 뒤적거렸다. 이게 다 얼마야... 얼마나 딥한 얘기를 하려고? 이거 다 마시고 너 취하면 질질 끌고 간다. 쉽게 취하는 그를 놀리기 위한 민규의 장난기 섞인 말에도 원우는 평소와 다르게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뭔데 그래. 초장에 듣고 진탕 마시자. 어느덧 몸을 기울여 테이블에 턱을 괸 민규는 눈을 끔뻑이며 원우의 말을 기다렸다. 응? 언제 말할 거야? 원우는 자신이 입고 있던 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었다. 김민규, 나...
" 헤어졌어. "
" ... 왜? "
그걸 알면 내가 너랑 이러고 있겠냐. 민규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몇 년 전, 자신이 원우에게 고백하지 못했던 원인이었다. 씁쓸한 표정의 원우는 남은 맥주를 들이키고는 새로운 맥주를 꺼냈다. 솔직히 4년 사귄 거면 오래 사귄 거지. 내가 뭐 잘해준 것도 없는데, 뭘 보고 날 만나. 민규는 자조적인 원우의 태도에 모자를 벗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우스웠다. 내가 알던 전원우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나랑은 15년을 알고 지내도 저런 표정 한 번 안 짓더니 고작 4년 만난 여자 때문에―. 한 번 더러워진 기분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민규는 애써 웃으며 손을 뻗어 원우의 손을 다독였다. 잘 헤어졌지 뭐. 사치 심한 사람은 만나는 거 아니야. 너 그 사람 때문에 동창회도 못 나오고... 이어지는 말을 끊어버린 원우의 표정은 냉하기만 했다. 잘 헤어진 거라고? 도리어 그 반응에 당황한 건 민규였다.
" 너 그 사람 때문에 힘들었잖아. 그럼 잘 헤어진 거지. "
" 세상에 잘 헤어지는 게 어디 있어. "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
"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
꼴에 헤어진 애인을 지켜주고 싶다는 건가? 마음속엔 부러움과 동시에 패배감이 뒤엉켜 이리저리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속이 쓰라렸다. 눈물겨운 사랑이네. 맥주가 원인이 아님을 알면서도 괜히 먹던 것을 내려놓은 민규는 제 손아귀를 꾹꾹 눌렀다. 그래, 내가 잘못했네. 널 너무 깊게, 오래 좋아한 내가 잘못인 거지. 안주 대신 속으로 들어간 마음을 꼭꼭 씹어 삼켰다. 달큰하리라 생각했는데 쓰디썼다. 미안. 짧은 한 마디와 함께 두 사람 사이엔 한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침묵을 깬 건 원우였다. 나 방 빼야 하는데, 당분간 너네 집에서 신세 좀 지자. 민규는 저도 모르게 욕을 뱉었다. 그 여자가 너보고 나가래? 원우는 망설이다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집 구할 때까지만... 금방 나갈게.
내가 오늘 뭐 하러 나왔을까. 오는 내내 왜 들떴을까. 헛웃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민규는 원우를 내려다보았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 오늘은 좆같아서 갈랜다. 그 길로 돌아선 민규는 가파른 언덕을 걸었다. 필요할 때만 찾는 사람은 애초에 끊어내는 게 맞았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제거 대상 1순위인 원우를 지금까지 끊어내지 못했던 건 자신의 실수였다.
숨을 고르기 위해 계단에 걸터앉은 민규는 저 멀리 보이는 편의점을 바라보았다. 15년이다, 전원우. 체육대회에서 계주 뛰는 너 보고 반한 게 벌써 15년 전이라고. 들리지도 않을 혼잣말에 문득 서글펐다. 남들은 쉽게 하는 사랑이 왜 자신에게만 이렇게 어려운지. 어둑한 골목이 갑자기 환해졌다. 이어지는 진동이 쉽게 끊기지 않을 것 같았다. 화면을 밀어낸 민규는 귓가에 그것을 가져댔다. 민규야.
— 보고 싶다아.
" ... 이기적으로 살면 기분이 어때? "
— 언제 올 거야?
나 다 마셨어. 나른해진 목소리가 이미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민규는 일어나 옷을 대충 털고 다시 언덕 아래로 향했다. 내일 속 안 좋다고 해장 어쩌고 하기만 해봐. 전화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면 어쩔 건데? 빈 캔이 이리저리 나뒹구는 소리, 춥다는 말과 함께 옷이 쓸리는 소리. 모두 민규의 귀에 담겼다. 하면, ... 해야지. 별 수 있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스치는 바람이 서늘했다. 자신에게 이 정도로 닿아오는 냉기라면 전원우는 그 이상을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편의점에 도착한 민규는 아직 그 자리에 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는 원우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질러진 자리를 치우고 원우의 짐을 챙긴 민규는 그를 살살 흔들었다. 원우야, 일어나. 집에 가야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원우는 서 있는 민규의 손가락을 감싸 잡았다. 김민규, 왜 원우라고 불러? 발음이 뭉개져 민규보단 '밍구', 원우보단 '워누'에 가까웠다. 제대로 취했네. 잡힌 손에 힘이 들어왔다. 몰라, 내 맘이야. 알게 모르게 뚱해진 얼굴에 민규는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참아냈다.
" 왜 취할 때마다 다정하게 부르냐고. "
" 취한 건 인정하는 거야? "
" 아 대답해... "
왜 원우라고 불러? 왜, 막, 그래? 물음표가 끊이질 않았다. 어차피 넌 기억을 못 하니까. 너 저번에도 똑같이 물어봤어. 멍하게 저를 바라보는 원우를 업은 민규는 아까보다 더딘 속도로 몇 번이고 오간 언덕을 다시 한번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너 때문에 오늘 이 언덕을, 몇 번이나. 아무리 가볍다고 한들 성인 남자였다. 던지면 아플까 봐 던지지도 못하겠고. 숨이 거칠어질 때마다 몇 번이고 멈춘 민규는 원우의 상태를 확인했다. 자는 모양인지 눈을 감은 채로 숨만 색색 내쉬었다.
걷다 보니 아까 앉아있었던 그 계단이었다. 원우를 조심스레 내려둔 민규는 금세 뭉친 어깨를 주물렀다. 진짜 미운 놈, 나쁜 놈. 그때, 하나밖에 없던 민규의 어깨에 손 하나가 늘었다. 나 미워하지 마. 아까보단 또렷한 발음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꾸라진 발음이었다. 더 자지 왜 일어났냐. 지금 속도로는 내일 아침쯤에 도착할 것 같은데. 농담 섞인 말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민망해지려던 찰나, 원우의 몸이 민규에게로 기울었다. 어깨에 닿아오는 머리칼에 애써 풀어놨던 어깨는 다시 경직되기 시작했다. 전원우, 무거워. 분명 업었을 때보다 무거웠다. 아깐 몸이 무거웠다면 지금은 마음이.
" 아까 화내서 미안. "
" 언제 화냈는데? "
" ... 기억 안 나면 말고. "
민규가 기억 못 할 리가 없었다. '친구'라는 사람이 전 애인 때문에 제게 화를 냈는데, 어찌 그걸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민규는 상처 난 제 마음보다 원우의 마음이 무거워지는 게 더 싫었다. 그래, 그럼 그냥 넘기자.
가만히 언덕 아래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보던 원우는 조심스레 일어나 벽을 짚었다. 이제 걸을 수 있을 거 같아. 민규는 그런 원우의 손을 잡았다. 조금만 더 있다 가자, 원우야. 너 어지럽잖아. 닿은 손이 따뜻했다. 그런 민규의 말에 원우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집에 가서 씻고 쉬어야지. 나 졸려. 민규는 조심스레 그를 당겨 자신의 품에 기댈 수 있게 만들었다. 졸리면 자, 내가 업고 가지 뭐. 사심이었다. 전원우가 날 필요할 때마다 찾는 것처럼 나도 지금은 전원우가 절실히 필요하니까. 이런 잠깐의 시간쯤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자그마한 욕심. 몸에서 북소리 같은 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이러다 들키면 어쩌지 싶다가도 어차피 자신이 아는 전원우는 기억하지 못할 게 분명하기에 그냥 울리는 대로 두기로 했다.
민규의 따뜻한 품에 기댄 원우는 눈을 감았다. 민규가 길게 늘어진 앞머리를 조심스레 만지자 눈이 스르르 열렸다. 마주한 눈빛이 깊고 짙어서 까딱 잘못했다간 빨려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민규는 고개를 돌려 아까보다 덜 반짝이는 야경을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반짝이는 걸 봤다고 이렇게 빛이 죽어 보일 수도 있구나. 원우는 그런 민규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 왜 헤어졌는지 알려줄까? 열린 입술에 돌아간 고개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왜 헤어졌는데? 이번엔 원우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 술만 마시면 김민규 찾아서. "
" ... 웃기고 있네. "
" 진짠데. 아까도 봤잖아, 전화하는 거. "
" ... 그럼 다른 날은 왜 안 찾았어? "
내가 너무 심하니까, 걔가 자기 번호를 김민규로 바꿔서 저장했더라. 동창회도... 너 나오는 거 아니까 가지 말라고 하고. 원우는 자기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데 민규는 제 자신에 대한 화가 났다. 전원우와 사랑을 하고 싶었던 건 맞지만 헤어짐의 이유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아픈 건 자기 한 명으로 족했다. 민규는 원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원우는 물었다. 휴대폰은 왜?
" 다시 만나, 그 사람이랑. "
" 이미 끝났는데, 뭘. "
" 당장 내 번호 지워. 전원우. "
방금까지만 해도 웃음기가 아른거리던 원우의 얼굴이 어둡게 물들었다. ... 싫어. 몸을 일으킨 원우는 당장이라도 언덕 아래로 내달릴 듯 보였다. 민규는 따라 일어나 원우의 손목을 잡았다. 너 그 사람 좋다고 했잖아. 죽고 못 살겠다며. 다시 가서 만나. 김민규랑 연 끊고 왔다고 해. 아래서 민규를 바라보는 원우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냈다. 민규야, 김민규. 정말 간만에 듣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 그런 말 할 거면 힘 빼고 다시 얘기해. "
" ... ... "
" 내가 가는 게 싫으면 싫다고 말해. "
그럼 안 갈게, 민규야. 손에서 힘이 서서히 빠지고, 잡고 있던 손목을 놓은 민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지 마. 원우야. 네가 날 필요할 때마다 찾았던 것처럼―
" ... ... "
" 난 지금 네가 필요해. "
원우는 가만히 민규를 올려보았다. 그 언젠가 운동장에서 저를 바라보던 눈빛. 15년 동안 변치 않는 번호 010-XXXX-XXXX. 술에 취해 드문드문 기억나는 다정한 말 한마디. 원우야, 좋아해.
" 안 갈게, 민규야. "
필요할 때만 찾는 관계는 끊어내는 게 맞았다. 지금은 새로운 관계의 정립이 필요한 시기였다.